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관련 기사들 말고도 스크랩해둘 만한 기사는 얼마든지 있지만 여건상 하루에 서재로 옮겨놓는 건 10-20% 정도밖에 안된다(책관련 기사도 사실 관심을 끄는 기사의 20-30% 정도를 스크랩해둘 뿐이다).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가불 놓치고 지나가는 기사가 많은데, 오늘 읽은 외신기사 하나는 그래도 챙겨두려고 한다. 외신기사라고는 하지만 한국 관련 기사다. 유감스럽지만, 자랑할 만한 기사는 전혀 아니고, 과거 우리의 치부를 환기시켜주는 쪽이다. 한국 정부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매춘을 '관리'하면서 '거대한 뚜쟁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 기사의 요점인데, 이건 '근대 국가론'을 보강해줄 수 있는 소스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리바이어던)은 '거대한 뚜쟁이'이기도 하다는. 지나가긴 했지만 건국 60주년을 맞이하여 집중조명을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이런 건 '역사 강의'에서 왜 빼놓는지?..  

 

 

 

 

 

 

 

 

   

  

 CNB뉴스(09. 01. 09) '한국정부, 거대한 뚜쟁이’ 파문

“한국 정부는 과거 미국의 보호를 받기 위해 매춘부들이 미군들에 몸을 팔도록 허용했다. 한국 정부와 미군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지촌 매춘부들이 미군에 성병을 옮기지 않도록 직접 관리했다”

한국의 전직 매춘부들이 과거 한국 정부가 미군기지촌의 '매춘(Sex Trade)'을 허용하고 미군당국과 함께 매춘부들을 관리했다고 뉴욕타임스는 8일(현지시간) A섹션 6면에 서울발 기사로와의 인터뷰에서 밝혀 파문이 일고 있다. 이와 함께 타임스는 “한국이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활용된 위안부의 추한 역사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는 또다른 학대의 모습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고 기지촌 매춘부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빗대 새로운 파장도 예고되고 있다.

타임스는 올해 80세로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사는 배모 할머니의 사진과 인터뷰를 실어 전직 기지촌 매춘부들의 비참한 삶을 부각시켰다. 신문은 “한국의 전직 매춘부들은 매춘이 강제로 이뤄졌지만 항의 할 수 없었으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자신의 추한 역사를 돌이켜보지 않고 일본에 대해 위안부 배상을 요구하는 위선을 보이고 있다고 비난한다”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매춘부들은 한국정부가 한국전쟁이후 피폐한 경제를 돕는데 자신들을 활용했으며 효율적인 기지촌매춘을 위해 영어와 에티켓을 가르치고 몸 팔아 달러를 마련하는 것을 칭찬했다고 주장했다.  



타임스는 김모씨(58)의 말을 인용, “한국정부는 미군을 위한 ‘거대한 뚜쟁이(Big Pimp)’였다”면서 “그들은 가능한 우리가 미군에 몸을 많이 팔도록 독려했으며 달러를 버는 애국자라고 불렀다”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일부 매춘부들은 “미군과 한국 공무원들이 정기적으로 이들이 있는 집창촌을 단속해 성병의심자를 골라내 단골고객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한국경찰은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매춘부들을 창문이 철망으로 막힌 이른바 ‘몽키 하우스'에 완치 될 때까지 가두기도 했다고 전했다. 타임스는 이들이 2차대전 때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들처럼 보상과 사과를 바라고 있다면서 “그것이 선택이든, 필요에 의한 것이든, 강요이든 우리 모두는 정부 정책의 희생양”이라는 말을 전했다.

한편 뉴욕 타임스가 기지촌 매춘부들을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한 것과 관련, 논란이 확산될 가능성과 함께 한국 정부의 대응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동맹속의 섹스()’라는 저서를 1987년 출간한 캐더린 문 웰슬리 대학 교수는 “이런 기지촌이 한국정부와 미군당국에 의해 지원됐다면 공범관계가 성립된다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여성문제를 관장하는 한국의 성평등부는 이같은 문제에 대해 논평을 거부했고 주한미군 사령부는 “인신매매나 매춘을 묵인하거나 지원하는 불법적인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타임스는 이번 기사를 위해 모두 8명의 전직 기지촌 매춘부를 인터뷰했다면서 관련 문서와 사진에 따르면 상당 부분 이들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한국과 미군당국은 수십년동안 기지촌의 매춘을 용인했기 때문에 사실 이들의 주장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면서 미군기지가 있는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도 기지주변에 술집과 매음굴이 퍼져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전직 매춘부들은 한국 국민들이 정부가 이 일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06년 한 전직관리는 TV에 나와 정부가 기지촌 매춘부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당시 공무원들이 나라를 위해서 나쁜 일은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인정했다. 



국회 기록에 따르면 일부 한국 지도자들은 매춘의 필요성을 용인하기도 했다. 1960년 두명의 의원이 동맹국의 군인들이 일본에서 달러를 쓰는 것을 막고 이들의 ‘자연적 욕구’ 충족을 위해 매춘부 공급을 촉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무부 이성우 차관은 정부 답변에서 ‘미군을 위한 매춘부 공급과 여가활용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1969년 닉슨독트린 선언 이후 미군의 철군 가능성을 두려워했고 이를 막기 위해 주한미군을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군 당국은 매춘부들을 등록하고 적절한 성병치료를 받도록 공동 노력을 기울였고 미등록됐거나 정기검진을 받지 않는 매춘부들을 단속한 1976년 보고서 기록도 있다. 이들 기지촌은 현재도 존속하지만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필리핀에서 온 외국여성들로 대체되고 있다. 전직 매춘부들은 주류사회와는 소외된 채 기지촌에서 대부분 궁핍하게 살고 있으며 해외로 입양을 보낸 혼혈자녀들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전모씨(71)는 18살이던 1956년 고아가 돼 굶주림을 못이겨 동두천의 기지촌을 찾게 됐다. 전 씨는 60년대에 아들을 낳았으나 아이가 열세살이 됐을 때 장래를 위해 미국으로 입양시켰다. 훗날 미군이 된 아들은 10년전 엄마를 찾아왔지만 전 씨는 아들에게 “난 엄마로서 실패했다. 나를 잊으라”고 말했다. 정부 보조와 폐품 수집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전 씨는 “아들에게 의존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나같은 여성들은 한미 동맹을 위한 최대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녀는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정부와 미군의 것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김진의 기자)  

09.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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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09 23:41   좋아요 1 | URL
가부장적 민족주의 정서로만 종군 위안부 문제를 접근하던 우리의 자세에 일대 경종을 울려주는 사건입니다.<동맹 속의 섹스>가 제기하는 문제의식만 있으면 일제시대 종군위안부는 민족의 순결한 여성이고 기지촌 여성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지요.박노자도 <만감일기>에서 정대협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길지 않은 글이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리영희<전환시대의 논리>에도 통금이 있던 시절에 정부가 직업여성에게 특별통행증을 주어 외국인 대상 매춘을 허용한 데 대한 글이 있었지요.

로쟈 2009-01-09 23:52   좋아요 1 | URL
기사를 읽고 든 생각은 대한민국이 정말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은 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미군정을 계승한 거구나, 란 거였어요. 해전사의 '재인식'이라고 할까요...
 

지난 연말에 나온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은 읽기 시작했다가 일더미에 떠밀리는 바람에 제쳐두었는데, 이번주 북리뷰 때문에 다시 책상맡으로 갖져왔다. 알고 보니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2008)도 그 사이에 출간돼 있었다(잠시도 한 눈을 못 팔게 하는군!). <미학 안의 불편함>은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과 겹쳐읽으면 좋겠다. <무지한 스승>에 대한 마땅한 리뷰가 없다 싶었는데, 마침 두 권의 책을 같이 다룬 리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1. 10) '지적 평등’이 두려워 저들은 ‘독학’을 깔본다 

지난해 말 한국을 다녀간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그의 또다른 책 두 권이 잇따라 번역돼 나왔다. 먼저 나온 <무지한 스승>은 1987년에 출간된 초기작이며, <미학 안의 불편함>은 미학이라는 틀을 통해 정치를 새롭게 이해하려 하는 랑시에르의 최근 관심을 반영한 2004년 저작이다. 두 책 사이의 시간상 간격은 크지만, 평등·민주주의·정치라는 정통적 주제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이 일관성 있게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지한 스승>은 소재의 독특함 때문에 특히 눈에 띄는 책이다. 랑시에르는 1830~1850년대 프랑스 노동자 운동의 문서고를 뒤지는 고고학적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틀을 세웠는데, 그 첫 성과물이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이었고, 그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에 기댄 또다른 작품이 <무지한 스승>이었다. 랑시에르가 발견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적으로 각성함으로써 노동자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키운다는 전통 좌파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노동자상이었다. 낮의 노동이 끝난 밤 시간에 노동자들은 시를 쓰고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노동자가 아닌 한 명의 시인 또는 철학자로서 살아가는 인간들, 그들이 바로 프롤레타리아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사유하는 인간’과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전통적인 나눔(분할)을 가로질렀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읽고 쓰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평등한 지적 능력’이었다.  

<무지한 스승>은 이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문제를 파고든 작품이다. 이 책에서 랑시에르는 문서고 탐사를 통해 찾아낸 독특한 인물 조제프 자코토(1770~1840)를 등장시킨다. “1818년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 자코토는 19살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른 나이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장 대리를 지내기도 한 수재였다. 1815년 부르봉 왕정이 복귀하자 그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벨기에로 망명해 루뱅 대학의 강사 자리를 얻었다. 기이한 경험은 이때 이루어졌다.  

불문학 강사였던 그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다. ‘무지한 스승’은 학생들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교재로 삼아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사용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했다. 스승과 학생 사이에 서로 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은 스스로 프랑스어를 기초부터 학습했다. 스승은 그 자기학습의 조건이자 계기로만 존재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단어들을 조합해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었고 철자법과 문법도 스스로 익혀 완성시켰다. “더구나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은 초등학생 수준이 아니라 작가 수준이었다.” 

이 우연한 경험을 통해 발견한 교수법을 자코토는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전통적 교육을 넘어선 새로운 교육이었다. “자코토는 다른 선생들처럼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님을 알았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경우를 들어 통상의 교육을 ‘바보 만들기’ 교육이라고 말한다. 계몽주의자들의 진보적 교육조차 흔히 ‘바보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에 머무르고 만다. 랑시에르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놓인 불평등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스승이 학생보다 지적 능력에서 우월하다고 전제하고서, 우월한 스승이 열등한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관념으로는 영원히 불평등을 벗어날 수 없다.  

랑시에르는 불평등을 출발점으로, 평등을 목표로 삼는 사고방식을 전복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의 문제는 지적 능력이 평등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스승과 학생 사이의 나눔·분할을 거부하고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식한 자가 지도하고 무지한 자는 지도를 받는다는 발상을 극복할 토대가 마련된다. 모르는 자가 모르는 자를 가르칠 수 있으며, 모르는 자가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다. 이런 지적 능력의 평등은 기존 질서의 위계와 자리를 무효로 만들 수 있다. 지배의 작동 조건인 나눔과 분할의 선이 지워지는 것이다. 

<미학 안의 불편함>은 이 ‘나눔을 통한 지배 질서의 작동’ 문제를 미학의 틀로 다시 사유하는 텍스트다. 랑시에르는 미학을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문’이라는 고전적인 정의에 가깝게 이해한다. 이때 감성적(감각적) 인식에 깊이 연루돼 있는 것이 정치다. “미학은 우연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이 정치다. 불평등의 구획 아래서 지배받거나 배제당한 자들이 그 구획을 거부하고 평등한 주체로 등장하는 것, 그것이 정치다. 그때 정치는 감성(감각)을 바꾸고, ‘감성의 분할’을 재구성하는 일이 된다.(고명섭 기자) 

09. 01. 09. 

P.S.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그런 '지적 평등'의 또다른 사례로 들고 싶은 것이 <행복한 인문학>(이매진, 2008)이다. 소외층을 위한 다양한 인문학 코스의 강의 체험담을 모아놓았는데, 이 경우의 '지적 평등'을 낳는 것은 강의를 맡은 교수들의 무지가 아니라 수강자들의 예기치 않은 관심과 열의이다. '행복한 인문학'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인문학이 아닐까. 오전에 나도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썼는데, 내일자 한겨레의 북리뷰는 그 두 배가 넘는 분량으로 이 책을 다루고 있다. 메인으로 다루어진 듯하다. 

 

한겨레(09. 01. 10) 인문학교실의 노숙인 “학교 오은 것 아니라 병원 오은 것 같다”

경제적 지원이 급한 사람들한테 인문학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 노원성프란시스대학, 관악인문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해 온 우기동 경희대 교수는 그런 얘기 하는 사람들에게 “그분들 인격을 모독하지 마라”고 했다. ‘그분들’은 노숙인, 교도소 수용자, 임대아파트 주민, 자활근로자들이고 나이는 20대에서 70대까지. 실천인문학·현장인문학·평화인문학·시민인문학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인문학 강좌의 나이 많은 수강자 ‘선생님’들이다.

“나은 요지 움에 들어 학교을 가은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은 것 같다. 성프란시스 대학병원에 …. 잊혀지고 버려지고 외곡된 모던것들이 … 새롭게 환희로 덮쳐온다. 한번도 보지도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 엄청난 파고로 밀려온다.” 인문학 강의는 까막눈을 갓 벗어난 이분에게 새 세상을 열어주었다. “나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한 또다른 분은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잠재력 속에 무한한 지식의 능력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글쓰기 연습을 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 나는 이 비밀을 찾았다. 인문학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고 공부할 수 있는 문이 열린 셈이다.” 그들 중엔 고학력자들도 있고 한때 기업체 사장으로 ‘잘나가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제 집도 절도 없는 그들은 어느날부턴가 ‘웰빙’이 삶의 최고가치인 양 떠들어대기 시작한 이 사회에서 영낙없는 ‘낙오자’들이다.  

 » 2007년 1월, 아홉달동안 철학과 역사, 문학 등 5과목을 이수하고 최종심사를 통과한 11명의 성공회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학생들의 수료식. 한 여성 수료생이 교가를 부르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들의 자녀를 임대아파트 주민의 자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며 다른 학교로 배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회, …건축 주택단지에서 작은 평수 아파트를 한구석에 몰아서 짓고 조경으로 담장을 치는 사회, 장애인 임대아파트가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지고 자녀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반대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사회, 일용직 근로자의 쉼터가 들어서면 우범지역이 된다고 쉼터의 건축을 반대하는 사회, 그리고 겉으로는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를 경멸하고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앞다투어 물질적 가치와 돈을 최우선 가치로 추구하는 사회.”

그렇게도 아득바득 달려온 경제성장의 최종 목적지가 여기일까? 우 교수가 보기에 이런 사회에선 제아무리 제철 과일 먹고 등푸른 생선을 즐기고 틈나는 대로 러닝머신에 올라타 몸매를 가꿔봤자 ‘웰빙’은 ‘꽝’이다.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 능력을 잃어버린 ‘웰빙’은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이기적 탐욕 극대화와 타락의 또다른 변종일 뿐이다. 재학생 절대다수를 고시 지망생들이 차지하고, 대학마다 인문학 과목들은 정작 전공학생들에게조차 외면당해 폐강 위기에 몰리지만 취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만한 실용과목들은 강의실이 미어터질 지경이 되는 이런 사회에서 인문학의 박제화·고사는 당연지사라는 게 소설가 임철우씨의 생각이다.

인문학의 죽음과 약육강식의 가짜 웰빙사회는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역코스를 가속적으로 질주해 간다. 그럴수록 빈곤한 약자들은 타인의 시선, 소외, 가정폭력, 질병, 마약, 범죄, 굶주림 등의 강고한 포위망에 겹겹으로 에워싸이면서 저항능력을 상실하고 체념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견 강자의 승리로 게임은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패자가 된다. 그런 사회는 지속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금융공황을 통해 이 말기적 증세가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뒤덮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1995년 미국의 작가 겸 사회평론가 얼 쇼리스가 이 죽음의 코스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쇼리스는 죄수와 마약중독자,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수업’을 통해 빈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일깨우고 ‘공적 세계’로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혁명(클레멘트 코스)을 시작했다. <희망의 인문학>이 그 교본이었다. 

2005년 9월 서울 노원구에서 성프란시스대학이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한국판 쇼리스 혁명이 시작됐다. 임철우씨는 이를 “저 광포한 자본주의의 질주에 맞서는 최초의 작은 반역”이라고 했다.시민인문학 강좌는 지금 모두 30여개로 늘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도종환 <담쟁이>)

구세군브릿지센터에서 시인 도종환씨가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시작 배경을 얘기하고 낭독했을 때 박수친 수강생들 중엔 난생처음 시에 감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20대 대학생들한테서는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진지한 반응과 열기” 속에 인문학은 그렇게 그들을 자긍과 자존의 존재로 바꿨다. 존재의 소리에 목말라 하고 영혼의 물음에 민감한 ‘소외된 삶’들이야말로 인문학 혁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에서 2학기(1학기는 12주)에 걸쳐 인문학(문학)을 강의한 임철우씨는 “정작 훨씬 많은 걸 배운 쪽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고 했다.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 박남희씨는 구제받은 것은 수강생들이 아니라 “인문학 자체”라고 고백했다. 성프란시스대와 관악인문대학에서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한 최준영씨도 “결국 인문학 강좌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인문학 그 자신인 셈이고, 노숙인을 비롯한 시민인문학 수강생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됐다”고 했다. 쇼리스가 말한 대로 “가르치는 사람 역시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고, 타자와의 올바른 관계 맺기를 배워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들 시민교수들이 인문학 강좌에 대한 생각과 강의 체험을 고백록 형식으로 엮은 것이 <행복한 인문학>(이매진 펴냄)이다.(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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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09 23:00   좋아요 0 | URL
이 포스트를 읽고 방금 아마존에서 랑시에르의 책 한 권을 주문했습니다. (알라딘은 아니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좋은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그리고 좋은 안내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9-01-09 23:20   좋아요 0 | URL
저도 찾아보니 <미학 안의 불편함>의 영역본은 올해 나오는 것 같네요...

biosculp 2009-01-09 23:31   좋아요 0 | URL
이 기사 보다가 미네르바가 생각이 나던데요.
지적 평등에 대한 랑시에르의 증거같기도 하고요.

로쟈 2009-01-09 23:58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1-09 23:32   좋아요 0 | URL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기존의 위계질서를 깨뜨린다...위계질서 하면 한가락하는 우리나라에서 저런 교육철학이 필요합니다.

로쟈 2009-01-09 23:59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 교육이 뜻하는 바가 그게 아닐까 싶어요...

게슴츠레 2009-01-10 00:08   좋아요 0 | URL
마침 최근에 『무지한 스승』을 읽고 있었는데 반가운 포스트군요ㅎㅎ 저는 "평등"한 "지적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랑시에르의 모습에서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칸트의 모습이 가장 많이 떠오르더군요. 『미학 안의 불편함』의 '요약본'으로 랑시에르의 홍대 강연문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강 목차만 훑어봤는데 홍대 강연문과 유사한 논지를 구사하는 듯 싶더군요. 강연문은 랑시에르 방한 강연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습니다.

로쟈 2009-01-10 08:50   좋아요 0 | URL
네, 방한시 프린트는 해놓았는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어요...

푸른바다 2009-01-10 00:13   좋아요 0 | URL
그런데 우리나라 보통의 교육 현장에서는 이러한 감동적인 모습이 연출되지 않을까요?

로쟈 2009-01-10 08:49   좋아요 0 | URL
'무지한 스승'이라면 쫓겨날 거 같은데요...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지 지구 공습이 중단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상군까지 투입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몇 차례 제시된 평화안을 모두 거부했고, 급기야는 유엔 구호차량까지 공격했다 한다. 좀 지나간 어법을 사용하자면 '깡패국가'가 따로 없다(이번 공습의 이유가 자국 주변의 '깡패'(하마스)를 소탕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판 '최종적 해결’도 불가능하지 않겠다. '최종적 해결'은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집단 소각한 일을 가리킨다. 분석기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지지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물러나기 전에 유리한 전략적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나 다음 달로 예정된 총선 등도 고려해 군사작전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라 한다. 세상은 아직 지옥이다...   

경향신문(09. 01. 09) 이스라엘의 왜곡된 건국신화  

새해를 맞이해 희망의 노래를 합창해야 하는데, 올해는 벽두부터 마음이 무겁다. 대공황에 준하는 경제위기가 주요인이지만, 연말연시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무자비한 학살극이 스산함을 참담한 전율로 바꿔놓는다. 중동 사태의 근원을 캐다 보면 유럽의 모순을 엉뚱하게 해외로 수출한 제국주의와 유럽 중심주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의 칙칙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을 증폭시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막는 것 가운데 하나가 편향된 역사인식이다. 우리 사회 역시 기독교, 미국, 서방 여론의 영향 아래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중동 사태에 대한 공정한 이해를 심각하게 방해받고 있다.

민족의 유전학적 동질성 미약
이스라엘이 학교 교육을 통해 가르치는 ‘유대민족사’를 보면,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토라’(율법)를 받은 이후 줄곧 존재해 온 유대 민족의 유일한 직계 후예다. 유대인들은 ‘출애급’ 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해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왕국을 세우나, 이후 왕국의 분할과 함께 결국 두 차례(기원전 6세기와 기원후 70년)의 유배생활을 경험한다. 2000년에 걸친 방랑(‘이산’)으로 유대인들은 예멘, 모로코, 스페인,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지로 퍼져갔는데, 하지만 언제나 혈연적 관계를 유지해 민족성을 결코 상실하지 않았다.

이 역사 해석에 따르면, 19세기 말이 되면서 옛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나치의 대학살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오랜 염원을 실현해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땅’에 정착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무주공산이며, 애초의 주민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처녀지이다.거기에 살고 있는 소수의 아랍인들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며, 독자적인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에 속한다. 유랑민족이 땅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전쟁은 정당하며,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이 역사관이 신화에 불과한 것임을 입증하는 책들이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온 ‘신 역사가들’의 논지를 요약한다. 먼저 성경을 역사서로 볼 수 있느냐이다. 종교적 진리를 민족교육의 토대로 만든 것이 19세기 후반기의 시온주의 역사가들인데, 최근 ‘신 고고학’ 등의 연구는 출애급과 관련한 ‘모세 오경’의 사실적 근거를 의심하며, 솔로몬의 왕국도 ‘영화’를 운위하기에는 소왕국에 불과했음을 지적한다. 또한 ‘바빌론 유수’에 대해서는 소수의 지배층만이 유배당했고, 기원후 70년의 ‘제2차 성전 파괴’로 유다왕국의 주민들이 유랑생활을 겪기는커녕 그대로 살다가 일부는 4세기에 기독교로, 대부분은 7세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렇다면 고대 이래 지중해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고대에서 중세 초에 걸쳐 유대교 역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기독교에 못지않게 중동과 지중해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다수 확보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오늘날 쿠르드족의 거주지에 기원후 1세기에 있었던 한 왕국이 유대교를 받아들여 유대왕국이 되었으며, 5세기에는 예멘에 유대왕국이 들어서 그 후예들이 오늘날까지 신앙을 지켜왔다. 또한 7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일부 베르베르족이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아랍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에 동참해 일종의 공동정권을 이루었다. 대규모 개종은 8세기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던 하자르족에게서 일어났다. 여기서 유대교는 우크라이나로, 13세기 몽골 침입 이후에는 동유럽과 독일로 퍼져나가 ‘이디시 문화’의 토대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국사학계’는 건국신화에 어긋나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가관인 것은 과학을 동원해 유대민족성의 유전학적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런 것이 발견될 리 만무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인구의 약 4분의 1이 비유대인으로 간주되어 법적으로 국가에서 배제당한 상태인 반면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의 정식 시민임에도 전 세계 유대인들의 고국으로 자처한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의 비서실장 내정자인 람 이매뉴얼은 미국 시민이면서 이스라엘 군에 입대해 아랍군과 싸운 바 있다. 이스라엘 군이 이런 건국신화를 내면화하고 있다면, 하마스에 대한 ‘최종적 해결’은 강력한 정신무장의 지원을 받는 셈이다. 참으로 상상조차 싫을 정도로 무서운 일이다.(최갑수 서울대교수·역사학)     

미디어오늘(09. 01. 08)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학살극, 즉각 멈춰야

이스라엘은 가자 사태와 관련한 언론의 취재를 철저히 제한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7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가자 지구에 대한 무차별 공격으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해외 언론사 취재진들의 가자 지역 전투 취재 요구를 거부했다. 취재진들은 전투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 쪽의 일방적인 브리핑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신문은 가자 지구에 취재진을 들여보낼 수 없는 해외 언론들은 가자 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언론인들에게 현지 소식을 전해듣고 있다고 말했다. 가자 지구에서의 취재는 하마스에게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이 신문은 밝혔다.
이스라엘 보도통제로 실상 안 알려져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전 세계의 관심사 이지만 이스라엘의 보도 통제 등으로 그 전모는 다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외신에 소개되는 사진 기사 등을 보면 이스라엘은 전투기, 헬기, 탱크 등을 앞세우고 군인들은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상태다. 반면 하마스는 로켓과 박격포로 무장하고 대항 중이라고 보도되지만 그 규모, 파괴력 등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국내 일부 언론은 ‘가자 지구에서 치열한 전투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정작 희생자는 팔레스타인 쪽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지난 십여일 동안의 관련 보도를 보면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은 어른이 어린 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식의 공격으로 보인다. 양쪽의 무력이 큰 차이가 나는 것과 함께 가자 지구 아이들과 부녀자 등 민간인 다수가 피해를 입는 것을 볼 때 이 비극은 군사작전을 통한 학살극과 같다. 이스라엘이 어떤 이유를 댄다 해도 비인도적 무차별 공격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국제사회는 분노에 떨면서도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라는 벽앞에 가로막혀 발만 구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학살극 성격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이 지난달 27일 시작된 후 10여 일이 지나면서 알려진 양측의 사상자 숫자를 비교하면 그 참상의 정도가 한 눈에 나타난다. AFP 통신 등에 따르면 8일 현재(한국시간)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702명, 부상자는 3100명에 이르는 반면 이스라엘 쪽은 사망 10명, 부상 10여 인데 이 가운데 전투중 사망한 군인은 6명이다.

가자 지구 사망자 가운데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진격 이전 현지 사망자는 4백여 명이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진격이 시작된 지난 3일이후 팔레스타인인 3백여 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군은 6명이 사망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진격 이전에 이스라엘 쪽에 로켓 공격을 벌여 이스라엘 민간인 4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했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6일 탱크를 동원해 팔레스타인 난민 다수가 피신해 있던 3개 유엔 학교를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48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가운데는 다수의 부녀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군은 한 학교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군에게 발포했기 때문이었으며 사망자 가운데 하마스 부대원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엔 쪽은 일차 조사결과 그럴 가능성은 99.9%가 없다고 부인, 공동 조사를 제의하면서 이스라엘의 공격에 분노를 표시했다.

유엔 학교 공격 이유는 하마스 발포 때문 주장에 유엔 그럴 가능성 99.9% 없어
가자지구에서 자행하는 무차별 공격에 대한 비난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바티칸 성당의 정의와 평화 장관은 이스라엘의 2주 간에 걸친 공격으로 가자 지구는 ‘거대한 수용소’로 변했다고 비판했다고 이탈리아의 한 온라인 신문이 보도했다. 바티칸 성당 쪽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비난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가 유대인을 집단 수용소에 감금하고 수백만 명을 살해한 것을 상기시키는 날선 내용이다.

바티칸 성당 쪽은 2차대전 당시에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했지만 지금은 유대인이 가자 지구 공격을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을 집단 학살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 것이다. 폴란드의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는 유대인 15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나치는 수용소에 감금된 유대인을 처음에는 총으로 쏴죽였으나 나중에는 가스실에 몰아넣어 한 에 수십,수백 명씩 학살을 자행했다. 이스라엘은 바티칸 성당 쪽의 언급에 대해 하마스의 선전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바티칸 성당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하더니 이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사람 집단 학살" 비판
과밀의 빈곤 지역으로 주민 150만 명 가운데 80%가 유엔의 구호식량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번 이스라엘 공격으로 이 지역은 식량과 연료, 약품 부족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 전기와 수돗물 공급은 끊기거나 턱 없이 부족한 상태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이 이런 상황을 고려해 비인도적인 공격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구호품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국제사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난 7일부터 매일 오후 1시(현지시각)부터 3시간 동안 하마스에 대한 군사작전을 중단키로 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이집트가 공동으로 제안한 하마스와의 휴전안 논의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지만 단시간 내에 타결될 가능성은 낮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무략화와 가자 지구로의 무기 반입을 중단시키는 조건이 총족될 때까지 휴전협상을 끌면서 공세를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지지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물러나기 전에 유리한 전략적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나 다음 달로 예정된 총선 등도 고려해 군사작전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참혹한 일이다. 비인도적 가혹행위는 피의 보복을 부른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대한 공격을 즉각 멈춰야 한다.(고동우 논설실장)  

09. 01. 09. 

 

P.S.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이후, 2008)은 최근에 새 번역본 개정판이 출간됐다. 이전 번역본에 제기된 불만을 출판사쪽에서 받아들인 결과인 듯싶다. 새로운 리뷰기사도 챙겨놓는다. 

한겨레(09. 01. 10) 촘스키의 ‘미국-이스라엘 커넥션’ 고발  

“폭격의 공포에 질린 아이들이 ‘아빠, 이스라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스라엘은 우리 땅을 빼앗으려 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모두 죽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왜 ‘세계가 이런 짓을 보고만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가자지구 주민 림 알구사인의 2009년 1월 7일치 <가디언> 인터뷰 중에서)

팔레스타인이 다시 짓밟혔다. 이스라엘의 미사일과 폭탄에 찢긴 채 죽어간 어린아이들의 주검이 비탄에 빠진 부모 품에 안겨 묘지로 향하고 있다. 700명이 넘는 생명이 차가운 주검이 됐다. 지난 60년 동안 왜 이런 비극이 끝없이 반복되고, 세계는 이토록 침묵하는가? 개정증보판으로 새로 나온 노엄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은 이 질문에 대한 묵직하고 진지한 대답이다. 세계적 언어학자라는 안락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계속된 억압의 역사와 이를 지원해온 ‘끈끈한 동맹’ 미국의 태도를 날카롭게 고발해온 촘스키의 치열한 노력이 1075쪽에 이르는 이 책 곳곳에 배어 있다.  

미국 주류 언론과 이스라엘이 세계를 세뇌시켜온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의 야만적 공격에 맞서 안보를 지킬 권리가 있다. 이스라엘은 많은 것을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이를 거부하고 로켓포를 쏘아댄다.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면서도 민간인들은 희생시키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건국 당시부터 이 문제를 깊이 추적해 온 촘스키의 설명은 완전히 다르다. 19세기 말 유럽의 시오니스트들이 2천년 동안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온 아랍인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영국이 이를 지원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100만명 이상이 쫓겨나 주변국의 난민이 됐고, 고향 땅에 남은 팔레스타인인들도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군사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가자에서는 2005년 이스라엘군 철수, 이후 봉쇄정책 계속)에서 ‘피정복민’으로 살아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빼앗아 정착촌을 세우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저임금 노동력으로 착취하면서, 점령에 맞서는 이들을 잔인하게 탄압해 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현실에 적응하며 생존권을 찾기 위해 애써 왔으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모든 권리를 거부해 왔다.

중요한 진실은, 이스라엘의 가혹한 점령정책은 “특별한 동맹” 미국의 지원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숙명의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막대한 부가 중동의 주민들이 아닌 미국과 서구로 흘러가는 데 방해가 되는 중동의 민족주의자와 저항세력을 소탕하는 ‘전략적 자산’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친미 독재국가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아 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하는 데 사용한 무기의 대부분은 미국이 제공한 것이다. 1978~1982년 이스라엘은 미국이 전세계에 제공하는 군사원조의 48%, 경제원조의 35%를 차지했다. 유엔에서 이스라엘의 지나친 행위를 막으려는 결의안들은 모두 미국의 거부권에 좌절돼 왔다. 이스라엘의 학살을 고발하는 이들과 언론에는 ‘반유대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매장시킨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세계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고 있는 지금, 이스라엘·미국의 주장과 이 책의 주장 어느 쪽에 귀를 기울일지는 독자의 몫이다.(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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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01-09 17:49   좋아요 0 | URL
정말 너무들 하네요... 제가 너무 순진한 소리를 하는 걸까요?

저 처참한 풍경을 사진으로 보자니, 눈물만 흐르네요...

로쟈 2009-01-09 21:40   좋아요 0 | URL
사실 더 처참한 사진들이 많지요...--;

Kir 2009-01-09 19:18   좋아요 0 | URL
참 싫어하는 표현인데, 요즘 이스라엘의 행태를 보면 하도 기가 차서 절로 떠오릅니다. 악의 축... 히틀러와 일당들보다 더하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걸까요?;

로쟈 2009-01-09 21:41   좋아요 0 | URL
더하다는 할 수 없겠지만, 요즘은 덜한 거도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1-09 23:54   좋아요 0 | URL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만들어진 정체성을 다룬 키스 휘틀럼<고대 이스라엘의 발명>도 추천합니다.우리나라에도 신학생들의 필독서로 잘 알려진 고대 이스라엘에 관한 명저들이 사실은 만들어진 고대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 책인데 저도 읽고 나서 그 '명저'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라구요.

로쟈 2009-01-10 00:00   좋아요 0 | URL
오호, 유익한 정보입니다.^^ 한데, 그 '명저들'도 몇 권 말씀해주시죠. 신학쪽 책은 뭐가 진짜고 아닌지 판별할 수 없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09-01-10 23:28   좋아요 0 | URL
가장 대표적인 게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전 2권입니다.이거 좀 괜찮은 신학대에선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보거든요.물론 유령 신학교에선 안 보지만요.

canon 2009-01-10 10:24   좋아요 0 | URL
키스 휘틀럼의 책'만' 읽어서는 안됩니다. 키스 휘틀럼 같은 사람을 '코펜하겐 학파'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이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아래 책도 읽어보세요.
William G. Dever, 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and When Did They Know It?: What Archaeology Can Tell Us About the Reality of Ancient Israel, Eerdmans, 2001.

로쟈 2009-01-10 13:37   좋아요 0 | URL
이스라엘의‘유대민족사’에 대해서 입장이 다른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1-10 23:53   좋아요 0 | URL
저는 휘틀럼의 책을 이성시<만들어진 고대>와 같은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이해했어요.그리고 그리스 문명에 대한 서구식 해석과 맞먹게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한 것에 대한 비판작업으로 이해했구요.에드워드 사이드가 호평했다니 그 성격을 알 수 있지요.서구 위주의 시각+시온주의의 공모를 파헤치는 작업이죠.핑켈슈타인 위의 책 읽은 뒤 보니까 좋더라구요.다음에 읽을 때 좀 더 정독해야겠어요.
논문집으로 <사회학적 성서해석>도 좋습니다.필자들이 성서해석 분야 일급학자들이에요.특히 게르하르트 타이센 논문이 좋아요.안병무 씨를 비롯하여 한국신학 연구소 쪽 신학자나 성직자들이 영향을 많이 받은 학자지요.

canon 2009-01-11 19:44   좋아요 0 | URL
다시 말하지만 휘틀럼, 닐스 피터 렘키, 토머스 톰슨 같은 코펜하겐 학파 사람들의 주장은 극단적이고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인정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 기록을 불신하고 고고학에 무지한 이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핑켈슈타인은(저를 가르친 교수님의 스승입니다) 기존 이론과 코펜하겐 학파의 이론에 거리를 두는 사람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1-11 22:10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성서 고고학의 최신학설이 실린 책들도 읽어봐야겠군요.

딸기 2009-01-12 16:31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트라이앵글 다시 나온다는 소리 들은지 5년 쯤 됐는데 이제야 다시 나왔군요
그렇다고 또 사서 볼 수도 없으니... 처음에 번역을 좀 잘 해놓을 일이지 말예요.

휘틀럼 책만 읽고 핑켈슈타인 책은 좀 지겨울 것 같아 안 읽었는데...
그런데 로쟈님, 그냥 제 생각인데, 9.11과 이라크전 이후에
'이-팔 분쟁의 이미지'와, 세계가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도 상당히 바뀐 것 같기는 해요.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의 신간이 출간됐다. <어루만지다>(마음산책, 2009). 연초에 읽은 지면에서 '여자들'에 대한 새 연재가 예고돼 있길래 작년에 연재됐던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 마무리된 걸 알았는데, 바로 책이 나온 걸 보면 미리 준비가 됐던 모양이다. 그의 애독자로서 눈길이 안 갈 수 없다. 일단은 기사를 챙겨놓는다.

 한국일보(09. 01. 07) 고종석 새 산문집 '어루만지다' 출간

'그러나 어루만짐이라는 형태의 스킨십은 사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사람의 살은 다른 사람의 살과 닿을 때 생기를 얻는다… 나는 마음의 치유이자 사랑 행위로서 어루만짐이 되도록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234쪽)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고종석(50)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의 새 산문집 <어루만지다>(마음산책 발행)가 나왔다. 그가 1996년 펴냈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의 맥을 잇는 한국어 단상록이다. 지난해 2월부터 12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을 손봐 묶은 것으로 그의 21번째 책이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란 책의 부제처럼 '어루만지다' '입술' '감추다' '혀놀림' '속삭임' '춤' 등 그가 엄선한 40개의 올림말은 사랑의 인력(引力)에 구속돼 있는 낱말들이다. 그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다.

한국어의 미세한 결을 읽어내는 눈밝음과 고현과 동서를 넘나드는 박람강기가 어우러진 그의 문장은 말 그대로 한국어의 한 진경을 그려낸다. 가령 '손톱'에서 그는 조선 궁중사의 중요한 부분인 내명부 여인들의 질투를 읽어내더니, 기타 연주와 연관된 손톱의 효용성으로 연상의 가지를 뻗쳐 "그것은 사랑을 닮았다. 손톱처럼 사랑도, 굳세거나 잔약하다"는 통찰로 마무리한다. 막 지천명의 들머리에 선 그의 인생경험은 이제 글을 잠언의 경지로 밀어올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가냘프다'라는 항목에서 "사랑을 낳는 것은 가느다란 신경일 테다.

사랑은 무딘 신경, 씩씩한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사랑은 가느다랗고 잘다. 모든 사랑은 잔정이다"와 같은 문장을 낳는다. '눈물'이라는 항목에서는 "아름다운 눈을 흔히 보석에 비유하는 관행에 기대면, 눈물은 액화한 보석, 액체보석이라 할 수도 있겠다"와 같은 시적 문장을 만들어낸다. 당대를 대표할 만한 이 미문가는 "이 책을 쓰며 새삼 절감했다. 한국어가 내 요람이자 무덤임을"이라고 자서(自敍)했다.(이왕구기자) 

09. 01. 08. 

P.S. '한국어가 내 요람이자 무덤'이라고 말하는 고종석이 내가 애호하면서 지지하는 고종석이다. 한데, 이건 '선호'가 아니라 '불가피'다. 이 '적들의 나라'에서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대해 내가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특별한 염증은 점점 커가고 있지만). 하지만 한국어에 대해서만큼은 불가피한 애정을 감추기 어렵다. 이유는 단순무식하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말이 한국어라서다. 이건 떼 쓰고 고집부리며 미운 짓을 골라해도 자기 아이에 대한 애정이 불가피한 것과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편애이고, '운명애'다. 같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한다는 점에서 고종석과 나는 젠장, 그 '운명 공동체'다. 운명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그저 어루만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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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1-08 23:27   좋아요 0 | URL
^^ 로쟈님도 고종석과 한국어를 무척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나온거 알고 벌써 주문했답니다.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책도 몇 권 있는데 고종석 건 나오자마자 자꾸 질러버리네요. 신문 연재는 옮겨다 놓긴 했어도 다 읽진 못했어요. 책으로 나올걸 알기에. 신문으로 보는 것보다는 책으로 읽는 걸 좋아해서. 좋은 밤입니다. :)

로쟈 2009-01-09 00:12   좋아요 0 | URL
네. 불가피한 편애입니다. 언젠가 문체론에 대한 글을 하나 더 써봐야겠어요...

Joule 2009-01-08 23:49   좋아요 0 | URL
딱 그만큼의 고종석을 좋아한다는 로쟈 님 말씀에 크게 동의하고 갑니다.

로쟈 2009-01-09 00:14   좋아요 0 | URL
저는 자유주의자 고종석도 지자하는 편입니다. 미식가적 취향은 제가 못 따라가지만...

푸른바다 2009-01-09 00:18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P.S.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고종석은 한동안 좋아한적은 있으나 요즈음 들어 보이는 그의 지리멸렬 때문에 관심이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로쟈 2009-01-09 00:26   좋아요 0 | URL
저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무던한 편입니다. 고정이 되면 메뉴를 잘 바꾸지 않지요.^^

비로그인 2009-01-09 00:55   좋아요 0 | URL
문체론에 대한 글을 써볼 생각이라고 하시니 기대하겠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1-09 14:44   좋아요 0 | URL
아주 애정이 묻어나는 PS네요. 다른나라 말을 아주 잘하게되어도 뭔가 미진하게 표현한듯한 느낌을 가지게 될 거 같아요. 제가 사투리 사용자로서 거의 완벽하게 표준어를 쓰지만 느끼는 약간의 답답함처럼 ^^
고종석님은 책보다는 다른 지면에서 자주 만나는데 참 감각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청와대 지하 벙커에 '비상경제상황실'이 설치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든 생각은 아무래도 게리 슈테인가르트의 <망할 놈의 나라 압수르디스탄>(민음사, 2007)을 좀 읽어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망할 놈의 나라, 내지는 망하기로 작정한 나라가 MB의 대한민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거의 '압수르디스탄' 수준이 아닐까. 어이없어 하면서 읽은 기사들 중 사설 하나와 진중권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1. 07) [사설]경제위기 확산된 뒤에야 설치된 ‘워룸’

비상경제정부 체제하의 상황실 노릇을 할 비상경제상황실이 어제 설치돼 가동에 들어갔다. 청와대는 하루하루 급박하게 돌아가는 경제 상황을 점검하는 일종의 워룸(War Room)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는 정부 안팎에 긴장감을 불어넣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상황실 사무실을 전시(戰時)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청와대 지하 벙커에 두었다. 그러나 정부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흔적은 없고, 어딘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진 지 벌써 4개월이 되어가고 있다. 금융위기 초기, 그 위기가 미국 국경을 넘어 전 세계 금융시장으로 번지자 영국 등 몇몇 나라들이 워룸 같은 비상기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분 단위, 초 단위로 바뀌는 금융 상황을 점검하고 대응책을 신속하게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국내 금융시장이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때에도 관련 업무를 총괄할 비상기구를 설치하기는커녕 부처별 각개약진과 혼선, 한 발 늦은 대책 등으로 여론의 질책을 받았다. 그러던 정부가 금융시장이 얼마간 진정된 지금에서야 워룸을 운영한다고 하니, 뭔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뒷북치기 식으로 만든 기구가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즉흥적인 업무 처리로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달 전 이른바 신빈곤층 대책 마련을 지시했으나 신빈곤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놓고 부처 간 논란만 빚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일자리 창출 계획도 뒤죽박죽이다. 이 대통령이 연일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자 지난해 말 정부 부처들은 2009년 업무계획을 통해 너도나도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보고했다. 이때 나온 정부 부처들의 일자리 계획을 모두 합치면 43만개에 이른다고 한다. 실업자들의 절반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그러나 무슨 재원으로 어떻게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새로 운영되는 비상경제상황실이 이런 전시성 계획이나 ‘뒤죽박죽’ 정책의 양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노컷뉴스(08. 01. 07) 진중권 "녹색뉴딜? 군복이 녹색이면 군대는 환경단체?"  

▶ 진행 : 고성국 박사 (CBS 라디오 '시사자키 고성국입니다')
▶ 출연 : 진중권 중앙대 겸임 교수


▲ 청와대 지하벙커에 비상경제상황실이 설치됐는데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 한마디로 어이가 없죠. 서울이 지금 가자지구입니까. 이스라엘에 폭격을 맞고 있는 상황인가요. 그런 상황도 아닌데 왜 벙커로 들어가는지 모르겠고요. 이런 데서 우리는 집권층이 가지고 있는 구시대적 마인드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분들이 구사하는 수사법을 보면 정말 6,70년대의 남한 아니면 5,60년대의 북조선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예를 들어 집권하자마자 얼리버드 운동을 했는데 그건 북한의 새벽별 보기 운동을 연상시키고요. 대통령도 디지털 시대에 젊은이들을 향해서 에어컨 돌아가는 사무실이 아니라 공사장 나가서 땀 흘리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건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기 운동을 생각나게 하고, 또 정부와 여당에서 아주 공공연하게 속도전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속도전이야말로 전형적인 천리마정신인데요. 여당 대표도 공공연히 전국이 공사판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건 전쟁 직후의 전후복구사업을 연성시키거든요. 이걸 보면 정부여당의 마인드가 완전히 과거에 고착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 지하벙커 문제는 청와대에 공간이 없어서 기존시설을 활용하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던데요?   

= 그런 식이라면 애초에 그렇게 나와야 하는데 지금 지하상황실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레토릭이라는 게 제가 볼 땐 그런 차원은 아닌 것 같아요. 정치적인 제스처가 있어서 자기들이 시시각각 전쟁 상황처럼 대응하고 있다는 발상 아닙니까. 저는 이렇게 경제를 운용하는 걸 워게임 모델을 도입하는 게 굉장히 시대착오라고 생각합니다.  

▲ 경제위기상황실 운영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도 그런 걸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 그런데 이분들이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약간 일종의 문화적 이벤트로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너무 서두른다는 느낌이랄까요. 언제는 위기였다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또다시 했다라고 했다가 굉장히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고요. 지금 필요한 건 위기 자체에 대해 대응하는 것도 있지만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위기라는 것들이야 왔다가 또 언젠가는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부분 전문가들이 올해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쯤 되면 경기가 다시 풀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군사용어까지 남발해가면서 호들갑을 떠는 게 맘에 안 들고요. 더 중요한 건 이분들이 나중에 경기가 풀리게 되면 그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상황실까지 설치해서 대응한 덕이 아니겠느냐고 자화자찬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 정부가 어제 위기극복대책의 일환으로 녹색뉴딜을 발표했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 군복이 녹색이라고 군대가 환경단체가 되는 건 아니겠죠. 그리고 녹색이라는 게 원래 현 정권의 시장주의 코드와는 잘 안 맞는 색깔이거든요. 그런데 국제적 압력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여온 건데,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파괴 때문에 세계 각 국에서 시장에 한계를 두려고 하지 않습니까, 탄소배출을 제한한다든지. 그러다보니 할 수 없이 들여온 건데, 그 낱말을 들여다가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저탄소 에너지라면서 원자력을 강조한다든지 그런 식이라는 거죠. 그리고 녹색뉴딜이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콘크리트 공사 위주거든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 산 깎아서 콘크리트 치고 그 위에다 녹색그물 같은 걸 덮어두는 게 연상되더라고요.  

▲ 이번 녹색뉴딜의 핵심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거든요?  

= 그런데 오바마의 그린뉴딜과 정부의 녹색뉴딜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오바마의 것은 최첨단 재생에너지기술에 대한 연구와 개발로 녹색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일자리들은 전문적이고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또 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나라들도 대개 그런 식으로 포트폴리오가 짜여져 있는데, 현 정권의 녹색뉴딜은 결국은 토목공사가 대부분입니다. 거기서 창출되는 일자리도 90% 이상이 건설일용직이고요. 또 공사가 끝나면 사라지는 일자리들인데요. 제가 볼 땐 경제에 대한 관념 자체가 너무 토목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50조라는 거금을 근시안적인 프로젝트에 쏟아 붓는 걸로 보입니다. 사실 경기는 부양해야 할 필요가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건설 부문에서 일자리 창출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50조라는 것도 결국 국민의 세금인데 조금 더 미래지향적이고 전문적이고 우리 경제를 위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지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야가 극한대치상태를 벌이다가 합의를 했는데요. 여야합의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 저는 당연히 그렇게 됐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이렇게 합의가 이뤄질 바에는 뭐 하러 그런 충돌을 해야 했느냐는 겁니다. 어차피 합의가 이뤄질 바라면 서로 예상이 되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강행하면 저쪽에서 물리적으로 저항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예측되는 결과들이 있는데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왜 매번 이런 것들을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여야 합의가 끝나고 나서 민노당 강기갑 의원의 의원직 사퇴결의안을 추진하겠다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 제가 볼 때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합의가 이뤄졌고요. 거기서 민노당이 계속 반발하다보니까 일종의 왕따를 시키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민노당 의석이 작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이어지는 일종의 희생양 제의처럼. 물론 강기갑 의원이 잘못한 행위가 있는데 그것에 비해선 과도하게 중요성들을 부여하면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게 현명할까요?  

= 강기갑 대표가 사과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그분이 부상을 당하고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건 이해하지만 의원으로서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선 이미 대국민사과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기갑 대표를 공적 1호라고 하면서 제명을 추진한다는 얘기까지 들리는데요. 제가 볼 때 강기갑 대표가 공적 1호라면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분들은 공적 0순위들입니다. 과거에, 또 현재에 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라는 거죠. 자기들도 의사당에서 분말소화기 쏘는 것도 폭력 아닌가요.  

▲ 여야 합의는 됐지만 한나라당 내에선 후폭풍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야당의 떼법에 한나라당 원내지도부가 굴복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 그건 잘못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만약 국회에서 다수당이 맘대로 한다면 굳이 총선한 다음에 의회를 구성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굳이 야당 의원들에게 뭐 하러 세비를 줍니까, 여당 의원들이 하자는 대로 다 하면 되는 거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합의처리라는 용어도 있고 협의처리라는 용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분명하게 다수와 소수의 의견을 절충하는 절차라는 게 그동안 국회에 있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 그런데 한나라당은 대선민심, 총선민심을 승복하라는 주장을 계속 하는데요?  

= 그럼 촛불민심도 승복해야죠. 지금 한나라당과 특히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어느 정도 나옵니까. 일본의 경우라면 내각의 사퇴, 내각을 다시 구성해야 할 정도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국민들이 대선 때 자기들을 뽑아줬다고 대선의 모든 공약을 다 동의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논리적인 오류죠. 특히 대운하 같은 것들을 국민들이 그때 동의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까지. 그리고 방송법에 대해서도 국민들의 여론은 다르게 나오고 있고요.  

09.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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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08 17:45   좋아요 0 | URL
원래 신자유주의,특히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뉴딜 반대파가 그 뿌리인데...그래서 우리나라 뉴라이트 경제학자인 이상돈(중앙대 교수)씨는 루스벨트 비판,뉴딜 비판에 몰두했지요.그런데 대통령이 뉴딜의 명성을 빌려 저렇게 나오니 어떻게 볼지 궁금해요.뉴딜이 실패한 정책이라고 그렇게 강조했거든요.

로쟈 2009-01-08 22:53   좋아요 0 | URL
기회주의적 비판이 아니었다면, MB식 뉴딜도 비판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