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강의가 해를 넘겨 내일 종강한다. 최근작 <넥석스> 읽기로 시작해서 인류 3부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피엔스><호모 데우스><21가지 제언>을 다시 읽었다. 지난 10년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고로 가장 많이 읽혔을 걸로 추정되는) 인문서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주목의 가치가 있다. 토론거리가 될 만한 주장과 제언도 풍부하다. 21세기적 사유의 한 브랜드라 할 만하다. 새로운 초인간 계급의 등장과 함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냉전 종식 이후의 지배적 합의)의 붕괴를 예견 내지 경고하는 <호모 데우스>의 한 대목을 옮긴다.

특별한 육체적·정서적·지적 능력을 가진 초인간이 출현해도 자유주의적 믿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초인간들이 보통의 사피엔스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무슨일이 일어날까? 초인간이 하등한 사피엔스 좀도둑의 경험을 담은소설을 지루해하고, 평범한 사피엔스는 초인간의 정사에 관한 멜로드라마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20세기 인간의 거대한 프로젝트(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하는 것)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풍요, 건강, 평화의 보편적 표준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21세기의 새로운 프로젝트(불멸, 행복, 신성을 얻는 것) 역시 포부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는 기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능가하는 것이라서, 새로운 초인간 계급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초인간들은 자유주의의 근본바탕을 포기하고 보통 인간을 19세기 유럽인이 아프리카인을 대한 것처럼 대할 것이다.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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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문학의 빛나는 재능, 비톨트 곰브로비치 읽기가 해를 넘겼다. 일정이 지연돼 지난달에 <페르디두르케>(1937)를 읽고 이달에 <포르노그라피아>(1960)와 <코스모스>(1965)를 읽게 되었다. 미성숙의 반란이라는 <페르디두르케>의 주제의식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가 관건. 출발점이 되는 단편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나중에 <바카카이>로 증보되었다)도 번역되면 좋겠다. 영어판 해설을 수잔 손택(민음사 표기는 손태그)이 썼는데, 손택의 대표작(<해석에 반대하여>가 <해석에 반하여>로 다시 나왔다) 제목을 비틀자면 곰브로비치의 문학은 (미성숙을 억압하는 모든 것의 이름으로서) ‘형식에 반하여‘라고 요약해도 좋겠다.

벌레와 곤충들이 하루 종일 먹이를 찾는다면, 우리는 온종일 형식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스타일과 삶의 유형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싸우기도 한다. 전차를 타고 가든 차를 몰고 가든, 재미있게 즐기든 휴식을 취하든 아니면 일을 하든, 우리는 언제나 형식을 찾고 그 형식 때문에 괴로워한다. 형식에 몸을 숙이거나 아니면 강제로 범하고 부러뜨려 버리거나, 아니면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게끔 몸을 내맡긴다. 아멘.
오! 형식의 힘이여! 나라들도 형식 때문에 죽는다.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형식은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어떤 것을 우리 안에 솟아오르게 만든다. 이것을 모르고는결코 어리석음, 악, 살인을 설명할 수 없다. 바로 형식이 우리로 하여금 가장 파렴치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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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그렇지만 지난해의 마지막 강의에서 읽은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의 한 대목이다. 츠바이크의 유작 <우체국 아가씨>는 그의 ‘유이한‘ 장편소설이다(<초조한 마음>이 다른 하나다). 중편(노벨레)이 주종목인 작가에게 장편소설이란 무엇일까가 내가 던진 질문이었고, <우체국 아가씨>는 그게 ‘오스트리아 문제‘일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초조한 마음>도 마찬가지다).

밑줄 그은 대목은 2부에 등장하여 여주인공 크리스티네의 파트너가 되는(연인이자 공범) 페르디난트가 전우였던(그리고 크리스티네의 형부) 프란츠에게 털어놓는 울분이다. 그는 1차세계대전에서의 참담한 경험으로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어찌 페르디난트뿐이랴. 그의 세대 전체가 그랬다는 것은 크리스티네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나치가 집권하고 또다른 세계대전을 앞둔 1934년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츠바이크의 심경도 겹쳐 읽힌다.

나는 내전이 어떤 것인지,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어. 내 눈이 먼다 해도 그 장면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 당시에 적군과 백군이 세 번씩이나 번갈아 가며 그 마을을 장악했는데, 소비에트 군대가 마을을 탈환했을 때 우리를 소집해서 시체를 파묻으라고 하더군.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까맣게 숯덩이가 되어버린 아이들과 여자들, 말들의 시체를 내 손으로 묻었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시체들은 한마디로 지옥 같은 공포그 자체였어. 진동하던 악취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그 후로 나는 소위 내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어. 내전을 치러야만 영원한 정의를 얻는다면, 그리고 그 정의의 대가로 살아 있는 인간을 죽여야 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런 정의를 위해 싸우지는 않을 거야. 나는 이제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아. 관심도 없어, 나는 볼셰비키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아. 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냐. 나는 아무래도 좋아, 나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어. 내가 봉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정부는 바로 나 자신이야. 다음 세대가 행복해지든지 말든지, 공산주의 국가가 되든지 파시스트 국가가 되든지 아무 관심 없어. 내 관심은 오로지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는 것뿐이야.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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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강의에서 읽으며 오랜만에 들뢰즈와 재회하고 있다(꽤 오랫동안 적조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들뢰즈의 탁견은 들뢰즈 철학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요긴하다. 프루스트론에 근거하여 말할 때 들뢰즈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술철학자다(철학예술가라고 불러야 할까?)...

예술은 본질에 관한 능력인 순수 사유에 호소한다. 예술이 우리에게 되찾도록 해주는 것은 본질 속에 휘감겨 있는 시간들, 즉 본질로 감싸여진 세계 속에서 태어나는 시간들이다. 이 시간들은 영원과 동일하다. 프루스트에게서 초시간적인 것이란 탄생의 상태에 있는 이 시간과 이 시간을 되찾아 내는 예술가로서의 주체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예술 작품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술 작품은 최고의 기호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의미는 근원적인 복합, 진정한 영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속에 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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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강의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2월에 한 차례 더 다룬다). 사르트르가 제기한 세 가지 질문 가운데, 첫번째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오늘 다룬 주제. 원초적인 질문과 함께 올해의 여정도 닻을 올렸다...

작가란 사랑이라는 말과 미움이라는 말을 <솟아나게 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말들과 함께, 아직도 제 감정을 정리하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과연 사랑과 미움이 <솟아나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스스로 알고 있다. 그는 또한 브리스 파랭이 말했듯이 말이란 <탄약을 장전한 권총>인 것을 알고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권총을 쏘는 것이다. 작가는 물론 침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총을 쏘기로 작정한 바에야, 어른답게 과녁을 노리고 쏘아야지, 어린애처럼 오직 총소리를 듣는 재미로 눈을 감고 무턱대고 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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