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제2장 '유물론 다시 보기'에는 레닌과 포퍼에 관한 간략한 언급이 포함돼 있다. 레닌의 <유물론론과 경험비판론>에는 정작 변증법을 위한 자리가 빠져 있으며, 이때의 레닌은 반헤겔주의자로서 칼 포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을 루치오 콜레티는 '레닌과 포퍼'에서 지적하고 있고, 콜레티가 인용하고 있는 포퍼의 사적인 편지를 지젝은 재인용하고 있는데, 1970년에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책은, 내 견해로는 진짜로 뛰어납니다." 포퍼가 격찬하고 있는 레닌? 이건 어찌된 일인가? 내용의 자초지종을 따라가본다(국역본과 영역본을 가급적 같이 인용한다. 독어본에 따르는 국역본보다 확장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영역본이 이해에 더 용이하다). 

"레닌의 진실이란 궁극적으로 유물론의 진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의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의 분위기에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주장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오늘날의 양자역학에 대한 대중적인 독해는 레닌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과학 자체가 마침내 유물론을 넘어섰다는 '통념'으로 이어져, 물질은 '사라진' 것처럼, 즉 에너지의 비물질적 파동에서 용해됐다는 것으로 여겨진다."(51쪽)

Lenin's truth is ultimately that of materialism, and in fact, in the present climate of the New Age obscurantism, it may appear attractive to reassert the lesson of Lenin's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in today's popular reading of quantum physics, as in Lenin's times, the doxa is that science itself finally overcame materialism - matter is supposed to "disappear," to dissolve in the immaterial waves of energy fields.(178쪽)

먼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아침(1989)과 돌베개(1992)에서 두 종의 국역본이 출간된 바 있다. 물론 모두가 품절된 책들이다(러시아에서조차 레닌의 책들을 구하는 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지젝은 그 '레닌'을 우선을 다시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레닌의 진실이란 궁극적으로 유물론의 진실이다."라는 단언에서 '진실'은 '진리'의 뜻으로 새기는 게 낫겠다. 지젝에게서 truth'는 대부분의 경우 '진실'보다는 '진리'의 뜻을 더 강하게 갖는다(국역본 1장의 제목이 '진실을 위한 권리'로 옮겨진 것은 그래서 유감스럽다).  

"(루치오 콜레티가 장조했듯이) 레닌은 물질을 철학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으로 구분함으로써 '자연(에서)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정신에 독립해 존재하는 실체로서 물질의 이 철학적 개념은 과학에 대한 철학의 개입을 배제한다. 그러나... 이 '그러나'는 <유몰론과 경험비판론>에 변증법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It is also true (as Lucio Colletti emphasized), that Lenin's distinction between the philosophical and the scientific notion of matter, according to which, since the philosophical notion of matter as reality existing independently of mind precludes any intervention of philosophy into sciences, the very notion of "dialectics in/of nature" is thoroughly undermined. However... the "however" concerns the fact that, in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there is NO PLACE FOR DIALECTICS, FOR HEGEL."

같은 버전인 독어본/국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빠져 있지만, 영역본에는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 'FOR HEGEL'이 들어가 있다. 즉, 여기서의 변증법은 '헤겔' 혹은 '헤겔의 변증법'을 가리키며, 레닌의 물질 개념에는 그 변증법/헤겔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는 것. 왜? 그는 물질을 규정함에 있어서 철학과 과학을 구분했고, 이 경우 '자연변증법' 같은 철학적 개념이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물질'에는 대입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레닌의 기본테제인가? 지식을 현상적 혹은 실용적 도구주의로 환원해버리는 데 대한 거부(즉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이 우리의 정신과 독립적을 존재하는 방식을 알게 된다는 주장 - 악명 높은 반영이론)는 우리가 가진 지식의 불확정적 성질에 대한 강조(지식은 항상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며, 오직 무한한 근사의 과정에서 외부의 실체를 '반영'한다)와 짝을 이룬다."(52쪽)

" What are Lenin's basic theses? The rejection to reduce knowledge to phenomenalist or pragmatic instrumentalism (i.e., the assertion that, in scientific knowledge, we get to know the way things exist independently of our minds - the infamous "theory of reflection"), coupled with the insistence of the precarious nature of our knowledge (which is always limited, relative, and "reflects" external reality only in the infinite process of approximation)."

소위 '악명 높은 반영이론'을 고집하는 한 레닌의 "지식을 현상적 혹은 실용적 도구주의로 환원해버리는 데 대한 거부"는 불가불 "우리가 가진 지식의 불확정적 성질에 대한 강조"와 궁합이 맞아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지젝의 발빠른 지적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 말들을 뭔가 익숙한 말이 아닌가? 이는 바로 분석철학의 앵글로색슨적 전통에서 볼 때, 전형적인 반헤겔주의자인 카를 포퍼의 기본 입장이 아닌가. 콜레티는 짦은 글인 '레닌과 포퍼'에서, <디차이트>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었던 1970년의 사적인 편지에서 포퍼가 실제로 다음과 같이 적었음을 상기시킨다. '레닌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책은, 내 견해로는 진짜로 뛰어납니다.'"(강조는 나의 것)

"Does this not sound familiar? Is this, in the Anglo-Saxon tradition of analytical philosophy, not the basic position of Karl Popper, the archetypal anti-Hegelian? In his short article "Lenin and Popper," Colletti recalls how, in a private letter from 1970, first published in Die Zeit, Popper effectively wrote: "Lenin's book on empiriocriticism is, in my opinion, truly excellent.""

 

 

 

 

조지 소로스의 스승이기도 한 포퍼가 플라톤과 헤겔, 마르크스를 '열린사회의 적들'로 규정하고 공박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이 反헤겔주의자가 헤겔-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레닌의 주장에 어떻게 감복할 수 있을까? 그건 포퍼의 변덕보다는 레닌의 오류에 기인한다. 그 오류에 대해서 짚어보기 이전에 최근에 출간된 포퍼의 글모음집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부글북스, 2006)에 대한 리뷰를 따라가면서 포퍼주의적 입장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정리해두도록 한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책은 포퍼 입문서로서 몇년전에 출간된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생각의나무, 2000)와 짝지어 읽어볼 만하겠다(포퍼에겐 모든 일이 배우는 것이며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그 이전까지 포퍼 입문서 역할을 했던 책은 브라이언 매기의 <칼 포퍼>(문학과지성사, 1982)였다.

 

 

 

 

동아일보(06. 10. 21) 진리는 열려 있다 -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이 책은 ‘열린사회를 꿈꾼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1902∼1994)가 19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썼던 수필과 강연 원고 모음집이다. 포퍼의 대표 저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 ‘추측과 논박’을 이미 읽은 독자보다는 그의 저작을 접해본 적이 없는 독자에게 권한다. 일종의 ‘포퍼 입문서’로 제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에 가장 맞춤한 독서법은 평생에 걸쳐 과학과 역사 이론을 검토하고 검증하며 진리에 다가가려 매진한 원로 철학자가 들려주는 삶의 태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글 모음집이라 다루는 폭이 넓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비판적 합리주의’와 ‘낙관주의’다. 포퍼가 말하는 합리주의자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다른 이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남의 마음을 사로잡기 바라는’ 지식인, ‘확실성 없이 살아갈 용기’가 없어 예언가를 기다리는 대중 모두 포퍼의 비판을 비켜가지 못한다. 시행착오와 오류의 수정은 생물의 진화에서도 거의 유일한 진보의 수단이었다.

포퍼는 “모든 생은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단언한다. 동물의 생이 바로 그러하다(*그러니까 포퍼의 주장은 인간도 동물인 한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병적인 동물'이라면 사정은 좀 달라지는 것 아닐까?) 동물의 눈이 물체와의 충돌을 피하도록 경고를 받기 위해 발달된 기관이듯, 우리의 감각기관은 특정한 생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형성된 도구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문제’가 관찰이나 감각 인식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어떤 도그마도 인정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포퍼의 경고 대상에는 ‘무제한의 자유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인류가 ‘공존’한다는 것에는 당연히 ‘모든 개인의 무제한적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포퍼는 ‘자유시장을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는 이념적 원리’를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기오염 같은 문제는 특별법 제정을 필요로 하며, 빈곤 문제의 해결을 시류에서 벗어난 문제로 돌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낙관주의’다. 포퍼는 낙관론자를 자임하면서 자신의 낙관주의는 “미래가 아니라 오직 현재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구분 짓는다. 포퍼는 평생에 걸쳐 비판했던 마르크스와 자신의 차이를 낙관주의를 기준으로 설명한다(*'낙관주의와 그 적들'?).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좌우대립의 양극화 시대에 포퍼의 낙관론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많다. 그는 ‘낙관주의는 의무’라고까지 주장한다. 미래가 열려 있고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이데올로기라는 색안경을 버리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좌우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어느 한 정당이 나서서 이념 전쟁의 기계를 해체하고 공동의 인도주의적 노선을 채택하자고 제안하라’고도 조언한다.

포퍼가 ‘나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를 설명한 대목도 재미있다. ‘쓸모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아 가구제작자 자격증명서까지 획득한 그는 단 한 번도 철학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학교 교사에서 전문 철학가로 ‘진화’했다. 그 비결을 포퍼는 “나의 것으로 간주한 ‘문제들’이 철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아마도 포퍼에게 세상은 '호기심천국'이었음에 틀림없다).

진정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바칠 멋진 ‘문제’ 하나를 찾아보기, 해법을 열심히 찾되 우리가 생각해내는 해법은 전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늘 겸손해야 하며 모를 때는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알기. 포퍼가 권하는 공부 방법론이다. 아니, 어쩌면 인생 방법론이다. 원제 ‘All Life is Problem Solving’(1994년).(김희경 기자)

다시 반복하자면,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그러한 낙관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과학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현실정치 또한 끝임없는 문제해결의 과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이 과정은 무한한 근사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답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과거에 제시된 답들보다는 언제나 근사치에 가깝다. 이 어찌 만족하지 않을쏘냐? 그런데, 문제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레닌의 입장이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

"이 <경험비판론>의 중요한 유물론적 핵심은 레닌이 헤겔을 재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1915년 <철학노트>에서도 견지된다. 왜일까? 레닌은 <노트>에서 아도르노가 그의 <부정변증법>에서 부딪혔던 것과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분투한다. 즉 직접성을 비판하고 주어진 객관성에 대한 주체적인 조정을 주장하는 헤겔의 유산을 아도르노가 '객체의 우월성'이라 부른 유물론의 최소 명제와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이것이 바로 레닌이 인간의 사고는 객관적 실체를 거울모사한다는 '반영이론'을 고수한 이유이다."(52-3쪽)

"This hard materialist core of Empiriocriticism persists in the Philosophical Note-Books from 1915, in spite of Lenin's rediscovery of Hegel - why? In his Note-Books, Lenin is struggling with the same problem as Adorno in his "negative dialectics": how to combine Hegel's legacy of the critique of every immediacy, of the subjective mediation of all given objectivity, with the minimum of materialism that Adorno calls the "predominance of the objective"; this is why Lenin still clings to the "theory of reflection" according to which the human thought mirrors objective reality."

<노트>에서도 견지되는 <경험비판론>에서의 유물론은 실상 유물론에 미달하는 유물론, 곧 유사-유물론이고 암묵적 관념론이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사과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을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반영이론'을 고수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반영론자로서의 레닌은 헤겔의 재발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물론에 미달하게 되는 것. 레닌은 무어라고 말하는가? "여기에 실제로, 객관적으로,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10자연 2)인간의 인식=인간의 뇌, 그리고 3)자연이 인간의 인식에 반영된 형태, 그리고 이 형태는 정확하게 개념, 법칙, 범주 등으로 구성된다..."(53쪽)

영역본은 이 대목을 영역본 레닌 선집에서 가져오고 있다: "Here there are actually, objectively, three members: (1)nature; (2)human cognition=the human brain; and (3)the form of reflection of nature in human recognition, and this form consists precisely of concepts, laws, categories, etc..."(179쪽) 참고로,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레닌 전집 29권 164쪽에 나온다. 

인용한 대목을 근거로 지젝은 아도르노와 레닌이 '인식주체 - 반영 - 자연/대상'이라는 반영론의 구도를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각주3)에 밝혀진 대로 유스타체 쿠벨라키스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게 각주에서 "'Eustache Kouvelakis'(Paris)"가 뜻하는 바이다('유슈타슈 쿠벨라키'라고 읽어야 하나?). 찾아보니까 쿠벨라키스는 <철학과 혁명: 칸트에서 마르크스로>(2003)의 저자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도레닌도 여기에서 잘못된 방식을 취한다. 유물론은 사고의 주체적 조정의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라는 최소 명제를 고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고가 스스로와 완전한 동일체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장애물의 절대적인 내재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주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점을 양보하고 장애물로 외부화하는 순간 사이비 문제 살정, 즉 우리는 영원히 파악불가능한 '객관적 실체'에 점근(漸近)할 뿐 절대로 이를 그 문한한 복합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되돌아간다."(53-4쪽)

"However, both Adorno and Lenin take here the wrong path: the way to assert materialism is not by way of clinging to the minimum of objective reality OUTSIDE the thought's subjective mediation, but by insisting on the absolute INHERENCE of the external obstacle which prevents thought from attaining full identity with itself. The moment we concede on this point and externalize the obstacle, we regress to the pseudo-problematic of the thought asymptotically approaching the ever-elusive "objective reality," never being able to grasp it in it infinite complexity."

 

 

 

 

참고로, 국역본에는 표시돼 있지 않지만 영역본의 인용문에 붙은 각주에서 지젝은 아도르노의 '객체의 우월성'론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믿음에 대하여> 2장을 참조하라고 적어놓았다. 이럴 때마다 믿을 수 없는 국역본 번역은 유감스럽다. 지젝이 이해못할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잖는가?  

'사고의 주체적 조정(thought's subjective mediation)이라고 옮겨진 것은 '사고의 주관적 매개'라고 옮기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싶다. 이 '사고'의 바깥에 객관적 현실/실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반영론적 전제를 고수하는 한 지젝이 보기에 '유물론은 없다!'. 인식의 장애물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애물을 외부화하는 순간, '객관적 현실'을 그 무한한 복합성 속에서 포착하지 못하고 다만 점근해갈 뿐리는 사이비 문제틀, 혹은 포퍼주의적 문제틀로 후퇴하게 된다. 포퍼와 헤겔 사이의 레닌?

"레닌이 주장하는 '반영이론'의 문제점은 그 이론이 가진 암묵적 관념론에 있다. 물적인 실체가 의식 바깥에 독립적을 존재한다는 강박적인 주장은 징후적 전치로 읽혀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 그 자체'가 암묵적으로 그것이 '반영하는' 실체으 외부에 있게 되는 중요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질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방식, 그 객관적 진실에 무한히 접근한다는 은유가 이러한 관념론을 폭로한다."(강조는 나의 것)

"The problem with Lenin's "theory of reflection" resides in its implicit idealism: its very compulsive insistence on the independent existence of the material reality outside consciousness is to be read as a symptomatic displacement, destined to conceal the key fact that the consciousness itself is implicitly posited as EXTERNAL to the reality it "reflects." The very metaphor of the infinite approaching to the way things really are, to the objective truth, betrays this idealism:"(179-80쪽)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사이비 관념론, '암묵적 관념론'에서 벗어난 '진짜' 유물론인가? 내용이 좀 길어져서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06. 10. 21-22.

P.S. 문제해결의 연속 혹은 진화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벼락도끼와 돌도끼에서 원자탄으로의 연속/진화이다. 과연 인류사의 분쟁과 불화를 제거하는 방법도 진화돼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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