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엔 다 아는 바와 같이 남아공 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한국이 그리스에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가 생각보다 강한 건지, 그리스가 생각보다 약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 감독은 첫 골을 그리스가 넣었더라면 경기의 양상은 달라졌을 거라고 말했다. 지당한 말이다. 축구공은 둥그니까. 그런 불확실성을 다시금 상기시켜준 건 영국과 미국의 경기. 새벽 경기라 직접 보진 못하고 아침에 스코어만 확인했는데, 이 또한 알다시피 1:1 무승부라는 의외의 결과였다. 물론 영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거꾸로일 가능성보다는 몇 배 높았지만 결과는 무승부였고, 가장 결정적인 건 어이없는 동점골을 내준 영국 골키퍼의 실수였다. 덕분에 좀더 '유명해진' 로버트 그린은 경기후 인터뷰에서 "이것이 골키퍼의 인생"이라는 매우 담담하면서도 철학적인 소감을 밝혔다. “항상 안정감을 유지하고 어려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골키퍼의 인생은 그런 것”이라고.
당장은 그가 다음 경기에도 기용될지 미지수인데, 기사를 보다 보니 문득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마음산책, 2010)에 대한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칼럼이 생각났다. '그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가 지난주 한겨레21의 칼럼 제목이었다(http://h21.hani.co.kr/arti/COLUMN/130/27484.html). 간단하게 소설 일반론을 먼저 기술하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범박한 일반론이지만 다시 정리해볼 생각을 한 것은 최근에 출간된 제임스 설터의 소설집 <어젯밤>(마음산책·2010) 때문이다. 이 인상적인 책은 사건, 해석, 진실, 단절로 이어지는 저 과정을 놀랍도록 효율적인 방식으로, 짧고 깊게, 단숨에 성취해버린다. 그림자에게 소매치기를 당한 기분이랄까. 1925년생이니 80살이 되던 해에 출간한 책이다. 소설은 통찰력의 산물이고 통찰력은 시간의 선물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어쩐 일인지 우리에게는 이 책으로 처음 소개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소설을 찾아 읽는 독자들에게 제임스 설터가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라는 사실은 일종의 신념과도 같다”(리처드 포드)는 평을 받는 대가라고 하니, 이제야 읽게 된 게 좀 억울할 지경이다.
열 개의 단편소설 중 ‘포기’와 ‘어젯밤’이 단연 압권이다. ‘포기’에서 잭은 그의 아내와 아이에게 좋은 남편이자 아빠처럼 보인다. 잭의 친구인 시인 데스가 마치 가족의 일원인 듯이 함께 살고 있는데, 평범한 조합은 아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품을 읽게 된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단란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날 밤, 아내가 잭에게 데스에 관해 무언가를 말한다. 다음날 아침,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젯밤’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어젯밤 월터는 죽어가는 아내의 요구로 그녀의 안락사를 도왔다. 그 와중에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월터의 삶은 무너진다. 두 작품 모두에서 ‘어젯밤’은 사건의 날이다. “그게 무엇이었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건 사라지고 없었다.”(199쪽)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란 표현은 '옮긴이의 말에 인용돼 있는데, 사실 이토록 '대단한' 작가의 이름이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 소개된다는 점이 좀 놀랍다. 하성란 소설가도 "제임스 설터는 너무 늦게 우리 독자에게 왔다. 왜 존 치버나 레이먼드 카버에 가려져 있었는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의 소설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라고 적었을 정도다.
책 말미에는 '이 책에 쏟아진 찬사'가 몇 페이지에 걸쳐 나열돼 있는데, "표제작 '어젯밤'은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견줄 만한 잊을 수 없는 걸작이며, 이 시대 문단 최고의 단편으로 자리한다."는 평이 눈길을 끈다. 수전 손택도 "제임스 설터는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아는 독자에게 특히 어울리는 작가다"라며 거들었다. 뭐 이 정도면 거의 '협박' 수준이다. 작품을 읽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역자가 '옮긴이의 말'을 마무리하는 소감은 가히 정점이라 할 만하다.
"설터의 책을 번역하는 건 호화 저택에서 몸종을 거느리고 사는 기분이다. 아니, 그보단 바닷가에 지은, 커다란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사치스럽게 산 기분이다. 이제 그 집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해서 '옮긴이의 말' 타이틀이 '호화로운 집에 살다'이다. 대체 어떤 '집'인가 궁금하여 현관 계단까지 갔다가, 책상에 잔뜩 쌓여 있는 책과 일거리를 생각하여 오늘은 이렇게 변죽만 울리기로 했다. 아마도 내일쯤 좌석버스 안에서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첫 작품도 읽기 전이지만 미리부터 그의 대표작이라는 <가벼운 나날들>이 번역되길 기대해본다.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조지프 폭스가 자신이 편집한 책 중에 다음 세대까지 남을 책을 들어달라는 질문에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와 함께 꼽았다는 책이다. 아,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너무나 많도다!..
10. 06. 13.
P.S.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란 표현에서 인용한 제목이 잘못 번역된 문장에 근거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으므로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