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파일을 찾다가 문득 10년전 메모를 들추게 됐다. 딱 10년전 가을에 메모해둔 것인데, 얼마 안되지만 이런 메모는 보통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한 용도였다(두엇은 이미 써먹은 듯하다). '젊은날'의 기억이 잠시 떠오른다(따져보면 '국민의 정부'도 들어서기 전이고 IMF사태 직전이었다!). 여하튼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런 메모에 주석을 붙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지만 지금은 기력이 없다. 그냥 창고에 넣어둔다...

1. 인간의 모든 사유에 규범적 기능을 담당하는 이성 없는 삶, 다소간이나마 이성적이 아닌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의 삶이며, 이성적 활동, 즉 진/위, 선/악, 미/추를 가려내는 충동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즉 인간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것이며, 이성이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나 서로 갈등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려는 다원주의는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박이문, <이성은 죽지 않았다>, 당대, 1996, 29쪽)

2.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조건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구는 우주에서 유일한 인간의 거주지이다.(50쪽) 나는 한편으로, 인간조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영속적이며 인간조건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상실될 수 없는 일반적 인간능력을 분석하는 데 나의 논의를 제한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역사적 분석을 하고자 한다. 이 분석의 목적은 근대의 세계소외, 즉 지구로부터 우주에로의 탈출과 세계로부터 자아 속으로의 도피라는 이중적 의미의 세계소외를 추적함으로써, 아직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시대의 출현으로 인해 거의 압도될 시점에 도달한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54쪽)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3. 여기서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라고 할 때 그 어떤 것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령 '이탈리아에서 금년에 난 포도알의 수'는 실지로 어느 누구에 의해서 헤아려지고 말고와 관계 없이 일정한 것으로서 있는 것이요 이 수를 그대로 표현하는 명제가 진리이다... 후설의 심리학주의 비판은 이런 이념적 세계의 객관적 존립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한전숙, <현상학>, 민음사, 1996, 86쪽)

4. 미학의 역사야말로 세계가 주관화되는 영역,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가 뒤로 물러나는 가장 탁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물러남이 바로 긴 진행과 정의 끝에서 볼 때 현대문화를 특징짓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뤽 페리, <미학적 인간>, 방미경 옮김, 고려원, 1994, 29쪽)



5. 토드 솔론즈(<인형의 집으로 오세오>): “이 영화는 코미디로 만들어졌다. 코미디는 격렬한 고통을 다루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욕을 견디려는 안간힘 속에서 나는 우습고도 통렬한 무엇을 발견한다.”(<씨네21>, 97. 10. 7,  57쪽)



6. 미셀 세르: “철학이 세상을 폐기 처리해 버린 지 몇십 년 되었습니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예로 들어봅시다... '지각'이라는 개념은 우선 '지각'이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한다는 지적으로 이 책은 시작됩니다. 단지 단어들이 문제되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접근방식은 다릅니다. 나는 우선 내가 느끼는 보르도 포도주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보르도 포도주를 마실 때, 나는 단어들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1900년 혹은 1920년 이래로 철학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철학자들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있고, 그것이 쓰레기통이 아닌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대담: 지식의 항해’, <세계사상>, 97년 가을호,  324-6쪽)

翻身11

7. 유중하: “개망나니 도박꾼에서 혁혁한 홍군의 전사로의 변화를 가리키는 중국어 단어가 있으니 그것을 ‘번신’(翻身)이라 한다. 번신이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면 몸(身)을 뒤집는다(飜)는 뜻. 왜 뒤집는가. 갓난아이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워 있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배로 방바닥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배밀이이다. 배로 방바닥을 밀자면 그보다 앞서 몸을 한바퀴 뒤집어야 하는 법. 갓난아이가 그 이름도 거룩한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려면 번신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씨네21>, 제155호, 98. 6. 9, 60쪽) 변신(變身)과의 비교.

 

07.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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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일까? 싶은 책들에 대한 리뷰만큼 요긴한 게 없는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의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들녘, 2007)가 궁금한 책이고(긴가민가한 책이고) 아래의 리뷰가 요긴한 리뷰이다. 소개에는 "독일의 과학 저널리스트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가 저명한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특히 신경학자들을 방문하여 ‘나’라는 작은 우주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책"이라고 돼 있다. 워낙 심상한/식상한 주제이기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게 되지만 이 책의 강점은 작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 그러니까 나름 '최신의' 연구성과들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경향신문(07. 10. 20) 진정한 ‘나’란 없다

마흔살의 여성 로슬린 Z는 자신이 남자라고 믿는다. 스스로를 자기 아버지라고 믿었으나 이따금 할아버지라고 말한다. 아버지 이름으로 불러야 대답하고, 서류 서명도 아버지 이름으로 한다. 삶의 이력에 대한 질문에 아버지의 인생을 설명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로슬린은 카프그라 증후군을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다. 그것도 자기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는 극히 특수한 내적 변신 사례다.

쉰한살의 건축 노동자 토미 맥휴는 가벼운 뇌출혈을 겪고 나서 혁명에 가까운 경험을 한다. 응급수술을 받은 지 2주일 만에 갑자기 그럴 듯한 시를 쓴다. 뿐만 아니다. 솜씨를 인정받아 여러 화랑에서 작품 전시회까지 여는 미술가가 됐다. 과학적으로도 소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여자 주인공 트리니티가 ‘경험된 가상’을 남자 주인공 네오에게 설명하면서 던지는 이런 물음과 흡사한 광경이다. “완벽하게 현실인 듯한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어? 네가 이 꿈에서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게 실제이고 어느 게 꿈인지 어떻게 알지?” 로슬린 Z와 토미 맥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극단적인 두 사례에서 엿보이듯이 ‘진정한 나’의 정체성은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달리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독일 과학 저널리스트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가 함께 지은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원제 ICH, Wie wir uns selbst erfinden)는 철학이나 종교적으로만 들리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과학적으로 궁구한다. 종반부를 보면 자연과학과 철학·종교의 접목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멀쩡한 ‘나’를 잃어버릴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어서다. 실제로 여러 명의 ‘나’로 인식되거나 ‘나’가 아닌 것으로 자각되는 생생한 실례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래선지 지은이들은 들머리에 먼저 ‘부작용에 대한 경고’를 써 붙였다. 혹시 책을 읽고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해서일까? 아무튼 경고문의 제목이 더 겁을 주는 듯하다. ‘인간의 기억은 위대한 쇼다.’ 성자(聖者)들은 흔히 ‘진정한 나는 내 안에 있다’며, 깨달음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라고 안내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나’란 것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인류가 여태껏 생각하던 ‘나’는 ‘조작된 나’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점에서는 불교와 라마교에서 ‘나’가 없다는 명제와 일치하는 것 같다.

인간이 ‘나’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순전히 ‘기억’ 덕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이 기억은 거의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고 지은이들은 최근 연구결과를 토대로 입증한다. 결국 기억이라는 게 ‘나’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매듭짓는다. 기억은 한정된 뇌 영역에 저장됐다가 ‘자서전적인 나’를 구성하는데, 이런 나에게서 기억을 뺀다면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인류가 수백만년 동안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숙제인 ‘참 나’에 관한 탐구를 오싹한 연역법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것도 시종 기존 관념을 무너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마음과 몸을 이원적으로 생각하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은 틀렸다. 마음은 백지장 같고 경험에 의해 모든 지식이 쌓인다는 경험론도 허구다. 나 안에는 고정된 성격이란 없다. 통일된 사령부가 없는 것은 물론 ‘왕이 없는 제국’이다.

새로운 견해와 학설도 적잖게 소개된다. 인간은 자유,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기존의 견해는 일종의 ‘망상’이다. 어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안다.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성격이 혼재할 수 있다. 사람의 성격은 쉰살이 넘어도 변한다. 성역처럼 여겨지던 프로이트식 무의식이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는 이론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물론 저자들이 새로 발견하거나 창조한 내용은 아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축적한 지식의 집합체다.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든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민족학자, 문화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신경학자들의 노력이 망라됐다. 그 가운데서도 신경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사례가 풍성하게 인용된다. 책에는 전문가들만이 쉽게 알 수 있는 생경한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타나지만 보통 독자들의 눈높이를 감안한 언론인들의 글솜씨인지라 능히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해’ 하고 자아찾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다. 그런데 ‘나’가 없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저자들은 이렇게 충고한다. “여러분의 ‘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그리고 나서 저자들은 자연과학도답지 않게 사회과학적인 마무리 말을 던진다. “‘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라고만 말하는 것은 타락이며, 스스로를 해체하는 행위다. ‘나’는 ‘우리’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저자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인 셈이다. ‘소우주’인 ‘나’에 대한 긴 탐험의 맺음말로는 좀 엉뚱한가?(김학순 선임기자)

07. 10. 19. 

P.S. 리뷰를 읽고 떠올린 책은 두 권이다. "사회과학에서 개념화, 이론화해 온 ‘자아’에 대한 현대의 논쟁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책"이라고 소개된 <자아란 무엇인가>(삼인, 2007). 원제 자체가 'Concepts of The Self'(2001)인데, 자연과학쪽 얘기가 많이 들어간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와 보완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 하지만 분량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게 약점. 260쪽 정도의 분량이면 이 주제에 관하여 그냥 '맛보기'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한권은 다니엘 데닛(데넷)과 더글라스 호프스태터가 같이 엮은 <이런, 이게 바로 나야!>(사이언스북스, 2001). 원저는 'The Mind's I: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1981)이고 짐작에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보다 더 술술 읽히는 책이다. 다만 1981년에 나온 것이라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는 책으로선 좀 오래된 감이 있다. 어떤 경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원서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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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0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술 2007-10-20 16:27   좋아요 0 | URL
흥미 땅기는 책이네요.

로쟈 2007-10-21 00:30   좋아요 0 | URL
의외로 관심들을 가지시는군요.^^

이리스 2007-10-20 16:42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굉장히... 에잇, 구입하겠어요!

로쟈 2007-10-21 00:29   좋아요 0 | URL
^^
 

'로쟈의 페이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예의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이다. 정작 내가 아직 손에 들지 않은 책들도 많은데, 특히 마지막에 거론한 <백낙청 회화집>이나 한창기 선생 문집 등은 나의 재력으론 감당할 수 없고 도서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야겠다. 그런 식으로 또 한 계절이 지나가누나... 

깊어가는 가을 독서의 여정은 ‘무시무시한 책’부터 시작해보자. 노엄 촘스키가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풍부하며, 명료하다.”며 격찬한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 바로 이 ‘무시무시한 책’이다(실상 무시무시한 건 책이 아니라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사다리 걷어차기>(부키, 2004) 이후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치명적인 덫에 대해서 신랄하게 폭로해왔다. 하여 ‘우리시대의 경제학 멘토’에게서, 덩달아 ‘무시무시한 인간’이 되지 않고도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을 얻어 보도록 하자.

 

 

 

 

그리고 여차하면 아이비리그의 경제학 멘토 로버트 프랭크의 <이코노믹 씽킹>(웅진지식하우스, 2007)의 도움도 빌리자.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걸핏하면 ‘경제’를 말하는 이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부수적으론 “인문학 교수들은 왜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할까?” 간파하기 위해서도(사실 어려운 질문은 아닌데, 박식함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이 권위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경제문제가 ‘해결’이 되면, 보다 근원적이거나 거시적인 관심을 가져보자. 프랑스의 인문학자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2007)은 아마도 최근에 나온 가장 방대한 이론서일 텐데, 부피에 걸맞게 문학, 인류학, 사회이론, 심리학, 종교사를 모두 아우르는 상상력 연구의 고전이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26055). 곧바로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진형준 교수의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문학과지성사, 1992)이나 송태현 교수의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살림, 2005)을 미리 참조하는 게 좋겠다. 전자는 뒤랑의 신화방법론을 다루고 있는 연구서이고, 후자는 뒤랑의 상상력 이론을 융, 바슐라르의 이론과 함께 개관하고 있는 책이다.

 

 

 

 

거시적인 것으로 치자면 문명론을 빼놓을 수 없겠다. 임철규 교수의 <그리스 비극>(한길사, 2007)은 서양문명과 정신사의 한 기원이라 할 '그리스 비극' 전체를 깊이 조명하고 있는 연구서로서 이 분야의 국내서로는 가장 두툼하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17149). 천병희 교수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나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를 읽고서 매혹과 함께 갈증을 느낀 독자라면 이 계절에 도전해볼 만한 책이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그리스문명학의 권위자 장 피에르 베르낭의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주저의 하나인 <그리스인의 신화와 사유>(아카넷, 2005) 외에도 <그리스 사유의 기원>(길, 2006), <베르낭의 그리스 신화>(성우, 2004) 등이 소개돼 있다. 이 경우에도 김재홍 교수의 <그리스 사유의 기원>(살림, 2003)을 길잡이삼아 먼저 읽어볼 수 있겠다.

 

 

 

 

 

 

 



 

기원으로서 그리스 문명론과 함께 읽어봄 직한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1875)과 그에 대한 자세한 읽기이다. 지난봄 마루야마 마사오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2007)에 이어서 고야스 노부쿠니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역사비평사, 2007)가 김석근 교수의 노고로 최근에 한국어본을 얻었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11057). 후쿠자와의 책은 일본 근대사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독해둘 만한 책이니 두 권의 ‘참고서’는 아주 요긴하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정작 <문명론의 개략>(홍성사, 1986)이 절판된 지 오래되었다는 점(그의 자서전도 소개된 마당인지라 이런 ‘공백’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상상력과 문명에 대한 풍족한 독서의 여정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다시 우리가 내딛고 있는 현실적 지반이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책들도 그런 의미에서 챙겨둘 만하다. 한국 현대 지성사의 산 증인이자 사상계의 거목 백낙청 교수의 <회화록>(전5권, 창비사, 2007)은 말 그대로 ‘우리시대 지성사 40년의 집대성’이다. 더불어, 월간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발행인이자 편집이었던 고(故) 한창기 선생의 문집 <배움 나무의 생각>(휴머니스트, 2007) 외 두 권도 지난 시대의 소중한 발자취로 기억해둠 직하다.

 

 

 

 

그럼, 이제 챙길 건 다 챙기고 기억할 건 다 기억한 것인가? 앗, 유령들을 빼놓았다! 새 번역본이 나온 ‘무시무시한 책’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은 각자가 상대하시길!..

 

 

07. 10. 19.

 

 

 

 

 

 

 

 

 

 

P.S. 분량상 다루지 못한 책들 가운데 가장 흥미를 끄는 책은 타니아 모들스키의 <너무 많이 알았던 히치콕>(여이연, 2007)이다. 원제는 'Hitchcock & Feminist Theory'(히치콕과 페미니즘 이론)라고 뜨는데, 찾아보면 '너무 많이 알았던 여자들'이 타이틀이고 그건 부제로 돼 있다. 여하튼 페미니즘 이론으로 히치콕의 영화들을 독해하는 책인 듯하다.

 

 

문득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자세히 읽던 기억이 난다. 좀 으스스한 그의 영화세계로 떠나가보는 것도 계절을 나는 한 가지 방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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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0-1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아니라 이미 겨울입니다.. 가을 자켙은 하루이틀 걸치는 것으로 제 임무를 다하는군요. 가을이 가도 저 무시무시한 책들은 독서리스트에 올립니다. <그리스 비극>과 <나쁜 사마리아인>. 그리고 저 지젝도 최근에 다시 읽고 있어요.
건물의 창들이 좀 비현실적으로 보여요. 그 안에 것이 궁금해지지 않을 정도로^^

로쟈 2007-10-19 20:0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직 한달이 남았는데요.^^; 건물 사진은 아마 영화 스틸사진일 겁니다(자연스레 '비현실적'인)...

2007-10-20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20 12:21   좋아요 0 | URL
'참으로 열심히' 읽지는 마시길. 저도 가끔 사기를 당하니까요.^^;

Kitty 2007-10-2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페이퍼에서 무려 지금 읽는 책을 발견하다니 감동(?) ㅠㅠ
Economic naturalist(이코노믹 씽킹?;;) 읽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소개해주신 책들 언제나 감사히 잘 참고하고 있습니다 ^^

로쟈 2007-10-20 12:22   좋아요 0 | URL
사실 경제학 책 두 권은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들이죠.^^ 이미 베스트셀러들이니까요...

lastmarx 2007-11-0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대 대학원신문을 보니 4면에 실렸더군요. 인터넷 서평꾼이라는 겸손한 소개와 함께. 로쟈님을 종이로 접하니 색다른 반가움이 또르륵.

로쟈 2007-11-04 09:52   좋아요 0 | URL
편집자가 제목을 더 그럴 듯하게 붙였더군요.^^;

lastmarx 2007-11-04 11:42   좋아요 0 | URL
6면의 제 글은 '가라타니'를 '가라타니 고진'으로 고쳤으니 고쳤다고 할 수도 없는데, '무시무시한 책과 가을나기'는 로쟈님이 붙인 게 아니었군요. 일교차도 심한데.

로쟈 2007-11-04 11:59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타이틀은 그냥 편집자가 알아서 붙입니다. 저도 쓰신 글은 봤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10/021162000200710180681029.html)를 옮겨놓는다(목차에는 '로쟈의 인문학산책'으로 돼 있던데, 이런 가을날에 정말 '산책'쯤 떠나고 싶다! 허구한 날 '서재'가 웬말이냐!). 제목은 '공부란 무엇인가'로 나갔지만 결론적으로는 '인문학습'에 방점이 두어지기에 '문제는 인문학습이다'로 바꿔단다. 문제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습이다, 란 뜻으로 읽히면 좋겠다(내 생각에 우리에겐 '인문학'이 모자라는 게 아니다. '인문학습'이 부족한 거다. '학문'은 학자들께서 다들 열심히 하지 않는가?).  

한겨레21(07. 10. 18) 공부란 무엇인가

지난주가 ‘인문주간’이었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올려 인문학의 부흥을 꾀하자”는 취지로 지난해부터 정부기관에서 열고 있는 행사로 올해의 주제는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었다. 거꾸로 짚어보자면, 한국 사회가 닫힌 사회이고 소통이 차단된 사회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문학이 그동안 닫힌 학문이자 불통인 학문이었다는 것인가? 진의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인문학 공부와 관련된 책들을 몇 권 들추게 된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이고 공부란 무엇인가를 되새겨보기 위해서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란 부제를 단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그린비 펴냄)부터이다. 호모 쿵푸스? ‘쿵후하는 인간’ 곧 ‘공부하는 인간’의 재기발랄한 명명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호모 쿵푸스의 또 다른 이름은 ‘호모 부커스’이니 이는 또한 ‘책 읽는 인간’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해주고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를 지정해주는 종차(種差)라는 것이다. 그러니 돈과 출세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존재와 자존(自尊)을 위한 공부이다. 그래서 ‘인생역전’은 이 사태를 지시하는 문구로 부족해 보인다. 공부는 ‘그저 인간’인가, 곧 ‘제3의 원숭이’ 혹은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인간’인가를 판별해주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은 없다.

중용이란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그러한 무지와 대중 기만에서 탈피하기 위해 책읽기에 나선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공부>(랜덤하우스 펴냄)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이탁오의 말.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장정일은 이 글을 보고 핑, 눈물이 돌았다고 적었다. 당신 또한 영문도 모르고 앞사람을 따라 짖어댔다면 ‘한 마리 개’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저자의 고백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새삼 ‘호모 쿵푸스’로 진화하는 수밖에. 마흔이 넘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몸으로 한다. 강유원의 잡문집 <몸으로 하는 공부>(여름언덕 펴냄)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가는” 것이다. 이 ‘지행합일’의 정신은 사실 저자의 지적대로 <논어>의 첫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배우는 ‘학’은 정신의 일이고 익히는 ‘습’은 몸의 일이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힌다. 이것이 이론(배움)과 실천(실습)의 합일이고 일치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습’이 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문학습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신영복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 펴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저자는 감옥에서 같은 감방지기인 노촌 이구영 선생에게서 동양고전과 한학을 배운다. <강의>는 경제학자인 저자가 그러한 인연으로 얻은 배움을 학생들에게 풀어서 나누어준 기록이다. 그의 풀이를 따르면, ‘習’(습)이란 글자는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을 나타낸다. 자신이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실습할 때, 곧 가르칠 때의 기쁨이 ‘학습’의 기쁨이다(어린 새들이 날갯짓하는 걸 바라보는 기쁨!). 이 때문에 ‘학습’은 혼자만의 ‘공부’로는 얻을 수 없는 ‘배움의 변증법’을 달성한다. 물어서(問) 배우고(學) 이를 실천하라(習)! 인간의 길이고 인문학습의 길이다.

07. 10. 19.

P.S. '강유원'을 검색하다가 유사한 컨셉의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짐작에는 한겨레21의 칼럼을 참조한 듯싶다.

문화일보(07. 11. 05) 고미숙·강유원씨의 ‘인문학 공부를 위한 조언’

‘나이들어’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우선 공부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활동중인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그린비), 철학자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여름언덕)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고씨는 우리들이 학교에서 해온 공부가 ‘수단으로서의 공부’였기에 즐겁지 않은 일이었으며 그것은 ‘근대’ 이후 뿌리박힌 공부에 대한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공부는 인간의 본능이자 삶의 기쁨이기에, ‘앎의 즐거움’과 ‘배움의 열정’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먼저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선입견을 버리라고 말한다. 제도교육은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을 한 장소에 모아 놓고 제도에 적응하게 하는 ‘관리’와 ‘훈육’을 해왔다며, 거기에서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이 주입되고,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에서 ‘해방’돼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에 대해 시야가 넓어진 성인이 되었을 때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그때 배우는 기쁨도 더 크다는 것이다. ‘호모 쿵푸스’란 ‘공부(工夫)하는 인간’을 말한다. 또 ‘호모 부커스’라고도 하는데 이는 ‘책 읽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는 곧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인 철학자’란 별명을 갖고 있는 강유원씨는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란 글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그가 강조하는 ‘비법’은 ‘베껴라’라는 것이다. 이는 표절을 하라는 뜻이 아니고, ‘초보자는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강씨 자신이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를 50번 읽으면서 ‘눈이 트이는’ 과정을 겪었다.

그는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막아주고,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몸으로 하는 공부’를 강조한다. 심화과정으로서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간다”는 것이다. ‘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배우는 ‘학(學)’은 정신의 일이고 익히는 ‘습(習)’은 몸의 일인데, 이는 곧 이론(배움)과 실천(실습)의 합일이고 일치라는 것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공부가 아니더라도 두 저자의 지적은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직장인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엄주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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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0-19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좋은데 한겨례 21에 나오는 로쟈님글은 너무 짧습니다. 편집진의 요구인 것 같은데 읽다보면 갑자기 뚝 그치는 것이 꼭 무슨 X싸다가 만 것 같은 느낌. 이렇게 짧아서야 어디 "인문학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나요?
한겨례 21은 로쟈님에게 무한대의 지면을 할애할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

로쟈 2007-10-19 14:30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이번엔 지면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렸는데, 그렇다고 매번 길게 쓸 만한 기력이나 내공도 못 되지요.^^;

raipai 2007-10-1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 로쟈님의 글을 매일 훔쳐보고 있는 독자입니다. thanks to도 꽤 하고 있고요. 주간지 구독비용 정도를 지불하고라도 글을 보고 싶은 독자입니다.
/ 제목을 보고 <공부에 관한 로쟈의 생각>이 궁금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소개된 순서대로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주면 적절하겠단 생각이 드는데, <네 명의 개소리^^:>말고 로쟈님의 외치는 소리,가 더 그립단 생각이..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한겨레에서 못다한 <로쟈의 공부론>을 이 곳에서 읽어보고 싶네요. ^^v
/(사족)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한길그레이트북 거의 전질이 개포고등학교 옆 <서적백화점 567-9876>에 여러질 나왔습니다. 50% 가격에. 또 러시아 원서는 홍제동 대양서점http://cafe.naver.com/daeyangbook에 꽤 많이 나왔습니다. 쥔 형님이 러시아어를 다룰 줄 몰라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꽤 많이 나왔답니다.

로쟈 2007-10-19 19:29   좋아요 0 | URL
분량상, 그리고 연재의 성격상 제 생각을 많이 드러내는 자리는 아니고요, 제 공부론은 '공부냐 학습이냐' 같은 페이퍼에 적어놓은 게 있습니다(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책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은 감사합니다.^^

라주미힌 2007-10-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10-22 17:03   좋아요 0 | URL
원래 로쟈하고 라주미힌은 잘 아는 사인데요...^^

뭉실이 2007-10-22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인문학습이다'에 한표 ^^


로쟈 2007-10-22 17:02   좋아요 0 | URL
학습당을 찍으신 건가요?^^
 

학술저널 담비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에 대한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6610). 주로 근작인 <장치란 무엇인가>를 '아감벤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때 기준점이 되는 건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호모 사케르>이다(국역본이 올해 안에 나오는가?). 이래저래 국내에 번역/소개가 늦어지고 있어서 '전설'로만 회자되고 있는데 조만간 한국어로도 실체가 드러나기를 기대한다(가장 최근에 아감벤을 다룬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77009 참조).

동국대학원신문(144호) 아감벤의 진화 혹은 새 출발 

"올해 최고의 책을 뽑으라면 단연 『호모사케르』죠.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나는 이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난 1997년 11월 27일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건축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비릴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비릴리오의 말이 단순한 허사가 아닌 것은 내노라하는 현대 사상가들, 가령 안토니오 네그리나 슬라보예 지젝 등도 이와 유사한 평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모사케르』가 출간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탈리아어 초판은 1995년, 프랑스어본은 1997년에 출간), 이 책의 지은이 아감벤도 꾸준히 진화 중이다.



작년에 출간된 『장치란 무엇인가?』는 약 40쪽 분량밖에 안 되는 팸플릿이지만, 아감벤의 진화를 보여주는 최근의 저서이다(『호모사케르』의 4부에 해당되는 『지배와 영광: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에 관하여』도 올해 초 출간됐다).



일부 사람들(가령 지젝이나 자크 랑시에르 등)은 아감벤의 사유가 염세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감벤은 짐짓 우리 시대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떤 사회적 권리도 갖지 못한 채 삶과 죽음이 유예되는 ‘예외상태’의 최고 단계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삶(la nuda vita)을 살아가는 존재(다른 말로 호모사케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치란 무엇인가?』에서의 아감벤은 이와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이 저서는 아감벤의 진화를 보여준다.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에서 ‘생명정치’라는 개념에 대해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셸 푸코의 논의에 기대서, 그러나 좀더 폭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장치’라는 개념을 분석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푸코는 ‘장치’라는 표현을 쓰기 이전에 ‘실증성’(positivit)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장 이폴리트에게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폴리트에게서 ‘실증성’이란 “청년 헤겔이 규칙, 의례, 제도의 무게와 더불어 외부의 권력에 의해 개인들에게 부과되었으며 …… 신앙과 감정체계 속에 내부화된 역사적 요소에 붙인 이름”이었는데, 푸코는 이를 “권력관계가 그 안에서 구체화되는 제도들, 주체화 과정들, 규칙들의 집합”으로 재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푸코는 이 용어 아래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포착하려고 했다는 것이 아감벤의 해석이다.

그 뒤 아감벤은 그 자신이 ‘장치’라는 개념의 “신학적 기원”이라고 부르고 있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용어를 분석한다(또한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대략 2~6세기 사이인 교회사 초기에 기독교의 교부들은 삼위일체(왜 신은, 혹은 신의 형상은 하나가 아니고 셋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신의 경제’를 말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 때문에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를 도입했다는 것이다(아버지 신은 아들 예수에게 인간들에 대한 ‘경제’, 즉 관리와 통치를 부여한 것이다).

기독교 교부들이 ‘오이코노미아’라는 그리스어를 번역하기 위해 도입한 용어가 바로 ‘장치’(dispositif)라는 용어의 어원인 라틴어 Dispositio이다. 이 “신학적 기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장치란 용어는 존재 안에 최소한의 토대 없이도 순수 통치 활동이 그것으로, 그것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명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치들은 항상 주체화 과정을 함축해야 한다. 장치들은 그것들의 주체를 생산해야만 한다.”는 점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에 근거해 아감벤은 푸코의 ‘장치’ 개념에 더 큰 일반성을 부여한다. “나는 생명체들의 몸짓들, 행동들, 의견들, 담론들을 포획하고, 유도하고, 결정하고, 차단하고, 만들고, 통제하고,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장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감옥, 수용소, 판옵티콘, 학교, 고백, 공장, 규율, 법적 조치들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핸드폰, 그리고 언어 자체도 장치이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아감벤은 “생명체(혹은 실체)-장치들-주체들”이라는 3항 도식을 도출한다.

『장치란 무엇인가?』의 이런 내용이 아감벤의 ‘진화’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추론을 통해서 아감벤은 비로소 주체생산의 이중성(주체화/예속화)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도처에 산재한 장치들은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는 주체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예속화), 이 과정은 장치들(그리고 장치들의 네트워크 자체)과 주체의 맞대응 관계가 무한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주체화). 아감벤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것은 소멸이나 지양이라기보다는 모든 개인적 정체성에 끊임없이 수반되었던 가면극의 차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산종(散種)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다른 현대 사상가들이 했던 말 아니냐고? 맞다. 그러나 답이 같더라도 그에 도달하는 과정이 다르다면 답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아감벤은 자신의 새로운 풀이과정을 통해 ‘저항’이 아니라 ‘세속화’(profanare)를 주체화의 또 다른 방법으로 언급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좌우간 아감벤은 계속 진화중이니, 그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의 진화를 계속 주시할 수밖에.(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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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2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사케르는 정말 나온다 나온다 하는 얘기만 한참 들은 것 같네요 허허.
관련해서 드는 생각인데, 들뢰즈가 죽기 전에 썼다고들 하는 "맑스의 위대성(Grandeur de Marx)"은 왜 아직 소식이 없는걸까요? 혹시 아시나 해서...^^a

로쟈 2007-10-24 23:28   좋아요 0 | URL
나온다던 책 나오지 않고, 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거 같습니다. 들리즈의 책 소식은 '빠리'에서 더 잘 아실 듯한데요. 저로선 그가 썼다는 것인지 쓰려고 했다는 것인지 헷갈리는군요...

비로그인 2007-10-25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는 '빠리'에 없고 서울에 있는데요. 혹시 닉네임 때문에 착각하신거라면 전 빠'라'바람 입니다^^;;

로쟈 2007-10-25 14:36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잘못 봤습니다...

비로그인 2007-10-25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시간 답글이네요^^;; 아무튼 제가 그 얘기를 들었던 건 "노마디즘"에서 였는데 이진경은 "네그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원고는 죽기 직전에 씌어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퇴고하지 않은 채 죽어서 아직 출간이 되지 않은 듯 합니다"라고 적고 있네요. 니콜라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에도 언급이 나와있는데 (http://libcom.org/library/deleuze-marx-politics-nicholas-thoburn-introduction) 썼다는 건지 안썼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다시 관심 접으렵니다ㅋ

로쟈 2007-10-25 16:37   좋아요 0 | URL
미완의 책이라고 하니까 분량이 어느 정도 되면 출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단행본 형태가 아니더라도). 구상 정도였다면 물론 어렵겠고, 그가 따로 불가하다는 유언을 남겼다면 역시 어렵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