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이란 구절은 물론 T. S. 엘리엇(1888-1965)의 <황무지>(1922) 서두에 나오는 것이면서, 이제는 4월이면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시구이다. 흔히 프란츠 카프카 문학의 위업을 말하면서, 그가 26개의 알파벳 중에서 'K'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작가라 평하기도 하는데(그건 셰익스피어도 하지 못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 엘리엇은 자신의 이 명구절 때문에 일년 12달 중에서 4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어쩐지 4월에는 그의 서명이 새겨져 있는 것 같지 않으신지? 특히나 시 애호가나 시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노래로는 딥퍼플의 'April'과 사이먼&가펑클의 'April come she will' 정도가 떠오른다).

가령, 정은숙 시인의 한 칼럼도 이런 식이다: "내게 봄은 엘리엇과 함께 온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이 시인의 절규가 생각난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다’는 이 시인의 ‘황무지’ 일절은 내게 봄이라는 계절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신열(身熱)처럼 그렇게 봄은 다가오는 것이다." 굳이 신열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게도 봄은, 특히 4월은 엘리엇과 함께 온다(몇년 전부터는 장국영(1956-2003)과 함께 온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아졌겠지만, 이들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읽기/쓰기에 관한 빽빽한 일정들이 달력에 표시돼 있는 4월의 '잔인함'을 확인하노라면 새삼 엘리엇의 시구는 아직도 생생한 '현실'이다. 

"응, 요즘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고 있구나." 그리고는 처음 서두의 몇 줄을 읊어댄다. 그런 식으로 과거에는 청소년 드라마에서도 종종 대사로 나오기도 했던 대목을 여기에 옮겨본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워왔다.

 

내가 읽은 번역은 황동규 시인/교수의 번역이지만, 현재 엘리엇 관련서들은 모스크바에서 구한 영-러 대역본 선집을 제외하곤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라 인터넷에 떠도는 걸 가져온 인용 번역은 출처를 알 수 없다. 하여간에, 이 자리에서의 요는 'APRIL is the cruelest month'라고 한번 읊조리듯 읽어주는 것이다(엘리엇의 낭송도 인터넷에는 떠다닌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직역하자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사실 이건 너무 잔인한 표현인데, 1-12월이 모두 잔인하지만 그 중에서도 4월이 가장 잔인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로선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게 아니라 그냥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푸념을 좀 늘어놓은 다음에 좀 기다렸다가 '5월은 푸르구나!'로 넘어가는 게 낫겠다.      

 

 

 

 

요즘은 그런 거 같지 않지만, 예전엔 시인이라면 <황무지> 정도의 '난해시'는 읽고 해석할 줄 알아야 했다. 작고한 구상 시인의 <현대시창작입문>(현대문학, 1989)에서도 시인의 기본 교양으로서 황무지 읽기와 해설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이채롭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상식이 돼 있지만, 여하튼 <황무지>를 읽기 위해서는 엘리엇이 많은 영감을 얻어왔다다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정도는 미리 읽거나 같이 읽어줘야 한다(엘리엇 왈: "나의 <황무지>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시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성배 찾기와 어부왕 전설 등에 관한 유용한 연구를 담고 있는 제시 웨스턴의 <제식에서 로망스로>(문학과지성사, 1988)도 교양 필독서이다. <황무지> 정도를 읽고 토론하는 정도는 '교양' 범주에 속한다고(주석본 읽기를 포함해서) 거기에 동의할 만한 독자들은 갈수록 줄어들 듯하다(<황무지>가 게임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한).   

학부 2학년 때 비교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T.S.엘리엇과 한국문학'이란 주제의 팀발표를 맡은 인연도 있고 해서 엘리엇에 관한 자료들은 국내의 연구서들을 포함하여 나름대로 갖고 있지만 영문학도도 아닌 데다가 현재 자료들을 열람할 만한 여건도 아니어서 더 아는 체하는 대신에 여기서는 신정현 교수(서울대 영문과)의 '고전해제'(동아일보, 2005. 06. 02)를 옮겨오도록 한다. 다만 강조는 나의 것이다.   

T.S. Eliot

 

 

 

 

 

 

-1922년에 발표된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20세기 현대 문명에 갇혀 생명의 기운을 잃은 서구인의 자화상이다. 20세기의 기술혁명을 바탕으로 치러진 1차 세계대전은 양측 군인 사상자만 3500만 명에 이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죽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더 참혹하고 처절했던가? 작가는 시를 통해 스스로 만든 재앙의 굴레를 자신의 머리 위에 쓴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해부하고 있다.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일까? 북러시아의 들쥐처럼 집단자살의 충동에 시달리며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문명으로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은? 인간에게 내린 신의 축복, 문명을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든 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20세기 최대의 시인 엘리엇은 섬뜩한 이미지와 푸가풍의 반복적이고 다음성적인 리듬으로 끊임없이 이 물음을 곱씹고 있다.  

-황무지란 원래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한다. 그렇다면 20세기 문명은 왜 생명을 잉태할 수도, 생명을 길러 낼 수도 없게 되었나? <세티리콘>에서 따온 이 시의 서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열쇠다. 늙어 쪼그라들어 작은 병 속에 갇혀 추녀 끝에 매달려 살게 된 무녀 시빌에게 한 아이가 묻는다. “시빌, 너 무얼 원하니?” 시빌이 대답한다. “나는 죽고 싶어!”  

-아폴로 신은 무녀 시빌을 총애해 어느 날 소원을 하나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시빌은 먼지 한 줌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먼지알만큼 많은 삶을 내게 주십시오.” 그녀는 젊음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먼지알만큼 많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한히 오래 살고 싶었을 뿐, 젊음을 재창조하며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시빌의 모습과, 그저 많은 문명의 이기는 원하지만 그곳에서 행복과 희열을 얻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현대 서구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맞닥뜨린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엘리엇은 서구인의 삶에 서린 ‘무한한 늙음’과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깊은 절망을 보았다. 그러나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이었다. 시빌의 절망에는 아직 희망은 있다. 그녀는 죽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재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절망에는 희망이 없다. 그 황폐한 정신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 다닐 뿐, 재생의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황무지에 등장하는 겨울에 따스함을 쫓아 남쪽으로 가는 유한계급의 사람, 종교적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문명의 값진 유산을 허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류계층 속물,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성(性)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방탕한 여인, 상업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장사치, 구원의 기사를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거리의 여인 등 수많은 인물은 모두 황폐한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으로 절망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은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폐한 문명에 붙여진 것임과 동시에 젊음의 재창조가 없는 영겁의 삶에도 두려움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황폐한 정신에 붙여진 것이다.

덧붙여서, 역시나 동아일보(1996. 04. 28)에 게재됐던 엘리엇 관련기사를 옮겨온다(필자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의 전기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어서 유익하다.

-미국 미네소타대는 지난 56년 4월 30일 한 시인의 강연회를 위해 대학 전용 축구장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이날 모인 청중은 1만 5천여명에 달했다. 강연회의 주인공은 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시인 T.S 엘리엇(1888∼1965). 그는 이날을회상하며 "거대한 투우장으로 들어가는 투우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강연 모습은 서구문학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문인들에게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한 사람만을 고르라면 바로 엘리엇이 선택될가능성이 가장 높다. 금세기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그의 시 <황무지> 때문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워왔다 .


-5부 4백 33행으로 이뤄진 <황무지>는 딱 떨어지게 해석되는 시가 아니다. 1차대전 후의 '시대적 환멸과 허무사상'을 노래한 시라고 하는가 하면 '현대문명의 불모성'을 노래한 시라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불교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엘리엇 자신은 이같은 해석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쓴 시'에 불과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같은 다면성을 갖춘 <황무지>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지난 22년 출판된 후 새로운 시의 대명사로 통해왔다. 다양한 인용과 다채로운어법등을 통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기법의 시세계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대학 창립자이자 목사였으며 엘리엇은 엄격한 가풍 속에 방종과 쾌락을 멀리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로 자라났다. 하버드대에 입학한 그는 철학에 빠져들어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된다. 그는 1908년부터 런던에서 머물렀는데 미모의 무용수 비비언 헤이우드를 만나 결혼했지만그녀의 정신질환으로 결혼생활은 불행하기만 했다. 그는 1917년부터 9년간 로이드 은행 행원으로 일하면서 격무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큰 비약을 했다. 1920년 최초의 비평선집 <신성한 숲>을 펴내 비평가로서 위치를 확립했다. 여기서 그는 시란 시인의 개성을 떠난 독자적인 생명체라는 '개성 배제의 시론'과 시인의 감성은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돼야 한다는 '객관적 상관물' 이론을 펼쳤는데 이는 이후 구미비평계를 휩쓴 '신비평'의 기초가 됐다.

 

-엘리엇은 출판편집인으로서도 큰 활약을 했다. 그는 문예지 <크라이테리언>의 편집책임자로서 로렌스, 조이스, 헉슬리 등의 글을 실었으며 대형출판사 '페이버'사의 편집이사로서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했다. 한편 그는 극작가로도 활약해 <성당의 살인>, <가족의 재회> 등의 시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엇 문학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였다. 그는 8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 43년 장시 <네 사중주>를 출간했다. 영문학계에서는 엘리엇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것은 <황무지>이지만 그를 대표하는 걸작은 <네 사중주>로 보고 있다. 초기 시의 난해성을 극복하고 통일된 구조와 안정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원숙한 작품이라는 것. 엘리엇에게 노벨문학상수상을 안겨준 것도 <네 사중주>였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는 잇따르는 상훈(賞勳)속에 비서였던 39세 연하의 발레리 플레처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06. 04. 02.

P.S. 엘리엇에게 4월맞이 '눈도장'을 찍었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각자의 '잔인한 4월'과 맞닥뜨려야 할 시간이다. 그 시간이 '시간의 재(Ashes of Time)'가 될 때까지 <동사서독>(1994)의 구양봉(장국영)처럼, 머리 풀어헤치고(혹은 새로 밀고서) 떠날지어다. 이크, 적들은 벌써 와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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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무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03 00:46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대한 갑론을박을 다루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시와 함께 관련논문을 10편쯤 읽고서 작성한 것이다. 몇 가지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어 흥미로웠고 이해의 가닥을 나대로 잡을 수 있었다. 제목엔 '깊이 읽기'란 말이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깊이 읽기'를 위한 심호흡이자 워밍업 정도이다. 여유가 되면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다(물론 더
 
 
산손 2006-06-0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티리콘 ㅋㅋ 왜 모든 걸 영어식으로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것도 간단히 찾아보면 되는 데 ;; 여담으로 원래 <사티리콘 Satyricon>에서 인용한 어구 대신에 엘리엇이 붙이려고 했던 건 콘라드 소설 속 화자가 커츠 죽는 걸 이야기하는 부분이라고 하는데(마지막 부분이 horror! horror!) 에즈라 파운드 씨가 딴지 걸어서 바꿨다고 하네요. 이미 알고 계신지도 ;; 저기 사진에 있는 'annotated'에 나와 있습니다.

로쟈 2006-06-0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자들의 '티내기'죠. 그 정점은 <옥스포드 영문학사>일 겁니다. 'horror, horror...'는 <어둠의 속>을 원작으로 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서 말론 브란도(커츠)의 마지막 대사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