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목전인 탓인지 눈에 띄는 책이 드문 주다. 개인적으론 새로 번역돼 나온 러시아소설들, 가령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열린책들, 2010)이나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민음사, 2010)에 눈길이 가는 정도. 피에르 바야르의 신작 <셜록 홈즈가 틀렸다>(여름언덕, 2010)은 챙겨두어야 할 책이었지만 저녁에 서점에 들렀을 땐 깜박했고, 약간 기대했던 책 가운데 가마타 히로키의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부키, 2010)은 들춰보지도 않고 손에 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너무 소략해서 실망스럽다(책이라기보단 칼럼집 수준). 리뷰기사를 미리 읽었더라면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후마니타스, 2010)을 대신 손에 들었을 텐데, 아쉽다. 아, 프리모 레비의 자전소설 <휴전>(돌베개, 2010)도 이주에 나온 필독서다. 일단 <한낮의 어둠>에 대한 리뷰를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예전 번역본은 최승자 시인이 옮긴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이었다. 저자는 '아서 케슬러'로 표기됐었다.    

한겨레(10. 09. 18) 어제의 혁명동지가 내 목을 달라는구나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 아서 쾨슬러(1905~1983)의 <한낮의 어둠>(1940)은 스탈린 치하 옛 소련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함께 언급되고는 한다.

소설은 주인공 루바쇼프가 감옥에 수감되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총살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루바쇼프는 10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혁명에 몸을 던졌으며 혁명이 성공한 뒤 당 중앙위원회 회원이자 인민위원, 혁명군 사령관을 역임한 혁명 정권의 중추적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1938년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니콜라이 부하린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쾨슬러 자신은 “루바쇼프의 삶은 이른바 모스크바 재판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종합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모스크바 재판(1936~8)이란 스탈린 개인 우상화를 위해 수천 명에 이르는 혁명 1세대를 숙청한 일을 가리킨다.

루바쇼프가 평생을 바쳐 복무했던 혁명 조국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것, 그것도 불명예스럽고 근거도 박약한 반혁명의 혐의로써 그렇게 한다는 상황은 루바쇼프에게는 절체절명의 딜레마이자 아포리아로서 다가온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그는 외국에서 혁명을 위해 싸우다가 적들의 감옥에 갇히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적국이 아니고 자신은 혁명의 적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 있었지만, 그 조국이 적국이 되었다. 그리고 친구였던 이바노프는 이제 적이 되었다.” 이바노프는 그의 대학 친구이자 오랜 혁명의 동지였으나 지금은 그를 심문하는 자로 처지가 바뀌었다.

모스크바 재판의 배경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알력으로 잘 알려진 혁명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있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는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론’을 대변하는 소설 속 인물은 이바노프에 이어 루바쇼프의 심문을 담당하게 된 젊은 관료 글레트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소. 하나는 모험자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국외 혁명을 위해 우리가 획득한 걸 걸고 싸우려고 하오. 당신은 그들에 속하오. (…) 우린 오직 한 가지 의무를 가지고 있소. 그건 사멸하지 않는 것이오.”

루바쇼프의 딜레마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레트킨과 같은 논리로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독일 청년 리하르트,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알로바, 그리고 벨기에 항구의 부두 노동자 조직 책임자였던 리틀 뢰비 등이 그들이다. 물론 그는 “‘혁명적 철학’으로 저지른 이 모든 사기는 그저 독재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넘버원’(스탈린을 암시한다)을 두고 “그는 권력에서 결코 스스로 사임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폭력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는 견해를, 비록 사석에서이기는 하지만, 내놓기도 했고 그것이 결국 그의 몰락의 빌미가 되었다.

그가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심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은 리하르트들에 대한 죄책감과 무관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 한 개인의 양심과 자유, 윤리 같은 덕목쯤은 희생시켜야 한다는 글레트킨 쪽의 논리에 그가 적어도 반쯤은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판정에서의 마지막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과 당 활동과 화해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죽을 수 있는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심의 전부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혁명가로 평생을 보낸 그가 바로 그 혁명의 조국에서 다름 아닌 반혁명 혐의로 처형당하는 마당에 글레트킨의 논리에 의탁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루바쇼프 자신의 이런 혼란과 동요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초심을 잃고 괴물로 바뀌어 가는 혁명 정권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그것이다. “그건 체제상의 과오였다. 어쩌면 그 과오는 지금까지 그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온 원칙(그 원칙의 이름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이제는 그 자신마저 희생되고 있지만),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 원칙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원칙이 혁명의 위대한 동지들을 죽였고, 그들 모두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이다.”(최재봉 기자) 

10. 09. 17. 

 

P.S. <한낮의 어둠>과 같이 읽어야 할 책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문학과지성사, 2004)과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이다. 김홍우 교수의 <현상학과 정치철학>(문학과지성사, 1999)에도 <한낮의 어둠>을 다룬 논문이 실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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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0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국<부하린,혁명과 반혁명 사이> (문학과 지성사)의 제6장에 부하린 재판과 이에 대한 아서 쾨슬러와 메를로 퐁티의 평가를 소개했더군요.

로쟈 2010-09-20 08:4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책은 어디 박스에나 들어가 있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