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엔 다 아는 바와 같이 남아공 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한국이 그리스에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가 생각보다 강한 건지, 그리스가 생각보다 약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 감독은 첫 골을 그리스가 넣었더라면 경기의 양상은 달라졌을 거라고 말했다. 지당한 말이다. 축구공은 둥그니까. 그런 불확실성을 다시금 상기시켜준 건 영국과 미국의 경기. 새벽 경기라 직접 보진 못하고 아침에 스코어만 확인했는데, 이 또한 알다시피 1:1 무승부라는 의외의 결과였다. 물론 영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거꾸로일 가능성보다는 몇 배 높았지만 결과는 무승부였고, 가장 결정적인 건 어이없는 동점골을 내준 영국 골키퍼의 실수였다. 덕분에 좀더 '유명해진' 로버트 그린은 경기후 인터뷰에서 "이것이 골키퍼의 인생"이라는 매우 담담하면서도 철학적인 소감을 밝혔다. “항상 안정감을 유지하고 어려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골키퍼의 인생은 그런 것”이라고. 

 

당장은 그가 다음 경기에도 기용될지 미지수인데, 기사를 보다 보니 문득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마음산책, 2010)에 대한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칼럼이 생각났다. '그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가 지난주 한겨레21의 칼럼 제목이었다(http://h21.hani.co.kr/arti/COLUMN/130/27484.html). 간단하게 소설 일반론을 먼저 기술하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범박한 일반론이지만 다시 정리해볼 생각을 한 것은 최근에 출간된 제임스 설터의 소설집 <어젯밤>(마음산책·2010) 때문이다. 이 인상적인 책은 사건, 해석, 진실, 단절로 이어지는 저 과정을 놀랍도록 효율적인 방식으로, 짧고 깊게, 단숨에 성취해버린다. 그림자에게 소매치기를 당한 기분이랄까. 1925년생이니 80살이 되던 해에 출간한 책이다. 소설은 통찰력의 산물이고 통찰력은 시간의 선물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어쩐 일인지 우리에게는 이 책으로 처음 소개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소설을 찾아 읽는 독자들에게 제임스 설터가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라는 사실은 일종의 신념과도 같다”(리처드 포드)는 평을 받는 대가라고 하니, 이제야 읽게 된 게 좀 억울할 지경이다.

열 개의 단편소설 중 ‘포기’와 ‘어젯밤’이 단연 압권이다. ‘포기’에서 잭은 그의 아내와 아이에게 좋은 남편이자 아빠처럼 보인다. 잭의 친구인 시인 데스가 마치 가족의 일원인 듯이 함께 살고 있는데, 평범한 조합은 아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품을 읽게 된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단란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날 밤, 아내가 잭에게 데스에 관해 무언가를 말한다. 다음날 아침,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젯밤’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어젯밤 월터는 죽어가는 아내의 요구로 그녀의 안락사를 도왔다. 그 와중에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월터의 삶은 무너진다. 두 작품 모두에서 ‘어젯밤’은 사건의 날이다. “그게 무엇이었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건 사라지고 없었다.”(199쪽)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란 표현은 '옮긴이의 말에 인용돼 있는데, 사실 이토록 '대단한' 작가의 이름이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 소개된다는 점이 좀 놀랍다. 하성란 소설가도 "제임스 설터는 너무 늦게 우리 독자에게 왔다. 왜 존 치버나 레이먼드 카버에 가려져 있었는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의 소설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라고 적었을 정도다. 

책 말미에는 '이 책에 쏟아진 찬사'가 몇 페이지에 걸쳐 나열돼 있는데, "표제작 '어젯밤'은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견줄 만한 잊을 수 없는 걸작이며, 이 시대 문단 최고의 단편으로 자리한다."는 평이 눈길을 끈다. 수전 손택도 "제임스 설터는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아는 독자에게 특히 어울리는 작가다"라며 거들었다. 뭐 이 정도면 거의 '협박' 수준이다. 작품을 읽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역자가 '옮긴이의 말'을 마무리하는 소감은 가히 정점이라 할 만하다.  

"설터의 책을 번역하는 건 호화 저택에서 몸종을 거느리고 사는 기분이다. 아니, 그보단 바닷가에 지은, 커다란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사치스럽게 산 기분이다. 이제 그 집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해서 '옮긴이의 말' 타이틀이 '호화로운 집에 살다'이다. 대체 어떤 '집'인가 궁금하여 현관 계단까지 갔다가, 책상에 잔뜩 쌓여 있는 책과 일거리를 생각하여 오늘은 이렇게 변죽만 울리기로 했다. 아마도 내일쯤 좌석버스 안에서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첫 작품도 읽기 전이지만 미리부터 그의 대표작이라는 <가벼운 나날들>이 번역되길 기대해본다.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조지프 폭스가 자신이 편집한 책 중에 다음 세대까지 남을 책을 들어달라는 질문에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와 함께 꼽았다는 책이다. 아,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너무나 많도다!..  

10. 06. 13. 

P.S.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란 표현에서 인용한 제목이 잘못 번역된 문장에 근거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으므로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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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4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10-06-14 02:24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영어.가 강조될수록 번역문을 읽을때의 찜찜함도 느는 것 같습니다. 평을 보기 전에 책을 읽을 때는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위의 평처럼 대단한 느낌은 받지 못했거든요. 카버의 번역본과 원서가 사뭇 다른 느낌이었듯이, 제임스 설터도 그런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임스 설터의 책으로는 국내에 번역된 부인과 함께 쓴 음식 이야기같은 약간은 싱거운(?) 책도 있어요. 마음산책의 인상적인 표지 이야기, 제가 포스팅 했던 것 링크 남겨 봅니다.

http://blog.aladdin.co.kr/misshide/3752917


로쟈 2010-06-14 19:43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영어'라기보다는 '간결한 영어' 같습니다. 카버나 치버 계통의...

Kitty 2010-06-14 03:54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영어...라면 번역가의 두통이 먼저 떠오르는...ㅠㅠ
영어가 수려하고 멋질수록 번역하기는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소설 번역하시는 분들이 더욱 대단해보이기도 하고요.

로쟈 2010-06-14 19:42   좋아요 0 | URL
적재적소에 잘 들어맞는 언어를 구사하는 게 사실 작가의 역량이죠...

나비 2010-06-14 22:59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영어 배우는데 나름 열심인 사람입니다. 로쟈 님의 글(http://blog.aladdin.co.kr/mramor/3818074)에 달린 댓글들을 제 블로그(http://blog.jinbo.net/hizino/?pid=37)에 올려도 되는지요?
저작권을 명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로쟈 2010-06-14 23:01   좋아요 0 | URL
네, 무방합니다.

나비 2010-06-14 23: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0-06-15 05:0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로쟈님의 글은 난해한 개념의 분류와 번역의 문제를 명료하게 해주셔서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제게 매우 유익한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실은 그간 곁눈질로 선생님께서 후학들에게 퍼감을 허락하시길래 제 맘대로 선생님의 글을 퍼갔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요사이 몇몇 주제들을 구체화하려다 보니 글을 퍼감을 선생님께 정식으로 허락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서번역의 인용이나 용어 상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꼭 출처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사후 재가를 구하는 것이 되어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말씀을 드리는 것이 나을 것같아 용기를 내어 댓글을 올립니다. 허락해주시길 바라며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로쟈 2010-06-15 10:30   좋아요 0 | URL
출처만 밝히시면 펌은 다 무방합니다..

비로그인 2010-06-15 11: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로쟈 2010-06-21 08:23   좋아요 0 | URL
^^

sophie 2010-06-20 23:48   좋아요 0 | URL
로쟈님 어젯밤을 읽어보았습니다. 말씀대로 정말 간결한 문장으로 긴박감을 느끼는 소설의 전개였지요. 근데 다 읽고나서는 '어 모야, 아 짜증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이런 원시적인 반응이라니... 로쟈님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한 편만 읽고 모라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포기'를 읽을 생각이 들지 어떨지....)

로쟈 2010-06-21 08:23   좋아요 0 | URL
ㅎㅎ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는 종류가 다른 소설이던데요.^^
 

다시 출간된 책, 곧 '오래된 새책'이 너무 많아져셔 이젠 특별한 '뉴스'가 되지 않는다. 지난주에도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누미노스, 2010)과 우나무노의 <삶의 비극적 감정>(누미노스, 2010)이 다시 출간됐다(<삶의 비극적 감정>에 대한 알라딘의 서지정보는 제목과 출판년도 모두 오기돼 있다). 우나무노의 책은 예전에 <생의 비극적 의미>란 제목으로 출간됐었다. 여담을 적자면, '스페인'이란 이름은 요즘 교과서에서 모두 사라졌다. '에스파냐'라고 한다. 그래도 축구할 때는 여전히 '스페인'. 외교부에서도 '스페인'이라고 표기하는 걸로 안다. 나는 이런 '이중표기'가 부조리하게 여겨진다. 

    

그래도 절판된 책이 '오래된 새책'으로 나올 땐 반갑다.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살림Biz, 2010)도 그런 경우다. 예전에 <No Logo>(랜덤하우스코리아, 2002)라고 원저명 그대로 출간됐으나 절판됐던 책이다. 이번에 10주년 기념판을 다시 옮겼다. 내용은 달라졌을 성싶지 않지만 저자의 새로운 서문이 붙었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6. 12) 다국적기업들의 추악한 이면 ‘노동착취’

스티브 잡스는 예의 편해 보이는, 그러나 잘 연출된 캐주얼 의상을 입고 단상에 올랐다. 손에는 날씬하고 작은 아이폰4G를 들었다. 한국의 얼리어답터들은 미국에서 열린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을 새벽잠 설쳐가며 인터넷으로 지켜봤다. 아이폰4G가 한국에서 출시될 날만을 기다리는 동시, 손은 이미 신용카드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다.

‘애플’은 미국의 가전제품 회사 이름이 아니다. 젊고 세련됐으며, 진취적이며 개방적인 시민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종교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는 베이비갭을 입고 맥클라렌 유모차를 탄다. 청소년들은 코카콜라를 마시며 닌텐도를 한다. 직장인은 스타벅스 커피를 든 채 아이폰으로 전화한다. 브랜드가 침입할 수 없는 ‘성역’이었던 대학에는 ‘삼성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섰다. 브랜드가 없으면 삶도 없다. 

캐나다 출신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원제 No Logo>은 미국 시애틀에서 세계무역기구(WTO)에 반대하는 반세계화 시위가 벌어진 직후인 2000년 1월 처음 출간됐다. 10년 사이 세상의 모습은 크게 변했지만, 브랜드의 영향력만큼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사이 <쇼크 독트린>으로 다시 한 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클라인은 10주년 맞이 서문을 붙여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을 다시 출간했다.

기업은 무엇을 만들까. ‘상품’이라고 답한다면 이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제조업체들 대부분이 더 이상 제품을 생산하고 광고하지 않는다. 대신 제품을 구매하고 거기에 상표를 붙인다.” 

그렇다면 상품은 누가 만들까. 제국주의자들이 제3세계 식민지를 착취하던 시대가 지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클라인은 미국과 유럽의 기업 대신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직접 찾았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오지의 경계 삼엄한 공장, 10대 소녀들은 옹기종기 모여 평생 직접 사용하지도 못할 제품을 만든다. 자카르타에서 만난 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옷이 오버코트라고 불리는 줄도 몰랐다. 더운 날씨의 이곳 사람들은 오버코트를 입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어떤 고용주들은 하루에 두 번씩 15분간 주어지는 휴식시간 외에는 화장실에도 못 가게 한다. 근무 중 잡담도 안되고, 노조는 언감생심이다. 최근에도 아이폰 하청업체인 중국의 공장에서 투신 자살이 잇달아 일어났다. 물론 잡스는 “우리는 노동착취업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클라인은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도 냉소를 보낸다. “하나의 브랜드로서 오바마 백악관은 스타벅스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세련되고, 진취적이고, 접근이 용이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느낄 만큼만 호화롭다.” 오바마에게 속은 사람들은 그가 부시 행정부의 핵심 국제정책 중 많은 부분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사실을 잊었다.  

 

>>광고판 해방 전선(Billboard Liberation Front)의 광고파괴자들은 애플 컴퓨터의 ‘다르게 생각하라’ 시리즈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들은 ‘환멸을 생각하라’는 말을 써넣었고, 사과 모양의 애플 로고는 해골로 바꾸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많은 행동가들은 실천하기 시작했다. 어떤 ‘광고 파괴자’는 거대 기업의 광고를 패러디해 대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떤 이들은 정치 시위와 놀이 문화를 결합시켰다. 클라인이 한국 사정을 알았다면 ‘촛불 시위’를 예로 들었을 것 같다. 노동착취기업에 대한 불매운동도 벌어졌다. 

 

>>벨기에의 노엘 고딘과 그의 친구들은 ‘파이 던지기’ 활동을 펼친다. 목표는 기업가들이다. 사진 속의 빌 게이츠를 비롯해 종자업체 몬산토의 로버트 샤피로, WTO의 레나토 루지에로 사무총장,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등이 이들이 던진 파이를 맞았다.

번역은 조금 더 윤문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예를 들어 ‘find oneself in …ing’를 그대로 옮긴 듯한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와 같이 어색한 문장이 눈에 띈다.(백승찬기자) 

10. 0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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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7-1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의 반역은 한마음사판으로 갖고 있습니다..재간돼었군요..그나저나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나 다시 번역돼어 나왔으면 원이 없겠습니다..이상구박사님 번역 이후로 완역이 여태 안돼고 있으니...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일간지 리뷰기사를 보다가 모르고 지나갈 뻔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톨스토이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소설로 옮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궁리, 2004)의 저자 제이 파리니의 또 다른 전기소설이 출간된 것인데, 이번엔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솔출판사, 2010). 벤야민의 전기는 몇 권 출간돼 있지만 '전기소설'이라고 하니까 또 감이 다르다. 벤야민의 독자라면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한국일보(10. 06. 12) '20세기 지성' 벤야민, 그 최후의 발자취  

국경 수비대의 감시를 피해 피난 일행이 벼랑길에서 몸을 숨기는 상황, 한 중년 남성이 가방을 뒤진다. 무슨 소리라도 날까 일행이 초초하게 바라보는 사이, 그가 꺼내 든 것은 괴테의 시집이었다. 숨막히는 상황에서 바위에 기대어 시집을 읽는 그 남자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이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이 그리고 있는 벤야민의 마지막 모습 중 하나이다. 20세기 최고의 독창적 지성으로 꼽히지만, 막상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렸던 유대계 독일 사상가 벤야민. 나치의 파리 점령을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그는 스페인 국경마을에 도착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비극적 삶의 정점이었다.

이 책은 그 마지막 몇 달간의 여정을 뒤쫓아가며 벤야민의 삶을 돌아보는 전기소설이다. 소설 형식이지만 벤야민의 글과 주변 사람들의 편지, 회고록, 인터뷰 등의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어 전기에 가깝다. 저자 제이 파리니는 톨스토이 전기소설인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작가이자 미국 미들베리대 교수.  



저자는 벤야민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유대교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숄렘, 벤야민의 피레네 산맥 월경을 도운 리사 피트코 등 여러 주변 인물을 화자로 등장시켜 다양한 시점에서 벤야민의 삶을 복원한다. 친구의 눈에는 돈이나 여자 문제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생활인, 급진적 혁명가인 아샤 라시스에게는 "겉으로만 혁명에 투신하는" 회의적인 부르주아로 비쳤던 벤야민은, 여관 주인이 보기에는 "늙고 지치고 고독한" 손님으로 묘사된다.

벤야민의 인간적 면모가 여과 없이 드러나지만, 책에 흐르는 전반적 기류는 이 뛰어난 사상가에 대한 애잔한 추도다. "아무도 그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유럽은 최고의 지성이자 유럽 정신의 계승자이며 다정한 성격을 지닌 대가를 한 사람 잃었다."(12쪽)

저자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은, 자살을 생각하던 벤야민이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소년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장면이다. "이 세상은 항상 폐허야. 하지만 우리에겐 작은 기회가 있어. 만약 우리가 아주,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선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파손된 것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낼 수 있어. 조금씩, 조금씩"(356쪽)이라는 벤야민의 말이 읽는 이를 뭉클하게 한다.(송용창기자) 

10. 06. 12.  

P.S. 작가들의 '마지막 날들'을 다룬 소설들이 종종 출간되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조제 렌지니의 <카뮈의 마지막 날들>(뮤진트리, 2010)이다. '원조'로 기억되는 책은 베르나르 앙리-레비의 <보들레르의 마지막 나날들>(책세상, 1997). 소설은 아니지만 '마지막 날들'의 양식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마티, 2008)도 같이 곁들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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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2 13:05   좋아요 0 | URL
이 다섯 권의 책으로 여름을 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는데요.
안 그래도 올여름 더위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데 나름 '서늘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로쟈 2010-06-13 21:04   좋아요 0 | URL
네, 일주일의 양식은 될 거 같습니다.^^
 

문학동네 블로그에 '로쟈의 스페큘럼'을 연재하게 됐다(http://cafe.naver.com/mhdn/15320). 오늘 실은 첫회에서는 '스페큘럼'이란 말이 떠올려주는 것들에 대해 적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들러보시길. 연재는 한달에 3-4회 정도 진행될 예정이다. 여기서는 일부만 발췌해놓는다.   

 

‘당신 서재의 나침반’이 내가 처음에 제안 받은 연재 타이틀이다. 하지만, 책으로 어지럽게 둘러싸인 서재에서 나조차도 ‘책과 책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다. 필요한 책을 제때 찾지 못하는 것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당신 서재의 나침반’이 돼주기는커녕 나야말로 그런 나침반이 필요한 처지다. 그런 이유에서 타이틀이 조금 부담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했더니, 이런, 이번엔 ‘로쟈의 스페큘럼’이다. 스, 페, 큘, 럼.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라서, 한 자씩 써봤다.(...)   

하여간에 ‘나침반’ 대신에 ‘스페큘럼’ 역할을 주문받고서 내가 연상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런 도구와 그림이다. 그런 연상을 배경으로 둔다면, 이제 ‘책과 책 사이’란 말이 조금 은밀하고도 외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으신지? 조금 감이 둔한 분들을 위해 한 번 더 말하자면 ‘책과 책 사이’란 ‘무릎과 무릎 사이’이기도 하다. 나침반은 손바닥에 올려놓지만, 검시경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 끼워 넣는다. 나침반은 방향만 가리키지만, 검시경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뭔가를 들여다보게 한다. ‘로쟈의 스페큘럼’이 로쟈가 갖고 있는 ‘스페큘럼’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로쟈라는 스페큘럼’을 뜻하는 것인지 모호하지만 여하튼 앞으로 뭔가를 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스페큘럼-되기’를 시도해보겠다.(...) 

10.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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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6-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가 갖고 있는 스페큘럼'이 독자에게는 '로쟈라는 스페큘럼'이 되리라 생각되는걸요. 기대합니다.

로쟈 2010-06-12 09:2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가요?^^

2010-06-10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2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ra 2010-06-1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연재부터 챙겨볼수 있게되어 기쁩니다ㅎㅎ

로쟈 2010-06-12 09:2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연재 마지막을 무사히 끝내면 기쁠 거 같습니다.^^;

비로그인 2010-06-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부인과 개업(?) 축하드립니다. 여기저기 '로쟈 바람'이 부는군요.

로쟈 2010-06-20 23:01   좋아요 0 | URL
네, 별걸 다해봅니다.^^;
 

프레시안에서 '6.15공동선언 10주년 연속인터뷰' 가운데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0609123820&section=05). 인터뷰기사의 타이틀이 "천안함 진실규명, 민주회복-남북관계 개선의 결정적 고리"라고 돼 있는데, 바로 천안함 진실규명과 관련한 백낙청 교수의 견해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프레시안 : 중국이 남·북·미·중 4개국 공동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백낙청 : 공동조사는 바람직하다. 북에서 검열단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검열단이라는 게 그쪽 문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참 적절치 않은 표현이었다. 어쨌든 검열단 제안이 왔을 때 우리 정부는 유엔사령부 조사결과를 가지고 군사정전위원회를 소집할 테니 거기 나오라고 역제의를 했다. 군사정전위는 지금 거의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인데 그걸 되살리겠다고 하니까 북에서는 '이제 와서 무슨 정전위냐'고 하면서 안 받았다.

그런데 남·북·미·중 4개국의 공동조사를 하자는 중국의 일종의 수정제안은 정전위 기구를 재활용하자는 남쪽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유엔사가 일방적으로 조사한 것을 갖고 와서 심문을 받아라, 야단 좀 맞고 가라는 게 아니라, 조사 자체를 4개국이 하자는 거니까 북은 마다할 이유가 없고 남쪽 정부도 자신 있으면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는 제안이다.

그런데 만약 사실무근을 가지고 정부가 이렇게 해놨다면 어떠한 공정한 조사 제의도 받기 어려운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은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5월 11일 시점에서 '북한-어뢰 프레임'에 갇히지 말자고 말할 때만 해도 나는 정부가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일종의 영구미제(永久未濟) 상태로 끌고 가면서 북의 소행이라는 냄새만 잔뜩 피우다가 선거가 끝나면 적당히 물러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어찌 보면 우리 정부의 과감성이랄까 저돌성을 내가 과소평가 했다.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웃음)

그러니까 나쁘게 보자면 적당히 장난치려고 했는데 장난이 너무 심해서 장난이 아니게 돼버린 것이다. 이제 정부는 추가자료를 제시해서 국민과 국제사회를 납득시키거나, 아니면 대한민국 역사에 유례가 없는 망신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 길이 없어졌다.

대한민국 국민 치고 나라가 망신을 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적어도 나는 안 그렇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통킹만 사건처럼 오랫동안 진실을 묻어놓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나 네티즌들이 문제제기하는 걸 봐라.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가. 뚜껑을 눌러놓고 무한정 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정부가 어떻게 수습을 할지 모르겠다. 국제사회가 정말로 납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해야 하는데 과거 김일성 주석이 김신조 사건에 대해 '나는 몰랐다'고 했듯 대통령이 '나는 몰랐다. 허위보고에 속았다'고 할 것인가? 그것도 간단치 않다. 우리는 북한 체제와 다르다. 정말 걱정이 되지만 어쨌든 진실에 입각해서 수습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시민사회는 진실과 원칙에 입각한 대응을 해야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령 선거를 앞둔 야당 같으면 '북한 소행이라는데 정부는 뭐하고 있었냐. 안보무능 아니냐. 차라리 참여정부가 안보에 유능했다'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정부가 진실을 말한다는 확신이 없을 때는 계속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에 입각해 문제를 풀어 나가자, 아무리 힘들어도 그 외엔 길이 없다고 계속 얘기해야 한다

10.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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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2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6-13 01:42   좋아요 0 | URL
민주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대립보충으로서 톡톡히 덕을 보았는데 역시 대립보충이기 때문에 그 덕을 다시 한나라당에게 돌려주고 서로 공생의 쳇바퀴를 계속 돌지 어쩔지 아연합니다.
지방선거 결과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민주당류를 생각하면 한없이 '불안'합니다만...
천안함 사건은 계속 의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대강과 천안함 문제는 한국 현대사를 통해 누적되어 온 강한 폭발력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에 말씀하신 지젝의 분노자본 같은 것...

로쟈 2010-06-13 21:06   좋아요 0 | URL
사필귀정의 역사를 믿어보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