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다가 잠시 숨을 돌리며 읽은 시집은(책소개로만) 김경후의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이다. 어젯밤에도 평이 좋다는 시집 두 권을 뒤적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모처럼 가슴이 뚫리는 듯하다. ‘속수무책‘을 읽자니 그렇다.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 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자칫 말장난으로 끝나기 쉬운 착상을 그런대로 버텨내고 있다. 안심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불새처럼‘까지 읽어보며 미덥다고 느낀다.

나는 많이 죽고 싶다, 봄이 그렇듯, 벌거벗은 나무에 핀 벚꽃과 배꽃이 그렇듯, 너무 많이 죽어 펄럭이고 싶다, 파도치고 싶다, 세상 모든 재와 모래를 자궁에 품고, 잿더미의 해일도 일으켜보자, 죽음보다 더 많이 죽어보자, 살과 소음, 그런 거 말고, 삶과 소식들, 그런 건 더더욱 말고, 소금과 술로밖에 쓸 수 없는 시를 쓰고 싶다, 너무 많이 죽어, 늘 증발해버리는 시, 그 시를 주술처럼 중얼거리며 죽고 싶다, 아주 자주, 아주 많이, 보석들 대신 비석들을 갖고 싶다, 비석들도 죽이고 죽고 싶다, 비석들 위로, 너무 많이 죽은 시들을 밤하늘처럼, 피와 황금의 사막처럼 펼치자, 나는 많이 죽고 싶다, 잿가루보다 무수히(‘불새처럼‘ 전문)

‘이주의 시집‘으로 주문해야겠다. 전작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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