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겨레21에서 '정재승의 사랑학 실험실'을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0000/2007/12/021160000200712200690053.html). 지난번에 불륜 본능을 옮겨온 바 있는데, 이번에는 '사랑에 빠진 뇌'라는 흥미로운 주제가 다루어진다. 책과 관련한 이미지들은 내가 덧붙인 것이다. 재미있는 건 작가 인용된 시인/작가들의 국적이 기사에서 엉터리로 표기된 것. 해서 교정하면서 읽어야 한다.  

한겨레21(07. 12. 20) '사랑’은 감정이 아니랍니다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거나 애착을 느끼는 감정 상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사랑이 이렇게 정의돼 있다. 기원전 4000년,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 동굴벽화에 흐릿하게 그려진 이래로 인간은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왔지만, 사랑에 대한 정의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옥스퍼드 사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랑은 상대가 필요하며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려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깊은 애착을 느끼게 되는 감정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시인(*영국의 시인) 존 키츠의 표현대로, 사랑이란 ‘온갖 자극과 감정이 뒤섞인 소란’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표정을 지어보라

그러나 최근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뇌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들은 옥스퍼드 사전에 담긴 사랑의 정의를 조금 수정해야 하지 않냐고 주장한다. 더없이 간결한 옥스퍼드 사전적 ‘사랑’에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단어는 바로 마지막에 붙은 ‘감정’이란 단어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과연 사랑을 감정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이 타당할까? 이 질문에 대해 신경과학자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경과학자들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랑이란 감정은…’이라는 일상적인 표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사랑이 만약 감정이라면, 사랑을 얼굴 표정으로 나타내보라고 주문한다.

우리는 기쁘고 슬프고 분노하고 즐거운 감정은 얼마든지 얼굴 표정을 통해 표현할 수 있으며, (더욱 중요하게도) 남의 표정을 통해 상대의 그런 감정 상태를 읽어낼 수 있다. 설령 미국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찡그리는 미국인의 얼굴 표정을 통해 그가 화가 났다거나 슬프다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인 감정을 얼굴 표정이나 몸동작으로 나타내고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사랑에 대응되는 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사랑에 빠진 표정을 명확히 지을 순 없다(사랑에 빠진 표정을 지어본 뒤 옆 친구에게 알아맞혀보라고 주문해보시라). 우리는 내 친구나 동생에게 연인이 생기면 그 사실을 다양한 행동들을 통해 알아차릴 순 있지만, 사랑이라는 상태는 확실히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 상태와는 확연히 구별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사랑은 반드시 ‘행동’을 동반한다는 점에서도 여느 감정과 구별된다. 우리는 슬프거나 기쁜 감정 상태가 표현되지 않고 그저 마음 상태로만 오래 간직된다고 해서 감정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사랑은 다르다. 사랑이라는 상태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모든 것을 집중시키며 그와 함께하고, 그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수행하며, 일련의 행동에는 뚜렷한 목적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감정이라기보다는 ‘욕구나 동기’에 더 가깝다.

결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뇌 활동사진을 찍어보면 사랑은 우리 뇌 안에서 감정을 관장하는 영역(편도체 등)에서 처리되지 않고 ‘욕구나 동기’를 관장하는 영역에서 처리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정, 황홀경, 갈망, 두려움, 의심, 질투, 당혹, 집중 등 온갖 격정적인 반응을 동반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래서 호머(*호메로스)는 자신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뜨거움. 갈망의 돌진. 연인의 속삭임이여. 가장 성스런 사람까지 미쳐버리게 만드는 그 마력이여.”

히로뽕 중독 환자의 ‘보상 중추’처럼
사랑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들은 다른 심리 상태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욕망도 뇌에 있는 특정한 화학물질과 신경회로로 인해 생겨나는 보편적인 마음 상태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기(fMRI)라는 뇌 영상장치 안에 집어넣고 그들의 뇌를 찍을 생각을 했던 최초의 연구자는 헬렌 피셔라는 미국 럿거스 뉴저지 주립대학 인류학과 연구교수였다.

그는 사랑에 빠진 수십 명의 커플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진 연인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디로 피가 몰리고 에너지가 활발히 소모되는지 관찰했다. 놀랍게도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히로뽕 중독 환자들이 히로뽕을 복용했을 때 활성화되는 보상중추라는 영역에서 활발한 반응을 보였다.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마구 분비되는 것도 관찰됐다. 사랑이란 고귀한 마음 상태도 생물학적인 뇌 활동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관찰한 것이다.

보통 뇌 속에 도파민 수치가 올라가면 사람들은 극단적인 집중력을 보이기도 하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동기부여와 목적 지향적인 행동을 수행한다. 또 무엇보다 마약이나 도박에 중독된 사람처럼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하며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사랑이 우리에게 극도의 쾌감을 주는 것은 연인과 함께 있으면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마구 분비되기 때문이다. 도파민과 함께 노르에피네프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도 늘어나는데, 이 화학물질이 체내에서 늘어나면 사람은 혈기 왕성해진 신체, 신경과민, 불면, 식욕 상실, 떨림, 두근거리는 가슴, 가빠지는 호흡, 고민과 두려움 등을 경험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 모든 증세는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흔히 관찰되는 증세가 아니던가!

낭만적인 사랑의 또 다른 두드러진 징후는 애인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물밀듯이 밀려드는 연인에 대한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헬렌 피셔 박사가 쓴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가>에 따르면, 헬렌 피셔는 실험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연구실을 찾은 피험자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깨어 있는 시간 중에서 애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몇%나 됩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90% 이상”이라고 대답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한시도 생각을 놓을 수 없다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고?) 그래서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사랑이라는 현상을 “정상적인 사람에게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주목 상태”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사랑에 사로잡힌 연인들의 행동은 강박관념에 빠져 정신장애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이탈리아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연인의 뇌에 존재하는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수치가 과도한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의 뇌에 존재하는 세로토닌의 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면 우리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몸에서도 이런 증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바다보다 넓은 것은 하늘이고, 하늘보다 넓은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라고 했지만,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하늘보다 넓은 인간의 마음을 뇌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던지, “뇌는 하늘보다 더 넓도다”라는 신경과학자들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시구를 남겼다.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기억하고 의식하는 모든 행동들은 생물학적인 뇌를 통해 설명될 수 있으며, 낭만적 사랑 또한 1.3kg에 지나지 않는 이 단백질 덩어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요즘은 1.4kg으로 치나 보다).



신경전달물질은 원인일까 결과일까
물론 사랑이 특정한 신경전달물질과 신경회로의 작동을 반드시 동반한다 해서, 그것으로 사랑을 완벽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사랑하는 동안 과도하게 분비되는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사랑의 원인인지 결과물인지, 혹은 그저 부산물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사랑을 하는 동안 우리가 보이는 많은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이 신경전달물질의 평소 역할로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07. 12. 23.

P.S. 기사에서 자세히 언급된 헬렌 피셔 박사의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가>(생각의나무, 2005)는 기대만큼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흥미로운 데이터들이 그냥 나열돼 있을 뿐이어서이다. 피셔의 책은 그밖에도 <제1의 성>(생각의나무, 2000), <성의 계약>(정신세계사, 1999), <사랑의 해부학>(하서출판사, 1994) 등이 소개돼 있다. 기억에 제일 재미있게 읽은 건 가정 먼저 소개된 <사랑의 해부학>이었다. 얼마전에 재번역돼 나온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7; 백년도서, 1995)처럼 <사랑의 해부학> 또한 다시 번역되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왜 사람은 바람을 피우고 싶어할까>(21세기북스, 2009)로 다시 번역돼 나왔다). 물론 이 주제에 대해선 그간에 더 좋은 책이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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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3 22:28   좋아요 0 | URL
아무리 그래도 Who knows?

로쟈 2007-12-23 23:36   좋아요 0 | URL
변수가 많긴 하지만 사랑의 '속내'는 대충 다 아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드팀전 2007-12-23 23:29   좋아요 0 | URL
오늘 막 올해의 마지막책으로 천병희 교수의 <일리아스> 읽기를 마쳤는데..그런 말이 어디있었는지는ㅋㅋㅋ
올 한해도 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좋은 책과 새로운 관심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내년에도 또 제 서재에 책을 쌓아 놓게 만드실 거라 생각이 드는 군요.^^ 어쨋거나 메리 크리스마스 반짝 반짝 반짝...해피 뉴 이어 뿅뿅뿅..

로쟈 2007-12-23 23:35   좋아요 0 | URL
<일리아스>를 다시 읽는 건 저로선 좀처럼 엄두를 못내는 일인데요.^^; 드팀전님도 메리하시고 해피하신 연말연시가 되시길!..

다락방 2007-12-24 08:44   좋아요 0 | URL
저는 왜 이런것만 별찜하는걸까요? ^^;;

로쟈 2007-12-24 09:20   좋아요 0 | URL
아마도 아직 솔로이신 듯.^^

다락방 2007-12-24 13:04   좋아요 0 | URL
아!!
 

아인슈타인만큼은 아니지만 수학자 쿠르트 괴델의 전기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대부분 품절이군). 그의 불완전성 원리야 일반 독자들에겐 너무 '전문적인' 영역이지만 천재이자 괴짜였던 한 수학자의 삶은 언제나 '읽을 거리'가 되기 때문이리라. 하오 왕의 책을 읽고 실망했던 기억이 있는데(그 책은 나오다 만 건가) 그간에 모아둔 '괴델의 책'들도 언제 읽어봐야겠다. 돌이켜보니 시작은 <아인슈타인 방의 사람들>이었다. <불완전성>에 대한 한겨레의 리뷰에도 실린, 괴델과 아인슈타인의 사진을 기념으로 박아놓는다.


1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불완전성- 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
레베카 골드스타인 지음, 고중숙 옮김 / 승산 / 2007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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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3일에 저장

출판사나 역자가 믿을 만하다.
괴델
존 L. 캐스티 & 베르너 드파울리 지음, 박정일 옮김 / 몸과마음 / 2002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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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도 어딘가에 꽂혀 있을 텐데...
괴델의 삶
하오 왕 지음, 배식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7년 11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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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괴델의 삶에 대해서 별로 말해주는 것이 없는 실망스러웠던 책.
괴델과 아인슈타인- 시간이 사라진 세상
팰레 유어그라우 지음, 곽영직.오채환 옮김 / 지호 / 2005년 10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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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벌써 절판이군. 어디에 꽂아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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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 시간에 기분을 낸답시고 서가에 있는 책을 임의로 꺼내 읽는 수가 있다. 수전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은 그렇게 꺼내든 것이고 예전에 조금 읽은 '시인이 쓴 산문'을 마저 읽었다(예전의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867577 참조). 본래 원저의 첫장에 배치돼 있는 이 글은 러시아의 여성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1892-1941)의 산문집 서문격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의 관계에 대한(보다 구체적으론 산문에 대한 시의 우위성에 대한) 일반론에 이어서 손택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한다면 특이한 종류의 산문이 발전했다는 것이다."(199쪽) 이때의 산문은 "주로 1인칭의 문장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성급하고 격정적이고 전후문맥이 생략된, 종종 일관성이 없고 문법에 어긋나는 산문을 말한다. 이런 산문은 주로 시인들이 쓴 것이다. 혹은 시적 창작 기준을 가진 작가들이 쓴 것이다."(200쪽)

어떤 시인들에게 있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을 하는 것이고 전혀 다른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엘리엇과 오든, 파즈 등의 비평과 저널적인 문화론 등은 아무리 뛰어난 글들이라 하더라도 '시인의 산문'(시인이 쓴 산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손택을 말한다. 하지만 이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만델슈탐(1891-1938)과 츠베타예바의 산문이라고 그녀는 본다. 그들의 글이야말로 전형적인 '시인의 산문'이라는 것이다(두 시인의 시집들만이 예전에 번역/소개된 바 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20세기 러시아시의 거장들이면서 또한 산문의 대가들이다. 스탈린시기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도 공통적이다). '시인의 산문'은 뭐가 특별한가?

"시인이 쓴 산문에는 특유의 열정과 농밀함, 시적 정신이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시인의 산문에서만 볼 수 있는 주제도 있다. 그것은 바로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이다." 때문에 "시인의 산문은 전형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서사 구조를 취한다. 하나는 회고록의 형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이다."

(1)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 "자신이 모델로 삼는 사람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그들과의 결정적 만남의 순간(실생활에서든 문학작품 속에서든)을 환기하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자아를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한다.

(2)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산문은 주로 시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서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자아는 바로 시인의 자아이며, 일상의 자아는 가차 없이 희생된다. 시인의 자아야말로 진정한 자아이며, 다른 자아는 시인의 자아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시인의 자아가 죽으면 그 시인도 죽는다."

아직 그녀의 산문이 한권도 소개되지 않은 상태라 자세히 늘어놓기는 멋쩍은데 아무튼 1939년 망명에서 돌아온 그녀가 194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정도는 명기해둔다. 손택은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이런 애수어린 어조는 단지 추방이라는 츠베타예바의 개인적인 비극 때문만은 아니다. 1939년 소련으로 돌아오기까지(그후 1941년 8월, 그녀는 영원한 내면적 추방이라 할 수 있는 자살을 한다)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지독한 궁핍과 고독 때문만도 아니었다. 시인은 산문을 통해 늘 자신의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애도한다. 추억이 스스로 말하게 하거나 아니면 흐느껴 우는 것이다."(202쪽)

그러니까 손택이 보기에 츠베타예바의 산문에 나타나는 비가(엘레지)적 정조는 그녀의 개인사와 무관하게 '시인의 산문'이 갖는 본질적인 속성이다. 다소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내용을 따라가는 데 부정확한 번역이 눈에 거슬린다는 점. 인용문에서 괄호안에 들어간 문장은 "where, now an internal exile, she committed suicide in August 1941"을 옮긴 것인데, 역자가 '자살'의 등가어로 읽은 '영원한 내면적 추방'은 츠베타예바에 대한 규정이다. 물론 'an internal exile'은 '영원한 내면적 추방'이 아니라 '내적 망명자'를 뜻한다(파스테르나크 또한 그런 '내적 망명자'였다). 다시 옮기면, "소련에서 이젠 '내적 망명자'가 된 그녀는 1941년 8월에 자살했다." 아래는 1939년의 츠베타예바.  

 

츠베타예바에게 "시인이 된다는 것은 고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츠베타예바는 '가장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산문에서는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 고양된 분위기를 창아볼 수 있다. 어떤 현대 작가도 그녀처럼 자신의 감정을 숭고에 가깝게 경험한 사람은 없다."(203쪽) 마지막 문장은 "no modern writer takes one as close to an experience of sublimity."를 옮긴 것인데, 어디에서 "그녀처럼 자신의 감정을 숭고에 가깝게 경험한 사람"이란 번역이 나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따라서 마지막 인용에 대한 결정적인 오역은 이미 예비된 것이기도 하다.

"츠베타예바는 이렇게 지적한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지는 못한다. 하지만 같은 책에 발을 두 번 담근 사람은 있지 않은가?'"

풀어서 얘기하면,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지는 못하지만 책에는 발을 두 번 담근 사람이 있다? 이 '어이없는' 오역 때문에 여기저기 검색을 하느라 손품을 팔았다. 원문은 "As Tsvetaeva points out, 'No one has stepped twice into the same river. But did anyone ever step twice into the same book?'"이고, 원문에는 출처가 따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푸슈킨과 푸가초프'라는 유명한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시인이 어릴 때 푸슈킨의 <대위의 딸>을 읽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푸슈킨은 대개의 러시아 시인들에게처럼 츠베타예바에게도 우상이었다). '푸슈킨과 푸가초프'는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나의 푸슈킨>에 수록돼 있다.  

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Мой Пушкин 

오역한 문장의 문맥은 이렇다: "There are books so alive that you’re always afraid that while you weren’t reading, the book has gone and changed, has shifted like a river; while you went on living, it went on living too, and like a river moved on and moved away. No one has stepped twice into the same river. But did anyone ever step twice into the same book?"

츠베타예바의 경구로 자주 인용되기도 하는 단락인데 러시아어 원문도 참작하여 우리말로 옮겨보면, "모든 책은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지 않는 동안 책이 마치 강물처럼 사라지거나 달라지지 않을까 혹은 흘러가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책 또한 살아가며,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간다.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은 책에 두 번 발을 담근 사람은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요는 책 또한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우리는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같은 책'이란 없어요...

07.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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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23 03:52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한 명쾌한 지적 잘 읽었습니다. 이래서 더욱 번역본 사기가 저어된다는...ㅠㅠ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영역본은 일전에 올려주신 "A Captive Spirit"이 괜찮은가요? 한 번 읽어보고 싶어서 여쭤봅니다.^^
(왜 아직까지 러시아어를 배우지 못했던가, 이럴 때 가끔씩 후회가 됩니다...)

로쟈 2007-12-23 11:01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없는 책이이서 'A Captive Spirit'은 아직 못 구했습니다. 영역본이야 제가 판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죠(대개 저보다는 러시아어를 월등히 잘하는 양반들이 번역을 하니까). 러시아어까지 하시면 음악은 어떻게?^^
 

이미 예고돼 있던 것이지만 '가장 쉬운 들뢰즈 입문서'(http://blog.aladin.co.kr/mramor/423844)의 저자 클레어 콜브룩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들뢰즈 이해하기>(그린비, 2007). 원저는 전작인 <질 들뢰즈>(2001)에 연이어 지난 2002년에 나온 것이다. 반면에 두 입문서의 국역본은 3년 터울을 갖게 됐다. 전작을 유익하게 읽었던지라 나는 이 후속작 또한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문했다(본인 선물은 아주 잘 챙기는군). 이주에 새로 나온 이병훈의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한길사, 2007)과 함께(책은 비록 성탄 다음날에나 받게 될 예졍이지만). 책을 먼저 주문하고 관련기사를 찾아서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7. 12. 21) 들뢰즈에 대한 진실 혹은 거짓

지난해 천규석의 책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를 둘러싸고 ‘노마디즘 논쟁’이 뜨겁게 벌어졌었다. 철학자 이정우의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촉발된 논쟁은 홍윤기, 김진석, 이진경 등의 철학자와 작가 김영현 등이 개입하며 확산됐지만 들뢰즈에 대한 ‘이해 차이’만 거칠게 확인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그만큼 들뢰즈 이해가 난해하다는 것뿐 아니라 들뢰즈의 사상이 우리에게 ‘몸으로’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들뢰즈(1925~1995)의 저서 ‘차이와 반복’‘천의 고원’‘앙티 오이디푸스’등은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는 지식층으로부터 가장 주목 받은 책들이었다. 특히 ‘노마디즘’같은 용어는 광고카피에 등장할 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노마디즘 = 들뢰즈주의’라는 심각한 들뢰즈 오독이 퍼져있음을 보여준 사례 중 하나다.



책의 저자는 영미권에 들뢰즈 철학을 쉽게 소개해온 영국의 영문학자다. 그는 들뢰즈의 철학을 ‘차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정리한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차이’라는 것을 부차적이며 불순한 것으로 보는 ‘동일성의 철학’이었다. 헤겔에 이르러서야 ‘차이’의 우선성이 주장되며 이전의 동일성의 철학과 단절이 시작된다. 그는 존재는 그것의 타자, 즉 그것의 부정을 통해 정의되며, 따라서 ‘차이’ 없이는 존재나 동일성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이후 구조주의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차이’를 더 심화시켜, 사고나 개념화 이전에 차이를 조직하는 표식들의 체계, 즉 언어 같은 ‘차이’의 구조가 먼저 있다고 주장했다.

들뢰즈는 더 근본적인 단절을 말한다. 들뢰즈는, 차이는 외적인 절대자는 물론 구조에 정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동하고 창조하는 것이며 오히려 주체나 구조는 선행하는 차이가 환원됨으로써 생겨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차이’는 엄밀히 말해 ‘차이생성’이며, 차이는 바로 차이생성이 산출해낸 효과와 다름없다고 강조한다.

옮긴이는 후기에서, ‘노마디즘 논쟁’에서 드러난 우리사회의 들뢰즈 이해는 차이, 생성, 탈주, 노마드 등을 하나의 ‘결론’ 내지 ‘강령’처럼 생각하면서 동일성의 ‘반립’으로 놓아버리거나, 아니면 마치 초월적 항(項)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차이, 생성, 탈주, 노마드 등이 성립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즉 차이는 차이이되 헤겔식의 부정적 차이나 구조주의의 개념적 차이로 봉인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엄주엽기자)

2007. 12. 22.

Жиль Делез, Феликс Гваттари Анти-Эдип. Капитализм и шизофрения L'anti-edipe: Capitalizme et schizophrenie

P.S.콜브룩을 읽는 김에 겸사겸사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도 다시 손을 대봐야겠다. 다행히 올해는 러시아어본도 출간됐기에 예전에 읽을 때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생업도 포기한다면 <차이와 반복>까지 건드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요며칠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는 사실 들뢰즈가 아니라 울리히 벡이다. 특히, <위험사회>(새물결, 2006 재판)가 아니라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새물결, 2000)와 <지구화의 길>(거름, 2000)에 눈길이 간다. 세기의 문턱에서는 챙겨두지 않다가 뒤늦게 발동이 걸린 셈이다(<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는 그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구화의 길>은 품절됐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한길사, 2003)과 함께 새해에 '가장 먼저 읽어볼 책' 후보들이다. 하지만 이 책들은 모두 주문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위험가계'가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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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22 17:31   좋아요 0 | URL
앙띠-오이디푸스 한국어 번역본은 한자어가 꽤나 많이 등장하더군요 : (
이번 겨우내 읽어내야할 책들 중 하나인데, 마음 단단히 다잡아야겠어요- : )

로쟈 2007-12-22 17:44   좋아요 0 | URL
짐작엔 역어를 잡을 때 일역본을 많이 참조해서 그럴 겁니다. 푸코의 <말과 사물>도 그렇구요...

2007-12-22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2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12-23 03:41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유머가 이 밤 저에게 웃음을 주네요.^^ "생업도 포기한다면", "위험가계" 등의 구절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또 혼자서 웃어버렸습니다(옆에 다른 사람이 없기에 다행입니다).

로쟈 2007-12-23 11:01   좋아요 0 | URL
썰렁한 유머에 그렇게 약하시다니!^^;
 

올해의 마지막 '경이'는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이다. <채플린 - 나의 자서전>(김영사, 2007)가 문제의 책인데, 국내 최초의 완역판이어서 분량이 1,000쪽이 넘는다(이 책에 견줄 만한 건 작년에 나온 패트릭 맥길리건의 <히치콕>(을유문화사)이나 세르주 투비아나 등의 <트뤼포>(을유문화사) 정도이다. 물론 이 두 권은 자서전이 아니지만). 물론 그 부피에 걸맞은 삶의 곡절들이 갈피마다 숨어 있을 터이다. 관련기사를 옮겨놓고 몇 가지 코멘트를 덧붙인다.

 

한국일보(07. 12. 22) '희극광대' 찰리의 위대한 비극

콧수염, 헐렁한 바지, 커다란 구두, 지팡이, 중산모를 쓴 우스꽝스러운 거지신사의 모습으로 대공황기의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찰리 채플린(1889~1977). 채플린이 자서전을 쓰고 있던 1960년대초 한 여류소설가는 “당신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를 가졌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4번의 결혼과 수많은 스캔들로 점철된 채플린의 여성편력을 의식한 궁금증이었던 것. 그러나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나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달리 섹스가 인간의 복잡한 심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위, 배고픔, 그리고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 등이 한 사람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는다.

<키드> <모던타임스> <황금광시대> 등 무성영화사를 수놓을 만한 탁월한 작품을 통해 백만장자가 됐지만 채플린의 예술적 자양분은 유년시절의 치욕적인 가난과 혹독한 불행이었다. 연극배우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채플린의 생후 1년 만에 갈라섰고, 술독에 빠져살던 아버지는 서른 일곱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유능한 가수였던 어머니도 후두염 때문에 무대생활을 접어야 했고 정신병에 걸려 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소년들처럼 런던의 빈민구호소를 들락날락하던 채플린은 5세 때부터 무대에 서야 했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잡화점 심부름꾼, 진료소 청소부, 인쇄소 직공 등을 전전해야 했다. 성공한 인물들 이면에는 가난과 불행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채플린의 위대함은 그것을 유머로 승화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채플린- 나의 자서전>이 처음으로 완역됐다. 번역본의 분량이 1,0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만큼 작품세계 이외에는 잘 알 수 없었던 채플린의 사랑, 성공과 실패 등 사생활과 공생애의 전반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그의 말이 대변하듯 비극을 유머로 극복하고 그것을 예술로 환치시킨 채플린의 낙천적 세계관을 확인하고 거기서 생에 대한 힌트를 얻어낼 수 있다면 책 두께만큼의 충분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의 미덕이라면 휴머니즘으로 귀착되는 자유주의적 철학을 육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2차대전 중 독일과 싸우고 있던 소련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자는 연설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오인 받아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미국에서 쫓겨나지만, 실상 정치적 이념은 강력한 반(反) 파시즘이었다.

나치 같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파시즘의 질료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심지어 애국주의에 대해서조차 비판적이다. 그는 애국주의에 대해 “햄버거나 코카콜라 같은 지엽적인 습관에 길들여지고 학습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맹목적으로 고국을 사랑하고 충성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요구는 나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유성영화시대에 들어서도 그가 히틀러를 풍자하는 <위대한 독재자>(1940) 같은 명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철학이 뒷받침 됐기 때문일 것이다. 풍부한 사진자료와 처칠, 사르트르, 흐르시초프(*흐루시초프), 카잘스, 아인슈타인 등 그가 만났던 20세기의 명사들에 대한 품평을 엿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1964년작.(이왕구기자)

07. 12. 22.

P.S. 한편으로 어제 잠시 들춰본 벤야민의 책에도 채플린 얘기가 나온다. 이번에 나온 선집 중 한 권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 수록돼 있는데, '채플린'이란 짧은 글 외에도 '러시아 영화예술의 상황에 대하여'에 '러시아 채플린'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눈길이 갔다. 러시아에 좋은 외국영화들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빚어지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벤야민은 이렇게 덧붙인다.

"러시아의 개별 예술가들에게는 여기서 비롯되는 관중들의 무지가 편리한 측면이 있다. 일진스키는 채플린을 매우 부정확하게 모방하여 작업하면서 오로지 채플린이 러시아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희극배우로 통하고 있다."(228쪽)

'일진스키'는 역주에 Igor Vladimirovich Iljinsky(1901-87)로 소개되고 있는데, '일진스키'가 아니라 '일린스키'로 읽어야 한다(표기의 'j'는 'y'와 호환되는 반모움이다). 즉 벤야민이 언급하고 있는 희극배우의 이름은 '이고르(이고리) 일린스키'이고 1927년에 젊은 배우였던 일린스키는 이후에 국민배우로 성장한다(내게도 굉장히 낯이 익은 배우이다). 그가 '러시아의 채플린'이었다는 것. 

마야코프스키의 <빈대>(1928)와 메이에르홀드가 연출한 고골의 <검찰관>(1926)에 출연하기도 했던 일린스키의 영화데뷔작은 유명한 소비에트 SF영화 <알리에타>(1924)였다. 내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일린스키는 엘다르 랴자노프의 데뷔작인 뮤지컬 코미디영화 <카니발의 밤>(1956)에서의 일린스키다(해빙기를 대표하는 영화의 하나다). 해빙기 청춘남녀의 사랑과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를 다룬 이 영화에서 일린스키는 고루하면서도 코믹한 관료로 등장한다(http://www.youtube.com/watch?v=Rss5fhpEo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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