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마감일이던 월요일에 성적 처리를 하느라 저녁이 다 돼서야 바삐 작성해서 보낸 원고였다.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거리로 골랐는데, 지난주에 강의에서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우연이긴 하지만 첫번째 연재에서 '말인'(최후의 인간)을 다룬지라 이번에는 '최초의 인간'을 떠올린 것이 우연만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겨레(10. 07. 03)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마주하게 되면 꼭 생각나는 작가는 알베르 카뮈다. 작품에서 접했을 뿐이지만 그가 찬양한 알제리의 태양과 바다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방인>의 작가’라는 게 카뮈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소개 문구지만, 그는 ‘<최초의 인간>의 작가’로 기억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겨진 유작이다. 아마도 완성되었다면 이 소설은 어머니에게 바쳐졌을 것이다.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라는 헌사가 초고에는 남아 있다. 남의 집 ‘하녀’ 일을 했던 그의 어머니는 귀가 어두운데다가 문맹이었다. 노벨상 수상 작가의 이 자전적 소설은 그 어머니에 대한 예찬이자 ‘기이한 사랑’의 고백으로 읽힌다.   

카뮈는 20대 초반에 발표한 최초의 산문집 <안과 겉>의 재판 서문을 20여년 만에 붙이면서 이런 바람을 적었다. “한 어머니의 저 탄복할 만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 어울릴 수 있는 정의, 혹은 사랑을 찾으려는 한 사나이의 노력”을 다시 한 번 더 그려보겠다고. <최초의 인간>은 바로 그런 노력의 소산이기에, 이 작품에서도 가장 궁금한 대목은 ‘어머니의 침묵’ 장면이다.

일찍이 남편을 전쟁터에서 여읜 카뮈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자기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과 같이 살았다. 집안에서는 카뮈의 외할머니가 군주처럼 군림했고 모든 일을 결정했다. 아이들의 훈육도 할머니의 몫이어서 잘못을 할 때마다 회초리질을 했는데, 너무 아프게 때릴 때면 어머니는 말리지는 못한 채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라고만 말하는 정도였다.

<안과 겉>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어머니에겐 의자에 앉아 멍하니 마룻바닥을 들여다보거나 해질 무렵 발코니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럴 때 어린 카뮈가 집에 돌아와서는 그런 모습을 보고 슬픔에 잠겼다. 그의 어머니는 한 번도 그를 쓰다듬어준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내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아들 또한 우두커니 서서 어머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듯 침묵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카뮈 문학의 모태적 풍경이자 원초적 이미지이다. 그것이 모태적이고 원초적이라는 것은 <최초의 인간>에서 늙은 어머니가 수십년 동안 고된 노동을 해왔음에도, 주인공 코르므리가 어린 시절 뚫어지게 바라보며 탄복해 마지않았던 그 젊은 여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암시된다. 카뮈의 문학 전체는 어머니의 침묵과 ‘기이한 무관심’이라는 이 ‘수수께끼’와의 대결이 아니었을까.   

<최초의 인간>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 또한 그 ‘수수께끼 풀이’의 한 장면이다. 어린 코르므리가 부른 노래를 이웃 아주머니가 칭찬하자 그의 어머니는 “그래요 좋았어요. 쟤는 똑똑해요”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뜨거운 시선을 느끼면서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 나를 사랑한다니까.”  

그는 자신이 어머니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으며, 어머니가 사랑해주기를 전심전력으로 열망해왔다는 걸 깨닫는다. 동시에 항상 그 사랑의 가능성을 의심해왔다는 것도. 아들 카뮈의 운명은 바로 그 어머니의 침묵과 사랑 사이에서 진동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조금 일반화하자면, 카프카 문학의 비밀이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놓여 있듯이 카뮈 문학의 경우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밑바탕으로 한다. 작품에서 ‘최초의 인간’은 ‘아버지 없이 자란 인간’을 가리키지만, 그 ‘최초의 인간’에게도 어머니는 마치 바위처럼 존재했다.  

10. 07. 02.  

P.S. 한편, 아버지 없이 자란 '최초의 인간' 카뮈에게 아버지는 사형(단두대형) 집행을 보러 갔다 와서 구토를 하며 앓아누웠다는 '이야기' 속의 아버지이다. 이 이야기는 <이방인>에서도 뫼르소의 아버지 이야기로 등장하며 <단두대에 대한 성찰>에서도 서두를 장식한다. 사형제도에 대한 카뮈의 끈덕진 성찰과 문제제기는 이러한 체험에 근거한다.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다시 읽으며 새삼 이 문제에 주목하게 됐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기회를 만들어 자세하게 분석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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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냐 반역이냐

격주간 <기획회의>(274호)에서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 꼭지를 읽었다. 인터뷰이는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밀턴과 칼라일 연구자이자 <서양 문명의 역사> 등 다수 번역서의 역자, 그리고 <번역은 반역이다>의 저자. 인터뷰의 타이틀은 '인문학, 지금부터 '새 역사'를 써야 한다'인데,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경청할 만한 대목들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우리의 경우 인문학의 황금기가 따로 없었기에 인문학 '부흥'을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 박 교수는 그럼에도 인문학 부흥을 위해 다져야 할 기본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먼저 독서 문화가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우리 현실은 뒷걸음만 치고 있군요. 90년대만 해도 인문서 초판을 2,000-3,000부도 찍었는데 요즘은 500부, 1,000부더군요. 점점 더 책을 안 사본다는 거지요. 게다가 대학 교수들은 마치 올림포스 산 정상의 신들처럼 고고한 상아탑에 유폐된 채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아니, 소통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 같아요. 평생 인문학 교수 했다면서 대중과 소통 가능한 저서 한 권 없이 정년을 맞이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분을 과연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제도권 속에서 요구하는 논문만을 줄곧 쓴다는 점에서 '인문 기능인'이라고 해야지 않을까요?"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와 번역 문제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한다.  

"인문학이란 기본적으로 글읽기와 글쓰기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 콘텐츠는 정말 빈약하지요. 읽을 글이 태부족입니다. 한글은 창제된 후 상당히 오랫동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고, 20세기 전반기에는 식민지 지배를 겪으면서 활용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결국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번역을 통한 양질의 한글 텍스트 확보는 시급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온전한 콘텐츠 확충을 위해서는 번역이 절실해요. 전 세계 모든 지식과 정보를 모국어로 습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와 비전이 있어야죠. 모국어에 대한 이런 포부와 야망마저도 없다면 이런 나라를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시작전권' 환수도 버거워하는 국가인지라(이유야 어찌됐든 소위 '군사주권'을 방기하는 것인데) '지식주권'까지 바란다는 건 너무 무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어지는 건 현재 우리나라의 번역과 인문학 수준에 대한 박 교수의 평가인데,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서구 편향적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이슬람 문명을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슬람교가 창시된 직후 수백 년 동안 아랍인들은 찬란한 문명을 창조해냈습니다. 이슬람 문명권은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을 아랍어로 번역했지요. 그것을 12세기 서유럽인인 라틴어로 중역해서 만든 것이 기독교 신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결합한 스콜라 철학이고요. 그런데 21세기 우리는 아직도 한글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이 없습니다. 아랍보다 1,100년, 서유럽보다는 900년 뒤졌네요.   
시인 김수영은 1960년대 중반에 쓴 산문에서 '1930년생'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했어요. 1930년 이전에 태어난 '구세대'는 해방되던 1945년에 15세 이상이었고 따라서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죠. 반면 1930년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는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김수영은 구세대가 일본어를 통해 문학의 자양을 흡수한 데 비해, 신세대는 일본어 해독 능력의 결여로 지적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수영은 신세대 문학 청년들을 '뿌리 없이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혹평했어요.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른는 까닭에 세계문학의 흐름에서 차단된 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지성'이라는 겁니다. 그는 산더미같이 밀린 외국 고전을 우리말로 번역해 한글 콘텐츠를 일본어 못지 않게 늘리는 일이야말로 국운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지적했어요.     
흔히 일본을 번역 천국이라고 하죠. 일본어로 세계의 고급 정보와 지식을 다 습득할 수 있어요.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스카와 도시히데 쿄토산업대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어요.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도 못 나가 여권도 없었습니다. 저는 한글만 갖고서도 노벨상을 탈 정도가 돼야 선진국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아예 '번역국'을 설치하여 국가 주도하에 수천, 수만 종의 서양 학술서를 번역했던 일본의 처지와 견주어 보면 우리는 100년 이상 뒤진다는 것이 박 교수의 냉정한 평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이 이미 19세기에 어머어마한열정으로 시작한 일을, 우리 사회는 지금도 그 필요성을 조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과 제도적 냉대에 대해서 박 교수는 이렇게 꼬집는다. 

"인문학자들에게 정체성 자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모국어를 튼실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인문학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성찰할 줄 몰라요. 미국이나 독일 등지의 대학원은 외국학(동양학) 연구자들에게 석박사 학위논문으로 번역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외국학을 할 경우 번역을 연구 실적으로 인정해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그런 주체성에 입각한 사고와 발상의 전환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아요. 자신이 한국사람이 아닌 미국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나 봐요." 

마지막 멘트는 농담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 절반은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녀들은 '미국인' 아닌가. 끝으로, 나도 개인적으로 관심을 환기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주제인데, 번역 문제와 민주주의의 관련성이다.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극소수입니다.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를 10개 땄다고 해도 영어책을 한글책처럼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글 콘텐츠를 확충해서 영어가 아니더라도 한글만으로 전 세계의 고급지식과 정보를 다 접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가 되는 거지요.
조건이 여의치 않다고해서 번역가와 출판인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위기를 극복한 역사적 경험을 갖지고 있어요. 어려운 상황일수록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좋은 번역서를 출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출판의 정도를 걸어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번역의 힘'을 만끽하도록 하는 일, 그것은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민주화운동이며 나라살리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병운동'과 '나라살리기 운동'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지식정보사회의 민주화운동'으로서 번역이 갖는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환기시키고픈 의도에서 박상익 교수의 인터뷰를 옮겨적었다... 

10. 07. 02.  

 

P.S. 박상익 교수와 마찬가지로 번역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영문학자 김욱동 교수가 번역과 한국 근대를 다룬 책 두 권을 한꺼번에 출간했다.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2010), <근대의 세 번역가: 서재필, 최남선, 김억>(소명출판, 2010)이 그 두 권의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이라 바로 주문을 넣고 기다리는 중이다. 우리는 100년 전에 번역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고 또 어떤 작업을 했던가 살펴볼 수 있겠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 또한 100년 뒤에 똑같이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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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7-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이 거의 25여년 전에 했던 주장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군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나요?

물론 전체적인 문제의식에는 십분 공감은 하지만 예로서 거론 된 것들이 좀 부적절하다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에 1100년 900년 뒤졌다고 하는 건 좀 어폐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전달된 후 100여년 지났을 테니 그 시점 이후부터 따져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인물임을 전제한다면 아랍어 번역이 나오는 데 거의 1000년 이상 걸린 셈이고 그리스 문명에 매우 친화적이었던 라틴어 번역도 아랍어 중역을 통해 거의 13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온 셈이니까요. 물론 문화교류의 스피드를 그 시대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아마 번역에 열심이었던 일본에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이 얼마만에 나왔나와 비교한 예를 들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중세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당시 학문의 중추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 사회에 그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구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는 암암리에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세뇌도 보입니다...

김욱동 교수님 책은 저도 관심이 가는 군요.^^

로쟈 2010-07-02 21:38   좋아요 0 | URL
약간 '과장'된 면도 있지요. 서양사 전공자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동시대 문제작들도 바로바로 소개되는 건 아니니까 저는 사정이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하기야 번역을 기다리는 우리 '고전'도 산적해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을 듯해요...

안티고네 2010-07-20 23:28   좋아요 0 | URL
그렇게 연대만 가지고 단순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랍어 번역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슬람 문명권에서의 번역이라고 해야겠죠. 이슬람신학의 쳬계화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인것이니까요. 622년 시작한 신흥종교 이슬람교가 750-900년에 모든 번역을 마쳤으니 이슬람기원으로부터 130년이 경과된 뒤 본격 번역작업을 시작한 거죠. 이슬람교 초창기 모든 것이 체계가 잡히지 않고 어수선한 그 시대에 불과 130년 지나서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작심을 했으니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리스문명에 라틴어가 친화적이었다는 것도 고대로마시대에 국한된 얘기입니다. 로마 멸망 후 500년 넘도록 과거와의 엄청난 단절이 있었습니다. 서유럽 게르만족이 라틴어를 겨우 읽고 쓰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샤를마뉴 시대인 800년경이었지만 11세기 중반까지 서유럽의 문맹률은 99% 이상이었습니다. 대단한 문맹시대였죠. 샤를마뉴 황제도 문맹이었으니 말 다했죠. 한마디로 거의 동물처럼 산겁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면서...유럽은 1050년 이후에야 겨우 농업혁명으로 경제가 피어나고 먹고살만해져서 교육시설이 늘어나고 라틴어 해독능력자도 많아진거죠. 그러니 기아상태에서 벗어나고 사람답게 산지 1세기가 채 안되어서 비록 중역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한 겁니다.
그때와 지금의 시간을 똑같은 시간이라고 인정한다 해도(그럴 리가 없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동작이 신속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현대의 엄청난 변화속도를 감안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느려터진 굼벵이 수준이고요.
그리고 로쟈 님이 말씀하셨지만 서양사 전공자가 아리스텔레스 예를 들었다고 '서구중심주의의 세뇌' 운운하는 것은 생뚱맞은 오바로밖에는 안 보이네요. 모국어로 세계의 모든 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서구 중심주의로 딱지 붙이는 건 심히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비판을 하면 좀 멋져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공정성은 있어야겠죠?

알비스 2010-07-0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출판 뿐만 아니라 음반시장을 봐도 일본이 부럽게 느껴집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구하지 못하는 음반을 일본에서는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보를 기록하고 보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죠.
그리고 요즘 출판업계에서도 서서히 전자책이 도입이 되고 있는데 열악한 우리 출판계에 이것이 대중화 되면 불법복제로 출판상황이 더욱 더 악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로쟈 2010-07-05 08:50   좋아요 0 | URL
촐판계에서도 불법복제 차단 기술에 대해선 다들 회의적이더군요...
 

경비실에서 택배를 찾아가라고 하여 내려가보니 전문 월간지 <공간(SPACE)>(512호)이 배송돼 있다. 보통 격월로 서평을 게재하는데, 한 번 건너뛰고 이번 7월호에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미술문화, 2010)에 대한 서평을 실은 바 있다. 건축 전공자가 아니라면 들여다볼 일이 거의 없을 잡지인지라 가끔씩 '문학평론가'의 서평이 실리는 게 신기하긴 하다.   

공간(10년 7월호)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의 부제는 ‘4인의 철학자가 들려주는 통섭강의’다. 아르코미술관 주최로 네 명의 인문학자가 참여한 강좌 ‘현대미술과 인문학’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전반적으론 미술사와 현대미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강의록’이라고는 하지만 ‘강의’는 빠지고 ‘기록’만 남았다. 강의의 현장감이 반영돼 있지 않은 탓인데, 독자에게 ‘들려주는’ 청각적 텍스트가 아니라 여전히 독자가 ‘읽어야 하는’ 시각적 텍스트에 머물고 있는 점이 흠이다. 무엇을 읽을 수 있나?   

먼저, ‘둥지의 예술철학’을 주제로 삼은 박이문 교수는 예술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예술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라고 전제하고 기존의 정의들을 검토한다. 예술을 ‘재현’과 ‘표현’, ‘형식’, ‘제도’ 등으로 규정해온 전통적 정의들이 어떤 점에서 만족스럽지 못한가를 지적한 후에 그는 ‘예술의 종말’론으로 유명한 아서 단토의 예술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고 비판한다. 단토의 정의가 “눈으로 보아서는 어떤 것이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그런가? 

  

단토는 1964년 앤디워홀이 뉴욕의 한 갤러리에 ‘브릴로상자’를 전시한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는다. 당시 워홀이 흔한 비누상자를 모방하여 제작한 이 ‘작품’은 적어도 육안으로는 기성품과 구별되지 않았다. 단토는 ‘지각적 식별불가능성’이란 문제를 도출해내며 지각이 더 이상 예술작품을 식별해주는 준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술이 ‘눈’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의 문제가 된 것이고, 이것은 감성학으로서 미학의 종언을 뜻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단토에 대한 비판은 다른 근거에서 이루어져할 듯싶다. 대신에 박 교수는 예술작품의 양태적 정의를 제안하며 예술작품의 구조적 모델로서 ‘둥지’를 제시한다. 새들의 둥지가 가장 바람직한 예술적 언어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둥지는 생태학적이며 친환경적이고,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건축공학적으로 견고하며, 감성적으로 따뜻하고, 영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중국철학 전공자인 임태승 교수는 ‘예술적 상상력과 동양의 사고’라는 강연에서 동아시아 미학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디지털미학을 위한 제언을 보탠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과 원리이며 동아시아 예술은 철학적인 원리와 미학적인 범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한 전통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유가(儒家)미학이다. 격물(格物)에서 수신(修身)을 거쳐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유가적 알고리즘이 미학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래서 ‘물로써 덕성을 비유한다’는 뜻의 이물비덕(以物比德), 줄여서 ‘비덕’이 가장 전형적인 심미론 또는 창작론이 된다. 자연계의 물상이 모두 인간의 도덕적 정감과 관련되기에 ‘재현(再現)’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 ‘사의(寫意)’다. 실경(實景)보다 상징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예 임 교수는 동아시아 예술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동아시아 미학이 디지털미학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동아시아 신화와 역사의 수많은 내러티브들이 디지털기술에 스토리보드를 구축하게 해줄 거라는 것이 임 교수의 기대다.   

‘현대미술과 철학의 이중주’에서 이광래 교수는 서양미술사가 재현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탈재현(차이의 발견)과 반재현(차이의 생산)으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기술한다. 푸코에 기대어 말하자면, 재현에서 재현을 통해 재현을 부정하는 탈재현으로, 그리고 그것마저도 거부하는 반재현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이 서양미술사의 전개과정이었다. ‘재현미술의 종언’ 이후의 미술은 곧 ‘엔드게임’으로서의 미술이다. 이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고 다른 게임, 즉 메타게임으로 대체되며 게이머들만 바뀐다. ‘미술의 종말놀이’라고까지 부르는 이유다. 급속하게 변화해가는 매체환경 속에서 미술작품도 무한변신을 시도할 수밖에 없으며 “마침내 ‘확장미술 시대’를 맞이할 미래의 사이버서퍼들은 스펙터클 엔드게임에 빠져들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전망이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은 ‘철학의 눈으로 본 매체’에서 매체 변화와 혁명이 가져온 의식 및 사회 변화의 양상을 기술하고 디지털 시대 새로운 형이상학의 밑그림을 그린다. 근대의 개인적 주체, 자본주의적 대량상품 시장 체제, 목적론적인 진보적 역사관 등의 확립이 모두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한 문자문화의 정착과 무관하지 않다면, 사진술의 발명은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모든 시각적 세계가 ‘인간의 눈’으로 본 세계였지만 사진술의 발명 이후에 인류는 ‘기계의 눈’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우리의 감각비율과 지각 패턴을 바꾸고 문화예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흐름을 바꾸어놓는다. 아직 진행중인 디지털혁명이 이미 존재 질서를 재편하고 우리의 정체성마저 변화시켰다는 주장은 그래서 가능하다. 아마도 우리가 인문학을 다시 또 만난다면 ‘미술관’이 아니라 ‘사이버미술관’에서이지 않을까.    

10. 07. 01.  

P.S. 엉뚱하게도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는 미술관이 아니라 영화관을 떠올려준다. 책의 후반부를 씨네큐브에서 <하하하>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읽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아서 단토의 신작이 <앤디 워홀>(2009)인데, 구미가 당긴다. 하하하, 앤디 워홀이네!.. 

 

P.S.2. 아서 단토의 <앤디 워홀>은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 2010)로 '번역'돼 나왔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청소년물로 각색되어 '번역'이란 말을 쓸 수도 없다('아서 단토 지음'은 어떤 의미로 적어놓은 것일까?). 편집자주에 따르면, "원저작물에 어려운 부분이 많아 엮은이를 따로 두었"고, 책은 그 엮은이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단토의 지적대로 워홀에 관해선 훌륭한 전기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하필 예술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책을 골라서 '전기'로 재가공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대하던 책을 하나 도둑맞은 기분이다. 단토나 저작권자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10.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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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앤디 워홀 이야기' 유감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4 20:07 
    저녁을 잘 먹고 소화 안 되는 기사를 읽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의 신작이 출간된 건 반갑고, 게다가 그 책이 지난달에 기대를 표한 <앤디 워홀>(2009)이라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작 '번역서'라고 나온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 2010)는 엉뚱하게도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의 하나로, 앤디 워홀의 전기나 소설처럼 꾸며서 훑어주는 책이다.    &#
 
 
 

비평고원에 오래 전에 올려놓았던 글을 옮겨놓는다(포스팅 날짜는 2002년 2월 2일로 돼 있다). 원래는 '루카치와 후쿠야마, 그리고 노동과 유희에 대하여'란 제목이었는데, 너무 '구태'가 나서 바꾸었다. 이 포스팅 또한 나름대로 <비평고원 10>(도서출판b, 2010) 출간 기념의 의미를 갖는다. 내용은 역시나 카페 주인장인 쿤데라님과의 논쟁을 담고 있다(주로 쿤데라님의 주장에 대한 논평과 반박이다). 돌이켜보니 2000년대 초반에 나는 주로 이런 논쟁을 즐겨했던 모양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논쟁도 다 추억거리가 된다(나 자신의 생각도 그간에 좀 달라지기도 했고).  

 

제 생각에 의견의 차이는 설득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과학철학에서 패러다임 이동이라고 하는 것이죠. 토마스 쿤은 그것을 종교적 개종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걸 권유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의견 혹은 입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논리적 일관성과 정합성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와 관련하여 제가 좀 미심쩍게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오해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해명도 덧붙입니다.  

"우선, 전 해체주의를 읽기 이론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왜냐면, 이것은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1) '읽기 이론'(reading theory)는 마이클 페인의 저서명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책이름은 '이론 읽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데리다는 자신의 읽기가 하나의 방법론으로 고착화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방법론은 모든 텍스트의 상이성을 지우는 것이기에. 그리고 텍스트의 해체/구축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그리고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러나 그런 점을 고려하여 그의 생각을 읽기 이론으로 보는 건 별로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데리다가 환영받을 수 있었던 건 신비평에서 얘기하는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와 접맥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이건 제 생각이 아니고 일반론입니다). 다만 신비평은 자세히 읽기를 통해서 텍스트의 아포리아들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반면에, 해체론은 오히려 아포리아들이 생산된다는 걸 보여줍니다. 읽기 이론에서 '이론'이란 말에 거부감이 있다면, 그냥 읽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방점은 읽기에 있는 거니까.  

읽기이론 이론읽기(라깡,데리다,크리스떼바)

그런데, "읽기란 본래 의미를 음미하는 작업입니다. 글쓰기는 이와 다르죠. 어떤 글쓰기도 결코 동일할 수 없으니까요."라는 건 뭔가요? 읽기가 글쓰기와는 다르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읽기는 동일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해체론은 글쓰기 이론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글쓰기와 차이>로 번역된 데리다의 책이 서점에서 작문 코너에 꽂혀 있기는 합니다.)  

"해체주의를 정치적 민주주의 이론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란 말과 같게 들리는군요.(자유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정체체제는 없다라는 절벽에 다다름) 아니면, 님이 민주의의란 말을 너무 추상적으로 사용하고 계시던가요."

(2) 저는 '민주주의'라고 했지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경제적)자유주의와 (정치적)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인데, 제 방점은 민주주의에 있으며,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민주주의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민주주의도 있고, 조선인민민주주의도 있습니다. 제가 뜻하는 민주주의는 텍스트적 의미의 단일성에 대한 믿음(그건 형이상학적 신앙 혹은 파시즘과 연관되는데)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의미의 복수성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정치에서의 의견의 복수성에 대한 믿음과 연관이 되고. 해서 의미의 복수성을 주장하는 해체론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연결된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민주주의 앞에 놓인 수사 때문에 그러한 복수성에 침해/훼손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냥 민주주의라고 한 것이죠.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십니까?  

"다만, 전 데리다와 루카치를 한 사람을 택하라면, 루카치를 택할 겁니다. 물론, 루카치의 정치적 실천에서의 오류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또는 글)로만 실천을 외치는 것보단 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3) 요컨대, 데리다보다 루카치를 지지하신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적어도 이 대목에선) 데리다가 말/글로만 떠든 데 반해 루카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직접 (자신의 사상을) 실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는 이상주의자(세계의 변화를 기대하는)와 냉혹한 현실주의자(또는 허무주의자)의 차이점이기도 하구요."라고 덧붙이셨는데, 루카치가 이상주의자이고 데리다가 현실주의자/허무주의자의 배역을 맡은 것 같네요(루카치가 말하는 리얼리즘이 이상주의로 번역되는 것이었나요?). 제 상식으로 루카치를 지지한다는 것은 맑시즘을 지지한다는 것이고,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믿는다는 것이며 예술/문학은 사회현실의 충실한 반영이고 또 반영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작품해석에 있어서 유일한 진리(유일하게 올바른 해석)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만년에 후배인 하우저와 나눈 대담(1969)의 일부를 인용해 보죠.  

루카치: 서구에서는 요사이 제 견해로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구호인 '다원론주의'라는 것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동일한 문제를 두고 여러 개의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언제나 오로지 단수 속에만 있습니다.
하우저: 적어도 단일한 이데올로기 내에서는 그렇지요.  
(반성완 편역,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 92쪽.)

그러한 믿음을 쿤데라님도 공유하고 계신가요?..

(4) 말이 나온 김에 후쿠야마 얘기도 하죠. "관변학자=주류"라는 공식에 의문을 제기하셨는데('관변학자'란 말은 제가 만들어쓴 말이 아닙니다), 기득권층을 주류라고 하는 것이 크게 이상한지요? 사뮤엘 헌팅턴이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현재 미국의 국익과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들입니다. 관변학자나 주류란 말에 무시의 의미가 내포돼 있는지요?(후쿠야마는 아시다시피 미행정부의 정책자문역을 해왔습니다. 관변학자란 말은 그걸 지칭하는 것인데, 그게 무시인가요?)  

"더구나, 후쿠야마는 그렇게 무시할 만한 존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 후쿠야마가 우리나라에서 너무 폄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물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관변학자인 후큐야마보다 비주류인 푸코의 책이 더 많이 팔리죠) 그의 논의엔 상당히 정당한 주장들도 많은데요. 민주주의를 최상의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는 것 등등."  

저는 후쿠야마를 무시하지 않았고(그의 '역사종언론'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음미할 대목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와 같은 입장이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는 국내에서 폄하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책들이 나오는 족족 번역되고 있고, 언론매체에서도 자주 그와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습니다(적어도 그는 고진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말씀이신지요?(또,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지만, 푸코의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하셨는데,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바케트빵처럼 팔리기라도 했나요? 그의 번역본과 연구서를 몽땅 다 해서 몇 만부이고, 또 실제로 읽은 독자는 그 절반의 절반도 안될 겁니다. 쿤데라님의 출판사회학은 제게 그다지 신뢰감을 주지 못하네요.)  



그리고 문제의 대목. "그의 논의엔 상당히 정당한 주장들도 많은데요. 민주주의를 최상의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는 것 등등"이라고 하셨는데, 왜 여기선 (추상적인!) '민주주의'인가요? 후쿠야마가 말하는 건 개나 소나 다 붙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입니다. 그리고 이슬람엔 그게 없어서 테러리즘이 창궐한다고 말합니다(요컨대 그는 미국 테러사태에 대해서 미국의 책임은 묻지 않습니다). 그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말씀하시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떻게 루카치에 대한 지지와 후쿠야마에 대한 동조가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루카치는 후쿠야마에 결코 동조하지 않았을 것 같고, 후쿠야마 또한 루카치에 대해 지지할 것 같지 않은데 말이죠. 물론 둘 다 헤겔리안이라는 공통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한 사람은 좌파고 한 사람은 우파거든요. 쿤데라님은 그런 좌우이념이 이젠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지요? 아니면, 그 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고 계신 건지요? 아니면, 그냥 '종교적' 관용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요?  

"다만, 이것 하나는 지적하고 싶군요. 국내 계간지에서 언급된 사상가들 대부분은 님의 기준으로 한다면, 모두 비주류이기에 소위 문학권력 논쟁도 비주류와 비주류의 싸움일 수도 있군요. 질문 하나, 그럼 님이 생각하는 주류는 누구입니까? 구체적 실명을 들어 주십시오."

(5) 제가 비주류적 지식인으로 언급한 사례는 촘스키, 부르디외, 푸코 등인데, 그게 "모두 비주류"란 의미가 되는 건가요? 다 촘스키와 부르디외, 푸코 같은 놈들인가요? 다만, 저는 지명도만 가지고 주류/비주류를 나눌 수는 없고, 그가 가진 정치적 성향(사회비판적 혹은 반체체적)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비판적 지식인과 주류 지식인이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문학권력 논쟁이 비주류와 비주류의 싸움"이라는 결론을 함축할 수 있는지요? 어떻게 그런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저는 한번도 이문열을 비주류 지식인(엄밀한 의미에서는 그가 지식인인지 의문이나)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데뷔 초기 무명시절에 잠시 비주류 작가였을 뿐입니다.(사실 이문열에 대한 쿤데라님의 태도도 저로선 모호하고 미심쩍게 생각됩니다.)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 한 두 개의 정확성보다 전체적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반복해서 읽기를 강조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시간적 격차를 두고 다시 읽는다는 것은 삶으로 읽는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을 10대에 읽었을 때와 20대에 읽었을 때와 30때에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죠. 이는 단순히 지적 성장뿐 아니라, 인격적 성숙(인생경험)과도 관련이 있지요."

(6) 이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우선, 전제는 원서로 읽는 것이 좋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외국어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번역본을 읽는 것은 차선입니다. 왜? 엄청난 외국어 능력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에!(그런데 왜 가끔 쿤데라님은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을 인용하시는지요?)

"물론, 로쟈님 말씀처럼 필요한 부분만 찾아읽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극히 작은 부분을 확인하거나, 오역을 찾아내는 수준이지, 전체를 원서로 음미하는 것과는 엄청 차이가 납니다."  

요는 쿤데라님이 전체를 원서로 음미해 보셨는데, 번역본으로 읽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는 말씀이죠? 만약에 정말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면, 좀 번거롭지만, 엄청난 외국어 능력을 기르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지 왜 번역본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까?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어서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왜 포기해야 합니까? 차선으로 영역본들만 읽어도 (좀 덜 엄청나겠지만 나름대로 엄청난) 그 차이를 음미해 볼 텐데 말씀입니다. 더구나 외국문학 전공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겠죠. 제가 아는 사람은 국문과를 졸업했지만, 엄청나게 외국어를 공부해서 영어와 불어는 비교적 자유자재로 읽습니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유명 작가/작품들을 읽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쿤데라님이 번역본을 고집하시려면, 적어도 원서 읽기와 번역서 읽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하셔야 되는 게 아닐까요?

"또, 님은 전공자라면 원서 읽기를 주장하셨는데, 전 번역서가 있는 한(아주 엉텅리가 아니라면) 굳이 원서로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문학 전공자가 프루스트는 불어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괴테는 불어로 읽어도 좋다고 주장하는 모순에 부딪힐 수 있으니까요. 원서로 읽는 걸 자신의 공부방법으로 삶기 위해선, 해당 작품을 해당 언어로 읽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어는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니까 쿤데라님의 원서 읽기 개념은 해당 문학작품이 씌어진 언어로 읽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지 않아서, 번역서를 읽자는 것이죠. 그것은 바꿔 말하면, 가능할 경우에는 원서를 읽으면 좋다입니다. 즉 "굳이 원서를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번역서로 읽어도 된다는 것이죠(번역서로만 읽자는 뜻은 아니시죠?). 그러니까 불문학 전공자는 (가능하다면) 불어로 프루스트를 읽고, 괴테는 아무 번역으로나 읽으면 됩니다(불역이건, 영역이건, 국역이건). 굳이 국역본만을 읽을 필요는 없겠죠?  

"님은 작품읽기와 그 작품을 둘러싼 해석읽기를 분리하시는 것 같은데, 전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7) 제가 말씀드린 걸 다시 반복하자면, "쿤데라님은 번역본을 세 번 읽는 것이 원서를 읽는 것보다 더 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같은 논법으로 말하자면, 사실 작품에 대한 유려한 해설들을 서너 개 읽는 것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해설들에 빠져 있는 것은 '경험'이지 '이해'가 아닙니다." 이게 작품읽기와 그 해석 읽기가 분리된다는 뜻인가요? 제가 말씀드린 건, 번역본 읽기로 원서 읽기를 대신할 수 있다면, 해설 읽기로도 번역본 읽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목적으로 한 경우에는(음미가 아니라). 쿤데라님이 말하는 비분리라는 건, (제가 상상력을 좀 발휘하면) 작품이 곧 해설 그 자체이기에 따로 해설이 필요없다는 뜻인가요? 그건 이론의 불필요성에 대한 주장과도 합치되니까 그럴 듯하네요. 저는 그냥 그래도 중요한 건 작품이다, 란 뜻으로 새기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10-20년 후면 대학교수들이 푸코, 들뢰즈, 라캉을 칸트, 헤겔, 하이데거를 이야기하듯 이야기할 것입니다. 미국의 한 교수가 말하길, 난 데리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데리다를 말하지 않으면 대학에서 밥먹고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대학에서 그럴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8) 미래학자들의 예측도 겨우 60% 적중율을 보였다는데, 제가 굳이 쿤데라님의 의견에 동감할 필요는 없겠죠. 10년 후에도 푸코, 들뢰즈, 라캉이 이야기된다면, 그들이 중요해서인지 무슨 꼼수나 로비에 의해서는 아닐 겁니다. 데리다를 말하지 않으면 대학에서 밥먹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신비평만 알아도 30-40년씩 대학교수를 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우리 대학이 그렇게 험악해 지나요? 그런 상황이 현실화되려면, 즉 데리다를 모르는 교수가 '왕따'가 되려면 나머지 대다수 교수들은 데리다를 좋아하거나 정통해야 하는데(우리에게 데리다가 그토록 중요하고 절실하게 될지도 의문이지만), 쿤데라님은 그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보시는 건지요? 저는 유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습니다.  

"(푸코, 데리다를) 영문학 전공자들이 미국에서 유행을 하니까 부지런히 수입해서 유행을 시켰죠. 해서, 헤겔, 칸트의 책이 안 팔리고, 이들의 책들이 팔리기 시작했죠."

(9) 몇 번의 논쟁을 거치면서 느낀 건데, '출판학'이나 '미래학'에 대한 쿤데라님의 주장은 그냥 한쪽 귀로 흘려들으면 될 것 같습니다. 푸코 번역서만 해도 번역자들은 철학자, 법학자, 정치학자, 불문학자 등입니다. 영문학자들이 강의실에서 떠드는 바람에 이 사람들이 번역을 시작하게 된 건가요? 그들이 수입하거나 맘만 먹으면 유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가요?(참고로 80년대 이후 대학사회에서 지식인의 유행은 루카치-알튀세르-푸코-들뢰즈의 순입니다.) 푸코나 데리다 때문에 헤겔, 칸트의 책이 안 팔렸다고요? 읽히는 건 둘째치고, 헤겔, 칸트의 책이 언제는 그렇게 많이 팔리다가 안 팔리게 된 건가요? 푸코, 데리다만 아니었다면 헤겔, 칸트가 여전히 유행하고 많이 팔려나갈 거란 말씀이신가요? 헤겔, 칸트가 일년에 몇 천부가 팔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나 <글쓰기와 차이>가 얼마나 팔렸는지 모르겠지만(<글쓰기와 차이> 같은 건 2천부도 안 나갔을 거라는 게 제 짐작인데), 뭐가 얼마나 안 팔리고 또 팔리기 시작했단 말씀인지... 다음에는 더 토를 달지 않겠습니다.  

"참, 그리고 푸코가 동성연애자이기때문에 비주류라고 하신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 = 비주류'엔 왠지 성차별적인 느낌이 드는군요."

(10) 동성애자는 분명 성적 소수자입니다(설마 의견이 다르신 건 아니겠죠?). 그런 소수자를 주류라고 해야 맞는 건가요? 그리고 비주류란 말이 차별적입니까? 저 또한 비주류 인문학도인데(쿤데라님도 별로 다를 것 같지 않고), 그건 우리시대에서 인문학 자체가 비주류이기 때문이죠. 거기에 차별이 있는 건가요? 우리가 분개해야 합니까?  

"근대문학에 있어 가치평가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장에의 요구에 따라 졸작이 걸작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그 역이 되기도 하죠. 해서, 제 말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한다는 말입니다. 텍스트 내의 문학성 외, 텍스트 밖의 사회성 역시 말입니다."

(11) 이것도 아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텍스트 밖의 사회성은 우리가 어떻게 고려할 수 있는지요? 작품에 대한 이해가 '텍스트 내의 문학성'과 '텍스트 밖의 사회성'을 아우르는 거라면, 작품(만) 읽기는 절반의 읽기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쿤데라님은 작품에 대한 해설도, 이론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시고. 우리는 그냥 절반만 이해하는 걸로 충분한 건가요?

(12) "예, 쿤데라님은 고전작품 읽기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것에 부정적이시죠"라는 저의 단정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선, 작품 읽기죠."라고 하셨는데, '작품 읽기'가 '고전작품 읽기'보다 더 정확히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전 바흐친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 바흐친을 읽는 것이죠. 물론, 요즘엔 거꾸로지만. 전 문학을 하는데 있어 이론을 그닥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결코 이론혐오증은 아닙니다) 이론을 문학은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도이지, 문학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론의 과잉, 이건 20세기적 현상에 불과합니다."

(13) 이전에 쿤데라님은 바흐친을 높이 평가하신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닌가 보네요. 이론이 그닥 필요하지 않은데, 굳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 바흐친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요? 그리고 바흐친을 권할 필요가 있는지요? 더불어 문학이론을 문학 그 자체라고 우기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리고 도움을 주는 게 어딥니까?). 문학이론의 과잉은 물론 20세기적 현상이고, 그것은 대학에서의 문학교육이 학제화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론을 참조하거나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 읽기란 어떤 건가요? 쿤데라님은 그런 읽기를 실천하고 계신 건가요?

(14) 제가 "(저에게) 그런 책읽기는 모두 괴로운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유희였습니다. 모름지기 고전읽기는 자기만족과 교양을 위한 것이지 결코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거나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 데 대해서. "노동과 유희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에 기쁨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쾌락, 전 솔직히 그런 걸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독서?"라고 하셨는데, 모든 노동이 유희와 결합되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우리가 벌써 그런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니!) 흔히 유희란 사회적 생산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는 일을 말합니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을 노동이라고 할 경우에는 비유적인 뜻인 것이죠. 그리고 그건 생계를 위한 노동과는 정말 다른 겁니다.  



책읽기가 노동이 되는 경우는 그것이 강제되어 있어서 억지로 행해질 때입니다(돈을 받고 독서 리뷰를 판다든가 할 때). 그렇지 않은 책읽기를 노동이라고 부르는 건 우스개입니다. 그리고 유희를 노동이라 부르는 건 범주착오일뿐더러 노동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가령 고진의 <윤리21>을 밤새워 읽는 건 노동이 아니라 유희입니다(설마 돈받고 읽으신 건 아니겠죠?). 재미없거나 피곤하면 언제든지 덮을 수도 있는 걸 재미/흥미 때문에 다 읽고 나서 '노동'을 했다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아이들이 축구하느라고 뛰어다니다 보면 숨도 차고 힘이 드는데, 그걸 노동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독서?"에 의문을 표시하셨는데, 누가 억지로 제발 좀 읽어달라고 해서 읽는 것도 아닌데, 왜 괴로운 독서를 해야 합니까? 요컨대 (어려운 일 뒤에 따르는 기쁨을 위해)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고생(이런 걸 고통이라 할 순 없죠), 즉 사서 하는 고생을 가지고 노동 운운할 수는 없습니다.

쿤데라님의 생각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문학전공자라면 고전읽기는 일정부분 강요되어 한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물론, 엘리엇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문학이란 역사적인 예술이기 때문에 전통에 대한 이해없이는 한 치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목을 보면, 쿤데라님은 강요에 의해서, 등떠밀려서 고전읽기에 나서시는 듯하니까.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인과적 강제가 아닌 이상, 쿤데라님의 자발성(자유의 공간!)이 개입한 것이고, 따라서 고전읽기의 괴로움을 말씀하시는 건 엄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게 너무나도 괴로우시면 딴걸 하시면 됩니다. '즐거운 유희'를 '괴로운 노동화'하시느라 굳이 수고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15) 제가 너무 억지인가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기도 하니까. "고전 기하학에 대한 이해없이, 미적분을 한다는 것은 우수운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즐겁냐? 즐겁지 않냐? 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전공, 직업으로 선택했다면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될 듯합니다. 쿤데라님은 (고전)작품 읽기는 전공/직업으로 선택한 것이고, 그래서 그 읽기는 유희가 아니라 노동(유희와 분리 안되는?)입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습니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의 소외 문제가 그것입니다. 그 노동은 고역일뿐더러 소외된 것이기에 삶의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쿤데라님의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저 혼자만의 의문입니다...)

부기: 직장이 아닌 집에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한글에서 답변/질의서를 작성하다 보니 말이 촌충처럼 너무 질어졌네요. 이러다 '노동'이 되겠습니다. 오해는 풀리고, 의견 차이는 보다 분명해졌기를 바랍니다...  

10.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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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7-0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사는 것만큼은 노동의 댓가라고 생각할려고요...(이건 뭐 상관도 없고 의미도 없는 댓글.)

로쟈 2010-07-01 13:16   좋아요 0 | URL
책은 사실 도서관에서 읽어도 됩니다. 필요한 건 시간이죠. 책읽기가 노동이라면 '천국의 노동'이 아닐까 싶어요...

Mephistopheles 2010-07-01 14:04   좋아요 0 | URL
저는 일단 소유욕을 버려야겠습니다..

로쟈 2010-07-01 14:12   좋아요 0 | URL
저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루체오페르 2010-07-01 18:06   좋아요 0 | URL
무소유의 법정스님께서도 책과 茶에 대한 소유를 마지막에야 버리셨다고 하더군요.

식은카푸치노 2010-07-0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능한 부하직원에게 시키고 싶은 일이 노동 아닐까요. ^^

로쟈 2010-07-02 00:23   좋아요 0 | URL
한데, 따로 노동하지 않으면 거꾸로 유희가 노동화될 거 같아요.^^

koreanist 2010-07-0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때 그 때 달라요. 일도 때론 유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독서도 자의든 타의든 '강제성'이나 '강박감'이 가미되면 어느 정도 노동이 될 수도...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책은 유희적 노동이라 칭하고 싶어요. 책 읽는 속도가 느려서 속상한 계약직딩...ㅋㅋㅋ

로쟈 2010-07-02 16:59   좋아요 0 | URL
네, 그때그때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다만 저는 유희의 편을 들고 싶습니다.^^

푸른바다 2010-07-0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홍색 박스 안의 문장이 쿤데라 님의 것이고, 번호가 매겨진 것들이 로쟈님의 것인 건가요? 그러니까 이러한 논쟁들이 <비평고원 10>에 들어가 있는 거죠?^^

로쟈 2010-07-04 16:36   좋아요 0 | URL
네, 대략 그렇습니다. 물론 이 글이 포함돼 있는 건 아니고요. 어제 책을 받아 보니 '논쟁의 고원' 장이 제일 두툼하더군요...

푸른바다 2010-07-04 16:59   좋아요 0 | URL
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빨리 구매를 해야 겠네요. 비평고원에 가입했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는데 저도 가입을 했었더군요.^^ 이 이책을 읽게 되면 10년 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됩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한국 사회의 소중한 지적 자산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쟈 2010-07-04 17:23   좋아요 0 | URL
구입하시면 아마 약간 놀라실 겁니다. 부피와 무게 때문에.^^;

난다 2011-03-2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이제야 읽는데...이 글을 썼을 때와 좀 달라진 생각이 뭔지 몹시 궁금하군요... 언제 시간이 되면 말씀해 주시면 감사.^^

coilrun 2020-08-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이 분명합니다. 심적 땀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비평고원의 10년

<비평고원 10>(도서출판b, 2010)이 출간된 김에 비평고원에서의 활동 초창기에 로쟈가 어떤 글을 올려놓았었나 궁금해서 찾아봤다("나는 네가 10년 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주로 댓글이 많았는데, 마침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작가들'이란 테마로 주인장(쿤데라님)과 논쟁을 벌인 게 있어서 약간 정리해 옮겨놓는다. 댓글답지 않게 길게 쓴 대목도 있다. '마침'이라고 적은 건 안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 강의 자료를 만들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비평고원 10>에는 '논쟁의 고원' 장도 포함돼 있는데, 어떤 논쟁들이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대개는 아래와 같은 분위기로 진행됐을 것 같다. 참고로  카페 주인장의 닉네임은 이후에 '소조'로 바뀌었다. 가라타니 고진 전담 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영일 씨가 그의 본명이다. 그때는 비평가나 번역가로 데뷔하기 이전이었다. 물론 나도 '무명의 로쟈'였고(카페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장이긴 했다).   

    `

쿤데라가 싫어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쿤데라의 작품 중에 <자크와 주인나리>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희곡으로 각색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답니다. 한데, 그는 <백치>를 다시 읽고 나서 진절이를 쳤답니다. 장황하고, 과장됨에 대해. 해서 쿤데라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평소 자신이 즐겨 읽었던 디드로의 소설을 희곡화 시킨 것이랍니다.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는 쿤데라가 하는 말 그대로 믿기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안닮은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매우 닮았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긴 어렵죠.(쿤데라님)

00. 11. 01.
쿤데라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란 건 약간 어폐가 있거나 예의 과장(!)인 것 같습니다. <백치>의 장광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하더라도, 제가 읽은 글에서 그는 <운명론자 자크>와 <악령>에 대해서 찬탄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참고로 한 도스토예프스키 학자는 그의 소설들을 18세기의 철학적 콩트들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테르나 디드로의 철학 소설들 말이지요. 좀 부피가 다르긴 하지만. 쿤데라의 문학론은 대개 <소설의 기술>(혹은 <소설미학>)과 <배반당한 유언>(<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참조할 수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자료가 있으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00. 11. 02. 
아마 <소설의 기술>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쿤데라의 모든 책을 갖고 있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여기저기 살림을 나누는 바람에 지금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찾아보기로 하죠.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나보코프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건 아주 유명합니다. 3류 취급을 했죠. 하지만, 그가 높이 평가한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주제와 모티브들을 소설화하기도 했구요. 제가 찾아보니까, "나보코프와 톨스토이"를 다룬 논문은 한편도 없는데 반해서, "나보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논문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영향 관계, 혹은 영향에의 불안 관계가 있는 것이죠. 콘래드에 대해서 제가 잘 모릅니다. 다만 그의 <밀정>(<비밀요원>)이 다루고 있는 소재가 <악령>의 그것과 닮았다는 것 정도.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차이점은 유머 대 숭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유머'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쿤데라의 유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머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쿤데라 작품엔 절대적인 가치(구원)이나 종착역이 존재하지 않고 웃음은 바로 그 작품 전체구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 전체가 농담이 되는 것이죠. 도덕에 대한 조롱(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처럼). 한데,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엔 웃어서는 안되는 종착역(구원/도덕)이 전제된 상태로 현실에 역투사되고 있습니다.그의 작품에서 유머는 진지함을 보충해주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쿤데라와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작가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조셉 콘래드가 있습니다.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했던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지나치게 숭고화된 형태의 러시아정신이 나타나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자주 헝가리인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셉 콘래드는 원래 헝가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쿤데라는 러시아의 체코 침공을 몸소 겪은 사람이고 나보코프는 과격한 러시아 혁명을 피해 서구로 망명한 작가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마도 이 같은 사회적 경험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바로 이런 과장되고 숭고한척 위장하고 있는 러시아 정신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 평가가 낯선 것은 아니지만, 또 그런 만큼 관습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바흐친이 밝혀준 바대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바흐친은 소설이란 장르 자체의 성질로 설명합니다.(그의 설명에 논리적 정합성이 좀 떨어지는 면은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웃어서는 안되는 종착역이 있다는 건 그의 사상의 경우에 국한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미완성작이고, 거기엔 별개의 사상과 감정들이 극단의 스펙트럼까지 공존하며 이질적인 웃음과 비장함들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작가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에서 결코 기독교적 진리만을 강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그 문제를 좀더 복잡하게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죠. <대심문관>의 논리와 조시마 장로의 설교만큼 이질적인 것도 드물겠지만, 작가가 어느 한쪽편에 치우져 있다고 보아지진 않습니다. 그 두 가지 논리, 두 가지 세계 모두 도스토예프스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서열이 부여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읽는 건 도스토예프스키를 너무 편하게, 관습적으로 읽는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덧붙여. 쿤데라의 '웃음'과 가장 유사한 철학적 개념이 저는 로티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쿤데라의 소설들이 철학에 접근할 때, 거꾸로 로티의 철학서들은 비철학으로 이탈해 나갑니다. 이들의 근접조우에 대한 글을 저는 구상중에 있습니다. 로티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현재 그는 인문학 교수죠.) 주요 철학자에서 빠질 수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 그는 중요한 저자입니다. 쿤데라와도 궁합이 잘 맞을 수 있는(!)...   

1.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은 구분가능한가? 님은 제가 말한 쿤데라와 유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머의 차이점에 대해 그건 관습적인 평가이고 사상적인 면에서만 타당한 이야기이다라고 말습하셨습니다. 한데,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머는 문학적이고 진지함은 사상적이란 말입니까? 만약 사상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이 구분가능하다면, 쿤데라의 사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 콘래드, 나보코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관계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푸시킨을 가장 높이 평가했는데, 푸시킨과 나보코보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푸시킨의 주장르는 시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들 간의 영향관계가 없었다고는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소재나 창작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해석의 문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속편은 알료샤가 신에 대해 회의하고 방랑하다 죽는 것으로 구상되었다고 말들합니다. 하지만, 쓰여지지 않은 작품까지 생각해서 쓰여진 작품을 판단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시마 장로와 <대심관>은 너무나 극과 극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아주 상반된 세계가 훌륭하게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종교적 설교집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 그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수 밖에 없지요. 이것은 곧 그 작품이 전체가 향하는 방향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경우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이 아주 상반된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여 대결합니다. 나프타와 세템브리니가 바로 그들이죠. 한데, 이 작품에서 중심은 세템브리니에 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죠. 그렇다고 종국적으로 나프타가 세템브리니에 통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같이 이반의 사상과 조시마 장로의 사상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손을 들고 있는 쪽은 조시마 장로쪽입니다. 물론, 이때 이반의 사상은 지양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왜냐면 이반의 사상이 존재함으로 이 이야기가 소설일 수 있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이반의 사상으로 인해 조시마 장로의 사상을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죠.  

4. 쿤데라와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로티는 책 머리에 쿤데라의 글을 인용할 정도니 언뜻 보아도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데, 쿤데라가 철학으로 가는 방면, 로티는 비철학으로 간다는 말에는 약간의 언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쿤데라와 관계가 있는 '철학'이란 오늘날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쿤데라가 말하는 철학에 해당되는 철학을 한 사람이란 제가 생각하기론 플라톤 외에는 없습니다. 개념에 대한 의존이 부재하던 시기의 철학 말입니다. 쿤데라가 말하는 '실존수학'이란 용어는 바로 이런 철학을 말하고 있죠. 이에 반해 로티는 기존 20세기 사상가들의 유행인 문학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미국식으로 약간 변주되어 있지만요.  

00. 11. 03.
쿤데라님과 논쟁 아닌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저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찾아 읽었던 팬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팬이기도 합니다. 한때 제가 써보고 싶었던 글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유머'였는데, 쿤데라님이 그의 유머에 대해서 너무 폄하하고 그의 사상(바흐친을 빌면, 최종적인 말)에 대해서 너무 강조하고 계신 것 같아 반론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보코프도 지적한 것이지만,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벌이는 소극들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이지요.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은 구분가능한가? 문학작품에 나타난 사상이란 작품에서 유추하거나 추출해낼 수 있는 어떤 철학적, 사상적 관념들 혹은 입장을 말하는 것이겠죠. 정신과 육체의 고약한 이분법이 여기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흔히 도스토예프스키를 말할 때 심오한 사상을 가진 작가라느니 어떠니 하는 말을 하는데, 제가 말한 사상이란 건 그렇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이 아닌 저널리즘적인 글이나 작가일기 등에서 표명하고 있는 정치관이나 세계관을 말하는 거죠. 그런 글들에서 엿보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은 지극히 국수적(러시아 민족주의)이고 광신도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소설들에서 똑같은 걸 읽어낼 수 있느냐 하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를 구분지어 말한 것이죠.  

그런 식의 자기분열(?)이 설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인지요? 아니면 당위적으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인지요? 쿤데라는 어느 쪽이냐 하면, 그는 순전히 작가입니다. 소설의 가치와 위엄을 믿는 이야기꾼이죠. 다만 철학적 소설(소설로 하는 철학)의 전통에 서 있을 뿐. 그래서 그가 소설론에서 피력하고 있듯이 소설에 대한 관념,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다만 그때의 사상이란 건 소설이라는 육체 속에 녹아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콘래드, 나보코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관계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푸시킨을 가장 높이 평가했는데, 푸시킨과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푸시킨은 나보코프뿐만 아니라 모든 러시아 작가들이 경배하는 작가입니다(혁명기 미래파만 빼고).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니까. 나보코프는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영어로 번역하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주석서를 낸 바 있습니다. 그의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어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죠. 푸시킨의 영향과 관련하여 나보코프의 마지막 영어 소설인 <재능>을 들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 <롤리타>의 중층적인 서술기법 또한 <예브게니 오네긴>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재나 창작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소재나 테마를 다른 방식으로 비틀거나 패러디 하는 게 영향관계와 무관할 수 있을까요? 패러디는 패러디되는 것에 대한 희화화나 오마주 양방향에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나보코프의 의도는 전자에 가까워 보이지만, 제 생각에 거기엔 모종의 경쟁의식도 끼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대가가 아니라면 맞상대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하지만,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 그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수 밖에 없지요. 이것은 곧 그 작품이 전체가 향하는 방향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경우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이 아주 상반된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여 대결합니다. 나프타와 세템브리니가 바로 그들이죠. 한데, 이 작품에서 중심은 세템브리니에 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죠. 그렇다고 종국적으로 나프타가 세템브리니에 통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다성성을 주장하는 바흐친을 따르자면, 반드시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물론 바흐친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작가의 일방적인 독백을 거부한다는 것이죠. 그런 독백을 드러낸 작품들 가운데 읽을 만한 작품은 몇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이 이반의 사상과 조시마 장로의 사상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손을 들고 있는 쪽은 조시마 장로쪽입니다." 물론 그것이 추정해 볼 수 있는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그건 작품-텍스트 바깥의 얘기입니다. 의도의 오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반해 로티는 기존 20세기 사상가들의 유행인 문학주의과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미국식으로 약간 변주되어 있지만요."라는 건, 로티를 싫어하는 철학자들이 하는 얘기지만, 저로선 동의하기 힘듭니다. '문학주의'가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지만(그런 의미에선 데리다도 문학주의자입니다), 로티는 대단히 엄격한 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죠. 제가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와 로티를 좋아하는 건 그들이 가진 친연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친연성에 대해 쿤데라님은 동의하시지 않는 걸로 결론내릴 수 있을까요?...   

00. 11. 03. 
제가 자꾸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쿤데라님의 말대로, 서로간의 취향, 혹은 관점의 차이가 있는 거라면, 저마다 각양각색인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유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유머가 주가 아니라는 거죠. 다시말해, 라블레와 쿤데라의 친연성이 라블레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친연성보다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상대적인 것이죠. 라블레와 쿤데라의 작품에선 '웃음'이 주된 거니까요."  

이때의 웃음은 좀 확장된 의미의 웃음이겠죠? 순전히 웃기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주장하시는 건 아닐테니까. 쿤데라는 '좋은 기분'이란 말을 쓴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분, 혹은 유머를 불러 일으키는 것, 그것이 그의 문학의 미덕이죠. 하지만, 그 이상의 주장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요? 라블레적 웃음의 중세 카니발적 세계관과 연관되는 것처럼, 쿤데라의 웃음, 혹은 유머 또한 그가 지향하는 소설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고, 그러한 세계관을 그의 흔히 쓰는 말로, 그의 사상이라고 부르면 안되는 것인지?  

"다시 말해, 도스토예프스키와 쿤데라의 친연성은 도스토예프스키와 까뮈의 친연성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상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은 분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그의 사상적인 면이 그 같은 문학적 형식을 만들었다고 그 같은 형식으로만 그같은 사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상과 문학의 분리불가능은 원론적으로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사상이 반드시 그의 문학작품 '안'에만 있는 건 아니죠. 소위 순수문학을 주장했던 우파 문인들의 경우, 문학작품은 어떠한 정치적 주의주장도 포함해서는 안된다는 하나의 '정치적 주장'이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작품의 정치적 순수성, 혹은 순수주의는 작품 '바깥'(맥락)과의 관계 속에서만 읽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쿤데라님이 말씀하신 거라면, 제가 오해한 것이구요.  

"구원에 대한 전제(불안하긴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장광설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쿤데라님의 의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소위 요즘의 연구자들도, 제가 아는 한,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쿤데라가 말하는 '철학'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죠. 문학과 철학이 아직 분화되지 전 철학, 다시말해 소설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쿤데라는 이런 표현방법의 하나로 블로흐가 먼저 시도하고 무질이 발전시킨 에세이라는 장르를 소설 속에 도입하기도 하고, 플라톤의 <향연>을 패러디하기도 합니다. 이때, 블로흐나 무질이 행했던 철학이나 사상과 플라톤 저작 속에 나타나는 철학은 오늘날 의미의 철학과는 분명 다르죠."  

사실, 이 부분은 제가 더 검토해 봐야 하는 부분입니다. '소설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철학'의 대표적인 예가 '향연'인가요? 고대 그리스의 메니푸스 풍자 같은 걸 예로 들 수 있을까요? 그것이 철학과 다르다는 것은 소위 (철학적) 개념에 저항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작가들 간의 영향 관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자칫 무용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조이스와 울프,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비교가능합니다. 한데, 마르케스와 보르헤스 같은 경우는 조금 망설여집니다. 물론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대적인 문제이니까요. 즉, 윤대녕과 이광수는 서로 비교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죠."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건수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모든 비교문학적 가능성에 의문을 갖고 계신 건지? 문학과 음악, 미술 등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어불성설인가요?  

"따라서 모든 작품들과 비교 가능하죠. 예를들어 발자크와 쿤데라의 비교." 물론입니다. 그것이 읽을 만한 것을 산출하기만 한다면. "전 텍스트주의가 아닙니다. 텍스트 밖에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죠. 해서 작가연구가 부정하는 것엔 찬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작가 연구가 주가 되면 안되겠죠. 소설 텍스트 연구 80%, 소설 외 텍스트 및 작가 연구 20% 전 뭐 이 정도로 균형을 맞추죠."  

그 비율이 일률적인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감이신가요? "이에 반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그는 자신의 대사회적 사상과 예술이 일치한다고 생각했죠. 전 일단 작가의 입장을 존중하는 편입니다." 물론 존중해야겠지만, 그때의 작가는 독자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엄격한 훈련은 소설쓰기에도 존재합니다. 훈련없이 소설쓰기는 힘들죠. 한데, 소설쓰기 훈련과 철학 훈련의 차이점은 전자가 순전히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만, 후자는 철학과하는 제도화되어 있는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데리다도 문학주의자죠. 제가 별루 좋아하지 않는. 순전히 저 개인적 취향입니다."  

문창과가 철학과만큼 많은 건 아니지만, 소설 쓰기 역시 공식/비공식적 교육의 장 혹은 제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전 쿤데라-카프카-하이데거 정도 되겠네요." 그렇다고, 제가 쿤데라-도스토예프스키-데리다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들만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다만 하이데거를 좋아하시면서 대표적인 하이데거리언인 데리다를 싫어하는 건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후기 하이데거라면, 쿤데라님의 표현대로 대표적인 문학주의자인데(그래서 소위 많은 철학자들이 후기 하이데거를 싫어했죠.)...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도 대표적인 문학주의자의 주장 아닌가요? "앞으론 구체적으로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하면 좋겠네요. 우선 이번 달 작품으로 선정된 <농담>과 <카라마조프>를 중심으로....." 예, 저도 적극적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다만, 직장인인 관계로 충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렵군요. 문학주의자도 생계 유지는 해야 하니까...  

로쟈님과의 논쟁에 있어 제가 약간 불리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제 자신의 말에 수긍이 잘 가지 않거든요. 한데, 이것만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작가다. 한데, 우리 나라에서 그는 너무 과대평가 받고 있다. 도스토예스키에 대한 과대 평가는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국문학에선 그것 자체가 하나의 논문거리가 되죠. 김윤식의 글 중에 이에 대한 글들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대결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죠. 예를 들어 조연현, 김동리, 서정주 같은 사람들. 일본에선 고바야시 히데오, 하니야 유타카 등등.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하면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저개발의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거죠.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쿤데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쿤데라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라블레, 블로흐와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한데, 명백한 것은 한국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선 열심히 읽으려고 하지만, 라블레나 블로흐에 대해선 그런 작가가 있는지 어떤 작품을 썼는지도 잘 모른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전 균형, 균형을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지적 균형.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선 라블레, 블로흐에 대한 이해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죠.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쿤데라에 무게중심을 둔다면요.

00. 11. 06. 
쿤데라님의 메일 잘 받아 보았습니다. 마감된(?) 논쟁의 작은 차이에 대해서, 약간의 보충을 하고자 합니다. 사실, 쿤데라 문학에 대한 애착은 남못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 카페를 둘러보면서 긴장(!)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죠. 아무려나 좋은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호가 확산되는 건 말 그대로 좋은 일이고, 그런 일에 저보다 힘써 주시는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쿤데라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그리고 제가 기억에 의존했던 대목)은, <소설의 기술>(책세상), 94-95쪽입니다. 한 대담에서 쿤데라는 예의 자신의 소설론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전제는 "철학자가 생각하는 방식과 소설가가 생각하는 방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에 대해 질문자가 "그러나 <작가일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완전히 직설적이죠."라고 말하자, 쿤데라 왈:

"그러나 그의 생각의 위대함은 거기 있는 게 아니죠. 그가 위대한 사상가인 것은 다만 소설가로서의 그를 통해서입니다[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 옮긴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그의 인물들을 통해 범상치 않을 정도로 풍부하고 새로운 지적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인물들 속에 투영된 그의 생각을 찾아보는 것을 좋아하지요. 예를 들면 샤토프 같은 인물 말이예요.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온갖 주의를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생각을 샤토프에게 투영시키고 있기는 해도 그 생각은 금방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도, 일단 소설의 몸뚱아리에 들어오게 되면 성찰의 본질이 달라지게 된다는 규칙, 교조적인 생각이 가설적인 생각이 바뀌게 된다는 규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 철학자들이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놓치게 되는 게 바로 이거죠..."

쿤데라님과의 논쟁에서 제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작가일기>의 저자 혹은 문학텍스트 바깥의 저자)와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나눈 것은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바흐친과 아주 유사하게, 쿤데라는 소설의 규칙을 이야기 합니다. 어떤 교조적인 생각도 소설의 옷을 입게 되면, 가설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소설이란 장르의 힘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힘이죠(그는 철학자가 아닌 겁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 대목에서, 저는 "쿤데라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논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죠...  

10.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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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30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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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1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