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조선일보 출판면에는 '출판시장, 좌파의 귀환?'이란 칼럼이 실렸다. '귀환?'이라면, 언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파들이여,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로 읽혔다. 이런 내용이다.  

현실정치에서는 친노(親盧)나 좌파세력이 권력을 잃었지만 출판계에선 최근 오히려 눈에 띄게 그런 성향의 책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비교적 활발했던 우파 학자나 지식인들의 저술활동은 뜸하네요.

이런 현상은 대형서점의 '정치사회'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을 훑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좌파진영이 강세를 보였던 분야는 '역사', 특히 한국현대사 쪽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좌파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현대사 뒤집어 보기, 거꾸로 보기 등이 유행한 때문입니다. 이런 흐름이 이제는 '정치사회' 쪽으로 이전한 셈입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성공과 좌절》(1위), 《내 마음속 대통령》(3위),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11위) 등 노무현 전(前) 대통령 관련서들입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유시민씨가 지난봄에 낸 《후불제 민주주의》(5위)도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고 있습니다.

'88만원 세대'론을 제창하며 좌파의 새로운 논객으로 떠오른 우석훈씨가 88만원 세대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운동을 펼쳐야 하는지를 담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가 4위, 백기완의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가 7위입니다. 8위와 9위도 우석훈씨의 책들입니다.

심지어 10월 말 출간 예정인 유시민씨의 차기작 《청춘의 독서》는 예약판매만으로 16일 종합순위 7위를 기록했습니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맬서스의 《인구론》,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등 자신이 젊은 시절 영향을 받은 책들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한국 좌파는 이미 출판시장 장악으로 정권을 잡아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이한우 출판팀장)  

먼저,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비교적 활발했던 우파 학자나 지식인들의 저술활동"이 무얼 지칭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우파 역사학자들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2006) 정도다. 하지만, 당시에 '우파' 지식인들이 득세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흥미롭다. '잊지 말아야 할' 주체가 '한국 좌파'가 아니라 '한국 우파'이기 때문이다. '한국 우파'(='우리는')이 암묵적인 주어인바, 이 문장은 본래 "우리는 한국 좌파가 이미 출판시장 장악으로 정권을 잡아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썼어야 명료했다. '출판시장 장악 -> 정권획득'으로 이어질지 모르니 현재의 출판동향을 예의 주시하며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겠다.    

아무려나 기사 덕분에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검색해봤다. 교보에서만 예약판매를 하고 있는데, 책은 '오래된 지도'로 모두 14권의 책을 다루고 있다. 특이하게도 러시아 문학작품들이 포함돼 있어서 페이퍼 거리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목차만 봐도 대략의 내용은 어림해볼 수 있다). '청춘의 독서' 리스트다(맬서스의 <인구론>은 절판된 상태다).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의 <청춘을 읽는다>(돌베개, 2009)도 근간 예정이므로 올가을 독서계에는 때아닌 '청춘'이 난무할 듯싶다.   

머리말 - 오래된 지도를 꺼내들다  



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 날카로운 첫 키스와 같은 책
- 다수의 평범함이 인류를 구원한다  



2. 권력의 유혹에 무엇으로 맞서야 하는가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 지하대학에서 배우다
- 벌거벗은 임금님을 발견하다
- 지식은 맑은 영혼과 더불어야 한다  



3. 청춘을 뒤흔드는 혁명의 매력 : 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 선언>
- 한 장의 정치선언문이 영혼을 뒤흔들다
- 교과서가 되어버린 혁명서의 비애
-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4. 불평등은 원래 자연의 법칙인가 : 맬서스, <인구론>
- 냉혹하고 기괴한 천재, 맬서스
- 자선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 자연은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 편견은 천재의 눈도 가린다  



5.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대위의 딸>
- 로맨스를 빙자한 정치소설
- 희극으로 그려낸 반란의 풍경
- 얼어붙은 땅에서 꽃이 피어나다
- 위대한 시인의 허무한 죽음  



6.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만나다 : 맹자, <맹자>
- 역성혁명론을 만나다
- 백성이 가장 귀하다
- 아름다운 보수주의자, 맹자의 재발견
- 이익이 아닌 가치를 탐하는 태도  



7.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 : 최인훈, <광장>
-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
- 혁명 없는 혁명 국가
- 주사파, 1980년대의 이명준
- 심장의 설렘을 포기할 수 없는 자의 선택  



8. 정치는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 사마천, <사기>
- 사기의 주인공, 한고조 유방
- 사마천의 울분
-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을 부른다
- 권력자의 인간적 비극
- 정치의 위대함에 대해 생각하다  



9. 고통도 힘이 될 수 있을까 :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굶주림과 폭력으로 가득한, 지극히 평범한 하루
- 슬픔과 노여움의 미학
- 이반 데니소비치 탄생의 비밀
- 노동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10.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 다윈, <종의 기원>
- 해설을 먼저 읽어야 할 고전
- 다윈과 월리스, 진화론의 동시발견
- 다윈주의는 진보의 적인가
- 이타적 인간의 가능성  



11.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 하는가 : 베블런 <유한계급론>
- 부富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 사적 소유라는 야만적 문화
- 일부러 낭비하는 사람들
- 지구상에서 가장 고독했던 경제학자
- 인간은 누구나 보수적이다  



12. 왜 가난한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을까 : 조지, <진보와 빈곤>
- 뉴욕에 재림한 리카도
- 꿈을 일깨우는 성자聖者의 책
- 타인을 일깨우는 영혼의 외침  



13.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는 ‘진짜 나’인가 :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보이는 것과 진실의 거리
- 명예 살인
- 언론의 자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14. 사회는 진보하는가 : 카, <역사란 무엇인가>
- 랑케를 떠나 카에게로
- 회의의 미로에 빠지다
- 식자우환識字憂患
- 이 격려를 다시 받아들여야 할까

후기 - 위대한 유산의 계보  

09. 10. 17. 

 

P.S. 유시민 전 장관의 '노무현 시민학교 특강' 취재 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2726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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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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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7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7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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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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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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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7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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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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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2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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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10-17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초만 하더라도 진보파들이 노무현과 그 측근 때리기가 유행이라서 후불제 민주주의가 엄청나게 욕을 먹더니 참...염량세태란...

2009-10-17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7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7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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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바 2009-10-18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선의 저 기사 읽고선 마지막 문장 주어가 없어서 아리송 했는데..
로쟈님 글 보니까 심증이 확증이 되는군요. ㅎ

로쟈 2009-10-18 15:18   좋아요 0 | URL
네, '우석훈 지못미'라고 쓰신 거 저도 봤습니다.^^

2009-10-19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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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9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속에 책 2009-12-03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의 독서> 지금 막 다 읽고 혹시 로쟈님이 이 책에 대해서 뭔가 코멘트 해놓으신게 없나해서 들어와봤는데 조선일보에서 이런 기사를 다 썼군요. 마지막 문장이 제겐 커다란 웃음을 선사하네요..어이없는 웃음을 말이죠 ^^;;
그러찮아도 여기 나온 책들을 한번 정리해보아야겠다 했는데, 깔끔하게 먼저 정리를 하셨네요. 감사히 참고하겠습니다.
 

지난주에 나온 책이긴 하지만 짐작에 지난 한달을 통틀어 학술사전 분야에서 가장 의미있는 책이라 할 만한 것은 <칸트 사전>(도서출판b, 2009)이다. 현대철학사전 시리즈의 첫 권이지만, 올초에 나온 <헤겔사전>에 이어 두번째로 나왔다. 이제 비로소 '칸트에 헤겔까지' 독일 관념론을 독파하는 데 필요한 연장을 다 구비하게 된 듯싶다.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을 다시 손에 들어도 좋지 않을까.

 

일본학계의 칸트연구 성과를 가늠해볼 수 있다는 것도 책의 장점인데, 용어 번역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백종현 교수의 칸트 번역서들서 사용된 용어들과 비교해보는 것도 한 가지 공부이겠다. 책을 손에 넣기 전에 일단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문화일보(09. 10. 12) ‘칸트의 모든 것’ 한권의 책으로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칸트사전’(도서출판 b)이 출간됐다. 출판사에서 기획한 현대철학사전 중 제1권으로, 올해 초 나온 제2권 ‘헤겔사전’에 이어 출간된 이 사전은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158명의 칸트 연구자들에 의해 집필된 ‘칸트사전’(코분도·弘文堂)을 독일 철학 연구자인 이신철 건국대 강사가 완역한 것이다. 사카베 메구미(坂部惠) 일 도쿄(東京)대 명예교수와 아리후쿠 고가쿠(有福孝岳) 교토(京都)대 통합인간학부 교수 등이 편집고문을 맡고 구로사키 마사오(黑崎政男) 도쿄여자대 문리학부 교수 등이 편집위원을 맡아 1997년 펴낸 ‘칸트사전’에는 일본의 칸트 연구 역량이 총집결돼 있다.

칸트 철학의 기본개념들과 칸트 연구에서의 핵심사항 등 이 사전에서 다루고 있는 항목들은 800여개에 달하며 ‘관념론’·‘대립’이나 ‘독일의 칸트 연구’ 등과 같이 철학사의 주요한 개념들과 연구사의 중요 쟁점들은 짧은 논문 한 편 분량으로 상세하게 해설돼 있다. 이와 함께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칸트의 강의록들에 대한 해설 및 칸트 연구와 관련된 다양하고 폭넓은 참고 자료들이 실려 있다. 특히 칸트 철학이 일본에서 수용된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우리에게 칸트에 대한 ‘창조적 독해’의 방향을 시사하기도 한다. 역자가 덧붙인 ‘한국어판 칸트 저작 및 연구문헌 일람’도 부록으로 수록돼 있다.

‘순수이성비판’ 등 3권의 비판서를 남긴 칸트의 철학은 그 이전의 철학사 전체가 그곳으로 흘러들어오고 또 그 이후의 모든 철학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그곳으로부터 발원하고 있는 하나의 광대한 호수에 비유된다. 특히 칸트의 사유 속에서 철학적 사유의 모든 근본문제들과 기초개념들이 다듬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칸트 철학에 대한 독해가 여러 철학적 사유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나 정작 칸트 철학에 대한 이해는 지난한 과제이다. 칸트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방대함과 가닥을 찾기 어렵게 얽혀 있는 개념들의 그물망, 칸트 철학에 대해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해석 때문이다. 이 점에서 텍스트 비판에 기초해 칸트 철학의 의의를 현대의 관점에서 재발견하려고 노력한 이번 사전은 칸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나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출판사는 내년에 현대철학사전 시리즈로 ‘마르크스사전’과 ‘니체사전’, ‘현상학사전’을 잇따라 출간할 예정이다.(최영창기자)  

09. 10. 17.  

 

P.S. 최근에 나온 칸트 번역서로는 <형이상학적 진보/ 발견>(이제이북스, 2009)가 있다. 연구서로는 칸트 전공자인 강영안 교수의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강대출판부, 2009)가 저자의 칸트 연구를 집약해놓은 책으로 기대를 갖게 한다. 덧붙여, 칸트 연구서로 빨리 번역되었으면 싶은 책은 승계호 교수가 쓴 입문서 <칸트>(컨티뉴엄, 2007).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 시리즈의 하나인데, 한국인 학자가 이런 저명한 시리즈의 저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흡족하고. 국내에 출간된 책으론 클레어 콜브룩의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그린비, 2008)이 이 시리즈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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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10-17 21:31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은 18~19세기 독일 관념론에 관한 책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에 어떤 것이 있는지요?

로쟈 2009-10-17 22:16   좋아요 0 | URL
코플스턴 신부의 책이 나온 게 있네요. 시간이 나면 대출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고진에게 칸트를, 지젝에게 헤겔을 배운 형편이라서 좀 변칙 공부를 한 거죠. 무얼 추천할 만한 자격은 못 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9-10-18 00:23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mirror 2009-10-18 18:10   좋아요 0 | URL
칸트에 대해서 국내에 출간된 책 중 가장 추천할 만한 입문서는 문예출판사에서 나오고 오트프리트 회페가 지은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이 책은 독일에서도 가장 많이 추천되고 읽히는 칸트 입문서입니다. 회페는 손꼽히는 칸트 연구자 중의 하나이자, 또한 독일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정치철학자 중 하나입니다. 최근에 나온 영어권의 주목할만한 입문서는 Paul Guyer의 "Kant"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칸트 연구의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좀더 짧은 것을 꼽으라면, Allen Wood가 쓴 입문서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대규모 영어판 칸트 저작집인 캠브리지판의 편집자들이자 순수이성비판 판단력 비판등의 번역자이기도 합니다.

로쟈 2009-10-18 18:16   좋아요 0 | URL
네, 회페의 책은 많이들 추천하시더군요. 가이어의 <판단력 비판> 연구서는 저도 갖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순수이성비판> 공역자라는 건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mirror 2009-10-18 18:48   좋아요 0 | URL
코플스톤의 책은 읽어보지 않았으나, 그 책을 칸트나 헤겔의 입문서로서 추천할만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칸트나 헤겔의 전문가도 아니었고, 또한 50여년 전의 영미의 칸트 헤겔 연구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영미에서도 좋은 칸트 헤겔 연구서들과 입문서들이 쏟아져나오는 상황에서 50년전 비전문가가 쓴 대규모 철학사 중 일부가 지금 출간되어 나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더구나 오늘날 한 사람이 철학사 전체를 서술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그 만한 능력을 한 사람이 갖는다는 것 자체가 초현실적이니까요(예외라면, 앤소니 케니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비트겐슈타인 각각에 대해서 업적을 남긴 학자니까요.)제가 본 바로는 오늘날 코플스톤의 책이 칸트 헤겔의 입문서로서 추천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읽어본 바로는, 그가 쓴 철학사 중 경험론은 뛰어났으나, 합리론은 정말이지 흉악한 수준의 책이었습니다.

로쟈 2009-10-18 18:51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영미권의 최근 연구서들이 번역돼 있는 것도 아니기에 독자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 로마 철학사>만 갖고 있는데, 영어권에서는 이미 잊혀진 철학사가인가 보네요...

mirror 2009-10-18 19:00   좋아요 0 | URL
새로 나온 영미권의 철학사를 들자면, 90년대 말에 루틀리지 출판사에서 9권짜리가 새로 나온바 있습니다. 수많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쓰여진 책이죠. 요즘은 이런 류의 철학사가 많은 것 같습니다.
또 철학사보다는 개별 철학자 입문서가 좀더 추천될 수 있을 것 같고요, 각 철학자들에 대한 캠브리지 컴패년 시리즈는 높게 평가받는 입문서들이기도 합니다.
칸트에 대해서는 회페책이 입문서로서 충분할 것 같고, 문제는 헤겔이지요. 헤겔에 대한 입문서는 다른 나라 말로도 흔치 않고, 있어도 입문서로서 기능하지가 의문입니다. 이것은 입문서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 헤겔 철학 자체의 특성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오래전부터 높게 평가받은 책은 Charles Taylor의 "Hegel"라는 책입니다. 75년에 나온 책이지만, 즉시 독일어로 변역되어 독일어권에서도 널리 읽혔죠. 500페이지 가량 되는 두틈한 책입니다. 헤겔 철학의 입문서가 주제별로 접근하면 피상적이 되고, 헤겔의 주요저작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어렵게 되는,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로쟈 2009-10-18 19:03   좋아요 0 | URL
네, 그러나 여전히 칸트/헤겔은 전공자나 연구자들을 위한 철학자로 남을 듯합니다. 한국의 일반 독자가 (한국어로) 칸트/헤겔을 읽는 게 어떤 의미가 있고, 과연 읽을 수는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mirror 2009-10-18 19:17   좋아요 0 | URL
그 의문은 매우 타당한 의문이시고요, 그 의문의 대상이 칸트와 헤겔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요.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그렇습니다. 한국의 철학계 수준이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의미는 타인이 있다고 해서 있게 되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발견해야 될 듯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문학의 독자층이 철학보다 훨씬 많고, 또한 접근가능성이 용이하다는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쉽게 얻어지는 지식이 있겠습니까? 모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로쟈 2009-10-18 19:20   좋아요 0 | URL
원론적으론 그런데, 저는 그래도 일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철학서와 동료들을 상대로 쓰여진 철학서는 구분된다고 봅니다. 칸트나 헤겔이 후자의 경우고요. 직장인이나 주부들에게 칸트를 읽으려면 노력을 좀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무리죠. 제대로 이해하려면 독어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짧지 않습니까?..

mirror 2009-10-18 19:43   좋아요 0 | URL
영어권이나 독일어권을 보아도 직장인이나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 소개서는 극히 드뭅니다. 그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닌 듯 합니다. 저는 철학이 그렇게 쉽게 소개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또한 그 필요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어쩔 수 없는 철학의 특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교양으로 칸트 헤겔을 일반인이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알고 싶다면, 어쩔 수 없이 좀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칸트 헤겔의 이해를 위해서 독일어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는 발언들이지요. 영어나 프랑스어로 칸트와 헤겔의 중요한 전 저작이 잘 번역돼 있습니다. 또한 칸트와 헤겔의 연구 수준에 있어서 영어권과 불어권이 독일에 뒤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각기 나름대로 전통을 가지고 발전해 왔고, 특히 요즘 영어권은 다른 지역을 압도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죠. 한국말로도 칸트는 이미 2세대에 걸친 훌륭한 번역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헤겔인데, 최근에 새로 번역되어 나온 책들이 어떠한지 제가 지금은 확인을 안 해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을거 같습니다. 이와 별개로 헤겔에 대한 접근은 어떤 말로 번역되어도 어렵습니다. 정신현상학을 원문만 읽어도 쉽게 이해되도록 번역했다,는 말을 누군가 한다면, 전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상상이 되지 않는군요. 저는 일반인들에게 헤겔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로쟈 2009-10-18 19:54   좋아요 0 | URL
그게 '철학사'인지 '서양철학사'인지에 따라서도 문제는 달라질 듯해요.^^; 한 푸코 전공자가 예전에 데리다는 한국어로 번역될 수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소개는 의미가 없다는 취지의 얘기도 한 적이 있었죠. 하지만 저는 이해한 만큼 더 쉽게 설명/번역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봅니다. 가령 헤겔이 보다 뛰어난 문장력을 갖고 있었더라면, 이라고 가정해볼 수는 있는 것이죠.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의해 굴절된 언어 사용도 고려해볼 수 있고요. 헤겔이 난해하더라도 중요한 철학자라면 저는 '읽을 수 있는 헤겔'을 보여주는 것이 학자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난해성이 진정성의 표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mirror 2009-10-18 20:03   좋아요 0 | URL
번역될 수 없는 철학책이 있다는 말을 저는 믿을 수가 없군요. 학자가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헤겔의 문장들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습니다. 헤겔은 칸트에 비하면,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죠. 헤겔의 난해함은 내용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 문장의 스타일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해석과 번역은 다르지 않을까요? 헤겔 해설서를 가능하면 쉽게 쓰라는 요구는 타당하죠. 그러나, 번역을 원문과 동떨어진 창작을 하라는 것은 좀 무리한 요구지 않을까요? 원문이 난해하면 번역서가 난해한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주석을 통해서 그것을 완화하라는 요구는 당연한 요구이지만, 원문 자체까지 손대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철학의 대부분은 쉽게 해설서를 써도 제대로 소개하자면 주부들과 직장인은 접근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용 자체가 난해한데, 쉽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지식이 쉽게 다 서술될 수 있다는 믿음에 쉽게 동의되지 않습니다.

로쟈 2009-10-18 20:36   좋아요 0 | URL
철학이 세계에 대한 개념적 이해라면 그것은 다른 용어로 재구성될 수 있고, 압축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래서 한자도 손댈 수 없다면, 시적이고 문학적인 철학이란 생각이고요. 저는 난해함 자체에 대해선 좀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단 이해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난해하지 않다고요...

펠릭스 2009-10-18 22:57   좋아요 1 | URL
어떤 이론이나 가설 그리고 분명치 않은 정신세계와 인간의 심리 등을 다방면에서 연구합니다. 그것을 이해 못할(?)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그것들을 중역하는 사람들의 오류나 오해 등의 자의적인 첨삭으로 인해 더 홀란 스러울 경우도 있습니다. 대중을 위한 인문학적인 전문성이 과연 필요 있겠는가의 우려 또한 의미있습니다.

하지만 난해하다고 그것을 받아 들이려는 독자층 확장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것은 조금은 불편합니다. 어쩌면 이론이나 사상이 어려워서 접근하지 않는게 아니라 중역되어 대중에게 가까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있으면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전문가구룹(교수 등)을 존경한 것은 그들의 사회적 역활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엘리트 인문학과 노숙자 인문학도 있지만요. 평생 들어보기만 했던 평양을 통일하기 어려워 대중은 기대말며 특수목적의 외교관이나 정책상 다녀오면 족하다며 통일불가능론을 편다면 우리 국민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구한말이후 세계문화와 사상을 접하는데, 번역이야 말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해왔습니다. 앞으로 대중을 위한 번역과 해설 등으로 많은 인문학 관련 작업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사회구조상 중간층의 생각이 확장될 수 있는 인문학적인 프로그램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한동안 교양과학서를 언급할 일이 없어 적조하던 차에 모처럼 고대하던 책이 출간됐다. 저명한 인지과학자이자 철학자인 대니얼 데닛의 <자유는 진화한다>(동녘사이언스, 2009). 제목이 유혹적이어서 몇년 전에 하드카바 원서까지 구해놓고 번역되기만을 기다리던 책이다(이제 내가 더 기대하는 책 두 권은 <다윈의 위험한 생각>과 <마법 깨뜨리기>이다). 책의 부제는 '자유의지의 진화를 통해 본 인간 의식의 비밀'. 책의 '비밀'은 이제 읽어봐야겠지만,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의 추천사는 이렇다. "독창적인 철학 사상, 생생하고도 경이로운 문장,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료한 논증이 어우러진 이 책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새로운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뭔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리뷰기사를 일단 챙겨놓는다.

한겨레 (09.10. 17) 다윈주의자 ‘자유의지’를 품다

내가 마음을 먹고 내 손가락을 한 번 까닥거렸다고 하자. “(그) 결정은 자발적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그저 일어나는 것일까?” 1980년대 벤저민 리벳이라는 신경과학자가 오래된 ‘자유의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는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한테 의지에 따라 손가락을 까닥거리게 하고 그 순간에 그 사람들의 뇌에 일어나는 전기신호 반응을 관찰했더니, 까닥거림 결정을 내렸다고 의식하기 0.3~0.5초 전에 이미 뇌는 그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후에 여러 다른 실험들에서 뇌의 이런 ‘사전 준비’는 결정의 순간보다 거의 1초가량 또는 그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실험들은 우리가 믿는 자유의지라는 게 뭔지, 그것은 단지 뇌에서 그저 일어나는 무엇일 뿐 실체는 없는 게 아닌지 하는 심각한 논쟁을 일으켜왔다.  



인지과학·철학계의 석학으로 꼽히는 대니얼 데닛(67·미국 터프츠대학) 교수의 저서 <자유는 진화한다>는 이런 논쟁의 한복판에 서서, 난해한 물음에 진지하게 응하는 철학과 과학 탐구의 산물이다. 책의 목적은 지은이가 말했듯이, “비물질적인 영혼이라는 개념은 자연과학의 발전 덕택에 신빙성을 잃은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는 강한 결정론과 자유지상주의를 모두 비판한다. 물리 세계는 인과관계에 따라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강한 결정론의 논리 모형들을 꼼꼼히 따져보며 균열을 찾아내고, 또한 양자물리학의 비결정론에 기대는 자유지상주의의 순진함을 드러내고, 또한 자연과학의 성과를 두루 흡수하는 식으로, 복잡한 논증과 사색의 길을 걷고 나서 그가 내놓은 결론은 한마디로 ‘과학과 철학의 화해’이며, ‘결정론과 자유지상주의의 화해’다. 화해는 한쪽의 극적 승리가 아니라 싱겁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화해는 허약한 절충이 아니라 강건한 제3의 길이다. 

강한 결정론은 물리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는 모두 분석되고 예측할 수 있으며 자유의지는 착각이거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데닛이 파고든 결정론의 허점은 결정론에 늘 따라붙는 ‘불가피성’이 지나친 주장이라는 것이다. 물리 세계에 정해진 시스템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런 결정론적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하느냐는 또다른 문제이며, 설계자에 따라 어떤 결과는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앎’과 ‘피할 수 있음’은 자유에서 중요한 개념이 된다. 

비결정론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지상주의에 대해선, 양자물리학의 비결정론이 어떻게 이 경이로운 자유의지를 낳는지 명확하고 일관된 그림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데닛은 비판한다. 결정론을 거부할 뿐 비결정론을 증명하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닛은 자연과학의 유물론과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지만,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지를 물질의 결정물만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가 전하는 제3의 논증은 상당히 섬세하게 읽혀야 한다. 그렇더라도 논증의 원동력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다윈 진화론’이다. 책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며 지상에서 일어난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얻어진 산물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얘기했던 문화 유전자 ‘밈’(meme)과 생물 유전자 ‘진’(gene)의 상호작용에 의해 획득됐으며, 자연 환경에 대응해 최선의 선택을 할 줄 알았던 ‘선택 기계’ 인간만의 능력인 것이다. 신경 반응 실험만으로 자유의지의 존재에 급진적 의문을 제기했던 벤저민 리벳 유의 실험들도 데닛의 강한 비판 대상이 된다.

번역서에 실린 해제에서 장대익 동덕여대 교수는 “많은 철학자, 인문주의자, 종교 사상가들은 일종의 자유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고, 강성 결정론자의 대부분은 과학자들”이라며, “(데닛은) 결정론과 운명론이 동의어가 아니고 결정론과 자유가 모순 관계가 아니며 자유의지는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고 주장”하는 ‘약한 결정론’ 쪽에 서 있다고 소개했다. 철학자로서 데닛은 인지과학, 신경과학, 진화생물학의 새로운 발견이 심리와 자유의지, 윤리를 성찰하는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오철우 기자)  

09. 10. 17. 

 

P.S. 데닛의 책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물론 부케티츠의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열음사, 2009)이다. 제목상으론 얼핏 강한 결정론을 떠올리게 하지만, 부케티츠 역시 '다윈 진화론'의 관점에서 자유의지를 이해한다. "이 책의 기본 테제는 자유의지란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전적으로 유용하다. 환상은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그것이 생존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5쪽)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오래전 방한 강연을 갖기도 했던 데닛에 대한 소개는 <다니얼 데넷>(몸과마음, 2002)를 참조할 수 있고, <마음의 진화>(동아사이언스북스, 2006)는 마땅한 입문서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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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간의식의 철학자 다니엘 데넷
    from 꿈.노.리 2009-10-17 13:20 
    [다윈은 미래다] 3부 4 인간의식의 철학자 다니엘 데넷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뇌와 기계적 하드웨어 결합, 인공지능의 형태로 발전 가속 뇌 신경세포간 경쟁서 이긴 세포가 영향력 행사하는 것이 의식작용 철학은 질문이 뭔지 모를때 역할, 생명체 결실의 통합이 진화론
 
 
starla 2009-10-17 13:18   좋아요 0 | URL
저도 <마법 깨뜨리기>가 정말 궁금한데요,
그래도 데넷이 나와줘서 참 좋네요.
명성에 답할 것인가... 두근두근해요.

로쟈 2009-10-17 19:42   좋아요 0 | URL
추천사들을 보면, 기대에는 부응할 거 같습니다...

게슴츠레 2009-10-17 20:59   좋아요 0 | URL
이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당 주제와 관련하여 지젝이 다니엘 데넷을 다루는 부분들이 <신체없는 기관>이나 <시차적 관점>에 있지 않나요? 같이 참고하면 공부가 많이 될 거 같습니다.

로쟈 2009-10-17 21:03   좋아요 0 | URL
네, <시차적 관점>의 '헤겔, 마르크스, 데넷' 절 등에서도 다뤄지고 있습니다...
 

새삼스레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란 시구가 생각이 나서 예전에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패러디해 쓴 시를 옮겨놓는다. 히로뽕 투약 혐의로 룸살롱 종업원들이 구속된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니까 십수 년 전에 쓴 것이다. '별 헤는 밤'은 한국인의 애송시이면서 나도 가장 좋아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산과 들에는
갖가지 향기의 별떨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코끝을 찌르는 이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꾸욱 꾸욱 들이켜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그저
내겐 아직 많은 날이 남아 있다고 턱없이 믿는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아반테와
별 하나에 스쿠프와
별 하나에 프린스와
별 하나에 세피아와
별 하나에 벤츠와
별 하나에 메르세데스  

나는 아무 미련도 없이 그저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송하(朴眞玉․26, 金銀嬉․24), 다보(崔成伊․28), 모노(李모․19, 李收容․27) 캐쉬(南基永․27), 실크(韓定恩․29), 땡큐(朴모양․25), 마우이(尹慶正․27, 蔡永愛․22), 샤넬(曺賢淑․24), 궁원(朴英美․25), 히로뽕 투약혐의로 종업원이 구속된 룸살롱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별천지에 있던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나는 무엇인지 부끄러워
이 많은 별내음이 내린 언덕 위에 누워버렸습니다

바지와 남방에 묻은 흙을 투욱 투욱 털면서 집에 갑니다  



09.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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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15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자신이 쓴 시의 연유를 잊은듯 했습니다. 어젠 나희덕,황지우 시인을 한 공간에서 보게되었습니다. 시가 낙엽처럼 떨어저 길섶에 딩굴때,독자는 유난히 한 낙엽을 주워 봅니다. 우리는 시인의 시를 통해 사물을 느낍니다.

로쟈 2009-10-15 11:23   좋아요 0 | URL
시집도 많이 읽으시는군요.^^

펠릭스 2009-10-15 14:56   좋아요 0 | URL
여름밤이면 저희 집 뒤산 메똥옆에 누워 초롱초롱한 별 들을
처다 봤었죠. 가끔 시원한 차림에 적막을 뚫고 혼자 올라왔던
통장님댁 따님이 제 여름밤의 고요를 흔들었죠. 잃어버린줄
알았는데 로쟈님 시속에 숨어 있었군요. 감사해요.

로쟈 2009-10-15 22:12   좋아요 0 | URL
요새 어디 누워서 별을 보기란 하늘에 별 따기죠...

hnine 2009-10-15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좋은 시들이 많이 쓰여지고 읽혀지고 있지만, 이런 시가 또 나올까 싶은 생각이 감히 들 정도로 좋습니다.

로쟈 2009-10-15 11:22   좋아요 0 | URL
윤동주답지 않은 시죠. 마지막 연은 논란이 있는데(어조도 좀 다르죠), 저는 포함된 걸 더 좋아합니다...

saint236 2009-10-1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별하나에아반데와 별하나에 스쿠프와....로쟈님의 간절한 소망이 확 다가오네요. 이택광씨의 "무례한 복음"이라는 책을 보다가 로쟈님의 이야기가 나왔더군요. 예전에 오역을 지적하셨던 사건 말이예요.루쟈님의 이야기를 거기에서 보니 반가운 마음에 들아왔습니다. 예비군 훈련가서 그거 한권 읽고 왔습니다.

로쟈 2009-10-15 11:21   좋아요 0 | URL
제 소망은 아닙니다. 저는 면허도 없고 차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요.^^; <무례한 복음>의 그 대목은 제가 페이퍼로 올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비로그인 2010-02-20 22:49   좋아요 0 | URL
재미있고 눈물나는 시군요..
벤야민이 떠올랐어요. 저는 벤야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이없고 안타깝게 자살한 그에 얹혀 선생님의 큰 눈망울에 스며드는 눈물까지...
 

날씨도 좀 을씨년스러운데, 김광석의 노래를 듣다 보니('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등) 쓰려던 원고는 진도가 나가지 않고 마음만 싱숭생숭하다. 잠시 둘러보다가 오래전에 쓴 시 가운데 '그날'을 옮겨놓는다. 짐작엔 이성복 흉내를 좀 내보려고 했던 듯싶다...  

그날   

그날 나는 목젖이 조금 부었고, 내겐
개구리 물망초 지지배배 녹슨 총 그런 따위들이
눈에 들지 않았다. 우박이라도 퍼부었으면
나는 정신 차리고 몇 사람에게 발길질이라도 했을 텐데.
그날 모든 게 개판이어서 나는 목젖이 마저 부었고,
그렇다고 목구멍에 파스를 붙일 수도 없어
죽어가는 시늉을 했다. 아,
아름다운 꽃들은 나팔꽃, 감자꽃, 제비꽃.
그날 어쩌면 나는 지난날 전부를 미래의 어느 날
오후 한때와 맞바꾸어도 아쉬울 게 없었다.
사실 내가 무얼 어쩌겠다는 건 아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 없어도
그날 정권이 바뀌었고, 그날 주식이 폭락했다.
나는 명동에서 자장면을 먹고 시를 썼다.
개구리 물망초 지지배배 또 왜 있잖은가, 당신들의 굴뚝.
나는 배고프지 않았고, 나는 그저 배가 고팠다.
그날 나는 목젖이 조금 부었다가 가라앉았고,
모든 게 개판이어도 아쉬울 게 없었지만,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문득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바로 그날.  

09.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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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13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마다 그날은 몇 번일까요? 어떤 그 날은 잊혀지고, 어떤 그날은
눈에 흙이 들어 갈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날이 올
것이라는 두려움마저 질꺽이는 논바닥을 걸어가며 생각합니다.

로쟈 2009-10-13 20:59   좋아요 0 | URL
날이 다 저문 시각에 논바닥을 걸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