오늘 배송받은 책 중의 하나는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과학사학자 오언 깅거리치의 <아무도 읽지 않은 책>(지식의숲, 2008)이다. 제목만으로는 어떤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 근대 과학혁명의 시발점이 된 코페르니쿠스의 '위대한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를 추적하고 있는 '책에 대한 책'이다. 겸사겸사 코페르니쿠스와 깅거리치 교수의 책들을 찾아보고 몇 권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오언 깅그리치'는 '오언 깅거리치'와 동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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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읽지 않은 책- 근대 과학혁명을 불러온 코페르니쿠스의 위대한 책을 추적하다
오언 깅거리치 지음, 장석봉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8년 4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2008년 04월 22일에 저장
절판
The Book Nobody Read (Paperback, Reprint)- Chasing the Revolutions of Nicolaus Copernicus
Gingerich, Owen / Penguin Group USA / 2005년 1월
27,930원 → 22,900원(18%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2008년 04월 22일에 저장
절판
An Annotated Census of Copernicus' De Revolutionibus (Hardcover)- (Nuremberg, 1543 and Basel, 1566)
Gingerich, Owen / Brill Academic Pub / 2002년 2월
419,060원 → 343,620원(18%할인) / 마일리지 17,190원(5% 적립)
2008년 04월 22일에 저장
품절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과학고전시리즈 4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지음 / 서해문집 / 1998년 4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2008년 04월 22일에 저장
품절
나도 구입해놓고 안 읽었으니 '아무도 읽지 않은'에 한몫하고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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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나온 주목할 만한 전기 두 권은 쿠바의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구술)자서전 <피델 카스트로 - 마이라이프>(현대문학, 2008)와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의 '60년대 좌파 실록' <60년대 자서전>(책과함께, 2008)이다. 두 권 모두 두툼해서 당장에 읽을 여유는 없고 리뷰만을 우선 챙겨놓도록 한다. 직장인이라면 5월 연휴 기간에 손에 들어볼 수도 있겠다.

한겨레(08. 04. 19) 반세기 혁명인생, 난 아직도 목마르다

“그는 언제나 혁명을 한다.” 100시간에 걸쳐 피델 카스트로(82) 전 쿠바 국가평의회장의 머릿속에 집약된 혁명의 기억을 함께 풀어낸 인터뷰어는 말한다. “그는 항상 생각하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매우 과감하다. 그래서 거대하지 않은 생각들은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이렇게 그는 “언제나 혁명을 한다.”

<피델 카스트로-마이 라이프>는 프랑스의 권위 있는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이냐시오 라모네가 2003년 1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100시간 동안 피델 카스트로를 인터뷰한 기록이다. 인터뷰 질문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구석구석 훑어낸다. ‘말로 쓰인’ 자서전인 셈이다. 건강이 악화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지난 2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좌를 넘겨준 카스트로가 “자서전을 쓸 생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는 점, 그가 지난 50년 동안 긴 인터뷰를 네 번밖에 안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국제정치의 마지막 ‘거룩한 괴물’”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듯싶다. 책은 15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라모네가 가까이서 본 피델의 성품은 “매우 수줍고 교양이 있으며 신사적”이었지만 “본능적인 위반자”이며 “영원한 반항아”였다. 말의 영역에서는 “풍부한 논증을 바탕삼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놀라운 수사적인 말솜씨”를 휘두르는 “무섭고 유식한 논객”이기도 했다.

700여 쪽에 이르는 이 두툼한 책은 1868년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의 무장봉기에서 시작된 쿠바 독립투쟁의 원류로부터,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까지를 카스트로의 생애와 단단히 엮어낸다.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8월13일 쿠바 동부 지방의 시골 농장에서 태어났다. 알려진 대로, 그는 스페인에서 건너와 자수성가해 제법 큰 땅을 소유한 농장주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을 그가 회고하는 어린 시절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대도시에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부모의 신념에 따라 여섯 살 때 산티아고에 있는 어느 선생님 집에서 2년을 보내는데, 그곳에서 그는 뜻밖의 ‘착취’와 소극적 ‘학대’를 경험한다.

식구는 많고 돈 벌 길은 막막했던 선생님 집은 오직 카스트로의 부모가 보내오는 체제비로 살림을 꾸렸다. 선생님은 카스트로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 그는 부모와 똑 떨어져 덧셈·뺄셈 따위가 적힌 공책 표지를 혼자 들여다보며 배를 곯았다. “나는 부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착취의 희생자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종류의 학대에 반발”하는 반항아 기질을 길렀다고 회상한다.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착취를 경험했던 인생의 아이러니가 가난하고 모욕당하는 자의 괴로움, 반항 정신과 투쟁의 필요성을 깊이 각인시켰다.

청년기에 카스트로는 쿠바의 독립전쟁에 관한 책과 훗날 그의 혁명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쿠바의 혁명가이자 시인·철학자인 호세 마르티의 책들을 탐독한다. 쿠바의 명문 아바나대학 법대에 다니던 시절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들을 읽었다. 1953년의 몬카다 병영 습격, 망명지 멕시코에서 이뤄진 체 게바라와의 만남,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대에 근거를 두고 벌인 게릴라 전투를 거쳐 1959년 혁명에 성공하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호세 마르티는 혁명의 윤리가 됐고, 마르크스와 레닌은 혁명의 나침반이 됐다.

‘인류 해방의 염원을 이룩했다’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라모네의 질문은 좀더 날카롭게 혁명 뒤의 쿠바를 해부한다. 그는 혁명 쿠바에서 이뤄진 공개재판과 처형이 “과했다”는 지적을 파고들고, 혁명 초기 동성애자들에게 억압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들춰낸다. 이어 쿠바가 남성우월주의 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국가 고위층에 아직도 흑인이 별로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교를 박해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쉴 새 없이 질문한다.

 

 

 

 




 

 


여기에 카스트로는 “혁명이 승리했지만 인종차별 현상에 상당히 무지했다” “남성우월주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등 일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혁명의 총체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방어한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가질 수 있었던 꿈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처음에 우리는 몽상가였는데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혁명과 함께한 80년 삶을 복기하고 난 그가 바라보는 쿠바의 미래는 근거 있는 낙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근거는 ‘총체적이고 완전한’ 문화를 지니고, 끊임없이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온 쿠바의 인적 자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낙관이 쿠바의 현실을 얼마나 냉정하게 들여다본 결과인지 가늠해 앞날을 꾸리는 것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됐다. 다만, 그의 생을 바친 쿠바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와 들어맞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하는 시대에 그는 여전히 ‘혁명의 무상 수출’을 꿈꾼다.

“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배고픔으로 내모는 체제입니다. 속임수와 거짓말 속에서 사는 것이고, 이기주의의 씨를 뿌리는 것이며, 소비주의를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곱절로 증식될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작권이나 특허권을 바라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만 있다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겁니다.” (김일주 기자)

한겨레(08. 04. 18) '68혁명’의 시대에 누가 못질을 하랴

“1967년 10월12일, 상쾌하고 맑은 런던의 가을날이었다. 우리는 최초의 대규모 베트남 관련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두 번의 집회에서 발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가디언>은 볼리비아에서 체(게바라)가 죽었다는 뉴스를 리처드 고트 특파원의 기사 및 시신 사진과 함께 실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울었다. 상실감과 슬픔이 너무 커서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고 반응했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영국에 망명한 뒤 1960~70년대 ‘68혁명’의 주요 현장들을 누볐던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65)는 자신이 쓴 <1960년대 자서전>(Street-Fighting Years: An Autobiography of the Sixties. 책과함께 펴냄)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 케네디 암살 당일과 비교하면서 체 게바라가 죽던 날을 그렇게 떠올렸다. 베트남을 방문한 적 있는 체는 죽기 전 “베트남을 구체적으로 돕기 위해 새로운 전선을 열어서 제국주의 관심을 인도차이나에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몸소 실천하기 위해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에 가 있었다.

미국은 50만의 군대와 최신 군사기술을 동원했으나 전쟁에서 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촉발된 미국내 반전운동이 세계를 휩쓸었다. 미국의 베트남 군대 파견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장기집권을 보장받은 군사정권이 ‘3선개헌’ 공작에 분주하던 한국 같은 나라는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모든 대륙이 변화의 욕망에 사로잡혔다. 희망이 넘쳐났다.” 타리크 알리가 말한 그 “전지구적 반란”에서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은 전세계를 분기시킨 핵심이슈였다.

1968년 2월 베트남연대 캠페인(VSC)이 주최한 반전집회 베트남 총회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벨기에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미국이 몇 년 내에 패배할 것이라며 그것은 “디엔비엔푸보다 더 큰 패배가 될 것”이라고 점쳤다.

3월 프랑스 빈민가의 낭테르대학에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됐다. 사회학도 다니엘 콘-벤디트가 이끈 ‘3월22일운동’은 “우리는 자본의 감시견이 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한 리플렛 수십만장을 뿌렸다. 5월 메이데이 직후 학생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베를린 등 전유럽으로 삽시에 퍼진 그 운동의 핵심 메시지를 사가들은 반권위주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문화혁명’으로 정리했다.

 

 

 

 



 

 

 

올해는 바로 68혁명 40돌이 되는 해다. 타리크는 지난 1월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때 실용주의를 주장하면서 전면적 변혁을 주장한 혁명가들을 비웃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도로 비웃어 주었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낚싯줄은 보지 않고 미끼만 보는 물고기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물질적인 소유가 아니라 타인-빈민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일부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경제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 규제되고 재조직될 필요가 있으며,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절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는 묻는다. 1968년의 꿈과 희망, 그 모든 것은 게으른 환상이었던가? 운동의 열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워싱턴 컨센서스가 신자유주의적 디스토피아를 체현”한 시대가 됐다.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세계는 다시 한번 뒤집혔다. 자본의 지배에 대한 대안이 하나하나 무너지면서 자본과 자본의 숭배자들은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승리를 축하했다. 좌파에게 그것은 역사적 몫의 패배였다.” 그가 서문에서 지난해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우파 사르코지가 ‘68년의 관에 마지막 못질을 한 것’이라고 자화자찬한 얘기를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르코지마저 자신의 승리를 68혁명에 빗대어 평가할 만큼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도 그만큼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역자 안효상씨는 이를 “모든 혁명은 실패로 끝나지만, 어떤 효과를 남긴다는 점에서 모든 혁명은 성공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거리에서 싸우던 나날’이란 원제가 시사하듯 저자는 줄곧 68운동(1967~75년) 현장에서 학생과 언론인, 전문활동가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콩고의 선출된 지도자 파트리스 루뭄바가 유엔과 미국의 공모 아래 권좌에서 쫓겨나 피살당한 데 항의하다 조국에서 사실상 쫓겨나 영국 옥스포드대학에 들어간 이후 유럽뿐만 아니라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와 남미, 모스크바 등 그를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당대의 리더들을 만나고 연설하고 조직했으며 썼다. 일관된 시각 아래 체험에 토대를 둔 유럽 변혁운동의 구체적 에피소드들을 풍성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개인 자서전이 아니라 1960년대라는 한 시대의 자서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한승동 선임기자)

08.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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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0 22:32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민주화 투쟁가들이 여전히 권위주의를 못 벗어난 원인은 68혁명 같은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이 따지고 선후배 따지고...근데 알리가 트로츠키 주의자인가요?

로쟈 2008-04-21 10:13   좋아요 0 | URL
68혁명도 사실 '실패한' 혁명이죠. 그건 러시아혁명이나 쿠바혁명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보다 못하다면 문제죠...

노이에자이트 2008-04-21 23:40   좋아요 0 | URL
실패라도 좋으니 우리 사회의 수직 서열 충효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항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클린턴이 카스트로와 정상회담한 적이 있군요.
 

한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페이퍼 거리들을 묵혀두었더니 어떤 것부터 다루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밀린 일들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서재일'도 나름 일인지라 자꾸 신경을 쓰게 되는데, 여건이 되는 대로 하나둘씩 올려놓도록 한다(인문학과 정치철학에 관련된 몇 가지 아이템을 페이퍼로 적어놓으려고 하지만 조만간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 중 하나는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에 대한 것이다. 이 하이데거론의 원제는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지만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제목을 바꿔단 보람도 없이 거의 묻혀버린 책이다.

  

 

 

 

책을 손에 든 건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부르디외의 몇몇 책들, 가령 <실천이성>(동문선, 2005), <사회학의 문제들>(동문선, 2004), <파스칼적 명상>(동문선, 2001)을 들추게 되면서 덩달아 눈길이 갔기 때문인데(모두 영역본과 같이 읽는다), 최근에는 이 책에 대한 '촌평'을 비판하는 글도 접한 터라 예전에 무얼 어떻게 읽고 촌평을 단 것인지 확인해보려는 뜻도 있다. '하이데거와 함께 철학을!'(http://blog.aladin.co.kr/mramor/1039607)이란 페이퍼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 그리고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비판서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도 (원제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비판으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이 페이퍼 자체는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이 출간된 걸 계기로 그의 책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본 것이었고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와 마찬가지로 책에 대한 정보와 간단한 인상 정도를 나열하고 있다. 그런 '인상'이나 '판단'의 근거를 자세하게 밝혀놓지 않은 점이 불만스럽다는 의견도 가능은 하겠지만 전공자들도 하지 않는 유형의 '책소개'를 내가 이런 자리에서 떠안아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spec님의 비판은 이렇다(강조는 내가 해놓았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매혹적"이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차근차근 따라가도 팍팍하거나 멀미나지 않는다" 등등, 느낌들이 이어지지만 이런 느낌을 주게 한 이유, 즉 느낌을 뒷받침하는 알맹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 심히 유감입니다. '의견'도 아닌, 그야말로 '인상'인 셈이지요. 더구나 이런 식의 느낌 전달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가령, 부르디외의 <나는 철학자다>에 대한 촌평은 이런 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군요. 이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다행히 제가 이 책만은 불어판과 번역서를 다 읽어보았기 때문에, 과연 불어판을 조금이라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인지 정당하게 여쭐 수 있을 것 같군요. 일단 번역서만 보자면, 제가 보기엔 반대로 가독성이 상당히 높았고 더구나 지금까지 나온 부르디외 번역 중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이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팍팍하다'라고 '느낄' 수 있겠죠. 그러나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 '정신에 대하여'를 쓴 데리다와 더불어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고.

그러므로 로쟈님이 말씀하신 '팍팍함'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팍팍함'은 어떤 책을 평가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게 단지 번역에 해당되는 평가라면, 이 평가는 전혀 정당하지 않습니다. 확신컨데, 이 번역은 오히려 '유려합니다'! (다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라는 좋은 제목 놔두고, "나는 철학자다"라는 이상한 한글 제목을 단 것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이는 출판부수를 늘리려는 출판사의 농간일 것 같은데, 대중성이라는 미명하에 결국 좋은 책을 사장시키는 작태라 생각됩니다).

먼저, 책소개를 하면서 별다른 근거 없이 주관적인 느낌, 인상들만을 나열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다는 것. <철학입문>의 경우 ""하이데거가 1928~29년 겨울 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의록"으로서 지난 1996년 하이데거의 전집 제27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입문' 아닌가?"라고 나는 적었다.

거기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는 판단의 근거(?)로 내가 제시한 건 첫째,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라는 것, 즉 그의 모든 책이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기에 <철학 입문>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과 둘째, 게다가 '철학 입문서'라는 것, 그렇기에 하이데거 입문서도 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 이 두 가지이다. 이런 근거가 '알맹이'가 아니어서 유감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것인지? 기껏해야 하이데거의 책이 나왔다는 정보와 함께 읽어볼 만하겠다는 기대를 표시한 게 왜 위험하며 폭력적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자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놓는다'는 어떤가? 

라캉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책의 1장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한길사, 2001)에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풀어서 얘기하면 (1)지젝의 하이데거론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읽을 수 있다. (2)거기서 지젝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를 통해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3)이는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정도가 되겠다. 내가 덧붙여 설명하지 않은 것은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일 텐데, <존재와 시간>이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면서 철학사의 한 걸작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염두에 둔 것이다(보통은 완벽한 작품을 걸작이라고 일컫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젝이 말하는 건 '<존재와 시간>의 곤궁'이기에 그러한 상식을 뒤흔든다고 적은 것이고. 물론 더 자세하게 적을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다. 하지만 이만큼만 적으면 과연 위험하고도 폭력적인 촌평이 되는 것인지?

이제 부르디외로 돌아와서,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나는 적었다. 물론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왜 팍팍한지를 적었으면 좋았겠다(이건 나중에 역자도 시간이 좀 지나서 내게 요구했던 사항이었지만 따로 시간을 내질 못했다. 그땐 책도 못 찾았었고). '팍팍하다'는 표현은 '진도가 더디 나간다' 혹은 '읽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적었던 듯한데, spec님의 의견으로는 이 번역서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못된다. 왜냐하면 번역본은 부르디외 번역서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유려한 번역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번역본은 어떻게 하여 이 '팍팍한' 책을 유려하게 옮긴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라고 spec님은 적었다. 요컨대,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은 무진장 팍팍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데리다의 <정신에 대하여>와 함께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는 것. 여기엔 '팍팍하다'는 평가가, 즉 읽기 힘들다는 느낌이 책 자체의 가치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spec님이 읽기에 부르디외의 불어본 하이데거론은 국역본보다 훨씬 더 팍팍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다, 라는 것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팍팍하다'는 평 자체는 번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폄하가 아니다. 좋은 책이지만 읽기는 힘들다는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직접 대조해보지 않았기에 나로선 불어본에 비해서 더 팍팍하다거나 덜 팍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단지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적었다. 이 또한 위험하며 폭력적일까? 불어본이 어떤 편제로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역본은 매 페이지마다 각주가 달려 있어서(어떤 경우엔 페이지의 3/4이 각주로 돼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학술논문'이란 인상을 '팍팍' 준다. 거기에 부르디외가 독어로 인용한 단어들은 모두 우리말 번역 옆에 독어가 병기돼 있고, 불어와 한자어의 병기도 빈번하게 나온다. 어떤 텍스트가 잘 읽히느냐 마느냐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런 체제의 텍스트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읽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나보다 뛰어난 독해력을 갖고 계신 것. 어떤 이에게 수월하게 읽힌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수월하게 읽히는 건 아니다. 초반부의 한 대목만 다시 읽어본다.    

"장의 효과, 철학적 소우주의 특수한 강제가 철학적 담론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절대적 자율성이라는 가상에 객관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 가상은 철학 - 즉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 - 의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이나, 슈펭글러나 융거 같은 문필가들의 저작과 비교하는 일을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 흔히들 하이데거를 이 자들과 매우 가까이 놓고 언급하려 들곤 했겠지만, 이것은 오직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이라는 식의 추론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에서이다."(12쪽, 강조는 원문)

보통은 이런 대목을 만나면 내용이 머릿속에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영어본도 같이 참조한다(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지만 아쉽게도 나는 구입해두지 않았다). 이 대목은 이렇게 영역돼 있다: "Paradoxically, the 'field' effect, that is the effect operated on the production of philosophical discourse by the specific constraints of the philosophical microcosm, is just what gives an objective basis to the illusion of absolute autonomy. This effect can be invoked to prohibit or reject a priori any comparison of the work of Heidegger, a conservative revolutionary in philosophy (that is, in the relatively autonomous field of philosophy), with the works of economists like Sombart and Spann or political essayists like Spengler or Junger, who would appear to be temptingly similar to Heidegger, if this were not precisely the kind of case where it is impossible to argue in terms of 'other things being equal'."(강조는 나의 것)  

'장(champ, field)'이란 건 부르디외 고유의 용어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 영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철학 또한 하나의 '장'이다. 때문에 장의 효과, 장으로서의 효과를 갖는다. 그 효과란 철학은 외부(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는 환상, 곧 '절대적 자율성'이란 환상에 객관적 토대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나대로 옮기면, "'장'의 효과, 즉 철학이란 소우주의 특수한 제약들이 철학 담론의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철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이라는 환상에 객관적인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어지는 문장의 주어를 국역본은 '이 가상'으로 봤는데, 영역본에 따르면 '이 효과(this effect)'이다(의미상 큰 차이가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두번째 문장을 옮기면, "이 효과는 철학, 곧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에서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들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들과 비교하거나, 다른 조건들이 같다는 조건하에 슈펭글러나 윙어(융거)와 같은 정치 에세이스트들이 하이데거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걸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게끔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는 철학자의 저작을 경제학자나 에세이스트의 저작과 동급에 놓고 비교하는 걸 금지하거나 거부하는데, 그럴 경우에 철학이란 장이 갖는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건 '환상'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하이데거 읽기의 방법론을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한다(부르디외 사회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된다. 그것은 우선 텍스트를 그것이 생산된 가장 일반적인 상황으로 곧바로 환원해버리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철학적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 또 이 주장과 상관적으로 모든 외적인 참조를 거부하려는 방식 역시 거부한다."(12-13쪽)

"Any adequate analysis must accommodate a dual refusal, rejecting not only any claim of the philosophical text to absolute autonomy, with its concomitant rejection of all external reference, but also any direct reduction of the text to the most general conditions of its production." 

영역본으로 미루어 보아 원문은 한 문장으로 돼 있을 텐데, 역자는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 그건 독자의 가독성은 어느 정도는 고려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덜 팍팍하게 읽힌다. 그런 고려를 조금 더 밀고나가면 이렇게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영역본의 중역인 만큼 다소간의 편차는 있을 것이다).

"모든 적합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를 잘 조화시켜야만 한다. 즉 철학 텍스트를 그 생산의 일반적인 조건들로 막바로 환원시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철학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그 외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부르디외가 제안하는 독해 방법은 이렇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호성에 따라 규정되는 글, 말하자면 두 정신적 공간에 대응하는 두 사회적 공간에 준거하여 규정되는 글에 대해서는, 철학적 독해와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적 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13쪽, 강조 원문)

이러한 '이중적 독해'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치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이데거 철학을 비난하는 비방자든, 나치참여와 하이데거 철학을 분리시키는 찬양자든 다음과 같은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 말이다."(14-15쪽, 강조 원문)

여기에 부르디외 하이데거론의 요체가 정리돼 있다. 나치와의 연루를 이유로 그를 거부하는 하이데거 반대자들이나 그의 나치 동조와 철학을 분리키시는 하이데거 옹호자들이 모두 놓치고 있는 점을 자신이 이 책에서 입증해 보이겠다는 것. 그것은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불과할 수도 있었다'? 영역은 이렇다: "Heidegger's philosophy might be only a sublimated philosophical version, imposed by the forms of censorship specific to the field of philosophical production, of the political or ethical principles which determined the philosopher's support for Nazism."

부르디외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1)하이데거의 정치적 혹은 윤리적 원칙은 그를 나치즘에 대한 지지로 이끌었다. 즉, 그의 나치 연루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2)하지만 그러한 입장을 철학 담론으로 전개할 수는 없었다. 철학 장의 검열 때문에(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작업'과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부르디외가 직접 프로이트의 용어를 쓰고 있기도 하고). (3)이러한 곤궁의 타개책으로 하이데거는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원칙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정치적 존재론'으로 재해명된다. 그것이 부르디외가 의도하는 바이다. 다 따라 읽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도는 '상식'으로 챙겨둘 만하다...

08. 04. 20.








P.S. 하이데거와 나치즘에 대한 상세한 분석/해명은 박찬국 교수의 연구서를 더불어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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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21 09:14   좋아요 0 | URL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최대한 읽겠다는 읽고 싶다는 읽어야 한다는 욕구나 희망 부담감 따위 전혀 없이 가끔은 심장이 가렵도록 읽고 싶은 책들을 봅니다.이를테면 에밀 시오랑처럼 말입니다. 몇 권의 책을 함께 주문했는데 이번에도 모두 흡족하진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겐 로쟈님의 페이퍼 이상이 아닌 책들도 많습니다. 저는 가끔 로쟈님의 페이퍼를 옮겨적으며 봅니다. 치매 예방에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뀐 그림이 썩 좋네요. 그런데 사진이 아니라 그림인가요? 언제나 그림이 아주 잠깐 비치고 페이퍼로 덮여서 볼 수 없는데 바탕그림을 보는 방법은 없나요? 몹시 헝클어진 새둥우리 같은 남자의 뒷통수를 좀 오래 보고 싶어서요.ㅎㅎ

로쟈 2008-04-21 10:10   좋아요 0 | URL
독일 풍경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국내에 화집도 나와있고요.^^ 수즈달 풍경사진이 가을 것이어서 교체한 것인데, 사이즈들이 다들 안 맞아서 결국 이 그림으로 가게 됐습니다...
 

지난주에 삼성 특검 결과가 발표되었다. 조세포탈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불구속 기소한다는 것이며 예상대로(?) 상식에 미치지 못하는 내용이다(아직 종결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의 전말은 한국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아주 요긴한 자료가 될 듯하다. 그게 이 사건의 의의가 될까?). 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남겨두게 됐는데, 애초에 이 비리사건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인터뷰기사와 재판부에 대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04. 19) "거짓말이었다면 나를 구속하라”

“나를 구속하라.” 말로는 누구나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단죄할 수 있다. 조준웅(67) 삼성 특별검사도 지금으로부터 121일 전 특검에 임명되자 “검찰 등 수사기관이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수사하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특검팀이 내놓은 150여쪽에 이르는 수사결과 발표자료는 “차명주식은 이건희 회장 개인 것이 분명하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나 같은 발표자료에 등장하는 김용철(50) 변호사는 “신빙성이 의심되고, 모순에 차고, 수시로 변하는” 남자였다. 김 변호사가 ‘나를 처벌하라’고 나선 이유다.

18일 아침 김 변호사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새벽 3시까지 변호인들과 반박자료를 준비했다고 한다. 특수부 검사 출신인 그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참고인 진술을 저렇게 조목조목 물어뜯는 것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비자금과 로비 의혹을 대충 덮을 것은 예상했지만 나를 물어뜯을지는 정말 몰랐다”는 것이다.

특검팀은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 결과 발표문의 상당 부분을 ‘김 변호사의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심지어 삼성 본관에서 돈을 주고받는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김 변호사가 특검팀에 그려준 사무실 약도조차 ‘로비는 없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됐다. 그는 “사람 말을 비틀어서 저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특검팀의 로비 의혹 수사 태도에 넌더리를 쳤다. “압권은 특검팀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명단’입니다. 제가 삼성 법무팀장으로 있을 당시의 검찰 주요 보직자 명단을 내밀며 ‘확인’을 해 달라고 하더군요. 이들이 나중에 검찰총장이나 장관이 될 때 로비 의혹이 불거지면 ‘특검 수사에서 해명됐다’며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환장하겠더군요.” 그는 확인해주지 않았다. 대신 마무리 조사를 받으며 “‘면죄부 조사면 더이상 진술 안 하겠다’는 내 말을 반드시 조서에 남겨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특검팀에 출석해 20여 차례 조사받았다. “내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추궁당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 왜 수사 끝나고 나를 씹는지 모르겠네요.” 정작 수사 시작부터 종료까지 수시로 말을 바꾼 것은 삼성 쪽이었다. “<행복한 눈물>을 보세요. 애초 삼성 쪽은 홍라희씨가 샀다고 했다가 곧바로 아랫사람 착각이었다고 말을 바꿔요. 그런데 특검팀은 그걸 인정해주거든요.”

“수사 끝난 뒤 왜 나를 깎아내리는지 모르겠어”

그는 특검팀이 “(김용철과 삼성 가운데) 누가 수사 대상인지 전혀 모르는 거 같다”고 했다. 수시로 바뀌는 삼성 쪽 해명은 별다른 확인도 없이 그때마다 인정했던 특검팀을 삼성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특검팀을 얼마나 비웃을까요. 아마 고마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을 텐데’ 하면서.”

김 변호사는 이번 수사를 수술에 빗댔다. “의사가 수술 끝나고 뱃속에 가위 넣고 꿰매도 환자들은 몰라요. 우리도 특검팀이 뭘 수사했는지 모르잖아요?” 덜 도려낸 암세포는 나중에 온몸으로 퍼진다. “국가기관·언론·지식인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는 삼성의 위력이 드러난 결과죠. 이 위력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악성종양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성과는 역설적이게도 삼성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한 데 있다고 김 변호사는 여기고 있다. “그 힘의 실체를 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수사 결과가 저를 공격하지 않습니까?”

그는 특검팀 안에서 ‘빅딜’도 아닌 ‘그레이트 딜’이라는 말을 몇 번 들었다고 했다. “특검팀이 수사를 풀어갈 복안이 있다고 하길래 뭔가 했습니다. 이제 보니 불구속 기소를 하는 대신 돈의 원천을 덮어주고 수사를 검찰에 넘기지 않기로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비 당사자들에게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한 김 변호사는 자신에게도 ‘거래’가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특검팀에서 ‘로비 의혹이 의심은 가지만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고소당한 게 문제되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검찰에서 원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특검, 삼성인지 김용철인지 수사대상 헷갈려”

그는 “삼성이 수십년 동안 감춰 놓은 돈을 국가예산으로 찾아서 합법적으로 세탁까지 해준” 특검 수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수사 결과를 보고 믿을 국민이 있을까요?” 하지만 걱정도 많다. “한달 뒤에 누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앞으로 어떤 사건을 구속 수사할 수 있겠습니까? 제헌절쯤 되면 벌써 집행유예 판결이 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건희 회장 일가와 삼성을 세속의 법정이 아닌 ‘역사의 법정’에 세우겠다고 했다. 불씨가 남으면 더 큰 불로 번지기 마련이다. “인생을 걸 만한 일을 진짜로 찾은 겁니다. 저나 사제단,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동참할 것입니다.” 수사 결과가 발표되던 날 밤 사제단 신부들은 김 변호사에게 “명예를 함께 지키자”고 했다고 한다. “사제단과 제가 제기한 의혹들이 거짓이라면, 세상을 이렇게 시끄럽게 한 죄는 엄청납니다. 거짓말이라면 허위사실로 세상을 흔든 죄를 물어 저를 구속시켜야 합니다.”(김남일 기자)



한국일보(08. 04. 19) 삼성 재판 맡은 민병훈 부장판사

조준웅 삼성 특별검사가 불구속 기소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전ㆍ현직 삼성 경영진 10명에 대한 재판을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가 맡게 되면서 이 부의 민병훈(47ㆍ사시26회) 부장판사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민 부장은 짧은 기간이라도 실형을 선고하고 수시로 법정구속을 할 정도로 양형이 엄중하다. 또 논리에 맞지 않는 검찰 주장에는 잇달아 무죄를 선고할 정도로 법 판단이 깐깐하다. 이에 따라 민 부장이 이번 사건을 맡은 게 삼성 측에 독이 될 지, 특검팀에 올가미가 될 지 그 향배가 주목된다.
18일 서울중앙지법 등에 따르면 당초 삼성 사건은 경제 전담 재판부인 형사 24부나 25부에 배당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법원은 “24부,25부에 사건이 많다”며 사건을 부패 전담 재판부인 형사23부에 배당했다.

민 부장은 개인적으로 삼성 사건에 상당한 관심과 의욕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고, 법원이 이번 사건에 적극적인 민 부장에게 배당했다는 분석도 있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경제,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인데다 치열한 법리 공방이 예상되는 만큼 믿고 맡길 수 있는 재판장을 고른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민 부장은 일단 유죄가 인정되면 집행유예보다는 단기라도 실형을 선고하고, 자주 법정구속을 하는 등 양형이 엄중하기로 유명하다. 민 부장은 최근 사건의뢰인의 투자금 13억여원을 가로채 불구속 기소된 이모 변호사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그는 또 지난해 12월 제이유그룹에서 2억여원을 받아 불구속 기소된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원에 대해 “국회의원을 3차례나 지낸 사람이 공무원의 직무와 관련해 2억원이라는 거금을 받아 죄질이 나쁘다”며 징역 2년을 선고하고 역시 법정구속했다.

그렇다고 민 부장이 무조건 검찰의 기소 내용을 수용하는 판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민 부장은 2006년 말 대검 중수부가 유회원 론스타코리아 대표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을 4차례나 기각, 법원과 검찰의 갈등을 촉발시킨 주인공이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은 민 부장을‘공공의 적 1호’로 꼽기도 했다. 그는 또 지난해 10억원 상당의 대출 사례금을 받아 기소된 상호저축은행 회장 사건에서 검사가 공소장에 도장만 찍고 실수로 서명을 빠뜨리자 “공소의 효력이 없다”며 공소기각 판결해 검찰을 경악케 했다.

이에 따라 삼성 사건에서 기소 내용이 받아들여질 경우 이 회장 등에 대한 처벌이 강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억원의 뇌물수수를 ‘나쁜 죄질’이라고 판단하는 민 부장에게 1,128억원의 양도소득세 포탈과 에버랜드 등에 끼친 2,500여억원 가량의 손실(배임)은 큰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법리를 따지는 스타일상 특검팀 기소 내용이 전부 인정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 회장은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실을 보고만 받았을 뿐, 지시 부분은 부인하고 있다.

특검팀도 물증 없이 정황증거로만 기소한 것이어서 자칫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 부장은 특검법에 따라 1심 재판을 3개월 내에 끝내야 하는 만큼, 앞으로 석달간 서초동 법정은 치열한 공방으로 뜨겁게 달궈질 예정이다.(고주희기자)

08. 04. 19.

P.S. 흠 오늘이 4.19기념일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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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4-19 12:46   좋아요 0 | URL
4.19인데 4.19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고, 삼성은 멀리 도망가고... (둘이 무슨 관계인거야) ( '')

로쟈 2008-04-20 10:08   좋아요 0 | URL
잊혀진 4.19란 기사는 보이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9 23:28   좋아요 0 | URL
대통령은 임기가 있는데 재벌총수나 언론사주는 임기가 무제한이라서...중앙일보는 김용철을 노리고 있더니 결국 일제사격 시작했더군요.

로쟈 2008-04-20 10:08   좋아요 0 | URL
요즘은 다들 너무 '노골적'이예요.--;

2008-04-21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21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oni 2008-04-21 09:27   좋아요 0 | URL
세상은 참 읽기 어려워요.

로쟈 2008-04-21 10:15   좋아요 0 | URL
읽기는 어렵지 않지만, 너무 꼬여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끊어버려야 하는데...
 

주중에 읽어보려고 했던 기사를 시간을 내 옮겨놓는다. 안톤 체홉의 희곡 <세자매> 공연에 대한 리뷰인데, 이번 작품은 특히 이윤택 연출이어서 눈길을 끈다. 공연을 직접 관람할 여유는 없지만 리뷰만으로도 감은 잡아볼 수 있겠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4&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160).

컬처뉴스(08. 04. 16) 희망과 절망을 담아낸 통속성

19세기 사실주의 연극의 거장 안톤 체홉은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하게 매몰되어가는 인생의 모습을 특유의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일면 비극적인 작품으로 ‘오독’되곤 하는 그의 희곡들은, 사소한 것들에 집착해 결국 생의 진수를 놓쳐 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블랙코미디와 같은 강한 희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는 4월20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세자매>는 선이 굵은 중견 연출가로 이름난 이윤택 씨가, 이러한 원작의 희극성을 증폭시켜 ‘대중통속극’의 맥락으로 재해석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낸 올가, 마샤, 이리나는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변방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로 내려왔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이들 자매는, 원치 않은 현실을 견디며 늘 아름다웠던 도시 ‘모스크바’를 꿈꾸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직장 때문에 늘 갈등하는 맏딸 올가, 결혼하면서 처음 품었던 기대와 너무나 다른 남편의 모습으로 인해 불행해 하는 마샤, 그리고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꿈꾸기를 단념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막내 이리나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청춘의 모습이다. 사방이 가로 막혀 있는 갑갑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 자매는 그녀들의 구원으로서 ‘모스크바’를 외친다. 하지만 꿈꾸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혹은 정말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꿈으로 그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비루할지언정 너무나 안정되어 버린 일상을 걷어차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지의 시간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선택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1막에서 ‘모스크바’를 외치던 세 자매는 2막과 3막 그리고 4막에서도 여전히 그 곳에 머물러 있다. 교사직을 그만두려고 하던 올가는 교장이 되고, 마샤는 마찬가지로 불행한 결혼 생활로 고통스러워하는 ‘베르시닌’ 중령과 동병상련의 힘겨운 사랑에 빠지며, 이리나는 무의미한 직장 생활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세 자매에게 희망과 같았던 남동생 ‘안드레이’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나타샤’의 유혹에 빠져, 너무 쉽게 교수가 되려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그렇게 멈추어 서 있는 세 자매의 삶은 점점 더 감당할 길 없는 가혹한 현실에 질식당해 간다. 오직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안녕 밖에는 관심이 없는 나타샤에 의해 자신의 방을 빼앗기는 순간, 이리나는 깨닫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모스크바’를 꿈꿀 수 없다. 정말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듯 체홉은 그저 멈추어 서 있었기에 좌절된 꿈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던 세 자매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말한다. 갔어야 했다. 떠났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결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늘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고, 일과 기회 그리고 사랑은 어느 덧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꿈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군대의 이동과 함께 텅 비어버린 도시에 남겨진 세 자매 곁에는 속물스런 시의회 의원이 된 안드레이와 이기적인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 버린 그의 아내 나타샤 만 남아있을 뿐이다. 생존 본능을 위한 이해타산에 밝은 나타샤의 세계는 점차 꿈의 흔적을 부여잡고 위태롭게 서 있는 세 자매의 세계를 거침없이 침식해 들어온다. 이런 이유로 서로를 힘겹게 의지한 채 삶의 의미와 미래의 희망을 애써 부르짖는 세 자매의 마지막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쓰럽게 만든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지 못하고 현실을 맴돌고 주저앉고 마는 허다한 인생의 모습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그린 체홉의 <세자매>에서, 이윤택 연출은 그 이면에서 꿈틀대고 있는 격렬한 욕망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는 원작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방식으로서 은유와 절제의 방식을 파하고, 도리어 노골적인 표현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본심을 폭로한다.

당시 사회 통념상 은밀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던 나타샤의 유혹은 안드레이를 거의 덮치는 식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원작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고통스러워하는 마샤와 베르시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렬한 키스와 포옹을 주저하지 않는다. 군의 이동으로 인해 무기력하게 떠나는 베르시닌의 등에 뛰어 올라 머리채를 움켜쥐는 마샤의 파격적인 모습은 이전의 어떠한 <세자매> 공연에서도 볼 수 없는 ‘통속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정한의 표현 방식이었다.

사실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의 공연들에서 <세자매>의 등장인물들은 비록 내면에는 인생의 고뇌와 욕망이 꿈틀대고 있을지언정, 겉으로는 세련되고 예의바른 태도로 각자의 진심을 감추곤 했다. 하지만 이윤택 연출은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지극히 ‘속물적인’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고 해석한다. 베르시닌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감추기 위해 늘 인류나 조국의 미래에 관한 멋진 장광설을 늘어놓는 한심한 사람이며, 그런 베르시닌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빠진 마샤는 그와 헤어지는 마당에도 자신의 신발을 챙기는, 말 그대로 ‘아줌마’다.

안드레이는 점차 몰락해 가는 집안의 현실은 물론, 아내 나타샤의 공공연한 외도를 애써 외면한 채 다만 안정만을 추구할 뿐이며, 그의 아내 나타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위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해 성공하려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시대의 화신과 같은 존재이다. 이윤택 씨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체홉의 매력이란 지극히 속물적인, 그런 까닭에 우리와 같이 평범한 보통 사람의 희망과 절망, 욕망과 좌절을 담아낼 수 있는 특유의 통속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체홉 작품 특유의 침묵과 절제의 미학을 포기하고, 통속극 방식의 자극과 도발의 독법을 선택한 이윤택 연출의 <세자매>는 분명 쉽고 재미있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만큼 원작이 지닌 정서, 곧 가고 싶고, 말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었지만, 결국 끊임없는 망설임 속에 인생을 놓쳐버린 세 자매의 회한어린 정서는 느끼기 힘들어졌다. 어떤 방식의 해석이 원작 또는 관객의 취향에 보다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다. 다만 과거 전통적인 방식의 해석과 차별화 된 방식의 새로운 <세자매>가 체홉의 작품 보는 즐거움을 더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 보인다.(박준용_연극평론가)

08. 04. 18.

P.S.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한 영화 버전의 <세자매>(1970)는 http://www.youtube.com/watch?v=saiH6HJH2Zw 참조. 도입 장면에서 암시되지만 세자매는 세월에 흐름에 맞서고자 하는 운명의 세 여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윤택 버전에서는 너무 '속물'로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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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소설은 재밌는데 희곡은 아직...왜 희곡은 읽기가 싫은지 모르겠어요.그래서 셰익스피어 전집도 사놓은지 5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안보고 있어요.

로쟈 2008-04-20 00:25   좋아요 0 | URL
독서일기를 내려면 읽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