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금요일자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요즘 기사들이야 온라인에 다 뜨지만 좀 '구식'인지라 아직도 '신문지'를 선호하는 편이다(e-book에 별로 취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지성 섹션에 읽을 만한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에 관한 리뷰를 일단 옮겨오기로 했다. 그건 이 책에 관한 자료들을 좀 찾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제는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인데, 원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희망의 인문학'이라고 붙여진 것은 최근의 '인문학 위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대안을 모색해본다는 의미도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겨레(06. 12. 01) 가난한 자에 필요한 건 '빵' 아닌 '장미'
가난한 사람 구제는 쌀을 나눠주는 것보다 쌀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는 게 당연히 낫다. 실직자에게 당장 돈 몇 푼 나눠주는 것보다는 취직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키는 게 더 나은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켄 로치의 영화 <빵과 장미>(2002)를 막바로 떠올리게 한다).
국가가 가난이나 실업구제 방편으로 동원하는 노동연계복지정책은 대부분 당근과 채찍을 사용해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이다.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이매진)는 이를 호되게 비판한다. 그런 식은 우선 “가난한 사람들이란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른 존재, 즉 능력이 부족하거나 별 가치가 없는 사람들, 또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가진 존재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토대를 둔 복지정책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키면서” 그들을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게” 해준다.
좀더 나가 보자.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도 다른 사람들과 공평하게 힘을 나누어 가질 만한 경제력도, 지적 능력도 없다. 그래서 인문학을 부자와 중산층이 독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만들어 놓은 채 그저 훈련만 시킴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순응적인 사람들로 묶어놓을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을 위한 정규대학 수준의 인문학 교육과정 ‘클레멘트 코스’ 창립자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 원제는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富)-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쯤 되겠다. 여기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 빈곤층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부’란 결국 인문학이다.
왜 인문학인가? 쇼리스는 뉴욕 인근 중범죄자 수용 교도소의 가정폭력에 관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 재소자를 만난다.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나요?”라는 질문에 그 재소자는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말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그 대화가 인문학자로서의 쇼리스 삶을 바꿔놨다.
해결의 실마리는 아이적부터 약자들의 사고 자체를 옭아매고 그들을 성장기까지 지속적으로 빈곤상태로 묶어놓는 매커니즘, 곧 무력(force)의 포위망을 깨뜨려 해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들을 공적 세계(페리클레스가 말하는 정치적인 삶)로 이끌어가도록 교육하는 것이며 거기엔 ‘성찰적 사고능력’이 필수적이다. 비니스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이 바로 그것이고 그게 다름아닌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결국 물고기 낚시기술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왜 필요한지, 그 역사와 사회적 파장은 어떤 것인지 등 더 깊고 폭넓은 사유로 이끄는 것이 인문학인 셈이다. 저자는 대학을 비롯한 많은 학교들이 인문학 교육과정을 직업훈련으로 대체하고 있는 현실과 관련해 “성찰적 사고의 윤리적이고도 지적인 힘을 망각한 국가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번성”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경고한다.
클레멘트 코스란 명칭은 저자가 이 인문학 교육과정을 구상하고 의논한 상대 제이미 인클란 예일대 법학부장이 설립한 상담소 ‘로베르토 클레멘트 가족보호센터’에서 따온 것이다. 뉴욕 남동부에서 ‘사회복지금 수급자, 노숙자, 재소자, 전과자들’까지 포함된 “가난하고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했고 특별한 기술도 없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95년부터 시작한 클레멘트 코스는 지금 한국을 포함한 4개 대륙 6개 나라 57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고 아프리카 가나에서도 코스 개설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책 역자들은 모두 광명시의 평생학습원을 수탁운영하고 있는 성공회대 교수들이며, 이들은 평생학습 분야의 새로운 접근방식과 실천사례의 모범으로 이 책을 선택했고 저자도 초청한 바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6. 12. 01.
P.S. 물론 함정은 있다. '빵 대신 장미', '빵보다 인문학'이란 발상이 동일한 시혜적 구조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부'를 가진자의 양심의 문제로 환원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은 이러한 '말'이 아닌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인지라 예단은 유보한다. 참고로, 아래는 이 책에 대한 영문 소개이다.
Earl Shorris's book, Riches for the Poor, takes up the story of the Clemente Course in the Humanities, the eight-month course in poetry, logic, art history, U.S. history and moral philosophy that Shorris first described in his book on poverty in the United States, New American Blues (1997). Blues argued in compellingly lyrical prose that poor people tended to stay poor because of a "surround of force" that was made up of tough social facts (police brutality, bad landlords) and relative intangibles (the gloomy fatalism that attends poverty). Only exceptionally talented people could rise out of the "surround," which otherwise binds the poor inside a tight knot of fear and anxiety, hems them into purely private concerns with immediate safety, food and shelter. Studying Plato and Aristotle, Shakespeare and Conrad, Michelangelo and Cezanne, the poor could become "public" beings, and begin, as Shorris wrote, "the journey from poverty to democracy." |
The course worked so well that even after Shorris stepped down from directing it in 1996 it flourished. As he notes in the first chapter of
Riches, "by the autumn of 1999 more than 400 students were attending the Clemente Course," and there were some 17 Courses in the U.S.. Remarkably, the course remains the same seminar in foundational humanities in Seattle and Anchorage, Tampa and Mount Holyoke that it started out as on the lower east side of New York. "The Clemente Course originated in a single idea," Shorris recalls in the forward to the book. "Force and power are not synonymous in a democratic society."
As the Clemente Course grows nationally Shorris remains its best ambassador. Some of the biggest plans are on the horizon. In a recent interview he said, "The biggest projects are just getting underway. One is more Clemente Courses with Alaska Natives and Indians — we'll have six this year. The other is potentially just as exciting. Martín Gómez, Executive Director of the Brooklyn Public Library, and his staff and I are working on a way to start Clemente Courses in libraries. You asked how many Clemente Courses? There are a lot of libraries." Riches closes with a startling paragraph about the consequences of learning. In summing up his book, Shorris writes about the kinds of questions that the humanities encourages students to ask — how shall we live? what is the best route to the happy life? — and suggests that what the humanities offer is, in essence, a revolution in consciousness — that is, ultimately, what Shorris means by "politics." "In one way or other," he writes in his last paragraph, "politics will make dangerous persons of the poor. The certainty of that has worried the elites of this earth since politics was invented. But Plato was wrong about politics then and his fundamentalist followers are wrong now. The happiness of others is a goal worth pursuing, and the method for achieving it, democracy, is a risk worth taking."
P.S.2. 급하게 페이퍼를 정리하고 분리수거를 하러 갔다왔는데, 분리수거중에 떠오른 생각은 '빵과 장미'의 문제가 비단 자본주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러시아 작가 블라지미르 두진체프(1918-1998)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1955; 집문당, 1989)가 문제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체제와 무관하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빵(생존)과 장미(행복)와 인문학(사유)이다. 이것을 순차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이 현실사회주의의 오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건 '산업화'와 '선진화'를 우상으로 섬기는 뉴라이트의 오류이기도 한 것 아닐까? 그러한 순차성이 요구되는 상태는 '절대빈곤'에 한정되는바,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사유의 절대빈곤인 듯싶다. 인간은 살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동시에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건 위엄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