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탈정치에 반대하여' 장에서 이탈리아 총리 베를루스코니에 관한 대목을 읽다가 그의 행적이 너무나도 유사한 또 다른 사례를 떠올리게 하기에, 지난달에 읽은 기사를 다시 찾아 읽었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5#). 대략 지난번 총리 재임시절 베를루스코니의 '방송장악' 시도가 현 이명박 정부의 유사 행태를 앞질러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베를루스코니의 과거가 이명박의 미래라는 것. 그러니 좀 주의해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네그리나 아감벤보다도 먼저 베를루스코니를!.. 

시사인(08. 06.21) 이탈리아 과거는 한국의 미래?

우리 세대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 깊은 이탈리아 영화를 묻는다면 아마도 <인생은 아름다워>가 꼽힐 것이다. 유태인 학살이라는 비극 상황에서도 해학과 낙관의 가르침을 전해준 로베르토 베니니의 열연이 감동적이었다. 그 로베르토 베니니가 정치 운동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다. 2005년 10월15일 인터뷰차 이탈리아 공영방송 라이(RAI)TV를 방문한 베니니는 저녁 8시 뉴스가 시작되자 카메라가 비추는 앵커 뒤로 돌진해 깡총깡총 뛰면서 “총리가 방금 사임했대요”라고 외쳤다. 물론 총리는 사임하지 않았지만 국민은 그의 ‘깜짝 풍자’에 웃었다. 로베르토 베니니는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문화 예산을 35% 삭감하는 식의 정책을 펴자 이에 반대하며 시위를 주도해온 터였다. 그가 라이TV 뉴스를 ‘퍼포먼스’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정권의 입’이 된 공영방송을 비판하려는 뜻도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선대위 상임고문을 지낸 인사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데 이어 YTN 사장,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아리랑TV 사장, KBS 사장까지 대통령 측근이 임명되거나 하마평에 오르면서 정권의 방송 장악 우려를 낳고 있다. 이명박 시대의 방송 미디어를 미리 보려면 ‘이탈리아의 이명박’이라는 베를루스코니의 사례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4월13일 이탈리아 총선에서 우파연합이 승리했다. 베를루스코니가 부활한 것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7개월 동안 총리를 지냈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 총리를 역임한 거물이다. 그의 재임 시절 공과를 두고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가 이탈리아 미디어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베를루스코니의 귀환에 이탈리아 언론인이 잔뜩 긴장하는 이유다.

베를루스코니는 CEO 출신이라는 점이 이명박 대통령과 닮았다. 선거 슬로건이 ‘경제 살리기’라는 것도 이명박 대통령과 닮은 점이다. 베를루스코니는 피닌베스트, 미디어셋 등의 미디어 기업과 일간지 ‘일 지오르날레’, 방송 채널 ‘이탈리아 우노’ ‘레테 콰트로’ 등을 거느린 ‘이탈리아의 루퍼트 머독’이다. 이탈리아 방송 시장은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셋 채널과 공영방송 라이 채널이 양분한다. 라이1 채널은 한국의 KBS와 같은 영향력이 있는데 그것도 이제 베를루스코니 것이 됐다. 파이낸셜 뉴스는 6월19일자 기사에서 이탈리아 미디어 노출의 90%가 베를루스코니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됐다고 썼다.

공영방송 수호 시위도 닮은꼴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공영방송 관리는 의회가 의석 수만큼 나눠 맡는 방식이었다. 대체로 라이1 채널은 기독교민주당, 라이2는 사회당, 라이3은 공산당이 관리한다고 알려졌지만 실제 정치 집단이 보도 내용에 관여하거나 압력을 넣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언론사 운영 경험으로 방송을 잘 아는 베를루스코니는 2001년 집권하자마자 라이 길들이기에 나섰다. 그는 이사 5명 중 3명을 자신의 측근으로 채운 것도 모자라, 2003년 2월 이사회 운영에 자기가 직접 개입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삐딱한’ 시각을 가진 기자는 쫓겨났다. 엔조 비아지·미첼 산토르·다니엘레 루타치 등이 그랬다. 라이 뉴스는 이상해졌다. 2003년 7월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독일 출신 유럽의회 의원에게 “나치 강제수용소를 다룬 영화의 간수 역할에 완벽하게 어울린다”라고 농담을 했다가 외교적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라이TV는 “총리가 던진 농담에 유럽의회 의원들이 반발했다”라는 식으로 짤막하게 보도했다. 2003년 11월, 라이TV에 15년이나 출연해온 국민 여배우 사비나 구잔티는 정치 풍자 코미디 <RAIOT>를 시도했다. 1회 방송에서 구잔티는 베를루스코니로 분장해 총리를 풍자했으나 바로 출연 정지를 당했다. 미국의 보수 단체 프리덤하우스는 베를루스코니 집권 시기 이탈리아의 언론 자유는 세계 77위라고 발표했다.

물론 베를루스코니의 방송 장악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라이 이사회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라이 회장에 자기 심복을 심는 데는 몇 번이나 실패했다. 5년 동안 라이 회장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고 그 중에는 임명은 됐지만, 회장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일주일 만에 물러난 사람도 있었다(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 서동구씨가 8일 만에 KBS 사장에서 물러난 일과 비슷하다). 2005년에도 (베를루스코니가 임명한) 방송통신부 장관이 추천한 회장 후보가 번번이 여론과 야당의 퇴짜를 맞자 결국 좌파 성향의 언론인인 페트루치올리가 회장이 됐다.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던 베를루스코니도 실제 공영방송 회장에 자기 사람을 앉힌 기간은 2년뿐이었다. 



국민의 저항도 심했다. 개악 방송법이 통과되고 라이 경영진이 전격 교체된 뒤인 2002년 3월 초, 전국에서 수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로마 시민은 라이 방송국 건물을 둘러싸고 인간띠를 만들며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를 외쳤다. 마치 요즘 한국의 촛불시위대가 KBS 수호에 나선 풍경과 비슷했다. 2006년 5월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중도좌파연합에 패배했다. 약속과 달리 베를루스코니 재임 기간에 이탈리아 경제성장률은 0.2%로 유럽에서 꼴찌 수준이었다. 새 총리가 된 로마노 프로디는 라이 회장 클라우디오 페르루치올리를 교체하지 않았다.

5월8일 베를루스코니가 취임한 이후 라이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아직 라이 회장은 페르루치올리 그대로다. 이탈리아 밀란에서 활동하는 독일 저널리스트 커스틴 하우센은 <DW-World>에 쓴 칼럼에서 “요즘 이탈리아 언론인 중에는 정치적 압력을 의식해 자기 검열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라며 “새로 정권을 잡은 베를루스코니는 어떤 식으로든 라이TV의 경영권을 교체하려 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신호철 기자)

08. 07. 28.

 

 

 

 

P.S.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지젝의 분석을 잠시 따라가본다. <지젝이 만난 레닌>의 545-549쪽, 그리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206-207쪽을 참조한 것이다(영어판을 옮긴 <지젝이 만난 레닌>과 독어판을 옮긴 <혁명이 다가온다>는 예전에 지적한 대로 부분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며. 여기서도 <지젝이 만난 레닌>의 542쪽 두번째 문단부터 547쪽 첫문단까지는 <혁명이 다가온다>에 들어 있지 않다). 인용은 <지젝이 만난 레닌>을 따르며 읽기의 편의를 위해서 약간 수정하기도 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2001년 5월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에서 배울 교훈이 있다면, 진짜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제3의 길 좌파'라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승리에 관하여 피해할 될 주된 유혹은 그것을 보수-좌파 문화비평가의 전통(아도르노에서 비릴리오까지)에 따라 또 한번의 연습의 구실로 이용하는 것이다. 즉, 조작된 대중의 어리석음과 비판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율적 개인의 소멸을 애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승리의 의미를 과소평가하자는 뜻은 아니다. 헤겔은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두 번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것도 그 한 예다. 따라서 베를루스코니도 두 번 선거에서 이겨야만 우리가 이 사건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단순한 우연적 호기심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지만, 두번째는 우리가 더 깊은 필연성과 만나고 있음을 보여준다.(545-6쪽)

인용에서 "베를루스코니도 두번 선거에서 이겨야만 우리가 이 사건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부정확하다. 이미, 1994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7개월간 총리를 역임한 바 있기에, 2001년의 승리는 그의 두번째 승리다. 원문도 "And it seems that Berlusconi also had to win the election twice for us to become aware of the full consequences of this event."이므로 "베를루스코니도 선거에서 두 번 이긴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 사건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정도로 이해해야겠다. 여기서 '사건'이란 대중 영합적 우파의 승리를 말한다(한데, 그는 이번 봄에 세번째 승리를 거두고 또 다시 총리가 됐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정도면 '이탈리아 좌파'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베를루스코니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그의 승리는 정치에서 도덕성의 역할에 관한 우울한 교훈을 준다. 커다란 도덕적-정치적 카타르시스(전후 이탈리아 정치를 지배했던 집권 기민당과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양극 체제를 파멸로 몰아넣은 10년 전의 반부패 운동, '깨끗한 손'의 궁극적 결과가 권자에 앉은 베를루스코니다. 이것은 루퍼트 머독이 영국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과 비슷하다. 머독은 기업 홍보 사업을 하듯이 정치 운동을 했다.(546쪽)

'10년 전의 반부패운동'이란 "1992년 부패 고위 공직자와 의원들을 추방한 ‘마니풀리테(깨끗한 손)'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 이후에 기독민주당과 공산당이라는 양대 정당이 수많은 군소 정당으로 분열됐고, 계파와 지역 중심 의회 구성 방식 때문에 여ㆍ야당 어느쪽도 압도적 과반확보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졌다고. 그런 정치적 상황의 최대 수혜자가 베를루스코니인 것이니 거의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승리를 루퍼트 머독의 경우와 비교했는데, 머독이 토니 블레어를 지지한 것은 알지만 자신이 소유한 언론을 베를루스코니처럼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에 동원했는지는 모르겠다. "머독은 기업 홍보 사업을 하듯이 정치 운동을 했다"의 원문도 "a political movement run as a business-publicity enterprise."인데, 일반적인 경향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려나 베를루스코니 이후 이탈리아 정치는 아주 노골적인 '비즈니스의 장'이 되었다. 그가 이끄는 당이 '전진 이탈리아(Forza Italia)'당인데, '포르차 이탈리아!'란 말 자체가 축구의 응원 구호라고 한다(우리로 치면 '필승 코리아'당쯤 되겠다). 그러고 보니 베를루스코니 자신이 축구클럽 AC밀란의 구단주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전진 이탈리아(Forza Italia)'는 이제 정당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스포츠 팬클럽에 가깝다. 과거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스포츠가 직접 정치화 되었다면(동독이 최고의 운동 선수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라), 이제는 정치 자체가 스포츠 시합이 되어버렸다. 이런 비유를 더 밀고 나갈 수도 있다. 공산주의 체제가 산업을 국유화했다면, 베를루스코니는 어떤 면에서는 국가 자체를 사유화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승리 밑에 잠복한 네오 파시즘의 위험에 대한 좌파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의 우려는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시즘은 여전히 결연한 정치적 기획이지만, 베를루스코니의 경우는 밑에 잠복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감춰놓은 이데올로기 기획은 없다는 말이다. 그냥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갈 것이며, 자신이 더 잘할 것이라는 뻔뻔스러운 확언만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베를루스코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탈정치다. 모든 서방 국가에서 '탈정치'의 궁극적 증거는 정부를 경영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 올바른 정치적 수준을 박탈당한 채 경영적 기능으로 재고안되고 있다.(546-7쪽)

"그냥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갈 것이며, 자신이 더 잘할 것이라는 뻔뻔스러운 확언만 있을 뿐이다."란 대목에서는 자신이 당선되면 주가지수가 두달 안에 3천까지 오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한 'CEO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명박은 베를루스코니와 마찬가지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탈정치다(이 '탈정치'의 한국식 표현이 '탈여의도 정치'이다). 이 '탈정치'는 '탈이념'이기도 해서, 베를루스코니와 마찬가지로 "감춰놓은 이데올로기 기획은 없다". 그걸 '실용'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주먹구구'에 가깝다. 거기에 적반하장격으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들리는 말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이다.  

베를루스코니식의 탈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인내해야 할까? 지젝의 전망은 낙관적이지 않다. "가까운 미래는 장-마리 르펜이나 팻 뷰캐넌 같은 노골적인 우익 선동가들의 것이 아니라, 베를루스코니나 하이더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대중 영합적 민족주의라는 양가죽을 쓴 이런 세계 자본의 옹호자들의 것이다. 그들의 '제3의 길 좌파' 사이의 투쟁은 세계 자본주의의 과잉을 누가 더 효과적으로 저지할 것이냐를 둘러싼 투쟁이다. '제3의 길'의 다문화주의적 관용이냐 아니면 대중 영합적 동성애 혐오냐? 이런 따분한 양자 택일이 전 지구화에 대한 유럽의 대답일까?"(549쪽) 여기서 '제3의 길 좌파'의 한국식 표현은 '좌파 신자유주의'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양자 택일도 한심한 건 마찬가지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어지는 대목은 다시 <지젝이 만난 레닌>에만 포함돼 있다.

따라서 베를루스코니는 최악의 형태의 탈정치다. 반좌파 자유주의의 완고한 목소리를 내는 <이코노미스트>조차 어떻게 유죄 선고를 받은 범죄자가 총리가 될 수 있느냐고 신랄한 질문을 던지자, 베를루스코니는 이 잡지가 '공산주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난했다! 이 말은 베를루스코니에게는 그의 탈정치에 반대하는 모든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옳다. 그외에는 그에게 진정으로 반대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이건 '제3의 길' 좌파건 나머지는 모두 기본적으로 베를루스코니와 똑같은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때깔이 다를 뿐이다. '제3의 길' 좌파가 과연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에 전 지구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따라서 베를루스코니의 편집적인 인식론 지도의 두 번째 측면 역시 옳은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즉 그의 승리가 더 급진적인 좌파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인식 말이다.(549쪽, 강조는 나의 것)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의 한국식 표현은 알다시피 '빨갱이들의 음모' 혹은 '주사파들의 음모'이고 '배후'이다. 이제까지 쇠고기 재협상에서 이명박 퇴진을 외치는 촛불의 목소리에 배후는 없었다. 하지만, 자유주의나 제3의 길 좌파가 우리의 배후가 될 수 없다면, 중요한 건 이제라도 보다 급진적이고 강력한 '배후'를 조직하는 일이다(촛불의 지구전과 조직화에 대해서는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8/07/021003000200807140719005.html 참조). 즉, 그들의 편집증적 망상에 사후적으로 실체를 부여해주는 것, 그것이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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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재용 대통령, 꿈만은 아니다!
    from 일체유심조 2008-08-18 16:52 
    정주영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유럽에서 완벽하게 성취한 사람이 있다.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당신들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는 선거 구호로 세번 째 총리에 등극한 사람. 그는 1600 만 명 내외의 철벽 ...
 
 
노이에자이트 2008-07-29 22:25   좋아요 0 | URL
이태리는 공산당 및 좌파가 상당히 강한데 이런 인물을...하기야 공산당 및 좌파가 강한 프랑스도 사르코지 같은 인물이 당선되니까요.지젝이 이런 글도 썼군요.

로쟈 2008-07-30 01:14   좋아요 0 | URL
지젝이 주로 이런 글을 씁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30 12:34   좋아요 0 | URL
오호...그렇군요.

김상호 2008-08-04 21:41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네요. 진짜 섬뜩한건 이명박에게도 '그에게 진정으로 반대하는 자가 없진 않지만 거의 드물것'일 지도 모른다는 거에요. 사실 참여정부가 '정말로' 명박과 반대되는지 전 모르겠읍니다. 오히려 참여정부의 옹호자들은 '진정한' 시장경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작품이라고 하는 현실이거든요. 말로는 신자유주의를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더욱 신자유주의에 천착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명박의 불평은 이해가 갑니다. '당신은 신자유주의를 하라고 해놓고 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인가요?' 이런 식이겠죠.
 

이번주 시사인에 실린 출판리뷰를 옮겨놓는다.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민음사, 2008)을 다루고 있다. 원제대로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리뷰의 분량상 모두 다루지는 못했다.  

시사인(08. 08. 02)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최근작 <폭력의 시대>(민음사 펴냄)가 번역돼 나왔다. 그의 대표작인 서구 근대사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와 20세기를 다룬 <극단의 시대>를 연상케 하는 제목이지만 원제는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이다. 주로 2000년에서 2006년 사이에 집필된 에세이들을 모은 것인데,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이전에 낸 책들의 내용을 보강해주고, 동시에 최신 정보에 맞게 수정해주는 글들”이다. 일견 자신의 충실한 독자를 위한 ‘애프터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지난 세기를 압축해서 둘러보고 새로운 천년의 시발점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계의 상황과 정치적 과제를 짚어보는 유익한 계기가 되어준다.

홉스봄이 되돌아보는 20세기는 어떤 세기였나? 그가 ‘극단의 세기’라고 부른 ‘단기 20세기’(1914-1991)는 물질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인류의 역량이 우주로까지 뻗어나간 세기였지만 동시에 유사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포함해서 전쟁으로 인하여 직간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억 8700만명에 달하며 이 수치는 1913년을 기준으로 당시 세계 인구의 10%가 넘는다. 1914년 이래 세계 전체가 평화로웠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고 하니까 달리 ‘전쟁의 세기’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게다가 사정이 더 좋지 않은 것은 갈수록 민간인의 피해가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1차 대전의 사망자 중 민간인은 고작 5%였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는 66%까지 늘어나며, 요즘에는 아예 80-90%의 희생자가 민간인이라고 한다.

그러한 포연과 살육 속에서도 20세기는 한편으로 인류사에 극적이면서도 갑작스러운 단절을 가져왔다.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이 단절은 기술과 산업생산에서의 변화에 힘입은 것인데, 홉스봄이 지적하는 것은 네 가지 측면이다. 첫째, 농민 계층의 쇠퇴와 몰락 둘째, 초거대 도시의 부상 셋째, 의사소통 수단의 기계화 넷째, 여성이 처한 상황의 변화. 우리의 경우를 보자면 모두가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이루어진 변화이다. 게다가 교육 기회 확대와 관련하여 저자는 적정 연령층의 55%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20개국 중의 하나로 한국을 꼽는데, 사실 고등교육의 확대는 한국사에서 유례없는 20세기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이러한 변화를 계승하고 있지만 국가의 위상 자체가 약화되어간다는 점에서는 20세기와 구별된다. 다국적기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탓에 자국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신뢰도 사라져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징병된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전쟁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20세기 전쟁의 전형적인 형태인 국가 간의 전쟁은 크게 줄었고, 덕분에 세계평화에 대한 전망이 20세기보다는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량 학살과 난민의 양산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2003년 말을 기준으로 전 세계 난민의 규모는 약 38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것은 2차 세계대진 직후의 난민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급속한 세계화가 초래하고 있는 지역 간 불균형과 불평등 외에 21세기가 당면한 문제점은 복수의 강대국이 균형을 이루는 국제 체제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제에 의해서 냉전시기의 균형이 가능했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이 제국의 확립에는 필수적이지만 그 유지에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은 자신의 힘만을 믿는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서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한 것 외에는 국제적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경제적 허약함만을 노출시켰다. 역사학자로서 홉스봄이 확신하는 것은 미국의 현재와 같은 위세가 역사적으로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리라는 점이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가장 몰두해야 할 일이 미국을 말리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미국을 교육시키거나, 재교육시키는 것”이라는 게 ‘폭력의 시대’를 염려하는 늙은 역사학자의 결론이다.

08. 07. 28.

P.S. 참고로, '세계화시대 미국문화와 폭력'을 다룬 책으로 김상률 교수의 <폭력을 넘어서>(숙명여대출판부, 2008)가 있다. '세계화 시대의 현대 미국 소설 다시 읽기'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현대소설에 나타난 '폭력의 재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전공서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시의성'이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적어둔다.

국가는 폭력이다

더불어,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글들을 모은 <국가는 폭력이다>(달팽이, 2008)의 출간 사실도 적어둔다. 아직 알라딘에는 입고가 되지 않은 듯한데, '평화와 비폭력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비록 '늙은 작가'의 성찰도 20세기가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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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홉스봄 옹은 노익장이 대단하군요.타이프로 글을 쓰시는지 손글씨로 쓰시는지 궁금하네요.
 

본격적인 여름방학을 맞아 볼 만한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문제적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이번주 개봉작 <미스트리스>(2007)도 그 볼 만한 영화에 포함시키고 싶다(미성년자 관람불가이므로 '방학'과는 무관하군!). 원제는 '늙은 정부'. 개괄적인 소개는 이렇다.

세계일보(08. 07. 25) 치명적인 사랑의 쾌감…팜프파탈, 21세기 페미니스트로 격상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은 말은 의외로 더 빨리 달린다고 한다. 고통이 쾌감으로 변해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빨리 달릴수록 화살은 더 깊게 박히고 결국 말은 죽게 된다. 죽음에 이르는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 치명적인 유혹. 비단 말뿐인가.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사랑은 지금 당신 곁에도 존재한다.

‘미스트리스’는 이처럼 치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스테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처럼 근대 이전 유럽을 배경으로 여성 중심의 사랑을 그렸다. ‘로망스’ ‘팻걸’ 등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성적 코드로 풀어내던 여성 감독 카트린 브레야가 메가폰을 잡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다.

Une vieille ma?resse

1835년 파리,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적 혼돈을 반영하듯 상류사회에서도 온갖 스캔들이 난무한다. 사교계를 주름잡던 꽃미남 마리니(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귀족 가문의 규수 에르망갸드(록산 메스키다)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출신 무희 벨리니(아시아 아르젠토)와 깊은 사이다. 둘은 10년 동안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왔다. 마리니는 이 관계를 끝내기 위해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올린 마리니와 에르망갸드는 파리를 떠나 조용한 해변으로 이사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날 벨리니가 이들 앞에 나타난다.

‘미스트리스’는 벨리니와 마리니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붙어있는 존재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애정없는 욕정만을 취하지만 운명처럼 질박한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전쟁터에 나간 말 엉덩이에 박힌 화살처럼 서로의 삶에 파고든다. 사랑의 치명적인 쾌감을 거부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측은하다.



정부(情婦)라는 의미의 제목에서 보듯 벨리니는 결혼 제도를 위협하는 인물, 남성의 삶을 파멸로 모는 위험한 존재다. 이런 여성을 두려워한 남성들은 이들에게 팜므파탈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따라서 남성적 시각에서 벨리니는 요부이자 마녀다. 하지만 영화는 벨리니를 옹호한다. 그녀는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봉건사회의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구현하는 현대적 인물이다. 결국 영화는 고전의 팜므파탈을 현대적 페미니스트로 격상시킨 여성주의 영화다.

‘미스트리스’는 전형적인 유럽 스타일 영화다. 서사는 절제되고 묘사는 튀지 않는다. 정적인 화면과 느린 드라마도 이야기를 곱씹게 만든다. 액션영화 ‘트리플X’로 얼굴이 알려진 아시아 아르젠토는 도발적인 시선과 청순한 눈빛을 동시에 선보이며 벨리니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그는 이탈리아 웨스턴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로도 유명하다.(이성대기자)

영화는 지난주에 국내 첫시사회가 있었던 듯한데, 씨네21에서 가져온 첫 반응은 이렇다.

이 영화

1835년 왕정복고기 파리. 잘난 신사와 귀부인들이 남몰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읽고 있을 무렵이다. 바람둥이 귀족 리노 마리니(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10년 동안 관계를 이어온 애인 벨리니(아시아 아르젠토)를 인생에서 잘라내고, 어리고 부유하고 정숙한 귀족 처녀 에르망갸드(록산느 메스키다)와 결혼하려 한다. 그러나 벨리니는 중얼거린다. “날 떠날 순 없을걸.” <미스트리스>의 제2장은 아주 긴 플래시백이다. 손녀사위를 둘러싼 추문을 익히 들은 플레르 후작부인이 마리니를 불러 사랑의 역사를 낱낱이 말해달라고 청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스페인 투우사와 이탈리아 공주의 사생아라는 소문의 여인 벨리니에게 도도한 마리니는 초면에 경멸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 파티에서 악마로 분장한 벨리니에게 사로잡힌 마리니는 무모한 구애를 시작하고 급기야 벨리니의 남편과 결투해 중상을 입는다. 여자는 가련한 남편을 차버리고 귀족사회는 들끓는다. 그러나 이것은 노래의 1절일 따름이다. 둘은 한때 먼 나라로 떠났고 행복하였다.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잃었다. 울부짖고 귀를 틀어막았다. 파리로 돌아온 그들의 일상에서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남은 나날을 그들은 본능적인 애무로 연명해왔다. 결국 마리니는 에르망갸드와 결혼식을 올리고 파리를 떠나 완벽해 보이는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날 산책을 나간 바닷가 길 위에서 마리니는 벨리니와 맞닥뜨린다.(김혜리기자)

Une vieille ma?resse

100자평

오호! 통재라. 왜 제목을 <미스트리스>라고 하여, 영화의 핵심적 미학을 깎아 먹는단 말인가? <미스트리스>는 19세기 탐미적인 당디(Dandy)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바르베 도르비이’의 소설 <Une Vielle Maitresse>를 원작으로 삼아, 과격하고 야하기로 소문난 여성감독 카트린느 브레야가 영화화한 19세기 시대극으로 2007년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DB등에 <늙은 정부> 혹은 <오래된 여인>등의 이름으로 중복 등재되어 있으며, 국내 개봉 제목은 <미스트리스>이다. 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제목은 단연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늙은 정부>이다.) 영화는 19세기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충동적이고 격렬한 사랑과 결국 파멸을 향해 가는 순수정념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들에 의해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정면으로 발언한다. <미스트리스>는 자주 접하기 힘든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영화이다. 장면 하나하나의 미장센이나 감정을 끌고가는 유려하고도 절제된 편집은 모두 감탄스럽다. (특히 마네의 <올랭피아>가! 연상되는 벨리니가 등장하는 첫장면이나, 거울과 창문을 이용한 미장센을 눈여겨 보라!) 또한 캐스팅이 완벽하다. 벨리니 역할을 한 '아시아 아르젠토'의 연기는 인물과 배우를 도저히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만들며, 마리니 역할의 ‘후아드 에이트아투’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선을 지닌 얼굴과 몸만으로도 영화의 주제를 150% 전달한다. 또 <팻걸>등의 전작에서 함께 했던 ‘록산느 메스키다’ 역시 냉정하고 고혹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미술도 훌륭하여 소품 하나에도 당시 귀족사회의 정서(혹은 원작자의 복고주의적 태도)가 담겨있는 듯 하다. 로맨틱코미디류의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 좋아하는 관객에겐 비추, <색, 계>가 좋았거나 혹은 불만족스러웠던 관객이라면 간만에 나온 ‘진하고 징하고 찡한 사랑영화’를 놓치지 마시라.(황진미/ 영화평론가)

08. 07. 28.

P.S. 환경을 바꾸다 보니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들쭉날쭉하게 되었다(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페이퍼라니!). <지젝이 만난 레닌>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믿는지 모른다'는 장을 읽다가 둘러본 몇몇 사이트에서 읽은 소개기사들이(그 중 하나는 지난 금요일에 지면에서 읽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카트린 브레야의 전작들은 예전에 다룬 바 있다('카트린느 브레이야'라고 주로 적었다). '100자평'에도 '마네의 <올랭피아>가 연상되는 벨리니가 등장하는 첫장면'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만 마네에 대한 오마주는 그녀의 영화에서 반복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네와 티치아노'(http://blog.aladin.co.kr/mramor/912039)를 참조할 수 있으며,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로망스 대 포르노'(http://blog.aladin.co.kr/mramor/800293)에서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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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7-2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큐브에서 전단을 읽었더랬죠. 가봐야죠,^^

로쟈 2008-07-28 19:57   좋아요 0 | URL
저도 동네에 들어오기를 기다려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8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35년이면 7월 혁명으로 샤를르 10세가 쫓겨나고 온건한 루이 필립이 등극하면서 7월 왕정이라고 하는데...그 전인 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가 재위한 때를 왕정복고기라고 합니다.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시가전하는 장면이 1830년 7월 혁명입니다.평론가가 착각했네요.

로쟈 2008-07-28 19:57   좋아요 0 | URL
ㅎㅎ 기자가 착각했거나 소개자료의 오류로 보입니다...
 

이미 '7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두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여우와두루미, 2008)의 열풍이 심상찮은 듯싶다. 아마도 2008년의 키워드를 꼽더라도 '아고라'는 가장 강력한 후보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언론에서 '아고라'가 언급되고서야 '아고라'의 존재에 대해서 알았을 정도이고 자주 들여다보지도 못했지만 책은 단박에 사들었다. 인터넷 자유토론장으로서 아고라의 역할을 지지하고 기념하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의 '상식'을 더이상 정부나 의회에 기대할 수 없는 마당에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도 필독/필람해볼 책이다. '수익금은 시위구속자 위해 쓸 것'이라고 하니 서점에서 넘겨보지 마시고 현매하시길.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00837.html).

한겨레(08. 07. 26) 책으로 다시 지핀 ‘촛불’

책 한 권이 뜨고 있다. “17일 완성본을 받았다. 19일쯤 서점에 깔았는데, 23일인 오늘 벌써 1쇄 5천부가 다 나가 2쇄에 들어간다. 기록적이다. 책에 관한 누리꾼들 관심도 폭발적이다. 선집 등 후속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사흘 전에 만난 그 책 기획자는 그렇게 말했다. 이쯤되면 대박이다. 여름에 올림픽이라는 ‘악재’까지 겹친 불황의 독서계를 자극할 이 책은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여우와두루미 펴냄).

촛불이 서울 중심가를 덮었던 두 달 전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공간 ‘아고라’ 자유토론방 누리꾼 사이에 이런 수작들이 오갔다. “아직도 오프라인에서는 아고라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고 … 하루빨리 책을 냈으면 하는데 …”(한글사랑나라사랑) “기대만땅 ~~~~^^* 아고라책이라 ~~~”(촛불살앙) “**놀랠 노자군요”(쥐발에편자) “이런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 저항의 방법은 다양하군요 …”(huraijin) “제가 생각하던 바를 현실로 옮기는 분이 계시다니”(누구세요) “여기는 지방 후진 동네라 아고라 잘 모르는 사람들 많습니다”(형형색색) “훗날 자식들에게도 산 역사의 서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책이 될 듯합니다”(비랑) “나오면 바로 털릴 준비하세요 … 몽땅 사버릴거얌 ㅎㅎㅎㅎㅎ”(스피릿) “아고라 아줌마부대도 넣어주세요 …ㅜㅜ”(약속해줘) “여기 미국인데 어떻게 받아볼 수 있을까요?”(박수진) “수고하셨습니다. 저도 아고라에 올라오는 주옥같은 글들을 모아 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고으니)

이처럼 ‘완벽한’ 시장조사를 거친 <… 아고라>는 주문자들의 입맛에 딱 맞췄다. 경쾌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비장하지만 결코 구질구질하지 않다. 구호들은 의표를 찌르고 풍자와 해학은 참신하고 쿨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대박의 이유를 파악하기 어렵다. 책의 내용과 출간이 갖는 의미까지도 아울러 제대로 짚으려면 몇 달 전부터 시작된 한국 역사상, 어쩌면 인류 역사상 초유의 ‘브로드밴드(광대역) 민주주의’를 선취한 기념비적인 사태를 되짚어봐야 한다.

5월 아고라에 이런 글이 떴다. “100년의 어둠에서 겨우 꽃피우려던 10년의 민주주의가 단 3개월 만에 짓이겨지는 모습에 눈물 흘렸소. 허허, 그러나 이젠 눈물을 거두려오. 그 짓이겨진 꽃은 아고리언 손에 하나하나 나뉘어 이젠 대한민국을 온통 꽃밭으로 만들고 있잖소. 당신들. 고맙소.”(꼬마와장군)

그 전인 4월6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 46일 만인 그날 아고라에 고등학생 누리꾼 ‘안단테’가 ‘【일천만명 서명】 국회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요구합니다’를 띄웠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3개월 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에 성의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대운하, 몰입식 교육, 보험 민영화, 고소영, 물가정책 …. 국민과 국가와 자존심을 갖다 버리신 대통령님 이런 대통령을 우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4월15일 교육과학부가 ‘학교 자율화 조치’라는 이름의 교육시장화를 강행했다. 사흘 뒤인 18일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개방한 한-미 쇠고기협상이 마무리됐다. 19일 4·19 묘지 앞에서 학교 자율화 반대 촛불문화제가 벌어졌다. 26일 서울 청계천 소라기둥 앞에서 집회가 열렸고, 28일 촛불집회를 하자는 제안이 떴다. 대통령 탄핵서명 개시 26일 만인 5월2일 서명자 50만을 돌파했다. 바로 이날 마침내 청계광장 촛불집회가 중·고등학생들 선도로 시작됐다. ‘미친 소, 미친 교육 반대’ 팻말이 뜨고 ‘되고송’이 떴다. “0교시 하면 잠 못자면 되고, 쇠고기 수입하면 광우병 걸리면 되고, 죽으면 대운하에 뿌려지면 되고~”

산업사회적 상상력을 해체하는 새 세대의 역동성이 화두로 떠오르고, 세상을 편집해온 언론의 서열이 네티즌의 손으로 재편되기 시작”했음을 알린 전대미문의 대사건 촛불시위의 출현은 아고라의 등장과 표리일체를 이뤘다. 그것은 또한 “우리 사회를 이끄는 힘이 순식간에 대중에서 다중으로, 공간 공동체에서 시간 공동체로, 정치에서 문화로, 지도와 계몽에서 집단지성으로 이동”(김형수)했음을 의미했다. 열흘 뒤인 5월13일 탄핵 서명자가 130만을 넘었다.

14일 경찰이 대통령과 광우병에 관한 ‘인터넷 괴담’을 퍼뜨렸다는 누리꾼들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날 경찰청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이 “내가 안단테다. 잡아가라.” “저도 잡아가주세요.” 등의 1만5천여 ‘자수’ 게시물로 뒤덮였다. 그때 한 누리꾼(peladona)은 “안단테 변호사비, 우리가 대주자”며 이런 계산을 올렸다. “서명인원 130만 × 100원= 1억3천만원.” 같은 셈법으로, 순식간에 수백 수천명이 접속하고 짧은 시간에 수백만명이 찾는 토론방 누리꾼들이 주목한 책이라면 뜰 만하지 않은가. 집단토론을 통해 자발적 실천지침을 도출한 아고라는 20년 전 “6월항쟁의 국민운동본부 같은 실질적 상징적 운동의 중심”이었다. 5월24일 거리로 진출한 시위는 이후 참여자가 연일 수천~수만을 헤아리다 수십만~일백만명이 모인 6월10일, 7월5일을 정점으로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 아고라>가 겨냥하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집단토론과 집단실천으로 이어지는 이 모든 과정의 진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가 버리는 초스피드의 사이버 공간에선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고 인터넷 접근이 원활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런 한계를 인쇄매체를 통해 돌파하자는 것이다. 책에 집약된 아고라를 통해 브로드밴드 직접민주주의, 촛불혁명을 언제든 되살리고 추체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 궁극의 목표는 바로 촛불혁명의 완수다. ‘촛불의 추억’은 아직 섣부르다. 촛불은 꺼지지 않고 원천봉쇄 완력 앞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라는 게 기획자들 생각이다. 거기엔 드물게 한국인들이 선두에 선 이 장대한 인류사적 실험이 정치적 탐욕의 희생물이 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는 기백이 스며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아고라 폐인’ 채수범·나명수씨 “수익금은 시위구속자 위해 쓸 것”

“책 정가의 10%를 인세로 받게 돼 있는데, 사진값 원고료 등 제반 출판비용을 충당하고 남는 돈은 불법 연행, 불법 구금, 불법 구속된 사람들을 변호하고 바른 교육과 바른 언론을 지원하는 일에 쓰겠다.” 책을 만들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은 ‘한글사랑나라사랑’이란 닉네임을 단 채수범(37·사진 오른쪽)씨. 부산 출신으로 외국계 건설회사에 다녔고, 한때 <딴지일보>에서 활약하기도 했던 토목기사 채씨는 “올해 안에 한방에 끝장내고 싶었다”고 했다. “추석 때 고향집에 내려갈 때 다들 사 갖고 가서 두고 왔으면 좋겠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인터넷 접속도 할 줄 모르고 해서 그분들이 처음 접하는 매체가 조·중·동이기 십상이다.”

책 출판을 위해 모인 임시 조직 아고라 폐인의 또다른 유력 멤버로, 채씨가 ‘형님’으로 모시는 닉네임 ‘권태로운창’은 원주 출신 나명수(47·왼쪽)씨. “아고라는 금방 페이지가 넘어가버리면 사람들이 제대로 접속도 해보기 전에 쌍방향 즉흥성, 창의성 뛰어난 그 좋은 내용들이 사라져버린다. 인쇄매체를 활용해 온라인의 장점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언제든 다시 꺼내 살펴볼 수 있고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사람들, 아고라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고라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5월12일께야 아고라에 참여했다는 속독·논술학원 원장 나씨는 “학원 선생님들한테서 아고라 얘길 들었고, 다음에 가입했다. 그 전엔 인터넷 토론을 해본 적도 없다. 아고라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아고라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건 절대 아니라면서, 다만 여론 주도층은 있기 마련이고 거기엔 지신들도 속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책 만드는 일엔 10여명이 참여했고 그중에서도 간사 1명을 포함해 5명 정도가 주도했다. 수록 글 선정 기준은 “창의적 발상, 기성관념으론 안 되는 참신함과 생산성을 담은 것, 시대문제를 파악하고 실천으로 이어간 글”로 잡았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두 달 정도 걸렸다. 또 하나의 원칙은 “있는 그대로 쌩으로 보여준다”는 것. 간간이 나오는 해설성 안내글들은 채씨 등이 썼다. 원문을 그대로 살리느라 오타도 그냥 뒀다.

촛불 동력이 떨어졌다는 얘기들에 대해 나씨는 “동력 자체가 쇠한 것은 아니다. 잠재돼 있고 행동으로 표출될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다. 연대의식과 의사표현 능력은 더 강해졌다”고 했다. 동력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경찰의 원천봉쇄 때문이라며, “원천봉쇄하겠다고 나서는 건 그만큼 저들의 위기의식이 강하다는 걸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채씨는 “동력이 떨어졌다는 식의 보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며 줄줄이 터져나올 다음 사건들이 기다리며 쉬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들은 아고라 최대의 힘은 정치인이나 언론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과거 비리나 약속 위반들이 모두 폭로되고 지금의 태도 변화와 비교되는 현실에서 그걸 두려워하는 자는 부패한 자라며, 심 아무개, 이 아무개 등 정권 실세들의 실명을 거론했다. “우리가 반정부 세력인 것이 아니라 저들이 반국민 집단”이라는 말도 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정보보호 종합대책, 사이버 모욕죄 등에 대해선 “원천적으로 눈과 귀를 막겠다는 것”이라며, 과도한 통제로 인터넷 후진국이라 손가락질당한 중국 같은 처지로 퇴보하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탄압이 계속되면 나라 밖에 서브를 구축하는 ‘아고라 망명정부’까지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08.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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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쯤 지내던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봐야 5미터쯤 떨어진 옆방일 뿐이지만 창문이 있는 보다 널찍한 방이다. 그래도 비유하면 13평 아파트에서 20평 아파트로 옮겨온 듯한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도 창문으로 빛이 드는 덕분에 '어둠의 시절'에서 벗어난 듯하다(조명을 켜지 않아도 노트북의 스크린을 볼 수 있다). 주차장쪽이어서 조용하기도 하고. 몇 가지 짐을 정리하고 나니까 얼핏 떠오르는 시가 보들레르의 'Anywhere Out of the World'이다.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데, 기억에는 제목 자체가 영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보들레르의 책들을 지금 안 갖고 있어서 여기저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세상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로 옮겨진 듯하다. 대략 이 산문시의 첫 대목은 이런 식이다.

인생은 환자들이 제가끔 침대를 바꿔눕고 싶어하는 욕망에 들린 하나의 병원이다.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괴로워하고 싶어하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창문 옆자리라면 회복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내게는 내가 현재 자리하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항상 만사가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자리를 바꾸는 문제가 바로 내가 나의 영혼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나 또한 끊임없이 논쟁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자리를 옮길 때면 이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찾아보니 '노마디즘에 대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877801)란 글에서 한번 인용한 적이 있다(번역은 좀 다르군). 보들레르의 '자리를 바꾸는 문제'와 키에르케고르의 '스테이크의 품질'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코멘트를 달아놓은 바도 있는데 당장은 옮겨놓을 수 없어서 아쉽다. 대신에 보들레르 시의 영역만을 옮겨놓는다.   

 

This life is a hospital where every patient is possessed with the desire to change beds; one man would like to suffer in front of the stove, and another believes that he would recover his health beside the window.
It always seems to me that I should feel well in the place where I am not, and this question of removal is one which I discuss incessantly with my soul.

'Tell me, my soul, poor chilled soul, what do you think of going to live in Lisbon? It must be warm there, and there you would invigorate yourself like a lizard. This city is on the sea-shore; they say that it is built of marble and that the people there have such a hatred of vegetation that they uproot all the trees. There you have a landscape that corresponds to your taste! a landscape made of light and mineral, and liquid to reflect them!'
My soul does not reply.
'Since you are so fond of stillness, coupled with the show of movement, would you like to settle in Holland, that beatifying country? Perhaps you would find some diversion in that land whose image you have so often admired in the art galleries. What do you think of Rotterdam, you who love forests of masts, and ships moored at the foot of houses?'
My soul remains silent.
'Perhaps Batavia attracts you more? There we should find, amongst other things, the spirit of Europe married to tropical beauty.'
Not a word. Could my soul be dead?
'Is it then that you have reached such a degree of lethargy that you acquiesce in your sickness? If so, let us flee to lands that are analogues of death. I see how it is, poor soul! We shall pack our trunks for Tornio. Let us go farther still to the extreme end of the Baltic; or farther still from life, if that is possible; let us settle at the Pole. There the sun only grazes the earth obliquely, and the slow alternation of light and darkness suppresses variety and
increases monotony, that half-nothingness. There we shall be able to take long baths of darkness, while for our amusement the aurora borealis shall send us its rose-coloured rays that are like the reflection of Hell's own fireworks!'
At last my soul explodes, and wisely cries out to me: 'No matter where! No matter where! As long as it's out of the world!'

08.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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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7-2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인용한 시가 멋지군요. 뭔 글들을 저렇게 잘 쓰시는지...그러니까 이름을 남겼겎지만

로쟈 2008-07-28 18:50   좋아요 0 | URL
네, 좀 이상한 멘트가 됩니다. 보들레르더러 '시를 잘 쓴다'고 평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