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주 읽어볼 만한 강의자료들을 골라서 프린트하는 작업을 열심히 하다가 프린터 위에 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를 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고 피식 웃었다. ˝태생이 함부로여서 눈은 생각이 많다˝!

점심시간도 되고 했으니 일손을 놓고 시집을 펼쳤다. <눈사람 여관>에 수록된 ‘어떤 아름다움을 건너는 방법‘인데, 1연을 건너뛰면 이렇게 시작한다.

눈이 내릴 것 같다

그 무언가 힘으로도 미치지 못하면서
나를 이토록 춤추게 하는 무언가

내 몸 위에는 한 번도 꽃잎처럼 쌓이지 않는 눈,
바다에도 비벼지지 않는 청어 떼 같은 눈,
태생이 함부로여서 눈은 생각이 많다

잠시, 바다에도 비벼지는 게 뭐가 있을까란 의문과 함께 태생을 문제 삼는 건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는 생각까지. 한 연 건너뛰고서 세 연을 적으면,

그러니까 세상 모든 그날들을 닮으면서 내리는 눈,
오늘 내린 눈을 두 눈으로 받아 녹이고서야
울먹울먹 피가 돌았다

단 한 번도 순결한 적 없이 마취된 척
한 세계를 가득 채운 냄새나 좇으며
허술한 사랑을 하려는 나여

눈이 저 형국으로 닥쳐오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란다

뭔가 절박한 마음을 표현하려는 듯싶지만 내게는 그냥 허술한 시로 읽힌다(이병률의 시는 어깨에 힘을 줄 수록 허술해지는 듯하다). ˝태생이 함부로여서 눈은 생각이 많다˝, 한 문장 건진 걸로 자리를 정리해야겠다.

눈 얘기는 어제 읽은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에도 나오는데 눈길이 좀 머물렀던 시라 같이 기억이 났다.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가 제목이다.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눈길이 머문 건 이 첫 두 연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다음부터의 진행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이제 보니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는 구절은 앞엣시의 ˝오늘 내린 눈을 두 눈으로 받아 녹이고서야/ 울먹울먹 피가 돌았다˝와도 연결되는군. 시인은 눈은 보아야 피가 도는 모양이다(특이한 연결이긴 하다. 이미지 상으로 눈과 피는 보통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지나는 김에 적자면, ‘울먹울먹‘ 피가 돈다는 건 무슨 뜻인가. 피가 비로소 돌게 돼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감격한다? 그런 절박함과 ‘허술한 사랑‘은 또 어떻게 연결되는가? 허술한 시는 너무 많은 걸 짜맞추게끔 한다.

다시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로 돌아오면 마지막 연은 이렇다.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무슨 조폭 영화에나 나오는 이미지를 눈 풍경과 중첩시키고 있는데 공감도안되고, 납득도 안된다(시인은 비비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 시에서도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정도를 챙긴다. 생선도 먹기 위해선 버릴 건 버리면서 다듬어야 하듯 시도 그렇다. 그러다 먹을 게 남아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PS. 눈을 소재로 한 시를 고른 건 첫눈이 올 때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보통 11월 중순에 기온이 떨어지면 오는 것 같으니까(12월인가?). 첫눈이 온다고 하여 있는 일정이 없어지거나 없는 일정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관성처럼 첫눈을 기다린다. 이병률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도 오늘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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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는 책상부터 바닥까지 책으로 쌓여 있는지라 책을 읽으려면 주로 식탁을 이용한다. 길죽한 6인용 식탁이라 독서용으론 모자라지 않다. 그 식탁에도 책들은 쌓여 있고 강의자료들은 널브러져 있다. ‘예술인‘(아침에 알게 됐는데 책을 쓰는 사람을 사람들은 ‘예술인‘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의 식탁은 그 모양이다.

아침을 그렇게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를 읽었고 오규원의 <현대시작법>(문학과지성사)을 펼쳤다. <현대시작법>은 같은 제목의 책들 가운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짐작에 시인 지망생들의 ‘시의 정석‘ 같은 책이다. 나는 몇달 전에 다시 구입했는데, 아마도 처음 구한 건 1990년에 나온 1판이었을 것 같고(확실하진 않다. 좀 뒤늦게 구입한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 구입한 건 올봄에 나온 3판 1쇄다. 1993년에 개정판(2판)이 나왔고 3판은 아마 책의 디자인에만 변화를 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2007년에 오규원 시인이 작고했기 때문이다.

500쪽이 넘는 책이라 단숨에 읽을 건 아니고 생각날 때마다 아무데나 펼쳐보는 용도다. 책의 강점은 저자가 문예창작과 교수를 오래 역임한 덕분일텐데 습작시를 예시로 다수 수록하고 있다는 점. 기성시인의 시뿐 아니라 습작기 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수록하고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설명을 자세히 읽지 않고 예시들만 읽어도 책값은 뽑을 수 있는 책이다.

시를 읽기 위한 또다른 ‘공구서‘로 시 비평집도 고를 수 있는데 아직 통독한 건 아니지만 배후처럼 손 가까이에 두고 있는 책이 조재룡의 <한줌의 시>(문학과지성사)와 황현산의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이다. 두 프랑스문학(더 구체적으로는 프랑스시) 전공자의 한국시 읽기는 면밀하고 깊이가 있다. 나도 나대로 2000년대 이후 시에 대해서 ‘개관‘할 정도가 되면(중요한 시인과 시집을 자신있게 거명할 정도가 되면) 시비평에 대해서도 한마디 거들어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당장은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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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너무 늦게 먹지도 많이 먹지도 않았지만 속이 더부룩해서, 게다가 눈은 말똥말똥해서 잠을 못 자고 있다. 영화를 보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책상 앞에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김삼웅의 <박정희 평전>(앤길)을 읽다가 또 오늘 배송온 시집들 가운데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민음사)를 읽었다. 2012년에 나온 시집이고 내가 읽은 건 올봄에 나온 13쇄. 이 역시 스테디셀러란 뜻인가.

그냥 일독한 소감으론 별로 할말이 없다는 것.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표제시의 시구를 갖다 쓰자면 나는 ‘이 시집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어떻게 이 시집을 다뤄야 하는가˝ 알지 못하겠다. 어떤 시들이길래? 건조과에 속하는 시들이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말린 과일의 표면이 쪼글쪼글하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이라는 말이 유머라면 꽤나 썰렁한 유머다. ˝말린 과일의 표면이 쪼글쪼글하다˝는 대단한 발견일까? 그럼에도 무려 한 연을 구성한다. 그 다음 연도 싱겁기는 마찬가지다.

말린 과일은 당도가 높고, 식재료나 간식으로 사용된다 나는 말린 과일로 차를 끓인다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
실내에서 향기가 난다

너무 심심해서 놀랍기까지 하다. 이런 대목을 시로 읽는다면 그건 순전히 시집에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연을 빼놓긴 했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이런 시가 호평을 받는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다른 시들이 너무 습한 시들이어서, 물에 절은 시들이어서.

황인찬스러운 시를 하나 더 읽어본다. ‘그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그것이 사라졌다

성경을 읽다가
다 옳다고 느꼈다

예쁜 것이 예뻐 보인다
비극이 슬퍼서
희극이 웃기다

좋은 것은 좋다

따뜻한 옷의 따뜻함을 느낀다
컵 속의 물을 본다

투명한 빛이 바닥에 출렁인다

그것은 마시라고 있는 것

해설에서 박수연 평론가는 ‘건조과‘를 두고서 ˝심지어는 차를 끓여 마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도 세속의 잡다한 관념에서 벗어나 오로지 그 대상과 순결하게 관계 맺으며 신성을 제련하는 구도 행위가 된다˝고 적었다. ‘그것‘도 굳이 정당화하자면 그러한 구도적 제스처를 보여주는 시로 읽을 수 있겠다. ˝좋은 것은 좋다˝가 무슨 말인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같은 의미연관을 갖는 게 아니라면 구제할 방도가 없다.

다만 구도 행위나 구도의 제스처를 우리가 굳이 시로 읽고 또 시로 대접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시보다 대단할지는 모르나 시는 아닌 것. 첫 시 ‘건조과‘와 짝을 이루는 마지막 시 ‘무화과 숲‘을 읽는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시의 전문이다. 이 정도 동어반복이면 역설적으로 대담하다고 할 만하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아침에는 아침을 먹다니, 허를 찌르는 수준 아닌가! 아마도 견습시인이 이런 습작을 들고 왔다면 시가 장난인 줄 아느냐며 많이 혼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들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는 행성도 존재하니 세상은 참으로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인찬은 ˝시를 써도 혼나지 않는 꿈˝을 제대로 꾼 시인으로 기억해둘 만하다...

PS. 황인찬은 <희지의 세계>(2015)까지 두 권의 시집을 펴냈다(두 권의 시집을 같이 받았다). 많이 달라졌을 것 같지 않지만 오늘내일중으로 읽어보려 한다. 나로선 난감함을 피력했지만 열독자들도 있을 것이니 리뷰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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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방에 넣고 갔던 시집 세 권에 대해서 몰아서 페이퍼를 적고 나니 진이 빠진다. 할일은 여전히 많지만 금요일 밤에는 사소한 사치로 강의와 무관한 책을 읽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런 여유까지는 부리지 못할 것 같다. 일단은 기력이 없으니.

대신에 책 한권을 골라놓는다.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신작 <내 마음의 낯섬>(민음사)이다. 2013년작이자 파묵의 아홉번째 소설. 더불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의 최종 후보작으로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경합했던 작품이기도 하다(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인터내셔널은 원작이 아니고 영어 번역작에 주어지는 상이다).

˝전 세계가 사랑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아홉 번째 장편 소설.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때 이스탄불을, 이스탄불을 설명할 때 나 자신을 설명한다˝고 밝히며 이스탄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밝힌 바 있던 오르한 파묵은 <내 마음의 낯섦>에서 문화적으로 복잡한 이스탄불의 40년 현대사를 흥미로운 스토리와 함께 환상적으로 그려 냈다. 

이 소설로 노벨 문학상 이후에 인생의 역작을 저술하는 희귀한 작가가 되었다는 평을 들은 오르한 파묵은 신작에서 이스탄불 거리를 누비며 ‘보자‘라는 터키의 전통 음료를 파는 한 소년 메블루트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보오오오자˝를 외치며 빈민가, 역사 깊은 골목을 구석구석 누비는 메블루트. 현대 이스탄불의 정치와 사회, 문화 그리고 그 속에서 소시민들의 삶이 생생하게, 또 다채롭게 펼쳐지는 작품이다.˝

이스탄불에 대한 오마주라면 그의 에세이 <이스탄불>(2008)도 떠올릴 수 있겠다. 한때 품절됐었는데 이제 보니 정상적으로 판매중이다. 소장본의 행방을 찾지 못하면 재구입도 고려해봐야 하는 책이다.

세계문학 강의를 하면서 언젠가는 터키문학도 한번쯤 다루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가장 많이 소개된 파묵의 작품이 중심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강의에서는 <내 이름은 빨강><하얀성><새로운 인생> 등을 읽었는데 나머지 작품들도 기회를 보아 다뤄보고 싶다(분량이 많은 작품들이 강의에서 걸림돌이긴 하지만). 일단은 최근작에 속하는 <순수박물관>과 <내 마음의 낯섦>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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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시인 황유원의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를 펴들고 몇편 읽지 않아서 받는 인상은 ‘우량시인‘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우량아‘를 시인에도 대입한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이즈‘가 다른 대형 신인. 실시간으로서 순간을 최대화하는 역량이 이 시인의 자질이고 재능이다. 적당한 이름이 따로 생각나지 않아 일단 ‘실시간 시‘라고 부르겠다. 그의 솜씨를 잠시 감상해본다. ‘바람 부는 날‘이다.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려과 공평함
그러나 고층빌딩의 견고함
원피스의 펄럭임은 야외에 달린 커튼
걸어다니는 커튼, 긴 머리의 자유로움과
저 여잔 머릴 기르길 참 잘했다는 생각

이렇게 죽 이어지는 시다. 무엇이 강점인가? 생생한 현장감이다. 이런 시를 실내에서 썼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건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쓴 시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쓴 시다. 실시간을 구성하는 순간순간을 바닷물을 움켜쥐듯이 손에 쥐었다가 놓았다가 해 가면서 쓰는 시, 그리고 물론 소주 한 병에 물회 한 접시를 시켜놓고 쓰는 시.

바람 부는 날 멀리서 바라보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빌딩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테이블에 올려진 물회에 뜨거운 밥 한 그릇을
소주 한 병 시키고 잔 세 개를 부딪칠 때 불어오는 바람
바다보다 더 바다 같은
바람보다 더 바람 같은 바람의 통로 안에 담겨 한 접시의 물회를
이제 더 큰 바람이 불어오겠지
암 그렇고말고
(...)
한 접시의 물회를
바람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마지막 잔을 비우고 그 속에 한 잔의 바람과 평화를
이 세상 모든 바람이 지금 여기로 불고 있다는 착각
지금 이 바람은 우릴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는 확신
이 모든 접시들과 수저들이 처음 보는 우릴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게 바람이 하는 젓가락질이라는 망상

이제 중반까지다. 실시간 시는 의도가 작용할 수 없는 시다. 예측불가한 현재의 감각이 시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시인을 무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유로운 망상과 몽상에 자신을 내어주고서 다만 취기와 함께 앉아있을 뿐이다.

잔이 세 개였으니 세 명이 ˝한치 학꽁치 미주구리 문어 대가리˝를 안주 삼아 소줏잔을 부딪치면서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을 몸으로 느낀다. 이 시는 의도도 없고 주제도 없으니 어떻게 끝나는가. 술자리가 파하면 끝난다. 바람 부는 날의 시는 다른 결말을 가질 수도 없다.

오늘 왜 난 자꾸 눈물이 날까
이봐 그러고 있지 말고 저길 봐
어느새 일렬로 늘어선 소주병들이 진한 방풍림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봐 앞에 앉아서 자꾸 핸드폰이나 쳐다볼 바엔 차라리 지나가는 여자 다리를 쳐다보지 그래
난장판이 되기 직전 빈 접시의 바람을 집어먹는 나무젓가락의 튼튼함
우리가 이제부터 불어올 모든 바람을 이 한 잔의 공간 속에 모두 쑤셔 담을 순 없겠지만
마침표같이 눌러놨던 돌멩이들 죄다 굴려 버리는 바람
그러나 어딘가에선 반드시 멈출 돌멩이를 바라보며
바람 부는 날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취기에 시원한 사이다 한 잔씩을 따라주며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빈 잔은 이제 그냥 빈 잔으로 남겨 두고

중간에 자를 수도 없어서 마지막 시행까지 옮겼다. 이미 적었지만, 무얼 노래하는 시도, 표현하는 시도 아니다. 시를 채우고 있는 건 실시간의 현장감과 바람의 공간감이다(그렇다, 바람은 공기에 부피감을 부여함으로써 공간화한다). 시와 함께 독자는 시인의 술자리에 동석한다. 그리고 얼만큼의 시간을 공유한다. 취기까지 공유한다면 독자도 시인과 같은 족속이 될 만하다...

PS. 덧붙이자면, 시인은 밥 딜런의 <시가 된 노래들>(문학동네)도 공역했다. 대표적인 노래 ‘불어오는 바람 속에‘도 우리말로 옮겼는데 ‘바람 부는 날‘의 시인이 옮겼다니까 수긍이 간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얼마니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비둘기는 모래 속에서 잠이 들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많이 하늘 위로 쏘아올려야
포탄은 영영 사라질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나의 친구여, 바람 속에서 불어오고 있지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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