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에 실린 출판리뷰를 옮겨놓는다.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민음사, 2008)을 다루고 있다. 원제대로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리뷰의 분량상 모두 다루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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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08. 08. 02)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최근작 <폭력의 시대>(민음사 펴냄)가 번역돼 나왔다. 그의 대표작인 서구 근대사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와 20세기를 다룬 <극단의 시대>를 연상케 하는 제목이지만 원제는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이다. 주로 2000년에서 2006년 사이에 집필된 에세이들을 모은 것인데,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이전에 낸 책들의 내용을 보강해주고, 동시에 최신 정보에 맞게 수정해주는 글들”이다. 일견 자신의 충실한 독자를 위한 ‘애프터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지난 세기를 압축해서 둘러보고 새로운 천년의 시발점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계의 상황과 정치적 과제를 짚어보는 유익한 계기가 되어준다.
홉스봄이 되돌아보는 20세기는 어떤 세기였나? 그가 ‘극단의 세기’라고 부른 ‘단기 20세기’(1914-1991)는 물질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인류의 역량이 우주로까지 뻗어나간 세기였지만 동시에 유사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포함해서 전쟁으로 인하여 직간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억 8700만명에 달하며 이 수치는 1913년을 기준으로 당시 세계 인구의 10%가 넘는다. 1914년 이래 세계 전체가 평화로웠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고 하니까 달리 ‘전쟁의 세기’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게다가 사정이 더 좋지 않은 것은 갈수록 민간인의 피해가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1차 대전의 사망자 중 민간인은 고작 5%였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는 66%까지 늘어나며, 요즘에는 아예 80-90%의 희생자가 민간인이라고 한다.
그러한 포연과 살육 속에서도 20세기는 한편으로 인류사에 극적이면서도 갑작스러운 단절을 가져왔다.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이 단절은 기술과 산업생산에서의 변화에 힘입은 것인데, 홉스봄이 지적하는 것은 네 가지 측면이다. 첫째, 농민 계층의 쇠퇴와 몰락 둘째, 초거대 도시의 부상 셋째, 의사소통 수단의 기계화 넷째, 여성이 처한 상황의 변화. 우리의 경우를 보자면 모두가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이루어진 변화이다. 게다가 교육 기회 확대와 관련하여 저자는 적정 연령층의 55%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20개국 중의 하나로 한국을 꼽는데, 사실 고등교육의 확대는 한국사에서 유례없는 20세기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이러한 변화를 계승하고 있지만 국가의 위상 자체가 약화되어간다는 점에서는 20세기와 구별된다. 다국적기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탓에 자국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신뢰도 사라져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징병된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전쟁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20세기 전쟁의 전형적인 형태인 국가 간의 전쟁은 크게 줄었고, 덕분에 세계평화에 대한 전망이 20세기보다는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량 학살과 난민의 양산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2003년 말을 기준으로 전 세계 난민의 규모는 약 38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것은 2차 세계대진 직후의 난민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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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한 세계화가 초래하고 있는 지역 간 불균형과 불평등 외에 21세기가 당면한 문제점은 복수의 강대국이 균형을 이루는 국제 체제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제에 의해서 냉전시기의 균형이 가능했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이 제국의 확립에는 필수적이지만 그 유지에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은 자신의 힘만을 믿는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서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한 것 외에는 국제적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경제적 허약함만을 노출시켰다. 역사학자로서 홉스봄이 확신하는 것은 미국의 현재와 같은 위세가 역사적으로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리라는 점이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가장 몰두해야 할 일이 미국을 말리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미국을 교육시키거나, 재교육시키는 것”이라는 게 ‘폭력의 시대’를 염려하는 늙은 역사학자의 결론이다.
08.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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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참고로, '세계화시대 미국문화와 폭력'을 다룬 책으로 김상률 교수의 <폭력을 넘어서>(숙명여대출판부, 2008)가 있다. '세계화 시대의 현대 미국 소설 다시 읽기'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현대소설에 나타난 '폭력의 재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전공서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시의성'이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적어둔다.
![국가는 폭력이다](http://image.kyobobook.co.kr/images/book/large/218/l9788990706218.jpg)
더불어,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글들을 모은 <국가는 폭력이다>(달팽이, 2008)의 출간 사실도 적어둔다. 아직 알라딘에는 입고가 되지 않은 듯한데, '평화와 비폭력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비록 '늙은 작가'의 성찰도 20세기가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