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일간지 리뷰기사를 보다가 모르고 지나갈 뻔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톨스토이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소설로 옮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궁리, 2004)의 저자 제이 파리니의 또 다른 전기소설이 출간된 것인데, 이번엔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솔출판사, 2010). 벤야민의 전기는 몇 권 출간돼 있지만 '전기소설'이라고 하니까 또 감이 다르다. 벤야민의 독자라면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한국일보(10. 06. 12) '20세기 지성' 벤야민, 그 최후의 발자취  

국경 수비대의 감시를 피해 피난 일행이 벼랑길에서 몸을 숨기는 상황, 한 중년 남성이 가방을 뒤진다. 무슨 소리라도 날까 일행이 초초하게 바라보는 사이, 그가 꺼내 든 것은 괴테의 시집이었다. 숨막히는 상황에서 바위에 기대어 시집을 읽는 그 남자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이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이 그리고 있는 벤야민의 마지막 모습 중 하나이다. 20세기 최고의 독창적 지성으로 꼽히지만, 막상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렸던 유대계 독일 사상가 벤야민. 나치의 파리 점령을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그는 스페인 국경마을에 도착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비극적 삶의 정점이었다.

이 책은 그 마지막 몇 달간의 여정을 뒤쫓아가며 벤야민의 삶을 돌아보는 전기소설이다. 소설 형식이지만 벤야민의 글과 주변 사람들의 편지, 회고록, 인터뷰 등의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어 전기에 가깝다. 저자 제이 파리니는 톨스토이 전기소설인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작가이자 미국 미들베리대 교수.  



저자는 벤야민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유대교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숄렘, 벤야민의 피레네 산맥 월경을 도운 리사 피트코 등 여러 주변 인물을 화자로 등장시켜 다양한 시점에서 벤야민의 삶을 복원한다. 친구의 눈에는 돈이나 여자 문제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생활인, 급진적 혁명가인 아샤 라시스에게는 "겉으로만 혁명에 투신하는" 회의적인 부르주아로 비쳤던 벤야민은, 여관 주인이 보기에는 "늙고 지치고 고독한" 손님으로 묘사된다.

벤야민의 인간적 면모가 여과 없이 드러나지만, 책에 흐르는 전반적 기류는 이 뛰어난 사상가에 대한 애잔한 추도다. "아무도 그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유럽은 최고의 지성이자 유럽 정신의 계승자이며 다정한 성격을 지닌 대가를 한 사람 잃었다."(12쪽)

저자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은, 자살을 생각하던 벤야민이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소년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장면이다. "이 세상은 항상 폐허야. 하지만 우리에겐 작은 기회가 있어. 만약 우리가 아주,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선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파손된 것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낼 수 있어. 조금씩, 조금씩"(356쪽)이라는 벤야민의 말이 읽는 이를 뭉클하게 한다.(송용창기자) 

10. 06. 12.  

P.S. 작가들의 '마지막 날들'을 다룬 소설들이 종종 출간되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조제 렌지니의 <카뮈의 마지막 날들>(뮤진트리, 2010)이다. '원조'로 기억되는 책은 베르나르 앙리-레비의 <보들레르의 마지막 나날들>(책세상, 1997). 소설은 아니지만 '마지막 날들'의 양식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마티, 2008)도 같이 곁들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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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2 13:05   좋아요 0 | URL
이 다섯 권의 책으로 여름을 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는데요.
안 그래도 올여름 더위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데 나름 '서늘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로쟈 2010-06-13 21:04   좋아요 0 | URL
네, 일주일의 양식은 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