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다가 잠시 숨을 돌리며 읽은 시집은(책소개로만) 김경후의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이다. 어젯밤에도 평이 좋다는 시집 두 권을 뒤적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모처럼 가슴이 뚫리는 듯하다. ‘속수무책‘을 읽자니 그렇다.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 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자칫 말장난으로 끝나기 쉬운 착상을 그런대로 버텨내고 있다. 안심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불새처럼‘까지 읽어보며 미덥다고 느낀다.

나는 많이 죽고 싶다, 봄이 그렇듯, 벌거벗은 나무에 핀 벚꽃과 배꽃이 그렇듯, 너무 많이 죽어 펄럭이고 싶다, 파도치고 싶다, 세상 모든 재와 모래를 자궁에 품고, 잿더미의 해일도 일으켜보자, 죽음보다 더 많이 죽어보자, 살과 소음, 그런 거 말고, 삶과 소식들, 그런 건 더더욱 말고, 소금과 술로밖에 쓸 수 없는 시를 쓰고 싶다, 너무 많이 죽어, 늘 증발해버리는 시, 그 시를 주술처럼 중얼거리며 죽고 싶다, 아주 자주, 아주 많이, 보석들 대신 비석들을 갖고 싶다, 비석들도 죽이고 죽고 싶다, 비석들 위로, 너무 많이 죽은 시들을 밤하늘처럼, 피와 황금의 사막처럼 펼치자, 나는 많이 죽고 싶다, 잿가루보다 무수히(‘불새처럼‘ 전문)

‘이주의 시집‘으로 주문해야겠다. 전작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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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송받은 책은 중고본으로 구입한 황석영 중단편전집인다. 창비판이 세 권짜리로 나왔었는데 개정판이 따로 나오는 것인지 오랫동안 품절상태다(<몰개월의 새>만 재고가 남아 있다).

<객지>와 <삼포 가는 길>은 소장도서이지만 서고도서라 당장 손에 들 수 없어서 이번에 재구매했는데, 똑같이 ‘최상‘품으로 주문했건만 전혀 다른 책이 왔다. <객지>와 <몰개월의 새> 판매자가 책의 위쪽과 아래쪽을 잘라낸 파본을 보내온 것이다.

출판사에서 반품도서를 다시 내보낼 때 그렇게 잘라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이 정도로 표가 나게 처리할 리 만무하다. 본문은 읽을 수 있지만 ‘전집‘을 구매한 의미가 없어서 책은 파기하고 다시 구입할 생각이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도 있지만 이런 책을 ‘최상‘으로 분류하는 알라딘의 기준도 문제가 있다.

여하튼 나의 중고본 구입 낭패사에 한 줄 더 적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전집을 마련해놓은 다음에 번듯한 개정판이 다시 나온다면 의문의 1패가 추가되는 것인가?..

PS. 구매 불만족 코멘트를 보고서 판매자가 환불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책은 파본이기에 파쇄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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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하나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현대문학, 2017)가 두 권으로 묶여서 나왔다. 대표 단편 30편이 두 권으로 갈무리된 것인데, <위대한 개츠비> 등 5편의 장편소설로 유명하지만, 피츠제럴드는 160여 편의 단편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당대에는 장편보다 단편이 훨씬 더 수입이 좋았기에 돈벌이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한데 헤밍웨이 단편과는 달리 피츠제럴드의 단편에 대한 문학사의 평가는 박한 편이어서 30편 가량만 읽어줄 만한 것으로 친다. 나머지는 재능의 낭비 사례. 피츠제럴드 단편 전집은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이번에 나온 현대문학판을 비롯하여 국내에 소개된 피츠제럴드 단편선이 대개 30편 가량을 묶고 있다. 구체적인 목록은 대조해봐야겠지만 거의 대동소이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문학판은 번역가를 겸하고 있는 소설가 하창수의 번역이고,민음사의 <피츠제럴드 단편선1,2>는 김욱동 교수의 번역이다. 



세계문학전집판의 또다른 선택지는 펭귄클래식인데, <아가씨와 철학자>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두 권이 나와 있고, 20편 가량의 중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피츠제럴드 작품의 붐을 가져온 건 전적으로 영화화된 두 작품, <위대한 개츠비>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덕분인 것 같다. 피츠제럴드 자신이, 이번에도 돈벌이를 위해서였지만, 영화계일에 관여하기도 했으니 자연스럽게도 보인다.    


겨울학기에 미국문학 강의를 진행하면서 (분량을 고려해) 첫 단편집 <아가씨와 철학자>를 다룰 예정인데, 겸사겸사 대표 단편들을 일독해보면 좋겠다. 번역된 작품집을 모두 갖고 있으니 시간만 내면 되는 일이다...


17.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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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일본 전문가 도널드 킨의 대표작 <메이지라는 시대>(서커스)가 재출간되었다. 당초 <메이지 천황>이란 제목으로 나왔던 책으로 영어판 원제는 <일본의 황제: 메이지와 그의 세계>다.

˝일본문학 연구가 도널드 킨의 <메이지라는 시대>. 일본 유신의 주도 세력들이 어떻게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추구해 나갔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방대한 자료를 기초로 하고 일본의 문화, 예술에 정통한 서구인의 시각으로 비서구 세계에 속한 일본의 근대화 경험을 객관적이고도 균형 잡힌 필치로 생생히 그려냈다.˝

내년 1월 일본문학기행을 준비하면서 이러저러하게 읽을 책이 많은데,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긴 했지만 도널드 킨의 책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절판된 책의 중고본을 구하러고도 했는데 마침 재간본이 나와 다행스럽다. 분량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적당히 추려서 읽어도 되겠다. 내친 김에 영어판도 주문했다.

올겨울에는 일본계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와 무라카미 하루키 강의도 진행할 예정이어서 여러 가지로 일본문학과 가까이 지내게 될 듯싶다. 참고로 일본문학기행에서 주된 탐방 대상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20세기 전반기 작가들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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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롯데문화센터의 요청에 따라 11월 18일(토) 오후(15시 40분-17시 10분)에 '하루키는 왜 읽히는가'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한다(신청은 롯데문화센터 홈피를 통해서 하실 수 있다). 강의는 주로 올여름에 나온 최신작 <기시단장 죽이기>(문학동네)를 중심으로하루키 문학의 매력과 대중성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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