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나온 책 가운데 제목만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관심도서 1위는 자오팅양의 <천하체계>(길, 2010)이다. '21세기 중국의 세계인식'이란 부제가 붙었다. 분량이 좀 얇은 편이어서 '선언적'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닌가 싶어 아직 주문을 넣진 않았지만, 이런 소개문구는 나 같은 독자에게 '딱'이다('나 같은 독자'가 많지는 않은 모양인지 언론리뷰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미국을 제치고 21세기 대국을 꿈꾸는 중국의 철학은 무엇일까. 현재의 주목할 만한 중국철학자 자오팅양은 전통의 문제와 21세기 중국이 처한 세계사적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어떤 사상적 편린을 펼쳐 보이고 있는지를 이 책에서 명쾌하게 제시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이 난세에 처한 것은 '세계'는 있지만 '천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하'란 바로 고대중국의 철인들이 갖고 있던 관념으로 천하를 얻는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서양적 의미에서의 제국[패권] 개념과는 대립되는 중국 전통의 관념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세계 VS 천하', '세계체계 VS 천하체계'를 비교의 범주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단지 '서양의 패권주의에서 중국의 시대로'라는 시사적 구호를 그럴 듯한 이념으로 포장한 것이 아닐까란 의혹을 사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그럴 듯함'에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천하' 관념을 통해 새롭게 세계 정치 제도를 평화롭게 이끌고 갈 구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제국의 논리가 아닌지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책소개에는 이미 이런 경계심도 미리 적어두고 있지만, 배울 건 배우고 취할 건 취할 수 있으리라. 1961년생이므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저자의 소개는 이렇다.  

중국철학계에서 "Trouble Maker"로 일컬어지고 있는 저자는 "하나밖에 없는 현대 중국의 진정한 철학자"이자 "사유가 정밀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철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이라거나 '가장 창조적인' 같은 수식어구는 무시해도 좋겠다. 다만 'Trouble Maker'라면 그가 일으킨 'Trouble'이 어떤 것들인지 읽어봤으면 싶다('옮긴이의 말'에 들어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소개보다는 그가 리쩌허우의 제자라는 말이 훨씬 더 '구체적'이다.  

저자 자오팅양(趙汀陽, 1961~ )은 리쩌허우(李澤厚)로부터 철학을 배웠으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둘의 영향, 즉 중국 고전을 통한 문제의식과 비트겐슈타인을 탐독하여 얻은 방법론적 가르침을 종합하여 저자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 방법론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관점이 없는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책의 역자도 리쩌허우의 <학설>(들녘, 2005)를 옮긴 노승현 박사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리쩌허우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개다. 저자의 이미지를 찾으니 '中國哲學新星'이란 문구도 뜨는군(문득 우리는 '한국철학신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세계체계' 대신에 중국 전통의 '천하체계'를 내세운 만큼 자부심이 없지 않겠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다.

오로지 중국의 세계관만이 등급에서 '국가'보다 높고/큰 분석의 각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정치에 관한 문제에서 중국의 세계관, 즉 천하 이론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세계 질서와 세계 제도의 이론을 고려했다. 따라서 중국이 세계를 책임지고 세계를 위한 이념을 어떻게 창조하려고 하는지가 우리의 진정한 문제여야만 한다.”

남 잘 났다는 소리니만큼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사실 동양고전이라고 우리가 맨날 읽는 것도 <논어>이고 <맹자>이니 그런 불편함은 약간 기만적이다. '중국의 지혜'는 좋지만, '중국의 세계관'은 안된다는 태도처럼 보이니까. 

여하튼 '천하체계'란 제목 자체가 호방하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만한, 아니 그를 능가하는 스케일을 자랑한다. '中國哲學新星'의 실력을 감상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주의 책'이다... 

10.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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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4-17 14:00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대륙은 스케일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 번 피부로 느끼게 해주네요..

로쟈 2010-04-18 22:21   좋아요 0 | URL
자연조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7 17:03   좋아요 0 | URL
대국굴기에서 '기'를 힘주어 말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대국주의는 경계할 필요가 있겠죠. 리쩌허우의 대담집인 [고별혁명]을 보면 그가 현실의 중국이 싫어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중국의 패권주의나 대국주의에 대해선 비판적 시각을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의 제자는 또 모르겠지만요.
여담이지만 또 다른 망명 지식인인 시인 베이다오를 강연회를 통해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리 중국을 비판하던 그가 미국에 이어 중국이 패권국가가 되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거부감이 없더군요. 그 정도 위상은 적어도 동아시아 국가에선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걸 보고 꽤 놀랐습니다. 동서(東西)라 말하지 않고 중국을 동아시아의 대표라 자처하며 중서(中西)라 말하는 기만이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로쟈 2010-04-18 22:20   좋아요 0 | URL
달리 '중국'이 아니지요. 거기에, 인구가 13억이 넘는 나라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paul 2010-04-18 11:42   좋아요 0 | URL
<영웅>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양조위가 모래 사막위에 검으로 쓴 '천하'라는 글귀...ㅎㅎ

로쟈 2010-04-18 22:19   좋아요 0 | URL
사실 아주 친숙한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4-18 15:56   좋아요 0 | URL
간단히 말해서 중국의 천하관념은 조공-책봉 관계이고 이런 국제관계가 유럽처럼 약육강식하는 살벌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지요. 약소국이 다소 숨쉴 여력도 만들어 주고...우리나라 사학자들도 사대주의가 중국에 종속된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일명 '사대주의 정당화학파'가 꽤 세력이 있지요.그런데 현실적으로 21세기의 천하질서는 음...동북공정이나 서남공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로쟈 2010-04-18 22:19   좋아요 0 | URL
동북공정 같은 건 속좁은 '제국주의'의 행태죠. 천하체계는 소위 '제국'의 논리에 더 가까울 듯해요. 읽어봐야 알겠지만.

mirror 2010-04-19 02:37   좋아요 0 | URL
시민 또는 국민을 백성으로 보는 것만 해도 전근대적인 관점이 아닐까요?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홉스와 로크, 루소의 정치철학에 기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것을 대체할 이념은 새로 등장하지 않았고요. 현재의 중국의 국가체제를 용인하면서 천하를 운운하다니요. 허황된 중국 지식인의 전형을 보는것 같습니다. 지금 중국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기위한 참고로서 이런 책이 번역되는 것은 좋지만, 실제로 중국 유학생들이 그런 생각인지는 의문입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대상이거나 유학한 나라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의 후광에 힘입어 행세하려는 것이 전통적인 한국의 학자들 행태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나 유럽에 갔다온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중국유학출신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적 지적 전통은 현대사회의 미래의 대안을 제시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해왔고, 지금까지는 미래의 가능성도 보여준 적 없습니다.
'관점이 없는 견해'란 표현은 다른 데서 베낀 것입니다. 80년대 중반에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 Thomas Nagel의 저서 이름이 'View from nowhere'입니다.

로쟈 2010-04-19 23:29   좋아요 0 | URL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이념은 등장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몰락이 '역사의 종언'이라고 믿는 입장에서라면 코웃음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많은 문제점을 지닌 나라이므로 중국 지식인의 생각이 허황하다고 보는 것은 미국이 이상사회가 아니므로 미국 지식인의 사상을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로선 '세계체계'라는 걸 상대화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