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올해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대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는 소개 기사를 옮겨온 적이 있는데, 며칠전 교수신문(06. 05. 04)에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에 부쳐'라는 부제를 단 음악비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이 또한 옮겨온다. 그의 생일은 9월에 있으므로 가을에야 보다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개최될 듯하지만, 미리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기사를 가끔씩 읽어보기로 한다. 클래식 음악에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대개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옮여오는 식이 될 것이다. 이번 기사는 허영한 한예종 교수가 기고한 것으로 '冷戰은 그의 음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가 그 타이틀이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시초프의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드미트리히(*'드미트리'가 맞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격변하는 20세기의 세계사와 소련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된 흥미로운 주인공이다. 조연급이면 피할 수 있었던 비난의 초점이 됐고 그를 사이에 둔 소련과 서방세계의 지속적인 갈등은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쇼스타코비치가 진정으로 소련 공산당의 충실한 당원이었는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렇게 행세를 한 것인지의 문제다. 절묘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작곡가 자신은 아무런 답을 남기지 않았다. 공식석상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애국지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어쩌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듯한 수많은 암시를 흘리고 있었다.

-교향곡 1번(1925)으로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소련이 최고로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긴 쇼스타코비치에게 위기가 오기 시작한 건 그의 오페라 <맥베스 부인> 때문이었다(*얼마전 이 오페라의 원작인 레스코프의 <므첸스크군의 멕베스 부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1934년에 초연됐던 이 오페라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다시 무대에 오른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러 온 스탈린의 말 한마디에 그토록 사랑받던 오페라가 순식간에 비판의 초점이 됐다. 1936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위기를 넘기게 한 작품이 바로 지금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 제5번이다. 이 교향곡이 1937년에 초연된 그 날 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교향곡이 감격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소련 최고의 작곡가로 복권된 그는 1938년 신문과 인터뷰에서 “교향곡 5번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응답이라고들 하니 매우 기쁘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잘못을 반성했다고 보기에는 충분치 못한 답변이었다.

 

 

 

-교향곡 5번에 ‘정당한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 다닌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악장 피날레는 다소 급격하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급전되면서 활발하고 밝은 분위기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분위기의 급변과 체제 순응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연결지으려한다. 긍정주의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피날레를 만들어 넣어 정부의 비난을 피하려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다소 인위적인 미학적 잣대를 내세워 서방세계의 음악계가 추구하던 모더니즘을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바로 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비판을 받았고 그보다 다소 쉬운 음악적 내용을 지닌 교향곡 5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작품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음악은 소리라는 추상적 매체를 사용하는 장르여서 가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 그 구체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사가 없는 순수 기악음악의 경우 아무리 구체적 내용이 명시된 표제음악이라 하더라도 그 제목과 달리 감상되고 해석되어질 여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작곡가의 직접 언급이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서 작곡가가 직접 이 곡은 강이다, 또는 이 선율은 나무다, 라고 말하지 않는 한 작곡가가 진정으로 담으려고 한 내용을 짐작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해석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5번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 곡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과 자신의 의견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당신들이 이 곡이 이러하다고 하니 나는 기쁘다” 정도에서 멈춘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내용으로만 이해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이러한 태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15번은 천박하기까지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의 선율이 등장하는가하면 엄숙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된 ‘운명’ 모티브까지 나온다. 사람들은 이 희한한 조합에서 의미를 찾느라 부산했지만 정작 작곡가는 이 곡의 특별한 내용의 존재를 부인했고 단순히 ‘장난감 가게’와 같은 분위기라는 설명만 제공했다. 또 한번 그의 알다가도 모를 작품 해설(?)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이번에는 다소 다른 예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전쟁 교향곡인 교향곡 7번은 흥미있는 일화와 함께 순수 기악음악으로도 일정한 구체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나치군이 소련을 침략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군에 지원하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지붕을 지키는 소방부대에 편입된다. 소방 모자를 쓰고 지붕을 지키는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소련의 거의 모든 신문에 실렸고 서방 언론에서도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변신한 작곡가의 모습을 흥미롭게 다뤘다. 같은 해 8월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났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남아서 그의 교향곡 7번의 일부를 완성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직접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사태가 위태로워지자 당 지도부는 레닌그라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이번에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교향곡 7번에 대해서 작곡자는 긴 내용의 줄거리를 직접 밝히고 있어 그 내용의 해석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받는 레닌그라드 도시와 소련 동포를 묘사하는 1악장으로 시작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4악장으로 끝나는 교향곡이라는 것이 작곡자의 변이었다. 비록 가사는 없지만 작곡자의 설명이 수긍이 가는 음악적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생애 말년에 이 교향곡이 레닌그라드가 포위되기 전에 이미 구상됐고 성경의 94번 시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교향곡에서 전쟁 분위기를 피하기는 어렵다. 행진곡 풍의 리듬과 북소리는 전쟁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쇼스타코비치를 철저하게 체제 순응적인 작곡가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에 그처럼 극적으로 작곡된 교향곡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스탈린 사후, 쇼스타코비치가 선보인 첫 작품이 프로그램이 없는 교향곡 10번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곡을 작곡할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학생이었던 24살의 피아노연주자 엘미라 나지로바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녀의 이름 ‘엘미라’로부터 이끌어낸 선율 동기(미-라-미-레-라)와 작곡자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나온 선율 동기(D-Es-C-H/우리말 음이름으로 옮기면 레-미b-도-시)를 서로 얽혀 놓고 있다. 교향곡 10번은 다시 한번 비평가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치적 상황이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한 쇼스타코비치는 평소와는 달리 강력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결국 1954년 4월 초에 열린 작곡가 연맹 대회에서 이 불필요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듯이 작곡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며 “이 작품에서 나는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끝맺는다. 이 교향곡은 어떤 정치적 해석도 어려워 보인다. 극히 사적인 쇼스타코비치만이 존재하며 이 점을 그는 반성해야만 했다.

-그의 정치적 정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의 교향곡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체제 순응 작곡가였다면 그의 교향곡은 철저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해석되고 그렇지 않다면 부당한 정부의 압력에 대항한 서구식으로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 때문이다. 20세기 서방세계의 음악관은 철저하게 미학적 자율성을 중시했기에 미학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의 배경은 쇼스타코비치의 진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당시로서는, 또 어쩌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냉전 시대적 대결 구조다. 쇼스타코비치를 소련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과 그를 서방 세계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암투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다. 분명한 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 양면성 중 한 면을 강조하며 자기편으로 유도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그 양면을 모두 진정한 쇼스타코비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06. 05. 08.

 

 

 

 

P.S.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게 쇼스타코비치의 평전인데, 국내에는 아직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이론과실천, 2001)밖에 나와 있는 책이 없다(진의성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 책이다). 유력한 평전(들)이 조만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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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5-0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퍼감다^^

로쟈 2006-05-0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옮겨오기만 했습니다.^^ 이미지 몇 개 찾아온 것 말고는 수고한 것도 없구요. 한데, 쇼스타코비치의 경우, 일차적으론 그 자신이 모호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는 것과 음악이란 장르 자체가 정치적 매체로서는 좀 비효율적이고 모호하다는 점, 두 가지가 모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자신이 그런 걸 얼마간 의식하면서 줄타기를 했을 수도 있구요. 전공자에 따르면 그는 매우 소심했던 사람으로 자기 의견을 남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러시아 문화의 이해'라는 강의시간에 러시아 감독 파벨 룽긴의 <택시 블루스>(1990, 110분)를 보았다. 오늘이 '메이데이'이기도 해서 '영화'를 보는 걸로 기분을 좀 내고자 했지만(러시아는 5월 1일부터 승전기념일인 9일까지 대부분의 직장이 짧은 휴가를 갖는다), 영화의 주조음은 '블루스'여서, 그러니까 어둡고 음울한 영화여서 수강생들이 기대만큼의 '기분'을 내지는 못했을 듯하다. 하지만, 에인젠슈테인의 <10월>(1927)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만일을 대비해서 화질도 좀 떨어지는 <택시 블루스> 외에 <10월>을 나는 여분으로 들고 갔었던 것.   

'파벨 룽긴'이라고 통상 표기되지만(영화잡지나 감독사전들에서도 그렇게 표기되고 있다), 러시아어를 음역한 영어식 표기는 'Pavel Lugin'이며, '파벨 룬긴'이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한데, 감독은 늦깎이 데뷔작이었던 프랑스와 구소련의 합작 영화 <택시 블루스>로 칸느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고는 아예 프랑스로 건너가버린다(그러니까 러시아의 '프랑스통' 감독이다). 그래서 얻게 된 그의 프랑스식 이름은 'Pavel Lounguine'이다. 아마도 이 이름이 다시 우리말로 옮겨지면서 '룬긴'이 '룽긴'으로 탈바꿈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1949년생인 룽긴은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번역가인 어머니와 극작가인 아버지 덕분에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던 언어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극작가였다. 번역가인 어머니와 극작가인 아버지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본격적인 영화감독 공부를 하던 중 자작 시나리오 <택시 블루스>로 데뷔, 이제 칸느의 영광과 함께 세계의 주목을 받는 감독이 되었다."  

"소련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처럼 촛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일갈하며 등장한 룽긴은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기 '소련'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투박하고 거칠며 암울한 현실이 그의 영화 속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영화는 달리는 영업용 택시를 통해 보여지는 모스크바의 어느 변두리 모습으로 시작된다. 택시 안에는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온갖 술주정을 부리는 등 운전수를 귀찮게 한다. 결국 그들은 택시 요금조차 내지 않고 도망가 버리고 그들을 놓쳐버린 택시 운전사 쉴리코프는 그 주동자인 로샤를 찾아내지만 그가 빈털털이인 것을 알고 그의 색소폰을 빼앗는다. 그는 색스폰을 가지고 암시장을 헤맨 끝에 악기가 무척 비싼 것임을 알고 악기를 로샤에게 돌려주는 대신 술주정뱅이인 로샤를 그의 밑에 두고 일을 시키기로 한다.

-결국 로사는 쉴리코프와 기묘한 동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삶의 가치관이 대조적인 소련인 쉴리코프와 유태인인 로샤는 색다른 우정을 쌓아간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색스폰 연주에 몰두하게 된 로사는 차츰 그 연주의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어느날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든다. 그곳에 순회공연을 온 미국연주단의 눈에 그의 음악성이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로샤는 그 미국 연수단의 일원으로 특채되고 함께 연주를 하게 되며 얼마가지 않아 대중에게도 인기있는 뮤지션이 될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하지만, 로샤가 유명해지면서 쉴리코프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로사는 결국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뒤늦게 로사의 천재성을 인정하게 된 쉴리코프에게는 조롱만을 남겨놓은 채.  

 

 

한겨레 신문  2006. 04. 20 유윤성 프로그래머가 추천하는 7편

뿌리 (파벨 룽긴, 러시아)

시종일관 흥겹고 떠들썩한 이 영화는 <택시 블루스>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는 러시아 감독 파벨 룽긴의 최신작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딕은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고향의 친척들을 찾아주는 알선업자다. 그런데 그들이 찾고 있는 고향과 그곳의 사람들은 과거의 끔찍한 사건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이에 에딕은 근처 마을 사람들을 매수하여 가짜 친척 노릇을 하게끔 사기극을 꾸민다. 잠시 동안의 재회로 끝날 것 같았던 가짜 친척들과 의뢰인들 사이에 진짜 애정이 싹트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 사회의 가치관 상실 및 도덕적 타락의 상황을 집요하게 파헤쳐왔던 룽긴 감독은 <뿌리>에서 좀더 유연하고 넉넉하며 성숙한 시선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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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곧 4월 26일은 지난 1986년 구소련(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이맘때 이런저런 관련 자료들을 검색해본 일이 있는데, 어느 새 1년이 흘렀다. 따로 준비한 건 없고, 대신에 녹색연합의 블로그에서 '체르노빌, 잊지 못할 이름'이란 글을 옮겨온다. 열심히 준비한 글이며 필자는 김미영 활동가이다. 문단조절이나 원문에 첨부된 2장의 사진 외의 이미지 부가 등은 모두 나의 조작이다.

-며칠 전부터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기사가 드문드문 보이더니 사고 당일인 26일에 가까워오자 버스 안 라디오 뉴스에서도 그 원전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체르노빌에 관한 글 한편을 써보겠다고 다짐한 이후 체르노빌이란 글자만 들어도 귀가 솔깃해지고 그 글자가 들어간 잡지도 여느 때와 달리 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올해가 20주기 되는 해인지라 다른 때보다 기사가 더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관심이 있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체르노빌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사고가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던 저는 올해가 그 사고가 일어난 지 20년 째 되는 해라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사고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진행되었고 후에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인터넷과 잡지 신문을 토대로 제가 나름대로 쌓은 내용을 지금부터 나누려고 합니다.

-체르노빌은 그 당시의 구소련,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입니다. 1986년 4월 26일 이른 새벽 1시 경에 체르노빌 원전에서는 출력을 낮추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총 4개의 원자로 중 제 4호기에서 그 실험은 진행되었는데 사고 전까지는 가장 좋은 운전실적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험이 원자로에 주게 될 부담과 안정성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운전 담당자와 안전 담당자가 충분히 정보를 교환하지 못한 관계로 실험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불행히도 운전원들이 자동정지 장치를 꺼버리는 실수로 인해 원자로 출력은 순간적으로 치솟았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열이 발생하여 핵연료는 녹아내렸습니다. 이어서 뜨거운 핵연료와 물이 만나 증기폭발이 발생하였고 추가적인 폭발로 인해 원자로 및 건물의 지붕까지 날아가 버리는 대형사고가 터지게 된 것입니다.



-그 폭발 당시 원전의 모습이 어떠할지는 상상할 수 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방사성 파편, 흑연조각(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는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먼지 등이 거대한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핵실험 시 생기는 거대한 버섯구름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진화작업으로 수천 톤의 납과 모래를 부었지만 거대한 불길은 열흘이 지나서야 잡혔습니다. 당시 발전소에 있던 연구원들이나 관리요원들이 사망하거나 방사능에 노출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화작업을 하던 소방요원들도 그대로 방사능을 뒤집어썼습니다.



-사고 후 소련의 대처방법은 사고만큼이나 끔찍합니다. 인근 다른 국가들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 지역의 주민들도 전혀 사고 소식을 몰랐다고 합니다. 방사선 물질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평소와 마찬가지로 밭을 일구고 야외파티를 하고 운동을 했겠지요. 스웨덴 과학자들이 평소보다 높은 농도의 방사능을 감지하고 바람방향을 이용해 역추적을 한 결과 사고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소련은 원전 사고를 시인했고, 상세한 내용을 발표한 것은 2주일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주변 지역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고 되도록이면 사고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소련은 서둘러 사고를 수습, 오염을 제거하려고만 하였고, 이는 오히려 피폭 피해를 더욱 가속화하였습니다. 현장정리에 제대로 된 안전장비 없이 동원된 사람들이 모두 8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당시 소련의 사고 대처는 슬프기까지 합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현재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고 피해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체르노빌 주변지역에는 유독 기형아출산율과 암 발생률이 높습니다. 기형적으로 머리가 큰 어린이 사진, 갑상선 수술 후 목에 난 수술자국을 보여주는 소녀 사진,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 사진을 보면 인간이 고안해낸 기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주변국인 영국, 스웨덴 등지에서도 고농도의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습니다.

-피해 규모 통계 자료는 조사단체마다 너무나 다르게 내어 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린피스가 내 놓은 조사 자료에 의하면 20년 전의 이 사고로 인해서 앞으로 발생할 암이 27만 건이라고 합니다. 덧붙여서 그린피스는 그중에서 약 10만 건은 무척이나 치명적일 것이라는 전망을 하였습니다.  유엔의 자료는 또 다릅니다. 4만 명이 암에 걸릴 것이고 그 중에서 1만 6천명은 갑상선암으로 고통 받을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방사선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바로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라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란 어렵겠지요. 하지만 사고 지역과 가까운 벨로루시에서 사고 이후에 갑상선 암 발생률이 30배나 높아졌다는 일례만 보더라도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선 유출이 인체에 치명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암 뿐만 아니라 성장장애, 노화촉진, 정신질환, 기형아출산 등 그 피해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아직도 그 곳 주민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향후 30년간은 계속 추이를 지켜봐야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방사능을 피해서 고향을 떠나야했던 슬픔, 피폭된 자들이라고 낙인 찍혀야했던 삶의 고통은 수치화 할 수 없겠지요.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사고가 일어난 후 소련은 인근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지금은 그곳에서 허가받은 사람들만이 외부로부터 오염되지 않는 식품과 정기건강검진을 제공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땅은 사고 당시 방사능 물질을 그대로 안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났지만 방사능의 양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역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방사능의 반감기는 물질에 따라 평균 30년 정도) 이곳의 숲, 강에서 잡히는 동식물들의 방사성물질은 먹이사슬을 타고 인간에게까지 충분히 올 수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로 반핵의 움직임이 크게 일었습니다. 그러나 유가는 계속 올라가고 기후변화 협약으로 이산화탄소를 절감해야하는 과제를 떠안자 너도나도 다시 핵에너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각자의 입맛에 맞는 통계자료를 들이대며 서로의 입장을 정당화 시킵니다. 과학자들은 지금도 연구실에서 좀 더 안전한 방식의 핵발전 방식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국수력원자력 역시 가동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는 가동 방식이 확연히 다르고 훨씬 안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한 우리는 방사성물질 누출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고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핵폐기물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핵폐기물을 아무리 꽁꽁 싸매어 깊이 묻어 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그것도 어떻게든 인간의 손을 거쳐 다시 처리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미래세대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일입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 -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청정에너지로서 핵발전소를 가동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닌,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핵 발전소의 사고와 처리 곤란한 핵폐기물을 미래세대에게 영원히 물려주느니, 이제부터라도 햇빛과 바람을 이용한 안전하고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적 연구와 과감한 지원과 투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20주기 맞이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25일 화요일 오전 11시에는 종로에서 추모 퍼포먼스가 있고 오후 6시에는 인사동 남인사 마당에서 추모 촛불 문화제가 열립니다. 이 때 사진 전시와 영상물 상영, 문화공연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지금도 www.enviroasia.info 및 각 환경단체 홈페이지에서 핵 확산 저지 한-일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는 체르노빌 핵사고 사진전이 27일에서 28일 양일간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유엔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체르노빌 사고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체르노빌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이다. 체르노빌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적과 알 수 없는 근심걱정을 담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사건이다.”   



06. 04. 25.

 

 

 

 

P.S. 체르노빌 사고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사회주의 재건(페레스트로이카) 운동을 '넌센스'로 만들어놓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5년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은 붕괴되었다. 어떠한 이념도 그러한 재난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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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가끔 와서 올려놓으신 귀한 자료 함부로 퍼갔습니다. 용서해주실거죠? 또 퍼갈게요.^^

로쟈 2006-04-2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온 자료인데요 뭐.^^

twoshot 2006-04-2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끔찍합니다. 그리고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

마노아 2006-04-26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좋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체르노빌 이야기를 소재로 쓴 시미즈 레이코의 "달의 아이"가 떠오릅니다. 좋은 글 퍼갈게요.

여울 2006-04-26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재활용되지 않는 폐기물을 남기는 사업이 (담수화와 친환경)이란 광고로 주입되고 있는 것은 아시죠.
중동에 설치해서 담수를 생산한다고 하면, 전쟁으로 피격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안전하다고, 돈 벌기위해 수출한다는 것을 아무리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아도 납득을 할 수 없군요.  갖은 돈을 들여 광고로 세뇌되는 현실... ...???
 

원자력硏-두산重, 해수 담수화 본격 추진

한국원자력연구소(소장 장인순)와 두산중공업(대표 김대중)이 원자력을 이용한 해수 담수화 기술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원자력연구소는 29일 연구소 대회의실에서 두산중공업과 이 분야 사업을 공동으로 본격 추진키 위한 상호협력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28일 밝혔다.

원자력연구소와 두산중공업은 이 협정에 따라 원자력연이 해수 담수화 등을 위해 지난 2002년 우리 고유 모델로 개발한 `일체형 원자로(SMART)'의 산업화와 해외시장 개척, 수주때 공동 또는 컨소시엄 형식으로 상호 협력해 나가게 된다.

일체형 원자로는 다목적 중소형 원자로로, 원전터빈에서 사용한 폐증기를 활용,바닷물을 증발시켜 높은 순도의 식수 및 공업용수를 1일 4만t씩 생산할 수 있을 뿐아니라 10만KW 정도의 전력도 생산할수 있는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인 최첨단 원자로다.

원자력연은 이 일체형 원자로의 기술검증을 위해 지난해 세계 해수 담수화 설비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두산중공업 등과 파일럿 플랜트 건설을 추진키로 했으며, 두산중공업 등은 2008년까지 총 2천500억원이 투입되는 이 플랜트 건설사업비의70%인 1천750억을 부담할 예정이다.

원자력연 관계자는 "두 산.연은 이를 통해 얻은 일체형원자로의 설계 및 건설기술을 바탕으로 공동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게 된다"고 설명했다.

오는 2011년께는 우리나라도 약 20억t의 물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일체형 원자로를 이용한 해수 담수화 사업은 국민들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미래식수원 확보와 함께 소규모 전력 생산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 물이 부족한 중동,북부 아프리카 및 중남미 지역에 진출할 수 있는 국가 수출전략 품목으로도 부상할 전망이다.

< 출처 : 대전=연합뉴스, 2004. 1. 28 >

sayonara 2006-04-2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르노빌 사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신문을 보니 방사능 오염으로 수박만해진 사과를 보고 마냥 좋아했던 기억이... -_-; 어린 시절이란 때론 철없이 잔인한가 봅니다.

로쟈 2006-04-2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cus님/ 남의 일이 아닌 거 맞습니다.
마노아님/ 저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작년에야 기억해 냈습니다.
여울마당님/ 2004년 일이면 벌써 상당히 진행중일 수도 있을 거 같군요. 사실, 배아줄기 세포 연구에 투자할 비용이라면, 대체 에너지쪽이 더 '현실적'인 것도 같은데요...
sayonara님/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 유난한 싼 채소, 감자 따위는 먹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었죠. 체르노빌산이라고 해서...
 

 

 

 

 

레프 도진의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자료들도 모아두고 몇 자 적기로 한다. 원래 이름이 '체호프 기념 모스크바 예술극장'인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극장/극단은 안톤 체호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자신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예술극장의 배우였던 올가 크니페르(1870-1959)와 1901년에 결혼하기도 했으니까 예술극장은 어쩌면 극작가 체호프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문장은 <갈매기> 초연을 기념하기 위해 박아놓은 '갈매기'이다. 그리고 그 연출자가 스타니슬랍스키였다. 아래는 재작년 모스크바에 머물 때 시내에 나갈 때마다 지나가곤 했던 카메르게르스키 골목의 모스크바 예술극장 사진들이다.

 

Крупнее

이 극장의 현 예술감독이 저명한 배우이자 연출가인 올렉 타바코프(1935- )이다. 모스크바 예술극단 출신인 그는 자신의 극장을 따로 갖고 있으면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감독직도 겸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국민배우'이자 연출가, 예술감독.

'몰리에르'와 '살리에리' 전문 배우로도 유명한 연극무대에서뿐만 아니라 그리고리 추흐라이의 <맑은 하늘>이나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전쟁과 평화> 같은 고전적인 영화에서부터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같은 대중영화, 그리고 니키타 미할코프의 1980년대 영화들에서도 타바코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미할코프의 영화 <오블로모프>(1981). 국내에는 <오브로모프의 생애>인가란 제목으로 출시됐었던 작품. 그의 표정만으로도 게으르지만 선량한 오블로모프의 넉넉함이 묻어난다(미할코프는 영화에서 천하의 게으른 지주 오블로모프를 공감과 연민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06. 04. 25-27.

P.S.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규모에 걸맞는 이야기는 당분간 미루어두어야겠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건 '쇼케이스' 페이퍼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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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nwise 2009-11-2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만들어졌군요 저는 엊그제 이책을 읽어서 요즘 매일같이 러시아란 나라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군요
 

지난 1월인가 러시아의 저명한 연출가 레프 도진의 연극 한편이 올해 공연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한 바 있는데, 그 일정이 한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번에 올려지는 '헝제자매들'은 생소한 작품인데, 공연시간은 무려 7시간이다. 9-10시간 짜리 공연 레퍼터리들도 드물지 않은 연출가이기 때문에 시간 자체가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한국 관객들에게 얼마나 어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도 관람을 권유한 만큼 나도 티켓을 알아봐야겠다. '워밍업' 차원에서 관련기사들을 두어 개 옮겨놓는다.  

먼저, 올해의 손꼽을 만한 공연들을 소개한 한국일보(2006. 01. 06) 기사에서 "연극-레프 도진의 연극 '형제자매들' " 꼭지. 

-2001년 7월, <가우데아무스>를 본 사람은 그들의 꿈에 감염되기 시작했다. 무대를 통해 인간은 다른 차원의 현실로 승화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군대 생활을 주제로 한 19편의 즉흥극은 그 흔해빠진 첨단 멀티미디어도, 테크놀로지도 없이 오직 인간의 현존만으로 이뤄지는 무대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입증했다. 그것은 희랍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연극이란 기본적으로, 아니 근본적으로 ‘배우의 현존’이어야 함을 웅변했다. 눈만 뜨면 가상 현실이다 뭐다 해서 사이버 문명에 주눅들던 한국인에게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연극 집단 ‘말리 극장'은 인간의 꿈이란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5월, 그들이 다시 온다. 이번에는 중간 휴식을 합쳐 공연시간 7시간의 대작 <형제 자매들>이다. 페드로 아브라모브 원작으로 1985년 초연된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 정권의 억압 아래서 러시아 민중이 어떻게 그 엄혹한 시간을 버텨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러시아 연극의 부흥을 일으킨 주역인 거장 레프 도진이 연출하고, 잘 훈련된 4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연극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한국에서 런던, 파리, 시카고 등지의 눈 높은 관객을 사로 잡은 도진의 휴머니즘과 연극론은 이번에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까. 5월 20, 21일 LG아트센터 공연. 러시아어에 한글 자막.

이어서 동아일보(2006. 04. 19)에 실린 서면 인터뷰 기사.

-'7시간 반짜리’ 연극이 온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의 <형제자매들>. 다음 달 20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이 작품은 국내 공연 사상 가장 긴 연극이다. 휴식시간을 뺀 순수 공연만 6시간. 대학로 연극 네 편을 하루에 보는 것과 맞먹는 시간이다. 이 작품의 연출가인 레프 도진(62·사진)은 말리 극장의 예술 감독이자 러시아의 신화적 연출가. 러시아 연극계에서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황금 마스크 상을 3차례나 수상했고 피터 브룩, 피나 바우쉬 등이 받은 유럽연극상과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 상을 거머쥔 인물이다. 10시간에 이르는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연극 <악령>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 그에게 왜 이렇게 긴 연극을 하는지 e메일로 물었다.

―‘7시간 반 연극’은 관객 입장에서도 도전이다.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않나?

“요즘 연극들은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모두들 TV의 영향으로 단절적 사고를 한다. 우리는 점점 더 속도전에 휩쓸려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과 예술은 속도의 공격에 맞서야 한다.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변화의 시기에 예술가는 천천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연극인들조차 빨리 생각하는 것 같다. 빨리 생각하는 것은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대가 빨라질수록 연극은 점점 더 느리고 진지해져야 한다.”(공연작인 <형제자매들>은 1985년 초연 후 꾸준히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그의 대표작.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빈곤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민중의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연극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어느 연극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로부터 개인을 지키고, 타인을 모욕하는 사람들로부터 인간을 지켜주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만큼 스스로를 괴롭히고 모욕하는 인간도 없으니까. 연극이 하는 가장 값진 역할은 관객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기 안에서 진정한 인간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인간 본성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인간의 영혼은 연극의 가장 중요한 탐구 주제다. 인터뷰에서 말하기엔 너무 광범위한 주제이고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7시간, 10시간짜리 긴 연극을 만든다. 나는 인간의 본성은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죽기 때문이다. 영혼은 태어나면서부터 투쟁해야 하며 이는 인간의 숙명이다.”

―한국은 뮤지컬에 밀려 연극은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러시아는 어떤가? 연극의 앞날을 낙관하나?

“한국이나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연극하기는 힘들다. 매스미디어, 대중문화의 공격을 받고 있고 연극인들은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럴수록 자신감을 갖고 저항해야 한다. 연극은 사람들의 영혼에 필요하다는 믿음을 간직해야 한다. 연극에서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연극이란 인간에게 본원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오페라 연출도 활발히 하는데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오페라도 공연 예술의 한 갈래이고 위대한 음악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데 매력이 있다. 하지만 오페라 작업은 연극과 모순되는 부분도 많아 최소한으로 맡으려 한다. 가을까지 오페라 <살로메>를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끝내야 하고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카체리나 이즈마일로바>(사진) 완성해야 한다.”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는 러시아 작가 레스코프의 소설 <므첸스크 군의 멕베스 부인>이 원작인 쇼스타코비치의 대표적인 오페라이다(*레스코프의 소설은 최근에 <러시아의 멕베스 부인>으로 번역/출간됐다).

 

 

 

 

원작은 몇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가장 최신 (번안)버전은 발레리 토도로프스키의 <모스크바 근교의 밤>(1993)이다. 영어 제목으론 'Katya Izmailova'인데, 우리말 제목은 엉뚱하게도 <마이 러브 카티샤>가 되었다('케테리나'의 애칭인 '카챠'를 '카티샤'로 잘못 옮긴 것). 그런 제목으로 버젓하게 개봉됐었고(기억에는 중앙극장에서였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본 적이 있다(러시아 영화일 거라 짐작을 했지만).

내용은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의 러시아-소비에트 버전인데, 며느리 타이피스트와 시어머니 작가, 마마보이 남편, 그리고 건장한 별장지기 사이에 벌어지는 불륜극. 줄거리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카티샤'는 '카챠'로 수중했다).

"모스코바 카챠는 32세의 타이피스트. 저명한 작가인 시어머니 이리나가 쓰는 소설 원고를 처리해 타이핑하며 단조로운 나날을 보낸다. 카챠샤의 남편 미티아는 자신의 어머니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남자이다. 이 세사람의 생활범위는 모스코바 아파트와 여름을 지내는 피서지의 별장 뿐이다. 어느 여름날 예년과 다름없이 별장을 찾아온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별장지기 세르게이였다. 카챠는 별장에서 타이핑 작업을 계속하고. 카챠는 세르게이에게 점차 매력을 느끼고 그의 관능적이며 광적인 사랑은 그녀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간다. 남편의 출장 중 그녀는 세르게이와 별장에서 위험한 정사를 나눈다. 두 사람은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시어머니 이리나에게 현장을 들키고만다. 그녀의 불륜을 질타하던 이리나는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약을 가져오던 카챠는 이리나의 침대위에 걸린 르느와르의 퍼즐그림에 시선을 두며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발작을 멈추지 못해 이리나는 결국 죽게 되고 출판계에 큰 충격을 안겨준다. 그녀의 소설 엔딩 부분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은 늘어만 가는데..."

감독 발레리 토도로프스키는 <인터걸>의 감독 표트르 토드로프스키의 아들이기도 한 중견감독이다. 카챠로 나오는 배우 잉게보르가 답쿠나이트는 <위선의 태양>에도 코토프 대령의 아내(아래 사진)로 출연했던 배우.

결론은 도진의 <형제자매들>을 한번 관람해 보시라는 것이다. 연극이란 인간에게 본원적으로 필요한 것이란 믿음을 공유하신다면...

06. 0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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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4-25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스코프의 원작 소설 [...맥베드 부인]에선 '시어머니'가 아닌 '시아버지'가 카챠(+그녀의 정부)에 의해 살해됐던 것 같아요. 길이는 얼마 안 되지만, 도..키의 [백치]에 맞먹는 '정념'의 드라마라고 할까요.

로쟈 2006-04-25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도로프스키의 영화는 현대판으로 각색한 것이라 좀 다르죠. 아무튼 러시아에서는 드문 경향의 작품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쇼스타코비치 버전에서는 정치적 뉘앙스도 가미되는 듯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