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크로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 2005)>을 읽어보게 됐다. 번역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지난 한 세기간 씌어진 철학과 미술사 관련 책 중 가장 면밀하고 중요한 책"이라는 아서 단토의 서평에 일단 끌렸다. 거기에 로잘린 크라우스가 찬사는 또 어떤가: "크로의 분석과 미술작품에서 시각적 요소들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한 눈부신 예시들, 그리고 보는 행위를 능숙한 해설로 옮겨가는 방법 등의 서술은 어떤 미술 독자에게라도 도움이 될 만한 무엇을 갖고 있다."

하니, 내가 '어떤 미술 독자'로서 이 책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다만, 번역만 제몫을 해준다면 말이다('어떤 번역'인가에 따라 책읽기는 조력자를 얻을 수도 있고 방해자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으로 읽은 본문의 첫장 첫 페이지 한 문장을 따라가보도록 한다.

"중산층 대중에게는 당황스럽게도, 마네의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대해 저속한 기호와 야만적 배경, 포르그래피에 등장하는 모델의 자세, 그리고 알레고리로서의 평면화된 회화 논리를 제공하였다."(11쪽)

원저 'Modern art in the common culture'(1996)에서 해당 대목을 옮겨오면: "Manet's Olympia offered a bewildered middle-class public the flattened pictorial economy of the cheap sign or carnival backdrop, the pose and allegories of contemporary pornography superimposed over those of Titian's Venus of Urbino."(3쪽)

번역문의 대강은 마네의 <올랭피아>(1863)가 이러저러한 것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에게 제공했다는 것인데, 정신분석의 사후성(사후효과)를 설명하는 사례가 아니라면 후대의 작품이 수백 년 전의 작품에 대해 무얼 제공했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하면 으레 '현대의 것'을 떠올리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contemporary pornography'에서 'contemporary'를 빼놓은 것도 이해에 혼선을 가져오는 듯하다(마네의 '동시대'일 수도 있다). 'carnival backdrop'을 '야만적 배경'이라고 옮긴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얼마간 카바해주고 있는 것이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시각과언어, 1995)에 번역돼 있는 이 책의 첫장 '시각예술에서의 모더니즘과 대중문화'이다. 거기에서의 번역은 이렇다: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는 경박한 자세와 축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배경, 즉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세와 알레고리, 현대판 춘화의 자세, 평면화된 회화의 경제학 등을 당혹해하는 중산계급 대중에게 제공하였다."(345쪽)

시각과언어판의 번역이 아트북스판보다 이해하기 수월하다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이 번역문에는 원저에도 제공돼 있지 않은 두 그림을 나란히 싣고 있어서 따로 설명이 없이도 내용의 8할은 짐작하게 한다(흠이라면 <올랭피아>의 창작년도가 1963년으로 오기돼 있는 것). 하지만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꼬여 있다. 그걸 풀어보기 위해서 먼저 두 그림, 곧 마네의 <올랭피아>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차례로 보도록 한다.  

첫눈에도 두 그림 사이에 '썸씽'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더불어 '경박한 자세와 축제적인 분위기(cheap sign or carnival backdrop)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야만적 배경'이라고 하기엔 어색하지 않은가?). 머리에 꽃을 꽂고 있는 이 잘나가는 매춘부에게 흑인 하녀가 (아마도 부르주아 신사일) 남정네의 꽃다발 선물을 갖다 건네는 장면, 이게 'cheap'하고 'carnival'적인 장면 아닌가? 그리고 그 'the cheap sign or carnival backdrop'을 다시 받고 있는 게  "the pose and allegories of contemporary pornography superimposed over those of Titian's Venus of Urbino"  아닌가? 

적어도, 시각과언어판에서 'sign'과 'pose'를 '자세'라고 옮길 때는 이러한 문장 이해가 전제된 것 아닌가? 그런데, 시각과언어판에서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세와 알레고리, 현대판 춘화의 자세"라고 하여 원문의 'superimposed over'를 누락시켰고('덧씌우다'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베끼다' 정도로 이해하는 게 편하겠다) 그런 만큼 불필요한 혼선을 가져왔다(아트북스판에서 '알레고리로서의 평면화된 회화논리'는 고차원적인 논리의 번역이지만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이 대목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베낀 현대판 춘화(포르노그라피)의 자세와 알레고리" 정도의 뜻이겠다. '현대판 춘화'라고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물론 자료야 널려 있지만!) 좀 고상한 축의 이미지를 하나 가져오자면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 <지옥의 해부>에 나오는 아래의 장면 같은 게 거기에 부합하지 않나 한다(눈을 감고 있다는 게 흠이긴 하다). 매춘부를 당당한 여신적 형상으로 제시하는 것, 그게 이러한 나부(裸婦)상들이 갖고 있는 알레고리가 아닌가 싶고(사실 브레야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중적 편견, 곧 '성녀 아니면 창녀'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판하기도 한다). 해서, '이 자세', '이 알레고리'이다.  

Anatomy of Hell

대략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하고서 다시 저자 크로의 문장 "Manet's Olympia offered a bewildered middle-class public the flattened pictorial economy of the cheap sign or carnival backdrop, the pose and allegories of contemporary pornography superimposed over those of Titian's Venus of Urbino."을 우리말로 옮기자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싸구려스런 배경, 혹은 카니발적 배경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베낀 현대판 포르노그라피에서의 포즈와 알레고리들을 평면화된 회화적 경제안에 제시함으로써 중산 계급(부르주아 계급) 대중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참고로, 마네의 <올랭피아>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교과서적인 비교대상이며, 티치아노를 베끼거나 패러디하는 사례들은 자주 만나볼 수 있다. 가령 아래와 같은 그림들.

 

잘 안 읽히는 번역 덕분에 '미술 공부'를 몇 시간 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06. 07. 10-12. 

 

 

 

 

P.S. 새로이 알게 된 것이지만,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눈빛, 1999)에도 크로(크로우)의 이 논문은 번역돼 있다. 번역문은 이렇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는 저속한 기호의 평면화된 회화적 질서 또는 티치아노의 <우리비노의 비너스>를 연상시키는 축제적 배경과 인물의 자세, 그리고 현대의 매춘에 대한 알레고리 등을 중산 계급의 대중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383쪽) 눈에 띄는 건 'economy'를 '질서'로 'pornography'를 '매춘'으로 옮긴 것 등이다. 'carnival drop'이 어디에 걸리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의견이 다르지만, 빼어난 솜씨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란 말이 있듯이, 도움을 얻으려면 제대로 된 번역서를 골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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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11-02-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 번역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는 11장의 각주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