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2월에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롯데백화점이 개점할 예정이라고 이미 보도된 바 있다(내가 알기에 러시아에 최초로 들어서는 외국 백화점이다). 러시아 최대 백화점은 모스크바의 <굼(GUM)>이다. GUM은 'Gosudarstvenniy Universalniy Magazin'의 약자로 국영백화점' 정도의 뜻이며, 모스크바의 굼은 크레믈린 바로 옆, 붉은광장 동편에 있다. 굼 광장과 내부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을 옮겨놓는다.

Gum Department Store

A Gallery in Gum

GUM stores center square

GUM stores center square

Clinique Boutique at Gum

06. 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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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4-0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사진들은 직접 찍으신 거예요? 멋지다...

로쟈 2006-04-0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그럴리가요? 사진 작가들이 찍은 겁니다.^^

릴케 현상 2006-04-07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멋져요^^

라주미힌 2006-04-07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건물은 다 똑같아 보이는데.. ㅎㅎㅎ

로쟈 2006-04-0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나라 건물들이 낡아도 '볼품'은 있는 편입니다...
 

다소 철지난 자료이지만, 체첸과 러시아에 관한 기사 중 드물게도 한국 기자가 현지 취재를 통해 작성한 것이고 현장의 목소리들을 많이 담고 있기도 해서 여기에 옮겨놓고 잠시 '체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쟈료는 <신동아>(2003년 1월호, 470-83쪽)에 실렸던 것이며, 필자는 김기현 특파원이다(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한 술자리에서 합석한 기억이 있다). 인용해온 글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강조와 이미지와 군말들은 물론 모두 나의 것이다.   

편집자: ‘신동아’에서는 신년 호부터 ‘세계의 갈등 지도’를 연재합니다. 체첸 북아일랜드 이스라엘 유고 등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을 매달 한 곳씩 골라 현황과 문제점에 대한 심층취재와 더불어 문화·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첫 순서인 이번 호에서는 최근 모스크바 인질사건으로 화제가 된 체첸사태를 다뤘습니다.

-모스크바극장 대규모 인질사태 후 러시아는 전면적인 체첸반군 섬멸전에 들어갔다. 러시아가 체첸 독립을 허용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송유관이다. 세계 최대 유전인 카스피 해에서 생산된 석유는 체첸을 거쳐 러시아와 유럽으로 공급된다. 2002년 10월26일 세계의 눈과 귀를 잡아끌었던 모스크바 뮤지컬극장 인질 사건이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은 채 3일만에 막을 내렸다. 치명적인 마취가스를 무차별 살포해 사태를 강제진압한 러시아 당국의 무모함도, 국제사회의 외면으로 ‘잊혀진 전쟁’이 돼버린 체첸사태를 초유의 극장 인질극으로 다시 부각시키려던 체첸반군의 시도도 함께 묻혀버렸다. 마치 세상이 무너질 듯 호들갑을 떨던 CNN 등 서방의 거대 언론들도 이라크 사태 등 다른 뉴스거리를 찾아 모스크바를 떠났다.(*아래 사진은 인질극이 일어났던 극장.)



-인질 사건이 일어나자 미-러 정상회담까지 취소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02년 11월11일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럽연합(EU)-러시아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체첸정책은 더 가혹해졌다. 체첸에서 병력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려는 계획은 취소됐다. 대신 체첸 주둔 러시아군은 전면적인 반군 섬멸전에 들어갔다. 전선이 따로 없는 게릴라전으로 전개되고 있는 체첸전이 격화되면 또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될 것인가?(*아래 사진은 장례식 모습.)



-그러나 ‘반군 색출’을 명목으로 체첸 전역에서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는 무차별 체포와 총살 강간 약탈 등 러시아군의 만행은 이제 외부로 알려지기 힘들게 됐다. 푸틴 정부는 인질사태를 계기로 소련 시절에나 볼 수 있던 엄격한 언론통제에 들어갔다. 러시아 언론사는 반군의 주장을 전하거나 심지어 반군의 모습을 화면이나 사진으로 보여주기만 해도 폐쇄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관련 언론인이 구속되는 것은 물론이다. 모스크바 지역방송인 모스코비야가 폐쇄되고 폭로전문 주간지 베르시야가 압수수색을 당하자 러시아 언론은 숨을 죽이고 있다.

-전화(戰禍)를 피해 모스크바 등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체첸인들은 이제 잠재적인 테러범 취급을 받고 있다. 이들은 경찰의 일상적인 검문과 체포 폭행 등에 시달리고 있다. 경찰뿐 아니라 ‘스킨헤드’라고 불리는 신(新)나치주의를 신봉하는 극우파청년들이 거리나 지하철 등에서 닥치는 대로 체첸인을 사냥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은 이들의 초법적인 테러를 못본 척한다. 푸틴 정부는 이번 인질사건을 그동안 러시아에 불리했던 국제여론을 반전시키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체첸사태가 거론되면 늘 수세에 서야 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은 체첸에서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군의 난폭하고 잔인한 행동을 들어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했다.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등 유럽 일부 국가들은 자국 내에 체첸 망명정부의 대표부 활동을 허용해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이라는 반군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질사건 이후 러시아 정부는 적극적인 외교 공세에 나서고 있다. 체첸전을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對)테러 전쟁과 연결시킨 것이다. 체첸 망명정부와 반군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나 알 카에다와 마찬가지로 테러조직이라는 것이 러시아의 논리다. 여기에는 러시아가 그동안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해왔으니 서방도 앞으로 체첸사태에 눈감아 달라는 은근한 압력이 포함돼 있다.



-러시아는 체첸반군을 국제테러조직에 포함시켜 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과 반군사령관 샤밀 바샤예프 등 대부분의 체첸 지도자가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의해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러시아는 덴마크 정부가 수도 코펜하겐에서 세계 체첸인 대회의 개최를 허용하자 마침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던 EU-러시아 정상회의를 거부해 결국 회의 장소를 벨기에 브뤼셀로 옮겼다. 체첸 망명정부의 대표부가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이의 폐쇄를 요청했다. 해외에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체첸인들의 유일한 창구인 체첸 대표부는 독일 등 몇몇 유럽국가와 터키 등 이슬람권에 있다.

-미국은 그동안 러시아와 외교적 갈등을 빚을 때마다 은근히 체첸사태와 인권문제를 연결시키며 러시아에 압력을 넣어왔다. 그러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한 미국은 당분간 체첸사태를 거론하는 일조차 삼갈 전망이다. 인질 사건을 이용해 주도권을 잡은 듯 보이는 러시아가 오랜 골칫덩어리이던 체첸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기자는 2000년 5월, 1주일 동안 체첸을 취재했다. 당시 취재허가를 내주면서 러시아군 당국은 “체첸전은 이미 사실상 종료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1999년 10월 체첸을 다시 침공해 2차 체첸전을 시작한 러시아군은 석달 만에 수도 그로즈니(Groznyi)를 비롯해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는 것이다. 체첸군은 남부 카프카스 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피해 산악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사진은 체첸전은 소재로 한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의 <카프카즈의 포로>(1996). 주연은 영화에서 체첸군의 포로가 된 러시아군 병사들로 나오는 올렉 멘쉬코프와 감독의 아들 보드로프 주니어가 맡았다. 국내 출시명은 <코카서스의 죄수>이고 영어판 제목은 'Prisoner of the Mountains')

-그러나 체첸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러시아군의 설명을 믿기 어렵게 됐다. 러시아군 수송기를 타고 체첸 접경 모즈도크 군기지에 온 기자는 헬기로 갈아타고 체첸 주둔 러시아군사령부가 있는 한칼라로 들어갔다. 기자는 “자동차로 다니며 현지 정세를 상세히 취재하고 싶다”고 공보관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사령부 공보관인 알렉세이 바신 대령이 어이없다는 듯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미스터 김, 체첸은 처음이지”라고 되물었다. 그때 체첸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은 조금만 먼 거리는 헬기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육로로 이동하다가는 매복에 걸려 몰살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헬기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헬기는 늘 전속력으로 날아다녔다. 대공포나 이동식 지대공 미사일에 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요 도시는 점령했지만 이들을 잇는 도로는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점(點)은 확보했지만 선(線)은 확보하지 못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막상 그로즈니에 들어갔더니 러시아군은 어두워지면 벙커 밖으로도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시내 곳곳에 숨어있는 저격수들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시내 여기저기서 총성이 멎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군은 낮에만 그로즈니의 주인이었고 밤이 되면 시내는 다시 반군 세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결국 러시아군은 그나마 점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사진은 체첸전쟁으로 파괴된 수도 그로즈니.)

-러시아군 당국의 공식 발표와 달리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한 기자는 한칼라 기지에서 만난 러시아 국방부 기관지인 '크라스나야 즈뵤즈다(赤星)' 기자에게 물었다.

“언제쯤 전쟁이 끝날 것 같습니까?” 현역 육군 대령인 그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무슨 전쟁 말인가? 이 전쟁은 200년도 넘게 계속돼 왔어. 여기는 늘 전쟁중이야.” 이게 무슨 말인가?

-여기서 체첸전쟁의 역사를 다시 짚어보자. 우리는 흔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2차 체첸전’이라고 부른다. 1차 전쟁은 1994년 12월 러시아군이 체첸을 침공하면서 시작돼 1997년 1월 체첸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된 전쟁을 가리킨다. 그러나 엄밀히 얘기하면 러시아를 상대로 한 체첸인들의 항쟁은 2세기 넘게 계속돼 왔다.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는 러시아어로 ‘무서운 곳’이라는 뜻이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폭군인 이반 대제를 러시아어로 ‘이반 그로즈니’라고 부른다(*사진은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그림 '이반 그로즈니'.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폭군 이반>의 원제가 '이반 그로즈니'이다.) ‘무시무시한 이반’이라는 뜻이다. 왜 러시아인들은 체첸의 수도를 ‘무서운 곳’이라고 이름지었을까? 제정(帝政) 러시아는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팽창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동쪽으로는 시베리아를 지나 극동까지 진출했고 중앙아시아로도 뻗어나갔다. 러시아의 팽창정책은 남쪽으로 카프카스(Kavkaz) 정복으로 이어졌다.(*아래 사진은 카프카즈 동부의 최고봉 '카즈벡'. 해발 5033m이다.)

-영어로 코카서스(Caucasus)라고 하는 카프카스 지역은 카스피해(海)와 흑해(Black Sea) 사이에 카프카스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지역이다. 카프카스 산맥은 유럽 최고봉인 엘부르스(5642m)를 비롯해 4000m가 넘는 험준한 고산들이 1200㎞에 걸쳐 이어져 있다.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선생은 생전에 “카프카스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다”고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산과 물, 기후와 공기 등 자연환경이 좋아 장수촌(長壽村)으로 유명했다. 기자는 몇차례 카프카스 지역에 갈 때마다 ‘지상의 마지막 낙원’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곳은 소련 시절에는 대표적인 휴양지였다.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이라서 그런지 일찍부터 다양한 민족이 모여들어 복잡한 인종분포를 이루며 살아왔다. 현재도 50개 이상의 민족이 카프카스 지역에 살고 있다. 이 지역까지 밀고 내려온 러시아 정복군은 1800년에 그루지야를 귀속시키고 1830년에는 카프카스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카프카스산맥에 근거를 둔 유목민족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들은 7세기부터 이 지역에 살고있던 이슬람교도인 나흐(Nakh)족이었는데 거칠고 사납기 그지없었다. 당시 유럽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러시아군이었지만 고전을 거듭해 무려 50여 년 동안 전쟁이 계속됐다. 나흐족 중 서부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그나마 일찌감치 손을 들었지만 동부에 거주하던 나흐족은 끝까지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동부 나흐족을 체첸인으로, 서부 나흐족은 잉구슈인으로 부르며 구분하기 시작했다. 체첸인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면서부터 러시아와 체첸의 길고 질긴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중반 체첸에는 셰이크 샤밀이라는 뛰어난 지도자까지 나타나 더욱 조직적인 반(反)러 항쟁을 주도했다. 결국 당시 러시아 최고의 용장 알렉세이 예르몰로프 장군까지 직접 현지로 내려가 독려한 끝에 1859년 샤밀을 체포하고 겨우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군이 체첸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얼마나 몸서리쳤으면 수도를 그로즈니라고 이름 붙였겠는가? 그러나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체첸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어났다. 20세기초 제정 러시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다시 항쟁이 시작됐다. 이 때는 민족적 자각에 이슬람원리주의까지 더해졌다. 러시아로부터의 민족해방 전쟁이면서 동시에 슬라브정교의 러시아에 대항하는 이슬람 성전(聖戰)의 성격까지 띠게 된 것이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곧이어 백군과 적군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자 체첸인들은 한때 이웃 다게스탄 지역까지 포함된 체첸-다게스탄 이슬람공화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소련은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해 잉구셰티아와 합쳐 체첸-잉구셰티아 자치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체첸인들은 러시아인과 슬라브정교에 대해서만큼이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반감을 보였다. 결국 1930년대 스탈린 시대의 광풍이 체첸까지 몰아쳤다. 1937∼38년 소련 비밀경찰은 북카프카스 전역에서 지식인과 민족 지도자 등 10만여 명을 검거해 처형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추방했다.

-체첸인들은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또다시 독립을 시도했다. 체첸인들은 카프카스 지역을 일시 점령한 나치 독일군과 힘을 합쳐 소련군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 대가는 엄청났다. 1944년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든 체첸인과 잉구슈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다. 스탈린은 1937년 극동 지역에 살고 있던 20여만명의 한인들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체첸인과 우리 민족은 비극적인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탈린이나 당시 소련 비밀경찰 대장으로 강제이주를 지휘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러시아인이 아닌 그루지야인이었다. 그루지야 역시 카프카스 지역에 속해 있다. 체첸인들은 이웃 민족 출신으로부터 탄압을 당한 것이다.

-중앙아시아로 끌려가던 일부 체첸인은 탈출해 소련에 대항하기도 했으나 강제이주와 항쟁 과정에 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20여만명이 희생됐다.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체첸인들은 스탈린 사후인 1957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강제이주 사건으로 체첸인들은 더 이상 소련 체제에 맞서 대규모 저항을 벌이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반러 감정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프카스 지역에 있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그루지야가 독립해 주권국가가 됐다. 그러나 체첸을 비롯해 잉구셰티아, 북(北)오세티아, 다게스탄 등은 여전히 자치공화국으로 러시아연방에 남아 있게 됐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구 소련군 장성 출신인 조하르 두다예프(1944-1996)다. 체첸 출신으로 소련군에서 가장 출세한 그는 고향에 돌아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자마자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그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대통령직에 재임했다).  

-러시아 국경 인근 체첸 난민촌에서 어린이가 추위도 잊은 채 전쟁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소련 해체 직후의 혼란 때문에 러시아는 체첸에 관심을 돌릴 여유도 없었고 이 틈에 체첸은 사실상 독립국 행세를 했다. 그러나 겨우 한숨을 돌린 러시아는 1994년 12월 체첸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당시 파벨 그라초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게 “1개 공정여단만 보내면 당장 체첸을 평정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라초프 장관은 과거 체첸인들이 막강한 제정 러시아군이나 소련군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더구나 소련 해체 후 러시아군의 전력은 크게 떨어졌다. 러시아군은 단숨에 수도 그로즈니까지 밀고 내려갔지만 그때부터 지루한 시가전이 시작됐다. 러시아군은 이 과정에 엄청난 피해를 봤다.

-전쟁이 1년 넘게 이어지자 러시아 내에서 반전 여론이 일어났다. 특히 체첸전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병사들의 어머니회’를 만들어 반전여론을 주도했다. 탈영병도 속출했다. 허약한 옐친 정부는 체첸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러시아군은 인공위성으로 두다예프 대통령의 위치를 확인해 미사일 공격으로 살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체첸군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1996년 대선에서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한 옐친 대통령은 체첸과 평화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이 해 8월 평화협정이 맺어졌고 러시아군은 체첸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이는 사태를 미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체첸의 지위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첸은 국제법이나 러시아 헌법상으로는 여전히 러시아연방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어정쩡한 위치에 놓였다.

-체첸은 경상북도만한 넓이인 1만7000㎢로 러시아 전체 국토의 1700분의 1에 지나지 않는 작은 나라다. 인구도 겨우 80여만명.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체첸의 독립을 용납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 송유관을 들고 있다. 최근 세계 최대규모의 유전으로 떠오른 카스피해 유전에서 생산된 석유는 체첸을 거쳐 러시아와 유럽으로 공급된다. 체첸은 독립할 경우 이 송유관 통과료가 가장 큰 국가 수입이 될 것으로 여길 정도. 반면 러시아는 안보자원 중 하나인 석유 수송을 체첸에 의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체첸은 대규모는 아니지만 상당한 양의 원유도 갖고 있다. 일부는 이미 개발해 러시아와 전쟁하는 비용으로 충당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1999년 10월 체첸을 재침공하면서 유전과 정유공장 시설부터 폭격했다.

-체첸을 풀어줄 수 없는 정치적 이유도 있다. 러시아는 89개 지방정부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이다. 물론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 등 슬라브계가 다수지만 그 외에도 수십여 소수민족이 역내에 살고 있다. 21개 자치공화국은 러시아인이 아닌 다른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자치공화국은 외교권은 없지만 상당한 수준의 주권을 보장받고 있다. 공화국 수반은 연방정부 수반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으로 불리고 공화국 헌법도 가지고 있다. 타타르인들의 나라인 타타르공화국 등은 지금 당장 독립해도 될 만한 영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출범한 러시아연방은 연방해체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다. 소련이 15개 국가로 나눠졌듯이 러시아도 또다시 몇조각으로 쪼개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우려다.

-실제로 체첸처럼 내전을 벌이면서까지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경우는 아니지만 타타르도 한때 연방헌법 비준을 미루는 등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90년대 중반에는 시베리아의 몇몇 공화국과 주(州)가 가칭 ‘시베리아 공화국’을 구성하겠다는 구상을 공개해 중앙정부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러시아가 체첸의 독립을 허용할 경우 다른 자치공화국의 독립 열망을 자극해 자칫하면 전국적인 내전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 각지에 배치돼 있는 핵무기 통제도 어려워져 미국 등 서방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러시아의 국민감정도 체첸 독립에는 반대다. 2차례의 전쟁과 체첸인들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테러에 매일같이 시달리면서 “차라리 체첸을 독립시켜주자”는 여론도 높아졌지만 여전히 체첸의 분리독립에 부정적인 여론이 우세하다. 전문가들은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욕심과 아직도 남아있는 제국주의적 정서 때문으로 분석한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덩어리를 갖고 있는 러시아지만 한치의 땅이라도 잃는 것은 참지 못한다. 일본으로부터 뺏은 북방 4개 섬을 되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나 중국과 전쟁까지 하면서 국경분쟁을 벌인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 것을 아직도 아쉬워하면서 선거 때마다 알래스카 반환 추진 공약이 나오는 판이다. 물론 미국이 들으면 황당하겠지만….

-한때 미국과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하던 초강대국에서 가난하고 초라한 대국으로 몰락한 현실에 대한 묘한 보상심리까지 있다. 체첸 등의 독립을 마치 과거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상실하는 것과 같은 아픔으로 여기는 것이다. 조그마한 체첸은 러시아 국내정치에도 핵폭탄급 영향을 끼치는 변수다. 옐친 전 대통령이 임기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임기도 못 채우고 하야하게 된 배경에는 건강문제와 경제난 등도 있지만 결국 체첸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가 있다.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로 전비를 낭비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도 체첸을 장악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정치적인 해결도 하지 못하자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지도력이 약화된 것이다.



-반면 체첸사태를 이용해 뜬 인물도 있다. 바로 푸틴 대통령이다. 1999년 8월 총리로 전격 임명됐을 때까지만 해도 푸틴 대통령은 지지율은커녕 인지도도 미미한 무명의 정치신인이었다. 거의 평생을 국가보안위원회(KGB)와 크렘린궁 등 음지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첸침공을 시작하자 인기가 치솟았다. 더구나 2차 체첸전에서 러시아군은 1차 전쟁과 달리 초반부터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 순식간에 그로즈니 등 주요 도시와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했다. 

-옐친 전 대통령은 민간인 희생을 우려해 무차별 폭격과 포격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푸틴이 주도한 2차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융단폭격과 로켓포 공격을 퍼부었다. 기자가 러시아군이 점령한 그로즈니에 갔을 때 도시 전체는 완전한 폐허가 돼 있었다. 민간인 희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차별 공격이 2차 전쟁 초기 러시아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원인이다.

-반군이 남부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으로 맞서면서 2차 전쟁도 1차 전쟁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계속되는 장기전이 됐다. 그러나 1999년 12월 옐친 대통령의 조기 퇴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푸틴 대통령은 전쟁 초기의 인기를 등에 업고 2000년 3월 대선에서 압승해 크렘린궁의 주인이 됐다. 국민들에게 이름조차 생소했던 인물이 8개월만에 대권을 차지한 드라마의 배경에는 체첸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이 재침공을 시작할 수 있는 명분은 체첸쪽이 먼저 줬다. 바샤예프가 이끄는 체첸반군이 체첸-다게스탄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겠다며 먼저 다게스탄을 침공했다. 게다가 1999년 8월부터 모스크바 등 러시아 전역에서 끔찍한 폭탄테러가 계속돼 300여 명이 희생됐다. 러시아당국은 이를 모두 체첸측의 소행으로 몰아붙였고 체첸을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때 ‘혜성같이’ 등장한 신임 푸틴 총리가 체첸 침공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위기에 처한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 신께서 차르(Tsar·제정러시아 황제로 러시아의 지배자를 가리킴)를 보내주신다는 러시아의 전통적 정서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지만 왠지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푸틴 대통령을 옐친의 후계자로 만드는 데 1등 공신이었던 러시아의 최대 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사진 오른쪽)는 지금 유럽에 망명중이다. 러시아판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고 푸틴의 최대 정적이 된 그는 최근 “당시 폭탄테러는 러시아 연방보안부(FSB)가 저지른 자작극이었다”고 폭로하면서 비디오 테이프 등 증거까지 제시했다. 구 소련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KGB출신인 푸틴은 바로 KGB의 후신인 FSB의 부장(최고 책임자)을 지냈다.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고한 자국민을 희생시키고 일부러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 엄청난 폭로에 러시아 국민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더구나 푸틴이 반군 지도자 바샤예프(사진)를 매수해 다게스탄을 침공하도록 사주했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판이다. 반군과 짜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당시 체첸의 강경파 지도자인 바샤예프는 온건파인 마스하도프 대통령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어서 러시아와의 긴장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에 푸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물론 푸틴이 이를 빌미로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할 줄은 몰랐던 바샤예프가 결국 푸틴에게 당한 셈이 됐지만…. 우리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음모론’이지만 도무지 내부 사정을 들여다볼 수 없는 크렘린궁의 정치 음모는 늘 상상을 초월한다.

-음모론이 나온 김에 ‘러시아를 위한 변명’을 시작하려고 한다. 체첸전이 주목받을 때마다 국내 독자들의 편지를 많이 받는다.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 민족의 정서로는 러시아는 일제(日帝), 체첸반군은 독립군으로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러한 등식과는 조금 어긋나는 얘기를 하자면 우리 독립 투사들은 극장에서 수백명의 관객을 잡고 인질극을 벌이거나 민간아파트를 폭파하는 테러는 하지 않았다. 체첸반군은 1996년에도 체첸 인근에서 병원을 점거하고 환자와 수천 명의 마을 주민을 인질로 잡고 인질극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것은 역사상 세계 최대 규모의 인질극이었다.

-반군의 도덕성을 의심할 만한 대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납치(拉致). 카프카스에 종군한 적이 있던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카프카스의 인질>(*보통 <카프카즈의 포로>로 번역된 작품)이라는 작품까지 썼을 정도로 카프카스의 인질극과 납치는 악명이 높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이 무수히 많을 정도.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납치해 아내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서슬 퍼런 소련 체제도 이런 악습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요즘도 체첸에서는 납치가 매일같이 일어난다. 러시아 군인이나 친(親)러시아계 관리들은 물론 내외신 기자나 외국인도 대상이다. 심지어 체첸 구호를 위해 온 국제기구 직원들까지 마구잡이로 납치됐다. 국제적십자사 등이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는 유일한 분쟁지역이 체첸이다. 납치는 정치적 이유보다는 엄청난 몸값을 원해서다. 몸값을 주지 않으면 잔인하게 살해한다. 체첸 인근 다게스탄에서 통신시설을 설치하던 영국인 기술자 4명이 납치돼 목이 잘린 채 발견됐고 평소 체첸에 동정적인 기사를 쓰던 러시아 여기자도 납치돼 거액의 몸값을 주고야 겨우 풀려났다. 

-백범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근 카타르의 알-자지라 방송이 공개한 것처럼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전 체첸 대통령 등 체첸 망명정부 지도자들은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 체첸 망명정부는 과거 우리 임시정부와 달리 돈 나올 곳이 많다. 1차 체첸전이 끝난 후 러시아가 지원한 복구자금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석유판매에서 나온 수입도 상당하다(*러시아 일반인들이 체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중근 의사가 일제와 막후 거래를 했다거나 마약 밀수에 손을 댄 적은 없다. 앞서 음모론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많은 반군 지도자들이 돈이나 이권에 따라 러시아와 체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마약이나 무기 밀매로 한몫 챙기고 있다.

-체첸인들 전체가 독립을 열망하는 것도 아니다. 제2의 도시 구데르메스를 비롯한 북부지역은 친러 성향이 강하고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다. 대부분의 반군 지도부는 남부 산악지역 출신이다. 러시아군의 잔혹행위가 주로 거론되고 있지만 반군 역시 이 못지않게 잔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은 잔인하게 살해되기 일쑤다. 러시아에 대한 체첸인들의 뿌리깊은 원한에 대해서는 앞서 얘기했지만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내 다른 소수민족이 체첸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어떨까? 스탈린 시대 강제 이주된 한인동포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역시 강제 이주돼온 체첸인들을 만났다. 한인 작가인 아나톨리 김은 “체첸인과 한인의 관계는 무척 나빴다”고 회고한다.

-카프카스 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민족들도 체첸인이라면 고개를 내젓는다. 거칠고 잔인하기 때문이라는 것. 12세만 넘으면 남자들은 모두 전사(戰士)다. 러시아군은 민간인에 대한 과잉탄압 시비가 나올 때마다 “체첸인은 모두가 총을 쏠 줄 아는데 어떻게 민간인과 반군을 구분하느냐”며 항변한다. 총이나 칼 등 무기에 대한 체첸인들의 집착도 유명하다. 자신과 가족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선지 남자들은 대부분 무기를 갖고 있다. 소련 당국이 정기적으로 체첸 마을을 둘러싸고 집집마다 수색을 벌여 무기를 압수했는데 얼마 후 다시 수색을 하니 또 무기가 나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체첸 남자들은 돈이 생기면 총부터 장만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은 오랜 탄압 속에서 살아오면서 길러진 남다른 생존력으로 볼 수도 있다. 1993년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러시아 10월 사태도 체첸과 관련이 있다. 당시 옐친 대통령에게 도전했던 루슬란 하스불라토프(1942- ) 최고회의(의회) 의장이 바로 체첸 출신. 옐친 정부는 탱크까지 동원한 시가전 끝에 겨우 사태를 진압했지만 하스불라토프는 체첸인으로는 처음으로 크렘린궁을 노렸던 인물이다. 그의 뒤에는 유명한 ‘체첸 마피아’ 조직이 있었다.

-소수민족이지만 체첸인은 러시아의 범죄세계만은 석권하고 있다. 러시아 마피아 중 최대 패밀리가 바로 체첸 마피아다. 그루지야 마피아와 아제르바이잔 마피아 등 러시아 범죄조직은 공교롭게도 카프카스계가 휩쓸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체첸 마피아는 마약 무기 매춘 청부살인 등 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손대고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모스크바에는 성공한 체첸 출신 사업가가 많은데 이들도 대개 불법적인 사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당연히 체첸인 하면 범죄부터 연상하기 쉽다. 이런 역사적 민족적 배경까지 살펴보면 체첸사태의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그런데 최근의 체첸사태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소련 해체와 함께 체첸뿐 아니라 카프카스 전체가 유럽의 화약고가 돼버렸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소련 말기인 1988년부터 무력분쟁을 벌였다. 아제르바이잔 내에 있지만 주민 대부분이 아르메니아인인 나고르노-카라바흐주(州)의 영유권 분쟁 때문이었다. 두 나라는 모두 독립국가연합(CIS) 회원국이면서도 6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겨우 휴전을 했으나 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러시아는 같은 정교도인 아르메니아를 은근히 지원했고 터키계인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계기로 탈(脫)러 친서방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루지야에 속한 압하지아 자치공화국도 분리독립을 선언해 내전 상태다. 그루지야와 사이가 나쁜 러시아는 압하지아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이에 발끈한 그루지야는 러시아군에 쫓긴 체첸반군이 역내로 들어오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러시아는 최근 그루지야 국경을 넘어 체첸반군을 소탕하겠다고 위협해 러-그루지야 분쟁으로 확장될 위기에 놓였다.

-국제테러리즘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되면서 체첸전의 국제화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체첸에는 원래 이슬람원리주의 세력이 강했다. 체첸전이 일어나자 “체첸의 이슬람 형제들을 돕자”며 아랍이나 수단, 심지어 인도네시아에서까지 이슬람 의용병들이 체첸으로 몰려왔다. 용맹스런 반군 지휘관으로 러시아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에미르 하타프(전사했음)는 알고 보면 아랍 출신으로 체첸말은 하지도 못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이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용된 용병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 이슬람전사 중 일부는 과거 아프가니스탄전에 참가했던 용사들로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가 줄기차게 “체첸반군은 국제테러조직”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러시아는 체첸반군 지도자들이 탈레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과 연계돼 있다고 주장해왔다. 알 카에다 전사들로서도 미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체첸반군들 사이에 섞여 체첸의 산악지대나 그루지야의 판키시 계곡에 은신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도 체첸반군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특수부대를 그루지야에 파병하기까지 했다.

-200년 동안 계속돼온 체첸사태가 가까운 시일에 해결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없다. 무력으로 사태를 진압하려는 러시아 정부나 이에 결사항전으로 맞서는 반군이나 조금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게다가 지구상의 다른 분쟁과 마찬가지로 얽히고 설킨 국제적 이해관계에서 체첸사태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는 체첸 남부 우루스마르탄에서 잠시 전투가 멎은 틈에 보았던 카프카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양떼를 몰고가던 순박한 표정의 촌부를 보면서 잠시 평화로운 이국의 정취마저 느꼈다. 그러나 탱크의 무한궤도 소리와 상쾌한 공기 속에 묻어 있는 매콤한 화약냄새 때문에 곧 전장의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체첸과 카프카스 전역에서 총성이 멎을 날은 과연 언제일까?

06. 04. 05 -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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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강의중에 러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 얘기가 잠깐 나왔다. 불현듯 샤슬릭 고기맛이 그리워지기도 해서, 하지만 당장 얻어먹을 방도가 없기도 해서, 그와 관련한 글과 이미지로 그리움을 달래기로 한다. 조재익 기자의 <굿모닝 러시아>(지호, 2004)의 한 절은 '늘씬한 미녀 베료자'란 제목을 달고 있는바, 일부 내용을 옮겨놓으면서 몇 마디 덧붙인다(나머지 책들의 이미지는 관련서라는 명목으로 '그냥' 옮겨놓았으며, 베료자나 샤슬릭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

 

 

 

저자는 서두에서 베료자(자작나무)에를 노래한 시들 몇 편을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빠져 있지만 아마도 가장 최신 버전은 러시아의 '국민밴드' '류베'의 음반 중에서 국내에 유일하게 출시된 걸로 보이는 <다바이 자...>(아울로스, 2003)의 머릿곡 '자작나무'일 듯하다(<한국인이 좋아하는 러시아 로망스 베스트2>에도 들어 있다). 내가 가장 자주 즐겨듣는 러시아 음악이 이 류베의 노래들인데(몇몇 노래들은 질리도록 듣는다), 멤버들의 모습은 아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앞의 '깍두기'가 리드 보컬인 니콜라이 라스토르구예프이다. 

"러시아의 자작나무는 왜 그토록 바스락거리는지?"란 가사로 시작하는 서정적인 노래이다(http://www.youtube.com/watch?v=qd4y0dtXOyw). "여성의 이름 같은 이 베료자가 바로 러시아 여성을 상징하는 나무다. 여성 가운데서도 젊은 아가씨 또는 처녀의 상징이다. 굽지 않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는 늘씬한 몸메가 러시아 여성 몸매와 같고, 하얀 몸통은 러시아 여성의 뽀얀 살색, 살결과 같다는 것이다. 거기에 버드나무처럼 치렁치렁한 베료자 가지는 또 러시아 여성의 긴 머릿결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여성들은 베료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랑스러워 한다."(70쪽) 책에는 여름날의 아름다운 베료자 나무숲 사진이 실려 있는데(71쪽), 나는 겨울숲의 이미지를 아래에 옮겨놓겠다.

베료자와 관련한 러시아 전통과 축제에 관한 내용들이 책에는 더 포함돼 있는데, 아주 크게 잘 자란 베료자는 신목(神木)으로 받들어지기도 했다는 것 정도만 언급해둔다. 마음은 젯밥에 더 가 있기 때문에. 다만, 베료자 가지와 잎을 엮어서('베닉'이라 한다) 러시아식 사우나에서는 등이나 배, 다리를 두드려 마사지 효과를 내는 데 사용했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미할코프의 영화 <위선의 태양>에서의 '사우나 장면'을 상기해보시라) . 아래 사진에서처럼 사우나에서 '베닉'으로 서로 쳐주기도 한다. "나뭇잎 향이 그윽하고 좋아서 사우나실의 땀 냄새를 제거하는 데도 그만"이라고.

그리고, 또 베료쟈의 중요한 용도는 샤슬릭을 굽는 데 숲으로 쓰는 것이다. "가장 러시아적인 음식인 샤슬릭은 쉽게 말하면 꼬치구이다. 양고기나 돼지고기를 성양갑 크기로 썬 다음 쇠꼬챙이에 끼워 숯불에 구운 것이다." 샤슬릭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신선한 고기이겠지만, "그 다음은 숯불이 중요하다. 샤슬릭을 굽는 데 가장 좋은 숯 재료는 포도나무 줄기이다. 다음은 아카시아 나무, 산딸나무, 너도밤나무, 그리고 오크다.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베료쟈 나무다. 가장 흔하게 숲에서 구할 수 있는데다가 그 향이 은은해 샤슬릭 맛을 최골 만들어준다."(76쪽) 그럼, 이제 맛은 못 봐도 구경이나 좀 해보도록 한다.

샤슬릭은 야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구워먹는 것이 제 격이지만(<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의 소풍 장면에서처럼) 러시아 음식점이나 주점의 주요 메뉴이기도 하며, 주문할 경우 대략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그걸 러시아산 맥주 '발티카'('발찌까')와 함께 먹어주시면 되겠다. 특히 여름날에!..

끝으로, 샤슬릭 에티켓을 덧붙인다: "샤슬릭 요리를 할 때 러시아에서는 고기를 양념에 재고 숯을 준비하고, 고기를 굽고 식탁에 차리는 것까지 모두가 남성 몫이다. 여성들은 그저 숯불에 노릇노릇 구워지는 샤슬릭을 바라보며 군침만 삼키다가 다 구워진 샤슬릭을 먹기만 하면 된다. 이 샤슬릭을 만드는 남성들이 지켜야 할 철칙이 있다. '고기를 구울 땐 여성을 대하듯 하라.' 절대 서두르지 말 것,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으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샤슬릭을 구우라는 것이다. 여성을 대하듯 쉼없이 고기에 관심을 보일 것이며 주의를 기울이고 인내할지어다. 비록 숯불 매운 연기에 코가 맵고 눈이 매울지라도 샤슬릭 고기에서 눈을 떼지 말라는 것이다."(76쪽) 세상에 인내 없이 되는 일이란 없는 법이다...

06.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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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4-0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합정역 근처의 '러시아 문화의 집' 2층 루슬란에서 샤슬릭을 먹었습니다. 그게 러시아에서 먹는 제대로 된 샤슬릭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좀 퍽퍽하던데요.

로쟈 2006-04-04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샤슬릭이 맞습니다. 한데, 우리의 갈비도 그렇지만 문제는 '러시아'가 아니라 (신선한)'고기'겠지요. 맛은 제 입맛에도 우리 갈비가 더 좋습니다. 그저 가끔은 별미가 그리운 법이지요.^^
 

 

오래전에 모출스키(1892-1950)의 <도스토예프스키1,2>(책세상, 2000)에서 발췌/정리한 부분을 옮겨온다. <악령>에 관한 해설인데,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예술'에 대한 저자의 해명을 포함하고있다. 모출스키의 평전은 한국어로 구해볼 수 있는 가장 권위있는 책이다. 양과 질에 있어서 가장 깊이있고, 해박한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라고 할 수 있다.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정음사, 1989; 중앙대출판부, 2003)과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 이해와 연구에 있어서 필독서라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러시아문학자 콘스탄틴 모출스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구조와 기법의 모든 특수성은 예술적 표현성의 원칙으로 설명된다. (1)주인공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사건 집중, (2)구조의 극적인 요소, 그리고 (3)어조의 수수께끼가 바로 '표현 예술'의 세 가지 특징이다.

(1) 작가는 단지 인간과 그 세계,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주인공의 개성이 작품 구성의 중심축이다(이 작가와 주인공의 자세한 관계는 바흐친의 저서를 참조할 수 있다. 바흐친은 이러한 특징을 '다성악적 소설'이란 개념으로 정식화한다). 이 축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이 배분되고, 플롯이 구성된다. <죄와 벌>의 중심에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서 있다. 그리고 <백치>의 중심에는 므이시킨 공작이 있다. 이런 집중화는 <악령>에서 그 극치에 이른다. 작가의 노트에서 우리는 이미 다음과 같은 메모를 발견했다. "스타브로긴이 전부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 전체가 스타브로긴의 운명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이 그에 관한 것이고, 모든 것이 그를 위한 것이다. 아래는 연극 <악령>의 한 장면.

(2)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 예술의 두번째 특징은 바로 연극성이다. <악령>은 비극적이고 희비극적인 가면들의 무대이다. 도입부 후, 다시 말해 과거 사건들에 대한 짧은 설명과 주인공들의 성격 묘사 후에 발단이 뒤따른다. 스타브로기나는 스테판을 다샤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발단은 두 개의 극적인 대화로 구성된다.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 세상은 복잡한 상호왕래와 도덕적인 전일체처럼 이루어진다. 모든 주요 인물들이 '중요한 날'인 일요일에 '우연히'; 바르바라의 응접실에서 만난다. 이러한 운명적 우연성은 도스토예프스키 세계의 법칙이다. 그는 극적인 기법인 이 관례를 심리적 필연성으로 변화시킨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사랑과 증오로 서로에게 끌리며, 우리는 그들의 접근을 주시하고 갈등의 불가피성을 예감한다. 작가는 폭발을 앞두고 속도를 지연시키며 우리를 괴롭히고(독자의 흥미를 높이기 위해 진행을 늦추는 수법), 우리의 기대를 점점 고조시키면서(점층법), 거짓 대단원으로 우리를 속이고(급변), 마침내 대파국으로 놀라게 한다. 이것이 그의 역동적인 구성방식이다.

(3)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예술이 갖는 세번째 특징은 바로 재미다. 작가는 독자들을 자신이 의도한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공감과 참여를 요구한다. 독자의 활동은 사건의 신비스럽고 낯설며 특이하고 예기치 못한 성질에 의해 유지된다.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평가와 수수께끼, 암시 등으로 인상을 예상하고 강화한다. 수수께끼들은 또다른 수수께끼들 위에 계속 쌓인다. 이러한 수수께끼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아하는 표현기법이다. 하나의 비밀을 파헤치면 또다른 비밀이 나타난다. 끊임없이 비밀을 파헤쳐도 여전히 '혼돈의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복잡한 여러 가지 사건들의 그물 속에 빠져 어쩔 수 없이 탐구자 또는 탐정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노트에서 소설의 독특한 어조에 대해 썼다. "이 작품의 어조는 네차예프(표트르 베르호벤스키)와 공작(스타브로긴)을 설명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네차예프)를 숨겨두고 강렬한 예술적 특징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공개한다." 공작은 '불가사의하면서도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속의 두 명의 '악마들'에게 특별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표현성을 부여한다. 무의 공허함은 그들의 환상적인 특징들 속에서 빛난다. 부정과 파괴의 영혼들은 끝까지 설명되거나 표현되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뛰어난 창작술은 어둠의 점층과 빛의 대조, 그리고 이중 조명 속에 존재한다.(642-650쪽)

06.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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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몇년 전에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온다. 카뮈의 <전락>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쓴 거 같기도 하다. 카뮈의 생애에 관해서는 올리비에 토드의 <카뮈>(책세상, 2000)를 참조했었다. 국내에서 나온 입문서로는 유기환 교수의 <알베르 카뮈>(살림, 20004)와 박홍규 교수의 <카뮈를 위한 변명>(우물이있는집, 2003) 정도를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물론 카뮈에 관한 가장 방대한 연구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김화영 교수의 <문학 상상력의 연구>(문학동네, 1998 개정판)를 꼽을 수 있으며,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는 김진식 교수의  <알베르 카뮈의 통일성 향수와 미학>(울산대출판부, 2005)이 있다.

카뮈(1913-1960)가 영향을 받은 러시아 작가들을 들라면, 톨스토이(1828-1910)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가 대표적이겠지만(레르몬토프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전락>의 원고는 <우리 시대의 영웅>이란 제목이 붙을 뻔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에는 아무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이 더 많이 배여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전락>(1956)이다.

 

 



 

이 작품은 카뮈가 43세 때 쓴 것이고, 그가 1960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을 제외하면 거의 유작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가 43세 때 쓴 작품)에 대한 20세기 버젼(혹은 변형)으로 이해한다. 나 또한 <전락>을 읽으면서 먼저 읽었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된 얘기가 돼 버렸나...

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대충 잡아도 대여섯 번은 읽은 듯하다. 더 읽었을지도 모른다. <전락>은 세 번쯤 읽었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하는 학위논문도 대충 읽어 보았다. 그래서? 과연 이 두 작가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인지? 요점을 말하자면, <전락>은 카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이다. 달리 말하면, 카뮈적이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이때 카뮈적이란 말은, <이방인>(1942)과 <시지프의 신화>의 카뮈를 말한다. 태양의 작가 카뮈, 지중해의 작가 카뮈.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 둘다 가난한 작가였고, 저널리즘에 종사하였으며(한 사람은 발행인으로, 한 사람은 기자로) 문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도 일치한다. 그래서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 대한 문학적 응전(작가는 원래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결과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이었다면, <전락>은 <반항적 인간>(1951)을 놓고 벌어졌던 사르트르(패)와의 논쟁에 대한 작가로서의 답변서라고나 할까. 작품의 많은 모티브들은 이 두 논쟁을 염두에 두고서야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형식(스타일)상의 유사성. 둘다 1인칭 독백(타자의 말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말들'뿐이다. 어떤 말을 하는가? 지하생활자는 물리법칙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적 에고이스트들에 대해서 딴지를 걸며 흥분한다. 2*2=4 따위는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클라망스(이 이름은 '사막에서의 외치는 자의 목소리'라는 성경 글귀에서 나왔다.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는 세례자 요한이면서 외치는 자이다, 말 그대로)는 진정한 선행을 하는 대신에 그 흉내만 내면서 도덕적인 인간인 척 행세하는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을 고발하고 심판한다(타인들을 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심문한다).

그리하여 이 두 작품 모두 신이 사라진, 혹은 죽은 시대에 '성자'는 어떻게 가능하며 '신앙'은 어떻게 가능한지는 묻는다. 물론 작품 내에서는 아무런 해답이나 대안이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두 작품은 모두 가장 음침하고 음울한 작품이 되었다. 한 전기작가의 말을 빌면, 두 작품은 모두 "(가장) 비참한, 그러나 낄낄거리며 조소하는 자포자기로 끝나는 유일한 소설"들이다.(이런 작품들을 좋아하다니!)



'속죄자이면서 재판관'이라는 클라망스의 자기 규정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카뮈가 아마도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었을 듯한데(카뮈는 <악령>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했었다. 이 각색본은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연출로 러시아 무대에도 올려졌었다. 내가 가졌던 기대에는 못 미치는 공연이었지만), 속죄자-재판관 모티브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온다(나의 심증이다).

조시마 장로가 죽기 전에 남기는 설교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의 심판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심판자 자신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아니 자기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그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는 아무도 죄인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심판자가 될 수 있다. 언뜻 듣기에는 정신나간 소리 같지만 이것이 진리다." 정신나간 소리같지만, 클라망스는 바로 이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자가 아닌가!

<전락>의 공간적 배경은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많이 내리는, 안개가 자주 끼는, 물위의 도시 암스테르담이다. 알제리의 사막이 아닌 것. 이 가장 비카뮈적인 배경이 이 작품의 비카뮈적인 성격을 낳는다(카뮈는 1954년 10월에 이틀간 암스테르담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리고 꼼꼼한 작가 카뮈에게서 <전락>은 아주 우발적으로 탄생한 작품이었다). 암스테르담은 역시나 우중충하고 진눈깨비 흩날리는 페테르부르크의 카뮈적 버젼이다. 말하자면 러시아적 공간이고 도스토예프스키적 공간이다. 클라망스의 목소리가 좀 세련되긴 했어도 지하생활자의 목소리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그는 지하생활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배우' 카뮈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 카뮈적인 세계란 무엇인가? "스스로 인정하는 무지, 광신의 거부, 세계와 인간을 테두리짓는 한계, 사랑받는 얼굴, 그리고 끝으로 아름다움,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스리스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게 되는 우리의 진영이다.('헬레네의 추방')이라고 적을 때, 그 '우리의 진영'에 속하는 것이 카뮈적인 세계이다. 거기엔 정오의 태양과 바다가 지배하는 세계이다(다시 한번 더 암흑의 철학은 빛나는 바다 저 위에서 흩어져 버릴 것인다. 오, 정오의 사상이여!).

그에게서 지중해가 가진 태양의 비극성은 북구(와 러시아)의 안개의 비극성과는 다른 비극성이다. 그의 정오의 사상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암흑의 철학과 다른 철학이요 사상이다. 이러한 둘을 묶어주는 것은 인간의 부조리한/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지극한 사랑이다.

만약에 진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다면 나는 그리스도 곁에 남겠다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적었다. 카뮈라면? 아마 그는 진리 대신에 바다(지중해)를 택할 것이다. 그리스도도 바다도 없는 나는? 이렇듯 비오는 날에 이런 걸 적으며, 중얼거리고 탄식할 따름이다. "나의 삶은 내가 바라는 바에 적합하지 않는구나!..."

06. 03. 27.

P.S. 타이밍을 맞추자면 봄비라도 내리는 날에 옮겨적어야 했나 보다.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알렉산드르 볼코프(1960- )의 <비오는 날>. 이걸로 비오는 날의 분위기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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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신고: 김진석->김진식

로쟈 2006-03-2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헀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3-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갈게용)

비연 2006-03-2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 도스토예프스키나 카뮈나 제가 다 좋아하는 작가들인데..
로쟈님의 페이퍼를 보니 아...그렇구나 하는 마음이 새삼...

로쟈 2006-03-2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소략한 글인데, 좋아하는 작가들을 한번 더 떠올릴 수 있다면 나름대로 제몫은 한 것이네요.^^

2006-05-28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렌티우스 2006-12-2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 벌어진 자신의 알제리 독립 반대입장에 관련된 비판에 이렇게 대답했지요 : "나에게 정의와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어머니를 선택하겠다"...

그런데 이 답변은 그 맥락상 좀 (상당히) 문제가 있기도 한데요... 함 간단히 브리핑을 해드려보면...


이 대답은 카뮈의 스웨덴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 직후 한 청중이 알제리 독립에 관한 그의 의견을 묻는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1957년 카뮈의 수상 당시 젊은 푸코(카뮈는 1913년생, 푸코는 1926년생)가 스웨덴 프랑스 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일하며 그를 영접했었다는 사실인데, 푸코는 노벨상 위원회가 1954년 이후의 알제리 독립선언에 대한 일종의 헌정행위로서 카뮈를 '잘못' 선택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카뮈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알제리 독립에 반대했으며(나도 카뮈를 너무나 좋아했던만큼, 이는 충격이었다. 왜 우리의 카뮈 연구서들은 이러한 점을 밝히지 않나? 하긴, 서양에서도 미시마 유키오가 파시스트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알제리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프랑스의 정착 규모와 기간은 역사에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알제리의 프랑스인은 이 어휘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의미에서 역시 토착민이다. 더구나 순수하게 아랍적인 알제리는 - 정치적인 독립이라는 하나의 환상이 없었다면 - 결코 경제적 독립을 성취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노력이 아무리 부적절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늘날 그 어떤 나라도 기꺼이 책임을 떠맡으려고 동의하지 않는 상당한 노력,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이 카뮈의 말을, 우리의 예로 치환시켜, 점령국의 국민이자 노벨상 수상작가인 한 일본인의 입에서 아직 미독립 상태의 1940년대 한국을 향해 발설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망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중 2장 8절 '카뮈의 제국주의 경험' 편을 보면 된다. 이 글에서 사이드는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문화와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의 일부'로서 분석하고 있다

단적으로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아랍인들은 하나도 이름이 '없다'. 일제시대 군산의 한 백사장에서 '태양빛이 너무나 뜨거워' 총을 난사한 '이방인' 일본인에 의해 사망하는 '조선인'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

로쟈 2006-12-2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적으로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아랍인들은 하나도 이름이 '없다'"라는 게 새로운 비판은 아니지만 카뮈를 읽을 때 참조해야 할 대목이라고는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