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1 | 212 | 213 | 2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내년, 즉 2005년에 개최되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한국은 주빈국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얼마전 ‘한국의 책 100권(종)’이 발표되었다. 당초 ‘한국의 명저(베스트) 100권’을 엄선할 예정이었다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100권’이 돼 버렸다. 놀라운 건 이 100권의 책을 1년 안에 번역 출간한다는 것. 선정위원회 황지우 위원장의 표현을 빌면, ‘문화의 삼풍백화점’이 우려되지만, “불가사의한 순발력과 저력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도 더불어 놀라고, 우려하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런 류의 호들갑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출판/번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지원이 배가될 수 있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관심을 갖는 쪽은 시와 철학 분야인데, 먼저 기존에 많이 번역된 시인/작가들을 제외한다는 방침하에 선정된 시집들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민음사),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이성복의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천상병의 <주막에서>(민음사), 그리고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로서 모두 7권이다.

아쉬운 것은 이들 시집들이 모두 독어(김수영, 신경림, 오규원, 천상병), 스페인어(기형도, 최승호), 프랑스어(이성복)로 번역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읽어볼 수 없다는 것(나는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김지하 등의 영역시집과 <님의 침묵>의 체코어역 시집을 갖고 있다). 짐작컨대, 이성복이 직접 번역에 간여할 듯한 <남해금산>이 가장 신뢰할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읽어보고 싶은 시집은 스페인어역 <입 속의 검은 잎>이다.

철학쪽으로 선정된 책들은 대개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김영두의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가 작년에 나온 책이고,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동아시아여성의 기원>도 재작년 연말에 나온 것이며, 이승환 교수의 <유교 담론의 지형학>(푸른숲)은 불과 지난 1월에 나온 책이다. 아마도 내용과 더불어 번역의 용이성이 고려된 선정인 듯하다.하지만, 재미철학자인 이광세 교수의 <동양과 서양, 두 지평선의 융합>(길)에 실린 글들은 대개 영어로 먼저 씌어진 걸로 아는데, 영어로 번역한다고 하니까 좀 어리둥절하다. 역시 영어로 (아마도 먼저) 씌어진 김재권 교수의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처럼 독어로 옮겨진다면 모를까.

철학분야 선정 14권의 책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고미숙의 <열하일기 -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와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이다. 얼마전 ‘회사원’ 강유원씨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은바 있는 <열하일기>는 프랑스어로 번역되는데, ‘들뢰즈의 언어’로 번역된다고 하니까 현지인들에게 좀 흥미를 끌지도 모르겠다(‘박지원의 언어’는 누가 번역할는지 궁금하지만). <니체>는 당당하게 독어로 번역되는데, 현단계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수준을 대표할 만한 책으로 선정된 듯하다(이 대표성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론도 없지 않지만). 번역에는 아마도 독일철학 박사들이 여럿 동원되어야 할 듯하다...

비록 관료적인 ‘한건주의’식의 번역사업이긴 하지만, 우려보다는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03-1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할 수 있을지 정말 우려되는군요. 번역의 질이 좋다고 해도, 몇몇 책들은 그 내용으로 비아냥이냐 받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4-03-1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기대할 건, '불가사의한 저력'인 것이죠. '비아냥' 정도의 반응도 '반응'아닐까요? 제 짐작엔, 그냥 정적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포월 2004-03-2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야 보다 철학 분야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공 탓보다 어이없는 탓이 크겠습니다. [열하일기..]는 사실 굳이 경직된 태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철학적인 것(?)으로 봐줄만한 것인지 언제나 의심스러웠습니다. [니체] 역시 실린 논문들의 수준이 매우 고르지 않아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런 책이 포함되었다는게 아무리 학문과 현실의 논리가 얼마간은 분리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줄 수도 있는 듯 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건 상관없이...
 

 

 

  

 

오늘자(2003.11.1) 한겨레의 <책과사람>란에 고정칼럼인 '김재기의 책읽기'는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를 다루고 있다. 모리스는 영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로서(그는 노벨상 수상자인 니코 틴버겐의 제자이다) 인간을 대상으로한 대중적인 동물행동학 저서들로 유명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꽤 많은 책들이 번역 소개돼 있다(한 가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그의 자서전이 절판된 지 오래됐다는 점이다. 김석희 번역이니까 번역도 날림이 아닌데. 기본 부수 이상은 팔릴 만한 책이 사장돼 있다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내 기억에 원제는 '동물들과의 나날'인데, 우리말 제목은 촌스럽게도 '옷을 입은 원숭이'였다.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로 재출간됐다).

칼럼의 필자는 철학자로서 '동물+알파'로서의 인간 공식에서 동물(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동물행동학이나 이후의 사회생물학(그리고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는데(그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것이 이러한 책들의 '재미'이다), 칼럼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돼 있다.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을 실증적인 생물학적 탐구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생물학의 오만은 유전자의 해독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이라는 망상처럼 해롭고 위험하다. 또 그것은 성경의 자구가 모든 지적 탐구를 대신해야 한다고 믿었던 낡은 신학의 강요만큼이나 폭력적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탐구는 자기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는 변증법의 지침이 여기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생물학이란 사회성 동물들에 대한 진화론적 행동과학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성 동물의 일종인 이상, 그 사회적 행동의 많은 부분이 사회생물학에 의해 해명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도 강조하고 있듯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며, 그것은 환경에 대한 다양한 적응기제의 산물이다.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 같은 경우도 인간에게서 생물학적 유전자(Gene)과 대비되는 문화적 유전자(Meme)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칼럼 필자의 오류는 사회생물학을 몇몇 테제적 주장으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을 모든 인문학적 담론과 모든 지적 탐구를 대체하고자 하는 오만한 주장으로 환원시킨 데 있다. '동물+알파'에서 알파는 동물성에 부가된 것이지, 결코 그것과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철학적 태도는, 칸트가 뉴턴의 물리학에 대해서 그랬듯이, 현대 생물학의이론과 주장들을 이해/소화해서 그것이 갖는 철학적 함의를 반성하는 일이다.

그건 분자생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사회생물학과 분자생물학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사실 둘의 전제는 많이 다르며 사이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유전학자들은 유전자결정론식의 주장들을 하지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분자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더 지지하는 듯하다(게놈 프로젝트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전자의 위치정보는 그 복잡한 '기능작용'에 비하면 사소하다). 따라서 '낡은 신학' 어쩌구 하는 논리는 매카시즘적인 배제의 논리일 따름이다.

모든 지적 탐구에 대해서 폭력적인 전횡을 일삼아온 것은 사실 철학적 담론이었다. 물리학과 심리학에서의 '혁명' 이후에 철학이 차츰 분수에 맞게 '언어' 분석에나 몰두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기 자리지킴에의 요구가 향해야 하는 것은 생물학 '혁명' 이후의 철학이지 생물학이 아니다.

이번에 방한했던 지젝의 강연문 중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를 읽고 감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지젝은 유전공학과 인지과학의 최신 성과들과 쟁점들을 섭렵하면서 그것이 정신분석과 어떻게 접속될 수 있는지,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재독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었다(덕분에 나는 스티븐 핀커의 책을 여러 권 샀다, 살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낡은 경전들'에 대한 자구풀이로 철학을 대신하면서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고 변명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들과 읽어야 할 책들은 산더미이다.

도전은 거부되거나 회피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철학에 대한, 인간학적 담론에 있어서 철학의 권위와 우선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라캉은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철학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 도전에 제대로 맞서는 일은 '적'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제자리에 있을 테니까, 너도 제자리에 있어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복지부동의 자세이다. 그러한 자세로는 동물성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침식하는지, 우리는 왜 맨날 이 모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영혼의 담론'만으로 인간을 논의해왔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의만으로 사회적 기득권을 향유해 왔던 이들이(철학교수들은 그런 점에서 목사들과 상통한다) 물정을 좀 알고, 정신을 차리는 일이다. 게으른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을 현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03. 11. 01.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3-2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를 읽다가 하도 재미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보려고 들어왔더니, 역시나 '로쟈와 나귀'(나귀를 몰고다니는 로쟈의 모습, 아니면 로쟈를 끌고다니는 나귀의 그림이 연상된다는, 하여간 제 이미지-세계 속에서는 짝을 이룰 법한 두 대상)의 글들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벌써 몇년 지난 글인데도 관점이 뚜렷해서 '감화'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젝한테도 고마워해야겠군요)

아마도, 철학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섭렵하는 속도보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철학을 흡수하는 속도가 더 빠를 듯 합니다.
 

조금 늦게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나서야 인터넷을 둘러보는데(*이 글은 2003년말에 씌어졌다), 미디어다음의 메인 뉴스가 “여배우 매염방 암으로 사망”이다. 그녀가 암투병중이라는 얘기는 오래전에 흘깃 지나가면서 들은 거 같은데, 그럼에도 2003년을 불과 이틀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갑작스럽다. 지난번 장국영의 자살에 이은 매염방(Anita Mui)의 죽음으로 이들 홍콩의 가수이자 배우들을 좋아했던 이들에게 올해는 ‘최악의 해’로 기억될 모양이다.

 

 

 

 

장국영이나 매염방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의 음악, 특히 영화주제가들을 좋아한다. 자신이 주연도 맡았던 영화의 주제가로 장국영이 부른 <천녀유혼>과 <영웅본색3>의 주제가로 매염방이 부른 <석양의 노래(夕陽之歌)>가 그것들이다(나는 그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던 관금붕의 <인지구>를 빼놓을 수 없다(이 영화로 매염방은 대만의 금마장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에 장국영이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등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여러 편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데 반해, 매염방은 몇몇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그녀는 연기력에 비해서 좋은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재주 많은 두 사람이 홍콩 연예계의 한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흔히 386이라고 부르는)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나에게 매염방은 개인적으로 한 친구에 대한 기억과 연결돼 있다. 그 친구는 사실상 나에게 매염방이란 배우의 존재 자체를 각인시켜준바, 언젠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나로선 이외였지만) 매염방이라고 했다(그때 나는 아마도 임청하를 좋아하는 배우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입 밖에 내진 않았는지도). 그러면서 그 친구가 내세운 이유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었다(나는 턱이 야무진 배우를 좋아한다. 임청하나 애슐리 주드처럼).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매염방 음반(테입)은 1989년에 나온 <브라질>이고, 커버에는 예의 게슴츠레한 눈빛과 도톰한 입술의 그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음반을 사는 일이 아주 드물지만, 그때만 해도 한번 산 테입은 거의 닳을 정도로 들었고, 매염방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음반은 A면(The Bright Side)과 B면(The Blues Side)이 각기 다른 주제로 돼 있는데, A면의 첫곡이 <여름날의 사랑(夏日戀人/ Summer Lover)>이고, B면의 첫곡이 바로 <석양의 노래(Sunset Melody)>이다. 매염방과 더불어, 어느덧 우리 인생의 여름날들은 다 저물어 간 듯하다.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석양의 노래>는 얼마나 박력 있고 장쾌한가! 나는 그녀가 암과의 사투 속에서도 그러한 의연함을 지켜갔으리라고 믿고 싶다.

매염방을 좋아했던 친구는 이후에 입술이 도톰하지는 않아도 매염방만큼 훤칠한 미인을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감쪽같이 숨겨왔던 자신의 배우자감을 처음 내게 소개하면서 의기양양해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가 지난봄 끄트머리에 세상을 버렸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 하던 그를, 한동안 자주 보지 못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내가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나를 포함하여) 세상 그 무엇도/누구도 그의 의지가 되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고 아쉽다. 그는 의연했던 것일까, 어리석었던 것일까?..

 

 

 

 

지난주말에 산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에 실린 ‘숨막히는 진정성의 시: 바예호 읽기’를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가 바로 5년 전인 1998년 12월에 나왔었고, 나는 그해 겨울을 레바나스를 읽으며, 바예호를 읊조리며 보냈다(나는 스페인어권 시인들 가운데 미겔 에르난데스와 바예호를 좋아한다). 평생을 경제적 고통과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시인 바예호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그의 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이다. “호이 메 구스타 라 비다 무초 메노스(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a detrás de mi palabra.

Hoy me palpo el mentón en retirada
y en estos momentáneos pantalones yo me digo:
¡Tánta vida y jamás!
¡Tántos años y siempre mis semanas!...
Mis padres enterrados con su piedra
y su triste estirón que no ha acabado;
de cuerpo entero hermanos, mis hermanos,
y, en fin, mi ser parado y en chaleco.

Me gusta la vida enormemente
pero, desde luego,
con mi muerte querida y mi café
y viendo los castaños frondosos de París
y diciendo:
Es un ojo éste, aquél; una frente ésta, aquélla... Y repitiendo:
¡Tánta vida y jamás me falla la tonada!
¡Tántos años y siempre, siempre, siempre!

Dije chaleco, dije
todo, parte, ansia, dije casi, por no llorar.
Que es verdad que sufrí en aquel hospital que queda al lado
y está bien y está mal haber mirado
de abajo para arriba mi organismo.

Me gustará vivir siempre, así fuese de barriga,
porque, como iba diciendo y lo repito,
¡tánta vida y jamás! ¡Y tántos años,
y siempre, mucho siempre, siempre, siempre!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들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버텼다.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자살에 대한 관념은 자살을 유예시킨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느새 삶은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내가 지난봄에 그 친구에게 바예호를 읽어주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해가 가고 있다. 하지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또 다른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산 자들의 몫이다. 저무는 해에 삶을 놓음으로써 자유를 얻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내 친구의 명복을 빌고, 매염방의 명복을 빈다(이 도톰한 여가수 덕분에 그 친구가 좀 덜 심심할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은 어린 남매의 명복을 빈다. 전철에 몸을 던져 우리가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한, 한 외국인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진으로 숨진 수만의 이란 사람들...

바예호의 사후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지 말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두고 가지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슬픈 시신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멀리해다오.12>

2003. 12.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30분쯤 친 내용을 날리는 바람에 다시 친다. 같은 내용을 다시 치는 일이 내키지는 않지만, 오기는 못말리는 법이다. 하지만, 대단한 오기는 아니기에 내용은 대폭 삭감한다...

문제의 발단은 어제 날짜 한겨레에 실린 한 서평이다. 신간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아트북스)에 대한 서평(24면)을 쓰면서 고명섭 기자는 줄곧 '벤야민'을 '베냐민'으로 표기했다. 제목까지 '베냐민에서 보드리야르까지...'로 달고서. 이 독일의 문예이론가 W. Benjamin에 대해 관례적인 표기는 물론 '벤야민'이다. 벤야민이나 베냐민이나 발음상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아마 고기자가 고집을 부리는 데에는 표기원칙이 작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설사 표기원칙에 따라 '베냐민'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더라도, 이 표기체계의 일관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용에 따라 축적된 문화적 관행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베냐민'은 (무슨 비타민이나 약이름도 아니고).'벤야민'이 갖고 있는 문화적 의미, 혹은 좀 과장해서 아우라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나치를 피해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청산가리를 먹고 죽은 사람을 베냐민과 짝짓지 못한다. 원음주의도 아닌, 이상한 표기원칙 때문에(게다가 이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원칙이다. 베냐민이란 이름으로 검색되는 책은 아직 한권도 없다), 그런 문화적 의미를 박탈당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학식있는 기자에게서 간혹 이런 만용을 볼 때(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나는 유감스럽다.

유사한 다른 사례들도 있다. 프랑스철학 좀 전공했다고, 관례화된 '베르그송(Bergson)' 대신에 '베르크손' 운운하는 족속들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원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외국어 표기에 있어서 원음주의는 한가지 원칙이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한 가지 원칙일 뿐, 절대적 타당성이나 객관성을 갖는 건 아니며, 교육부의 표기원칙과도 다르다(창작과비평에서도 원음주의를 선호하여 '소쉬르'를 '쏘쒸르'로 표기하는데, 좀 짜증스럽고,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혐오스럽다).

흔히 원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원칙이 한 가지 원칙이라고 말하는 대신에(원칙 중에서는 좀 순진한 원칙인데), 올바른 원칙이고, 진리에 근접한 원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그동안 베르그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라고. 그런 주장은 물론 사실이 아닐 뿐더러, 혐오스러운 상징폭력에 다름아니다(부르디외라면, 티내기로서의 '구별짓기'라고 말할 것이다). 프랑스에서조차 외국어 저작이나 인명 표기에 있어서 자기들식의 원칙/체계를 충족시킬 따름이지 원음주의 어쩌구 하는 수작은 부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것들이 현학취 이상의 의미를 갖는지 의심스럽다. '베르그송'과 '베르크손'을 절충해서 '베르그손'이라 표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과연 그게 목숨걸 일인지. 옆에서 보기엔, 이런 수작들이 무용하지만은 않다. 이런 표기를 근거로 베르그송 연구자들의 세대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정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일문학 (연구서도 아닌) 소개서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젊은 베르터의 슬픔'으로 옮겨놓은 걸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이미 '베르테르'란 번역 표기가 굳어져 있는 상태이고, 더군다나 대다수 독문학자들이 그렇게 번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르터'란 표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그게 원음에 가까운가? 과연 씩씩한 '베르터'가 유부녀 때문에 자살할 위인인가? 게다가 '베르테르'란 우리말(!)에 담겨 있는 문화적 의미를 '베르터'가 다 접수할 수 있는가? 이 역시 좀 모자란 이들의 현학취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바흐친(Bakhtin)을 '바흐찐'이라고 표기해야지만 되고 '바흐친'이라 표기하는 건 무식의 발로이며, 영미식의 왜곡된 바흐친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같다. 초기에는 '바흐틴'도 있었고, 심지어 '박틴'도 있었다. 사실, 어느 것이래도 무방하다. 우리말 체계에서 '차이'만을 가지면 되는 것이니까. 거기에 '이해수준'을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비뚤어진 전문가주의이다. 번역으로 책을 읽고 무얼 쓰는 건 다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외국인명의 표기는 원칙에 따라 두 가지가 공존할 수는 있다. '마르크스'와 '맑스'처럼. 그리고 거기에 무슨 우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원칙적 일관성과 관례, 표기의 경제성 등이다. 그리고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가급적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이왕 하나로 통일돼서 쓰이고 있는 표기라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무슨 치명적인 이유가 없는 한. 엉뚱하게 좀 튀어보려는 수작들은 이젠 그만 사라졌으면 싶다...

덧붙여 말하자면, 튀는 공유명사 표기가 말해주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이다. 무식이거나 교만이거나. 계몽철학자 '디드로(Diderot)'를 '디데로'로 표기한다든가, 문학비평가 '바르트(Barthes)'를 '바데스'로 표기하는 건 '무식'이고, (이미 합의된) '후설(Husserl)'을 '후세를'이나 '훗설'로 표기하는 건 교만이다. 둘다 학문에는 유익하지 않다...

03. 09. 21.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haire 2004-03-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동감, 정말 동감입니다!!! 베냐민에 반대하신다 해서, 깜짝 놀라 읽어보니, 벤야민에 반대하는 건 아니었군요... 저도 베냐민에 반대합니다. 넘 황당한 표현이네요.

로쟈 2004-03-1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지시군요^^

sayonara 2005-04-16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만... 또는 허영이 아닐까여!?

로쟈 2005-04-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적어도 '이상한 고집'쯤은 되는 것 같습니다...

딸기야놀러가자 2005-06-09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이야기입니다만.
국제기사에서 이름/지명 표기는 '아우라'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문제인 경우가 많거든요. '한국식/관행적 표기법'이라는 것이 대략 서구 식민주의자들->일본어 발음 거쳐서 온 것들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저는 현지발음을 살려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번번이 벽에 부딪칩니다. '관행적 표기' '외래어표기법'을 들고나오는 교열부의 벽에 말이죠. ^^

로쟈 2005-06-0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식/관행적 표기법'이라는 것이 대략 서구 식민주의자들->일본어 발음 거쳐서 온 것들"이란 지적은 일리 있지만, 일반화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현지발음'이라는 건 상상적인 것일 뿐이어서(가령, '톨스토이' 대신에 '똘스또이'라고 하면 현지음에 가까운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현지음을 고려하면 '딸쓰또이'쯤으로 표기해야 됩니다. 이게 권장할 만한 표기인지는 의문입니다), 그걸 표기에 다 반영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의 난점은 해당 언어의 '정확한' 발음을 모를 경우 표기를 역추적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상당히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얘기지만, 창비사에서는 경음 표기를 선호하는데, 가령, '데까르뜨' '싸르뜨르' 등, 하지만, 그게 '현지발음'에 더 부합하는지도 의문일 뿐더러 '탈식민주의적' 표기가 되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론,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면피용 혹은 생색용) 알리바이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벤야민', '베냐민'은 사실 현지발음과도 전혀 무관하기에, 저로선 기자의 양식을 좀 의심하게 됩니다(즉 허영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비로그인 2006-11-0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 김용옥식의 표기법도 싫어 하시겠군요.ㅋ

로쟈 2006-11-01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원칙은 관행/관례과 일관성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은 사실 발음과는 무관하기에 '김용옥식 표기'와도 무관합니다...
 

중력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이때의 어떤 것은 어떤 작용력이다.

 

  

 



M. 하이데거의 존재(Sein)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글자들, 유전형(genotype)과 표현형(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중력은 그런 것이다.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로 규정할 때, 그는 이 중력에 대해서 잠시 잊은 듯하다. 즉 그는 현존재의 한 면만을 말한 것. 다른 한 면이란 바로 현존재가 ‘잡아당겨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내던져진 채로 가만 놔두어지는 존재가 아니다(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꼼지락거린다). 따라서 내던져짐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현존재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는다. 잡아당겨짐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반드시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존재물음과 존재사유는 제값의 덩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시는 포스트그램(post-gram)이다(시인은 포스트그래머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삶이 무게(질량)와 거리의 관계에 의해 정식화되는 중력의 지배하에 놓인다면, 시는 그것에서 벗어난다. 적어도 벗어나는 체한다. 시는 무게와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 즉 시는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의미에 지배되지 않는다. 시는 단지 어떤 형태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시라는 것은 백과사전적(혹은 n차원적) 의미공간에서 어떤 자력(磁力)에 의해 결합되는 단어들의 집합이다. 새로운 시라는 것은 이 의미공간에서 새로운 항로를 발견한다는 뜻을 갖는다. 이때 시의 공간은 다만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다. 따라서 시는 현존하지 않는다. 시의 흔적만이 현존할 따름이다. 언젠가 당신 뺨에 흐르던 눈물 자국처럼, 그것은 곧 마르고 곧 지워지며 곧 잊혀진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부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삶을 많이 가난하게 만들 것이다. 시는 그런 것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시적인 것의 세 가지 사례: ⒜아침에 아이들을 깨울 때는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경쾌한 음악을 틀었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잠옷 위에 바바리를 걸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나갔다가 아예 지하철을 함께 타고 남편의 직장까지 가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경직 상태)로 되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할 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동물들은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약탈자로부터 위기를 모면한다... 카메룬 두꺼비와 돼지코뱀은 위협을 당하게 되면 등을 땅에 대고 드러누워 혀를 빼물고 죽은 시늉을 한다. 그러나 이 방어기제는 완벽하게 발달된 것은 아니어서 똑바로 길을 가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때 즉시 다시 드러눕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한다.

⒞아버지께서는 시상(詩想)이 떠오르실 때면 항상 우리를 불러다 받아쓰게 하셨다. 언젠가 아버지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은 시 쓰시는 일밖에 없으시면서 그것도 왜 혼자 하시지 않으세요?”하고 철없는 불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시를 쓰려고 하면 내가 시를 쓸 수 있구나 하는 기쁨에 손이 떨려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등가적이다. 과연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3초의 시간 여유. 정답은 과잉, 뭔가 넘쳐남이다. 먼저 ⒜는 바순(파고트)을 전공, 시립교향악단의 수석 바순주자로 활동하다가 “립스틱을 지워야 하는 것이 싫어”서 그만 둔 M여사(41세)의 얘기다. 다른 건 평범하다. 경쾌한 음악쯤은 나도 튼다. 하지만 바바리만 걸치고 ‘아파트 현관’을 지나서 남편의 직장까지 동행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G. 베커의 가족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부부생활(결혼)은 생물학적 차이에 바탕을 둔 교환계약이며 생산기술과 부부노동의 잠재적 시장가격에 의해 부부생활이 결정된다. 이때 사회적 의미에서 결혼이란 특정한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제도로써 사회가 수용한 것이라고 정의된다. 사랑의 감정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교환계약의 한 요소이다.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따라서 M여사 류의 감정(표현)은 과잉이다. 그래서 시적이다!

⒝의 두꺼비도 마찬가지이다. 이 녀석의 불완전한 방어기제 또한 눈물나게 시적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혀를 빼물고 죽은 시늉”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이 시지프적인 두꺼비가 제법 시를 알 만한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양서류로서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포유류의 시적 동물로서의 우리는 이 두꺼비에게 깊은 연민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는 박용래 시인의 얘기다. 시가 무엇이기에 손이 떨려 글씨도 제대로 못쓴단 말인가? 이건 시를 초과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시적이다! 이 세 가지 사례는 각각 제도와 본능과 시가 무엇인가라는 사유에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과잉, 넘쳐남을 통해서이다.

 

 

 

 

H. 베르그송은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을 ‘웃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나는 기계적인 것에 덧붙여진 생명적인 것을 ‘시(시적인 것)’라고 규정하겠다. 물론 이때의 시는 장르적인 규정이 아니다. 이 시적인 것은 우주적인 차원의 것이다. 바로 우리가 존재-시와 중력-시를 말하고 더듬고 사유하는 차원 말이다. 장르로서의 시는 이 전체-시(한 권의 시집Le Livre!)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9-04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1 | 212 | 213 | 2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