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집이라고 펴낸 것 중에서 <생의 바깥에서>(1995)라는 게 있는데, 눈에 띄기에 뒤적여보다가 하나 옮겨놓는다.
내겐 너무 뻑뻑한 詩
그에겐 뻑뻑한 속주머니가 있어
뻑뻑한 건 주머니가 아니고 뻑뻑한 건
주머니와 손의 관계이지만 관계를
이루는 방법이지만 그에겐
손가락 두 개가 겨우 들어갈 만한
속주머니가 있어 뻑뻑한 아주 은밀한 주머니야
알겠어, 손가락 두 개란 말씀이야
속주머니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건 바로
속주머니의 마음속에 꾸역꾸역 머리를 찔러넣는
마음 아프게 하는 손가락이지만 말씀이야
어찌 알았겠냐는 말씀이야
속주머니, 그 작은 새장에서
노래하는 새들을 말씀이야 뒷짐지고
노래하는 착한 새들을 말씀이야
도대체
어찌 알았겠냐는 말씀이야
뻑뻑한 속주머니의 뻑뻑하지
않은 속사정을 말씀이야
속마음을 말씀이야
그 손가락 두 개인 거란 말씀이야
바로 詩란 말씀이야
10. 09. 15.
P.S. 아침에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지난달에 마지막으로 뵙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소식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여러 일정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는 건 내일로 미뤄졌다. 지상을 떠난 사람들 생각을 잠시 하다가 <생의 바깥에서>의 발문을 쓴 친구도 떠올렸다. 발문의 끄트머리쯤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저 유희이고, 말장난이고, 거짓말이고, 엄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구에도 진실이 있듯, 쾌락전후에도 고통이, 농담 뒤에는 진담이, 엄살 속에는 아픔이 존재한다. 그의 웃는 모습 속에는 분명히 그런 아픔들이 있을 것이다(요즈음은 능청스러워진 것인지 멍청해진 것인지, 내 눈에 그런 것들이 거의 안 보인다). 그러나 웃음과 즐거움이 너무 두드러져, 다른 것들이 잘 안 보인다. 밖으로 도는 웃음이, 확산되고 스며드는 웃음이 된다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의 웃음은 경계허물기의 웃음이 되어, 삶의 너머로 날아오르고 영혼 깊은 곳으로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흠, 요즘도 능청스러워졌거나 멍청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어떤가, 친구, 그런가?..
P.S.2. 시집의 표제작인 '생의 바깥에서'는 옮겨놓은 줄 알았더니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모스크바 통신'에만 올려놓았던 모양이다. <생의 바깥에서>라는 건 내 기억에 테러조직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한 기자의 며칠간을 다룬 프랑스 영화의 제목이다. 그와 무관하게 제목만 빌려서 내가 오래 전에 쓴 시는 이렇다.
나는 잘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못 이룬 부활의 꿈을 되새김한다.
생의 껍질을 깨고 생의 바깥으로 튀어나온 노른자위가 내지르는 저
맛좋은 소리여, 기름이 튀는 소리여, 아으 생색내는 소리여!
언젠가 나도, 맛있는 프라이가 될 날이, 생의 바깥에서
그대의, 아으 그대의 품안에서 눈물이 기름처럼 튀어오를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