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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연재한 '로쟈의 인문학서재' 두번째 꼭지를 옮겨놓는다.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책은 기대만큼 잘 씌어지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어서 유익하다. '폭력의 철학'을 구성하기 위한 개요 정도로 읽을 만하며 개인적으로는 <배틀로얄>에 대한 분석 등이 인상에 남는다. 참고문헌도 요긴하다.  

한겨레21(07. 08. 30) [로쟈의 인문학서재] 어떤 폭력을 선택할 것인가

“폭력, 비폭력이라는 범주는 너무나도 다양한 힘으로 충만해 있는 이 세계를 해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한 단어가 아닐까?” 애초의 문제의식이 그러했다.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을 낳은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진 또 다른 문제의식은 막스 베버가 근대사회의 특징으로도 지적한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다. 그 독점에서 발생하는 것이 ‘폭력의 압도적인 비대칭’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스펙터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폭력이고 폭력의 비대칭 아닌가?

폭력의 철학, 혹은 폭력에 대한 사유는 먼저 폭력/비폭력이란 이 빈곤한 이분법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테러에도 반대하고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나는 테러에도 반대하고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태도에 반대한다! 그때 가능해지는 공간이 폭력과 비폭력 사이의 ‘회색지대’이다. 이 회색지대를 저자 사카이는 ‘반폭력’(anti-violence)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독일어로는 그냥 ‘게발트’(Gewalt)라고 부르겠다.

게발트? 저자는 월터 베냐민(*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론>(Kritik der Gewalt, 1921)에서 폭력의 철학을 위한 통찰을 얻어온다. 그 제목에서 ‘폭력’의 원어가 ‘게발트’이고, 독어에서 이 말은 ‘지배 혹은 통치의 유지’ ‘정당한 강제’란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게발트는 온당한 힘의 행사로서 ‘정당화된 폭력’이다. 그럼 그런 폭력을 베냐민이 비판했던가? 그런 건 아니다. 독어에서 ‘비판’(Kritik)은 어원적으로 ‘분리’란 뜻을 갖는다. 즉 베냐민이나 사카이가 하려는 것은 ‘폭력의 더미’에서 정당한 폭력으로서의 ‘게발트’와 ‘반폭력’을 분리해내는 일이다(베냐민은 ‘보존적 폭력’과 ‘정초적 폭력’을 분리해냈다).

가령, 점령지에 탱크를 몰고 들어가 느닷없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살해하는 이스라엘군과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거나 수류탄을 몸에 감고 경찰 앞에서 자폭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폭력을 구별하고 분리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 두 가지 ‘폭력’을 ‘비폭력주의’라는 입장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기아와 다이어트를 동일시하거나 “빵이 없으면 과자를!”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지하며 게으른 태도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바이지만, 폭력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고 ‘적대성’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란 폴리스(police)의 논리와는 구분되는 폴리틱스(politics)의 논리를 복원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행정까지를 포함하는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분열하게 하며 거기에 위계질서를 세우는 기능을 담당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정치란 폴리스의 논리와 폴리틱스의 논리가 만나서 충돌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반폭력은 이러한 ‘정치의 논리’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폭력의 압도적인 비대칭에 대한 교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정에 필수적인 것은 적대성을 말소하거나 절대화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이다. 폭력이란 억압되고 감추어진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런 적대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킹 목사와 간디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맬컴 엑스와 프란츠 파농의 폭력과 대립하지 않는다. 정념적인 차원에서 이들은 모두 억압적인 지배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분노’를 공유했으며, 이 분노가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휴머니즘과 폭력>(1947)에서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고 말했다. 폭력은 ‘정치적 인간’으로서 우리의 숙명이다. 폭력 자체로부터 우리는 발을 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폭력을 선택하느냐이다.

07. 08. 31.

P.S. 사실 이 책과 관련한 곁가지 이야기들을 많이 적어야 하지만 따로 시간을 내기 힘들어서 미뤄둔다. 언젠가는 '폭력의 철학'에 걸맞는 분량의 글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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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3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글을 올리셨군요. :)
폴리스와 폴리틱스의 구별은, 여기서 처음 본 듯 합니다. 사카이 다카시의 말인가요.
폭력이냐 비폭력이냐가 아니라, 폭력 중에서 어떤 폭력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라는 거죠. 저는 간디의 비폭력도 지지하지만, 더 이상 저항할 수단이 오로지 폭력 밖에 남지 않은 이들의 폭력 또한 소극적 지지합니다.

로쟈 2007-08-31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지면이라 자세히 쓸 수 없었는데, 폴리스와 폴리틱스의 구별은 자크 랑시에르의 것입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많지 않고, 폭력론에 대한 로드맵 정도로 유용한 책입니다...

마늘빵 2007-08-31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또 새로운 인물을 접하는군요. 자크 랑시에르. 음. 감사합니다. 폭력론에도 관심갖고 있는데, 일단 로쟈님 페이퍼 통해서만 대략 간접적으로 접해놔야겠습니다.

로쟈 2007-08-31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예전의 페이퍼 http://blog.aladdin.co.kr/mramor/1066288 를 참고하시길...

드팀전 2007-08-31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마지막 말이 제가 예전에 흘리던 말과 비슷해서 반갑네요.

로쟈 2007-09-01 20:26   좋아요 0 | URL
^^

에바 2007-09-0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부쩍 바쁘신 것 같습니다.^^ 지젝에 대한 페이퍼가 예전처럼 많지 않아 좀 섭섭하지만 그래도 좋은 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로쟈 2007-09-01 20: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좀 바쁘긴 합니다. 그래봐야 남들만큼이겠지만. 지젝에 관한 페이퍼 거리는 넘쳐나지만 여유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람혼 2007-09-01 0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랑시에르적 영감, 특히나 그의 책 Mésentente으로부터의 영감이 저변에 흐르고 있는 글이군요. 벤야민의 Gewalt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특히나 데리다가 <벤야민의 이름>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 분류법'에 대한 [재-]검토 또한 함께 다루어주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09-01 20:29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의아했던 점인데 저자가 데리다의 벤야민론을 참조하고 있지 않더군요. 랑시에르를 참조할 정도면 몰랐을 리도 없는데...

책사랑 2007-09-1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출판 길"입니다. 현재 저희 출판사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책 "정치의 가장자리에서"(또는 정치의 해안에서)와 "불화"를 번역중에 있습니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는 2008년초에(아마도 3~4월경) 선보일 예정입니다.

책사랑 2007-09-1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은 발터 벤야민 선집 제1차분(전3권) 출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제1권은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역자 이화여대 최성만 교수의 자세한 해제가 돋보입니다)
제2권은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제3권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년판/1939년판 동시수록)/사진의 작은 역사/파리 편지 외
로 구성됩니다.

로쟈 2007-09-13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야민의 책들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마무리에 바쁘시겠네요.^^

책사랑 2007-09-13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9월말까지는 편집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 약간 늦어지면 10월 중하순에 책이 출간될 듯 합니다. 제2차분(전3권)은 올 11월까지 원고가 들어올 예정이니, 2008년 상반기에는 펴낼 예정입니다. 제2차분에는 "보들레르" "역사철학테제""언어기원에 대하여" 등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책사랑 2007-09-1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짐멜 선집 제2차분도 내야 하는데... 전공자인 김덕영 선생님께서는 현재 "돈의 철학" 번역에 진력하고 계셔서... "돈의 철학"은 2008년 중하반기쯤 선보일 예정입니다.

로쟈 2007-09-14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야민과 짐멜, 양수겸장이네요.^^

책사랑 2007-09-14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짐멜의 에세이적 글쓰기 형식이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비롯한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또한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는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벤야민의 글이 갖는 독창성은 근 8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지금 읽어도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준다는 것이죠.
 

'로쟈의 페이퍼'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든다. '로쟈의 서재'에 달려 있는 페이퍼들이면 다 '로쟈의 페이퍼' 아닌가, 란 반문이 가능하지만, 사실 타이틀은 내가 붙인 것이 아니다. 이번 2학기에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로쟈의 페이퍼'라는 '신간 소개' 코너를 연재하게 됐다. 기획안 자체가 '최근에 나온 책들'을 컨셉으로 한 것이라고 해서 원고 청탁에 넙죽 응했다. 그리고는 또 마감을 놓치고 있다(물론 다른 일들이 계속 겹치고 있긴 하다).

하룻밤 동안에 원고지 60-70매 정도는 거뜬히 채우곤 하지만 막상 10매짜리 청탁원고를 쓰는 일에는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지젝도 그런 증상을 호소한 적이 있는데, 무얼 메모하는 것과 쓰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어서 그에 따른 부담에도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그 차이는 자발적인 글쓰기이냐 아니냐의 차이로도 변주된다). 내가 내린 진단이 그렇다. 하지만 처방은?..

이 페이퍼는 그 10-11매짜리 원고를 쓰기 위한 초고이자 메모이다. 겸사겸사 작년 10월 이후로 중단된 '최근에 나온 책들'을 이어갈까 하다가 컨셉을 약간 바꾸기로 했다. 사실 내가 읽지도 않은(심지어 손에 들어보지도 못한) 책들을 나열하고 '소개'하는 일이 나 자신에겐 그다지 유익해보이지 않았다(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연재를 중단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거들었다).  

 

해서 비슷한 방식이더라도 조금더 유익한 방향의 책소개가 없을까 궁리하다가 고안해 낸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방식이다(이게 말하자면 '로쟈의 페이퍼'의 부제쯤 된다). 그 시작으로 고른 책이 어제 도서관에 갓 들어온 책을 대출해서 두 번이나 읽은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 2007)이다(구내서점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었다). 왜 두번이냐고? 책이 얇기도(가볍기도) 했고, 한편으론 어제나 그제 읽은 한 구절의 출처를 찾지 못해서 한번 더 훑어본 것이기도 했다(그래도 못 찾았다. 다른 책인 듯하다. 내가 조금 더 예민한 체질이었다면 노이로제에 걸릴 처지이다. 그 와중에 알라딘은 먹통이 되는군).   

 

 

 

 

책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재일교포 지식인 서경식 교수와 미국 시카고대학의 노마 필드 교수, 그리고 일본의 원로 비평가 카토 슈이치(가토 슈이치) 교수 3인의 공저이다. '공저'라고는 돼 있지만 실제로는 강연록이며 세 사람의 회합을 모의한 사람은 가장 연배가 젊은 서경식 교수이다.

도쿄경제대학에 재직중인 그가 지난 2003년 '교양의 재생을 위하여'란 주제의 특별강연회를 마련하였고 다른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초빙되었던 것. 해서 책은 서교수의 서론('왜, 지금 '교양'인가?')을 제외하면 세 사람의 강연과 서교수가 카토 슈이치와 나눈 대담, 이 네 꼭지로 구성돼 있다. 모두가 "이 위기의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문교양'이란 과연 무엇일까?"란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세 사람의 사진이 나란히 표지에는 박혀 있는데, '재일조선인의 양심'으로 소개돼 있는 서경식 교수(1951- )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이후로 이미 별다른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국내에 여러 저작이 소개돼 있다(현재는 성공회대에 연구교수로 체류중이며 한겨레의 북리뷰란에 '심야통신'을 오랫동안 연재했었다).

그리고 '수전 손택 여사 이후 미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소개된 노마 필드 교수(1947- )는 현재 시카고대학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장을 맡고 있다는 일본문학/문화 전문가이다(저서들로 봐서는 '수전 손택'과 나란히 거명되는 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국내에는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창비, 1995)가 소개돼 있다. 필드 교수는 '전쟁과 교양'이란 주제의 강연을 했는데, 읽다 보니까 내용중에 "이제 곧 지천명이 될 나로서도"(80쪽)란 대목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2003년이면 1947년생인 그녀가 56세 때인데(그러니까 지천명이 한참 지난 뒤인데), 어떻게 '곧 지천명이 될' 수 있는지?

카토 슈이치 교수(1919- )는 그간에 '가토 슈이치'로 이름이 표기돼 왔고, 이번에 찾아보니까 여러 권의 책이 출간돼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대담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에서 인터뷰어 역을 맡은 이가 가토 슈이치이고,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소화, 1997), <일본문화의 숨은 형>(소화, 1995), <일본문학사서설1,2>(시사일본어사, 1995-6) 등도 소개돼 있다. 일본어로는 24권짜리 저작집(전집)이 나와 있다고 하니까 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는 듯하다...

대략 여기까지 쓰고는 시간관계상 더는 미루지 못하고(<교양,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해서는 따로 리뷰를 쓰든지 할 예정이다) 아래와 같이 초고를 작성했다(분량 때문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에 게재될 것이다). '현대의 교양'을 실마리로 한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이다(역시나 분량상 '제국'과 '폭력', '욕망'을 주제로 한 책들은 제외됐다).


‘로쟈의 페이퍼’는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주관적 눈요기이다. “요새 읽을 만한 책들이 없어.”라는 주관적 푸념을 자주 접하지만, 읽기로 작정하면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 또한 객관적 현실이다. 여럿이 다닐 만한 길이 될는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몇 권의 책을 길잡이삼아 그 푸념과 현실 사이에서 나대로의 길을 내보도록 한다. 

시작은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이다. 아마도 ‘교양’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나온 책들 가운데서는 가장 ‘가벼운’ 책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위기의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인문교양’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란 묵직한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는 책이다. 서경식, 노마 필드, 카도 슈이치, 3인의 공저인데 원래는 일본학생들을 청중으로 한 강연록이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아직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야만의 시대’에 과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교양’이란 게 가능한지, 그것은 또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과 맞닥뜨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또 해야 하는 일은 책을 읽는 것이다. 일단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와 <청춘의 사신>(창비), <소년의 눈물>(돌베개), <난민과 국민 사이>(돌베개) 같은 책들을 일독해볼 수 있겠다. 재일한국인으로 저자가 감당해야 했던 시대의 초상과 영혼의 편력이 펼쳐진다. 또한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삶과 성찰을 따라가 보는 것도 제쳐놓을 수 없겠다. 실제로 마지막 장 ‘현대의 교양이란 무엇인가’에서 서경식 교수가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프리모 레비의 경우이다.  

 

 

 

 

 

 

 

 

 

 

이미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가 작년에 번역돼 나왔고, 레비의 주요 저작인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와 <주기율표>(돌베개)도 올해 초에 우리말로 출간되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인용된 일화를 보면, 강제수용소에서 동료 죄수가 레비에게 아무 시라도 좋으니 읽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책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는 상황에서 이탈리아인 레비가 떠올린 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이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레비가 프랑스인 동료에게 애써 번역하여 들려주려던 시구는 이런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그리고 이러한 시에 용기를 얻어 그는 ‘지옥’과도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반가운 것은 그 <신곡> 또한 이제는 우리말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이탈리아아어 완역본으로 2005년에 출간된 한형곤본(서해문집)에 이어서 최근에 박상진본(민음사), 김운찬본(열린책들)이 더 출간되었다. 프리모 레비가 처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지옥>편이라도 이 가을에 읽어봄 직하다.  

 


 

 

 

 

 

 

강제수용소 얘기가 나온 김에 제러미 벤담의 ‘감시시설, 특히 감옥에 대한 새로운 원리에 관한 논문’ <파놉티콘>(책세상)도 읽어보도록 하자. 잘 알려진 바대로 이 논문은 원형감옥에 대한 벤담의 ‘혁신적인’ 구상을 담고 있다. 이번에 나온 건 특이하게도 프랑스어판 축약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덕분에 분량은 50여 쪽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과 함께 푸코의 <감시와 처벌>(나남)도 읽어줘야 한다면 견적은 좀 달라질 수 있겠다. 거기에 미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도서출판b)에서 표제가 된 장 ‘암흑지점’도 반드시 참조해야 할 글이다. 보조비치가 영어판 <파놉티콘>을 편집하고 붙인 서론이기도 하다.

 

 

 

 

벤담의 <파놉티콘>을 읽으면서 거꾸로 ‘감옥 없는 세상’을 잠시 꿈꿔봤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을 읽으면서 ‘종교 없는 세상’을 같이 상상해볼 수 있겠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라는 제사(題詞)부터가 도전적인 이 책은 종교라는 오랜 터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기를 제안한다. 비록 ‘종교’라는 망상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건 ‘민족’이라는 상상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듯하지만.

 

사실 도킨스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이다. 그는 유물론적 신학을 주장함으로써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아예 거꾸로 세운다. 평소에 지적 자극이 모자란다고 푸념하는 이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 ‘유물론적 신학’의 원안 제공자인 발터 벤야민의 <베를린의 어린시절>(새물결)과 <일반통행로>(새물결)도 덧붙이자면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특히 <일방통행로>에는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이란 문구가 붙어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고 교양이 목표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유격전을 시작할 때다.

 

07. 08.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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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8-30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고료 두둑하게 받아내서 밥 사세요..
환영할 컨셉입니다.

로쟈 2007-08-30 23:14   좋아요 0 | URL
원고료는 책값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2007-08-31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31 14:55   좋아요 0 | URL
아마 청탁이 오면 쓰실 수 있을 겁니다.^^

philocinema 2007-08-3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기율표'와 '암흑지점'은 처음 보는 책들이군요!
시간이 나서, 아니 시간을 내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소개 잘 받고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로쟈 2007-08-31 18:49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참고로 <암흑지점>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marr 2007-08-3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운 책읽기, 자유로운 글쓰기.
정말 부럽습니다.
뭐, 당신도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 하실 수 있겠지만, 실상 특정 주제에 매에 있으면 그런 자유는 자만이 되기 쉽죠. 어쨌든 좋으시겠습니다.

로쟈 2007-08-31 18:52   좋아요 0 | URL
'자유로운' 책읽기/글쓰기는 제가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럴 만한 형편을 만들기가 늘 어렵습니다.--;

marr 2007-08-3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제가 깜빡했습니다.
연구자에겐 늘 한정된 생활이기 마련이지요.
그래도 부럽습니다. 전 조금씩 달아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2007-09-01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1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1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09-01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마 필드 교수는 예전에 김윤식 선생의 '문학여행기'들 중 어느 한 권에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김윤식 선생의 단골 인용 모토인 "아득한 회색... 선연한 녹색..."의 문구를 제목으로 차용했던 책으로 기억하는데요, 이른바 '학술여행'이란 것, 언젠가는 한 번 꼭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은 부러운 일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9-01 22:3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그 책을 갖고 있는지 문득 헷갈립니다.^^;

마늘빵 2007-09-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중대 대학원 신문까지. 축하드립니다. 모든 글은 이곳에서 다 볼 수 있는거죠? :)
그래도 또 여기서 보는거랑, 지면으로 보는거랑 느낌이 다르긴한데.

로쟈 2007-09-01 22:34   좋아요 0 | URL
네, 대부분은 이곳에서도 읽으실 수 있을 텐데, 10매짜리 글들은 쓰긴 어렵고 생색은 안 나고 그렇네요.^^;
 

한동안 시끄러웠던 '디워' 논란도 이젠 잦아드는 국면인 듯하다. 여전히 약간의 '후일담'은 새어나오고 있지만, 어쨌거나 '정리 모드'로 접어든 게 아닌가 싶다(진중권의 최근 몇몇 칼럼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는다). '디워'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말썽의 건덕지도 없어 보이지만(말 그대로 '디워'가 걸작이어서 700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였다고 말할 사람은 없는 거 아닌가? 왜 그게 시비의 대상이 되는지?), '디워'가 '핑계'가 되어준 거라고 하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소위 평론가 집단과 대중은 서로에 대한 쌓이고 쌓인 경멸과 반감을 '디워'를 핑계로 '터놓고' 교환한 것이 되니까. 최근 몇몇 언론의 '진단'은 이젠 그런 쪽으로 시야를 돌리는 듯하다(가령 이번 논란의 구도를 '386세대 지식인 vs 포스트386세대 대중'의 구도로 보는 식이다). 눈에 띄는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So what?'은 '대중의 반역'의 구호이면서(그런데, '대중의 시대'에도 '대중의 반역'은 가능한 건가?) 동시에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반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So what?'은 부정의 변증법을 체현한다...

  

중앙일보(07. 08. 28) 21세기판 저주받은 걸작에 대하여

‘저주받은 걸작’이란 어느 비평가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단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교체되어야 한다. 소수의 비평가 집단에서 일반 대중으로.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를 둘러싼 논쟁을 보며 든 생각이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23일 열린 토론회에서 비평가 진중권은 “문근영이나 이나영 보겠다고 영화를 보러 가긴 하지만 그걸 가지고 평론하거나 평점을 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정답이다. 같은 시각 같은 극장에 앉아 있어도 비평가와 대중의 동기와 목적은 다르다. 하여 반응도 당연히 다르다.

비평가에게 예술작품은 텍스트다. 텍스트이므로 그들은, 학생이 교과서 공부하듯이 영화를 분석하고 소설을 해부한다. 한 번은 문학평론가의 노트를 구경한 적 있다. 그 노트엔 한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캐릭터와 관계가 설계도면 마냥 촘촘히 그려져 있었고, 어구 하나하나를 옮겨놓은 바로 아래엔 깨알 같은 해설이 달려있었다. 그게 그들의 업이다. 다시 말해 벌이의 수단이다.

하나 대중(Mass)에게 문화는 소비의 대상이다. 문근영이 나와서 또는 컴퓨터그래픽이 그럴싸해서, 아니면 작정하고 울어 보려고, 이도 아니면 소일삼아, 그들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다. 전문가 버금가는 매니어도 물론 있다. 그러나 매니어란 말 자체엔 아마추어란 개념이 포함돼 있다. 먹고사는 일이 아니므로 매니어의 작업은 일종의 유희다.

마침 계간문예지 ‘문학수첩’ 가을호가 흥미로운 특집을 실었다. 김훈·공지영·류시화·하루키의 문학이 왜 인기인지를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란 제목 아래 조명했다. 찬찬히 읽어봤지만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글쎄다… 훈계 조의 몇 말씀만 눈에 띄었을 뿐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획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했다.

앞서 언급한 넷 중 공지영과 류시화는, 대중의 지지가 무색할 만큼 비평과 사이가 나쁘다. 이에 대해 공지영이 진작에 한 말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떠들게 하라. 난 내 길을 가겠다.” 이런 식의 대응은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개중 한 신예작가의 재치 어린 화법이 기억에 남는다. “지젝이고 라깡대는 소리.” ‘지젝’과 ‘라캉’은 현재 한국 비평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소위 ‘주석용 학자’다. 마치 ‘지껄이고 깡깡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일찍이 평단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던 박민규가 자신의 SF소설 ‘깊’이 올해 황순원문학상 최종심에 오르자 “왜들 이러셔”라고 대꾸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비평 작업을 깎아내릴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비평을 거치지 않고도 대중과 바로 교류하는 문화상품이 늘고 있음을 지적할 따름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화상품’이란 용어다. 혜택받은 소수만이 문화를 향유하던 시절은 지났다는 걸 ‘문화상품’은 스스로 증명한다. 한 문학평론가의 고백이 떠오른다. “박민규는 비평을 통하지 않고 독자와 직접 접촉한 문학에서의 첫 사례다.” 공지영이나 류시화, 나아가 ‘디 워’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다.

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엄청난 발견을 했다 치자. 관련 계통에선 위대한 업적이겠지만 대중에겐 그저 “So what(그래서 뭐)?”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비평 언어는 애초부터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비평은 각 장르 안에서 엄연한 학문이다. 문화 유통업자들이 비평의 권위를 빌릴 뿐이다. 그러니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세상은 이미 변했다.(손민호 기자)

경향신문(07. 08. 25)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현대의 대중과 지식인 : ‘디워’ 논란
문화 연구는 대중문화가 모든 사회적 힘이 관여된 전장이며 늘 새로운 터라는 데 착안하고 있다. 영화 ‘디워’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오늘날 한국 문화의 구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내용과 테크놀로지의 문제, ‘괴수 영화’라는 장르와 수용의 행태, 그리고 배경에 있는 미국 대중문화와의 관계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롭고도 중요한 것은 ‘디워’ 수용과 논란에 개재된 참여자들의 행동 양식이다. 거기에 바로 거대한 카오스모스로 존재하는 한국의 ‘대중’이 있다.

'디워’ 논란은 아직 우리가 ‘대중’이라는 현상과 그 카오스모스를 잘 읽어내거나,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지식인’의 비평이 오히려 문화지체와 지적 한계의 덫에 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들끓는 대중 현상이야말로 ‘지식인의 죽음’을 확증해주는 듯하다. 지식인은 자신이 가진 몇 가지 해석의 도구 때문에 대중보다 더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갖기 십상이다. 그러나 텍스트에 대한 대중의 수용은 텍스트 자체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며, 현학적 언어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도구란 대중이 처한 현실 자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디워’ 논란만 보아도 거기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대중의 앎과 삶이 반영되어 있다. 즉 그들은 단지 애국주의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는 ‘무지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권력과 권위에 대한 건강한 도전 의식과 소외된 자로서의 분노, 그리고 무차별한 향유의 정신과 상식적 윤리성, 또한 마니아적 집요함과 여러 분야의 지식을 나눠 가진 모순적 존재이다. 평소에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데서 서식하지만, 때론 한데 뭉쳐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폭발의 방향과 반응도 진화하고 변이를 일으킨다. 몇 줄짜리 ‘댓글’이 곧 대중은 아니다.

양심적이고 날카로운 한 문화평론가가 ‘디워’ 때문에 마치 공적처럼 돼버린 사태는 대중의 모순적 역동을 그 혼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그는 쉽게 사태를 애국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황우석 사태와 같은 ‘추상’에 환원하고 대중을 ‘초딩’에 비유했다. 그는 전혀 공적도 아니고, 그의 ‘디워’ 평가도 옳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오류에 빠진 게 아닐까. 그는 복잡다단한 현상으로서의 대중을 단순히 사상하며, 윤리적·문화적 주체로서 대중의 자의식을 건드린 듯하다. 물론 대중의 파도 속에는 참주선동을 일삼는 음험한 세력이 언제나 끼어있을 수는 있다. 문화연구는 이와 같은 대중문화의 주체-수용자 현상을 가장 주요한 대상으로 한다. 문화의 정치 경제학적 재생산과 개별 텍스트에 대한 분석·비판은 그를 위한 중요한 통로이다.

◆한국에서의 ‘문학에서 문화연구로’
하지만 문화연구가 ‘대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음악·미술·문학·영화 같은 개별 장르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해이다. 문화연구는 수용주체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와 돈,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깊게 문제 삼는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주지하듯 후기산업사회의 계급대립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영국에서 탄생한 ‘시각’이다. 이는 대중과 엘리트, 문화와 정치, 이데올로기와 생활양식 등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하는 효과를 지닌 입장들을 지칭했다. 그래서 문화연구는 하위 주체와 그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인해 젠더 연구와 탈식민주의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문화 연구는 문학 연구의 밭으로부터 움이 터서 일구어지고 있다. 문학이 전 시대의 중심적인 양식이었고, 그래서 거기에 총체적인 것과 새로운 것에 예민함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이전의 국문학은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풍속·일상·문화제도·수용자·젠더 등에 대한 논의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 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구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화사나 문화 연구의 방법론을 참조해서 많은 성과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 이외에도 계급·젠더·민족(인종) 문제에 민감한 정치 경제학,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연구, 그리고 전통적인 미학이 다 문화 연구와 직접 관련된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 연구는 인문-사회과학 내부의 ‘통섭’의 수준을 보여주는 한편, 현실과 연구 및 현실과 비평의 연결 강도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현대 한국의 문화사가 제대로 서술된 적이 없고, 문화 재생산의 한국적 양상이 총체적으로 연구된 바도 없다. 또한 ‘문화과학’ 등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각개 약진하는 여러 분야의 연구와 담론이 어떻게 공통의 의제와 담론의 장을 만들 것인지도 광범위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영미의 문화 연구가 가진 한계는 이미 지젝이나 스피박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됐다. 문화 연구는 현실과의 연관이 미미해진 이론과 문학에 대한 중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고, 그 본성상 대학 학과의 틀 속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문화 연구라는 문제 의식 자체 속에 앎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의도가 내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넘어서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 연구도 서구 문화 연구 이론의 영향을 물론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끝없이 역동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문화 현실이 더 1차적이며 근본적인 문제틀이다. 오늘날 한국과 동아시아의 현실은 미국과 유럽의 발걸음을 추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는 소위 ‘선진국’의 이론에도 한 발, 또 현실에도 여러 발 뒤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의 긴장력은 무조건 중요하다. 문화적 현실은 ‘지식인의 죽음’을 증거하지만, 그것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문화 연구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의 영역을 지킨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앎을 종합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적인 계몽이 불가능하고, 대신에 소통과 연대가 가능한 길임을 문화연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문화의 변화와 과제
어떻게 한국의 문화 연구는 공동의 주제를 설정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비판적 문화 연구는 계급과 성, 민족주의와 세계화의 토픽을 다루지만, 그것은 ‘지금-여기’의 문화변혁의 의제와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대중문화는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2002년의 승리는 문화적 변혁의 결과이기도 했다. 대중성의 성격 변화와 한국 자본주의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다고 말해지는 것처럼, ‘대중의 외부’도 없고 대중문화의 외부도 없다. 다시 말해서 문화(즉 삶의 양식) 전체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또한 그 활동과 소통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영역이 없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대중성 변화의 가장 중요한 첫번째 측면이다. 오늘날 한국의 문화에서 돈은 얼마나 더 중요해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시끌벅적한 대중문화의 장이야말로 오히려 돈만으로 다 안 되는, 내지는 돈의 장악이 지닌 모순이 감춰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전쟁터이다.

한국 사회에는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8대 2, 아니 9대 1 사회로 영구히 공고화될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교육불평등과 계급불평등은 이제 단단히 구조화되어가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는 교육적 양극화를 비롯한 사회적 양극화로 파급되고,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면적으로 문화적 양극화는 잘 관철되고 있는 듯하다. 빈곤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은 실로 문화의 적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문화는 정치 문제이다.

그런데 문화의 양극화는 ‘반-경향’과 함께 관철된다. 대규모 자본이 투여된 상품만이 시장을 장악하여 대량의 이윤으로 회수되는 양극화는 기본적으로 심각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추구는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동시성을 통해 구현되는 공통의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다른 한편 취향에 의해 수평적으로 준별되는 문화의 향유에로 달려가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복잡성의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

마니아(동호인·문화 부족) 현상은 일단 소요 자본과 진입장벽이 크지 않은 분야에서만 두드러지지만, 문화적 취향을 근대적인 ‘고급/저급’ ‘본격/통속’과 같이 위계지어진 것으로 구분하거나 특정한 문화적 취향을 특정 경제적 계급에 귀속시키는 일이 불가능하게 한다. 문화적 계급 구성과 정치·경제적 계급 구성 사이의 불일치, 또 노동과 향유 사이의 괴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항존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불일치와의 괴리가 점점 더 복잡하고 커지는 양상을 띤다.

마니아는 대중의 존재성을 바꾸고 또한 강화한다. 그들은 지적 엘리트나 지배계급이 아니지만, 새로운 앎을 개척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데 엄청나게 기여한다. 그들의 자발적인 횡적 연대는 그 자체로 오늘날 대중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참여군중(Smart Mobs)’ ‘대중지성’ 등이 운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한 제품(자동차, 패션, 각종 전자기기 등)과 특정한 대중문화 상품(TV드라마, 연예인, 영화 등)에 대한 동호인 문화는 이제 일상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소비제품과 대중문화 수용에 있어 마니아들의 도움을 얻고, 또한 스스로 마니아가 되어 비평하고 옹호한다.

거대한 대중의 행동을 선동하고 선도하는 힘이 전위나 지식인이 아니라, 열정을 바치는 마니아들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하자. 거기에 새로운 정치도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전통적 비평의 불가능함도 여기와 연관된다. 문화 연구도 생산되는 텍스트를 뒤따라 다니면서 주석 달고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생산하는 앎이 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문화 연구가 ‘대중을 향한 생산’이 될 수 있느냐는 것에 그 미래의 중요한 부분이 달려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외부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활용하고 필요한 만큼 긍정하고, 대중 현상에 배후에 숨어서 권력과 지배를 항구적으로 누리려는 세력에 저항하고, 대중의 역능을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연대의 전선을 개척하는 것이다. 또한 앎의 연대 전선을 다시 설치하는 것은 순종과 발전주의의 나락에 빠진 대학을 변화시키고, 인문학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과업과 관계 깊다.(천정환|성균관대 교수·국문학)

07. 08. 29.

P.S. 관련기사로 더 보탤만한 건 프레시안의 기사이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823134236. 그리고 더불어서 이번주 한겨레21의 '노 땡큐!'에 실린 김규항의 '타인의 취향'도 읽어두는 게 공평하겠다. 덧붙이자면 나는 계몽적 대중주의자이다. 나는 '지젝이고 라깡대는 소리'가 엘리트 평론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일용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계몽의 끝이다). 내가 기대하는 건 엘리트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엘리트화이다. 그럼으로써 엘리트주의를 해소하는 것. 엘리트주의의 상징적 폭력을 무력화하는 것. 자기부정의 운동은 그래서 요구된다. 타인의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안주하는 건 존중받을 만한 취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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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30 01:25   좋아요 0 | URL
제목만 보고 엄청나게 원색적인 가사가 대부분인 메탈리카의 곡명이 생각났었습니다.^^

섬나무 2007-08-30 11:14   좋아요 0 | URL
로긴 안하고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갈 수 없네요.^^인상적인 사회현상을 들추게 된 영화얘기니까요. 하여간 이번을 계기로 진중권씨에 대한 호감이 박살이 난 사람이거든요.그렇다고 디워 옹호론자도 못되는데 말입니다. 문화를 꼭꼭 씹어 먹는 일이 업인 사람이 그걸 대충 삼키는 대중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열을 낼 일이었나 싶습니다.역시 대중의 가치관은 전문가들의 그것보다 현실적이며 폭넓다는 생각입니다.
올리신 기사들이 깊이 공감됩니다.

람혼 2007-08-30 12:12   좋아요 0 | URL
제목만 보자면, 저로서는 바로 Miles Davis가 떠오르는군요...ㅎㅎ

로쟈 2007-08-30 15:32   좋아요 0 | URL
노래를 먼저 떠올리신 분들께는 죄송한데요.^^
섬나무님/ 저의 So what?은 대중과 지식인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저부터도 지식인-대중이니까요)...

섬나무 2007-09-03 10:42   좋아요 0 | URL
저는 가끔 아주 몹시 어느 한 쪽에 서고 싶어집니다. 아무래도 저는 흔들리는-대중 입니다^^ 하지만 로쟈님의 조언은 백번 지당합니다.

람혼 2007-08-31 02:33   좋아요 0 | URL
사실 Miles Davis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는걸요.^^
 

막바지 더위가 기승이다. 밤공기는 많이 서늘해졌지만 실내의 후덥지근한 기운은 여전하다. 순전히 더위를 식힐 겸 릴케의 시를 잠시 둘러보다가 예전에 모스크바통신에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호출하여 창고에 넣어둔다(모스크바통신은 비공개로 돼 있다). 작년 여름에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http://blog.aladin.co.kr/mramor/929287)이라고 축약본을 올려놓았었는데 그 풀버전이다.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한 3년 전 여름으로 잠시 되돌아가본다.

요즘 한국은 전국이 열대야라고 하지만, 모스크바의 여름 더위는, 과연 그런 게 어떤 건지 아직도 궁금할 정도이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여름 햇볕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그래 봐야 한국 날씨로는 좀 더운 5월 날씨 정도인 듯싶다. 7월도 마지막 주에 접어들고, 어느새 이 주에는 중복도 끼어 있지만(초복은 언제 지나갔단 말인가?), 모스크바의 ‘복날’은 이름이 좀 무색하다. 그러니 한두 시간쯤 바람을 쐬는 걸 제외하고는(인터넷카페에 들르고, 서점들을 돌아다니고),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지만, 그저 조용한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자위해도 (자기)기만은 아닌 셈이다. 애써서 러시아까지 날아오는 한국 관광객들도 많잖은가?

대개 그 관광코스에는 모스크바대학 구경도 포함돼 있는바, 관광버스를 타고 이 스탈린식 건축양식의 기념비적인 건물인 본관 건물을 한번 둘러보는 정도인데, 그 건물 안에서 ‘방콕’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니 나의 ‘일상’을 ‘내적-관광’이라 불러도 과장은 아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게 아니라,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관광지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번역에 매달려 있는 갑갑한 일상이 다소 구제된다. 하긴, 1일 감옥체험이란 것도 일종의 ‘감옥-관광’이 아닐는지? 덧붙여 말하자면, 번역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감옥’이다. 지난주에 다녀간 한 후배는 이곳 기숙사 방을 일제 때의 형무소에 비유했는데(아무렴 호텔에 있는 줄 알았을까!), 그래도 감옥으로 치자면, 아주 고상하고 호사스러운 감옥이다(이게 또 위안이 될 만하군). 게다가 산책시간은 물론이거니와 노트북까지 제공돼 있는.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달려든 번역이지만 진도는 생각만큼 빠지지 않고 있다. 곧 견적을 수정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주업인 번역에만 목을 매달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부업으로 ‘바람’도 핀다. 그건 릴케의 시들을 읽는 일이다. 특히 <두이노의 비가>(릴케는 이 시의 첫 구절을 바람결에 들었다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보드카의 안주로 맥주나 주스를 마시듯이, 나는 번역거리의 안주로 릴케의 시들을 옮겨 적고, 러시아어로 음미해 보고 있다. 그것들이 나의 일과 휴식이며, 빵과 포도주이다.

Стихотворения (пер. с нем. Микушевича В.Б.) (на нем., русс.яз.) Серия:

릴케의 시집은 지난주에 막심네 가게에서 샀다. 러시아어로 릴케 전집은 3권짜리가 나와 있다고 하는데, 그걸 찾으러 고서점을 돌아다닐 여력도 없거니와 재정적인 여유도 없다. 대신에 내가 산 건, 칸딘스키의 그림들이 표지와 삽화를 장식하고 있는 손바닥만한 릴케 선집이다. 정확하게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가는 책인데, 그래도 하드카바에 전체 334쪽이고, 2000년에 나온 이 책의 값은 3,500원 가량이다. 러시아에서는 유명 시집들의 경우 이런 식의 포켓북들이 많이 나와 있다. 릴케의 다른 선집도 있었지만,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다른 책과 달리 <두이노의 비가> 10편이 모두 번역돼 있다는 점. 릴케 자신의 평가도 그렇지만, 나는 <비가>가 릴케 시의 정점이자 ‘비가(엘레지)’라는 장르의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감’이자 ‘견문’일 따름이고, 나는 아직 <비가>를 통독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기회도 없었지만, 여건도 따르지 않았는바 한국어로 <비가>를 읽는 일은 장갑을 끼고 애무하는 것만큼이나 감질나는 것이어서(그것도 번역이 안 좋을 경우는 장갑도 ‘벙어리 장갑’이다), <비가>의 진가를 음미하기가 쉽지 않았다. 독어로 읽으면 좋겠지만(학부시절에 놀면서라도 해둘 일은 제 2외국어를 2-3개 정도 학습하는 것이다. 나는 알면서도 그러질 않았는데, 30대 이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게도), 아쉽게도 독어에는 까막눈이기 때문에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건 번역본들뿐이다.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두이노의 비가>는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한기찬 번역본이며, 나는 이 번역을 통해서 <비가>에 입문했다. 그게 17년 전이다. 무엇보다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1>의 시작부분이다. 이와 관련하여 8년 전에 쓴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릴케를 읽은 것은 대학 1학년의 여름. 고작 <두이노의 비가>를 번역으로 읽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릴케를 읽지 않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그래서 이번에 좀 읽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감동 이상의 것이다. 그걸 잘 말할 수 있을까? 하여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번역(*당시에는 청하출판사본에 이어서 문학과지성사본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번역/출간됐었다)을 동시에 옮겨보면 이렇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뉘라서, 내 울부짖은들, 들어주랴, 천사들의 질서로부터?”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눈물나게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감동적이다(눈물나게는 아니었지만, 오직 <장자>를 읽었을 때의 감동이 여기에 비견할 만하다. 둘 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듯하다. 내게 릴케와 장자는, 그래서 동급이다. 또한 똑같이 비주류적이면서도 각기 서양과 동양의 시적 형이상학의 한 극점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사유의 양태와 정조는 다르지만). 그리고 사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우리가 무얼 인식하거나 이해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것이다. 시이면서 시 이상인 어떤 것(울부짖음!). 울부짖음은 독어나 한국어 같은 개별 언어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주관적인 감동으로 이 시구의 이해를 대신하는 것이 어찌 결례가 될까, 망발이 될까…


내가 17년이 지난 지금도 이 <비가>에 매혹되는 것은 일단 릴케의 시구이면서 그 자신의 것만도 아닌(그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 적었다고 했다) 이 첫 시구 때문이다. 내게 익숙한 건 물론 한기찬 번역이다(일부 오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이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 이후에 이 <비가>는 책세상 릴케 전집과 민음사 릴케 전집으로 더 번역/출간되었기 때문에, 우리말 <비가>는 내가 아는 한,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한, 모두 네 종이다. 나는 한때 영역본 <두이노의 비가>도 구했었지만,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만을 구하고 말았었다. 지금이라면 구해볼 수 있을 텐데, 몇 년 전에 한창 구하러 다닐 때는 의외로 눈에 띄질 않았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본을 갖고 있다. 네 종의 번역본을 대조해 가면서 읽는다면(그런 걸 나는 ‘바꿔 말하면-효과’라고 부른다), 얼추 <비가>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현지사정상’ 당장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나마 내가 모스크바에서 릴케를 읽을 생각을 하게 된 건 룸메이트가 들고 온 책세상판 릴케 전집2권 때문이다(거기에 물론 <두이노의 비가>가 실려 있다). 해서 내가 읽는 건 주로, 김재혁 번역의 한국어 <두이노의 비가>와 미쿠세비치의 번역의 러시아어 <두이노의 비가>이다.

 

 

 



러시아본은 대역본이어서 왼쪽 페이지에는 독어 원시가 씌어져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 러시아어 번역이 씌어져 있다. 나는 비록 읽을 수 없더라도 그런 식의 대역본을 좋아하며, 번역시집은 가급적/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번역 시집들 가운데는 민음사의 세계시인선과 솔출판사의 세계시인선이 그런 편제를 갖추고 있다(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시인선도 그랬던 것 같다). 설사 읽을 수 없는 언어라 하더라도, 대역본 체제는 시의 번역이란 것이 원초적인 번역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왜 번역 불가능한가? 시의 언어는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기 때문이고, ‘뜻’이 아니라 ‘글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불가능성이 역설적으로 번역의 조건이기도 하다. 즉 시는 번역될 수 없기 때문에 번역되며, 그때 번역되는 것은 번역불가능성이다. 하긴 이런 번역불가능성은 동일언어 사용자라고 해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자연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로트만에 따르면, 시는 ‘2차 모델화 체계’이다). 가령, 당신은 김수영의 시에 대해서, 이성복의 시에 대해서, 기형도의 시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시 원론을 늘어놓을 수는 없고, 다시 릴케로 돌아가자면, 하여간에 ‘좋은’ 룸메이트를 둔 덕분에 <히치콕>에 이이서 <릴케>도 읽게 됐다(가을에는 <니체>도 읽을 생각이다). 그런데, 시 읽기의 전제는 말 그대로 ‘읽어내기’이다. 시에 대한 어떠한 해석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읽어내기’인바(물론 이때의 해석과 읽어내기는 ‘해석학적 순환’을 구성한다), ‘읽어내기’로서의 읽기란 번역과 마찬가지로, 비유컨대 ‘낮은 포복’이다. 번역은 줄거리만 옮긴다거나 재미있는 장면만 발췌하는 작업이 아니라,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을 짚어가며 그걸 다른 기호학적 체계의 구조물로 변형/구축하는 작업이다(그래서 낮은 포복이다! 이 여름에!). 시 읽기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은바, 2차 모델화 체계, 즉 시를 1차 모델화 체계, 즉 자연언어로 옮겨주는 작업이 그 읽기, 즉 ‘읽어내기’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해서, 그러한 ‘읽기’가 빠진, 해석이나 비평을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해석/비평은 대개 시의 한두 구절이나 한두 연을 떼다 놓고 거기에 이런저런 관념을 버무려서 ‘체념의 시학’이니 ‘달관의 시학’이니 하는 이름들을 그럴 듯하게 붙여놓는바, 그런 건 ‘그의 요리’이되, 내가 음미하고픈 시의 본래 맛과는 거리가 멀다. 요컨대, 시의 경우엔 해석이나 비평보다 일차적인 읽기와 주석이 더 필요하고 요긴하다. 내가 김화영 교수의 미당 시 읽기나 권영민 교수의 정지용 시 읽기 같은 작업을 존중하는 것은 그런 판단에서이다. 물론 번역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기본적인 ‘읽기’이자 ‘읽어내기’이며, 내가 번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번역은 ‘낮은 포복’이자 ‘바닥 청소’(=걸레로 바닥 닦기)이다. 오, 성자들이여! 물론, 대충 닦거나 엉터리로 닦으면 안된다. 더구나 성자들이!).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의 경우에도 아마 독일어로는 많은 주석과 ‘읽기’가 이미 나와 있을 거라고 짐작되지만, 아쉽게도 한국어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기본적인 ‘읽기’로서 네 종의 번역이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그렇다. 주석이 필요하고 ‘읽어내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래서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불충분성 속에서도 내가 <비가>로부터 감동을 받는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는 인간적 ‘울부짖음’에 관한 것이며, 그 울부짖음이 어떤 식으로 구제/위로 받는가에 대한 시이기 때문이다. 이미 적은바, “울부짖음은 독어나 한국어 같은 개별 언어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래서 8년 전에 나는 “그러니 나의 주관적인 감동으로 이 시구의 이해를 대신하는 것이 어찌 결례가 될까, 망발이 될까.”라고 또 적었지만, 이번에는 ‘주관적 감동’이 아닌 ‘객관적 논리’로써 <비가>를 읽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다(내가 읽고 싶은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런 식의 임시방편으로라도 때우는 수밖에 없겠다).



릴케는 사실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인이다. 그는 젊었을 때 루 살로메와 함께 두 차례인가 러시아 여행을 감행하며, 톨스토이를 직접 방문한 적도 있다. 파스테르나크의 <어느 시인의 죽음>(원제는 ‘안전통행증’)에는 톨스토이를 방문했던 이 ‘젊은 시인’에 대한 기억이 살짝 묘사돼 있다(파스테르나크 집안은 톨스토이와 친분이 있었던바, 화가였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는 <부활>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미지는 그가 스케치한 릴케). 그리고 러시아 시인들의 시들을 독어로 번역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릴케의 ‘파리 시절’ 그리고 로댕과의 만남 이전에 러시아의 자연과의 만남은 그의 시작(詩作)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얼마전 <러시아에서의 릴케>란 두툼한 책을 이곳 서점에서 봤는데, 무게와 가격 때문에 사지는 못했지만(돈줄을 구해야겠다), ‘릴케와 러시아’란 주제가 생소한 것은 아니란 사실을 입증한다(이 주제만큼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릴케와 발레리’인데, 릴케는 발레리의 시들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서로 친분을 나눈바 있다. 나중에 찾아봐야겠지만, 이런 주제는 누가 책을 써줬으면 좋겠다).

나의 릴케 읽기는 일단 후기시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그 후기시라는 건 뮈조트성에서 <두이노의 비가>가 처음 씌어지기 시작하는 1912년부터의 시이다. 그가 10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를 완성하는 것은 1922년이며, 그는 이 해에 또 다른 대표작인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쓴다. 그리고 <두이노의 비가>를 쓰기 직전 같은 해에 쓴 시가 연작시 <마리아의 탄생>이다. 내가 이 여름에 읽어볼 계획으로 있는 것은 이 세 작품이며, 집중적인 ‘읽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일단 <두이노의 비가>이다. 물론 주업인 번역 진도에 따라서, 부업인 시 읽기가 얼마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중간에 지젝의 <이라크>나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비평과 진단> 읽기가 끼어들 가능성도 있다(나는 삶을 계획하지만, 통제하지는 못한다). 하여간에, 이런 것이 나의 바캉스 계획이다(나는 당신들의 바캉스를 질투하는 한편으로, 당신들이 나의 바캉스를 질투해주길 바란다. 그게 공평하니까).



일단 시작은 하고 보자. 이미 인용한 바 있지만, <비가>의 첫 시구를 (민음사본을 제외한) 세 번역본에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현재 안 갖고 있는 번역본의 인용은 이전에 쓴 글에서 따온 것이다). (1)“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청하), (2)“뉘라서, 내 울부짖은들, 들어주랴, 천사들의 질서로부터?”(문학과지성사), (3)“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책세상) 이에 대한 원시를 내 짐작대로(나는 독어 수업을 두 시간 청강했을 뿐이다) 음역하면 “베어, 벤 이히 슈리에, 회르테 미흐 덴 아우스 데어 앙겔 오어드눈겐?”이다(역시 발음하기 어려운데, 내 경험상 음역하기에, 그리고 발음하기에 가장 좋은 건 스페인어이다). 더불어 내 마음대로 영역하면, “Whoever listens to my cry, from the order of angels?”쯤이 될 듯하다(이 음역/번역에 대해서는 잘 아시는 분들의 지적/교정을 바란다).

짐작에는 릴케가 도치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듯하며(그리고 ‘오어드눈겐’에서 행이 바뀐다. 그래서 그걸 따라 우리말 번역 중 일부도 행을 바꿔주지만, 그건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알리바이’일 뿐이다), 문학과지성사본이 가장 직역에 가까운 듯하다. 하지만, 시 번역은 단어와 구문을 단순하게 다른 언어로 바꿔주는 게 아니다. 같은 인도-유럽어족의 굴절어끼리는 각운까지 맞춰주는바, 그러한 형식적 고려 때문에 ‘내용’은 다소간 변형된다(물론 교착어인 한국어는 이런 일에 젬병이다). 즉 시는 ‘내용’의 직접적인 번역이 아니라는 얘기이며, 이 때문에 영역된 시들을 읽기도 쉽지 않다(영역된 릴케도 마찬가지일 거라 짐작된다).

문외한이 보기에 <비가>는 특별히 각운 등을 맞추고 있지는 않으며, 덕분에 러시아어 번역 또한 ‘내용’을 이해하는 데 좀더 편하게 돼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옮기는 데 있어서 내가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번역은 청하본이다. 사실 이 번역에 내가 익숙해 있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우리말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참고로, 우리의 경우 번역시의 걸작으로 자주 회자되는 건 일제 때 오장환이 번역한 러시아 ‘농민시인’ 예세닌 번역시이다. 그런 사례에서 알 수 있는바, 시 번역은 번역이면서 번안이다).

이 대목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건 두 가지이다. 첫째, 영어로는 ‘cry’에 해당하는 걸 어떻게 옮길 것인가? 둘째, ‘the order of angels’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내가 독어를 모르기 때문에, 편의상 임의로 옮긴 영어를 사용한다.) 알다시피, ‘cry’는 동사와 명사로 다 쓰이며, 동사로는 ‘소리치다’ ‘부르짖다’ ‘울다’ 등의 뜻이다. 세 번역에서 모두 동사로 옮기고 있는데(명사로라면 ‘외침’이나 ‘절규’가 후보로 떠오르는데, 뭉크의 그림 제목처럼 이 <비가>에도 더 적합한 것은 ‘절규’이다. ‘외침’은 너무 중성적이다), 나는 ‘소리친들’이란 번역은 너무 약하다고 생각한다. 천상계에까지 호소할 만한 정념 혹은 비탄은 ‘소리치다’란 동사로 다 표현되지 않는다(“누가 들어줄까?” 그런 건 안 들어주는 게 당연하다). 천사들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도 할 만큼은 해야 하니까 ‘울부짖다’라고는 옮겨줘야 한다(울부짖는 데도 안 들어주는 건 못된 것들이다). 해서 낙착은 “울부짖은들”.

그리고, 두 번째로 ‘the order of angels’에서의 ‘order’(오어드눈겐)의 번역인데, 우리말 번역은 각각 ‘열’ ‘질서’ ‘계열’로 옮기고 있다. 물론 셋 다 가능한 번역이다. 문제는 이 시의 문맥에 가장 적합한 번역어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그걸 결정하는 건, 일단 독어에서 ‘오어드눈겐’의 용례이다. ‘천사들의 열’이란 말은 ‘천사들의 질서’나 ‘천사들의 계열’보다는 우리말로 자연스럽다. 즉 무표적이다(‘유표적/무표적 marked/unmarked’은 야콥슨의 용어이다). 거꾸로 말해서, ‘천사들의 질서’나 ‘천사들의 계열’이라고 할 때는 한국어 화자의 관심이 ‘천사’가 아니라 보다 유표적인 ‘질서’나 ‘계열’로 가게 된다. 하지만, ‘오어드눈겐’이 얼마나 튀는 말인지 나로선 판별할 수 없다. 내가 고려할 수 있는 건, 이 시구에서 방점이 과연 ‘천사’에 두어져야 하느냐, 아니면 ‘오어드눈겐’에 두어져야 하느냐이며, 나는 전자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러시아어 번역은 ‘천사군(軍)’(이때의 軍은 ‘구세군(救世軍)’의 ‘군’이다). 해서, 나라면 ‘천사들의 열’을 선택하겠다.

천사들의 열, 즉 ‘오어드눈겐’이 우리에겐 다소 낯설지만, 천사들도 서열이 있고 짬밥이 있다. 그래서 대천사 혹은 천사장이 있고, 그 아랫것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자세한 서열을 알지 못하지만, 치품천사(熾品天使), 지품천사(智品天使) 하는 식으로 내려간다(가령 미스코리아 진-선-미 하는 식으로). 이런 수직적 서열관계를 표시하는 단어로는 ‘질서’란 말이 ‘열’보다는 낫다(‘열’은 보다 ‘수평적’이다. ‘계열’은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차이(장점)가 ‘대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해서, 결론은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이다. 물론 약간의 변형은 가능하다. “내 울부짖은들 뉘라서 들어주랴, 천사의 열에서.”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 다음 구절. 행 가름 없이 나열하면, (1)“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힘찬 존재 때문에 나는 사라지고 말리라.”(청하), (2)“어느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해도, 나는 사라지고 말걸, 보다 강한 그의 현존재로 말미암아.”(문학과지성사), (3)”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책세상) 이 대목부터는 독어 음역을 생략한다(잘 모르면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다).

공통적인 ‘내용’은 이렇다. “한 천사가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면, 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너무나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 번역이란 이 ‘내용’을 이제 한국어로 ‘작문’하는 것이다. 먼저, 구문 (1), (2)는 “-한다 해도”라는 양보구문이고, (3)은 “-한다면”이라는 가정법구문이다. 러시아어본은 가정법구문으로 돼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하지만’이란 접속사가 앞에서 이끄는 가정법구문이다(청하본에서는 ‘설마’라는 문두의 부사가 이에 대응한다). 즉 “하지만, -한다면”이란 식인데, 이건 “-한다 해도”와 유사한 의미효과를 갖는다. 내가 좀 어색하게 생각하는 건 (2)와 (3)에서의 종결어미이다. “나는 사라지고 말걸”이나 “나 스러지고 말 텐데” 정도로는 이 시 화자의 비애감이나 비장함을 전달하기에 역부족이다(전자에 대한 반문은 “그러냐?”이고 후자에 대한 반문은 “그래서?”이다). 해서 “-말리라.”

대신에 “사라지고 말리라”보다는 “스러지고 말리라”란 번역이 더 적합하다. 러시아어번역은 ‘바스러지다’. 천사라는 ‘강력한 존재’가 우리를 가슴에 껴안으면 너무도 ‘연약한’ 우리는 그의 품안에서 바스러질 거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어디로 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스러지다’란 동사는 ‘사라지다’(=죽다)와 ‘바스러지다’를 동시에 포괄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적합하다고 한 것이다.

나머지. ‘갑자기’와 ‘느닷없이’는 알다시피 같은 말이고 ‘취향’의 문제이긴 한데, 나라면 ‘갑자기’를 고르겠다. 그건 ‘천사가’ ‘나를’ ‘가슴에’ 등의 ‘아’음과 더 잘 호응하기 때문이다(그러니까 보다 리드미컬하게 된다). 그런 리듬의 관점에서 보자면, ‘느닷없이’는 느닷없다(즉 유표적이다. 쉽게 말해서, 튄다). 이 역시 해당 독일어가 얼마나 유표적-무표적인지를 참조하여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껴안다’와 ‘끌어안다’. 안는 거야 각자가 알아서 할 문제이지만, 이 경우에도 나는 ‘다수’보다는 ‘소수’의 편을 들겠다. ‘바스러지기’에 더 적합한 것은 ‘끌어안다’보다는 ‘껴안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1)‘힘찬 존재’ (2)‘보다 강한 그의 현존재’ (3)‘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 일단 ‘현존재’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해당 독일어는 ‘Dasein’이고, 하이데거 철학에서 보통 ‘현존재’라고 번역되는 단어이지만,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인간인 반면에 여기선 ‘천사’를 가리키므로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 건 아니며 특칭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현존재’라고 옮길 경우, 한국어 화자의 관심은 ‘강한’이 아니라 ‘현존재’로 가게 된다(물론 이 문맥에서 더 중요한 건 ‘(현)존재’가 아니라 ‘강한’이란 형용사이다). ‘힘찬’과 ‘강한’은 선택적이지만, 독어에서 비교급이 사용되고 있다면 더 적합한 것은 ‘강한’이다.

결론적으로, (1)을 중심으로 종합하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여기서도 직역투인 (2)는 도치구문을 사용하고 있는데, 첫째로, 릴케의 도치구문이 독일어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유표적인 구문인가? 둘째로, 시의 운율을 고려한 도치구문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 전달을 의도한 도치구문인가?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일 경우에만 한국어 도치구문이 유의미하며 정당화된다. 한데, 정상어순인 (3)으로 봐서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그렇다면, (2)는 독일시 수업시간의 강독용 번역으로서나 유용해 보인다). 그리하여, 내가 재조합한 번역은 이렇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대충 마음에 든다. 부족하다 싶은 건 나중에 손을 좀 보면 될 것이다. 사실 이 두 문장에는 <두이노의 비가> 전체를 이끌고 가는 핵심적인 모티브들이 포함돼 있다. 물론 ‘천사’는 핵심 중의 핵심인데, 릴케 존재론의 기본축은 ‘강한 천사’와 ‘연약한 인간’의 대비이다. 흔히 말해지듯이, 인간은 짐승도 아니지만, 천사도 아니다(못 된다). 유한한 존재이자, 필멸적 존재인 인간, 그래서 맨날(은 아니더라도) ‘울부짖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그 ‘어중간함’이 릴케 시의 숙고의 대상이다(죽음의 관점에서는 ‘너무 이른 죽음’. 릴케는 그걸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어중간한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 받는가.

지상적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더라도 천상적 존재인 천사들은, 혹은 신은 눈도 꿈쩍하지 않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노장철학에서 말하듯이, ‘天地不仁’인 것이다). 그건 ‘계’가 다르고 ‘질서’가 다르며,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사들의 무관심을 탓하고, 천지의 ‘어질지 않음’(不仁)을 원망하는 것은 유치하다(다시 말해서 유아적이다. 인격화 혹은 의인화는 사물화만큼이나 ‘편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으로 더 무서워할 만한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고 ‘어짊’이다(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이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겨 설혹 한 천사가 우리를 껴안아준다고 해도 문제는 우리가 그걸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브한 비유를 들자면, 백일도 안 지난 아이한테 보약을 먹이는 격이다.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며, 아이가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관심과 사랑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실제로 엄마의 젖가슴에 눌려 질식사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니 어찌 함부로 관심을 구하겠는가, 사랑을 구걸하겠는가? 간혹 밥 먹듯이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정말로 사랑을 견딜 수 있는 건지? 가슴이 터질 듯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터져 스러지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연약한’ 우리가 견뎌내기에는 너무 강한 정념이기 때문이다(나는 밥 먹으면서 사랑하고, 이 닦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활화산처럼 터져버리는, 그런 사랑”(혜은이)은 얼마나 무서운/두려운 사랑인가?

그건 ‘진리’나 ‘복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맨정신으로 대문자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진리’를 견딜 수 있을까?(“살아남는 일은 많은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공연히 있겠는가?) 곧, 진리는 죽음이다(이러한 명제의 톨스토이 버전은 “죽음이 곧 진리이다”이다. ‘릴케와 톨스토이’도 한 편의 글이 될 만한 주제인데, 두 사람의 공통적인 화두는 ‘죽음’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매 학기마다 강의시간에 떠들어대곤 했다). 그럼, 성도들이여, 복음은 어떤가? 만약에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복음’을 견딜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견딜 수 있는가? 그의 ‘기적’은 어떤가? 혹은 ‘재림’은? ‘종말’은?

내가 피치 못할 이유로 몇 번 다녀본 교회에서는 예배 시작 때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던데(나는 아직도 못 외운다. 머리가 나쁘기도 하지만, 외워지질 않는다), “-믿사오며, -믿사오며, -영원히 믿사옵나이다”란 구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믿음’을 정말로 견딜 수 있는 것인지? ‘공포와 전율’을 느끼지 않으면서, 그래서 기절하지 않으면서, 그 숨막힐 듯한 ‘믿음’에 질식사하지 않으면서, 정말로 견딜 수 있는 것인지? 해서, 밥 먹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그건 ‘믿음’이 아니라 일상이거나 비즈니스일 것이다). 왜냐고?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해서 이 두 구절은 많은 걸 ‘평정’하게 해준다. 내가 17년 전에 인생에 대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건 릴케의 이 시 구절을 읽은 덕분이다. 이미 앞에서 적지 않았던가?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눈물나게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감동적이다.”

당신도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 감상(感傷)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끔은 골방에서 이 시구를 되뇌어보라. 아니면 호프집에서라도. 다소간 위로가 되고, 구제가 될는지 모른다(물론 구원은 턱도 없다. 우리는 연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천박하기도 하므로). 그리고, 하여간에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는 공연한 관심과 사랑, 진리와 복음을 구걸하지 말고, 그저 대충 울부짖는 데 만족할 일이다. 울다 보면 속이 후련해지고(당신도 알지 모르겠지만, 기뻐지기까지 한다), 내가 또 언제 울어보겠냐는 생각도 들 테니까(인생이 잠시이듯이 우는 것도 잠시이다).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앞의 세 줄의 시 구절을 들고 날밤을 샌 것은 이젠 좀 이해해 보고자 해서이다. 17년 전에는 ‘무지’가 용납/용서될 수도 있었지만, 이젠 나이도 꽤 먹었고, 사회적 체면상 알 건 알아야 하며, 아는 체도 해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두이노의 비가> 읽기는 그래서 계획된 것이다(나는 언젠가 이 시에 대해서 이런 막된 글이 아닌, 정갈한 주석/해석을 쓰고 싶다. 나를 눈물나게 한 것들은 이런 식으로 다 갚아줄 거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어떻게 되는가?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그러니까, 다음 번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아니, ‘무서움’부터인가?.. 

P.S. 6시간 넘게 이 글을 붙들고 있었는바, 덕분에 공친 번역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번역(주업)이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에로스)에 의지하고 있다면, 이런 읽기(부업)는 죽음에 대한 동경(=타나노스)에 의존하고 있다(혹은 ‘의무감’ 때문에 미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릴케는 그러한 읽기에 가장 적합한바,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가장 탁월한 해석자이기 때문이다(반면, 릴케와 함께 20세기 독일시를 대표할 만한 고트프리트 벤의 시적 주제는 ‘시체’이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처음 구상한 이 글의 원제목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혹은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이다. 그게 너무 긴 듯하여, 뒷부분으로만 제목을 삼았다. 밀린 번역에 허덕이는 주제에 남들 번역에 참견하는 듯하여 멋쩍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의무’ 따로, ‘권리’ 따로라고 해야겠다.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해서, 몇 마디 참견하는 건 나의 권리이다(더구나 공짜로 얻은 책들도 아니고, 다 내 돈 주고 산 책들이다).

<두이노의 비가> 읽기는 언제 다시 시간을 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읽고 싶어한다는 것이고, 결국은 읽게 될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다. 끝으로, 릴케의 시들 가운데, (내가 읽은바) 한국어 번역이 가장 뛰어난 시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이 정도면 한국어로도 ‘시’이다). 제목은 <이별의 꽃>인데, 릴케에게서 ‘이별’은 거의 ‘죽음’과 동의어이다. 나는 다시 한동안 죽어지내도록 하겠다. 빠까!..

이 세상 어디선가 이별의 꽃은 피어나
우리를 향해 끝없이 꽃가루를 뿌리고
우리는 그 꽃가루를 마시며 산다.
가장 가까이 부는 바람결에서도
이별을 호흡하는 우리.

04. 07. 26/ 07. 08. 28. 

P.S. 내용을 약간 교정한 '담비' 버전은 http://www.dambee.net/news/read.php?idxno=5521&rsec=MAIN&section=MAIN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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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8-2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 가끔(아주아주 가끔) 원서로 읽어요. 독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때는 그 때밖에 없답니다.

로쟈 2007-08-29 19:32   좋아요 0 | URL
잘 하셨네요.^^ 저는 칸트나 헤겔을 독어로 읽는 건 별로 부럽지 않은데, 하이데거나 릴케를 독어를 읽는 건 좀 부럽더군요...

2007-08-29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29 19:33   좋아요 0 | URL
아주 '고전적인' 번역으로 읽으신 거 같은데요.^^ '어디로 사라진' 책들은 제가 나중에 도서관을 뒤져봐야겠네요...

섬나무 2007-08-2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감동적인지 모르겠는데 감동적인 글입니다라고 남기고 싶습니다.
로쟈님의 바캉스와 안주에 질투보단 절망감을 느낍니다.

로쟈 2007-08-29 19:34   좋아요 0 | URL
제 바캉스가 그토록 절망적인가요?^^;

섬나무 2007-08-30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흉내낼 수 없는 열정과 에너지에 대한 질투이자 절망감이지요.

로쟈 2007-08-30 19:39   좋아요 0 | URL
과도한 절망이신데요.^^ 열정이야 다들 갖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껴둘 따름이겠죠...

Permanent rumor 2007-08-30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블로그로 퍼가도 될지요...
릴케의 싯구가 가슴을 울리네요.
 

최근 부쩍 이미지 관리에 나서고 있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이번엔 웃통을 벗고 나서서 화제가 되고 있단다. 찬반 양론이 있다지만 대세는 찬사쪽인 듯하다. 러시아 여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고 하니까 이 정도면 이미지 컨설팅을 받을 만하다. 가히 '푸틴 성대'(내년 대선이 변수이긴 하지만). 그의 측근인 '실로비키'들까지 가세해서 말 그대로 푸틴 천하이다(푸틴 리더십은 정치학에서 단골 연구주제이다). 관련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

중앙일보(07. 08. 28) '몸짱' 푸틴 사진에 러시아가 시끌

블라디미르 푸틴(사진) 러시아 대통령의 근육질 몸을 보여 준 사진이 공개된 지 열흘이 넘도록 여전히 화제가 되고 있다. 문제의 사진은 푸틴 대통령이 13~15일 남부 시베리아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투바 자치공화국에서 휴가를 보내며 찍은 것이다. 군복 바지를 입고 웃통을 벗은 채 강에서 낚시를 즐기는 모습을 담은 이 사진엔 운동광인 푸틴 대통령의 탄탄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크렘린 공보실이 최근 이 사진을 대통령 행정실 공식 홈페이지에까지 올리면서 러시아 내에서 찬반 여론이 들끓고 있다. 대통령의 건강한 몸에 대한 찬사의 목소리와 함께 지도자의 품격에 맞지 않으며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인기몰이 행동이란 비판 여론이 동시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주류는 찬사 쪽이다. 현지 인터넷 사이트와 블로그는 푸틴의 벗은 사진과 그의 몸에 대한 칭찬 글들로 넘쳐나고 있다. 타블로이드 신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자사 웹사이트가 푸틴의 몸을 찬양하는 여성 독자들의 글로 도배됐다고 전했다.

신문은 22일자 기사에서 '푸틴처럼 되라'는 제하에 가슴을 드러낸 푸틴 대통령의 컬러 사진을 싣고 장관이나 주지사, 의원들이 대통령과 같은 몸을 만들려면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지를 삽화까지 곁들여 소개했다. 한 라디오 토크쇼에서는 푸틴의 반(半) 나체 사진이 대통령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던 진행자가 청취자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동성연애자 사이트에는 대통령이 웃통을 벗은 것은 동성애에 대한 관용을 표시한 것이란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까지 등장했다.

이와 함께 사진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비난하는 여론도 있다. 일부 정치 전문가는 "푸틴 대통령의 벗은 사진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그의 건강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며 "그가 헌법이 금지한 3기 연임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투기를 조정하거나 잠수함을 탄 대통령의 모습을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해 국민에게 강한 지도자상을 심어 온 지금까지의 정책과 다를 바 없다는 해석이다. 반면 스타니슬라프 벨코프스키 국가전략연구소장은 "대통령의 휴가 사진은 그가 은퇴를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라며 상반된 해석을 하기도 했다.(유철종 기자)

조선일보(07. 08. 27) 음지 '막강세력'으로 부활… 러시아 '실로비키'

소련은 망했지만 KGB(옛 소련 정보기관)는 러시아 최고의 실세로 되살아났다.’ 1991년 소련 공산체제의 몰락과 함께 청산 대상으로 추락했던 ‘음지의 제왕’ KGB가 러시아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실력자’를 뜻하는 ‘실로비키(Siloviki)’로 떠올랐다고 이코노미스트 최신호가 전했다. 이들은 FSB(러시아 연방보안국·KGB 후신) 국장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Putin) 대통령의 후원에 힘입어 러시아를 ‘스파이국가(Spookocracy)’로 바꿔놓았다.

◆“고위 관료 4분의 1이 정보기관 출신”
미하일 고르바초프(Gorbachev) 옛 소련 대통령이 정보기관을 무력화하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단행할 때 KGB 직원 50만명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설욕을 다짐했다. 그로부터 8년 후, 푸틴의 집권과 더불어 이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푸틴은 ‘올리가르히(Oligarchy·신흥재벌)’ 등 도전 세력을 거세하고 권력을 다지는 과정에서 KGB 동료들을 되살려냈다. 이들은 대통령궁인 크렘린은 물론 정부 각 부처와 군·언론·재계까지 틀어쥐었다. 러시아학술원의 사회학자인 올가 크리슈타노프스카야(Kryshtanovskaya)는 전국 고위 관료의 4분의 1이 실로비키라고 진단한다. 이제 국가 중대사는 푸틴의 옛 KGB 동료와 그의 고향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들로 구성된 실로비키가 좌우한다.

◆“실로비키는 국가 자체”
과거 KGB가 정치 권력에 열중했던 데 반해 실로비키는 권력과 돈을 한 손에 쥐었다. 푸틴 외에 “이들에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알렉세이 콘다우로프(Kondaurov) KGB 간부 출신 연방의원은 말한다. 이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막강한 실권을 휘두르는 게 특징이다. ‘음지에 있을 때 더 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뒤로 물러난 지금 이들의 정신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다. KGB 시절과 달리 반(反)자본주의를 고집하지 않는다. 자신들도 시장경제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 안팎의 ‘적’을 제압하는 것이 사명이라 믿는다. 이를 위해서라면 법도 발 아래에 있다고 여긴다. 이들은 러시아에 대한 최대 위험이 서방에서 온다고 본다. FSB 요원 양성학교인 FSB 아카데미는 ‘KGB 혈통’의 자녀를 우대하고, 실로비키끼리의 혼사를 권장한다.

◆국가경영 능력은 부재
하지만 실로비키는 무소불위의 힘에 비해 국가경영 능력이 의심스럽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국가를 ‘접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경제와 경영에는 문외한들이다. 정보기관 특유의 직업주의가 사라진 것도 위험 요소. 한 전직 KGB 요원은 “폭력을 쓰는 것은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실토한다. 이들은 국외에 적을 만들어 내분을 봉합하려 하지만 이것이 국가의 번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러시아는 고유가에 힘입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범죄율과 부패, 관료주의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서방에 적대적인 외교정책 역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전병근 기자)

07. 08. 27.

P.S. 이코노미스트지의 기사는 http://www.economist.com/world/displaystory.cfm?story_id=96826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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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28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푸틴은 참 오래 해먹는거(?) 같아요.

로쟈 2007-08-28 21:02   좋아요 0 | URL
이제 '시작'이라는 자세입니다...

털세곰 2008-01-05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하~ 정곡을 찔렀습니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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