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전해들은 것이지만 한국문학의 '전복적 상상력' 혹은 '수상한 활력'에 대한 심포지엄이 개최된다고한다. 문단의 동향에 관심을 가져온 이라면 대략 어떤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다. 발표문들은 아마도 겨울호 계간지에 실릴 듯도 한데, 개인적인 의견은 그때 붙이도록 하겠다. 

경향신문(06. 10. 26) '전복적 상상력’ 심포지엄, 한국문학 전위 ‘수상한 활력’ 찾기

사진 위부터 황병승, 강영숙, 강정씨.

2000년대 한국 문학을 향해 흔히 던지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자리가 마련된다. 계간 ‘실천문학’이 2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하는 심포지엄 ‘한국 문학과 전복적 상상력’이 그것이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은 물론 문학판 안에서조차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변화한 한국 문학의 전위에 대해 평가해보는 자리다. ‘문학’이라는 아성, 특히 리얼리즘·모더니즘 등 외부 세계에 어떤 현실·진리가 존재하고 문학은 그것을 재현한다는 식의 근대문학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21세기 문학을 규정하려는 평론가들의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심포지엄의 총론 발제를 맡은 평론가 손정수씨(계명대 교수)는 “예술로서의 문학과 상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구분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서는 희미해진 반면, 제도적 차원에서만 뚜렷하다”며 “특히 예술로서의 문학은 소규모 취미공동체 내에서만 유통되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손씨는 여기에 ‘교육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범주를 하나 더 보태는데 이는 근대문학 초창기에 계몽 또는 교양의 역할을 하다가 오늘날에는 홈쇼핑 방송에서 논술교재용으로 판매하는 동서양 고전처럼 상품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손씨에 따르면 공공적 성격이 강한 상품·교육으로서의 문학은 자본주의체제에서 자립하는 반면, 사적 활동인 예술로서의 문학은 정부지원에 의해 지탱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그렇다면 예술로서의 문학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손씨는 “문학의 정치성이라는 근대문학의 전제는 사라졌다”면서 그 대신 “2000년대 이후 문학의 종말을 둘러싼 음산한 풍문들 속에서도 수상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지칭하는 작품은 편혜영·김애란·김숨·백가흠·김유진 등의 소설, 황병승·강정·장석원·김행숙·이장욱 등의 시이다. 이 작품들은 ‘분석자의 시선이 사라지고 피분석자의 언어만이 드러나 있는 것’, 즉 관찰·묘사·해석·대안 등 기존 문학적 관습에서 벗어난 것이다. 손씨는 여기서 미래 문학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인터넷 블로그와 같은 자발적 글쓰기, 공동체의 구성원이 하고 싶은 말을 작가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말하는 방향”이라는 전망이다.

한편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를 분석한 평론가 신형철씨(서울대 강사)는 2000년대 ‘뉴웨이브’라 명명된 시의 핵심이 ‘자아에 대한 발본적 반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서정시와 생태시를 가능하게 했던 전인적 ‘자아’ 대신, 분열되고 해체된 ‘주체’가 시에 등장했다는 뜻이다. ‘죽을 때까지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으리’(황병승의 ‘시코쿠’), ‘토끼는 달리면서 자꾸만 토끼 아닌 것이 된다’(강정의 ‘들판을 토끼’) 등의 시구가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신씨는 “‘정상’의 시선에서는 변태와 괴물, 환상과 엽기일지 모르지만 ‘금지에의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의 거절’만이 가능한 시대에 탈고백, 반계몽, 무질서가 갖는 전복적 미학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에서 평론가 심진경씨(서강대 강사)는 민족과 국경이 사라진 전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그려낸 소설로 강영숙의 장편 ‘리나’(랜덤하우스)와 한유주의 작품집 ‘달로’(문학과지성사)를 든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진 1990년대의 작가들이 인도·티베트·몽골·중국 등 해외체류경험을 통해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정서를 그렸다면 강영숙과 한유주는 더이상 자본주의 아닌 곳이 없는 현실에서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만들어낸다. 심씨는 “강영숙의 주인공 ‘리나’는 단순한 탈북자가 아니라 세계의 여러 국경을 떠도는 이주자이며 한유주의 화자는 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 기억에 대한 기억만이 가능한 신세대의 표상”이라고 밝혔다.(한윤정 기자)

06. 10. 26.

P.S. 컬쳐뉴스에서 실제 진행된 심포지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 2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된 계간 『실천문학』 심포지엄에서 손정수 문학평론가가 총론을 발표하고 있다

컬쳐뉴스(06. 10. 30) 한국문학의 '내파력'은 어디서 오는가?

편혜영, 김애란, 김숨, 강영숙, 백가흠, 황병승, 강정, 장석원 등 소위 요즘 잘나가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의 작품은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과 같은 전통적 문학 범주로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동시대 작가로서 공통된 경향성을 보이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문학에 따라다니는 공통된 수사가 있다. 바로 ‘전복적 상상력’이 그것인데, 기존의 문학적 형식이나 내용의 틀을 깨트리는 이 ‘전복적 상상력’은 2000년대 문학이 가진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계간 『실천문학』은 이번 겨울호 발간에 앞서 2000년대 한국문학이 지닌 이 같은 ‘전복적 상상력’을 보다 냉철히 성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 10월 27일(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된 문학 심포지엄 ‘한국문학과 전복적 상상력’은 2000년대 문단에 제출되고 있는 시와 소설에서 발견되는 ‘전복적 상상력’이 한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인가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격론의 장이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총론 ‘한국문학의 전복적 상상력’과 소주제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 읽기’,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 읽기’로 진행됐다. 심포지엄 총론을 맡은 손정수 문학평론가는 「‘전복적 상상력’을 전복하는 상상력」이라는 발제에서 “2000년대 이후 문학의 종말을 둘러싼 음산한 풍문들 속에서도 시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수상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이 새로운 경향은 귀족적이라고 비판되곤 하는 모더니즘 내러티브의 순수한 추상화를 향한 초월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의 길을 걷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최근의 문학 작품에서는 증상에 대한 처방이 아니라 증상만 드러나는 경우가 빈번하다”면서 때문에 “누구나 문학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인터넷 블로그와 같은 자발적 글쓰기의 형식은 미래적 글쓰기의 존재방식의 한 측면을 암시”한다고 밝혔다. 결국 “기존의 문학 관념을 벗어난 곳에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놓여 있”으며, “문학의 현재적 존재방식 자체를 전복 혹은 변화시키는 상상력, 즉, 텍스트 차원의 ‘전복적 상상력’을 전복하는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토론에서 “문학의 전복성은 주변성이 아니라 중심의 가운데에서 그것을 해체하거나, 중심의 중심성, 척도의 정당성 자체를 뒤흔드는 혁명성에 있다”면서 “문학이, 문단이 제도화된 상황에서 인터넷을 통한 자발적 글쓰기가 아마추어리즘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서영인 문학평론가는 “근래에 들어 문학의 새로움을 증명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이전의 원리들에 의거해 설정되고 있다”면서 “지금의 문학이 이전의 것과 다르다면 그리고 그 이전의 문학 역시 새로운 것으로 명명된 바 있다면, 지금의 새로움을 말하기 위해서는 좀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읽기’를 분석한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2000년대 한국시의 뉴웨이브’에 대해 “새로워서 좋다”가 아니라 “좋은데 새롭다”고 전제하면서, “뉴웨이브의 핵심은 ‘나’에 대한 발본적 반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뉴웨이브”들을 “‘상투적인’ 서정시”들과 구분하면서 “그들은 ‘나’의 단독성을 보증해주지 못하는 세계에서 ‘자아’라는 헛된 정체성(동일성)과 작별”하고 “세계 여기저기에서 ‘나’를 재확인하는 서정적 여행을 그만”두고, “‘나’의 진실을 찾아 비서정적, 탈서정적 여행을 떠난다”고 분석했다.

신 평론가는 “많은 사람들이 뉴웨이브의 시가 내용 없고 질서 없는 장광설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시 독자의 이반을 초래하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이 세상의 깨달음과 지혜라는 것들이 대개 엇비슷하게 닮아있다는 사실에 피로를 느끼는 독자들은 이들의 시에서 어떤 역설적인 가능성을 읽어내기도 한다”면서 “탈-고백, 반-계몽, 무-질서가 궁극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분간 이 미학들의 전복성은 소진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래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한국 시단에 반향을 일으킨 권혁웅 문학평론가는 토론에 앞서 “미래파라는 말은 텅 빈 명명이자 일종의 여백”이라며 “이 여백을 통해 실재하는 것들의 자리가 조금이나마 드러난다면 그것으로 이 용어의 쓸모는 다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황병승에게 이성복이 없었다면, 장석원에게 김수영과 황지우가 없었다면, 강정에게 함성호와 진이정이 없었다면 (중략) 이들의 출현은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라면서 “이들의 시가 전복적인 것은 그 전대의 영향을 미묘하게 변형하고 비켜가고 극단화해서 마침내 새로운 차원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성혁 문학평론가는 신형철 평론가가 ‘좋은데 새롭다’는 것을 마케팅 미학인 ‘새롭기 때문에 좋다’와 구분지어 명명한 것과 관련해 “좋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사용가치가 없다면 교환가치도 가질 수 없다”며 “발표자는 교환가치의 불모지인 문학마저 ‘새롭기 때문에 좋다’라는 마케팅 미학에 흡수된 양상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 읽기’에서 심진경 문학평론가는 민족과 국경의 경계가 사라진 전지구화 시대, 미디어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그리고 있는 강영숙의 장편소설 『리나』와 한유주의 단편집 『달로』를 통해 ‘허공에서 글쓰기’라는 문학적 경향을 읽어낸다.

심 평론가는 “이들 소설의 인물들은 단일한 기원이나 정체성을 주장하기 보다는 세계를 스쳐지나가듯 여행하면서 유령처럼 희미하게만 존재한다”며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견인해왔던 현실적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공중부양하는 이들 소설에서 ‘허공’은 새롭게 발견한 문학적 공간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허공에서 글쓰기는 다국적 기업의 논리가 지배하고 미디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경험하게 된 후기자본주의적 현실과 그리 멀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허공은 무중력의 탈현실적 공간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명철 문학평론가는 “『리나』는 근대적 경계로부터 발산되는 문제들에 맞서는 ‘포월의 서사’가 아니라 악무한의 현실로 빚어진 관념의 공간-국경을 넘는 ‘이월의 서사’에 자족할 뿐이며, 『달로』 역시 주체와 그 주위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시간의 물질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이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났다면, 벗어난 이유들에 대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강민 문학평론가는 “모든 것은 매개된 기억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한유주의 소설은 과연 2000년대 소설의 새로운 희망일까?”라고 물으며, “2000년대 작가의 진정한 새로움이란 탈주체, 탈근대를 표방한 1990년대 미시서사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 속에 새롭게 태어난 것일 수박에 없는데, 한유주의 경우 1990년대 문학의 연장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라 2006-10-2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정 시인 사진은 처음 보네요.
예전에 한번 본 '비행선'이라는 밴드의 보컬하고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같은 사람이군요..;;
성기완 시인도 그렇고 참 다재다능한 사람들이네요

로쟈 2006-10-2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로만 버티기도 힘들다는 게 다재다능의 이면이 아닐까요...
 

한겨레의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번역가의 괴로움'이란 칼럼을 읽게 되었다. 제목 자체가 최근에 문제된 '대리번역' 파문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건 칼럼을 읽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가브리엘 마르케스 전문 번역가로 유명하다는(아마도 마르케스의 노벨상 수상에도 일조했을 듯싶다) 그레고리 라바사를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

 

 

 

 

<백년의 고독> 혹은 <백년 동안의 고독> 영역본의 그의 작품이라는데(국내에도 여러 번역본이 출간돼 있다), 마시멜로보다는 라바사에 흥미를 느껴서 몇 가지 검색을 해보았다. 한겨레의 칼럼과 함께 재작년 뉴욕타임즈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0. 24) 번역가의 괴로움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의 대리번역 또는 이중번역 논란으로 모처럼 번역가들한테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덕분에 번역가들의 어려운 처지도 약간 드러났으나, 아무래도 나쁜 인상이 더 클 것 같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번역가들이 주목받는 건 흔히 부정적인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서다. 독자들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고 느낄 때나 ‘도대체 누가 번역했어’ 하며 이름을 확인하는 게 보통이다. 번역의 어려움을 알 만한 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도 원전을 강조하고 번역서와 번역가를 낮춰보는 경향이 꽤 있다.

하지만 훌륭한 번역가가 문화에 이바지하는 바는 셈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 점은 미국의 유명 번역가 그레고리 라바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22년 쿠바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60년대 초부터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쓰는 작가 약 30명의 작품 60권 정도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남미 문학이 이렇게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70년에 번역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은 또하나의 훌륭한 창작품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 말엔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라바사에게도 번역은 쉽지 않은 작업인 듯하다. 책 전체를 미리 읽지 않고 읽어가면서 번역하기로 유명한 그는 지난해 쓴 회고록 <이것이 반역이라면>에서 번역을 모순적으로 규정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그저 ‘단어들을 따라가기’로 묘사하다가, 다른 대목에서는 ‘개인적인 선택에 근거한’ 아주 주관적인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번역은 미묘하고 까다로운 일이다. 독자들이 이런 어려움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만, 책을 잡을 때 ‘이름 없는 봉사자’인 그들을 한번 생각해주는 정도의 관심은 필요할 것이다.(신기섭 논설위원)

A Translator's Long Journey, Page by Page

By ANDREW BAST

Published: May 25, 2004

On Gregory Rabassa's crowded bookshelves is a first edition of "Rayuela," the experimental 1963 novel by the Argentine novelist Julio Cortázar. Mr. Rabassa had just finished his Ph.D. in Portuguese in the mid-1960's when an editor at Pantheon — who had noticed his work editing a failed literary magazine at Columbia University — asked him to translate Mr. Cortázar's book from Spanish into English. Without having read what has been called a "fiendishly esoteric" novel, Mr. Rabassa sat down and typed a draft in English, word by word. In 1967 Mr. Rabassa's work, titled "Hopscotch" in English, won the first National Book Award for translation.

"I've got 50 of them behind me," Mr. Rabassa said, reflecting in the Upper East Side apartment he shares with his wife, Clementine. He has a slight build and white hair that he wears like a crown. He is surrounded by novels written by literary giants like Jorge Amado, Mario Vargas Llosa, José Lezama Lima and Gabriel García Márquez, the original Spanish or Portuguese edition beside his published English translation.

Now, at 82, Mr. Rabassa is finally going to publish his own first full-length book, "If This Be Treason: Translation and Its Dyscontents," a playful reflection on his life's work that New Directions is planning to bring out next spring.

"My thesis in the book is that translation is impossible," Mr. Rabassa said. "People expect reproduction, but you can't turn a baby chick into a duckling. The best you can do is get close to it."

If that is true, then Mr. Rabassa has gotten about as close as one can. He is widely considered one of the greatest practitioners of his craft. "Rabassa's great gift is to find the music in English that is true to the language of a wide range of writers in Spanish," said Dan Simon, the founder of Seven Stories Press, which has published some of Mr. Rabassa's translations. "Had Rabassa become a diplomat or brain surgeon, we could easily imagine not having readable translations of Cortázar and García Márquez."

Yet for all the accolades, translation is still a difficult and poorly understood art. Often the translator's name will not even appear on the cover of the book, Mr. Simon said, yet "a poor translation of a text kills it in the market."

Walter Benjamin, the German literary critic, once wrote, "No translation would be possible if in its ultimate essence it strove for likeness to the original."

Mr. García Márquez has said that Mr. Rabassa read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sat down and then rewrote it in English. (He also said that Mr. Rabassa's translation improved on the original.)

But Mr. Rabassa contends that rewriting is not at all what he does: "I'm reading the Spanish, but mostly I'm reading it in English, and it comes out that way.

"When I talk about it, I say the English is hiding behind his Spanish. That's what a good translation is: you have to think if García Márquez had been born speaking English, that's how a translation should sound."

In the case of Cortázar, Mr. Rabassa developed a relationship with him, and they became good friends, spending days and nights listening to 78's of Count Basie and Lester Young. Mr. Rabassa translated Luis Rafael Sánchez and lounged with him on the beaches of Puerto Rico. And after translating "Seven Serpents and Seven Moons" by Demetrio Aguilera-Malta, a former Ecuadorian ambassador to Mexico, he ended up with one of the author's paintings hanging on his apartment wall.

Yet Mr. Rabassa has also produced brilliant translations without developing any relationship with the author. Jorge Armado and Mr. García Márquez wanted nothing to do with their books in English.

Mr. Rabassa said he typed his translation of Mr. García Márquez's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page by page, just as he did with Cortázar's novel. Yet unlike his blind excursion with "Hopscotch," Mr. Rabassa had already read Mr. García Márquez's magical epic about the Buendía family, before he tried the translation. "I knew it was a damn good book, but it wasn't as much fun knowing all about it," he said.

Sitting in his armchair, nibbling on a greek pastry, Mr. Rabassa explained that titles pose their own challenge. He translated the 19th-century Portuguese classic "Memórias póstumas de Bráz Cubas" by Joaquim Maria Machado de Assis, which literally means "The Posthumous Memoirs of Brás Cubas." When Noonday Press issued the novel with the title "Epitaph of a Small Winner," Mr. Rabassa complained.

"You don't mess around with a classic," he said. "That's like calling `Madame Bovary' the story of a middle-class adulteress." (Oxford University Press published the book with Mr. Rabassa's translated title in 1997.)

Half of Mr. Rabassa's book will consist of reflections on each of the many authors he has translated, and half will be a memoir of how he ended up as a translator. The epilogue, he said, will be printed unfinished, as "translation is never finished."

Mr. Rabassa was born in Yonkers in 1922. His father was a Cuban sugar broker, but, he said, "the old man didn't speak much Spanish around the house." The young Mr. Rabassa studied French and Latin in high school; then at Dartmouth, he said, he "began collecting languages." There he studied Portuguese, Russian and German. In conversation, his voice wanders seamlessly among the five he still speaks.

"I'd dabbled in Italian," Mr. Rabassa said. "But then I bought a beautiful edition of Dante. I used Spanish and Portuguese — they're so similar to Italian — as I went along, substituting the real Italian words, and finally I was talking Italian."

In 1942 Mr. Rabassa volunteered for the Army and, because of his language skills, ended up in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Mr. Rabassa translated encryptions, or what he called English into English, and he also conducted interrogations.

When he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after spending time in Italy and Northern Africa, Mr. Rabassa lived on Morton Street, watched Charlie Parker play in Greenwich Village and wrote poetry. He studied for his master's in Spanish at Columbia, then, tired of the language, kept on with his studies but finished his doctorate in Portuguese. At a cocktail party Mr. Rabassa met an administrator at Queens College and he ended up being hired as a professor there. He still teaches the freshman lecture course Hispanic Literature in Translation.

"When I began teaching," he said, "I was the same age as my students, and I still labor in the delusion. So it's a good, youthful operation."

Mr. Rabassa says that although he is translating a new generation of Hispanic writers, little has changed since he translated the giants. Despite the differences in writing styles, the way he approaches the text is essentially the same.

"They're all so different, the ones I did," he said. "I think it works because I don't think I have a translation style. It's a positive feeling I have about them. I find a lot of instinct in what I do. You have to just hit it right. I'm never sure whether something is right, but I know damn well when something is wrong."

06. 10. 14.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itournelle 2006-10-24 01:48   좋아요 0 | URL
* 퍼 갈께요...요즘 정지영씨와 관련되어 있는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맘이 찹작함을 많이 느끼는데, 괜찮은 글인 것 같습니다.

이네파벨 2006-10-24 10:11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갈께요...고맙습니다.

sommer 2006-10-24 17:29   좋아요 0 | URL
익명의 내면성을 외재화하는 게 번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마치 헤겔의 변증법을 외재화된 자기 의식으로 귀환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고찰로 파악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기인 2006-10-24 21:46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갑니다. 공익하면서는 번역 알바나 할까 생각중인데, 페이와 노고를 대비해보면 정말 답 안나오는 일이기도 해서... 고민중입니다. 다시 사교육계에 투신(?)해야 하나 하고 ㅠㅜ

로쟈 2006-10-24 23:00   좋아요 0 | URL
호의적인 반응들을 보여주셔서 다행입니다. 번역, 더 나아가 '좋은 번역'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대우가 좀 달라져야 한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계몽'에 가장 긴요한 수단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인 연극'에 이어지는 글이다. ‘도착적인 새끼 악마’는 'Imp of the Perverse'의 번역이며, 국역본 <향락의 전이>에서 이 절은 '고상한 '성도착의 도깨비''란 제목을 달고 있다(내가 갖고 있는 건 초판이어서 개역판에는 변화가 있는지 모르겠다). 

 

 

 

 

좀더 면밀히 고찰하면, 귀부인-대상의 접근불가능성은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을까? 피해야 할 원칙적인 실수 증의 하나는 이 접근불가능성을, 우리는 그 열매가 금지되는 한 그것을 탐낸다는 식의, 단순한 욕망과 금지의 변증법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혹은, 다음과 같은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공식을 따라서 그렇게 환원하는 일이다.  

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 

"…성애적 욕구의 심리적 가치는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쉬워지자마자 감소한다. 리비도를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장애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족에 대한 자연적 저항이 충분하지 않았던 곳에서 항상 사람들은 사랑을 즐길 수 있기 위해 인습적인 장애물을 설치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궁정식 사랑은 그저 가장 급진적인 전략의 하나로 나타날 뿐인데, 그것은 곧 대상을 획득불가능하게 만드는 관습적 장애물을 설치하여 대상의 가치를 드높이는 전략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라캉은 세미나 20 <앙코르>에서 외관상 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성적 관계의 부재를 대체하는 가장 세련된 그 방법은 그 길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가장하는 것이다.”(라캉, <앙코르>, 불어판, p.65)

따라서 요점은, 대상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부가적인 관습적 장애물을 우리가 설치한다는 것, 단지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외부적 장애물은, 그 장애물이 없다면 대상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환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귀부인-물(Lady-Thing)의 장소는 원천적으로 텅 빈 곳이다. 그녀는 그 주위로 주체의 욕망이 구조화되는 일종의 블랙홀로 기능한다. 욕망의 공간은 상대성 이론의 공간처럼 구부러져 있다. 대상-귀부인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은 간접적인, 우회적인, 구불구불한 길 뿐이다. 곧장 직진해서 가면 우리는 반드시 목표를 잃는다. 이것이 라캉이 궁정식 사랑과 관련하여 “심리적 경제에서 우회의 협상에 귀속시켜야 하는 그런 의미”를 환기시켰을 때 염두에 둔 것이다.  

정신에서의 우회는 쾌락원칙의 영역에서 조직되는 모든 것과 현실의 구조로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모든 것 사이의 교섭을 조절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액포(vacuole, 液胞)의 영역을 그 자체로 눈에 띄게 만들기 위해 조직되는 우회와 장애물이 또한 존재한다…… 궁정식 사랑과 관련된 테크닉들은 - 그리고 그것들은 무엇이 때로 사실fact이 되는가를, 이러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고무 속에서 성적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지각할 수 있게 한다 - 억제, 미결정, 방해된 사랑(amour interruptus)의 테크닉이다. 궁정식 사랑이 자비의 선물(le don de merci)이라고 신비롭게 언급된 것 이전에 설정하고 있는 단계는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 프로이트가  <세 개의 에세이(Three Essays)>에서 전희(前戱)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했던 용어로 표현된다.(라캉, 앞의 책, p.152)  

 

 

 



그런 이유로, 라캉은 왜상(歪像; anamorphosis)의 모티프를 강조한다. 즉 대상은 그것의 측면에서, 부분적이고 뒤틀린 방식으로, 그 자신의 그림자로서 보여질 때에만 지각될 수 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단지 텅 빈 공동만을 보게 될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시간적 왜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상은 끊임없는 연기[지연]를 통해서만, 그것을 확인[참조](reference)할 수 있는 지점이 부재하는 상태로서만(as its absent point of reference) 획득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상은 말 그대로 창조된 어떤 것인데, 그 대상의 장소는 에워싸여져 있으며, 그 대상은 [주체의] 우회, 근접, 성공 일보직전(near-miss)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창조된다. 승화가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라캉적 의미에서의 승화는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적 의미의 승화와는 달리] 대상이 물의 위엄으로 승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승화는 일상적 현실의 부분인 어떤 대상이, 불가능한 물의 장소에서 발견될 때 발생한다. 인위적 방해물들이 기능하는 곳은 이 곳이다. 방해물들이 우리가 어떤 평범한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갑자기 막는다. 그 방해물들이 대상을 물의 지위를 대리하는 것으로 상승시킨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 ‘금지된 것’으로 바뀌는 방식이다 : 이 변화는 물과 인위적인 방해물들 때문에 접근 불가능하게 된 어떤 실정적인 대상 사이의 단락(短絡; short circuit) 때문에 일어난다.

접근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귀부인이라는 전통은 살아 있고, 예컨대 우리 세기의 초현실주의에서 더욱 그렇다. 그것은 루이스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상기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거기서 한 여성은 일련의 불합리한 트릭을 통해 그녀의 늙은 애인과의 성적 재결합의 순간을 끊임없이 지연시킨다(예컨대 남자가 그녀를 결국 침대로 데려갔을 때, 그는 그녀의 잠옷 속에서 그녀를 완전히 벗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많은 버클이 달린 구식 코르셋을 발견한다). 영화의 매력은 근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한계와 사소한 경험적 장애물 사이의 바로 이 터무니없는 단락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궁정식 사랑과 승화의 논리를 그 가장 순수한 형태 속에서 발견한다. 어떤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이나 행위는 일단 그것이 물(Thing)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 접근할 수 없거나 성취 불가능한 것이 된다. 물은 쉽게 닿을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체 세계는 어떻게든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측량할 수 없는 우연성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데 순응해왔다.  

브뉘엘은 이러한 역설적 논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단순한 욕망을 충족하는 것의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그의 모든 일련의 영화들은 이러한 모티프를 변주한다. <범죄에 대한 수필(The Criminal Life of Archibaldo de la Cruz)>에서 주인공은 간단한 살인을 하기를 원하지만 그의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추방당한 천사(The Exterminating Angel)>에서는 파티를 마치고 난 일군의 부자들은 문턱을 넘어 그 집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에서 두 커플은 함께 식사를 하기를 원하지만 예기치 않게 생기는 복잡한 일들이 항상 이 단순한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이제 통상적인 욕망과 금지의 변증법과 관련하여 무엇이 차이를 결정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금지의 목적은 대상으로의 접근을 보다 어렵게 만듦으로써 대상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자체를 물(物)의 수준으로, 그것을 중심으로 욕망이 조직되는 ‘블랙홀’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라캉은 정당하게도 통상적인 승화의 공식을 뒤집는데, 그 공식이란 리비도를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에서 이러한 욕구와 명백한 관련이 없는 대상으로 이동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예컨대 파괴적 문학비평은 승화된 공격성이 되고, 인간 육체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는 승화된 관음증이 되는 등등 그런 식이다. 반대로 라캉이 승화로써 의미하는 바는 리비도를 ‘쓸모없는’ 물의 공동에서, 물의 자리를 점유하는 순간 숭고한 속성을 획득하는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궁정식 사랑에서 귀부인의 역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결국 우회의 역설이다. 우리의 공식적 욕망은 우리가 그 귀부인과 자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우리의 소망에 관대하게 굴복하는 귀부인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귀부인으로부터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은 단지 또 다른 새로운 명령이고, 또 한 번의 연기(延期)일 뿐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신은 그 자신의 부정한 성적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한 난봉꾼의 우화를 소개한다. 그러나 그가 간통에 대한 대가로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그가 결국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게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귀부인의 충실한 하인이라면, 선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아마도 그는 귀부인에 대한 그 자신의 욕망을 즉각적으로 만족시키기보다는 교수형을 더 선호하리라. 그러므로 귀부인은 하나의 독특 단락(段落)으로서, 욕망의 대상 그 자체가 그 자신의 목표달성을 방해하는 힘과 일치하는 독특한 단락으로서 기능한다. 어떤 면에서, 대상은 그 자신의 퇴거이자 철회인 것이다.

우리가, 종종 언급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되었던, 여성의 ‘남근적’ 가치, 즉 ‘여성=남근’이라는 라캉의 동일화를 인지해야만 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 의지해서이다. 말하자면, 똑같은 역설이 거세의 기표로서의 남근적 기표를 특징짓는다는 말이다. ‘거세란, 향락이 거절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 결과, 향락이 욕망의 법이라고 하는 뒤집혀진 사다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캉, <에크리 선집>, p.324)

이러한 ‘경제적 역설’은 얼마나 그럴 듯한 것인가, 욕망의 기계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주체는 향락을, 그 무슨 고귀한 대의(Cause)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향락]에 접근할 수 있기 위해서,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인가? 혹은 - 동일한 역설에 대한 헤겔의 공식을 인용하자면 - 어떻게 우리는 동일성을 그것을 상실하는 것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가? 이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남근 즉 향락의 기표가 동시에 거세의 기표이어야만 한다는 것, 즉, 하나의 동일한 기표가 향락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상실을 의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향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바로 그 작인이 우리로 하여금 향락을 거부하게 만드는 일이 가능해진다.

다시 귀부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귀부인을 서양의 형이상학적 열정의 의인화로 간주할 수 있으며, 특수한 실체 혹은 대상을 모든 존재의 근거로 격상시키는 형이상학적 오만의 과도하다 못해 거의 희화(戱畵)적인 사례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좀더 면밀히 고찰해본다면, 무엇이 이러한 형이상학적 혹은 더 단순하게 철학적 오만을 구성하는가? 아마도 놀라운 사례로 보일만한 것을 거론해보자.

맑스의 경우, 그가 생산을, 생산․분배․교환․소비라는 네 가지 요소의 총체성의 한 계기(moment)이면서 동시에 그 네 가지 요소를 망라하는 총체성이자 그 총체성에 특별한 색조를 부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때, 거기에선 특수하게 철학적인 차원이 작동한다.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절대화’, 즉 총체성의 특수한 한 계기를 총체성의 근거로 상승시키는 것, 균형 잡힌 전체의 조화를 ‘방해하는’ 그와 같은 오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거론해보자. 오스틴(John L. Austin)의 작업과 뒤크로(Oswald Ducrot)의 작업 말이다. 그들의 작업을 ‘철학’으로 간주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정당한가? 모든 동사를 수행문(performatives)과 사실(확인)문(constatives)으로 구분한 오스틴의 구분은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확인)문을 포함한 모든 명제는 이미 수행적이다, 라는 오스틴의 ‘불균형적이고’ ‘과도한’ 가정과 함께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즉, 수행적인 것은 전체의 두 계기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라는 가정 말이다(*뒤크로의 책으론 토도로프와 공저한 <언어과학백과사전>이 유명하다. 나는 영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대기호학연구소 번역으로 <기호학사전>(우석, 1990)으로 번역돼 나온 적이 있다. 그다지 신뢰할 만한 번역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레마스와 쿠르테 공저의 <기호학 용어사전>(민성사, 1988)만큼 가관은 아니었지만).

모든 서술어가, 그것의 정보전달적(informative) 가치를 넘어서서, 논쟁적(argumentative) 가치를 소유한다는 뒤크로의 논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단지 각각의 서술어에서 정보전달적 가치와 논쟁적 가치를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실증 과학의 영역에 머문다. 어떤 정보전달이 어떤 논쟁적 태도에 ‘적합한가'에 대한 특별한 양태를 확인하려 할 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보전달적 내용을 포함하는 서술어는 단지 압축된 논쟁적 태도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그로부터 어떤 논쟁적 태도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그 서술어의 ’순수한‘ 정보전달적 내용을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도한‘ 가정과 함께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전부가 아닌(not-all)'의 역설에 직면한다 : ’서술어의 내용의 어떠한 측면도 어떤 논쟁적 태도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은 채로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서술어의 모든 내용은 논쟁적이다’라고 하는 언뜻 명백해 보이는 보편적 결론을 끌어낼 수 있게끔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분명히 규정될(pinned down)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속하는 잉여, 빠져나가는 그 잉여는 라캉적 의미의 실재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숙고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론적 차이란] 총체성의 (특수한 형태이지만 근거로 격상된 그) 근거와, 이 근거를 빠져나가는, 그리고 그 자신은 그 근거 안에서 ‘근거지어질’ 수 없는 실재 사이에서 언제나 벌어지는 거리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말하자면, ‘비-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오만도 제거된 ‘균형 잡힌’ 총체성이 아니며, 여하한 특수한 양상 혹은 실체도 근거로 격상되지 않는 그런 총체성(보다 더 하이데거적 용어로 말하자면 '존재자들의 전체(the Whole of entities)'도 아니다. 실체들[존재자들]의 영역은 그것의 아래에 놓여져 있는[가정되어 있는](sup-posited) 근거로부터 그것의 일관성을 얻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형이상학’은 근거와 [그것을] 빠져나가는 실재―그것의 실정적인 내용(‘현실’)은 근거에 근거지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의 영역을 빠져 나가고 근거를 침식하는 실재―사이의 차이에 대한 통찰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다시 귀부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이 바로 귀부인이 형이상학적 근거의 또다른 이름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근거 자체를 근거지어주는 자기 철회적인 실재(the self-retracting Real)의 다른 이름인 까닭이다. 그리고 모든 실체의 형이상학적 근거의 또 다른 이름이 ‘최고 선(supreme Good)’인 한, 물로서의 귀부인은 근본 악(redical Evil)의 구현체로서 지적될 수 있다. 에드가 앨런 포가 그의 단편에서 '도착적인 영혼(spirit of perverseness)'이라고 불렀던 그 악의 구현체 말이다.


 

 

 

 

-이러한 영혼에 대해서 철학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착perversness이란 것이 인간 마음의 원초적 충동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나에게는 내 혼이 살아 있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열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수백 번 저질러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거스르면서, 단지 그것이 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을 어기려는 집요한 기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검은 고양이>)  

-...사실 그것은 동기 없는 움직임(a mobile without), 동기화되지 않은 동기(a motive not motiviert)다. 그 자극 때문에 우리는 납득할 수 있는 어떤 목적[대상] 없이 행위 한다. 혹은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서 이해해 본다면, 우리는 [앞서 말한] 그러한 자극 때문에, 우리가 해서는 안된다는 그 이유로 [무언가를] 행한다는 식으로 전제를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론들 중에서 이보다 더 부조리한 논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이 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잘못이며 실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종종 우리를 몰아가고 그것을 실행하라고 부추기는 어떤 정복할 수 없는 힘이 된다는 사실은 내가 숨쉬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내게는 확실한 것이다. 잘못 그 자체를 위해 잘못을 저지르려는 이러한 압도적인 기질은, 분석이 되거나 다른 내적 요소로 분해 되거나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그리고 원초적인 충동-요소란 말이다.(<도착적인 새끼 악마>)

 

동기화되지 않은 불필요한 행위(acte gratuit)로서의 범죄가 예술에 대해 갖는 친화성은 낭만주의 이론의 표준적인 주제이다.(낭만주의 예술가 집단은 죄인으로서의 예술가라는 관념을 구성한다) 포의 공식(동기 없는 움직임, 동기화되지 않은 동기)이 직접적으로 미적 경험에 대한 칸트의 결론(‘목적 없는 합목정성’, 등등)을 상기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러한 명령 ― ‘너는 [너에게 그것이] 허락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 한다’, 즉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수행되는 어떤 행위의 순수하게 부정적인 근거 ― 은 오직 변별적인 상징적 질서 내에서만, 즉, 그러한 부정적 결정이 긍정적 목적지(그 목적지 내에서는 특질의 부재가 긍정적 특질로 기능하는 그런 목적지)를 갖는 상징적 질서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포의 ‘도착의[도착이라는] 새끼 악마’는 따라서 행위의 동기화가 행위가 그것의 경험적 대상과 맺는 외부적인 연결을 끊어버리고, 행위의 동기 그 자체를 오직 자기-참조의 내재적 원환에 근거 짓는 지점을 표시한다. 요컨대, 포의 ‘새끼 악마’는 엄밀하게 칸트적인 의미에서 자유의 지점에 상응하는 것이다. 

칸트와의 이와 같은 관련성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욕망하는 능력은 초월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념적 대상과 동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라캉은 욕망하는 능력의 선험적 지위를 논증해내려고 한다. 즉, 정념성과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우리 욕망의 어떤 동기부여(이러한 비-정념적인 욕망의 대상-원인은 대상 a이다)를 공식화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포의 ‘도착의 새끼 악마’는 그러한 순수한 동기부여의 직접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내가 ‘오직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를 수행할 때, 나는 경험적-우연적 대상과 관계 맺지 않고, 보편적-상징적 영역 안에 머무른다. 말하자면,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비-정념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내기를 잘못 걸었다 : 정념적 동기부여의 윤리학이라는 영역을 일소해버림으로써, 그는 선을 가장하고 악을 행할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을 근절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한 것은 보통의 병리적[정념적] 악보다 훨씬 더 기괴한(uncanny) 악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젖힌 일이다.

06. 10. 23.

P.S. 참고로, <도착적인 새끼 악마(The Imp Of The Perverse)>(1845)의 원문을 옮겨놓는다. 국역본 단편전집에 포함돼 있는지는 확인해봐야겠다.

In the consideration of the faculties and impulses – of the prima mobilia of the human soul, the phrenologists have failed to make room for a propensity which, although obviously existing as a radical, primitive, irreducible sentiment, has been equally overlooked by all the moralists who have preceded them.  In the pure arrogance of the reason, we have all overlooked it.  We have suffered its existence to escape our senses solely through want of belief – of faith; – whether it be faith in Revelation, or faith in the Kabbala.  The idea of it has never occurred to us, simply because of its seeming supererogation.  We saw no need of the impulse – for the propensity.  We could not perceive its necessity.  We could not understand, that is to say, we could not have understood, had the notion of this primum mobile ever obtruded itself; – we could not have understood in what manner it might be made to further the objects of humanity, either temporal or eternal.  It cannot be denied that phrenology, and in great measure, all metaphysicianism, have been concocted à priori.  The intellectual or logical man, rather than the understanding or observant man, set himself to imagine designs – to dictate purposes to God.  Having thus fathomed to his satisfaction, the intentions of Jehovah, out of these intentions he built his innumerable systems of mind.  In the matter of phrenology, for example, we first determined, naturally enough, that it was the design of the Deity that man should eat.  We then assigned to man an organ of alimentiveness, and this organ is the scourge with which the Deity compels man, will-I nill-I, into eating.  Secondly, having settled it to be God's will that man should continue his species, we discovered an organ of amativeness, forthwith.  And so with combativeness, with ideality, with causality, with constructiveness, – so, in short, with every organ, whether representing a propensity, a moral sentiment, or a faculty of the pure intellect.  And in these arrangements of the principia of human action, the Spurzheimites, whether right or wrong, in part, or upon the whole, have but followed, in principle, the footsteps of their predecessors; deducing and establishing everything from the preconceived destiny of man, and upon the ground of the objects of this Creator.

It would have been wiser, it would have been safer to classify, (if classify we must,) upon the basis of what man usually or occasionally did, and was always occasionally doing, rather than upon the basis of what we took it for granted the Deity intended him to do.  If we cannot comprehend God in his visible works, how then in his inconceivable thoughts, that call the works into being?  If we cannot understand him in his objective creatures, how then in his substantive moods and phases of creation?

Induction, à posteriori, would have brought phrenology to admit, as an innate and primitive principle of human action, a paradoxical something, which we may call perverseness, for want of a more characteristic term.  In the sense I intend, it is, in fact, a mobile without motive, a motive not motivirt.  Through its promptings we act without comprehensible object; or, if this shall be understood as a contradiction in terms, we may so far modify the proposition as to say, that through its promptings we act, for the reason that we should not.  In theory, no reason can be more unreasonable; but, in fact, there is none more strong.  With certain minds, under certain conditions, it becomes absolutely irresistible.  I am not more certain that I breathe, than that the assurance of the wrong or error of any action is often the one unconquerable force which impels us, and alone impels us to its prosecution.  Nor will this overwhelming tendency to do wrong for the wrong's sake, admit of analysis, or resolution into ulterior elements.  It is a radical, a primitive impulse – elementary.  It will be said, I am aware, that when we persist in acts because we feel we should not persist in them, our conduct is but a modification of that which ordinarily springs from the combativeness of phrenology.  But a glance will show the fallacy of this idea.  The phrenological combativeness has for its essence, the necessity of self-defence.  It is our safeguard against injury.  Its principle regards our well-being; and thus the desire to be well, is excited simultaneously with its development.  It follows, that the desire to be well must be excited simultaneously with any principle which shall be merely a modification of combativeness, but in the case of that something which I term perverseness, the desire to be well is not only not aroused, but a strongly antagonistical sentiment exists.

An appeal to one's own heart is, after all, the best reply to the sophistry just noticed.  No one who trustingly consults and thoroughly questions his own soul, will be disposed to deny the entire radicalness of the propensity in question.  It is not more incomprehensible than distinctive.  There lives no man who at some period, has not been tormented, for example, by an earnest desire to tantalize a listener by circumlocution.  The speaker is aware that he displeases; he has every intention to please; he is usually curt, precise, and clear; the most laconic and luminous language is struggling for utterance upon his tongue; it is only with difficulty that he restrains himself from giving it flow; he dreads and deprecates the anger of him whom he addresses; yet, the thought strikes him, that by certain involutions and parentheses, this anger may be engendered.  That single thought is enough.  The impulse increases to a wish, the wish to a desire, the desire to an uncontrollable longing, and the longing (to the deep regret and mortification of the speaker, and in defiance of all consequences,) is indulged.

We have a task before us which must be speedily performed.  We know that it will be ruinous to make delay.  The most important crisis of our life calls, trumpet-tongued, for immediate energy and action.  We glow, we are consumed with eagerness to commence the work, with the anticipation of whose glorious result our whole souls are on fire.  It must, it shall be undertaken to-day, and yet we put it off until to-morrow; and why?  There is no answer, except that we feel perverse, using the word with no comprehension of the principle.  To-morrow arrives, and with it a more impatient anxiety to do our duty, but with this very increase of anxiety arrives, also, a nameless, a positively fearful, because unfathomable, craving for delay.  This craving gathers strength as the moments fly.  The last hour for action is at hand.  We tremble with the violence of the conflict within us, – of the definite with the indefinite – of the substance with the shadow.  But, if the contest has proceeded thus far, it is the shadow which prevails, – we struggle in vain.  The clock strikes, and is the knell of our welfare.  At the same time, it is the chanticleer-note to the ghost that has so long over-awed us.  It flies – it disappears – we are free.  The old energy returns.  We will labour now.  Alas, it is too late!

We stand upon the brink of a precipice.  We peer into the abyss – we grow sick and dizzy.  Our first impulse is to shrink from the danger.  Unaccountably we remain.  By slow degrees our sickness, and dizziness, and horror, become merged in a cloud of unnameable feeling.  By gradations, still more imperceptible, this cloud assumes shape, as did the vapor from the bottle out of which arose the genius in the Arabian Nights.  But out of this our cloud upon the precipice's edge, there grows into palpability, a shape, far more terrible than any genius, or any demon of a tale, and yet it is but a thought, although a fearful one, and one which chills the very marrow of our bones with the fierceness of the delight of its horror.  It is merely the idea of what would be our sensations during the sweeping precipitancy of a fall from such a height.  And this fall – this rushing annihilation – for the very reason that it involves that one most ghastly and loathsome of all the most ghastly and loathsome images of death and suffering which have ever presented themselves to our imagination – for this very cause do we now the most vividly desire it.  And because our reason violently deters us from the brink, therefore, do we the more impetuously approach it.  There is no passion in nature so demoniacally impatient, as that of him, who shuddering upon the edge of a precipice, thus meditates a plunge.  To indulge for a moment, in any attempt at thought, is to be inevitably lost; for reflection but urges us to forbear, and therefore it is, I say, that we cannot.  If there be no friendly arm to check us, or if we fail in a sudden effort to prostrate ourselves backward from the abyss, we plunge, and are destroyed.

Examine these and similar actions as we will, we shall find them resulting solely from the spirit of the Perverse.  We perpetrate them merely because we feel that we should not.  Beyond or behind this, there is no intelligible principle.  And we might, indeed, deem this perverseness a direct instigation of the Arch-Fiend, were it not occasionally known to operate in furtherance of good.

I have said thus much, that in some measure I may answer your question, that I may explain to you why I am here, that I may assign to you something that shall have at least the faint aspect of a cause for my wearing these fetters, and for my tenanting this cell of the condemned.  Had I not been thus prolix, you might either have misunderstood me altogether; or with the rabble, you might have fancied me mad.  As it is, you will easily perceive that I am one of the many uncounted victims of the Imp of the Perverse.

It is impossible that any deed could have been wrought with a more thorough deliberation.  For weeks, for months, I pondered upon the means of the murder.  I rejected a thousand schemes, because their accomplishment involved a chance of detection.  At length, in reading some French Memoirs, I found an account of a nearly fatal illness that occurred to Madame Pilau, through the agency of a candle accidentally poisoned.  The idea struck my fancy at once.  I knew my victim's habit of reading in bed.  I knew, too, that his apartment was narrow and ill ventilated.  But I need not vex you with impertinent details.  I need not describe the easy artifices by which I substituted, in his bed-room candlestand, a wax-light of my own making, for the one which I there found.  The next morning he was discovered dead in his bed, and the Coroner's verdict was, ‘Death by the visitation of God’.

Having inherited his estate, all went well with me for years.  The idea of detection never once entered my brain.  Of the remains of the fatal taper, I had myself carefully disposed.  I had left no shadow of a clue by which it would be possible to convict, or even to suspect me of the crime.  It is inconceivable how rich a sentiment of satisfaction arose in my bosom as I reflected upon my absolute security.  For a very long period of time, I was accustomed to revel in this sentiment.  It afforded me more real delight than all the mere worldly advantages accruing from my sin.  But there arrived at length an epoch, from which the pleasurable feeling grew, by scarcely perceptible gradations, into a haunting and harassing thought.  It harassed because it haunted.  I could scarcely get rid of it for an instant.  It is quite a common thing to be thus annoyed with the ringing in our ears, or rather in our memories, of the burthen of some ordinary song, or some unimpressive snatches from an opera.  Nor will we be the less tormented if the song in itself be good, or the opera air meritorious.  In this manner, at last, I would perpetually catch myself pondering upon my security, and repeating, in a low, undertone, the phrase, “I am safe.”

One day, whilst sauntering along the streets, I arrested myself in the act of murmuring, half aloud, these customary syllables.  In a fit of petulance, I remodelled them thus: – “I am safe – I am safe – yes – if I be not fool enough to make open confession!”

No sooner had I spoken these words, than I felt an icy chill creep to my heart.  I had had some experience in these fits of perversity, whose nature I have been at some trouble to explain, and I remembered well, that in no instance, I had successfully resisted their attacks.  And now my own casual self-suggestion, that I might possibly be fool enough to confess the murder of which I had been guilty, confronted me, as if the very ghost of him whom I had murdered – and beckoned me on to death.

At first, I made an effort to shake off this nightmare of the soul.  I walked vigorously – faster – still faster – at length I ran.  I felt a maddening desire to shriek aloud.  Every succeeding wave of thought overwhelmed me with new terror, for, alas! I well, too well understood that, to think, in my situation, was to be lost.  I still quickened my pace.  I bounded like a madman through the crowded thoroughfares.  At length, the populace took the alarm, and pursued me.  I felt then the consummation of my fate.  Could I have torn out my tongue, I would have done it, but a rough voice resounded in my ears – a rougher grasp seized me by the shoulder.  I turned – I gasped for breath.  For a moment, I experienced all the pangs of suffocation; I became blind, and deaf, and giddy; and then, some invisible fiend, I thought, struck me with his broad palm upon the back.  The longimprisoned secret burst forth from my soul.

They say that I spoke with a distinct enunciation, but with marked emphasis, and passionate hurry, as if in dread of interruption before concluding the brief, but pregnant sentences that consigned me to the hangman, and to hell.

Having related all that was necessary for the fullest judicial conviction, I fell prostrate in a swoon.

But why shall I say more?  To-day I wear these chains, and am here!  To-morrow I shall be fetterless!  –  but wher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지젝의 <향락의 전이> 제4장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Courtly Love, or Woman as Thing)의 새 번역이다. 제목 자체를 '고상한 사랑, 또는 물로서의 여성'이라고 옮겨놓고 있는 '고상한' 국역본의 오류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지젝이 재미있는 통찰들이 사장되는 게 유감스러웠던 차에 또다른 번역문을 인터넷상에 발견하고 반가웠다.  

 

 

  

 

해서 몇달전에 스크랩해놓았었는데, 내용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이미지 버전을 만들어 올려놓도록 한다. 역자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분량상 일단은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이란 절만을 옮겨놓는다. 다른 대목들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옮겨놓을 예정이다(본문중의 이미지와 강조, 군말은 모두 나의 것이다).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

궁정식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가 피해야 할 첫 번째 함정은 귀부인(the Lady)을 숭고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관념이다. 대체로 우리는 여기서 영성화(spiritualization)의 과정, 즉 미숙하고 감각적인 갈망에서 고양된 영성적인 소망으로의 이행을 환기한다. 그리하여 귀부인은 우리를 더 높은 종교적 엑스터시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영적인 가이드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라캉은 그러한 영성화와는 상반되는 일련의 특징들을 강조한다. 사실상, 궁정식 사랑에서의 귀부인은 구체적인 특성을 잃고 있으며 추상적인 이상으로서 언급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모든 시인들이 마치 같은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고 기록했다. 이런 시적 장(poetic field)에서 여성적 대상은 모든 실제적인 실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49) 그러나 귀부인의 이러한 추상적 성격은 영혼의 정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차갑고 거리가 있는 비인간적인 파트너에 어울리는 추상작용을 지시한다. 즉 귀부인은 결코 따뜻하고 동정심 많으며 이해심 있는 동료가 아니다.

"예술에 고유한 승화의 형식을 수단으로 하여, 시적 창작은 내가 오직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파트너로서 기술할 수 있을 뿐인 대상을 정립하는 것에 있습니다. 귀부인은 그녀의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미덕, 즉 지혜, 신중함, 혹은 심지어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현명하다고 기술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녀가 비물질적인 지혜를 구현하고 있거나 그것들을 실행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의 기능들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반대로, 자신의 하인에게 할 수 있는 한 제멋대로 시험을 부과합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50) 

그러므로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관계는, 무의미하고 흉폭하며 불가능하고 자의적이며 변덕스러운 시련을 강요하는 봉건영주의 주권에 대한 농노와 가신의 관계다. 이러한 시련의 비영성적 본질을 정확히 강조하기 위해 라캉은 하인에게 자기 엉덩이를 문자 그대로 핥으라고 요구하는 귀부인에 관한 시를 인용한다. 시는 하인을 그 아래에 대기하게 만든(우리는 중세에 개인위생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알고 있다) 악취에 대한, 그가 그의 임무를 완수할 때 귀부인이 그의 머리에 오줌을 싸리라는 절박한 위협에 관한 시인의 불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귀부인은 어떠한 종류의 정화된 영성(靈性)으로부터도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는 우리의 욕구와 욕망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타자성이라는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파트너로 기능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또한 일종의 자동기계, 즉 의미 없는 요구 사항들을 마구잡이로 말해오는 하나의 기계이다.

귀부인에게 섬뜩하고 괴물스러운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불가해한 타자성과 순수한 기계의 이러한 일치다. 귀부인은 우리의 ‘동료’가 아닌 큰 타자다. 다시 말해, 그녀는 어떠한 공감의 관계도 나누는 가능하지 않은 그 누구(someone)이다. 이러한 외상적인 타자성은 라캉이 프로이트의 용어 ‘das Ding’을 빌려 물(物; the Thing)이라고 지칭한 바 있는 바로 그것, 즉, ‘항상 그 자리로 돌아오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견고한 중핵인, 실재(the Real)이다. 귀부인의 이상화, 즉 그녀를 영적인 천상적 이상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따라서 엄격히 이차적인 현상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녀의 외상적 차원이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projection)이다.

이러한 정확하고 한정된 의미에서, 라캉은 “궁정식 사랑의 이데올로기에서 명확히 찾아낼 수 있는 이상화하는 찬미의 요소는 확실히 논증되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특성상 나르시시즘적인 것입니다”라고 인정한다. 모든 실제적 실체성을 박탈당한 채로, 귀부인은 주체가 그의 나르시스적 이상을 투사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기능한다. 달리 말해 -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라는 소네트에서 가브리엘 로제티와 그의 귀부인 엘리자베스 시달의 관계를 말하는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말로 하자면 - ‘귀부인은 그녀 자신으로서[그녀가 그녀 자신일 때]가 아니라, 그의 꿈을 채움으로써[채울 때] 나타난다.’

그러나 라캉에게 있어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곳에 있다. “거울은 때때로 나르시즘의 기제를 함축하며, 특별히는 우리가 후에 조우하게 될 파괴 혹은 공격성의 차원을 함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한계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그것은 넘어서지지 않는 한계입니다. 그것이 참여하는 유일한 체제는 대상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이라는 체제일 뿐입니다.[그것은 오로지 대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써 어떤 한계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합니다]”(라캉, 앞의 책, 151쪽)

따라서 궁정식 사랑에서 어떻게 귀부인이 실제의 여성들과 관계되는가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살과 피를 가진 여성에 대한 굴욕을 포함하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대표하게 되는가에 대한 진부한 문구를 포괄하기 이전에 우리는 다음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그러한 텅빈 표면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투사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열어젖히는 그 차갑고 중립적인 스크린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즉 만약에 남성들이 그들의 나르시시즘적 이상을 거울에 투사하려고 한다면, 침묵하는 거울 표면은 이미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표면은 일종의 현실의 블랙홀로서, 그것의 너머(Beyond)에 접근할 수 없는 하나의 한계로서 기능한다.

 

궁정식 사랑의 또 다른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철저하게 예절과 에티켓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장벽들을 뛰어넘으며 사회적 규칙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그런 기본적 열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우리는 엄밀한 허구적 공식을, 즉 한 남성이 그의 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귀부인임을 가장하는 ‘마치~처럼(as~if)'의 사회적 게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궁정식 사랑과, 그 사랑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은 듯이 보이는 하나의 현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정확히 이러한 특징이다.

 

 

 

 

즉 지난 세기 중반에 자허 마조흐(Sacher-Masoch)의 문학작품과 삶의 실천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된 성도착의 특수한 형태로서 마조히즘이 바로 그것이다. 질 들뢰즈는 마조히즘에 대한 유명한 연구에서, 마조히즘이 사디즘의 단순한 대칭적 역전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사디즘과 그의 희생자는 결코 상보적인 ’사도-마조히스트‘ 커플을 형성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비대칭성을 증명하기 위해 환기하는 그러한 특징들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부정(negation)의 양태의 대립이다. 사디즘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부정, 폭력적 파괴 및 고문과 조우하는 반면, 마조히즘에서의 부정은 부인의 형태, 즉, 가장의 형태, 현실을 중단시키는 ‘마치 ~처럼’의 형태를 취한다(*마조흐의 주저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 들뢰즈의 <매저키즘(인간사랑, 1996) 외에도 <모피를 입은 비너스>(과학과사상, 1996)로 번역돼 있다).

이러한 첫 번째 대립에 밀접하게 의존하는 대립은 제도와 계약의 대립이다. 사디즘은 제도의 논리, 즉 희생자를 고문하고 희생자의 무기력한 저항 속에서 쾌락을 얻는 제도적 폭력의 논리를 따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디즘은 그 그림자로서 필연적으로 ‘공적인’ 법을 배가시키고 동반하는 외설적인 초자아 이면 속에서 작동한다. 반대로 마조히즘은 희생자의 조처(measure)로 이루어진다. 주인과의 계약을 개시하고, 그녀[주인]에게 그녀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를 능멸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주권자인 귀부인의 변덕에 따라 행위할 수밖에 없도록 그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희생자(마조히즘적 관계에서는 하인)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속을 상연한다.

사디즘과 반대되는 마조히즘의 더 차별적인 특징은 그것이 내재적으로 연극적이라는 점이다. 폭력은 대부분 가장되고, 그것이 ‘실제적’일 때조차도 폭력은 장면의 구성요소로서, 연극적 상연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 게다가 폭력은 결코 실행되지도 않고 결론을 맺지도 않는다. 그것은 항상 중단된 제스처의 끝없는 반복으로서 중지된 채로 남겨진다.

우리로 하여금 마조히즘적 태도의 근본적인 역설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부인(disavowal)의 논리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마조히즘적 장면은 어떻게 보이는가? 남성-하인은 냉정하고 사무적인 방식으로 여성-주인과 계약 사항들을 설정한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하는가, 어떤 장면이 끊임없이 시연(試演)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무슨 옷을 입는가, 그녀는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고문의 명령에서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하는가(그녀는 그를 어떻게 모질게 채찍질하고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를 사슬에 묶으며 어디에서 하이힐의 끝으로 그를 찍어 누르는가 등).

그들이 결국 고유한 마조히즘적 게임으로 넘어갈 때, 마조히스트는 끊임없이 일종의 반성적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결코 실제로 그의 감정에 굴복하거나 그 자신을 게임에 완전히 내어주지 않는다. 게임의 중간에 그는 갑자기 적어도 ‘환영을 파괴함’이 없이 정확한 지시(그 지점을 더 세게 누르시오, 그 운동을 반복하시오...)를 내리는 무대 연출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일단 게임이 끝나면, 마조히스트는 다시 존경스러운 부르주아의 태도를 채택하고 평범하고 사무적으로 주권자 귀부인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습니까?” 등등.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조히스트의 가장 내밀한 열정의 완전한 자기-외부화(self-externalization)이다. 가장 내면적인 욕망이 계약의 대상이 되고 협상을 구성한다. 마조히즘적인 연극의 본성은 따라서 완전히 ‘비(非)심리학적’이다. 사회적 현실을 중단시키는 초현실적이고 열정적인 마조히즘적인 게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일상적 현실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마조히즘이라는 현상은 라캉이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니라고 여러 번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예증한다. 마조히즘은 우리로 하여금 ‘허구’의 질서로서의 상징적 질서라는 역설에 직면하게 한다. 마스크 밑에 감추어져 있는 것에서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스크에,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게임에, 우리가 복종하고 따르는 ‘허구’ 속에 더 많은 진리가 있다는 역설 말이다. 그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상연중인 게임 속에서, 마조히스트의 존재의 중핵은 외부화된다.

그리고 폭력의 실재(the Real)는 정확히 마조히스트가 히스테리화될 때 분출한다. 주체가 그 자신의 타자의 향락의 대상-도구의 역할을 거부할 때, 그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대상 a로 환원될 것이라는 예감으로 인해 공포에 떨 때 말이다. 이런 교착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는 '행위로의 이동'에, 즉 타인을 겨냥한 부조리한 폭력에 호소한다. 제임스의 <죽음의 취향(Taste for Death)>의 말미쯤에 살인자는 범죄의 환경을 기술하는데, 그의 망설임을 해결하고 그를 행위(살인)로 이끄는 요소가 희생자(폴 베론 경)의 태도임을 보여준다.

 

 

 

 

-그는 죽기를 원했어. 신은 그를 부패시켰고, 그는 그것을 원했어! 그는 실제로 그것을 요구했지. 그는 날 멈추게 하려고 애쓰고 탄원하며 논쟁하고 싸움을 할 수도 있었어. 자비를 구걸할 수 있었지. “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내가 그에게 원했던 것은 그것이 다였어. 오직 그 말 한 마디…… 그는 경멸감으로 날 쳐다보았지. 그때 그는 알았어. 물론 그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심지어 반쪽짜리 인간인 양 그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 짓을 하지 않았겠지.

 

 

 

 

-그는 심지어 놀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지. 그가 공포에 질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어…… 그는 마치 “당신이로군. 당신이어야 한다는 건 참 이상하군.”이라고 말하듯이 날 쳐다볼 뿐이었지. 마치 이런 것처럼, 난 선택권이 없어. 도구일 뿐이야. 어리석은. 그러나 난 선택했어. 그리고 그 역시 그랬지. 제길, 그는 날 멈출 수도 있었어. 그는 왜 날 멈추지 않았지?

 

 

 

 

죽기 며칠 전, 폴 베론 경은 상징적 죽음과 유사한 ‘내적인 몰락’을 경험하였다. 그는 장관직을 사퇴하고 모든 ‘인간적 유대’를 절단함으로써, 어떤 상호주체적인 공감의 관계를 배제하는 성인이라는 ‘배설물적’ 위치, 즉 대상 a의 위치를 취하였다. 이런 위치는 살인자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살인자는 $, 즉 분열된 주체로서의 그의 희생자에게 접근했다. 다시 말해 그는 희생자를 죽이기를 원했으나 동시에 희생자로부터 두려움과 저항의 기호를, 살인자가 행위를 완수하지 못하게 막는 기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자는 살인자를 (분열된)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살인자를 주체화시키게 될 어떠한 기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폴 경의 비저항과 무관심한 분노의 태도는 살인자를 큰 타자의 의지의 도구로 환원함으로써 그를 객체화하고, 그에게 어떠한 선택도 남기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살인자가 행위하도록 강제한 것은 희생자를 죽이려고 하는 그의 욕망과 희생자의 죽음충동을 일치시키는 경험이었다.

 

이러한 일치는 히스테리컬한 남성 ‘사디스트’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구타를 정당화하는 방식을 환기시킨다. “그녀는 왜 내가 그 짓을 하게 만드는가? 그녀는 실제로 내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원하고, 내가 그녀를 때려 그녀가 그것을 즐기게끔 나를 몰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릴 것이며,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녀에게 가르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조우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의 오(지각)된 효과가 사후적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하게 만드는 일종의 고리(loop)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 나는 실제로는 그녀의 노예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구타를 원하고 내가 그렇게 하기를 자극했기 때문에 - 나는 실제로 미쳐서 그녀를 때렸다...(*'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로 이어질 것이다.)

06. 10. 2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6-10-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면서 사드 후작의 작품 <소돔 120일>이 떠오릅니다.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로쟈 2006-10-2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미덕의 불운>이나 <규방철학>이 재미는 더 있을 거 같네요...

마태우스 2006-10-23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가 무릎꿇은 그림은 워터하우스 거 아닌가요??

로쟈 2006-10-2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정식 사랑의 '이미지'만 보여주려고 했지 출처는 상관이 없었는데요, 찾아보니까 Edmund Blair Leighton란 화가의 'The Accolade'(작위수여식)이란 그림이네요...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제2장 '유물론 다시 보기'에는 레닌과 포퍼에 관한 간략한 언급이 포함돼 있다. 레닌의 <유물론론과 경험비판론>에는 정작 변증법을 위한 자리가 빠져 있으며, 이때의 레닌은 반헤겔주의자로서 칼 포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을 루치오 콜레티는 '레닌과 포퍼'에서 지적하고 있고, 콜레티가 인용하고 있는 포퍼의 사적인 편지를 지젝은 재인용하고 있는데, 1970년에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책은, 내 견해로는 진짜로 뛰어납니다." 포퍼가 격찬하고 있는 레닌? 이건 어찌된 일인가? 내용의 자초지종을 따라가본다(국역본과 영역본을 가급적 같이 인용한다. 독어본에 따르는 국역본보다 확장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영역본이 이해에 더 용이하다). 

"레닌의 진실이란 궁극적으로 유물론의 진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의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의 분위기에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주장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오늘날의 양자역학에 대한 대중적인 독해는 레닌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과학 자체가 마침내 유물론을 넘어섰다는 '통념'으로 이어져, 물질은 '사라진' 것처럼, 즉 에너지의 비물질적 파동에서 용해됐다는 것으로 여겨진다."(51쪽)

Lenin's truth is ultimately that of materialism, and in fact, in the present climate of the New Age obscurantism, it may appear attractive to reassert the lesson of Lenin's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in today's popular reading of quantum physics, as in Lenin's times, the doxa is that science itself finally overcame materialism - matter is supposed to "disappear," to dissolve in the immaterial waves of energy fields.(178쪽)

먼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아침(1989)과 돌베개(1992)에서 두 종의 국역본이 출간된 바 있다. 물론 모두가 품절된 책들이다(러시아에서조차 레닌의 책들을 구하는 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지젝은 그 '레닌'을 우선을 다시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레닌의 진실이란 궁극적으로 유물론의 진실이다."라는 단언에서 '진실'은 '진리'의 뜻으로 새기는 게 낫겠다. 지젝에게서 truth'는 대부분의 경우 '진실'보다는 '진리'의 뜻을 더 강하게 갖는다(국역본 1장의 제목이 '진실을 위한 권리'로 옮겨진 것은 그래서 유감스럽다).  

"(루치오 콜레티가 장조했듯이) 레닌은 물질을 철학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으로 구분함으로써 '자연(에서)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정신에 독립해 존재하는 실체로서 물질의 이 철학적 개념은 과학에 대한 철학의 개입을 배제한다. 그러나... 이 '그러나'는 <유몰론과 경험비판론>에 변증법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It is also true (as Lucio Colletti emphasized), that Lenin's distinction between the philosophical and the scientific notion of matter, according to which, since the philosophical notion of matter as reality existing independently of mind precludes any intervention of philosophy into sciences, the very notion of "dialectics in/of nature" is thoroughly undermined. However... the "however" concerns the fact that, in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there is NO PLACE FOR DIALECTICS, FOR HEGEL."

같은 버전인 독어본/국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빠져 있지만, 영역본에는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 'FOR HEGEL'이 들어가 있다. 즉, 여기서의 변증법은 '헤겔' 혹은 '헤겔의 변증법'을 가리키며, 레닌의 물질 개념에는 그 변증법/헤겔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는 것. 왜? 그는 물질을 규정함에 있어서 철학과 과학을 구분했고, 이 경우 '자연변증법' 같은 철학적 개념이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물질'에는 대입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레닌의 기본테제인가? 지식을 현상적 혹은 실용적 도구주의로 환원해버리는 데 대한 거부(즉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이 우리의 정신과 독립적을 존재하는 방식을 알게 된다는 주장 - 악명 높은 반영이론)는 우리가 가진 지식의 불확정적 성질에 대한 강조(지식은 항상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며, 오직 무한한 근사의 과정에서 외부의 실체를 '반영'한다)와 짝을 이룬다."(52쪽)

" What are Lenin's basic theses? The rejection to reduce knowledge to phenomenalist or pragmatic instrumentalism (i.e., the assertion that, in scientific knowledge, we get to know the way things exist independently of our minds - the infamous "theory of reflection"), coupled with the insistence of the precarious nature of our knowledge (which is always limited, relative, and "reflects" external reality only in the infinite process of approximation)."

소위 '악명 높은 반영이론'을 고집하는 한 레닌의 "지식을 현상적 혹은 실용적 도구주의로 환원해버리는 데 대한 거부"는 불가불 "우리가 가진 지식의 불확정적 성질에 대한 강조"와 궁합이 맞아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지젝의 발빠른 지적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 말들을 뭔가 익숙한 말이 아닌가? 이는 바로 분석철학의 앵글로색슨적 전통에서 볼 때, 전형적인 반헤겔주의자인 카를 포퍼의 기본 입장이 아닌가. 콜레티는 짦은 글인 '레닌과 포퍼'에서, <디차이트>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었던 1970년의 사적인 편지에서 포퍼가 실제로 다음과 같이 적었음을 상기시킨다. '레닌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책은, 내 견해로는 진짜로 뛰어납니다.'"(강조는 나의 것)

"Does this not sound familiar? Is this, in the Anglo-Saxon tradition of analytical philosophy, not the basic position of Karl Popper, the archetypal anti-Hegelian? In his short article "Lenin and Popper," Colletti recalls how, in a private letter from 1970, first published in Die Zeit, Popper effectively wrote: "Lenin's book on empiriocriticism is, in my opinion, truly excellent.""

 

 

 

 

조지 소로스의 스승이기도 한 포퍼가 플라톤과 헤겔, 마르크스를 '열린사회의 적들'로 규정하고 공박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이 反헤겔주의자가 헤겔-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레닌의 주장에 어떻게 감복할 수 있을까? 그건 포퍼의 변덕보다는 레닌의 오류에 기인한다. 그 오류에 대해서 짚어보기 이전에 최근에 출간된 포퍼의 글모음집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부글북스, 2006)에 대한 리뷰를 따라가면서 포퍼주의적 입장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정리해두도록 한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책은 포퍼 입문서로서 몇년전에 출간된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생각의나무, 2000)와 짝지어 읽어볼 만하겠다(포퍼에겐 모든 일이 배우는 것이며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그 이전까지 포퍼 입문서 역할을 했던 책은 브라이언 매기의 <칼 포퍼>(문학과지성사, 1982)였다.

 

 

 

 

동아일보(06. 10. 21) 진리는 열려 있다 -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이 책은 ‘열린사회를 꿈꾼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1902∼1994)가 19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썼던 수필과 강연 원고 모음집이다. 포퍼의 대표 저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 ‘추측과 논박’을 이미 읽은 독자보다는 그의 저작을 접해본 적이 없는 독자에게 권한다. 일종의 ‘포퍼 입문서’로 제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에 가장 맞춤한 독서법은 평생에 걸쳐 과학과 역사 이론을 검토하고 검증하며 진리에 다가가려 매진한 원로 철학자가 들려주는 삶의 태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글 모음집이라 다루는 폭이 넓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비판적 합리주의’와 ‘낙관주의’다. 포퍼가 말하는 합리주의자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다른 이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남의 마음을 사로잡기 바라는’ 지식인, ‘확실성 없이 살아갈 용기’가 없어 예언가를 기다리는 대중 모두 포퍼의 비판을 비켜가지 못한다. 시행착오와 오류의 수정은 생물의 진화에서도 거의 유일한 진보의 수단이었다.

포퍼는 “모든 생은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단언한다. 동물의 생이 바로 그러하다(*그러니까 포퍼의 주장은 인간도 동물인 한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병적인 동물'이라면 사정은 좀 달라지는 것 아닐까?) 동물의 눈이 물체와의 충돌을 피하도록 경고를 받기 위해 발달된 기관이듯, 우리의 감각기관은 특정한 생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형성된 도구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문제’가 관찰이나 감각 인식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어떤 도그마도 인정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포퍼의 경고 대상에는 ‘무제한의 자유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인류가 ‘공존’한다는 것에는 당연히 ‘모든 개인의 무제한적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포퍼는 ‘자유시장을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는 이념적 원리’를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기오염 같은 문제는 특별법 제정을 필요로 하며, 빈곤 문제의 해결을 시류에서 벗어난 문제로 돌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낙관주의’다. 포퍼는 낙관론자를 자임하면서 자신의 낙관주의는 “미래가 아니라 오직 현재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구분 짓는다. 포퍼는 평생에 걸쳐 비판했던 마르크스와 자신의 차이를 낙관주의를 기준으로 설명한다(*'낙관주의와 그 적들'?).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좌우대립의 양극화 시대에 포퍼의 낙관론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많다. 그는 ‘낙관주의는 의무’라고까지 주장한다. 미래가 열려 있고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이데올로기라는 색안경을 버리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좌우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어느 한 정당이 나서서 이념 전쟁의 기계를 해체하고 공동의 인도주의적 노선을 채택하자고 제안하라’고도 조언한다.

포퍼가 ‘나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를 설명한 대목도 재미있다. ‘쓸모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아 가구제작자 자격증명서까지 획득한 그는 단 한 번도 철학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학교 교사에서 전문 철학가로 ‘진화’했다. 그 비결을 포퍼는 “나의 것으로 간주한 ‘문제들’이 철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아마도 포퍼에게 세상은 '호기심천국'이었음에 틀림없다).

진정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바칠 멋진 ‘문제’ 하나를 찾아보기, 해법을 열심히 찾되 우리가 생각해내는 해법은 전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늘 겸손해야 하며 모를 때는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알기. 포퍼가 권하는 공부 방법론이다. 아니, 어쩌면 인생 방법론이다. 원제 ‘All Life is Problem Solving’(1994년).(김희경 기자)

다시 반복하자면,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그러한 낙관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과학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현실정치 또한 끝임없는 문제해결의 과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이 과정은 무한한 근사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답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과거에 제시된 답들보다는 언제나 근사치에 가깝다. 이 어찌 만족하지 않을쏘냐? 그런데, 문제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레닌의 입장이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

"이 <경험비판론>의 중요한 유물론적 핵심은 레닌이 헤겔을 재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1915년 <철학노트>에서도 견지된다. 왜일까? 레닌은 <노트>에서 아도르노가 그의 <부정변증법>에서 부딪혔던 것과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분투한다. 즉 직접성을 비판하고 주어진 객관성에 대한 주체적인 조정을 주장하는 헤겔의 유산을 아도르노가 '객체의 우월성'이라 부른 유물론의 최소 명제와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이것이 바로 레닌이 인간의 사고는 객관적 실체를 거울모사한다는 '반영이론'을 고수한 이유이다."(52-3쪽)

"This hard materialist core of Empiriocriticism persists in the Philosophical Note-Books from 1915, in spite of Lenin's rediscovery of Hegel - why? In his Note-Books, Lenin is struggling with the same problem as Adorno in his "negative dialectics": how to combine Hegel's legacy of the critique of every immediacy, of the subjective mediation of all given objectivity, with the minimum of materialism that Adorno calls the "predominance of the objective"; this is why Lenin still clings to the "theory of reflection" according to which the human thought mirrors objective reality."

<노트>에서도 견지되는 <경험비판론>에서의 유물론은 실상 유물론에 미달하는 유물론, 곧 유사-유물론이고 암묵적 관념론이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사과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을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반영이론'을 고수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반영론자로서의 레닌은 헤겔의 재발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물론에 미달하게 되는 것. 레닌은 무어라고 말하는가? "여기에 실제로, 객관적으로,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10자연 2)인간의 인식=인간의 뇌, 그리고 3)자연이 인간의 인식에 반영된 형태, 그리고 이 형태는 정확하게 개념, 법칙, 범주 등으로 구성된다..."(53쪽)

영역본은 이 대목을 영역본 레닌 선집에서 가져오고 있다: "Here there are actually, objectively, three members: (1)nature; (2)human cognition=the human brain; and (3)the form of reflection of nature in human recognition, and this form consists precisely of concepts, laws, categories, etc..."(179쪽) 참고로,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레닌 전집 29권 164쪽에 나온다. 

인용한 대목을 근거로 지젝은 아도르노와 레닌이 '인식주체 - 반영 - 자연/대상'이라는 반영론의 구도를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각주3)에 밝혀진 대로 유스타체 쿠벨라키스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게 각주에서 "'Eustache Kouvelakis'(Paris)"가 뜻하는 바이다('유슈타슈 쿠벨라키'라고 읽어야 하나?). 찾아보니까 쿠벨라키스는 <철학과 혁명: 칸트에서 마르크스로>(2003)의 저자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도레닌도 여기에서 잘못된 방식을 취한다. 유물론은 사고의 주체적 조정의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라는 최소 명제를 고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고가 스스로와 완전한 동일체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장애물의 절대적인 내재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주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점을 양보하고 장애물로 외부화하는 순간 사이비 문제 살정, 즉 우리는 영원히 파악불가능한 '객관적 실체'에 점근(漸近)할 뿐 절대로 이를 그 문한한 복합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되돌아간다."(53-4쪽)

"However, both Adorno and Lenin take here the wrong path: the way to assert materialism is not by way of clinging to the minimum of objective reality OUTSIDE the thought's subjective mediation, but by insisting on the absolute INHERENCE of the external obstacle which prevents thought from attaining full identity with itself. The moment we concede on this point and externalize the obstacle, we regress to the pseudo-problematic of the thought asymptotically approaching the ever-elusive "objective reality," never being able to grasp it in it infinite complexity."

 

 

 

 

참고로, 국역본에는 표시돼 있지 않지만 영역본의 인용문에 붙은 각주에서 지젝은 아도르노의 '객체의 우월성'론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믿음에 대하여> 2장을 참조하라고 적어놓았다. 이럴 때마다 믿을 수 없는 국역본 번역은 유감스럽다. 지젝이 이해못할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잖는가?  

'사고의 주체적 조정(thought's subjective mediation)이라고 옮겨진 것은 '사고의 주관적 매개'라고 옮기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싶다. 이 '사고'의 바깥에 객관적 현실/실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반영론적 전제를 고수하는 한 지젝이 보기에 '유물론은 없다!'. 인식의 장애물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애물을 외부화하는 순간, '객관적 현실'을 그 무한한 복합성 속에서 포착하지 못하고 다만 점근해갈 뿐리는 사이비 문제틀, 혹은 포퍼주의적 문제틀로 후퇴하게 된다. 포퍼와 헤겔 사이의 레닌?

"레닌이 주장하는 '반영이론'의 문제점은 그 이론이 가진 암묵적 관념론에 있다. 물적인 실체가 의식 바깥에 독립적을 존재한다는 강박적인 주장은 징후적 전치로 읽혀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 그 자체'가 암묵적으로 그것이 '반영하는' 실체으 외부에 있게 되는 중요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질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방식, 그 객관적 진실에 무한히 접근한다는 은유가 이러한 관념론을 폭로한다."(강조는 나의 것)

"The problem with Lenin's "theory of reflection" resides in its implicit idealism: its very compulsive insistence on the independent existence of the material reality outside consciousness is to be read as a symptomatic displacement, destined to conceal the key fact that the consciousness itself is implicitly posited as EXTERNAL to the reality it "reflects." The very metaphor of the infinite approaching to the way things really are, to the objective truth, betrays this idealism:"(179-80쪽)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사이비 관념론, '암묵적 관념론'에서 벗어난 '진짜' 유물론인가? 내용이 좀 길어져서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06. 10. 21-22.

P.S. 문제해결의 연속 혹은 진화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벼락도끼와 돌도끼에서 원자탄으로의 연속/진화이다. 과연 인류사의 분쟁과 불화를 제거하는 방법도 진화돼 온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