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강의중에 러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 얘기가 잠깐 나왔다. 불현듯 샤슬릭 고기맛이 그리워지기도 해서, 하지만 당장 얻어먹을 방도가 없기도 해서, 그와 관련한 글과 이미지로 그리움을 달래기로 한다. 조재익 기자의 <굿모닝 러시아>(지호, 2004)의 한 절은 '늘씬한 미녀 베료자'란 제목을 달고 있는바, 일부 내용을 옮겨놓으면서 몇 마디 덧붙인다(나머지 책들의 이미지는 관련서라는 명목으로 '그냥' 옮겨놓았으며, 베료자나 샤슬릭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

 

 

 

저자는 서두에서 베료자(자작나무)에를 노래한 시들 몇 편을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빠져 있지만 아마도 가장 최신 버전은 러시아의 '국민밴드' '류베'의 음반 중에서 국내에 유일하게 출시된 걸로 보이는 <다바이 자...>(아울로스, 2003)의 머릿곡 '자작나무'일 듯하다(<한국인이 좋아하는 러시아 로망스 베스트2>에도 들어 있다). 내가 가장 자주 즐겨듣는 러시아 음악이 이 류베의 노래들인데(몇몇 노래들은 질리도록 듣는다), 멤버들의 모습은 아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앞의 '깍두기'가 리드 보컬인 니콜라이 라스토르구예프이다. 

"러시아의 자작나무는 왜 그토록 바스락거리는지?"란 가사로 시작하는 서정적인 노래이다(http://www.youtube.com/watch?v=qd4y0dtXOyw). "여성의 이름 같은 이 베료자가 바로 러시아 여성을 상징하는 나무다. 여성 가운데서도 젊은 아가씨 또는 처녀의 상징이다. 굽지 않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는 늘씬한 몸메가 러시아 여성 몸매와 같고, 하얀 몸통은 러시아 여성의 뽀얀 살색, 살결과 같다는 것이다. 거기에 버드나무처럼 치렁치렁한 베료자 가지는 또 러시아 여성의 긴 머릿결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여성들은 베료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랑스러워 한다."(70쪽) 책에는 여름날의 아름다운 베료자 나무숲 사진이 실려 있는데(71쪽), 나는 겨울숲의 이미지를 아래에 옮겨놓겠다.

베료자와 관련한 러시아 전통과 축제에 관한 내용들이 책에는 더 포함돼 있는데, 아주 크게 잘 자란 베료자는 신목(神木)으로 받들어지기도 했다는 것 정도만 언급해둔다. 마음은 젯밥에 더 가 있기 때문에. 다만, 베료자 가지와 잎을 엮어서('베닉'이라 한다) 러시아식 사우나에서는 등이나 배, 다리를 두드려 마사지 효과를 내는 데 사용했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미할코프의 영화 <위선의 태양>에서의 '사우나 장면'을 상기해보시라) . 아래 사진에서처럼 사우나에서 '베닉'으로 서로 쳐주기도 한다. "나뭇잎 향이 그윽하고 좋아서 사우나실의 땀 냄새를 제거하는 데도 그만"이라고.

그리고, 또 베료쟈의 중요한 용도는 샤슬릭을 굽는 데 숲으로 쓰는 것이다. "가장 러시아적인 음식인 샤슬릭은 쉽게 말하면 꼬치구이다. 양고기나 돼지고기를 성양갑 크기로 썬 다음 쇠꼬챙이에 끼워 숯불에 구운 것이다." 샤슬릭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신선한 고기이겠지만, "그 다음은 숯불이 중요하다. 샤슬릭을 굽는 데 가장 좋은 숯 재료는 포도나무 줄기이다. 다음은 아카시아 나무, 산딸나무, 너도밤나무, 그리고 오크다.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베료쟈 나무다. 가장 흔하게 숲에서 구할 수 있는데다가 그 향이 은은해 샤슬릭 맛을 최골 만들어준다."(76쪽) 그럼, 이제 맛은 못 봐도 구경이나 좀 해보도록 한다.

샤슬릭은 야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구워먹는 것이 제 격이지만(<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의 소풍 장면에서처럼) 러시아 음식점이나 주점의 주요 메뉴이기도 하며, 주문할 경우 대략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그걸 러시아산 맥주 '발티카'('발찌까')와 함께 먹어주시면 되겠다. 특히 여름날에!..

끝으로, 샤슬릭 에티켓을 덧붙인다: "샤슬릭 요리를 할 때 러시아에서는 고기를 양념에 재고 숯을 준비하고, 고기를 굽고 식탁에 차리는 것까지 모두가 남성 몫이다. 여성들은 그저 숯불에 노릇노릇 구워지는 샤슬릭을 바라보며 군침만 삼키다가 다 구워진 샤슬릭을 먹기만 하면 된다. 이 샤슬릭을 만드는 남성들이 지켜야 할 철칙이 있다. '고기를 구울 땐 여성을 대하듯 하라.' 절대 서두르지 말 것,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으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샤슬릭을 구우라는 것이다. 여성을 대하듯 쉼없이 고기에 관심을 보일 것이며 주의를 기울이고 인내할지어다. 비록 숯불 매운 연기에 코가 맵고 눈이 매울지라도 샤슬릭 고기에서 눈을 떼지 말라는 것이다."(76쪽) 세상에 인내 없이 되는 일이란 없는 법이다...

06.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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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4-0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합정역 근처의 '러시아 문화의 집' 2층 루슬란에서 샤슬릭을 먹었습니다. 그게 러시아에서 먹는 제대로 된 샤슬릭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좀 퍽퍽하던데요.

로쟈 2006-04-04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샤슬릭이 맞습니다. 한데, 우리의 갈비도 그렇지만 문제는 '러시아'가 아니라 (신선한)'고기'겠지요. 맛은 제 입맛에도 우리 갈비가 더 좋습니다. 그저 가끔은 별미가 그리운 법이지요.^^
 

 

 

 

 

'4월은 잔인한 달'이란 구절은 물론 T. S. 엘리엇(1888-1965)의 <황무지>(1922) 서두에 나오는 것이면서, 이제는 4월이면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시구이다. 흔히 프란츠 카프카 문학의 위업을 말하면서, 그가 26개의 알파벳 중에서 'K'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작가라 평하기도 하는데(그건 셰익스피어도 하지 못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 엘리엇은 자신의 이 명구절 때문에 일년 12달 중에서 4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어쩐지 4월에는 그의 서명이 새겨져 있는 것 같지 않으신지? 특히나 시 애호가나 시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노래로는 딥퍼플의 'April'과 사이먼&가펑클의 'April come she will' 정도가 떠오른다).

가령, 정은숙 시인의 한 칼럼도 이런 식이다: "내게 봄은 엘리엇과 함께 온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이 시인의 절규가 생각난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다’는 이 시인의 ‘황무지’ 일절은 내게 봄이라는 계절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신열(身熱)처럼 그렇게 봄은 다가오는 것이다." 굳이 신열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게도 봄은, 특히 4월은 엘리엇과 함께 온다(몇년 전부터는 장국영(1956-2003)과 함께 온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아졌겠지만, 이들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읽기/쓰기에 관한 빽빽한 일정들이 달력에 표시돼 있는 4월의 '잔인함'을 확인하노라면 새삼 엘리엇의 시구는 아직도 생생한 '현실'이다. 

"응, 요즘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고 있구나." 그리고는 처음 서두의 몇 줄을 읊어댄다. 그런 식으로 과거에는 청소년 드라마에서도 종종 대사로 나오기도 했던 대목을 여기에 옮겨본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워왔다.

 

내가 읽은 번역은 황동규 시인/교수의 번역이지만, 현재 엘리엇 관련서들은 모스크바에서 구한 영-러 대역본 선집을 제외하곤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라 인터넷에 떠도는 걸 가져온 인용 번역은 출처를 알 수 없다. 하여간에, 이 자리에서의 요는 'APRIL is the cruelest month'라고 한번 읊조리듯 읽어주는 것이다(엘리엇의 낭송도 인터넷에는 떠다닌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직역하자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사실 이건 너무 잔인한 표현인데, 1-12월이 모두 잔인하지만 그 중에서도 4월이 가장 잔인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로선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게 아니라 그냥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푸념을 좀 늘어놓은 다음에 좀 기다렸다가 '5월은 푸르구나!'로 넘어가는 게 낫겠다.      

 

 

 

 

요즘은 그런 거 같지 않지만, 예전엔 시인이라면 <황무지> 정도의 '난해시'는 읽고 해석할 줄 알아야 했다. 작고한 구상 시인의 <현대시창작입문>(현대문학, 1989)에서도 시인의 기본 교양으로서 황무지 읽기와 해설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이채롭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상식이 돼 있지만, 여하튼 <황무지>를 읽기 위해서는 엘리엇이 많은 영감을 얻어왔다다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정도는 미리 읽거나 같이 읽어줘야 한다(엘리엇 왈: "나의 <황무지>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시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성배 찾기와 어부왕 전설 등에 관한 유용한 연구를 담고 있는 제시 웨스턴의 <제식에서 로망스로>(문학과지성사, 1988)도 교양 필독서이다. <황무지> 정도를 읽고 토론하는 정도는 '교양' 범주에 속한다고(주석본 읽기를 포함해서) 거기에 동의할 만한 독자들은 갈수록 줄어들 듯하다(<황무지>가 게임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한).   

학부 2학년 때 비교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T.S.엘리엇과 한국문학'이란 주제의 팀발표를 맡은 인연도 있고 해서 엘리엇에 관한 자료들은 국내의 연구서들을 포함하여 나름대로 갖고 있지만 영문학도도 아닌 데다가 현재 자료들을 열람할 만한 여건도 아니어서 더 아는 체하는 대신에 여기서는 신정현 교수(서울대 영문과)의 '고전해제'(동아일보, 2005. 06. 02)를 옮겨오도록 한다. 다만 강조는 나의 것이다.   

T.S. Eliot

 

 

 

 

 

 

-1922년에 발표된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20세기 현대 문명에 갇혀 생명의 기운을 잃은 서구인의 자화상이다. 20세기의 기술혁명을 바탕으로 치러진 1차 세계대전은 양측 군인 사상자만 3500만 명에 이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죽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더 참혹하고 처절했던가? 작가는 시를 통해 스스로 만든 재앙의 굴레를 자신의 머리 위에 쓴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해부하고 있다.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일까? 북러시아의 들쥐처럼 집단자살의 충동에 시달리며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문명으로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은? 인간에게 내린 신의 축복, 문명을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든 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20세기 최대의 시인 엘리엇은 섬뜩한 이미지와 푸가풍의 반복적이고 다음성적인 리듬으로 끊임없이 이 물음을 곱씹고 있다.  

-황무지란 원래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한다. 그렇다면 20세기 문명은 왜 생명을 잉태할 수도, 생명을 길러 낼 수도 없게 되었나? <세티리콘>에서 따온 이 시의 서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열쇠다. 늙어 쪼그라들어 작은 병 속에 갇혀 추녀 끝에 매달려 살게 된 무녀 시빌에게 한 아이가 묻는다. “시빌, 너 무얼 원하니?” 시빌이 대답한다. “나는 죽고 싶어!”  

-아폴로 신은 무녀 시빌을 총애해 어느 날 소원을 하나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시빌은 먼지 한 줌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먼지알만큼 많은 삶을 내게 주십시오.” 그녀는 젊음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먼지알만큼 많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한히 오래 살고 싶었을 뿐, 젊음을 재창조하며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시빌의 모습과, 그저 많은 문명의 이기는 원하지만 그곳에서 행복과 희열을 얻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현대 서구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맞닥뜨린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엘리엇은 서구인의 삶에 서린 ‘무한한 늙음’과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깊은 절망을 보았다. 그러나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이었다. 시빌의 절망에는 아직 희망은 있다. 그녀는 죽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재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절망에는 희망이 없다. 그 황폐한 정신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 다닐 뿐, 재생의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황무지에 등장하는 겨울에 따스함을 쫓아 남쪽으로 가는 유한계급의 사람, 종교적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문명의 값진 유산을 허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류계층 속물,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성(性)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방탕한 여인, 상업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장사치, 구원의 기사를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거리의 여인 등 수많은 인물은 모두 황폐한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으로 절망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은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폐한 문명에 붙여진 것임과 동시에 젊음의 재창조가 없는 영겁의 삶에도 두려움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황폐한 정신에 붙여진 것이다.

덧붙여서, 역시나 동아일보(1996. 04. 28)에 게재됐던 엘리엇 관련기사를 옮겨온다(필자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의 전기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어서 유익하다.

-미국 미네소타대는 지난 56년 4월 30일 한 시인의 강연회를 위해 대학 전용 축구장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이날 모인 청중은 1만 5천여명에 달했다. 강연회의 주인공은 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시인 T.S 엘리엇(1888∼1965). 그는 이날을회상하며 "거대한 투우장으로 들어가는 투우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강연 모습은 서구문학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문인들에게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한 사람만을 고르라면 바로 엘리엇이 선택될가능성이 가장 높다. 금세기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그의 시 <황무지> 때문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워왔다 .


-5부 4백 33행으로 이뤄진 <황무지>는 딱 떨어지게 해석되는 시가 아니다. 1차대전 후의 '시대적 환멸과 허무사상'을 노래한 시라고 하는가 하면 '현대문명의 불모성'을 노래한 시라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불교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엘리엇 자신은 이같은 해석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쓴 시'에 불과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같은 다면성을 갖춘 <황무지>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지난 22년 출판된 후 새로운 시의 대명사로 통해왔다. 다양한 인용과 다채로운어법등을 통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기법의 시세계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대학 창립자이자 목사였으며 엘리엇은 엄격한 가풍 속에 방종과 쾌락을 멀리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로 자라났다. 하버드대에 입학한 그는 철학에 빠져들어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된다. 그는 1908년부터 런던에서 머물렀는데 미모의 무용수 비비언 헤이우드를 만나 결혼했지만그녀의 정신질환으로 결혼생활은 불행하기만 했다. 그는 1917년부터 9년간 로이드 은행 행원으로 일하면서 격무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큰 비약을 했다. 1920년 최초의 비평선집 <신성한 숲>을 펴내 비평가로서 위치를 확립했다. 여기서 그는 시란 시인의 개성을 떠난 독자적인 생명체라는 '개성 배제의 시론'과 시인의 감성은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돼야 한다는 '객관적 상관물' 이론을 펼쳤는데 이는 이후 구미비평계를 휩쓴 '신비평'의 기초가 됐다.

 

-엘리엇은 출판편집인으로서도 큰 활약을 했다. 그는 문예지 <크라이테리언>의 편집책임자로서 로렌스, 조이스, 헉슬리 등의 글을 실었으며 대형출판사 '페이버'사의 편집이사로서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했다. 한편 그는 극작가로도 활약해 <성당의 살인>, <가족의 재회> 등의 시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엇 문학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였다. 그는 8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 43년 장시 <네 사중주>를 출간했다. 영문학계에서는 엘리엇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것은 <황무지>이지만 그를 대표하는 걸작은 <네 사중주>로 보고 있다. 초기 시의 난해성을 극복하고 통일된 구조와 안정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원숙한 작품이라는 것. 엘리엇에게 노벨문학상수상을 안겨준 것도 <네 사중주>였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는 잇따르는 상훈(賞勳)속에 비서였던 39세 연하의 발레리 플레처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06. 04. 02.

P.S. 엘리엇에게 4월맞이 '눈도장'을 찍었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각자의 '잔인한 4월'과 맞닥뜨려야 할 시간이다. 그 시간이 '시간의 재(Ashes of Time)'가 될 때까지 <동사서독>(1994)의 구양봉(장국영)처럼, 머리 풀어헤치고(혹은 새로 밀고서) 떠날지어다. 이크, 적들은 벌써 와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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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무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03 00:46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대한 갑론을박을 다루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시와 함께 관련논문을 10편쯤 읽고서 작성한 것이다. 몇 가지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어 흥미로웠고 이해의 가닥을 나대로 잡을 수 있었다. 제목엔 '깊이 읽기'란 말이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깊이 읽기'를 위한 심호흡이자 워밍업 정도이다. 여유가 되면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다(물론 더
 
 
산손 2006-06-0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티리콘 ㅋㅋ 왜 모든 걸 영어식으로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것도 간단히 찾아보면 되는 데 ;; 여담으로 원래 <사티리콘 Satyricon>에서 인용한 어구 대신에 엘리엇이 붙이려고 했던 건 콘라드 소설 속 화자가 커츠 죽는 걸 이야기하는 부분이라고 하는데(마지막 부분이 horror! horror!) 에즈라 파운드 씨가 딴지 걸어서 바꿨다고 하네요. 이미 알고 계신지도 ;; 저기 사진에 있는 'annotated'에 나와 있습니다.

로쟈 2006-06-0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자들의 '티내기'죠. 그 정점은 <옥스포드 영문학사>일 겁니다. 'horror, horror...'는 <어둠의 속>을 원작으로 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서 말론 브란도(커츠)의 마지막 대사이기도 합니다.
 

 

 

 

 

"대개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pansexualism)라고 말해지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항상 그것에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의미의 궁극적인 지평은 성행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진짜 눈물의 공포>, 304쪽)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 지젝이 (각주에서) 도입하고 있는 것은 한술 더 떠서 그러한 범성욕주의적 관점으로 근대철학사를 재기술하는 것이다: "성관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받아들이면 근대철학사 전체를 그런 용어들로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지젝의 각주16)은 국역본 319-320쪽, 원서 204-5쪽에 나온다). 

이럴 경우 만우절 행사를 겸하여 지젝의 '진지한' 농담을 옮겨놓고 잠시 음미하고픈 유혹을 나는 느끼게 된다. 번역은 필요할 경우 약간씩 수정하기로 한다(국역본에서 점잖게 '성교'라고 옮겨진 'fuck'를 나는 비속어에 걸맞게 '빠구리'라고 옮기려다가 체면을 생각해 참아두었다. 읽으시는 분들이 알아서 요령껏 읽으시길 바란다).

  

-데카르트: "나는 성교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강렬한 성행위 속에서만 내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한다는 말씀이며, 이것을 라캉식으로 탈중심화하면,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성교하며, 내가 성교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즉, 성교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것이 성교한다'는 것.

-스피노자: 성교로서의 절대자(coitus sive natura) 안에서 우리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간의 구별에 따라, 능동적으로 성교하는 삽입과 성교를 당하고 있는 대상을 구별해야만 한다. 세상에는 성교를 하는 자와 성교를 당하는 자가 있다.

-의 경험론적 회의: 우리는 하나의 관계로서 성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오직 그 움직임들이 서로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대상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위기에 대한 칸트의 대답: "성교의 가능조건이란 동시에 성교 대상의 가능조건이다." 

-피히테는 이러한 칸트의 혁명을 급진화한다: 성교는 스스로를 성교하는 자와 성교를 당하는 대상으로 나누는 자기-정립적인 무조건적 행위이다. 그 대상, 즉 성교를 당하는 자를 정립시키는 것은 바로 성교하기 그 자체이다.

-헤겔: 성교를 단지 실체(우리를 압도하는 실체론적인 충동)로서만이 아니라 주체(정신적 의미의 맥락에 포함돼 있는 반성행위)로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크스: 관념론의 자위행위적 철학하기에 맞서 우리는 진짜 성교행위로 회귀해야만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쓴 것처럼, 진짜 실제 삶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진짜 성교가 자위행위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니체: 의지란 그 가장 근본에 있어서 성교에의 의지(Will to Fuck)로, 그것은 '나는 좀더 원한다'라는, 즉 영원히 계속되는 성교라는 영원회귀에서 정점에 달한다.

-하이데거: 기술의 본질이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성교의 본질은 단순히 존재적 행위로서의 성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성교의 본질은 본질 그 자체의 성교이다.' 즉, 우리의 존재이해를 성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가 이미 교접하고 있다.(*'fuck'에는 망가뜨리다란 뜻도 있으며 국역본은 그렇게 옮겼다.)

-끝으로, 본질 자체가 어떻게 이미 교접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라캉의 "성관계 같은 것은 없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진부한 이해에 반대하여, 프로이트적인 혁명은 바로 그와는 정반대의 제스처에 놓여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전체 우주를 '성화'하여 우주의 기본구조를 남성적인 원리와 여성적 원리, 곧 음과 양간의 긴장으로 보고, 그러한 긴장이 심지어 다른 더 높은 수준(빛과 어둠, 하늘과 땅)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현실 자체가 이러한 두 원리의 우주적 성교의 결과로 등장한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이기 때문이다"(304쪽)

-"프로이트가 이룩한 것은 바로 세계의 근본적인 탈성화(desexualization)이다. 정신분석학은 세계의 근대적인 '탈주술화'로부터 궁극적인 결론을 끌어내는데, 그 결론이란 이 세계는 의미없고 우연적인 다수(the universe as a meaningless, contingent multitude)라는 관념을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일상적인 일들을 하고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이다."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개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는 동안, 즉 우리가 성행위에 참여하는 동안 어떤 환상적 보충을 필요로 하며 다른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해야(환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305쪽) 다르게 말하면, 두 사람이 성교할 때 각자의 환상적 보충물까지 거기에 끼여들기 때문에 언제나 넷(적어도 셋)이 성교하는 게 된다. 그게 '성관계는 없다'의 의미이다! 

만약에 그런 환상적 보충물이 결여된다면, 차이밍량의 <흔들리는 구름>에서와 같은 '삭막한' 성교, 곧 'fucking as the real'이 될 것이다. 영화를 곧 보기는 해야 할 텐데...

06.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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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0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꾹.
 

지젝에 관한 최근의 '인심'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 몇몇 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뜻밖에도 '로쟈'에 대한 평문을 발견했다. 필자는 noinsider님이고(아마도 북조선 소속이신 듯), 아래의 내용이 그의 '이 사람을 보라!'이다. '로쟈'의 허물을 잘 지적하고 있는 글이므로, 서재를 즐겨찾으시는 분들이 참조하시길 바란다. noinsider님은 '문학은 러시아문학, 철학은 독일철학'이란 신념을 갖고 계시는데, 나는 그 신념의 절반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사실 (절반쯤은) 동지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용문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필자의 것이다. 내용에 대한 판단은 '대중들'께서 해보시길(남조선의 '반동에 기생하는 지식인'은 입다물고 있어야 마땅할 것이므로). 

-우선 이야기 할것은 나와 로쟈씨는 전혀 모르는 관계다. 다만 내가 아는건 '로쟈'씨가 활동했던 온라인상의 '흔적'들 뿐이고 이상의 논의는 이 '흔적'들에 집중될 것이다. 내가 '이 사람'(-로쟈씨)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녀가 전형적인 부르주아 '지식소유자'의 '미래상'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오역 찾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오역문제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 현재 대중(교양을 갖춘 혹은 교양을 갖추길 바라는. 이상의 논의에 쓰이는 대중이란 용어는 이 범주에 한한다.)들이 원하는 번역서에 대해서 알아보자.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특징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1) 그들은 중요 개념들에 대한 '원문병기 표기방식'을 원한다. 2) 그들은 의역보단 직역위주의 번역을 원한다. 3) 그들은 완역을 원한다.

-1)과 2), 그리고 3)을 종합하면 대중들이 원하는 번역서의 특징이 나온다. 그것은 원저자와 독자의 직접적 소통-번역자의 부재(지양)를 통한-이다. 1)과2)의 방식은 부수적인 결과물이 따른다. 한글문법의 파괴다. 번역서에 한해서 문법은 파괴될수 있다. 시가 문법을 파괴할수 있는 건 더 큰 예술적 감동이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다. 번역이 문법을 파괴할 수 있는 건 원저자와 독자의 '직접적 소통'이 '정당화'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선 아직은 판단하지 않겠다. 

-원저자와 독자의 직접적인 소통은 과거에는 해당저작의 전공자들이나 갖춰야할 지향해야 할 자세였다. 대중들이 지향하는 바가 '그것'(원저자와 대중적 독자의 직접적 소통)이라면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 할 수 있다: (1) 대중적 독자의 수준이 전문적 독자(해당서적의 전공자)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2) 대중적 독자는 전문적 독자의 수준을 흉내내는데 불과할 뿐이다.

-(1)의 경우가 진실이라면, 번역이 좀더 올바르게 되야 한다. 번역이 올바르게 된다는 건 무엇인가? 원저자와 독자의 직접적 소통이 최고로 발휘되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자들은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의 끝은 무엇일까? 그 끝은 '원전독해'이다. 즉 번역이란 결국은 무용한 것이고 그것은 원전독해를 향한 '다리'에 불과할 뿐이다. 독자는 자신의 수준을 더욱 향상 시켜서 원서를 읽어야 한다. 번역의 질을 따지는 건 무용한 논의들일 뿐이다. 어떤 번역이든 왜곡은 행해지기 마련이다. 번역행위는 대중들의 지적인식이 행상되면서 그것에 따라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당장은 대중들의 지적인식이 원전독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원전독해를 교육시키는 지식소유자 유형이 각광받을 것이다. 바로 '로쟈씨'다. 로쟈씨와 같은 지식인 유형은 대중들이 원전을 독해하는 순간 그 필요성이 없어질 것이다.

-요즘 나오는 번역에 대한 논의들의 전제가 1)이다. 이 논의는 그 논의자체에 내재한 전제들과 그 작동체계탓에 필연적으로 '번역의 파괴'-'번역은 반역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남조선의 당장의 '열악한 현실'을 근거로 그들은 그들의 논의를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고 그들의 논의를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 짓지만.

-요약하면 (1)의 경우가 진실이라 믿고 그것을 전제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그 내부에 '계몽주의'를 간직한다. 즉 인간의식은 계속 발전 될 것이고 그 발전의 과정에서 그 발전을 도와주는 모든것들은 조금씩 지양될 것이다. 즉 완벽한 독해를 향한 진보의 노정-원본을 향한 번역의 노력은 번역에 대한 지양을 내포한다. 그 번역가나 번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소유자들 또한 지양될 것이다. 

-(2)를 보자. (2)가 진실이라면, 대중적 독자는 전문적 독자를 흉내내는 것일까? 사실 대중들은 진심으로 원저자와의 직접적 소통을 바라고 있다. 이 직접적 소통이 가능할까? 이 흉내개기란 직접적 소통의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마비시키려는 무의식적 노력이 아닐까? 우리는 좋은 번역을 판단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물어봐야 할것이 있다. 그것은 번역가가 번역하려는 대상 즉 원작이 실재하는가다?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이 객관적 실체로서의 원작은 존재한다. 허나 객관적 실체를 번역하려면 객관적으로 읽어야 한다. 즉 완벽한 번역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는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원작'을 객관적으로 읽는 것이다. 모든 독해는 주관적이다. 따라서 무슨 근거로 좋은 번역과 나쁜번역을 판단하는가? 쉽게 얘기하는 데로 비중역, 직역, 완역등의 미덕이 이 근거를 확실하게 해주는가?

-솔직히 말해보자. 좋은 번역의 절대적 조건은 부재한다고. 다만 비교에서 나온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그 정도의 차이를 구분해주는 것-그것은 원본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이라고. 결국 좋은 번역이란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즉 좋은 번역은 기존의 해석을 반복하고 결국 기존의 사고를 반복해서 기존의 '사고틀'을 공고화한다. 오직 그것만이다. 좋은 번역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소유자들의 내부의 욕망은 단 하나다. 그것은 '반동'이다.

-이 '좋은 번역 논의'들은 대중들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 즉 원작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단지 원작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재현하고 반복시키는데에 주력하게 한다. 즉 좋은 번역이 추구하는 '목적물'은 원서(원본)가 아니라 원서(원본)에 대한 기존의 '해석'뿐이다.

-여기다 (1)의 논의를 더해보자. 원작에 대한 객관적 독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원작(원본)을 인식할 수 없다. 외부의 실체로서 원작(원본)이 실재한다해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작이나 원저자와의 직접적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주체적 구조(자신)와 대상적 구조(텍스트)의 충돌에서 나온 해석뿐이다. 

-(1)의 불가능성-직접적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좌절에서 나온 최면상태가 (2)의 상태다. 그 흉내냄을 통해 대중은 직접적 의사소통을 가상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대중들 자신들의 의식속에서. 전공자를 흉내냄으로써 대중은 가상적 대리만족 속에 빠진다. 즉 대다수 대중들은 중요 개념의 원어 표기, 직역, 완역등의 장치로 자신을 스스로 마비시킨다. 번역물이라는 원작에서 굴절된 물체를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원작의 복사물로 스스로 착각시킨다. 아우라는 원작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장치를 통해 굴절된 복사물에도 존재시킬 수 이다. 우리는 아우라를 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상태에서 '로쟈'씨와같은 지식소유자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 지식소유자들 또한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서 그 복사물의 아우라의 섬광을 진짜로 믿는다. 이런 인물들은 대중들의 착각의 행진을 앞에서 지휘한다. 스스로 계몽의 대표자라 믿으면서. 2) '완벽한 번역을 위한 노정'의 무의미를 아는 지식소유자들은 이것을 이용한다. 사회반동성을 강화하거나 자신의 지식을 통해 권력을 추구한다. 이 둘은 대부분 동시에 이루어진다. 1)과 2)도 동시에 이루어진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하면 2)를 위해 1)의 착각을 스스로 한다.

-로쟈씨의 경우를 보자. 그녀가 읽은 텍스트 목록을 보면 그녀가 '완벽한 번역을 위한 노정'의 무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녀는 이 완벽한 번역을 위한 행진을 지휘하며 지식소유자에서 지식인이 되었다.(그녀가 동의하든 안하든) 그녀는 창조력이 없다.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에서 나온 편집자의 한탄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해당된다. 그녀의 모든 글들은 그녀가 읽은 수많은 텍스트들의 분해와 재조립일 뿐이다. 창조력이 고갈된 '지식소유자'는 '지식인'이 될수 없다. 로쟈씨는 창조력이 부재한 자신의 '한계'를 '완벽한 번역'을 위한 행진을 '이용'해서 깨뜨리고 자신의 '지위'를 '지식인'으로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대중들의 무의미'를 '자신만의 의미'로 가꾸고 있다.

 -또 한가지 문제는 번역행진이 앞서 지적했듯이 18세기 계몽주의사상이라는 것에 있다. 로쟈씨가 많이 다루는 텍스트들은 20세기 텍스트들이다. 18세기 의식을 가지고 20세기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방관적 관조다. 20세기의 텍스트들은 지적유희의 대상일 뿐이다.(그녀에 의하면) 그것의 힘들은 단지 지식애호가로서의 로쟈씨의 한계에 따라 단지 좀더 복잡한 '장난감'으로 격하된다. (사실 로쟈씨에게는 모든 이론과 텍스트들이 장난감일 뿐이다. 창조력 없는 지적 소유자의 전형적 특징이다.) 로쟈씨의 권력의지의 대상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로쟈씨의 그런 태도를 숭배하고 흉내낸다. 이런 사태들의 결과는 반동의 강화뿐이다.

-이런 류의 지식 소유자들은 앞으로 많아질 것이다. 즉 형식주의 철학의 대세로 인해 대중은 본질보단 겉모습의 섬광에 집착하게 된다. 즉 대중들에게는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 텍스트들의 겉모습을 바라보는게 중요하게 됐기 때문이다. 번역담론들은 그 겉모습을 향한 관심의 첫번째 시작일 뿐이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는 이 세상에서 '본질적 실체'의 '매커니즘'을 따져서 '필연적 변혁'을 위한 이론들은 무시당하게 된다.(내가 전에 대중들이 원하는 건 엄격한 체계라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그건 어느정도 옳지만 또한 틀리다. 왜냐면 대중들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농간으로 이미지에 현혹되어서 본질을 갖춘 체계보단 체계라는 겉모습을 띈 이미지에 열광한다. 즉 바디우에 현혹되는 것이 그 증거다.) 로쟈는 이 시대적 반동에 '기생'하는 지식분자이다.

-글을 마무리 짓자. 번역의 문제는 실천적 차원에서만 파악된다. 즉 대상이 되는 저작을 이론적 노동을 통해 극복, 비판, 옹호, 발전시키려는 그 노동안에서만-그 실천안에서만 파악되고 정립될 수 있다. 지적유희를 위한 독서를 하는 지식소유자들이 번역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웃기는 일이다. 그들의 그 유희적 차원의 독서법-실천이 부재한 독서법에 의해 그들에게 번역문제는 무의미하게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유희적 차원의 독서가 무의미한 것처럼. 오역의 문제-남조선의 그 열악한 번역환경에서 나온 이런식의 문제들은 실천적 독서를 통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실천적 독해의 전제는 상식적 수준에서의 정확한 번역이기 때문이다.(사실 모든 해결책은 단순하지만 이데올로기의 농간으로 복잡해지는 것이다.)

-예컨데 카의 예를 들면 목수가 좋은 나무를 고르는건 이러쿵 저러쿵 논할 필요가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독해를 위해선 올바른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은 왈가왈부 할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남조선의 번역문제는 그 목수가 좋은나무를 골라야 된다는 걸 목수의 최고의 자질인양 떠드는게 문제다. 목수의 최고 자질은 좋은 건축물을 짓는 것이다. 역시 책에 대한 최고의 행위는 번역이 아니라 (재현적 독해가 아니라)실천적 독해이다. 한가지 부수적인 사실을 전부인양 과장하면 그때부터 문제점이 생긴다.

-역사가들이 (역사가가 가져야할 기초적이고 부수적인 태도인)사실적 태도를 과장한 나머지 실증주의라는 얼토당토한 이론으로 기운것처럼, 번역이라는 기초적 부수적 태도를 과장한 나머지 남조선은 반동의 물결이 휩쓸고 있다. 이미지를 통한 반동의 물결이-이 반동에 기생하는 지식소유자들-이 유형의 전형적 대표자 로쟈씨. 이 사람을 보라! 

06. 04. 01.

P.S. 인용문의 문단을 조정하고 오타임에 분명한 조사를 하나 고친 것 외에 나는 인용문에 손대지 않았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나는 '원전주의자'가 아니며(우리말답지 않은 '직역'도 옹호하지 않는다), 번역을 '원전독해'를 향한 다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물론 니체를 따라서 우리의 존재 자체는 몰락/이행의 다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직접적 소통'의 환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갖다붙이자면) '번역주의자'라고 해야 옳겠다. 우리의 모든 인식 자체가 번역이고 번역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나'/'우리'라는 정체성 자체가 번역과정의 산물이다). 이런 건 '창조성'이 없는 내 생각이 아니라 사카이 나오키 등의 생각이다. 따라서 번역은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게 내가 번역과 번역 비판 등에 에너지를 투자/허비하는 이유이다.

어쨌거나 noinsider님의 생각은 "오역의 문제-남조선의 그 열악한 번역환경에서 나온 이런식의 문제들은 실천적 독서를 통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로 집약될 수 있겠다. 그리고 부수적인 예견: "(로쟈와 같은) 이런 류의 지식 소유자들은 앞으로 많아질 것이다." 동시에 "로쟈씨와 같은 지식인 유형은 대중들이 원전을 독해하는 순간 그 필요성이 없어질 것이다."('대중들'이 왜 '원전독해'에 목매달아야 할까? 혹은 '원전독해'가 가능할 때도 대중들은 여전히 대중들인가? 등의 의문이 막바로 떠오르지만, 여기서는 묻어두기로 하자.) 해서 나의 몫은 저절로 그 필요성이 없어질 때까지 (많아지거나?) 반동에 기생하며 남아있는 것이겠다. 그날이 지상의 모든 박테리아들이 소멸하는 날보다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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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04-0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 ^^

로쟈 2006-04-01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바로 들켜버렸습니다. 나름대로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yoonta 2006-04-0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글이 북조선에서도 모니터링되고 있었던건가요? 북한에 네티즌이 그렇게 많은줄 몰랐습니다..-_- 아마도 북조선에 동조하는 친북논객이거나..아니면 로쟈님에게 까인 번역가일듯..
글의 내용을 읽어보니 헛소리를 이렇게 장황하게 할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_-

"결국 좋은 번역이란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즉 좋은 번역은 기존의 해석을 반복하고 결국 기존의 사고를 반복해서 기존의 '사고틀'을 공고화한다. 오직 그것만이다. 좋은 번역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소유자들의 내부의 욕망은 단 하나다. 그것은 '반동'이다."

이 부분에서는 할말을 잃게 만드는군요..-_-

로쟈님에 대한 기본적 사항조차 모르는데서 그치는 것 뿐만아니라..번역이라는것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있는 분같네요..

로쟈 2006-04-0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북논객'이 한가하게 알라딘을 어슬렁거릴 거 같지는 않고, '까인 번역가'라면 더 심한 '욕'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실천적 독해의 전제는 상식적 수준에서의 정확한 번역이기 때문이다"라고 할 때(저도 '상식주의자'로서 전적으로 동감합니다만) '상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인 거 같습니다. 가령 'pop artist'를 ('top artist'로 잘못 보고) '최고의 예술가'라고 옮겨놓을 때, 이걸 용인될 수 있는 '상식'으로 보느냐, 마느냐(제가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것의 80%는 그런 건데요. 그런 지적이 '반동적'이라!). '최고 지도자'는 보다 관대한가 봅니다...

비로그인 2006-04-02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는 지금 껏 로쟈 누님(40세 미만은 저에겐 다 형님과 누님.ㅋ)이 남자 분이라고 믿어 왔는데.. 제가 왜 오해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로쟈님이 속이신 건가요?ㅋㄷ

로쟈 2006-04-0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이젠 저도 헷갈리네요. '로쟈'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비로그인 2006-04-0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서재에서 "아빠" 라는 단어로 검색해 봤슴다.ㅋㅋ 로자 님 왜 그러셨어요.ㅋㅋㅋ

로쟈 2006-04-04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뭘 어쨌길래 그러시온지요?^^

비로그인 2006-04-0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한 딸아이의 아빠이자 남편이" 되고 싶으시다면서요.ㄲㄲㄲㄲㄲ.=3=3=3=3=3=3=3

로쟈 2006-04-0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비밀이지만, 우리나라에도 동성부부란 게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6-04-0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지난번에 마저 다루지 못한 예술 관련서들을 호출하도록 한다. 신간이라고 나왔으면 무대인사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건 혼자 생각이고 미리 안면을 터두어야 머리속에 오래 담고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호출한 책들은 (혼자 생각에) '내놓은' 책들이다.

 

 

 

 

 

 

 

 

 

첫번째로 내놓을 책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음악, 회화, 그리고 예술>(동문선, 2006)이다. 원제는 'Deleuze on Music, Painting and the Arts'(2003)이다. 들뢰즈 전문가의 한 사람인 보그는(알라딘에서는 '로널드보그'로 검색된다) 우리에게 <들뢰즈와 가타리>(새길, 1995)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저자인데, 이후에 이번에 나온 책을 포함하여 <들뢰즈와 문학(Deleuze on Literature)>(2003), <들뢰즈와 시네마(Deleuze on Cinema)>(2003) 등을 한꺼번에 출간했다(이름을 붙이자면 보그의 '들뢰즈와 예술 3부작'쯤 되겠다. 보그의 최신간은 'Deleuze's Wake'[2004]이다). 얼마전에 이 세 권 중에서 'Deleuze on Music, Painting and the Arts'의 원서를 마지막으로 구했었는데, 이번에 번역본이 나와준 것(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이미 '들뢰즈의 미학'을 주제로 한 <사하라>(산해, 2006)도 얼마전 출간된 바 있고 해서 바야흐로 들뢰즈의 미학과 예술론에 대한 읽을 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느낌이 든다(나는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철학'과 '실험철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예술가/실험가 철학'). '들뢰즈와 음악'에 대한 연구서들도 최근에 더 나오고 있지만(가령 뷰캐넌 등의 책)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쪽은 영화나 미술이고, 특히 미술 방면으론 콜브룩의 입문서 <질 들뢰즈>(태학사, 2004)를 먼저 참조하신 후에 <감각의 논리>(민음사, 1995)를 옆에 끼고서 보그의 신간을 읽으시면 되겠다(내가 그럴 계획이라는 얘기이지만).   

 

역자는 '사공일'씨인데 관료출신의 경제학자와는 무관한 동명이인이고 후기를 보니 <들뢰즈와 가타리>(세종출판사, 2004)의 저자 정형철 교수의 제자이며 번역 용어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출판사가 흠없는 책들을 좀체로 내지 않는 동문선이라 미심쩍긴 하지만, 초면의 반가움을 더 증폭시켜줄 수 있는 책이기를 기대한다(대충 훑어본 바로는 기대 이상의 번역이다).  

 

 

 

 

 

 

 

 

 

동문선 얘기가 나온 김에 그동안 모른 체했던 책을 한 권 언급하자면, 프랑스 저명한 신화학자 조르주 뒤메질(1898-1986)의 대담짐 <대담>(동문선, 2006)이 출간됐다. 대담자는 학술전문 저널리스트인 디디에 에리봉. 에리봉의 대담집으론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와 곰브리치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 1997)이 이미 출간돼 있다(에리봉의 푸코의 전기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 푸코는 뒤메질의 제자이다). 내 기억에(푸코의 전기를 읽다보면 종종 언급된다) 뒤메질은 인도신화의 최고 권위자였는데(레비스트로스가 북미신화의 권위자였듯이), 자전적 <대담>이 그의 책으론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책이다. 그런 책들이 어디 한둘이랴만.

 

 

 

 

 

 

 

 

 

두번째로 짚어볼 책은 서성록 교수의 <한국 현대회화의 발자취>(문예출판사, 2006)이다. 한국 미술과 미술계에 문외한인지라 저자나 이번 저서가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저명한 미술평론가 오광수 교수와 함께 <우리 미술 100년>(현암사, 2005)을 출간한 바 있는 중견이다. 현대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오광수 교수의 <한국 현대미술사>(열화당, 2004)와 같이 읽어봄 직하겠다. 그런 미술사 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우리 젊은 화가들의 작업을 둘러보고 싶다면, <한국의 젊은 화가들>(다빈지기프트, 2006)에 눈길을 주어보시길.

 

두툼한 분량은 아니지만, '45명과의 인터뷰'란 부제대로 에누리 없이 "한국의 젊은 미술가 45명의 삶과 철학 그리고 예술 이야기를 대표작과 함께 수록"한 책이다. 소개를 더 옮겨오자면, 책은 "45인의 작가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여섯 개 항목의 질문을 통해,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살펴보았다. 나아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해 보고자 했다. 동시대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큐레이팅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할 목적으로 씌어진 책." 그러니까, 눈요기와 귀동냥을 위한 책이다.

 

  

 

 

 

 

 

 

세번째 찍어둘 책은 <옥스포드 세계영화사>(열린책들, 2006) '보급판'. 실상 양장본 책은 작년에 나왔었지만, 도서관을 위한 '그림의 떡'이었고, 이번에 나온 보급판은 나름대로 '저렴한' 가격이기에 장서용으로라도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 굳이 소개가 필요없는 책이지만, "전세계 80명 이상의 영화학자와 영화평론가들이 함께 만든 영화의 역사에 관한 백과사전. 1000쪽에 이르는 페이지와 1만 개의 색인 목록이 말해주듯 '세계 영화사'가 다루어야 할 항목들을 빠짐없이 수록했다"는 점에서 소장가치는 충분하다. 단, (나처럼) 데이비드 보드웰/크리스틴 톰슨의 <세계영화사>(시각과언어, 2000)를 이미 갖고 있는 경우에는 약간 망설여지기도 하겠다. 이런 경우엔 주머니 사정에 맡겨두면 되겠다. 국내 버전으론 김성태/임정택의 <세계영화사 강의>(연세대출판부, 2001)도 있다. 1000쪽이나 되는 영화사를 관람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적합해 보인다.  

 

 

 

 

 

 

 

 

<옥스포드 세계영화사>는 "현대 영화이론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책이면서도 전체적인 시각의 균형을 잘 유지해 특정 학파의 이론을 중심으로 씌어진 기존의 영화사 책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지역적으로도 유럽과 미국뿐 아니라 아프리카, 인도, 라틴 아메리카 등까지 아우르며 고르게 안배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에 대한 소개가 빠진 부분이 약간 아쉽다."(한국의 세계영화사의 바깥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줄 책들이 자료집들을 포함해서 최근에 계속 나오고 있다(중요한 건 이런 영화사들이 해외에도 소개되는 일이겠다). 이런 분야를  '쌈박하게' 정리해줄 분이 주변에 없는 게 아쉽다.   

 

 

 

 

 

 

 

 

 

덧붙여 한국영화의 현재를 점검해주는 책들로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의 '영화와 시선' 시리즈의 신간들도 최근에 출간됐다. <공동경비구역 JSA>(삼인, 2002)로 시작된 이 시리즈의 10번째 책은 역시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새물결, 2006)이고, 같이 나온 9번째 책은 <살인의 추억>(새물결, 2006)이다. 이 시리즈의 강점은 한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깊이있는 읽기를 시도한다는 데 있는데, 한편으론 우리 '영화담론'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넓이'에 주목하고픈 독자라면 <200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작가, 2006)에 눈길을 돌려 마땅하다.

 

 

 

 

 

 

 

 

 

"2005년 한 해 동안 국내에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34편의 작품을 선정하고, 각 영화에 대한 평론을 덧붙였다. 영화인, 영화 이론가, 영화평론가, 각 분야의 문화 예술 전문가, 출판.편집인으로 구성된 105명의 추천 위원을 위촉하여, 한국 영화 16편과 외국 영화 15편, 독립(단편) 영화 3편을 '2006 오늘의 영화'로 선정했다. 2006년 선정된 작품들 중 한국 영화 부문에서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17회)가, 외국영화 부문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15회)가, 독립(단편) 영화 부문에서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14회)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추천을 받은 감독과 영화를 목록으로 작성하여 부록으로 수록하고, 추천 위원들의 '선정 이유'도 함께 실었다"는 책.

 

 



 

 

 

 

 

네번째로 꼽아보는 책은 마틴 켐프의 <레오나르도>(을유문화사, 2006)이다. 2004년에 나온 책이 이렇듯 재빨리 번역/소개되는 것은 아무래도 <다빈치 코드>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지만, 저자가 옥스포드대학의 미술사학과 교수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회 등도 기획했다고 하니까 허술한 책은 절대로 아니겠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이 어떻게 예술과 과학을 탄생시켰으며,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같은 걸작들에 숨겨진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또 레오나르도의 다양한 이력을 추적함으로써, 그의 꿈과 힘 있는 패트론(후원자)과의 관계, 신과 인간, 자연에 대한 관점들을 풀어낸다."

 

한 외국저널의 서평이 간명하다: "레오나르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마틴 켐프는 창조적이면서 지적인 삶을 살았던 레오나르도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통합적으로 서술하였다. 마틴 켐프는 르네상스 거장의 경력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받은 임무, 그를 유혹했던 돈, 그가 섬긴 궁전에서의 임무, 잘 알려진 간결한 그림들이 갖고 있는 여담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그의 접근을 매혹적이고 계몽적이며 읽기도 쉽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로널드 보그의 책과의 수미상관을 고려하여 전방위 문필가 장석주의 비평서 <들뢰즈, 카프카, 김훈>(작가정신, 2006)을 고른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이 제시하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문학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저자의 사유는 '공무도하가'를 비롯해 이상,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이성복, 신경림, 황지우, 황동규 등과 이문과, 김훈 등 한국작가들의 시와 소설, 그리고 카프카를 종횡무진 아우른다. 지은이는 문학이 '나'와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현실과 역사, 더불어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사유체계를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단면들―타자, 시선, 욕망, 개인, 가족, 국가, 질병, 순수, 유목주의, 술, 스타일―을 통해 그 전체적인 국면을 들여다본다."

 

 

 

 

 

 

 

 

 

과거  출판사 편집/경영까지도 했었던 저자를 '비평가'가 아닌 '문필가'로 칭한 것은 비평가는 물론 시인, 소설가에다 에세이스트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전 5권의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시공사, 2000)이 그의 재기작이었다. 의외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소설창작론인 <소설>(들녘, 2002)로 돼 있다. 입소문이 난 책인가?). 아마도 그는 손으로 꼽을 만한 다산성을 자랑하는바, 이제까지 40여 권에 육박하는 책들을 출간했다. 물론 나의 독서력은 저자의 집필력을 따라가지 못하며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그의 책은 시집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문학과지성사, 1996)와 산문집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프리미엄북스, 1997) 등이 아니었나 싶다. 여유가 생기면, 작년에 나온 <풍경의 탄생 - 한국시의 이미지 계보학을 위해>(인디북, 2005) 등을 읽어보고 싶다. 물론 그 전에 <들뢰즈, 카프카, 김훈>을 손에 들겠지만...

 

06. 03. 30.

 

 

 

 

 

 

 

 

 

 

P.S. 덧붙이자면, 아주 오랜만에 장 필립 뚜생(1957- )의 소설이 번역돼 나왔다. 그의 2002년 신작 <사랑하기>(현대문학, 2006)이 그것이다(<텔레비전>(문학사상사, 1997) 이후 거의 10년만이다). 역자는 이번에도 그의 소설 <욕조>(세계사, 1991)를 소개했던 이재룡 교수이고, 분량은 180쪽 정도니까 역시나 경쾌한 중편 정도이다. 소개에 따르면, 뚜생은 작년 2005년에 <도망치기>란 작품으로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뚜생과 <사랑하기>의 불어본.

 

 

줄거리인즉, "디자이너인 '마리'와 마리의 애인인 '나'는 패션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 마리는 내가 키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짓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경미한 지진이 일어난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지진이 마리와 나의 관계를 어긋낼 것이란 예감을 한다"는 식이며, "노골적 성 행위를 뜻하는 원제목(Faire l'amour)에서 알 수 있듯, '육체적 충동과 욕망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랑의 파괴적 에너지가 허무를 낳고 소멸과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묘사했다. 소설의 배경은 도쿄이다.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로 명성을 떨친 작가 장 필립 뚜생은 일본 문단으로부터 '프랑스 스타일의 선(禪)문학'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는 자주 일본을 방문하고,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물렀는데, 2002년 발표한 <사랑하기>는 일본 체류시의 기억을 되살려 쓴 작품이다. (메디치상 수상작인 <도망치기>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아래 사진은 일역본. 덧붙이자면, 사랑도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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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30 22:42   좋아요 0 | URL
"출판사가 흠없는 책들을 좀체로 내지 않는 동문선"...헌데 꾸준하긴 엄청나게 꾸준한 것 같습니다.-.-;;

푸하 2006-03-30 22:5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편력(여정)이 긴 행렬을 이루네요.... 로쟈님 책 내신 거 있으세요? 미묘한 질문인가요?

瑚璉 2006-03-30 23:44   좋아요 0 | URL
그래도 동문선의 완역상주 한전대계는 좋은 시리즈였는데 말이지요.

로쟈 2006-03-30 23:43   좋아요 0 | URL
marcus님/ '동문산'쯤 될 겁니다!
푸하님/ 제가 더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다면 올해부터는 두어 권씩 나올 예정입니다.
壺裏乾坤님/ 저도 원래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출판사입니다(--;)

푸하 2006-03-31 15:0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여정이 기대되네요..... ^^; 이곳의 많은 자료들은 책출판하는 시점에서 안전할까요?

로쟈 2006-03-31 18:33   좋아요 0 | URL
'안전'이란 말씀은? '자료들'이 막바로 책이 되는 건 아니므로 그냥 내버려둘 계획입니다. 혹 다른 걸 물어보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