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일정이 없는 한 주말의 일과는 강의자료를 만드는 일로 채워진다. 매주 적지 않은 강의를 하다 보니 강의자료를 만드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때로는 몇 시간씩 타이핑을 할 때도 있다.

아침에 떨어진 프린터 토너를 오후에 이마트에 들러 사온 이후엔 저녁을 먹은 시간을 제외하면 내내 강의자료를 만들고 프린트하는 일을 반복했다. 다시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 있어서(과열인가?) 머리를 식히며 시집을 펼쳤다. 보드카의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것 비슷하게.

86년생 시인 송승언의 시집 <철과 오크>(2015)에서 아무 곳이나 펼쳤는데 ‘새와 드릴과 마리사‘가 그럴 듯하게 여겨졌다. 오규원과 박상순을 연상케 하는 시인이다(안 그래도 박상순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문학과지성사)이 최근에 재간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오규원을 떠올린 건 ‘골목‘ 때문일까?

골목은 차다 골목은 반짝인다 골목은 깊이를 잃은 채 골목은 갈라진다 골목은 둘로 나뉜다
셋으로도 나뉜다 넷으로도 나뉜다

죽은 새를 주워 저글링을 했다 죽은 새를 양손으로 주고받으며
둘로 갈라지는 골목을 걷는다 셋으로 갈라지는 골목을 넷으로 갈라지는 골목을

걷는다 의자가 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의자 하나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의자 둘...

이 시인에게서, 혹은 이 시집에서 ‘새‘는 어떤 의미로, 혹은 형상으로 반복되는지는 검토해볼 일이지만, 여하튼 죽은 새를 저글링하면서 여러 갈래로 나뉜 골목길을 걸었다는 게 3연까지의 진술이다. 이 진술을 실어나르는 언어의 리듬감이 좋다. 영혼과 성당, 음악 등의 단어가 나오는 다음 두 연을 건너뛰면 마지막 두 연은 이렇다.

죽은 새가 살아나고 반짝이는 날개를 꿈틀거리면 짓눌러 죽은 새로 만드는 일
냉담자들만이 음악을 하지 열심히 하지

지겨울 때까지 그 짓을 했다 더는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둘째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셋째 골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죽은 새로 저글링을 했다‘와 등치되는 건 ‘음악을 했다‘와 ‘그 짓을 했다‘다. 성당 주변을 빙빙 돌면서 저글링=음악=그 짓을 지겨울 때까지 반복했다는 게 시의 요지.

‘드릴‘과 ‘마리사‘는 시집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 (전후를 살피지 않아) 모르겠으나 시적 화자는 ˝성당에 들지 않고 성당을 뜨지 않는˝ 냉담자로 스스로를 지칭한다. 열심히 음악을 하기에 리듬은 만들어 내지만 죽은 새는 죽은 새일 뿐(혹여 살아나도 죽은 새로 만들 뿐) 의미가 충전되지는 않는다. 무의미의 리듬만 남게 되는가? 일견 그렇게 보인다.

그렇게만 읽혀도 재미있는 시다. 그 재미는 물론 리듬이 만들어내는 재미다. 리듬이 죽으면 송승언의 시도 죽은 시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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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도 피식하게 된다.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의 <나는 강이지로소이다>(현암사). 문학 독자라면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패러디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겐 생소한 편인데 저자는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방송작가였다고.

˝나는 강아지다. 이름은 아직 없다, 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돈 마쓰고로라고 한다.˝

이렇게 서두를 뗀 마쓰고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일본에서는 TV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다. 영화 제목은 <돈 마쓰고로의 생활>(1986), 속편은 <돈 마쓰고로의 대모험>(1987).

자연스레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비교해서 읽고픈 마음이 생기는데, 1월 일본문학기행 때 소세키 문학관과 몇몇 관련 장소를 찾아볼 예정이라 안 그래도 다시 읽어보려 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창비 세계문학전집판도 나와 있는데 제목은 <이 몸은 고양이야>로 바뀌었다. 새로운 시도이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이노우에의 책도 <이 몸은 강아지야>가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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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내내 피곤했던 터라 일찍 잠자리에 들어 마땅하지만 눈이 말똥말똥한 상태라 버티고 있다. 어제(날짜로는) 아침 건강검진 때 혈압이 높다는 얘기를 들은 탓인지 뒷목이 당기는 것 같기도 하다. 86년생의 젊은 시인 박성준의 시집들을 읽다가 ‘기계들의 나라‘에 눈길이 멈춰진 이유. 이렇게 시작한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심장이 머리보다 위에서 뛴다. 이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상에! 생각하는 심장이라니? 머릿속이 다 쏟아질 것 같은 기분입니다.

주로 쥐어짜내는 시들을 읽다가 모처럼 쏟아내는 시를 읽으니 반갑고 유쾌하다(머리만 무겁지 않다면 날아갈 것 같다고 썼겠다). 박성준은 시를 따로 궁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냥 생각이 시로 비져나오는 부류에 속한다.

생각이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제 숨을 쉴 때마다
내 몸은 생각이다.

발상이 억지스럽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시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고 조바심을 내지도 않는다. 이력을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다고 하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듯싶다. 시를 쓰는 건 일도 아닐 테니(시를 쓰는 게 일인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를 지어내는 시인들!) 앞으로 과제는 중요한 시를 쓰는 것. 시가 그냥 시에 그치지 않는 것.

당장은 그냥 솜씨만 감상한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말들의 호연.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괜찮아 심장이 터지지는 않을 테니까. 심장이 터지면 속으로 했던 생각들이 분출되겠지? 아니다. 생각에 그칠지도 모른다. 어슬렁거리며 저 풍경들이 내 심장 속으로 이제 다 들어올지도 모른다. 내가 우연이 될지도 몰라. 사건이 될지도 몰라.

시가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옮겨적었다. 박성준은 두 권의 시집을 펴냈다. 차례로 <몰아 쓴 일기>(2012)와 <잘 모르는 사이>(2016)다. ‘기계들의 나라‘는 <잘 모르는 사이>에 수록돼 있다. 아직 읽는 중이니 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두 시집은 젊은 시인들이 시에 대한 질문에 답한 <나는 매번 시쓰기가 재미있다>(서랍의날씨)에 이름이 실린 걸 보고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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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귀가 후에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오늘 온 시집들 가운데 두 권을 읽었다. 며칠 전에 기대감을 적은 김경후의 최근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과 그보다 앞서 2012년에 나온 <열두 겹의 자정>(문학동네)이다.

읽은 순서는 출간 순서인데 <열두겹의 자정> 이전에 낸 첫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가 빠졌다. 주문에서 빼놓은 건 아마 배송예정일이 달라서였을 거 같은데 뒤에 나온 시집 두 권을 읽고 나니까 따로 읽어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내가 호감을 갖고 읽은 ‘불새처럼‘이나 ‘속수무책‘ 같은 시들이 희소했기에. 흔히 하는 말로 ‘그게 다예요‘에 해당한다(이 시인은 여러 편의 칼리그램(형상시)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미 한국시에서도 더이상 새롭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다).

놀라울 뻔한 시는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의 첫 시, ‘입술‘이었다.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이렇게 첫 연이 시작하는데 도발적인 비유(˝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와 상투적인 진술(˝네게 닿고 싶다고˝)이 기대반 염려반으로 나뉘다가 결국 염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마지막 연.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결국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냥 ‘절벽‘에서 멈춘 시가 되었다.

<열두 겹의 자정>은 사정이 더 좋지 않다. 물론 내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일 뿐이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취향이 까다로운 독자인 것인지 의구심도 갖게 된다. 더불어 시집 해설을 쓰는 문학평론가라는 직업도 때론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경후의 시는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따라가는 순례의 여정인 것만 같다.˝(이소연)

그렇지만 김경후의 순례를 따라가는 독자의 여정은 첫 시 ‘토르소‘에서 멈췄어도 무방했을 듯하다.

텅 빈 카페 선반 위
토르소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나절
기다리지 않기로 한 뒤
또 한나절
허벅지와 미소
울부짖음과 발바닥
있어선 안 되는 건 이미 모두
없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그것뿐
벌건 할로겐 램프 아래
벌거벗은
토르소
잊기의
기억

내가 덧붙일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더이상 잃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토르소의 세계를 김경후는 경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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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이시구로의 인터뷰와 그에 관한 연구자료는 지난 주말까지 다 구비해놓았지만 오늘 강의는 작품과 그에 대한 논문 두 편 정도만을 참고했다. 예열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지만 전체 강의의 가닥은 잡을 수 있었다. 28살에 첫 작품을 발표한 이시구로의 차기작들은 나도 기대가 된다. 그는 4년 뒤 두번째 작품으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1986)를 발표하게 될 것이다.

전작 읽기가 가능한 작가여서 작품은 발표순으로 읽어나갈 예정이지만 부커상 수상작 <남아있는 나날>(1989) 이후에 발표한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1995)만 뒤로 미루었다. 분량도 가장 두꺼우면서 가장 난해한 작품. 부커상 수상작가의 ‘갈라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강의에서 이 작품까지 다루게 될지는 다음주에 결정할 예정이다(다루게 된다면 12월의 한 주를 나는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과 씨름하며 보내야 한다).

역자도 충분한 고려 끝에 ‘A Pale View of Hills‘를 ‘창백한 언덕 풍경‘으로 옮겼지만 일반적인 선택은 ‘희미한 언덕 풍경‘이었을 것이다. 나로서도 더 무난하지 않나 싶은데 ‘창백한‘은 너무 이미지가 강하게 여겨져서다. ‘희미한‘ 내지 ‘흐릿한‘이 작품의 의도와 더 호응하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창백한‘ 기억이 아닌, ‘희미한‘ 기억, ‘흐릿한‘ 기억을 다루고 있기에 그러하다. 동시에 그렇게 희미한 과거를 더듬으며 재구성하는 것은 화자(에츠코)의 불가피한 전략이기도 하다. 자살한 딸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기에.

‘전후 소설‘이면서 여성 문제를 다룬 ‘여성 소설‘로 읽히는데, 그 점을 문제 삼은 리뷰가 적은 것은 의외다. 이시구로의 인터뷰나 자료에서 확인하고 싶은 부분인데 이 작가의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처리방식은 충분히 주목거리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어머니와의 관계도 궁금한데, 이런 개인사는 인터뷰에 자세히 안 나올지도 모르겠다.

강의자료에도 넣은,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조각상 사진을 옮겨놓는다. 작품에서도 에츠코가 뜨악하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도 원폭과 무슨 상관이 있는 조각상인지 의아하다. 에츠코의 희미한 사적 기억은 이 공적인 기억에 대한 교정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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