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길에 습관대로 대형서점에 들러봤지만 눈에 띄는 신간이 별로 없었다. 모처럼 '조용한' 주로 분류해야겠다. 그런 가운데 버스에서 읽은 책은 김예슬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와 함께 이장욱의 첫 소설집 <고백의 제왕>(창비, 2010)이다. 전자는 3/4쯤 읽었고('김예슬 선언'은 의외로 '유나바머 선언'을 떠올려주었다. 아니, 자연스러운 건가?), 후자에선 평판작 '변희봉'을 읽었다. 첫머리에 실린 '동경소년'을 잡지에서 읽을 때 다 모아놓으면 그림이 되겠다 싶었는데 그 '그림'의 표제가 '고백의 제왕'이다. 몇 편 더 읽으면 나의 느낌을 말해볼 수 있겠다(일단 내가 받는 인상은 역시나 그가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단편들은 언어의 바깥을 지시하기보다는 그 지시가능성 자체를 음미해보는 쪽이다. 그는 '변희봉'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밴, 히봉'에 대해 쓴다). 작품을 이모저모 뜯어보고 있는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10. 04. 17) 순결한 고백이 추한 욕망을 만날 때…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평론가인 이장욱(42)의 첫 번째 소설집 ‘고백의 제왕’(창비 펴냄)이 보여주는 세계는 현실의 공간일 수도, 환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혹은 현실적인 환상, 환상적인 현실일 수 있다. 

서로 다른 서사를 품은 8편의 단편소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일관되게 등장하는 ‘유령’, 그리고 ‘죽음’이다. 한결같이 낯설고 기괴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담(奇談) 류와는 궤를 달리 한다. 이장욱의 탄탄한 문장이 선연한 이미지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들의 무대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이어주는 기괴한 곳, ‘아르마딜로 공간’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모든 작품의 뿌리에는 ‘비(非)존재로서의 존재들’-예컨대 외계인 또는 우리 사회의 이주노동자 등과 같은 이들-에 대한 위로와 성찰이 담겨 있다. 타임워프(시·공간 이동)와도 같은 이상한 곳 ‘아르마딜로 공간’에서는 ‘지난해의 여름을 달려가던 택시’가 ‘25년 전의 겨울을 걸어가던 빨간 모자를 쓴 여자아이’를 치는 등 숱한 죽음이 잇따른다.  

‘변희봉’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영화 ‘괴물’, ‘플란다스의 개’에 출연했던 배우 변희봉은 끊임없이 마주친 인물임에도 만기와 그의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부재의 인물이다. 게다가 ‘배우 밴히봉’의 존재에 대해 무한 의문과 회의를 품고 동대문운동장 곁을 지나던 만기 앞에는 엉뚱하게도 사직구장에서 사라져버린 롯데 이대호의 파울공이 떨어진다. 말이 없던 여자친구는 점점 형체가 희미해지며 결국 눈에 보이지 않게 되고(‘동경소년’), 죽어버린 유령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난다(‘기차 방귀 카타콤’).  

그런가하면 ‘곡란’에서는 하루에 두 번 기차가 서는, 간이역이 있는 시골 마을 모텔이 아예 자살 명소와도 비슷하다. 함께 자살하기 위해 방에 들어선 세 사람이 주저하는 곳에는 과거에 이곳에서 목숨을 끊었던 온갖 유령들이 바글바글하다. ‘곡란’은 그들이 묵은 모텔의 이름 ‘목란’의 외벽 전구가 군데군데 끊어져 ‘곡란’으로 보인데서 나온 제목이다. 왜곡된 소통의 상징과도 같은 장치다.  

표제작 ‘고백의 제왕’은 대학 동창들의 송년회 술자리에서 ‘고백의 제왕’으로 통했던 친구 곽(郭)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가 풀어놓았던 고백들은 진실 여부를 떠나 너무 구체적이고 충격적이어서 듣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중학생 시절 환갑이 넘은 식당 아주머니와 가진 첫 경험, 자신의 누이를 자살하도록 만들었던 기억, 홍일점으로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J의 임신, 낙태 등 일련의 고백들은 자리를 냉랭하게 만들거나 분란의 공간으로 바꿔내는 마성(魔性)을 띤다. ‘고백’이라는 가장 진정성어린 형식이 개인의 추한 욕망과 맞물리며 낳는 결과를 묵시록적으로 보여준다.  

이장욱은 ‘작가의 말’에서 “결국은 어둡고 고요한 진심만이 남는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 “존재하는 것은 타자(他者)라는 관념이 아니라 당신이며,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말”이라고 소통하는 삶에 대한 애정과 바람을 담았다.  

 

1994년 시로 등단한 이장욱은 첫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2005)로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았고, 시인으로서 내놓은 시집 ‘정오의 희망곡’ 등 역시 젊은 감각으로 노래한 새로운 서정에 대해 시단의 상찬이 쏟아졌다. 또 단편 ‘변희봉’은 지난 2월 이장욱에게 ‘젊은 작가상’을 안겼고, 지난달에는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박록삼기자) 

10.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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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2010-04-17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의 제왕'이란 소설집 제목에서 '나는 선언의 천재'로 시작하는 황병승 시가 연상되네요.

선언, 고백 이런 단어만 놓고 보면 낡은 느낌인데,시인들은 언어를 다루는 신비한 능력이 있나봅니다.



로쟈 2010-04-17 09:33   좋아요 0 | URL
그게 시인들의 프라이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