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파일을 찾다가 문득 10년전 메모를 들추게 됐다. 딱 10년전 가을에 메모해둔 것인데, 얼마 안되지만 이런 메모는 보통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한 용도였다(두엇은 이미 써먹은 듯하다). '젊은날'의 기억이 잠시 떠오른다(따져보면 '국민의 정부'도 들어서기 전이고 IMF사태 직전이었다!). 여하튼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런 메모에 주석을 붙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지만 지금은 기력이 없다. 그냥 창고에 넣어둔다...

1. 인간의 모든 사유에 규범적 기능을 담당하는 이성 없는 삶, 다소간이나마 이성적이 아닌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의 삶이며, 이성적 활동, 즉 진/위, 선/악, 미/추를 가려내는 충동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즉 인간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것이며, 이성이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나 서로 갈등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려는 다원주의는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박이문, <이성은 죽지 않았다>, 당대, 1996, 29쪽)

2.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조건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구는 우주에서 유일한 인간의 거주지이다.(50쪽) 나는 한편으로, 인간조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영속적이며 인간조건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상실될 수 없는 일반적 인간능력을 분석하는 데 나의 논의를 제한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역사적 분석을 하고자 한다. 이 분석의 목적은 근대의 세계소외, 즉 지구로부터 우주에로의 탈출과 세계로부터 자아 속으로의 도피라는 이중적 의미의 세계소외를 추적함으로써, 아직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시대의 출현으로 인해 거의 압도될 시점에 도달한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54쪽)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3. 여기서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라고 할 때 그 어떤 것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령 '이탈리아에서 금년에 난 포도알의 수'는 실지로 어느 누구에 의해서 헤아려지고 말고와 관계 없이 일정한 것으로서 있는 것이요 이 수를 그대로 표현하는 명제가 진리이다... 후설의 심리학주의 비판은 이런 이념적 세계의 객관적 존립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한전숙, <현상학>, 민음사, 1996, 86쪽)

4. 미학의 역사야말로 세계가 주관화되는 영역,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가 뒤로 물러나는 가장 탁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물러남이 바로 긴 진행과 정의 끝에서 볼 때 현대문화를 특징짓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뤽 페리, <미학적 인간>, 방미경 옮김, 고려원, 1994, 29쪽)



5. 토드 솔론즈(<인형의 집으로 오세오>): “이 영화는 코미디로 만들어졌다. 코미디는 격렬한 고통을 다루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욕을 견디려는 안간힘 속에서 나는 우습고도 통렬한 무엇을 발견한다.”(<씨네21>, 97. 10. 7,  57쪽)



6. 미셀 세르: “철학이 세상을 폐기 처리해 버린 지 몇십 년 되었습니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예로 들어봅시다... '지각'이라는 개념은 우선 '지각'이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한다는 지적으로 이 책은 시작됩니다. 단지 단어들이 문제되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접근방식은 다릅니다. 나는 우선 내가 느끼는 보르도 포도주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보르도 포도주를 마실 때, 나는 단어들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1900년 혹은 1920년 이래로 철학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철학자들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있고, 그것이 쓰레기통이 아닌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대담: 지식의 항해’, <세계사상>, 97년 가을호,  324-6쪽)

翻身11

7. 유중하: “개망나니 도박꾼에서 혁혁한 홍군의 전사로의 변화를 가리키는 중국어 단어가 있으니 그것을 ‘번신’(翻身)이라 한다. 번신이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면 몸(身)을 뒤집는다(飜)는 뜻. 왜 뒤집는가. 갓난아이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워 있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배로 방바닥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배밀이이다. 배로 방바닥을 밀자면 그보다 앞서 몸을 한바퀴 뒤집어야 하는 법. 갓난아이가 그 이름도 거룩한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려면 번신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씨네21>, 제155호, 98. 6. 9, 60쪽) 변신(變身)과의 비교.

 

07. 10. 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