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목전인 탓인지 눈에 띄는 책이 드문 주다. 개인적으론 새로 번역돼 나온 러시아소설들, 가령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열린책들, 2010)이나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민음사, 2010)에 눈길이 가는 정도. 피에르 바야르의 신작 <셜록 홈즈가 틀렸다>(여름언덕, 2010)은 챙겨두어야 할 책이었지만 저녁에 서점에 들렀을 땐 깜박했고, 약간 기대했던 책 가운데 가마타 히로키의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부키, 2010)은 들춰보지도 않고 손에 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너무 소략해서 실망스럽다(책이라기보단 칼럼집 수준). 리뷰기사를 미리 읽었더라면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후마니타스, 2010)을 대신 손에 들었을 텐데, 아쉽다. 아, 프리모 레비의 자전소설 <휴전>(돌베개, 2010)도 이주에 나온 필독서다. 일단 <한낮의 어둠>에 대한 리뷰를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예전 번역본은 최승자 시인이 옮긴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이었다. 저자는 '아서 케슬러'로 표기됐었다.    

한겨레(10. 09. 18) 어제의 혁명동지가 내 목을 달라는구나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 아서 쾨슬러(1905~1983)의 <한낮의 어둠>(1940)은 스탈린 치하 옛 소련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함께 언급되고는 한다.

소설은 주인공 루바쇼프가 감옥에 수감되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총살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루바쇼프는 10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혁명에 몸을 던졌으며 혁명이 성공한 뒤 당 중앙위원회 회원이자 인민위원, 혁명군 사령관을 역임한 혁명 정권의 중추적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1938년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니콜라이 부하린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쾨슬러 자신은 “루바쇼프의 삶은 이른바 모스크바 재판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종합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모스크바 재판(1936~8)이란 스탈린 개인 우상화를 위해 수천 명에 이르는 혁명 1세대를 숙청한 일을 가리킨다.

루바쇼프가 평생을 바쳐 복무했던 혁명 조국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것, 그것도 불명예스럽고 근거도 박약한 반혁명의 혐의로써 그렇게 한다는 상황은 루바쇼프에게는 절체절명의 딜레마이자 아포리아로서 다가온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그는 외국에서 혁명을 위해 싸우다가 적들의 감옥에 갇히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적국이 아니고 자신은 혁명의 적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 있었지만, 그 조국이 적국이 되었다. 그리고 친구였던 이바노프는 이제 적이 되었다.” 이바노프는 그의 대학 친구이자 오랜 혁명의 동지였으나 지금은 그를 심문하는 자로 처지가 바뀌었다.

모스크바 재판의 배경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알력으로 잘 알려진 혁명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있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는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론’을 대변하는 소설 속 인물은 이바노프에 이어 루바쇼프의 심문을 담당하게 된 젊은 관료 글레트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소. 하나는 모험자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국외 혁명을 위해 우리가 획득한 걸 걸고 싸우려고 하오. 당신은 그들에 속하오. (…) 우린 오직 한 가지 의무를 가지고 있소. 그건 사멸하지 않는 것이오.”

루바쇼프의 딜레마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레트킨과 같은 논리로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독일 청년 리하르트,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알로바, 그리고 벨기에 항구의 부두 노동자 조직 책임자였던 리틀 뢰비 등이 그들이다. 물론 그는 “‘혁명적 철학’으로 저지른 이 모든 사기는 그저 독재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넘버원’(스탈린을 암시한다)을 두고 “그는 권력에서 결코 스스로 사임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폭력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는 견해를, 비록 사석에서이기는 하지만, 내놓기도 했고 그것이 결국 그의 몰락의 빌미가 되었다.

그가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심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은 리하르트들에 대한 죄책감과 무관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 한 개인의 양심과 자유, 윤리 같은 덕목쯤은 희생시켜야 한다는 글레트킨 쪽의 논리에 그가 적어도 반쯤은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판정에서의 마지막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과 당 활동과 화해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죽을 수 있는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심의 전부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혁명가로 평생을 보낸 그가 바로 그 혁명의 조국에서 다름 아닌 반혁명 혐의로 처형당하는 마당에 글레트킨의 논리에 의탁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루바쇼프 자신의 이런 혼란과 동요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초심을 잃고 괴물로 바뀌어 가는 혁명 정권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그것이다. “그건 체제상의 과오였다. 어쩌면 그 과오는 지금까지 그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온 원칙(그 원칙의 이름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이제는 그 자신마저 희생되고 있지만),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 원칙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원칙이 혁명의 위대한 동지들을 죽였고, 그들 모두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이다.”(최재봉 기자) 

10. 09. 17. 

 

P.S. <한낮의 어둠>과 같이 읽어야 할 책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문학과지성사, 2004)과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이다. 김홍우 교수의 <현상학과 정치철학>(문학과지성사, 1999)에도 <한낮의 어둠>을 다룬 논문이 실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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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0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국<부하린,혁명과 반혁명 사이> (문학과 지성사)의 제6장에 부하린 재판과 이에 대한 아서 쾨슬러와 메를로 퐁티의 평가를 소개했더군요.

로쟈 2010-09-20 08:4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책은 어디 박스에나 들어가 있을 거 같아요.--;
 

내일자 경향신문의 '책과 삶' 꼭지를 옮겨놓는다. 신간들 가운데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와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를 묶어서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10. 09. 18) 책을 왜 쓰느냐 묻거든 그곳에 길을 만들려 

한국인의 문해율은 2008년 기준 98.3%다. 문해율이란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의 비율을 뜻한다. 98.3%라면 한국의 성인 가운데 문자를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문자를 읽고 쓸 능력이 있다는 것과 실생활에서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등산을 할 수 있지만, 모두가 산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러고보면 읽기·쓰기와 등산은 닮은 데가 있다. 혼자 가든 떼를 지어 가든 산에 오르기 위해선 결국 자신의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읽기와 쓰기 역시 개인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산이 있어야 산에 오를 수 있듯 읽기는 앞서 쓴 사람이 있기에 가능하고 쓰기는 앞으로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둔 행동이다. 여기, 쓰기와 읽기의 최고 고수들이 쓴 책이 마주보며 놓여있다. 한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영국의 작가, 한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책은커녕 자신이 욕심내는 책조차 다 읽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리라는 사실을 아직도 섭섭해 하는 한국의 지독한 책벌레다.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두 사람이 각각 쓴 책은 투수와 포수처럼 나란해 보인다. 



‘국민공통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이력은 명문 이튼스쿨 졸업,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 생활, 파리와 런던에서 최하층민 생활, 스페인 내전 참전 등 ‘20세기 초중반 시대의 격변을 온몸으로 살았다’ 정도로 요약하기로 하자. 그는 소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데 이건 그가 쓴 방대한 글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는 생전에 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 등 11권의 책을 냈거니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수백편의 길고 짧은 칼럼과 서평, 에세이를 썼다. 이 책은 에세이 29편을 골라 번역한 것이다.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는 나치의 파시즘과 스탈린식 공산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등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반대했던 오웰의 작가적 입장이 명확히 담겨 있다. 그는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오웰이 작가의 작업을 정치 선동가의 역할과 동일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치적 글쓰기’란 어떤 거짓이나 폭로하고 싶은 것을 ‘미학적 경험’에 입각해 쓰는 것이다. 그는 “<동물농장>이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었다”고 고백한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와 영어’라는 제목의 매우 신랄한 에세이를 볼 필요가 있다. 오웰은 당시 지식인들의 글들을 실례로 들어가며 죽어가는 비유, 지극히 불분명한 표현, 젠체하는 용어, 무의미한 단어들을 집어냈다. 마치 시범을 보이듯 이 책에서 예리한 통찰과 특유의 비유, 신랄한 독설의 진수를 보여준 오웰이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의미가 단어를 택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뜻을 최대한 분명하게” 한 다음 “뜻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표현”을 택해야 “진부하거나 뒤섞인 이미지, 이미 만들어진 어구, 불필요한 반복, 그리고 허튼소리와 막연함을 대체로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글쓰기 6원칙을 제시하는데 이것만 가지고 글쓰기 교재를 써도 될 정도로 포괄적인 동시에 실용적이다. 



이 책은 오웰의 르포집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번역하기도 한 번역가 이한중이 4권으로 엮인 오웰의 원문 에세이 저작집에서 명문(名文)으로 평가받는 것들, 오웰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술회된 것들을 뽑아 시간순으로 배치했다. 오웰은 자신의 전기를 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데 편역자의 말마따나 이 책은 오웰의 자서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오웰은 생애 자체가 워낙 다채로웠다. 그리고 철저히 체험에서 우러나온 에세이들을 썼다. 런던 부랑자들의 삶을 묘사한 ‘스파이크’, 버마 경찰 복무 경험을 그린 ‘코끼리를 쏘다’, 스페인 내전 참전 회고담인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생계를 위해 서평을 쓰면서 느낀 역겨움을 여과없이 드러낸 ‘어느 서평자의 고백’ 등 어느 것 하나 지루한 게 없다. ‘빨주노초파남보’가 무지개를 이루듯 29편의 글이 제각각 고유한 색깔을 뽐내며 글쓰기라는 그 무엇으로 향하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냈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로쟈’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이어 두번째로 낸 서평집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가 에세이 범주에 속하는 글들을 모은 것이라면, 이번 책은 본격적인 서평집에 해당한다. 지난 10년간 각종 매체에 썼던 서평, 그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올렸던 글들을 30개의 꼭지로 정돈했다. 
 
로쟈의 서평을 보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주인공 톰 크루즈가 눈 앞에 떠오른 가상의 스크린에 매우 빠르게 명멸하는 화면들을 검색하면서 양손으로 그것들을 이리 저리 짜맞추는 유명한 장면 말이다. 로쟈가 블로그에 공개한 ‘공익적인’ 글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평론가 신형철은 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쟈는 문학·철학·역사학·사회학을 넘나들면서 배치하기·짝짓기·지도 그리기·교정하기 등등의 테크닉을 발휘하여 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다양한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요즘 강조되는 ‘맥락적 책읽기’를 일찍부터 보여줬다. 그의 블로그는 책과 작가에 관한 ‘위키피디아’를 방불케 한다. 시인이자 소설가 장정일이 메인 게스트로 나온 어느 ‘북포럼’에 패널로 나가 발표한 글에서 로쟈는 장정일의 작품이 읽히던 시대, 장정일의 작품세계를 따라가면서 이성복·황지우·유하 등의 시인, 마광수, 밀란 쿤데라, 노무현, 이문열, 황석영, 강유원 등을 줄줄이 떠올린다. 작년에 나온 김규항의 <예수전> 위에 한완상의 <예수 없는 교회>를 겹쳐 읽으면서 ‘혁명’이라는 키워드를 뽑아낸 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으로 나아가는 식이다. 

이런 일은 그가 ‘지독하다’는 표현으로는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읽어대기에 가능했다. 간간이 등장하는 번역자의 태만에 의한 오역이나 ‘꼴’을 갖추지 못한 책에 대한 꾸짖음은 준엄하다. 그러나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고 말하는 로쟈의 책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겸손하고 따뜻하다. 그는 말한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책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내게 그 책을 읽을 역량이 갖춰져야 한다. 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돼야 한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이번엔 독자들이 로쟈에게 고마워해야 할 차례다.(김재중기자) 

10. 09. 17. 

P.S. 흠, '지독한 책벌레'라는 것이 '로쟈'에 대한 흔한 인상인 듯하다. "닥치는 대로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대는" 같은 이미지라면 사실 나와 그다지 닮지 않았다. 나보다 더 많이, 더 집요하게, 더 지독하게 읽는 독자가 왜 없겠는가. 다만 그 '책벌레'가 '공익' 근무요원처럼 매일같이 책에 관한 소개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쓴 리뷰와 잡담을 많은 이와 공유하기 위해 애쓰는 자를 가리키는 거라면 크게 어긋나진 않을 것 같다. 책의 서문에 적었듯이, 지난 3년간의 집중 '복무'를 뒤로 하고 이젠 '예비역'의 자세로 생활하려고 한다. 한데 '후임'은 대체 언제나 배정되는 것일까?.. 

P.S.2. 내친 김에 눈에 띄는 언론리뷰를 더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9. 18) 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비평모음집

그는 책벌레다. 그것도 지독한. 아마도 우리 시대 가장 큰 위를 가진 책벌레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서평이라는 새로운 영역 개척의 선두에 섰던 그의 이름은 이현우, 아니 서평꾼 로쟈다. 인터넷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깊이 있고도 성실한 서평들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나 홀대받던 인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우면서, 실용서의 범람에 지쳐 있던 이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그 로쟈가 두번째 책을 냈다. <책을 읽을 자유>는 지난 10년간 로쟈의 책 리뷰를 골라 묶은 책이다. 주제별로 수백권의 책들이 들어서 있는 모양은 도서관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도서관은 로쟈만의 분류법으로 가꿔져 있으며, 또 언제나 그렇듯 꼼꼼하고 진지한 서평들이 함께한다. 때로는 일부 책들의 오류에 대해 꽤 신랄하게 짚어내고 있어, 독자로서는 거대한 책의 바다를 항해할 때 요긴한 항해도를 얻은 기분이 든다.

책 첫머리에서 지은이는 자신에게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바로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라 고백한다. 매일 갈아먹어야 할 양식에 물렸던 시간들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끔찍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자유는 바로 ‘책을 읽을 자유’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책장을 넘기다 보면, 로쟈가 이 자유를 정말 만끽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600쪽에 이르는 이 책은 올가을 이 땅의 책벌레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은혜로운 양식이다.(윤은숙 기자)   

한국일보(10. 09. 18) 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세상 꼬집기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인터넷 서평꾼 이현우씨의 두번째 서평집. 블로그를 비롯해 신문, 잡지 등 매체에 지난 10년 간 기고했던 서평들을 한 곳에 모았다. 시인 고 기형도의 <기형도 전집>,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탐독한 147권의 책에 대한 사유의 흔적을 30개의 키워드아래 모았다.

그의 글 곳곳에는 강한 현실비판 의식이 투영돼 있다. 서평을 그냥 글쓰기가 아니라 '비평행위'로 여기는 저자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구절에 밑줄을 그으며 '강부자 고소영 내각'을 꼬집고, 일본 우익의 사상적 본질을 해명한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을 읽으며 반공주의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한국 우익의 사상적 빈곤을 비판한다.(이왕구 기자)

중앙일보(10. 09. 18) 노련한 가이드와 함께 오르는 인문학 봉우리 

저자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인터넷 서평가다. ‘로쟈의 저공비행’이란 그의 블로그엔 매일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가 지난 10년간 쓴 147편의 서평을 모아 책을 냈다.저자는 서평을 총 30개의 주제로 분류했다. 예를 들어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아래 『폭력의 철학』『폭력의 시대』『러시아 혁명』『성스러운 테러』등에 대한 서평을 엮는 식이다.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다. 문학, 미술, 고전, 역사, 철학, 학술, 글쓰기, 번역 등을 망라하고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서평을 비평한 것도 있다. 인문학자(한림대 연구교수)라는 배경 때문인지 인문학적 관심에서 고른 책들이 많다. 재테크 책이나 자기계발서를 편식하는 일반 독자들은 아마 제목도 못 들어본 책들이 태반일 것이다. 하지만 산에 갈 때 반드시 정상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올레길을 걸으며 산을 완상하는 것도 좋다. 올레길을 가다 ‘저 봉우리를 한번 올라가 봐야지’라고 맘을 먹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이건 한번 읽어봐야지’라는 느낌을 받으면 족하다.

그의 서평은 단순한 책소개를 벗어나 비평에 가깝다. 따뜻한 찬사를 늘어놓다가도 매몰찬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독자들에겐 독서를 자극하는 강력한 흥분제가 될 것이다.

“나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에어컨이 고장 나 창문을 열어놓고 달리는 저녁 버스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읽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그의 글들을 읽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그만 사라져도 좋을 듯 했다.”

올 가을,‘로쟈’라는 유능한 가이드를 따라 ‘책을 읽을 자유’를 누리는 것도 좋을 듯 하다.(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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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39   좋아요 0 | URL
영어교사들이 로쟈님이 심혈을 기울인 오역 바로잡기를 정독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9-20 08:43   좋아요 0 | URL
ㅎㅎ 필요한 독자들에게나 참고가 되면 되는데요.^^;

사과나무 2010-09-19 13:58   좋아요 0 | URL
'한데 '후임'은 대체 언제나 배정되는 것일까?'

신검을 통과라도 해야 군대에 가죠.. 흑흑...


로쟈 2010-09-20 08:43   좋아요 0 | URL
요즘 신검이 그렇게 어렵나요? 여긴 '자원'이긴 하지만요.^^
 

자작시 한편을 더 옮겨놓는다.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란 글에 포함돼 있었지만 시만 따로 빼놓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병 속의 시간

그대를 그리워하다 남는 시간은 빈병 속에 넣어둔다
시간은 시간의 과욕이며 연적(戀敵)이다
그리움이 막막할수록 부질없는 시간은 빈병 속에서 묵직해지고
나는 어느덧 텅 빈 세상 하나를 거느리게 되었다
빈병 속 보이지 않는 자갈이 깔리고 보이지 않는 꽃들이 핀 길
그대가 원한다면 느티나무 두 그루를 마저 심겠다
보이는가, 저 텅 빈 세상의 물살과 바람과 먼지……
그대를 그리워하다 남는 시간이, 아아 더 소중해 보인다
시간은 시간의 변덕이며 불가피한 오용이다
그대를 그리워하던 다락 같은 방도 이젠 저 빈병 속에 있다

 

10. 09. 17. 

P.S. 이 시는 아마도 짐 크로스의 노래 '병 속의 시간(Time in a bottle)'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다. "만약 시간을 병 속에 저장할 수 있다면"이라고 시작하는 노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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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go 2010-09-17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

lo초우ve 2010-09-1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감상 잘했습니다 ^^

로쟈 2010-09-17 23:09   좋아요 0 | URL
^^

비로그인 2010-09-1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병 안에 들어가고 싶어져요.

로쟈 2010-09-17 23:09   좋아요 0 | URL
흠, 좀 답답할 거 같은데요.^^;

trenwelling 2010-09-1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빈병속의 시간'모두 시적 모호함을 담을 수 있는 훌륭한 용기들 이군요. 로쟈님 시들 가끔 보았지만, 시는 좀... 하는 생각이었는데. 좋은 시네요.몇번씩 더 읽고 싶게 만드는.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 산문인지 모르겠지만 한번 보고 싶군요.
'그대를 그리워 하던 다락같은 방도 이젠 저 빈병속에 있다'. 아... 가슴이 저릿.

로쟈 2010-09-17 23:10   좋아요 0 | URL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09-17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없는 소리지만 '자작시'를 지젝시로 읽은 1인입니다.


아 그나저나 그대를 짝사랑만 하던 답답하던 20대 초반도 이젠 저 빈병 속에 있다....ㅜㅜ

로쟈 2010-09-17 23:20   좋아요 0 | URL
지금은 20대 후반이신가요?^^

자꾸때리다 2010-09-18 00:33   좋아요 0 | URL
86년생임다...

2010-09-17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7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2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2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계 사막> 2장으로 바로 들어가기가 애매해서 아침에 지방에 내려가기 전에 부랴부랴 예전에 쓴 글을 보완했다. 애초엔 '팜므파탈' 얘기를 좀 다루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연휴에 여유를 좀 얻었으면 하고 바라는 수밖에... 

<실재계 사막>의 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에 관한 한 문단을 읽는다.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의 한 대목 읽기이며, 일종의 추석맞이 ‘선물’이다.

"사랑이 폭력이라는 말이 발칸의 저속한 속담 -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 -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57쪽)

인용된 발칸의 속담은 영어로 "If he doesn't beat me, he doesn't love me!"이다. 요즘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가는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테니 너무 진지하게 경청하진 마시길(속담은 속담일 뿐 오해하지 말자!). 이와 관련하여 얼른 떠오르는 영화는 발칸의 영화가 아니라 스페인 영화이다. 페도로 알모도바르의 도발적인 영화 <욕망의 낮과 밤>(1990)이 그것인데, 이 영화의 원제목이 ‘Átame!’이고 영어제목은 <나를 묶어줘! 나를 풀어줘!>(Tie Me Up! Tie Me Down!)이다. 그리고 물론 한국영화로는 장선우의 <거짓말>(1999)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한국영화로서는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을 다룬 드문 영화이지 않을까?).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원문은 이렇다. “violence is already the love choice as such, which tears its object out of its context, elevating it to the Thing” 곧 “사랑은 이러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러저러한 의미에서 폭력”이라는 구문이다. 우리말 번역은 이 대목을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라고 옮긴 것인데,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봐야겠다. 그리고 문장은 뒤집어서 이해하는 게 더 용이하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 자체가 이미 폭력”이라고 읽는 게 더 좋겠다는 말이다. 결국에 '사랑=폭력'이라는 것이니까 대차는 없는 것이지만 초점은 달라진다. “폭력이 곧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이 곧 폭력”'이라는 게 여기서는 초점이니까.

전체를 다시 옮기면 “사랑의 선택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숭고한 대상’으로까지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자리에서 ‘사물/괴물’이라고 옮긴 ‘Thing’을 그냥 ‘대상’이라고 하면 의미전달은 잘 안 되기에 여기서는 ‘숭고한 대상’이라고 옮겼다. 여하튼 이것이 ‘사랑의 폭력’, ‘사랑이라는 폭력’이 뜻하는 바이다. 가령, 2007년의 추석맞이 영화로 개봉됐던 곽경택 감독의 영화 <사랑>의 주인공 주진모(채인호)의 경우를 보자. 한겨레 신윤동욱 기자의 리뷰를 잠시 따라가보면 영화는 이런 구도이다.

태초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년 채인호(주진모)는 첫눈에 소녀 정미주(박시연)에게 반한다.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는 통속성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예쁘고 소녀의 집은 부자다. 산동네 소년은 괜스레 소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소년과 싸운다. 소녀는 소년을 생일에 초대하지만, 하필이면 소녀의 집은 그날 망한다. 그리고 첫 번째 이별. 고등학생 인호는 또 싸운다. 하필이면 싸우다가 인호를 병으로 찌르는 본드쟁이 복학생은 미주의 오빠다. 그렇게 남자는 인호와 미주의 끊어진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 ‘지나친’ 정공법이요 통속성의 기본이다. 미주의 본드쟁이 오빠는 노름쟁이 엄마를 껴안고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사랑의 맹세. “니가 내 지키도. 나도 니 지키주께.” 인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순수한 사랑, 곧 순수한 폭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맥락(학교와 가족사)에서 박시연(정미주)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연을 바라보는 진모의 시선은 건달세계에서 진모가 휘두르는 주먹보다 앞서는 근원적인 ‘폭력’이다. 영화 <사랑>은 그 맹목적인 사랑의 끝을 향해서 단순무식하게 돌진해나가는 ‘순정영화’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오면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다. “몬테네그로의 민담에서 악의 근원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은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며, 모든 것에 편파성의 색조를 입힌다.”

여기서도 떠오르는 영화는 몬테네그로 영화가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 <말레나>(2000)이다. ‘세기의 미녀’라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말레나는 마을에서 모든 남성의 시선 끌어 모으는, 그럼으로써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는” 여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2차 대전이 한창인, 햇빛 찬란한 지중해의 작은 마을. 이 마을의 매혹적인 여인 말레나가 걸어갈 때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그녀를 훑어 내리고 여자들은 시기하여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레나토는 그녀를 연모하는 열세 살의 순수한 소년이다. 남편의 전사소식과 함께 말레나는 욕망과 질투, 분노의 대상이 된다. 남자들은 아내를 두려워해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고, 여자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모함한다. 결국 사람들은 독일군에게까지 웃음을 팔아야 했던 말레나를 단죄하고 그녀는 늦은 밤에 쫓기듯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 레나토만이 진실을 간직한 채 마지막 모습을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1년 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말레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 그녀의 곁엔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불구가 되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도 근원적인 폭력은 말레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 이전에 말레나를 무자비하게 탈맥락화함으로써 ‘숭고한 대상’의 지위로까지 고양시키는, 소년-레나토의 순수한 연모의 시선에 자리한다. 이러한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 

10.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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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7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7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G.Ego 2010-09-17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카 벨루치와 박시연! 오! 이런 누나들이 옆집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벨루치 누나는 이제 나이가 꽤 드셨겠군요.

로쟈 2010-09-20 08:44   좋아요 0 | URL
네, 그나마 덜 끔찍해졌지요.^^;
 

자작시집이라고 펴낸 것 중에서 <생의 바깥에서>(1995)라는 게 있는데, 눈에 띄기에 뒤적여보다가 하나 옮겨놓는다.   

내겐 너무 뻑뻑한 詩 

그에겐 뻑뻑한 속주머니가 있어 
뻑뻑한 건 주머니가 아니고 뻑뻑한 건 
주머니와 손의 관계이지만 관계를 
이루는 방법이지만 그에겐 
손가락 두 개가 겨우 들어갈 만한
속주머니가 있어 뻑뻑한 아주 은밀한 주머니야 
알겠어, 손가락 두 개란 말씀이야
속주머니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건 바로 
속주머니의 마음속에 꾸역꾸역 머리를 찔러넣는
마음 아프게 하는 손가락이지만 말씀이야
어찌 알았겠냐는 말씀이야 
속주머니, 그 작은 새장에서
노래하는 새들을 말씀이야 뒷짐지고
노래하는 착한 새들을 말씀이야
도대체 
어찌 알았겠냐는 말씀이야
뻑뻑한 속주머니의 뻑뻑하지
않은 속사정을 말씀이야 
속마음을 말씀이야 

그 손가락 두 개인 거란 말씀이야
바로 詩란 말씀이야 

  

10. 09. 15. 

P.S. 아침에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지난달에 마지막으로 뵙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소식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여러 일정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는 건 내일로 미뤄졌다. 지상을 떠난 사람들 생각을 잠시 하다가 <생의 바깥에서>의 발문을 쓴 친구도 떠올렸다. 발문의 끄트머리쯤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저 유희이고, 말장난이고, 거짓말이고, 엄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구에도 진실이 있듯, 쾌락전후에도 고통이, 농담 뒤에는 진담이, 엄살 속에는 아픔이 존재한다. 그의 웃는 모습 속에는 분명히 그런 아픔들이 있을 것이다(요즈음은 능청스러워진 것인지 멍청해진 것인지, 내 눈에 그런 것들이 거의 안 보인다). 그러나 웃음과 즐거움이 너무 두드러져, 다른 것들이 잘 안 보인다. 밖으로 도는 웃음이, 확산되고 스며드는 웃음이 된다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의 웃음은 경계허물기의 웃음이 되어, 삶의 너머로 날아오르고 영혼 깊은 곳으로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흠, 요즘도 능청스러워졌거나 멍청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어떤가, 친구, 그런가?.. 

P.S.2. 시집의 표제작인 '생의 바깥에서'는 옮겨놓은 줄 알았더니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모스크바 통신'에만 올려놓았던 모양이다. <생의 바깥에서>라는 건 내 기억에 테러조직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한 기자의 며칠간을 다룬 프랑스 영화의 제목이다. 그와 무관하게 제목만 빌려서 내가 오래 전에 쓴 시는 이렇다. 

나는 잘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못 이룬 부활의 꿈을 되새김한다.
생의 껍질을 깨고 생의 바깥으로 튀어나온 노른자위가 내지르는 저
맛좋은 소리여, 기름이 튀는 소리여, 아으 생색내는 소리여!

언젠가 나도, 맛있는 프라이가 될 날이, 생의 바깥에서
그대의, 아으 그대의 품안에서 눈물이 기름처럼 튀어오를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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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5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15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거운 발걸음을 하셔야겠군요.
시에 대한 감상을 몇 자 적어보려 했는데
부음을 들으셨다는 글에 멈칫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로쟈 2010-09-15 23:36   좋아요 0 | URL
고통 속에서 계속 사셨더라도 마음이 편친 않았을 거 같아요. 무병장수는 다들 기원하지만 이루긴 어렵죠...

미지 2010-09-1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의 바깥에서>.. 참 좋은데요.^^

로쟈 2010-09-16 09:01   좋아요 0 | URL
^^

반딧불이 2010-09-1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로쟈 2010-09-16 23: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lo초우ve 2010-09-1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비가 오는군요.. ㅠㅠ

사람은 언제나 늘 왔다가 가는거자나요

명복을 빕니다...

로쟈님 힘 내세요..

로쟈 2010-09-16 23: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