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몇년 전에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온다. 카뮈의 <전락>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쓴 거 같기도 하다. 카뮈의 생애에 관해서는 올리비에 토드의 <카뮈>(책세상, 2000)를 참조했었다. 국내에서 나온 입문서로는 유기환 교수의 <알베르 카뮈>(살림, 20004)와 박홍규 교수의 <카뮈를 위한 변명>(우물이있는집, 2003) 정도를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물론 카뮈에 관한 가장 방대한 연구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김화영 교수의 <문학 상상력의 연구>(문학동네, 1998 개정판)를 꼽을 수 있으며,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는 김진식 교수의  <알베르 카뮈의 통일성 향수와 미학>(울산대출판부, 2005)이 있다.

카뮈(1913-1960)가 영향을 받은 러시아 작가들을 들라면, 톨스토이(1828-1910)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가 대표적이겠지만(레르몬토프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전락>의 원고는 <우리 시대의 영웅>이란 제목이 붙을 뻔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에는 아무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이 더 많이 배여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전락>(1956)이다.

 

 



 

이 작품은 카뮈가 43세 때 쓴 것이고, 그가 1960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을 제외하면 거의 유작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가 43세 때 쓴 작품)에 대한 20세기 버젼(혹은 변형)으로 이해한다. 나 또한 <전락>을 읽으면서 먼저 읽었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된 얘기가 돼 버렸나...

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대충 잡아도 대여섯 번은 읽은 듯하다. 더 읽었을지도 모른다. <전락>은 세 번쯤 읽었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하는 학위논문도 대충 읽어 보았다. 그래서? 과연 이 두 작가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인지? 요점을 말하자면, <전락>은 카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이다. 달리 말하면, 카뮈적이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이때 카뮈적이란 말은, <이방인>(1942)과 <시지프의 신화>의 카뮈를 말한다. 태양의 작가 카뮈, 지중해의 작가 카뮈.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 둘다 가난한 작가였고, 저널리즘에 종사하였으며(한 사람은 발행인으로, 한 사람은 기자로) 문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도 일치한다. 그래서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 대한 문학적 응전(작가는 원래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결과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이었다면, <전락>은 <반항적 인간>(1951)을 놓고 벌어졌던 사르트르(패)와의 논쟁에 대한 작가로서의 답변서라고나 할까. 작품의 많은 모티브들은 이 두 논쟁을 염두에 두고서야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형식(스타일)상의 유사성. 둘다 1인칭 독백(타자의 말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말들'뿐이다. 어떤 말을 하는가? 지하생활자는 물리법칙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적 에고이스트들에 대해서 딴지를 걸며 흥분한다. 2*2=4 따위는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클라망스(이 이름은 '사막에서의 외치는 자의 목소리'라는 성경 글귀에서 나왔다.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는 세례자 요한이면서 외치는 자이다, 말 그대로)는 진정한 선행을 하는 대신에 그 흉내만 내면서 도덕적인 인간인 척 행세하는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을 고발하고 심판한다(타인들을 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심문한다).

그리하여 이 두 작품 모두 신이 사라진, 혹은 죽은 시대에 '성자'는 어떻게 가능하며 '신앙'은 어떻게 가능한지는 묻는다. 물론 작품 내에서는 아무런 해답이나 대안이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두 작품은 모두 가장 음침하고 음울한 작품이 되었다. 한 전기작가의 말을 빌면, 두 작품은 모두 "(가장) 비참한, 그러나 낄낄거리며 조소하는 자포자기로 끝나는 유일한 소설"들이다.(이런 작품들을 좋아하다니!)



'속죄자이면서 재판관'이라는 클라망스의 자기 규정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카뮈가 아마도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었을 듯한데(카뮈는 <악령>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했었다. 이 각색본은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연출로 러시아 무대에도 올려졌었다. 내가 가졌던 기대에는 못 미치는 공연이었지만), 속죄자-재판관 모티브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온다(나의 심증이다).

조시마 장로가 죽기 전에 남기는 설교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의 심판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심판자 자신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아니 자기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그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는 아무도 죄인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심판자가 될 수 있다. 언뜻 듣기에는 정신나간 소리 같지만 이것이 진리다." 정신나간 소리같지만, 클라망스는 바로 이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자가 아닌가!

<전락>의 공간적 배경은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많이 내리는, 안개가 자주 끼는, 물위의 도시 암스테르담이다. 알제리의 사막이 아닌 것. 이 가장 비카뮈적인 배경이 이 작품의 비카뮈적인 성격을 낳는다(카뮈는 1954년 10월에 이틀간 암스테르담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리고 꼼꼼한 작가 카뮈에게서 <전락>은 아주 우발적으로 탄생한 작품이었다). 암스테르담은 역시나 우중충하고 진눈깨비 흩날리는 페테르부르크의 카뮈적 버젼이다. 말하자면 러시아적 공간이고 도스토예프스키적 공간이다. 클라망스의 목소리가 좀 세련되긴 했어도 지하생활자의 목소리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그는 지하생활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배우' 카뮈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 카뮈적인 세계란 무엇인가? "스스로 인정하는 무지, 광신의 거부, 세계와 인간을 테두리짓는 한계, 사랑받는 얼굴, 그리고 끝으로 아름다움,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스리스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게 되는 우리의 진영이다.('헬레네의 추방')이라고 적을 때, 그 '우리의 진영'에 속하는 것이 카뮈적인 세계이다. 거기엔 정오의 태양과 바다가 지배하는 세계이다(다시 한번 더 암흑의 철학은 빛나는 바다 저 위에서 흩어져 버릴 것인다. 오, 정오의 사상이여!).

그에게서 지중해가 가진 태양의 비극성은 북구(와 러시아)의 안개의 비극성과는 다른 비극성이다. 그의 정오의 사상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암흑의 철학과 다른 철학이요 사상이다. 이러한 둘을 묶어주는 것은 인간의 부조리한/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지극한 사랑이다.

만약에 진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다면 나는 그리스도 곁에 남겠다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적었다. 카뮈라면? 아마 그는 진리 대신에 바다(지중해)를 택할 것이다. 그리스도도 바다도 없는 나는? 이렇듯 비오는 날에 이런 걸 적으며, 중얼거리고 탄식할 따름이다. "나의 삶은 내가 바라는 바에 적합하지 않는구나!..."

06. 03. 27.

P.S. 타이밍을 맞추자면 봄비라도 내리는 날에 옮겨적어야 했나 보다.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알렉산드르 볼코프(1960- )의 <비오는 날>. 이걸로 비오는 날의 분위기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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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신고: 김진석->김진식

로쟈 2006-03-2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헀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3-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갈게용)

비연 2006-03-2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 도스토예프스키나 카뮈나 제가 다 좋아하는 작가들인데..
로쟈님의 페이퍼를 보니 아...그렇구나 하는 마음이 새삼...

로쟈 2006-03-2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소략한 글인데, 좋아하는 작가들을 한번 더 떠올릴 수 있다면 나름대로 제몫은 한 것이네요.^^

2006-05-28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렌티우스 2006-12-2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 벌어진 자신의 알제리 독립 반대입장에 관련된 비판에 이렇게 대답했지요 : "나에게 정의와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어머니를 선택하겠다"...

그런데 이 답변은 그 맥락상 좀 (상당히) 문제가 있기도 한데요... 함 간단히 브리핑을 해드려보면...


이 대답은 카뮈의 스웨덴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 직후 한 청중이 알제리 독립에 관한 그의 의견을 묻는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1957년 카뮈의 수상 당시 젊은 푸코(카뮈는 1913년생, 푸코는 1926년생)가 스웨덴 프랑스 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일하며 그를 영접했었다는 사실인데, 푸코는 노벨상 위원회가 1954년 이후의 알제리 독립선언에 대한 일종의 헌정행위로서 카뮈를 '잘못' 선택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카뮈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알제리 독립에 반대했으며(나도 카뮈를 너무나 좋아했던만큼, 이는 충격이었다. 왜 우리의 카뮈 연구서들은 이러한 점을 밝히지 않나? 하긴, 서양에서도 미시마 유키오가 파시스트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알제리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프랑스의 정착 규모와 기간은 역사에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알제리의 프랑스인은 이 어휘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의미에서 역시 토착민이다. 더구나 순수하게 아랍적인 알제리는 - 정치적인 독립이라는 하나의 환상이 없었다면 - 결코 경제적 독립을 성취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노력이 아무리 부적절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늘날 그 어떤 나라도 기꺼이 책임을 떠맡으려고 동의하지 않는 상당한 노력,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이 카뮈의 말을, 우리의 예로 치환시켜, 점령국의 국민이자 노벨상 수상작가인 한 일본인의 입에서 아직 미독립 상태의 1940년대 한국을 향해 발설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망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중 2장 8절 '카뮈의 제국주의 경험' 편을 보면 된다. 이 글에서 사이드는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문화와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의 일부'로서 분석하고 있다

단적으로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아랍인들은 하나도 이름이 '없다'. 일제시대 군산의 한 백사장에서 '태양빛이 너무나 뜨거워' 총을 난사한 '이방인' 일본인에 의해 사망하는 '조선인'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

로쟈 2006-12-2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적으로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아랍인들은 하나도 이름이 '없다'"라는 게 새로운 비판은 아니지만 카뮈를 읽을 때 참조해야 할 대목이라고는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