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금요일자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요즘 기사들이야 온라인에 다 뜨지만 좀 '구식'인지라 아직도 '신문지'를 선호하는 편이다(e-book에 별로 취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지성 섹션에 읽을 만한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에 관한 리뷰를 일단 옮겨오기로 했다. 그건 이 책에 관한 자료들을 좀 찾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제는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인데, 원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희망의 인문학'이라고 붙여진 것은 최근의 '인문학 위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대안을 모색해본다는 의미도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겨레(06. 12. 01) 가난한 자에 필요한 건 '빵' 아닌 '장미'

가난한 사람 구제는 쌀을 나눠주는 것보다 쌀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는 게 당연히 낫다. 실직자에게 당장 돈 몇 푼 나눠주는 것보다는 취직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키는 게 더 나은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켄 로치의 영화 <빵과 장미>(2002)를 막바로 떠올리게 한다).

국가가 가난이나 실업구제 방편으로 동원하는 노동연계복지정책은 대부분 당근과 채찍을 사용해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이다.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이매진)는 이를 호되게 비판한다. 그런 식은 우선 “가난한 사람들이란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른 존재, 즉 능력이 부족하거나 별 가치가 없는 사람들, 또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가진 존재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토대를 둔 복지정책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키면서” 그들을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게” 해준다.

좀더 나가 보자.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도 다른 사람들과 공평하게 힘을 나누어 가질 만한 경제력도, 지적 능력도 없다. 그래서 인문학을 부자와 중산층이 독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만들어 놓은 채 그저 훈련만 시킴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순응적인 사람들로 묶어놓을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을 위한 정규대학 수준의 인문학 교육과정 ‘클레멘트 코스’ 창립자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 원제는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富)-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쯤 되겠다. 여기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 빈곤층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부’란 결국 인문학이다.

왜 인문학인가? 쇼리스는 뉴욕 인근 중범죄자 수용 교도소의 가정폭력에 관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 재소자를 만난다.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나요?”라는 질문에 그 재소자는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말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그 대화가 인문학자로서의 쇼리스 삶을 바꿔놨다.

해결의 실마리는 아이적부터 약자들의 사고 자체를 옭아매고 그들을 성장기까지 지속적으로 빈곤상태로 묶어놓는 매커니즘, 곧 무력(force)의 포위망을 깨뜨려 해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들을 공적 세계(페리클레스가 말하는 정치적인 삶)로 이끌어가도록 교육하는 것이며 거기엔 ‘성찰적 사고능력’이 필수적이다. 비니스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이 바로 그것이고 그게 다름아닌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결국 물고기 낚시기술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왜 필요한지, 그 역사와 사회적 파장은 어떤 것인지 등 더 깊고 폭넓은 사유로 이끄는 것이 인문학인 셈이다. 저자는 대학을 비롯한 많은 학교들이 인문학 교육과정을 직업훈련으로 대체하고 있는 현실과 관련해 “성찰적 사고의 윤리적이고도 지적인 힘을 망각한 국가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번성”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경고한다.

클레멘트 코스란 명칭은 저자가 이 인문학 교육과정을 구상하고 의논한 상대 제이미 인클란 예일대 법학부장이 설립한 상담소 ‘로베르토 클레멘트 가족보호센터’에서 따온 것이다. 뉴욕 남동부에서 ‘사회복지금 수급자, 노숙자, 재소자, 전과자들’까지 포함된 “가난하고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했고 특별한 기술도 없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95년부터 시작한 클레멘트 코스는 지금 한국을 포함한 4개 대륙 6개 나라 57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고 아프리카 가나에서도 코스 개설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책 역자들은 모두 광명시의 평생학습원을 수탁운영하고 있는 성공회대 교수들이며, 이들은 평생학습 분야의 새로운 접근방식과 실천사례의 모범으로 이 책을 선택했고 저자도 초청한 바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6. 12. 01.

P.S. 물론 함정은 있다. '빵 대신 장미', '빵보다 인문학'이란 발상이 동일한 시혜적 구조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부'를 가진자의 양심의 문제로 환원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은 이러한 '말'이 아닌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인지라 예단은 유보한다. 참고로, 아래는 이 책에 대한 영문 소개이다.

Earl Shorris's book, Riches for the Poor, takes up the story of the Clemente Course in the Humanities, the eight-month course in poetry, logic, art history, U.S. history and moral philosophy that Shorris first described in his book on poverty in the United States, New American Blues (1997). Blues argued in compellingly lyrical prose that poor people tended to stay poor because of a "surround of force" that was made up of tough social facts (police brutality, bad landlords) and relative intangibles (the gloomy fatalism that attends poverty). Only exceptionally talented people could rise out of the "surround," which otherwise binds the poor inside a tight knot of fear and anxiety, hems them into purely private concerns with immediate safety, food and shelter. Studying Plato and Aristotle, Shakespeare and Conrad, Michelangelo and Cezanne, the poor could become "public" beings, and begin, as Shorris wrote, "the journey from poverty to democracy."

The course worked so well that even after Shorris stepped down from directing it in 1996 it flourished. As he notes in the first chapter of Riches, "by the autumn of 1999 more than 400 students were attending the Clemente Course," and there were some 17 Courses in the U.S.. Remarkably, the course remains the same seminar in foundational humanities in Seattle and Anchorage, Tampa and Mount Holyoke that it started out as on the lower east side of New York. "The Clemente Course originated in a single idea," Shorris recalls in the forward to the book. "Force and power are not synonymous in a democratic society."

As the Clemente Course grows nationally Shorris remains its best ambassador. Some of the biggest plans are on the horizon. In a recent interview he said, "The biggest projects are just getting underway. One is more Clemente Courses with Alaska Natives and Indians — we'll have six this year. The other is potentially just as exciting. Martín Gómez, Executive Director of the Brooklyn Public Library, and his staff and I are working on a way to start Clemente Courses in libraries. You asked how many Clemente Courses? There are a lot of libraries." Riches closes with a startling paragraph about the consequences of learning. In summing up his book, Shorris writes about the kinds of questions that the humanities encourages students to ask — how shall we live? what is the best route to the happy life? — and suggests that what the humanities offer is, in essence, a revolution in consciousness — that is, ultimately, what Shorris means by "politics." "In one way or other," he writes in his last paragraph, "politics will make dangerous persons of the poor. The certainty of that has worried the elites of this earth since politics was invented. But Plato was wrong about politics then and his fundamentalist followers are wrong now. The happiness of others is a goal worth pursuing, and the method for achieving it, democracy, is a risk worth taking."

P.S.2. 급하게 페이퍼를 정리하고 분리수거를 하러 갔다왔는데, 분리수거중에 떠오른 생각은 '빵과 장미'의 문제가 비단 자본주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러시아 작가 블라지미르 두진체프(1918-1998)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1955; 집문당, 1989)가 문제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체제와 무관하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빵(생존)과 장미(행복)와 인문학(사유)이다. 이것을 순차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이 현실사회주의의 오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건 '산업화'와 '선진화'를 우상으로 섬기는 뉴라이트의 오류이기도 한 것 아닐까? 그러한 순차성이 요구되는 상태는 '절대빈곤'에 한정되는바,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사유의 절대빈곤인 듯싶다. 인간은 살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동시에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건 위엄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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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2-01 12:30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단이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잘 읽었어요. 깊이 공감합니다.

sommer 2006-12-01 13:36   좋아요 0 | URL
'빵 대신 장미', '빵보다 인문학'이란 발상이 동일한 시혜적 구조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부'를 가진자의 양심의 문제로 환원될 소지가 있다는 내용이 선뜻 이해가 안 되네요. 클레멘트 코스가 지향하는 것이 빵과 장미 혹은 인문학 사이의 담론의 차원에서의 양자택일이 아닌, 실정적인 측면의 위상을 강조하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빵과 장미 그리고 인문학'의 난점은 이러한 '부'를 가진 자들 역시 그만큼 핍진해 있다는 것이지요. 빵의 차원에서는 비대칭적 관계가 명료하게 형성되지만, 나머지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제 백분토론에서도 '저출산율'의 대책을 논의하면서 한 패널이 대책으로 제시한 '인식의 개선'에 대해 손석희씨가 곤혹스러워하며 결국 토론의 마지막에는 기업의 대표로 나온 패널에게 실제적인 약속을 받아내는 것으로 종결지었던 장면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한국 사회의 언표는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동시에 실질적인 정책에 대한 강박은 그만큼 인식의 공백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곧 한국 사회에서는 '정신이 빵이 되는' 셈이지요. 빵이 빵 이상의 그 무엇이 되는 곳...

로쟈 2006-12-01 13:53   좋아요 0 | URL
제가 간단히 언급한 것은 예상되는 반론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한데, 가령 어떤 게임을 하는데 못사는 동네 아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좋은 코치가 잘 지도해준 덕분에 무슨 대회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다고 할 때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남아있는 것은 그 게임의 규칙인 것이죠. 그 게임이 공정한 게임인가 아닌가란 문제가 좋은 코치를 가졌느냐 못가졌느냐란 문제로 치환/환원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입니다. 또 다른 예로, 가령 교양으로서의 클래식(고전) 교육을 한다고 할 때, '무엇이 클래식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빠뜨린다면 그 역시 백화점 교양강좌와 다를 바 없을 거라는 얘기지요. 물론 아이들이 그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있습니다. 청출어람하듯이...

기인 2006-12-01 21:00   좋아요 0 | URL
위, 빵과 장미를 보니 전태일 열사가 떠오르네요. 노동자 중심주의에 대해서 근래에 급속도로 회의하고 있었는데, 다시금 전태일 평전을 읽으니 그 통찰력과 행동력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공익이 이제는 공부방 같은 데에 투입되는 것으로 제도가 변화할 것이라는 데, 기대도 됩니다. 제가 사는 관악구에는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학생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
* 신문기사는 간략히 검토중이라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결국 공익은 공부방 청소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거겠지요 -_-;;; 그럼 학부 친구들이 와서 동네 학생친구들이랑 함께 공부하면 저는 옆에서 청소를 하고 문 잠그고 해야 되는셈? ㅡ.ㅡ;; 흠..
어쨌든 퍼갑니다 ^^;;;;

로쟈 2006-12-02 01:04   좋아요 0 | URL
공부방이 그래도 실질적인 '공익' 복무가 아닐까 싶네요. 저는 공익을 가장한 당번병을 했더랬지요...
 

어제오늘 가장 시끄러운 기사는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 공개한 대안교과서의 시안에 관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4.19혁명을 '의거'나 '운동'으로 평가절하하고 5.16쿠데타를 '5.16혁명'으로 재평가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보다는 '산업화'에 역점을 두어 현대사를 재서술하고자 하는 것이 교과서포럼의 취지인 듯하다. 학계의 보수 명망가들이 야심차게 기획한 새교과서가 지난 70년대에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그리고 지난 80년에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한국현대사(5.16을 찬양하고 12.12를 정당화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새'역사라는 게 실상 '오래된 미래'에 다름아닌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뉴라이트의 '주인기표'가 박정희라는 걸 고려하면 '선진화시대를 이끌 박정희'에 대한 열망이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정치적 무의식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무의식은 숨어있는 무의식이 아니라 활동하는 무의식이어서 한동안 여론을 들끓게 할 듯하다(새교과서의 시안 자체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다른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게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가끔 러시아의 정치적 후진성에 대해서 무거운 마음이 들고는 했는데 주제를 모르는 생각이었다. 차고 넘치는 관련기사들 가운데 몇 개만을 추려놓도록 한다.  

동아일보(06. 08. 15) "안병직 이인호교수 등 새 역사교과서 만든다"

안병직(뉴라이트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명망있는 원로 학자 7명이 현행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과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교과서 제작에 나섰다.

안 교수와 이인호(전 러시아 대사) 명지대 석좌교수, 유영익(전 한림대 부총장)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 이성무(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신복룡, 이주영 건국대 교수는 지난달 11일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뉴라이트 진영의 ‘교과서포럼’과 함께 새로운 근현대사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안 교수가 편집위원장에 추대됐고 다른 학자들은 편집위원을 맡기로 했다.

이들은 “K출판사 등 6종의 현행 근현대사 교과서가 ‘민중 운동사’ 관점에서 기술하다 보니 대한민국의 발달사는 불완전하고, 통일이 돼야만 근현대사가 완성이 된다는 취지로 돼 있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교과서를 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국 754개 고등학교가 사용하고 있어 채택률이 절반을 넘는 K출판사 교과서는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민족정신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의 출발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 교수는 “한 교과서의 경우 해방 정국에서 좌파가 정통성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기록돼 있다”면서 “현행 역사 교과서는 이념적 편향성 문제뿐만 아니라 조잡하고 사실관계의 오류가 너무 많아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새 교과서 제작에 나선 학자들은 편향된 역사교과서가 학생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 주면 나중에 바로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학창 시절부터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새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기술 방향으로 △대한민국의 형성, 발전과 미래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정치적 관계가 경제적 관계를 규정하므로 서술의 순서도 정치적 관계를 서술한 뒤 경제적 관계를 서술한다 △독립운동 및 각종 사회운동은 정치 경제를 서술한 뒤 쓴다 등을 제시했다.

이들은 이달 중 2차 모임을 열고 새 교과서의 구체적인 집필 방향과 목차 등을 논의한 뒤 교과서포럼 소속의 박효종 이영훈, 전상인 서울대 교수 등 중견 소장 학자와 함께 내년 3월까지 교과서 집필을 마칠 계획이다.(정용관 기자)

경향신문(06. 11. 30) 뉴라이트 “일제가 근대문명 이식…한국발전 토대"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 인식을 둘러싼 보수·진보간 갈등이 급기야 역사교과서로 번지고 있다. 현행 교과서가 이념적으로 ‘좌’에 편향돼 있다고 생각하는 보수파 인사들이 대안으로 내놓은 게 바로 29일 교과서포럼이 공개한 대안교과서이다. 이 교과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바탕에 깔고 산업화 세력의 경제발전 역할을 강조하는 대신 민주화 세력은 폄훼하는 등 일관되게 보수적 시각에서 기술돼 사회적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교과서에 따르면 일제 식민지 시기는 ‘근대로의 이행과정’이다. ‘일제가 한반도에 근대문명을 강제로 이식, 전통과 주체적 결합을 해, 해방후 한국은 이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서술했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1946년 일제가 제정한 모든 법률·기구를 폐기해, 곧바로 문명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고 적었다. 이는 남한과 북한을 문명과 반문명의 잣대로 구분하는 ‘뉴라이트 사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4·19’ ‘5·16’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 대해서는 용어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4·19는 ‘혁명’에서 ‘학생운동’으로 의미를 축소시켰다. ‘급속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자는 국민적 염원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며 인식에도 차이를 드러냈다. 5·16을 ‘혁명’으로 표현하는 등 교과서포럼 교과서는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 긍정적 평가로 일관했다. ‘군부 엘리트가 주도한 산업화로 보기 드문 역동성을 과시했다’는 찬사였다. 이 교과서는 1960년대를 ‘경제적 성장을 위한 회임적 시기’라고 규정했다. 박정희 독재가 고착화된 유신체제의 출범도 선의로 해석했다. ‘박정희가 70년 초부터 안보위기 극복, 1백억달러 수출 달성 등 조국 근대화 작업의 도약을 의미하는 프로젝트를 본인이 관장하려는 강렬한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5·18은 ‘광주민주화항쟁’으로 표기해 용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5·18의 원인과 결과 해석엔 보수적 시각이 여과없이 담겼다. 5·18 항쟁의 원인을 ‘광주가 경제 발전과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데 대한 불만이 누적된 데다 그 지역 출신 김대중의 체포 소식이 분노를 야기했다’는 데서 찾았다. 5·18 이후는 ‘이 사태에 미국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확산됨에 따라 이후 한국 사회에 반미급진주의를 확산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며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는 ‘4·19’ 이후 ‘학생들 구호가 반체제적으로 바뀌어 갔다’는 부분과도 일맥상통한다.

87년 6·29 선언도 민주화 운동의 승리라는 기존 시각과 전혀 다르다. 이 교과서는 ‘민주개혁 없이는 더 이상 효과적인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집권세력이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 일련의 개혁 단행을 약속한 것’이라고 집권세력의 입장에서 결단을 부각시켰다. 현 한국사회에 대해서는 ‘지체현상을 보인다’고 판단했으며, 논란이 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는 ‘시장개방은 긍정적’이라는 인식만 담겨 있다.(임지선·손제민기자)

◇교과서포럼이란: 2005년 1월 출범했다. 주로 대학교수들이 참여하고 있는 교과서포럼은 현행 중·고등학교의 역사, 사회, 경제, 윤리 등의 교과서들이 이념적으로 잘못 편향돼 있다는 시각 아래 교과서의 분석·비판, 대안교과서 집필, 강연과 대중서적 발간 등을 추진해오고 있다. 교과서포럼은 창립선언문을 통해 “우편향도 좌편향도 아니다”라며 “사실을 추구하는 학도로서의 성실성과 엄숙성·겸허함을 견지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동대표인 박효종(서울대)·이영훈(서울대)·차상철(충남대) 교수가 학계 내 대표적인 뉴라이트 인사들인 데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김진흥 뉴라이트전국연대 상임의장 등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우편향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데일리서프(06. 11. 30) "5.16은 가난 구제했으므로 교과서에 혁명으로 바꿔야한다”

형식 논리로 보면 5.16쿠데타가 맞다. 그러나 내용면으로 5.16 이전과 이후 한국 사회 각분야가 질적으로 달라졌다. 쿠데타라고 하면 태국과 베트남 등 60년대 동남아에서 많이 일어났다. 그런 나라에서 일어난 쿠데타는 단순히 권력 교체에 불과했을 뿐이다.”



교과서포럼 공동대표인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시안의 ‘5.16 혁명’이란 표현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박 교수는 29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서 “5.16이 구체적 사회적 변혁을 몰고 왔다는 차원에서 올바르게 평가해야 한다”며 “고심 끝에 혁명이라고 표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군부 집단의 행위 자체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한다는 차원은 아니다”면서 ‘혁명’이란 표현에 대해 “산업화의 관점뿐만이 아니라 정치·사회·교육 전체가 송두리째 변화하는 모습을 국민들은 경험했고, 거기에는 군부 세력이 정치 주도세력으로 있었지만 구성원들도 자발적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들이 강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혁명’이란 표현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대국으로 발동할 수 있었던 계기가 그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평가를 해보자는 의도”라고 덧붙였다.

그는 교과서포럼이 뉴라이트 계열이라는 지적과 관련해선 “뉴라이트 계열이란 것은 언론에서 편의적으로 붙이는 이름”이라며 “저희들은 교육의 문제에서 대한민국의 역사관을 학생들에게 바로 전수하고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사실주의가 우리 가치관이다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과서 포럼은 이날 대안교과서 시안을 공개하면서 ‘5.16 군사정변’은 ‘5.16혁명’으로, ‘4.19혁명'은 ‘4.19학생운동’으로, ‘5.18민주화운동'은 ‘5.18광주민주화항쟁’으로 표기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5.16에 대해 “당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인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주도할 대안적 통치집단의 계기가 된 사건”이라고 서술했다. 현재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교과서로 채택된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했다”고 평면서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정권의 정당성 확보하기 위해”라고 기술하고 있다.

‘뉴라이트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대안교과서 시안은 또 유신체제와 관련해 “권력구조적 차원에서 영도적 권한을 지닌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보장하는 체제인 동시에 행정적 차원에서는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국가의 자원 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평가했다. 한편 교과서 포럼은 30일 서울대에서 제6차 심포지움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 이렇게 고쳐 만듭니다’를 열고 대안교과서의 시안을 선보일 예정이다.(이응탁 기자)

06.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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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01 07:58   좋아요 0 | URL
이제 일본 교과서를 비판할 처지가 못되게 되었군요. 뉴 라이트가 무엇인지 궁금했었는데 정확히 일본 우익의 아류네요.^^

로쟈 2006-12-01 08:56   좋아요 0 | URL
예, 상식 밖이어서 고의적인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마노아 2006-12-01 09:35   좋아요 0 | URL
황당해서 놀라울 지경이에요. 가관도 아니군요.

sommer 2006-12-01 21:25   좋아요 0 | URL
학술적인 수사로 포장한 정치적 제스쳐가 아닐까요? 반응 효과들을 겨냥하고 있는...그래서 아마도 무지와 신념으로 가장한 그네들의 '맨몸'의 육탄전을 유심히 바라봐야할지 않을까요...

로쟈 2006-12-01 21:33   좋아요 0 | URL
교과서포럼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민족주의(이데올로기) 대 과학'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듯싶습니다. 역사를 심정적인 차원에서보지 말고 팩트(사실), 곧 성과/결과를 가지고 얘기해보자는 것이지요. 기존의 나이브한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자극이 될 만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팩트에 대한 제어되지 않는 과신과 성과주의입니다. 독일 역사학계에서의 나치즘 변호가 이에 대한 참조가 될 만합니다.공산주의라는 최악에 응전하기 위해 나치즘이란 차악이 불가피하며 정당했다는. 공산주의(북한)라는 최악에 대응하기 위한 차악으로서 유신-독재체제는 불가피하며 정당하다는. 아니 오히려 산업화라는 '기적'을 일궈냈다는...
 

며칠전 작가 백가흠의 창비주간논평을 옮겨오면서 <현대문학>(12월호)의 특집 '문학과 돈'에 대해 잠깐 언급했었는데, 그 필자의 한 명으로 참여했던 최재봉 기자가 그와 관련한 편집국 칼럼을 썼다. '문학상의 빛과 그림자'가 그것인데 내일자 조간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해서 이 페이퍼는 '미리보는 조간'이 되겠다. 

 

 

 

 

참고로 <현대문학>의 기고문 제목은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고 '넘쳐나는 문학상과 상금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이 부제이다. '조심스럽게 쓰는 글'이란 단서를 서두에 달고 있는데. 내용 자체는 파격적인 게 전혀 아니다. 결론만큼 상식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만 구체적인 데이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글이다. 필자는 '시궁이후공'이란 말을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솔출판사, 1996)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시는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뜻이다."

"물론 반대되는 주장도 있다. 궁함이 총족됨만 같이 못하다는 뜻의 '궁불여달(窮不如達'), 또는 충족된 연후에야 공교로움이 나온다는 '달이후공(達而後工)'과 같은 이론이 그러하다." 가령 우리시대 대표작가의 한 사람인 작가 김영하의 경우가 그러하다. <문학동네>(겨울호)의 대담 '내면 없는 인간의 내면을 향하여'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지난 십 년을 돌아보니 글쓰는 즐거움, 소설을 만들고 세계를 만드는 쾌감보다는 마치 월급쟁이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바쁘게 한 십 년 살았으니 앞으로 십 년은 좀 다르게, 더 작가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지난 세월 부지런히 살아온 덕분에 작가로서 마음먹은 글을 제대로 써낼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강조는 나의 것) '달이후공'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연전에 소설가 김영하는 한꺼번에 세 개의 문학상을 받으면서 총 상금이 1억원을 넘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창작에 있어서 '궁이후공'이 맞는지 '달이후공'이 맞는지는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다만 200여 개를 훌쩍 넘어선다는 한국의 문학상들이 '달불여궁(達不如窮)'의 사태를 초래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있겠다.  

한겨레(06. 12. 01) 문학상의 빛과 그림자

“동전도/ 돈이지만/ 또한 돈일 수 없지만/ 원효교 난간 위로/ 해는 떨어지고,/ 강건너/ 비행장에/ 불을 켠 채 착륙하는 밤비행기./ 나의/ 하루의/ 공허한/ 귀환을,/ 동전도/ 돈이지만/ 또한 돈일 수 없지만/ 발길에 채어/ 어둠 속으로/ 땡그르르 굴러가는/ 1966년 12월 1일/ 내 생애의 동전 한닢.”(박목월 <일일> 전문)

12월1일. 마지막 달의 첫날이다. 40년 전 목월이 노래한 대로 ‘생애의 동전 한닢’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날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여느 날과는 다른 각별한 감회를 자아낸다. 마지막과 처음이 어우러져 긴장과 이완을 아울러 선사하는 까닭이다.

문단 역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출판사와 잡지 별로 송년회가 줄을 잇고 각종 문학상 시상식도 이즈음에 집중되어 있다. 나라 밖에서는 저 유명한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12월10일에 열린다. 문학 지망생들에게 이 무렵은 신춘문예에 응모하고자 골방에서 원고지나 컴퓨터 자판과 씨름해야 하는 철이다. 그들은 문학상 시상식 소식을 접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그 화려한 자리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은밀한 기대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문학상 시상식 자리는 풍성하고 따뜻하다. 수상자는 행운에 감사하며 겸손한 어조로 문학적 포부를 밝힌다. 문단 동료와 선후배로 이루어진 손님들은 축하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사진기의 플래시가 펑펑 터지고 그에 질세라 수상자와 축하객들의 웃음소리도 반 옥타브쯤 올라간다. 공식 행사가 끝나면 일행은 예약해 둔 술집으로 우루루 몰려간다. ‘진짜’ 축하를 하려는 것이다. 아예 술청 전체를 세내서는 먹고 마시며 떠들고 노래 부른다. 때로 술이 과해서 울거나 싸우는 이도 없지 않지만, 문인 특유의 인정과 낭만으로 작은 소동쯤은 넉넉히 감싸안는다.

문화의 다른 부문과 비교해 보아도 문학상은 종류도 많고 상금도 풍성하다. 지역 단위에서 시상하는 작은 규모의 상들까지 포함하면 현재 이 나라에는 몇백 개의 문학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평균으로 따지자면 적어도 하루에 하나 꼴은 되지 않을까. 문학상이 많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많은 문학상이 해마다 수상자와 수상작을 내고 있다면, 한국문학은 나날이 풍요로워지고 있지 않겠는가.(금전적으로가 아니라 문학적 성과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문학담당 기자로서 현장에서 느끼는 실감은 그런 추측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문화면 머릿기사로 다룰 만한 시나 소설이 나와 주어야 하는데, 그만한 작품이 눈에 뜨이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기 일쑤인 것이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이육사 <절정>) ‘그 많던 문학상 수상자와 수상작은 어디로 간 것일까.’(박완서).

문학 전문지 <현대문학> 12월호의 특집 ‘문학과 돈’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의 일단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나 자신 그 특집의 필자로 참여한 처지라 다소 민망하기는 하지만, 특집의 또다른 필자 역시 “돈은 문학 생산 현장에서 대체로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들어 ‘금전망자(金錢亡者)와 벼슬지상’(천상병)의 문단 풍토를 꾸짖고 있었다. 문학상의 영광과 상금이라는 금전적 보상이 반드시 작품 창작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즈음 하루가 바쁘게 이어지는 문학상 시상식에 입회하면서 때로 마음 한켠이 불편했던 까닭이 분명해진 느낌이다. 문단의 한 해 소출을 결산하고 이듬해의 풍작을 염원하는 문학상 시상식이 마음에서 우러난 축하와 격려의 자리로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최재봉/문학전문기자)

06. 11. 30.

 

 

 

 

P.S. 이 기사와 일맥상통하는바 특집호 기고문에서의 결론은 이렇다: "200년대 벽두의 문인들이 70년대의 문인들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형편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문학이 70년대보다 그만큼 더 나아졌노라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분명한 퇴보와 위기로 현재의 문학적 상황을 평가하기도 한다. 문학의 위기니 종말이니 하는 수상쩍은 말들이 횡행하게 된 데에 문학상은 간접적으로나마 책임이 없는 것일까, 묻고 싶다."

한데 최기자의 기고문을 읽으면서 보다 흥미로웠던 대목은 문학동네의 얘기와 견주기 위해서 필자가 들고 있는 언론동네의 사례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언론동네에서 선배들에게 들은 애기 중에 이런 게 있다: 예전 70년대까지의 기자들은 그들 자신이 가난한 처지였다; 월급도 적었거니와 그 월급조차 술값이니 교통비로 다 날아가버려 정작 집에 가지고 들어가는 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권언유착이 형성되면서 기자들에 대한 처우가 급격히 나아지기 시작한 게 80년대 이후였다; 그와 함께 신문과 방송에서 가난한 이들의 살림에 대한 기사가 실종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자들의 피부에 와닿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드는 생각은 문학의 위기나 종말 이전에 한국사회에서는 언론의 위기와 종말이 먼저 도래했었다는 것이다(언론상도 그렇게 많은가? 혹은 상이 따로 필요없을 만큼 기자들이 유복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인가?). 이 위기는 아무도 모르게, 아무런 통증도 없이 지나가버린 것인가? 왜 우리주변에 '유령기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처럼 보이는지 이젠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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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3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문학상이 몇백개라고요? 설마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그 많던 문학상 수상자들은 어디로 갔을까?'네요.

로쟈 2006-12-0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상 한번 못 받아본 작가'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 같습니다...

다크아이즈 2006-12-0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문학가'가 되어야 할 문학자 같아요. 로쟈님 서재에 적응 안 됐을 때 님의 펌글들을 님의 주체적 문학 행위로 이해했다는..^^* 님 책 내시면 애독자 예약 접수. 혹, 평론집이나 번역서 준비하지 않나요?

로쟈 2006-12-0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린 책들이 많이 있긴 합니다. 욕심은 많아도 걸음은 느린지라... 어쨌든 내년부터는 성과가 있기를 저도 기대합니다. 그리고, '예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 이맘때 기사 하나를 옮겨온다. 북데일리의 '세계의 책' 코너에서 가져온 것인데, 희귀하게도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국역본이 근간예정인 상태에서 해를 넘기는 것 같아 유감스럽지만 대신에 영역본들이라도 뒤적거려봐야겠다(*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이 최근 출간됐다. -08. 11. 14).  

북데일리(05. 12. 05) 선악의 이분법 뛰어넘은 '사도 바울로'

기독교 성인 사도 바울로(서기 10~67년)는 다마스쿠스로 여행하다가 예수의 출현을 보고 사흘간 실명 상태를 겪은 끝에 소명을 받고 제자가 됐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전도자이자 신학자였던 바울로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로 자신의 종교적 사상을 전해 그 가운데 14통이 신약성서에 포함돼 있다.

이중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이방인이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떠오른 바울로 사상의 진수를 가장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담고 있다. '신앙과 의화(義化)'와의 관계를 소개하는 이 편지는 '성경 속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듯 다른 편지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진수가 들어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미학자 이자 베네치아건축대학 교수인 조르지오 아감벤(63. Giorgio Agamben)은 바울로의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앞부분에 나오는 10개 단어를 텍스트로 하여 매우 획기적인 시각으로 서양사상의 사유적 이분법을 철저히 분석해 냈다. 그의 저서 <남은 시간 :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스탠포드대출판부. 2005)는 그 결실이다. 영어 원제는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아감벤은 그동안 죽은 자와 산 자, 동물과 인간, 육체와 정신, 자연과 문화 등 서구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원적 대립의 사유구조 속에서 중간지대를 설정, 그 '무언가'의 상태가 현대사회를 지배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 아감벤은 '경계'와 '나머지'라는 말을 적시하는 조건은 이원적 대립 관계에 수용되지 않고 계속 '남는 것'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 전형이 로마시대 '성스러운 인간'이란 이름 아래 '인간 외 인간'으로 차별화된 '호모 사켈'이며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회교도'로 불리며 유대인을 돌보고 그들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 죄수도 간수도 아닌 '나머지의 사람'이다.

책은 이런 발상의 사유를 하게 된 저자 특유의 메시아에 대한 이해를 바울로의 편지 속에서 그 흔적을 찾아낸다. '메시아'란 히브리어로 세계 종말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구세주를 나타내며 그리스어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 예수'를 의미한다. 하지만 유태교에서는 아직도 도래하지 않는 메시아를 '지금' 항상 기다리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이미' 도래한 메시아(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차이가 있다.

아감벤은 '지금'과 '이미'의 중간에 놓인 시간에 초점을 맞춘다. 과거 사건이 결코 '지금' 완료된 것이 아니라 본래 부정적일 미래를 구속하는 응축된 형태로서 점차 다가오는 특이한 '지금의 때'를 밝혀낸다. 이것이 '나머지 시간'이다. 그때 구원에 대한 갈구를 통해 '자유인' 바울로가 기독교의 사도가 된 시점이 바로 '나머지 시간'이다. 이런 사상적 관념은 기독교인 바울로에게 인종, 종교, 성별이라는 차이는 의미가 없고 현대인에게 '약함' 관심을 둘 때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서 '바울로'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노수진 기자)

06. 11. 30.

P.S. 아감벤의 책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스탠포드대학의 '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시리즈로 나란히 나온 알랭 바디우의 <성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영역본 2003)와 테어도어 제닝스의 <데리다 읽기/ 바울 생각하기>(2005) 등이 있다. 진작에 구해놓은 책들이지만 읽을 여가/기회를 아직 못만들고 있는 책들이다. 아직은 '나머지 시간'을 살 나이가 아닌 탓인가?..

 

 

 

 

바울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신학'과는 무관하며 지젝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다. <믿음에 대하여>나 <혁명이 다가온다> 등에서 바울에 대한 언급을 읽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한다. 참고로 지젝이 추천하는 바울 관련서는 독일 철학자 야곱 타우베스(Jacob Taubes; 1923-1987)의 <바울의 정치신학>(199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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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6-11-30 16:3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서재는 늘 좋은 글,정보들이 넘쳐나는군요..^^ 요즘 게을러진 책읽기에 탄력을 주고자 아감벤의 '바울' 불어본,영어본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올 겨울 공부계획이죠. 90년대 후반 바디우의 '바울'의 출간되었을 때 상당히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종영씨가 이행총서로 계획했다가 포기한(버린?) 신학적 사고(Christian Jambet의 '알라무트에서의 위대한 부할'도 저작권만 사놓고 포기됨)가 저에겐 아직도 매력적입니다. 사실 바디우나 아감벤의 '바울'은 ' 네그리의 '욥기'보다는 더 매력적입니다.... 꼬르벵(H.Corbin)의 책들('이슬람철학사'..)와 함께 농사꾼에겐 이 겨울이 공부의 계절이 될듯합니다..

"종말의 도래가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곧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시간 이해였고, 그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저자이다.(124쪽)" 알랜 시걸, <예수 2000년>,대한기독교서회

로쟈 2006-11-30 16:39   좋아요 0 | URL
제 경우 바울에 대한 관심은 지젝에 의해 촉발된 것인데, 바디우, 아감벤 등이 모두 바울론을 쓰고 있어서 이게 거으 '트렌드' 수준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련서 몇 권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두려고 합니다...

아포지 2006-11-30 18:01   좋아요 0 | URL
관려서 정보들을 모으신다니.. 참고로.... Theodore W. Jennings, Jr. 의 "Reading Derrida/Thinking Paul" 라는 책도 있더군요. 데리다에 관한 책이니 벌써 아시는지도 모르겠네요...

2006-11-30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30 20:13   좋아요 0 | URL
apouge님/ 예, 갖고 있는 책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님/ 별 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진득하게 매달려 있지 못하는 성격/처지인지라...

Nabi 2006-11-30 20:56   좋아요 0 | URL
지젝이 The Parallax view에서 네그리와 아감벤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아감벤의 생각이 더 묵시적(265쪽)이라고 지적한부분에 공감이 갑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울과 관련한 묵시적 사고에 대한 참고 자료들은... 데리다 <최근 철학에서 제기된 묵시론적 목소리에 관하여>, 지젝,바디우와 활발히 교류하는 신학저널JPS(http://www.philosophyandscripture.org)실린 바울과 관련된 글들. Ward Blanton의 Apocalyptic Materiality: Return(s) of Early Christian Motifs in Slavoj Zizek(http://www.jcrt.org/archives/06.1/index.html).. 리요타르의 책 The Hyphen : Between Judaism and Christianity (Philosophy and Literary Theory)도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얇은 책이 왜그리 비싼지 아직도 구입을 미루고...)

로쟈 2006-11-30 21:14   좋아요 0 | URL
Nabi님/ 거의 전문적인 서지인데요.^^ 저는 그 정도까지는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리오타르의 책 같은 건 도서관에서 주문해봐야겠습니다...
 

얼마 안되지만 모아놓은 마일리지를 가지고 장하준 교수의 <국가의 역할>을 주문하려다가 눈에 띄길래 엉뚱하게(?) 주문한 책이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실천문학사, 2006)이다. '역사인물찾기' 시리즈의 한권으로 나온 책인데, 7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으로까지 출간됐지만 사실 빅토르 세르주(1890-1947)란 인물에 대해서 사전에 입력된 정보는 거의 없다. 러시아사가 전공인 역자의 이름에 눈에 띄길래 '전공관련'인가 싶어서 유심히 읽어보니 어디선가 지나가면서 접해보았을 법한 '비운의 혁명가'이다. 소개에 따르면, "소설가이자 역사가, 한때 아나키스트였던 볼셰비키 당원, 이단아, 좌익반대파의 일원"으로서 "소련사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존재이다." 분명 마지막 멘트는 과장된 것이겠지만 아무튼 흥미를 끄는 것만은 사실이다.

 

찾아보니까 세르주 자신이 쓴 <회고록>도 유명한데, 이번에 그보다 먼저 출간된 것은 수잔 와이스만 교수의 책 'Victor Serge: The Course Is Set on Hope'(Verso, 2001)이다. "2500여 장에 이르는 원고와 1200여 개의 주석을 통해 러시아 혁명의 변질이라는 ‘20세기 변혁운동 최대의 비극’을 빅토르 세르주의 민감한 지성이 언제, 어떻게 감지했는지 그리고 그 비극을 막아보고자 그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상세히 밝혔다."

'20세기 서구 신좌파의 스승'으로 평가받는(다는) 한 인텔리겐치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재작년에 박노자 교수가 칼럼에서 다룬 바 있어서 옮겨놓는다. 유익한 참고자료이다.

 한겨레21(04. 02. 11) 실패한 혁명가’를 읽는다

1980년대의 혁명적인 열성이 ‘아득한 옛날’로 느껴지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독서계에서는 ‘혁명가 평전’이라는 장르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체 게바라나 호치민, 마오쩌둥, 그리고 박열이나 여운형에 대한 ‘편안히 살게 된 세대’의 새로운 관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제는 경험해보지 못할 듯한 기존 틀들의 전면적인 부정과 신세계 창조의 ‘이질적인 체험’의 매력에 끌린 것인가? 아니면 ‘임금의 목을 쳐보지도 못한’ 채, 기존의 지배층의 권력들을 계속 인정해 지금도 친일파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혁명의 부재’에 대한 참회인가?

물론 혁명과 우리가 멀었고 지금은 더욱 멀어졌다는 사실이 역으로 ‘혁명가 평전’들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은, 자본주의적 질서의 기본 틀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누적된 회의가 간접적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라는 점점 심해지는 광풍에 대한 반항과 해결법 모색의 에너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혁명가 평전’의 열풍에 대해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유의미한 존재로 다가온 외국의 혁명가인 티토나 레닌, 체 게바라, 호치민, 마오쩌둥 등이 다 결과적으로 새 국가 건설에 ‘성공’한 ‘혁명형 건국 군주’가 아닌가? 체 게바라 같은 경우는 예외라 볼 수 있지만 그에게도 사회주의적 국가 쿠바의 건설이라는 ‘후광’이 있었다. 역사 인물의 위치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꼭 ‘성패’라는 자본주의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우리의 순치된 무의식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다.

혁명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옥죄고 있는 권력 관계와 ‘낙오자 되기’의 공포, 체제에의 안주 등의 포기, 반란의 행위 그 자체가 아닌가? 반란의 결과가 고생 끝의 죽음뿐이더라도 그 해방적인 순간, 체제의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는 그 순간에 얻어지는 ‘참나’ 실존의 체험이 아닌가? 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건국의 성공’보다는 체제의 부속품이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서 ‘나’를 실천해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속인이 보기에는 ‘실패’한 혁명가라 하더라도 그가 지은 ‘해방적인 체험’이 담긴 시나 소설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이다. 삶에서 ‘실패’해도 작품으로 보통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에 오른 20세기의 탁월한 ‘세계주의적 혁명가’를 꼽자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서구 신좌파들의 스승이 된 빅토르 세르주(1890~1947)라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를 들 수 있다.

우리가 인물을 소개할 때 그 이름 앞에 그가 출생했거나 거주했던 나라 이름을 하나씩 붙이곤 한다. 그러나 궁리를 거듭해도 그의 이름 앞에 붙일 만한 적합한 국명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의 지위를 버리고 혁명에 몰두했다가 결국 망명을 결행해 벨기에에 정착한 러시아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벨기에에서 태어난 세르주는 결국 벨기에 국적을 보유하게 됐고 불어와 러시아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다.

그러나 벨기에에 정착할 생각 없이 19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옮겼다가 그 뒤 스페인을 거쳐 1919년에 새로운 혁명의 러시아에 들어간 세르주를 ‘벨기에 사람’으로 칭하기가 힘들다. 그 뒤 9년 동안 볼셰비키 러시아의 각종 요직을 거치고 초기 코민테른의 대(對)서구 선전 작업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다가 1928년에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죄로 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했고 5년 뒤에는 투옥됐다. 몇년 뒤 몇명의 유명한 서구 지식인들의 끈질긴 구명운동 끝에 풀려나와 다시 벨기에로 가서 소련 체제의 ‘반동성’과 ‘혁명 정신의 말살’을 외쳤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선량한 신민이라는 의미의 ‘소련인’도 아니었다. 세르주는 히틀러의 군대가 서구를 휩쓴 뒤 기적적으로 멕시코로 탈출해 거기에서 소련에 의한 암살로 추측되기도 하는, 의문이 없지 않은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이 멕시코 시민으로서 멕시코의 자랑이라 할 만한 저명한 화가가 됐지만, 창작 작업을 불어로 했던 세르주를 ‘멕시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세계적 방랑자’ 세르주…. 그의 만년 소설의 무대가 자연스럽게 시베리아의 오지에서 스페인의 혁명 현장으로 옮기고 그 주인공들도 온갖 나라 사람들이 뒤섞인 것은 그의 ‘방랑 경력’을 반영하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나 당시의 혁명 거인 트로츠키(1879~1940) 등의 ‘혁명 선배’들도 국가와 민족 등의 범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러나 트로츠키와 세르주는 서로 다른 점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멕시코에서 암살당했을 때 임종의 순간에 “그럼에도 공산당은 궁극적으로 옳은 것이고 그 역사적 정당성을 잃지 않았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간 철저한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와 달리, 세르주의 정치적 지향이나 세계관은 무슨 ‘주의’로 범주화할 수 없었다. 벨기에에서 사회민주당의 청년조직에서 활약하다 체제에 안주해갔던 사민주의자들의 ‘개량주의’에 염증을 느껴 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의 편집자가 된 세르주는 ‘테러활동 고무·찬양’ 등의 죄목으로 프랑스에서 옥고를 치르고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 반란의 주도자가 됐지만, 그는 수많은 남유럽 아나키스트들의 목적을 결여한 ‘폭력을 위한 폭력’을 시종일관 비판해왔다.

사민당의 간부도 아나키스트도 못 된 세르주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그와 소련 정권의 관계도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1917년 혁명의 근본 성격을 진정한 의미의 혁명으로 규정한 그였지만, 중앙집권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나 폭력을 규탄한 멘셰비키 등 기타 소수의 혁명 정당에 대한 새 정권의 비밀경찰(체카, KGB의 전신)의 살인적 탄압이나, 곡물의 강제 공출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총살 또한 그의 자유주의적·인본주의적 신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련 체제의 근대적 폭력성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세르주는 레닌의 서거(1924) 전까지 그나마 공산당의 도덕성이나 “노동자 대표자로서의 성격”에 대한 믿음으로 버텨왔다.

그러나 그 뒤 트로츠키와 함께 신생국가의 관료화와 ‘혁명성 상실’을 비판하기 시작한 그와 스탈린 체제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괴리가 생겼다. 그렇다면 그가 트로츠키파였는가?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그에게 붙인 딱지였지만 실제로 그와 트로츠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컸다. 트로츠키를 늘 깊이 존경하던 세르주가, 트로츠키 저서들을 불어로 번역하는 등 소수파로서 트로츠키파의 목소리가 유럽인들에게 들리게끔 만반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인본주의적 혁명가였던 세르주는 혁명의 과정에서 반대파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트로츠키의 ‘과도기적 국가 폭력 긍정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정치보다 글쓰기를 더 즐긴 세르주는 <러시아 혁명의 첫해>(1930)나 <혁명의 운명>(1937) 같은 역사·정치적 저작과 <혁명가의 회고록>(1945)이라는 나중에 서구 신좌파의 필독서가 된 자신의 역사적 증언의 모음을 펴냈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것은 주로 1930년대 러시아의 암흑기를 소재로 한 그의 뛰어난 소설들이다.

<긴 황혼>(1946), <툴라예프 동지의 사건>(1948년 사후 출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스탈린 독재 체제의 완비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안고 발버둥치는 각계각층의 역사 주인공들이다. ‘정의 상실’에 끝없는 분노를 느껴 거만한 ‘공산당 귀족’을 죽여버린 열성파의 젊은 공산주의자, 시베리아의 배고픈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스탈린과의 ‘이론 투쟁’을 쉬지 않는 트로츠키파의 ‘강철의 혁명가’, 권력과 부에 도취되면서도 숙청의 공포로 하룻밤도 편히 자지 못하는 스탈린주의의 ‘고위층 충견’들…. 역사의 마차에 깔리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들을 세르주 이상으로 극명하게 잘 보여준 작가를 광풍의 20세기에도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들을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혁명가의 회고록>) 한 세기의 비극을 함께 안고 살았던 그의 인생의 값진 결론인 셈이다.(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06. 11. 29.

P.S. 페이퍼의 제목으로 단 '반체제 맑스주의'란 표현은 그에 관한 한 영어문건에서 따온 것이다. 빅토르 세르주 아카이브(http://www.marxists.org/archive/serge/index.htm)에서 그의 저작목록과 이런저런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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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처럼 2006-11-30 08:44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퍼 갈게요.

로쟈 2006-11-30 09:00   좋아요 0 | URL
첫문장이 비문이어서 다시 수정했습니다. 오타는 또 없는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