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10/021162000200710180681029.html)를 옮겨놓는다(목차에는 '로쟈의 인문학산책'으로 돼 있던데, 이런 가을날에 정말 '산책'쯤 떠나고 싶다! 허구한 날 '서재'가 웬말이냐!). 제목은 '공부란 무엇인가'로 나갔지만 결론적으로는 '인문학습'에 방점이 두어지기에 '문제는 인문학습이다'로 바꿔단다. 문제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습이다, 란 뜻으로 읽히면 좋겠다(내 생각에 우리에겐 '인문학'이 모자라는 게 아니다. '인문학습'이 부족한 거다. '학문'은 학자들께서 다들 열심히 하지 않는가?).
한겨레21(07. 10. 18) 공부란 무엇인가
지난주가 ‘인문주간’이었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올려 인문학의 부흥을 꾀하자”는 취지로 지난해부터 정부기관에서 열고 있는 행사로 올해의 주제는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었다. 거꾸로 짚어보자면, 한국 사회가 닫힌 사회이고 소통이 차단된 사회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문학이 그동안 닫힌 학문이자 불통인 학문이었다는 것인가? 진의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인문학 공부와 관련된 책들을 몇 권 들추게 된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이고 공부란 무엇인가를 되새겨보기 위해서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란 부제를 단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그린비 펴냄)부터이다. 호모 쿵푸스? ‘쿵후하는 인간’ 곧 ‘공부하는 인간’의 재기발랄한 명명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호모 쿵푸스의 또 다른 이름은 ‘호모 부커스’이니 이는 또한 ‘책 읽는 인간’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해주고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를 지정해주는 종차(種差)라는 것이다. 그러니 돈과 출세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존재와 자존(自尊)을 위한 공부이다. 그래서 ‘인생역전’은 이 사태를 지시하는 문구로 부족해 보인다. 공부는 ‘그저 인간’인가, 곧 ‘제3의 원숭이’ 혹은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인간’인가를 판별해주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은 없다.
중용이란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그러한 무지와 대중 기만에서 탈피하기 위해 책읽기에 나선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공부>(랜덤하우스 펴냄)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이탁오의 말.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장정일은 이 글을 보고 핑, 눈물이 돌았다고 적었다. 당신 또한 영문도 모르고 앞사람을 따라 짖어댔다면 ‘한 마리 개’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저자의 고백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새삼 ‘호모 쿵푸스’로 진화하는 수밖에. 마흔이 넘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몸으로 한다. 강유원의 잡문집 <몸으로 하는 공부>(여름언덕 펴냄)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가는” 것이다. 이 ‘지행합일’의 정신은 사실 저자의 지적대로 <논어>의 첫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배우는 ‘학’은 정신의 일이고 익히는 ‘습’은 몸의 일이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힌다. 이것이 이론(배움)과 실천(실습)의 합일이고 일치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습’이 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문학습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신영복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 펴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저자는 감옥에서 같은 감방지기인 노촌 이구영 선생에게서 동양고전과 한학을 배운다. <강의>는 경제학자인 저자가 그러한 인연으로 얻은 배움을 학생들에게 풀어서 나누어준 기록이다. 그의 풀이를 따르면, ‘習’(습)이란 글자는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을 나타낸다. 자신이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실습할 때, 곧 가르칠 때의 기쁨이 ‘학습’의 기쁨이다(어린 새들이 날갯짓하는 걸 바라보는 기쁨!). 이 때문에 ‘학습’은 혼자만의 ‘공부’로는 얻을 수 없는 ‘배움의 변증법’을 달성한다. 물어서(問) 배우고(學) 이를 실천하라(習)! 인간의 길이고 인문학습의 길이다.
07. 10. 19.
P.S. '강유원'을 검색하다가 유사한 컨셉의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짐작에는 한겨레21의 칼럼을 참조한 듯싶다.
문화일보(07. 11. 05) 고미숙·강유원씨의 ‘인문학 공부를 위한 조언’
‘나이들어’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우선 공부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활동중인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그린비), 철학자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여름언덕)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고씨는 우리들이 학교에서 해온 공부가 ‘수단으로서의 공부’였기에 즐겁지 않은 일이었으며 그것은 ‘근대’ 이후 뿌리박힌 공부에 대한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공부는 인간의 본능이자 삶의 기쁨이기에, ‘앎의 즐거움’과 ‘배움의 열정’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먼저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선입견을 버리라고 말한다. 제도교육은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을 한 장소에 모아 놓고 제도에 적응하게 하는 ‘관리’와 ‘훈육’을 해왔다며, 거기에서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이 주입되고,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에서 ‘해방’돼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에 대해 시야가 넓어진 성인이 되었을 때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그때 배우는 기쁨도 더 크다는 것이다. ‘호모 쿵푸스’란 ‘공부(工夫)하는 인간’을 말한다. 또 ‘호모 부커스’라고도 하는데 이는 ‘책 읽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는 곧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인 철학자’란 별명을 갖고 있는 강유원씨는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란 글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그가 강조하는 ‘비법’은 ‘베껴라’라는 것이다. 이는 표절을 하라는 뜻이 아니고, ‘초보자는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강씨 자신이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를 50번 읽으면서 ‘눈이 트이는’ 과정을 겪었다.
그는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막아주고,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몸으로 하는 공부’를 강조한다. 심화과정으로서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간다”는 것이다. ‘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배우는 ‘학(學)’은 정신의 일이고 익히는 ‘습(習)’은 몸의 일인데, 이는 곧 이론(배움)과 실천(실습)의 합일이고 일치라는 것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공부가 아니더라도 두 저자의 지적은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직장인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엄주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