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한국에서 경계적 지식인을 다룬 커버스토리를 옮겨놓는다. 다큐영화 <경계도시2>가 빌미가 돼 한국사회에서 경계적 지식인의 문제를 살폈다.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지목돼 나도 인터뷰에 응했고, 몇 가지 언급이 기사화됐다. '경계'라는 말이 다의적인 만큼 '경계적 지식인'도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내 경우엔 학계와 대중 사이를 오간다는 의미다. 그런 역할도 그다지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주간한국(10. 04. 20) <경계도시2> 경계인을 생각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2'를 보고 난 관객들의 뜨거운 응원소리가 전해진다. 개봉한 지 한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칼럼니스트, 변호사, 소설가, 가수, 대학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지식인 인사들의 자발적 지지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릴레이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 자유롭게 영화를 본 소감을 얘기하거나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유명 인사들만이 아니다. 영화를 관람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가정주부들도 리뷰를 쏟아내고 있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최다 관객리뷰를 기록할 정도다. 이 같은 반향이 시사하는 바는 뭘까? 그것은 이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성찰의 다큐멘터리라는 점이다. 그러면 단지 이념 논쟁에 대한 성찰일까? 



영화는 2003년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귀국을 둘러싼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은 여전한 레드 콤플렉스뿐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한 사상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의 부재, 그리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선의 결핍과 심각한 쏠림 현상이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으로 살기 힘든 한국적 사회현실에 대해 '경계도시2'는 냉정하게 렌즈를 들이댄다. 



왜 경계인 생존이 힘든 사회인가
송두율 교수는 스스로를 경계인으로 규정한다. 소통이 불가능한 배타적인 두 경계를 허물기 위해 그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인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이쪽 아니면 저쪽을 택하라고 윽박지른다. 경계인 송두율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혹한 희생양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사회에서 경계인으로 살기 어려운 것이 송 교수뿐일까? 영화는 보다 포괄적으로 경계인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 작품을 만든 홍형숙 감독은 전화 인터뷰에서 "분단이나 레드 콤플렉스 저변의 중요한 문화코드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했다"고 답했다. 집단적인 선택과 요구가 강요되고, 개인의 권리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갖기 쉽지 않은 문화를 지적했다. 그는 "그러한 문화 속에서 새로운 시선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 역시 이념논쟁을 비롯한 어떤 '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고,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사실 경계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경계인은 일반적으로 진보와 보수, 좌와 우, 학계와 대중 등 분리와 극단의 경계선상에서 양쪽과의 소통과 통섭을 시도하는 사람이다. 또, 주류에 반기를 드는 재야 지식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도 포함된다.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 사회가 경계인의 생존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뭘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를 근거로 삼은 출세주의가 한 이유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치열한 내부경쟁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나라다.

한국인들은 극렬한 경쟁에 치를 떨면서도 경쟁만이 살 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패거리를 중심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인다. 우리는 그런 투쟁을 곧잘 이념투쟁이나 지역투쟁으로 착각하지만, 그 실체는 이익투쟁이다. (2009년 12월27일 한겨레신문)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권력을 가진 자와 같은 학교나 고향 출신이라는 연고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기 영역을 확장하고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는 경계인이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대학의 붕괴를 거론한다. 지성의 영역이어야 할 대학이 사라지고 상업적 성과를 중시하는 이상한 풍토가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지식인을 멸종시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빨리 연구하고, 빨리 성과를 내는 기업적인 연구문화가 만연하게 됐고요. 또,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은 연구논문들 가운데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되는 학문적인 분야가 너무 많아요. 비정상적인 지식 연구 패턴이 대학, 그리고 더 나아가 지식인을 없애고, 제도권에 대한 지식의 종속을 심화 시키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경계도시2'를 통해 심각한 지식의 종속을 발견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진보인사들조차 여론몰이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제도와 권력에 대한 지식의 종속을 반영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이자 대중적인 인문교양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펴낸 이현우 박사는 우리나라의 열악한 출판 시장을 경계인으로 살기 힘든 환경으로 꼽는다. 그는 인터넷에서 인기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는 등 학계와 대중 사이를 오가는 경계적 지식인이다.

"영어권 국가나 일본 등과 달리, 우리나라는 출판시장이 작고 열악해서 지식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대학이나 기업, 혹은 국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제 책의 경우에도 1만 부가 팔려 인문학서적으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저자가 받는 인세는 1500만원도 안 됩니다. 학진(학술진흥재단)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연구를 하면 1년에 논문 한 편을 써서 3000만원 정도를 받아요. 그러다 보니 제도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지식의 길을 택하는 이들이 매우 드물게 되고, 지식이 국가 등 기득권에 예속 되는 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봐야겠죠."

경계인이 필요한 이유
하지만 경계인이 자생하기 힘든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경계인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경계인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소통의 문제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저서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우리사회가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승자독식주의, 서울 중심의 초강력 중앙집권주의, 다른 이념에 대해 약간의 신축성도 보이지 않는 이념의 사유화 등을 꼽았다. 그리고 소통의 조건으로 이 같은 무리의식과 이해관계가 그어놓은 경계에서 벗어날 것을 제시한다.

여기서 좌파와 우파를 비롯해 소통 불가능한 경계를 넘나들며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경계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한국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발행인 성일권 씨는 경계인이 많아져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제,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 활약 중인 몇몇 국내 경계적 지식인을 거론하며 "제도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주류 지식에 편입되지 않고 자유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계인이 많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유롭게 주류세력을 비판할 수 있는 경계적 지식인이 많은 프랑스를 예로 들었다. 프랑스는 주류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 즉 경계인의 영향력이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큰 나라다. 이들은 사회 주류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고, 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을 지키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사회기류는 기존의 주류 문화와 제도에 반기를 들었던 '68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68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학교육의 모순과 관리사회에서의 인간소외, 사회적 모순 등에 반대해 학생과 근로자들이 연합해 벌인 대규모 사회변혁운동이다.

"68혁명으로 인해 비록 기존의 체제와 문화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그랑제꼴 중심에서 대학으로 교육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대중문화를 당당히 문화의 주류 반열에 올리는 데 성공했지요. 이후 주류문화에 도전하는 지성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면서 사회의 변화와 견제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경계적 지식인은 지식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이현우 박사는 "대학의 도제제도나 파벌주의, 업적주의 그리고 국가, 기업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경계적 지식인이 없는 한 세계를 보는 눈을 바꿔 놓는 지식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왜 론 처노와 같은 전문 저술가가 나올 수 없는지 반문한다. 시사 평론가이자 금융전문 작가인 처노는 '금융제국 J.P. 모건'이나 '부의 제국 록펠러'를 통해 미화되고 은폐되기 쉬운 거대 기업가의 숨은 면모를 낱낱이 파헤쳐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또 '과학의 탄생'이나 '16세기 문화혁명' 같은 세계적인 저작이 과연 국내의 재야 지식인에게서도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든다고 덧붙였다.(전세화 기자) 

10. 04. 21.  

P.S. 참고로, 우리의 '출판시장' 혹은 '지식시장'의 현실과 관련해서 내가 답변한 내용은 이렇다.

'지식시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동정 없는 세상'이죠.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훈련'받지 않은 터라 생존확률이 그만큼 떨어진다고 봅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는 건 어려운 일이어서 국내 인문학자 가운데서는 손에 꼽을 정도이니까요. 분야는 다르지만, <금융제국 J.P모건>이나 <부의 제국 록펠러> 등을 쓴 론 처노 같은 '전문 저술가'가 국내에서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고요, <과학의 탄생>과 <16세기 문화혁명> 같은 저작이 역시 국내의 재야 지식인에게서 나올 수 있을지 회의가 듭니다. 개개인의 역량 이전에 사회문화적 여건의 문제이고, 학문적 온축의 문제이기 때문에요. 20-30년 후라면 좀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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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1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1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1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1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녁이 다 돼서야 편의점에 가 신문을 사들고 왔다. 즐겨 마시는 카페오레를 사러 간 길이었다. 북리뷰란은 이미 인터넷으로 훑어보았기에 관심을 갖고 읽어본 건 칼럼란이다. 마침 어제 <김예슬 선언>(느린걸음, 2010)도 읽은 김에 두 고대생과 오늘날 대학 문제를 짚어본 칼럼을 옮겨놓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학문제를 집약적으로 다룬 책으론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에서 엮은 <지식사회 대학을 말한다>(선인, 2010)도 있다.  

 

경향신문(10. 04. 17) 김연아와 김예슬 그리고 대학 

한 대학생이 자신의 대학을 '방문'했다. 그 학생은 등교하자마자 총장실로 직행해 총장, 부총장, 학생처장 등과 '환담'을 나눈다. 총장은 그 학생에게 미래를 위해 외국어도 공부하라고 권유하고 학과장은 어떤 책을 원서에 번역서까지 선물한다. 그리고 그 학생은 학장의 안내로 학과건물을 시찰(?)한 후 강의실로 들어갔다. 9시에 시작한 수업에 1시간 40분이나 늦게 들어간 그는 다음 약속 때문에 10분만 앉았다가 나왔다. 그 학생의 측근(?)은 그가 언제 다시 학교에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2학년에 재학 중인 이 학생은 1학년 때도 딱 한 번 학교에 갔다. 그때도 총장 등 보직 교수들과 차를 마시며 환담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졸업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요즘 이 학생의 근황을 듣는다. '은퇴'를 고민 중이란다. 학생이 무슨 은퇴? 도대체 그 학생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다니지도 않을 학교를 도대체 왜 들어갔나.

자본주의 사회의 ‘초극강 상품’
누구의 이야기인지 다들 아실 것이다. 바로 김연아다. 그는 귀국 후 광고계약을 맺은 한 의류매장에 가기도 하고 '삼성 애니콜과 함께하는 스마트 데이트'라는, 재벌기업의 브랜드명으로 뒤범벅인 팬미팅 행사에 나타나기도 했다. 김연아는 그러나 분명 대학생임에도 학생으로서의 신분이나 그에 따르는 의무에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결국 '학벌'만을 위해 대학에 간 것인가. 어쨌든 학생이 학교를 외면하는 모습, 학교가 학생을 모시는 모습, 수업을 안 들어와도 학교 광고만 되면 그게 '장땡'이라는 모습은 이 시대 대학의 굴욕이다. 



이러한 모습 위에 겹쳐지는 또 다른 기억은 나를 더욱 씁쓸하게 한다. 지난 달 김연아와 같은 대학의 김예슬이라는 학생은 자퇴를 선언했다. 그는 '자격증 브로커' 또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한 대학에서 재벌기업이 원하는 상품이 되어 간택되기를 열망하기보단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 자퇴한다고 했다. 또 그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리는 것을 기뻐"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비정하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을 개탄했다. 그래서 김연아가 택한 학벌을 그는 버렸다.

김연아와 김예슬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경쟁'이 아닌가 싶다. 한쪽은 세계챔피언이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한 '1등 인간'이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미디어시대 자본주의사회의 '초극강 상품'이다. 그래서 그 대학이 모셔갔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거대한 자본의 탑에서 돌멩이에 불과한 인간이다. 그 끝없는 경쟁의 트랙을 질주하다가 결국 방황하는 젊은이다. 결국 자본이 요구하는 상품이 되기를 거부한 그가 택한 것은 자퇴였다. 이렇듯 완벽하게 대비되는 두 젊은이가 '고려대'라는 공간 안에서 뒤범벅이 되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대학마저 요지경이 되는 것인가. 대학이 보도자료까지 뿌려가며 김연아의 등교를 광고한다. 김예슬은 뒷문에 학교를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붙인다. 대학이 '완제품' 김연아를 모셔와 '광고모델'로 활용한다. 그러는 사이 학교의 관심을 받지 못한 평범한 학생 김예슬은 방황하다 자퇴한다. 오직 경쟁능력에 따라 한 학생은 대접 받고 다른 학생은 자퇴의 길을 택한다. 가르치고 길러내는 곳이 대학일 터인데 '완제품'은 대접받고 '방황하는 청춘'은 설 곳이 없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대학의 모습이어야만 하는가. 한국사회 대학은 과연 '大學'다울 수 있을 것인가.

상품화 거부 ‘방황하는 청춘’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대학에게도 최소한의 자존심과 지조는 있어야 한다. 마침 고려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의 와세다대에서 날아온 소식이 눈을 끈다. 이 대학 3년생인 후쿠하라 아이는 국가대표 탁구선수면서 CF를 찍을 정도의 인기 스타다. 현재 세계랭킹 8위인 그는 런던올림픽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학교 출석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올림픽 메달을 노리는 스타학생에게 와세다대는 어떤 배려를 했을까. 학교는 안 와도 좋으니 메달만 따라고? 그래서 학교의 명예를 빛내라고? 천만에. 학교가 제시하는 출석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게 된 후쿠하라는 지난 달 자퇴해야 했다.(정희준 | 동아대 교수·문화연구) 

10. 04. 17. 

P.S. 칼럼의 요지에 동감하지만 "대학이 '완제품' 김연아를 모셔와 '광고모델'로 활용한다. 그러는 사이 학교의 관심을 받지 못한 평범한 학생 김예슬은 방황하다 자퇴한다. 오직 경쟁능력에 따라 한 학생은 대접 받고 다른 학생은 자퇴의 길을 택한다."라고 한 대목은 오해의 소지도 있는데, 김예슬은 '학교의 관심을 받지 못해' 방황하다 자퇴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말을 빌리면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현재 한국 대학의 현실에 절망하여 자퇴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진리'는 학점에 팔아넘겼다. '자유'는 두려움에 팔아 넘겼다.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겼다. 나를 가슴 벅차게 했던 그 세 단어를 나 스스로 팔아 넘기면서, 그것들이 모두 침묵 속에 팔아 넘겨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려대학교는 '삼성'과 '글로벌'과 '이명박 대통령'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건 고려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大學 없는 대학. 순수한 영혼과 진리와 자유와 비판과 정의와 저항의 대학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진리 탐구의 전당과 대학문화라는 벽이 무너지면서, 세상 모든 대학이 자본과 시장의 탐욕에 활짝 열려 버렸다.(35쪽)  

천안함 사건에 묻힌 감이 있지만, '특별한 대학생' 김연아를 '환대'한 이기수 고려대 총장은 며칠 전 대교협 신임 회장에 취임하면서 기여입학제 도입 찬성 등의 발언을 토해내 한번 더 구설수에 올랐다(지난 1월에 한국 대학의 등록금이 너무 싸다고 발언한 장본인이다). 자퇴생 한 명 정도는 안중에는 없는 듯하다. 사설 하나를 옮겨놓는다.   

국민일보(10. 04. 15) 혼란만 키운 대교협 회장 발언 

대학들을 대표하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신임 회장이, 그것도 취임식 날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사회적 중론을 모아 정리된 대학입시 기준을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말을 했으니 입시생과 학부모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기수 대교협 신임 회장은 13일 기자간담회에서 “대학이 입학사정관 전형 공통기준을 어기더라도 가급적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겨도 불이익 없는 기준은 있으나마나한 셈이니 결국 공통기준을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대교협은 지난 7일 공통기준을 발표하면서 어기는 대학을 제재할 것이라고 했었는데 며칠 사이에 이렇게 오락가락하니 고교들은 입시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게 됐다. 논란이 일자 대교협이 내놓은 해명자료가 더 가관이다. “자율 규제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인데, 안 지켜도 된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이 회장은 또 “우수한 외국어 학교라면 필요한 자격을 갖춘 학생에게 가산점을 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시행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회장이 총장으로 있는 고려대는 2009 수시전형에서 고교등급제를 시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이제 고교등급제가 전체 대학으로 확산되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

그는 사견임을 전제로 했지만 “100억원 정도 들여 건물을 지어주는 사람의 2, 3세가 수학능력 검증을 거쳐 정원 외 1% 정도 입학을 허용하는 제도는 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기여입학제를 옹호했다. 기여입학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부정적 여론이 많아 당분간 도입하지 않기로 한 상황에서 대교협 회장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는 얼마 전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이 교육의 질에 비해 싼 편”이라고 말해 비난을 받았었다.

이 회장의 가벼운 입도 문제려니와 입학사정관제 공통기준이 과연 지켜질지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입시생들은 공인 어학시험이나 경시대회를 챙겨야 하는 것인지 필요가 없는 것인지 더 헷갈리게 됐다. 이런 것도 정리하지 못해 국민을 골탕 먹이는 교육과학기술부라면 차라리 해체하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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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2010-04-18 09:59   좋아요 0 | URL
젋은이 들보다 더 많이 살아온 어른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숭례문을 태워 버리지 않나, 강의 모양을 확 바뀌버리지 않나 등 그 만큼 사회적 능력이 많아서 겠지만요. 고교때 종교의 자유를 외첬던 대학생, 입학여 대학의 행태에 실망하여 자퇴하게된 여대생 등이 우리 사회의 소금이 될거라 믿습니다.

로쟈 2010-04-18 22:24   좋아요 0 | URL
소금을 배격하지 않는 사회가 먼저 돼야겠지요...

paul 2010-04-18 11:38   좋아요 0 | URL
첫번째 글을 읽으며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김연아와 김예슬 양의 단순한 대비), 역시 로쟈님이 찝어주신 대목을 보니, 보다 명쾌해지는군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회 속에서 대학의 세례가 갖는 힘을 알기에, 부끄러움과 답답함이 동시에 드는군요....

로쟈 2010-04-18 22:22   좋아요 0 | URL
대졸자 주류 사회란 표현을 쓰는데, 이미 졸업장이 별로 없는 시대가 되었죠. 그런 시대에 등록금만 올라가고 있다는 건 넌센스입니다...

비로그인 2010-04-18 22:46   좋아요 0 | URL
진정한 의미(?)의 대학은 다른 의미에서 '잃어버린 10년'의 귀결(작년 강내희씨 칼럼에 대한 댓글에서 몇 마디 늘어놨던 것이 떠오릅니다)을 어떻게 감당하며 만회할 것인지, 저도 '사실상' 대학에 절망한 지 오래된 한 사람으로서 답답함을 느낍니다. 2007년부터 저에게 대학 역할을 해준 이가 강유원씨, 로쟈님 등이었죠...

로쟈 2010-04-18 22:56   좋아요 0 | URL
양다리(?) 걸치고 있는 저도 헷갈립니다. 갱신이 필요한 건지, 종언이 필요한 건지...

비로그인 2010-04-20 12:10   좋아요 0 | URL
제가 학교 다닐 때부터도 의심스러웠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학문화'나 '대학공동체'란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현장 분위기를 도통 모르겠네요. 대학교가 그저 캠퍼스가 '큰 학교', 대학원이 그저 '큰 학원'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로쟈 2010-04-22 00:34   좋아요 0 | URL
요즘 대학 분위기는 저도 잘 모릅니다. 강의실만 들락거려서요.^^;

mirror 2010-04-19 02:53   좋아요 0 | URL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점을 신자유주의로 환원하는 신자유주의 환원론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대학들의 말도 안 되는 행태가 신자유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를 발명한 미국과 영국의 대학들이 한국과 같은가요? 그들 대학은 한국 대학과 같은 미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들의 이 행태는 신자유주의와 무관합니다. 미국 대학들에는 학원스포츠가 한국보다 더 발달해 있지만, 운동선수들도 다른 학생들처럼 공부하고 학점을 따야 졸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박함과 반지성주의, 한국 사회의 본질적이지 않은 영역에서의 극도의 경쟁은 신자유주의와 무관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의 원인이 신자유주의라면, 신자유주의의 종주국들도 똑같은 문제들을 보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안 그렇지 않습니까? 4대강 사업의 원인이 신자유주의가 아닌 것처럼, 한국 대학의 문제들을 야기한 원인도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김예슬이도 그렇습니다.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는 교육을 반대하다고 했죠? 김예슬이 다닌 학과가 경영학과입니다. 만약 김예슬이 노어노문학과나 역사학과 철학과 또는 사회학과를 다녔다면, 기업의 사원이 되는 교육만을 받았을까요? 고려대 정도의 역사학과나 국문학과에서 취업교육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김예슬은 자신이 학과를 잘못 선택하고 적응하지 못한채 엉뚱한 짓을 했던 것입니다. 경영학과에서 기업의 사원이 되는 교육을 시키지 도대체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하나요? 경영학과에서 지젝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까? 고려대 경영학과는 교수가 100명이나 되는 좋은 학과입니다. 이 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죠. 김예슬은 예초부터 이 학과에 가지 말았어야 합니다. 엉뚱한 학과 선택이 이 엉뚱한 짓의 원인인 것이죠. 어린 학생의 치기어린 행동에 이토록 환호하는 것 또한 아주 우스운 일이 아닐까요.
현대사회에서 대학이 국가나 사회 경쟁력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해야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과대학, 경영대학은 모두 기업의 사원을 기르기 위해서 만들어진 학과죠. 이런 학과들이 한국 대학들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은 상당부분 자본주의의 사원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죠.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한국의 대학들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합니다. 김연아가 대학생이라고 적을 두는 것 자체가 대학들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이죠.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는 것은 문제점에 눈감은 것과 같습니다.

로쟈 2010-04-19 08:21   좋아요 0 | URL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한국대학의 행태는 신자유주의보다도 더 나쁜 것이다, 로 정리하겠습니다. 한데, '신자유주의'란 말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기원적 의미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도입한 이들의 용례에 어긋나는 건 아닙니다. CEO총장이 유행했듯이, 기본 바탕은 대학을 '제품'을 생산해내는 '기업'으로 본다는 것이죠. 이건 '학과 선택'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인문학과들이 축소되거나 폐과되는 것이 한국 대학의 현실입니다. 고작 '대학 부적응' 학생의 자퇴선언에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한국대학의 문제점들을 응집시켜놓은 '컨테이너'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사실 <김예슬 선언>을 읽어보니 단순한 대학 거부가 아니라 "비즈니스 문명, 도시기계문명, 자본권력의 세계체제'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그래서 '유나바머 선언'을 떠올렸구요. 그런데, 그건 또 문제의 확산이자 다른 맥락이어서 초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의미있는 문제를 제기한 거라면 생산적인 논쟁이 가능하겠지요. 두고볼 일입니다...

2010-04-19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9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에 나온 책 가운데 제목만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관심도서 1위는 자오팅양의 <천하체계>(길, 2010)이다. '21세기 중국의 세계인식'이란 부제가 붙었다. 분량이 좀 얇은 편이어서 '선언적'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닌가 싶어 아직 주문을 넣진 않았지만, 이런 소개문구는 나 같은 독자에게 '딱'이다('나 같은 독자'가 많지는 않은 모양인지 언론리뷰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미국을 제치고 21세기 대국을 꿈꾸는 중국의 철학은 무엇일까. 현재의 주목할 만한 중국철학자 자오팅양은 전통의 문제와 21세기 중국이 처한 세계사적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어떤 사상적 편린을 펼쳐 보이고 있는지를 이 책에서 명쾌하게 제시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이 난세에 처한 것은 '세계'는 있지만 '천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하'란 바로 고대중국의 철인들이 갖고 있던 관념으로 천하를 얻는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서양적 의미에서의 제국[패권] 개념과는 대립되는 중국 전통의 관념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세계 VS 천하', '세계체계 VS 천하체계'를 비교의 범주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단지 '서양의 패권주의에서 중국의 시대로'라는 시사적 구호를 그럴 듯한 이념으로 포장한 것이 아닐까란 의혹을 사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그럴 듯함'에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천하' 관념을 통해 새롭게 세계 정치 제도를 평화롭게 이끌고 갈 구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제국의 논리가 아닌지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책소개에는 이미 이런 경계심도 미리 적어두고 있지만, 배울 건 배우고 취할 건 취할 수 있으리라. 1961년생이므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저자의 소개는 이렇다.  

중국철학계에서 "Trouble Maker"로 일컬어지고 있는 저자는 "하나밖에 없는 현대 중국의 진정한 철학자"이자 "사유가 정밀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철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이라거나 '가장 창조적인' 같은 수식어구는 무시해도 좋겠다. 다만 'Trouble Maker'라면 그가 일으킨 'Trouble'이 어떤 것들인지 읽어봤으면 싶다('옮긴이의 말'에 들어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소개보다는 그가 리쩌허우의 제자라는 말이 훨씬 더 '구체적'이다.  

저자 자오팅양(趙汀陽, 1961~ )은 리쩌허우(李澤厚)로부터 철학을 배웠으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둘의 영향, 즉 중국 고전을 통한 문제의식과 비트겐슈타인을 탐독하여 얻은 방법론적 가르침을 종합하여 저자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 방법론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관점이 없는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책의 역자도 리쩌허우의 <학설>(들녘, 2005)를 옮긴 노승현 박사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리쩌허우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개다. 저자의 이미지를 찾으니 '中國哲學新星'이란 문구도 뜨는군(문득 우리는 '한국철학신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세계체계' 대신에 중국 전통의 '천하체계'를 내세운 만큼 자부심이 없지 않겠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다.

오로지 중국의 세계관만이 등급에서 '국가'보다 높고/큰 분석의 각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정치에 관한 문제에서 중국의 세계관, 즉 천하 이론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세계 질서와 세계 제도의 이론을 고려했다. 따라서 중국이 세계를 책임지고 세계를 위한 이념을 어떻게 창조하려고 하는지가 우리의 진정한 문제여야만 한다.”

남 잘 났다는 소리니만큼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사실 동양고전이라고 우리가 맨날 읽는 것도 <논어>이고 <맹자>이니 그런 불편함은 약간 기만적이다. '중국의 지혜'는 좋지만, '중국의 세계관'은 안된다는 태도처럼 보이니까. 

여하튼 '천하체계'란 제목 자체가 호방하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만한, 아니 그를 능가하는 스케일을 자랑한다. '中國哲學新星'의 실력을 감상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주의 책'이다... 

10.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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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4-17 14:00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대륙은 스케일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 번 피부로 느끼게 해주네요..

로쟈 2010-04-18 22:21   좋아요 0 | URL
자연조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7 17:03   좋아요 0 | URL
대국굴기에서 '기'를 힘주어 말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대국주의는 경계할 필요가 있겠죠. 리쩌허우의 대담집인 [고별혁명]을 보면 그가 현실의 중국이 싫어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중국의 패권주의나 대국주의에 대해선 비판적 시각을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의 제자는 또 모르겠지만요.
여담이지만 또 다른 망명 지식인인 시인 베이다오를 강연회를 통해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리 중국을 비판하던 그가 미국에 이어 중국이 패권국가가 되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거부감이 없더군요. 그 정도 위상은 적어도 동아시아 국가에선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걸 보고 꽤 놀랐습니다. 동서(東西)라 말하지 않고 중국을 동아시아의 대표라 자처하며 중서(中西)라 말하는 기만이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로쟈 2010-04-18 22:20   좋아요 0 | URL
달리 '중국'이 아니지요. 거기에, 인구가 13억이 넘는 나라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paul 2010-04-18 11:42   좋아요 0 | URL
<영웅>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양조위가 모래 사막위에 검으로 쓴 '천하'라는 글귀...ㅎㅎ

로쟈 2010-04-18 22:19   좋아요 0 | URL
사실 아주 친숙한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4-18 15:56   좋아요 0 | URL
간단히 말해서 중국의 천하관념은 조공-책봉 관계이고 이런 국제관계가 유럽처럼 약육강식하는 살벌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지요. 약소국이 다소 숨쉴 여력도 만들어 주고...우리나라 사학자들도 사대주의가 중국에 종속된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일명 '사대주의 정당화학파'가 꽤 세력이 있지요.그런데 현실적으로 21세기의 천하질서는 음...동북공정이나 서남공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로쟈 2010-04-18 22:19   좋아요 0 | URL
동북공정 같은 건 속좁은 '제국주의'의 행태죠. 천하체계는 소위 '제국'의 논리에 더 가까울 듯해요. 읽어봐야 알겠지만.

mirror 2010-04-19 02:37   좋아요 0 | URL
시민 또는 국민을 백성으로 보는 것만 해도 전근대적인 관점이 아닐까요?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홉스와 로크, 루소의 정치철학에 기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것을 대체할 이념은 새로 등장하지 않았고요. 현재의 중국의 국가체제를 용인하면서 천하를 운운하다니요. 허황된 중국 지식인의 전형을 보는것 같습니다. 지금 중국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기위한 참고로서 이런 책이 번역되는 것은 좋지만, 실제로 중국 유학생들이 그런 생각인지는 의문입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대상이거나 유학한 나라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의 후광에 힘입어 행세하려는 것이 전통적인 한국의 학자들 행태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나 유럽에 갔다온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중국유학출신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적 지적 전통은 현대사회의 미래의 대안을 제시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해왔고, 지금까지는 미래의 가능성도 보여준 적 없습니다.
'관점이 없는 견해'란 표현은 다른 데서 베낀 것입니다. 80년대 중반에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 Thomas Nagel의 저서 이름이 'View from nowhere'입니다.

로쟈 2010-04-19 23:29   좋아요 0 | URL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이념은 등장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몰락이 '역사의 종언'이라고 믿는 입장에서라면 코웃음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많은 문제점을 지닌 나라이므로 중국 지식인의 생각이 허황하다고 보는 것은 미국이 이상사회가 아니므로 미국 지식인의 사상을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로선 '세계체계'라는 걸 상대화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귀가길에 습관대로 대형서점에 들러봤지만 눈에 띄는 신간이 별로 없었다. 모처럼 '조용한' 주로 분류해야겠다. 그런 가운데 버스에서 읽은 책은 김예슬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와 함께 이장욱의 첫 소설집 <고백의 제왕>(창비, 2010)이다. 전자는 3/4쯤 읽었고('김예슬 선언'은 의외로 '유나바머 선언'을 떠올려주었다. 아니, 자연스러운 건가?), 후자에선 평판작 '변희봉'을 읽었다. 첫머리에 실린 '동경소년'을 잡지에서 읽을 때 다 모아놓으면 그림이 되겠다 싶었는데 그 '그림'의 표제가 '고백의 제왕'이다. 몇 편 더 읽으면 나의 느낌을 말해볼 수 있겠다(일단 내가 받는 인상은 역시나 그가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단편들은 언어의 바깥을 지시하기보다는 그 지시가능성 자체를 음미해보는 쪽이다. 그는 '변희봉'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밴, 히봉'에 대해 쓴다). 작품을 이모저모 뜯어보고 있는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10. 04. 17) 순결한 고백이 추한 욕망을 만날 때…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평론가인 이장욱(42)의 첫 번째 소설집 ‘고백의 제왕’(창비 펴냄)이 보여주는 세계는 현실의 공간일 수도, 환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혹은 현실적인 환상, 환상적인 현실일 수 있다. 

서로 다른 서사를 품은 8편의 단편소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일관되게 등장하는 ‘유령’, 그리고 ‘죽음’이다. 한결같이 낯설고 기괴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담(奇談) 류와는 궤를 달리 한다. 이장욱의 탄탄한 문장이 선연한 이미지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들의 무대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이어주는 기괴한 곳, ‘아르마딜로 공간’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모든 작품의 뿌리에는 ‘비(非)존재로서의 존재들’-예컨대 외계인 또는 우리 사회의 이주노동자 등과 같은 이들-에 대한 위로와 성찰이 담겨 있다. 타임워프(시·공간 이동)와도 같은 이상한 곳 ‘아르마딜로 공간’에서는 ‘지난해의 여름을 달려가던 택시’가 ‘25년 전의 겨울을 걸어가던 빨간 모자를 쓴 여자아이’를 치는 등 숱한 죽음이 잇따른다.  

‘변희봉’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영화 ‘괴물’, ‘플란다스의 개’에 출연했던 배우 변희봉은 끊임없이 마주친 인물임에도 만기와 그의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부재의 인물이다. 게다가 ‘배우 밴히봉’의 존재에 대해 무한 의문과 회의를 품고 동대문운동장 곁을 지나던 만기 앞에는 엉뚱하게도 사직구장에서 사라져버린 롯데 이대호의 파울공이 떨어진다. 말이 없던 여자친구는 점점 형체가 희미해지며 결국 눈에 보이지 않게 되고(‘동경소년’), 죽어버린 유령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난다(‘기차 방귀 카타콤’).  

그런가하면 ‘곡란’에서는 하루에 두 번 기차가 서는, 간이역이 있는 시골 마을 모텔이 아예 자살 명소와도 비슷하다. 함께 자살하기 위해 방에 들어선 세 사람이 주저하는 곳에는 과거에 이곳에서 목숨을 끊었던 온갖 유령들이 바글바글하다. ‘곡란’은 그들이 묵은 모텔의 이름 ‘목란’의 외벽 전구가 군데군데 끊어져 ‘곡란’으로 보인데서 나온 제목이다. 왜곡된 소통의 상징과도 같은 장치다.  

표제작 ‘고백의 제왕’은 대학 동창들의 송년회 술자리에서 ‘고백의 제왕’으로 통했던 친구 곽(郭)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가 풀어놓았던 고백들은 진실 여부를 떠나 너무 구체적이고 충격적이어서 듣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중학생 시절 환갑이 넘은 식당 아주머니와 가진 첫 경험, 자신의 누이를 자살하도록 만들었던 기억, 홍일점으로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J의 임신, 낙태 등 일련의 고백들은 자리를 냉랭하게 만들거나 분란의 공간으로 바꿔내는 마성(魔性)을 띤다. ‘고백’이라는 가장 진정성어린 형식이 개인의 추한 욕망과 맞물리며 낳는 결과를 묵시록적으로 보여준다.  

이장욱은 ‘작가의 말’에서 “결국은 어둡고 고요한 진심만이 남는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 “존재하는 것은 타자(他者)라는 관념이 아니라 당신이며,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말”이라고 소통하는 삶에 대한 애정과 바람을 담았다.  

 

1994년 시로 등단한 이장욱은 첫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2005)로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았고, 시인으로서 내놓은 시집 ‘정오의 희망곡’ 등 역시 젊은 감각으로 노래한 새로운 서정에 대해 시단의 상찬이 쏟아졌다. 또 단편 ‘변희봉’은 지난 2월 이장욱에게 ‘젊은 작가상’을 안겼고, 지난달에는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박록삼기자) 

10.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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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2010-04-17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의 제왕'이란 소설집 제목에서 '나는 선언의 천재'로 시작하는 황병승 시가 연상되네요.

선언, 고백 이런 단어만 놓고 보면 낡은 느낌인데,시인들은 언어를 다루는 신비한 능력이 있나봅니다.



로쟈 2010-04-17 09:33   좋아요 0 | URL
그게 시인들의 프라이드죠...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사진이 홈피에 올려져 있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이런저런 근심은 사실 지난 겨울의 무모한 일정이 낳은 후유증이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04. 15. 

P.S. 레닌주의는 일단 국가권력을 쟁취하고, 이어서 일상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식이지만, 수유너머에 처음 다녀오면서 그 순서를 거꾸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우리의 일상을 먼저 바꾸면서(공부하는 일상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레닌과 마오가 각각 발명한 혁명의 공식을 우리 시대에 맞게 한번 더 발명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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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6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6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