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좀 을씨년스러운데, 김광석의 노래를 듣다 보니('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등) 쓰려던 원고는 진도가 나가지 않고 마음만 싱숭생숭하다. 잠시 둘러보다가 오래전에 쓴 시 가운데 '그날'을 옮겨놓는다. 짐작엔 이성복 흉내를 좀 내보려고 했던 듯싶다...

그날
그날 나는 목젖이 조금 부었고, 내겐
개구리 물망초 지지배배 녹슨 총 그런 따위들이
눈에 들지 않았다. 우박이라도 퍼부었으면
나는 정신 차리고 몇 사람에게 발길질이라도 했을 텐데.
그날 모든 게 개판이어서 나는 목젖이 마저 부었고,
그렇다고 목구멍에 파스를 붙일 수도 없어
죽어가는 시늉을 했다. 아,
아름다운 꽃들은 나팔꽃, 감자꽃, 제비꽃.
그날 어쩌면 나는 지난날 전부를 미래의 어느 날
오후 한때와 맞바꾸어도 아쉬울 게 없었다.
사실 내가 무얼 어쩌겠다는 건 아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 없어도
그날 정권이 바뀌었고, 그날 주식이 폭락했다.
나는 명동에서 자장면을 먹고 시를 썼다.
개구리 물망초 지지배배 또 왜 있잖은가, 당신들의 굴뚝.
나는 배고프지 않았고, 나는 그저 배가 고팠다.
그날 나는 목젖이 조금 부었다가 가라앉았고,
모든 게 개판이어도 아쉬울 게 없었지만,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문득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바로 그날.

09.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