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마감일이던 월요일에 성적 처리를 하느라 저녁이 다 돼서야 바삐 작성해서 보낸 원고였다.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거리로 골랐는데, 지난주에 강의에서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우연이긴 하지만 첫번째 연재에서 '말인'(최후의 인간)을 다룬지라 이번에는 '최초의 인간'을 떠올린 것이 우연만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겨레(10. 07. 03)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마주하게 되면 꼭 생각나는 작가는 알베르 카뮈다. 작품에서 접했을 뿐이지만 그가 찬양한 알제리의 태양과 바다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방인>의 작가’라는 게 카뮈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소개 문구지만, 그는 ‘<최초의 인간>의 작가’로 기억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겨진 유작이다. 아마도 완성되었다면 이 소설은 어머니에게 바쳐졌을 것이다.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라는 헌사가 초고에는 남아 있다. 남의 집 ‘하녀’ 일을 했던 그의 어머니는 귀가 어두운데다가 문맹이었다. 노벨상 수상 작가의 이 자전적 소설은 그 어머니에 대한 예찬이자 ‘기이한 사랑’의 고백으로 읽힌다.   

카뮈는 20대 초반에 발표한 최초의 산문집 <안과 겉>의 재판 서문을 20여년 만에 붙이면서 이런 바람을 적었다. “한 어머니의 저 탄복할 만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 어울릴 수 있는 정의, 혹은 사랑을 찾으려는 한 사나이의 노력”을 다시 한 번 더 그려보겠다고. <최초의 인간>은 바로 그런 노력의 소산이기에, 이 작품에서도 가장 궁금한 대목은 ‘어머니의 침묵’ 장면이다.

일찍이 남편을 전쟁터에서 여읜 카뮈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자기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과 같이 살았다. 집안에서는 카뮈의 외할머니가 군주처럼 군림했고 모든 일을 결정했다. 아이들의 훈육도 할머니의 몫이어서 잘못을 할 때마다 회초리질을 했는데, 너무 아프게 때릴 때면 어머니는 말리지는 못한 채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라고만 말하는 정도였다.

<안과 겉>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어머니에겐 의자에 앉아 멍하니 마룻바닥을 들여다보거나 해질 무렵 발코니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럴 때 어린 카뮈가 집에 돌아와서는 그런 모습을 보고 슬픔에 잠겼다. 그의 어머니는 한 번도 그를 쓰다듬어준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내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아들 또한 우두커니 서서 어머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듯 침묵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카뮈 문학의 모태적 풍경이자 원초적 이미지이다. 그것이 모태적이고 원초적이라는 것은 <최초의 인간>에서 늙은 어머니가 수십년 동안 고된 노동을 해왔음에도, 주인공 코르므리가 어린 시절 뚫어지게 바라보며 탄복해 마지않았던 그 젊은 여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암시된다. 카뮈의 문학 전체는 어머니의 침묵과 ‘기이한 무관심’이라는 이 ‘수수께끼’와의 대결이 아니었을까.   

<최초의 인간>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 또한 그 ‘수수께끼 풀이’의 한 장면이다. 어린 코르므리가 부른 노래를 이웃 아주머니가 칭찬하자 그의 어머니는 “그래요 좋았어요. 쟤는 똑똑해요”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뜨거운 시선을 느끼면서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 나를 사랑한다니까.”  

그는 자신이 어머니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으며, 어머니가 사랑해주기를 전심전력으로 열망해왔다는 걸 깨닫는다. 동시에 항상 그 사랑의 가능성을 의심해왔다는 것도. 아들 카뮈의 운명은 바로 그 어머니의 침묵과 사랑 사이에서 진동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조금 일반화하자면, 카프카 문학의 비밀이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놓여 있듯이 카뮈 문학의 경우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밑바탕으로 한다. 작품에서 ‘최초의 인간’은 ‘아버지 없이 자란 인간’을 가리키지만, 그 ‘최초의 인간’에게도 어머니는 마치 바위처럼 존재했다.  

10. 07. 02.  

P.S. 한편, 아버지 없이 자란 '최초의 인간' 카뮈에게 아버지는 사형(단두대형) 집행을 보러 갔다 와서 구토를 하며 앓아누웠다는 '이야기' 속의 아버지이다. 이 이야기는 <이방인>에서도 뫼르소의 아버지 이야기로 등장하며 <단두대에 대한 성찰>에서도 서두를 장식한다. 사형제도에 대한 카뮈의 끈덕진 성찰과 문제제기는 이러한 체험에 근거한다.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다시 읽으며 새삼 이 문제에 주목하게 됐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기회를 만들어 자세하게 분석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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