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주말판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이번에 고른 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민음사, 2000)이다.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어서 이모저모를 다 살펴볼 순 없고 작품에 나타난 혁명과 고독의 관계에 대해서만 조금 적었다.  

 

 

 

한겨레(12. 10. 13) 혁명이 사라진 자리엔 깊은 고독만이

 

중국 작가 모옌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중국의 민중세계를 가장 잘 재현한다는 평판의 모옌은 민간 구전과 역사를 결합시키는 기법을 즐겨 쓰기에 ‘중국의 마르케스’로도 불린다. 딱 30년 전인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그의 대표작 <백년의 고독>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스페인어권에서 <돈키호테>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초대형 베스트셀러이기도 해서 국내에는 노벨상 수상 이전에 <백년 동안의 고독>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

 



마르케스의 노벨상 수상연설문 제목이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었고, 한 평론가는 <백년의 고독>을 두고 “남미 대륙의 고독을 벗어나기 위한 지루한 여정”이라고도 말했다. 어떤 고독인가? 작품에서만 보자면 근친상간적 욕망의 고독이다. 부엔디아 가문 6대의 성쇠를 다룬 이야기의 발단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의 결혼이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사촌간이었다는 데 있다. 자신들을 조롱한 친구를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죽인 일이 계기가 돼 그들은 낯선 곳으로 이주하여 마콘도라는 마을을 세운다.

두 사람은 부엔디아 가계의 자손들을 퍼뜨리지만 아내 우르슬라는 항상 근친혼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를 염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친혼적 성향은 그 자손들에게도 이어진다. 집안의 남자들에게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란 이름만 반복적으로 붙여지는 것은 그 징후적 표지다. 100살 넘도록 장수한 우르슬라가 죽고 나서 6대손 아우렐리아노는 이모 아마란타 우르술라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들은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가 개미떼의 밥이 되는 것을 보고서야 아우렐리아노가 오래전 집시 멜키아데스가 남긴 양피지 문서에 쓰인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해독해내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단순하게 보자면 부엔디아 가문의 종말기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처럼 예언을 피하려다 결국은 붙들리고 마는 운명비극으로도 읽힌다. ‘잘못될 수 있는 일은 결국 잘못되게 마련’이라는 머피의 법칙의 한 사례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다른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문의 안주인 우르슬라와 함께 소설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아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보여준 가능성이다. 작가가 콜롬비아 보수정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자유파 지도자 우리베 장군을 모델로 하여 그려낸 부엔디아 대령은 가장 고독한 성격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모두 실패로 돌아가긴 했어도 서른두번의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애초에 그는 마콘도에 부임한 정부 행정관의 사위가 되지만, 장인이 선거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하는 부정을 저지르는 걸 보고는 보수파는 사기꾼들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서 내전에 가담한다. 반란군의 전설적 지도자로서 그가 일으킨 서른두차례의 반란만큼 의미를 갖는 것은 그가 전국 각지에서 열일곱명의 여자에게서 얻는 열일곱명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아우렐리아노란 이름으로 불린다. 근친혼적 성향의 수축적 가계에서 벗어나 확산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아들들은 아버지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마콘도에 모였다가 새로운 반란을 두려워한 정부 쪽 요원들에 의해 모두 암살당하고 만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가능성이 닫힐 때 남는 건 고독으로의 유폐뿐이다.

 

1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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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11호)에서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착각'으로 착각에 관한 책들이 여럿 눈에 띄길래 골랐다. 착각에 관한 통념 혹은 착각을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이다.

 

 

 

책&(12년 10월호) 착각

 

“어떤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현상”을 착각이라고 정의한다. 착각은 오류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을까? 우리가 곧잘 주고받는 “착각하지 마!”란 충고는 착각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듯싶다. 하지만 착각에 대한 이런 통념이야말로 착각에 대한 전형적인 착각이라면? 착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인가. ‘착각’을 주제로 한 책들을 몇 권 골라본다.


가장 먼저 꼽고 싶은 책은 독일의 뇌과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프리트헬름 슈바르츠의 <착각의 과학>(북스넛, 2011)이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착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간명한 정의를 내려주고 있어서다. “착각은 뇌의 일상적인 활동”이라는 것.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뇌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활동이 바로 착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뇌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현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원하지만 뇌는 기억과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만 원한다. 이런 차이를 신경과학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라고도 설명한다. 착각의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의식과 무의식 간의 불일치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생각과 결정은 어떻게 내려지는가. 무의식의 힘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를 보자. 두 그룹의 대학생들에게 어휘력 실험이라며 두 가지 단어군을 제시했다. 한쪽엔 활력, 스포츠, 근육 등 젊음과 관련된 단어를 보여주고, 다른 쪽엔 늙음, 질병, 황혼 등의 단어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그 단어들을 이용해 짧은 글을 짓게 하고 돌아가게 했는데, 정작 실험의 초점은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젊음과 관련된 단어를 제시받은 참가자들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간 반면에, 늙음과 관련된 단어를 받았던 학생들은 아주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갔다. 자신의 처지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은 그 단어들을 자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뇌는 그렇게 우리를 움직인다. 때문에 인간은 이기적 계산속에 따라 움직이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반응하는 ‘호모 레시프로칸스’에 가깝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착각은 우리를 이성의 독재로부터 해방시킨다고까지 말하면 과장일까.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심리학 블로그 운영자인 데이비드 맥레이니의 <착각의 심리학>(추수밭, 2012)은 초점이 조금 다르다. 원제가<당신은 그다지 똑똑하지 않아(You are not so smart)>인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우리가 똑똑하다는 착각을 교정하고자 한다. 물론 착각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우리의 사고를 구성하는 ‘인지적 편견’과 ‘발견적 학습’, 그리고 ‘논리적 오류’가 끊임없는 착각의 동력이다. 가령 당신은 “나의 행복은 오직 이 순간을 만족하는 데 달려있다”고 생각하는가? 착각이다. 우리의 자아는 ‘현재의 자아’ 곧 실시간으로 인생을 ‘경험하는 자아’ 외에 ‘기억하는 자아’로도 구성된다. 우리는 감각상의 기억이 지속되는 3초 정도의 순간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면서 산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행복해야 할뿐더러, 나중에 되돌아볼 기억을 만들어내야만 행복할 수 있다.

 


<착각의 심리학>은 그런 다양한 오해와 진실을 흥미롭게 펼쳐놓는데, 또 다른 사례는 마술사들의 눈속임이다. 마술 쇼는 ‘무주의 맹시’와 ‘변화 맹시’에 근거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주의를 집중할 때 그 배경에는 무주의하게 되는 현상을 마술사들이 이용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인지능력의 한계를 이용한 이러한 눈속임이 마술 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쓴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 2011)는 바로 그런 착각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들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착각을 주의력 착각, 기억력 착각, 자신감 착각, 지식 착각, 원인 착각, 잠재력 착각 등 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분석한다. 


더불어 세 명의 신경과학자가 쓴 <왜 뇌는 착각에 빠질까>(21세기북스, 2012)는 ‘마술의 신경과학을 다룬 최초의 책’으로 마술의 눈속임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착각과 착시를 본격적으로 해부한다. 저자들이 폭로하는 착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착각인데,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생각, 행동, 사실, 믿음 등이 갈등할 때 우리는 뇌는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이들 가운데 하나를 부각시키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그런 인지부조화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믿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늘 착각 속에서 산다면 처방은 무엇인가. <가끔은 제정신>(쌤앤파커스, 2012)의 저자 허태균 교수는 간명하게 답한다. 착각해야 행복하다면 그냥 이대로 살아도 좋다고. 다만 가끔씩 “혹시 내가 틀린 것 아냐? 착각하는 거 아냐?”라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착각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더 현실감을 갖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걸로 충분한 것일까?

 

1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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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96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인간>(메디치, 2012)을 읽고 쓴 것인데, 라자라토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로 국내엔 <비물질노동과 다중>(갈무리, 2005),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갈무리, 1997) 등의 공저를 통해서 알려졌으며 <부채인간>은 처음 소개되는 단독저작이다. 시론적인 성격의 소책자라서 다소 아쉬운데(<피로사회>와 함께 올해의 주목할 만한 소책자다), 문제의식을 좀더 확장시킨 책이 나오면 좋겠다... 

 

 

 

주간경향(12. 10. 16) 우리는 모두 부채인간이다

 

경제기사를 읽다가 가끔씩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다. 부채 혹은 채무와 관련한 기사다. 이미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섰다는 추측이 나오는 가운데(우리 시대를 가리키는 이름 중 하나가 ‘가계부채 1000조 시대’다!) 최근 발표에 따르면 공기업 부채를 합산한 한국의 국가부채 또한 1006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의 가계와 국가 모두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채무자다. 두 가지가 궁금하다. 과연 이런 상황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와 이 많은 부채의 채권자는 누구인지다.

 

 
그런 궁금증을 품고 있었기에 <부채인간>(메디치, 2012)에 바로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제목 자체에 끌렸고 ‘인간의 억압 조건에 관한 철학 에세이’란 소개가 기대를 갖게 했다. 저자의 기본 발상은 현재의 경제를 ‘금융경제’나 ‘금융 자본주의’란 말 대신에 ‘부채경제’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부채경제를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는 더 이상 자본가와 노동자 혹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이다. 이때 자본은 ‘거대한 채권자’, ‘포괄적 채권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금융과 생산을 더 이상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이르러 ‘금융’이란 말은 채권자-채무자 관계의 부상을 특별히 부각시켜주는 표현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경제는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다양한 기술을 통해서 구현해 왔다. 그 결과 ‘채무자’의 형상으로서 ‘부채인간’이 공공영역을 대표하는 주체의 형상이 됐다. “우리는 모두 부채인간이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전세계적 현상으로서 공공부채의 급증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복지 관련 지출의 금융구조 개선과 맞물린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비롯한다. 흥미로운 것은 공공부채를 마련할 때 중앙은행을 통해 현금을 확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이 시기에 유럽의 모든 정부에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금은 ‘금융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법이 생기기 이전에는 국가가 무이자로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지만 시장에서 자금을 융통할 경우에는 막대한 이자를 물어야 한다. 1974년에 이 법을 도입한 프랑스의 경우 이후에 공공부채 총액이 16조410억 유로, 이자총액만 약 12조 유로에 이르렀다. 2007년에 500억 유로를 넘어선 이자비용은 프랑스의 국가 예산 가운데 교육예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매년 소득세 전체와 맞먹는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1979년의 석유파동 이후에 경기가 침체되고 금리가 치솟으면서 막대한 공공적자가 발생했다. 2008년 6월 기준으로 미국의 부채총액이 510조 달러를 넘어섰다고 하니 한마디로 부채경제다. 하지만 이러한 부채는 경제성장의 장애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동력이다. 게다가 부채경제는 사회적 연대와 권리 주장 같은 집단행동을 무력화하기에 대단히 정치적이기도 하다. 요컨대 ‘산업과 채무자 중심의 포디즘 메커니즘’으로부터 ‘금융과 채권자 중심의 금융 메커니즘 시대’로의 이행이 부채경제의 전면적인 성립 배경이다.

 

 

 

저자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통해서 부채인간의 계보학적 형성과정 또한 탐구한다. 니체는 사람들 사이의 가장 오래되고 원천적인 사회적 관계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라고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곧 자신을 보증하고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공동체의 주된 임무다. 현대 자본주의야말로 니체의 이러한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발견해낸 것처럼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에 등장하는 채권추심원 이강도야말로 인격화한 자본주의의 형상 아닌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재앙으로 몰아넣는 권력장치”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협박경제’이고 부채경제다.

 

12. 10. 10.

 

 

P.S. '부채'는 '증여'와 함께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인데, 이와 관련해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그 첫 5,000년>(부글북스, 2011)와 애디슨 위긴 등의 <세계사를 바꿀 달러의 위기(원제는 '부채의 제국')>(돈키호테, 2006) 등을 더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라자리토의 <부채인간>은 <부채인간의 형성>이란 제목으로 영역돼 있는데, 번역본이 잘 안 읽히는 대목들에서 도움을 받았다.

 

가령 "정치적으로, 부채경제는 금융이나 금융화된 경제 혹은 금융 자본주의라 불리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48쪽)는 대목은 거꾸로 옮긴 오역이다(영역으로는 "Politically, the debt economy seems to be a more appropriate term than finance or financialized economy, not to mention financial capitalism). 이 대목의 절 제목 자체가 '왜 금융경제가 아닌 부채경제에 대해 말하는가'인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저자의 핵심 주장은 '금융경제'란 말 대신에 '부채경제'라고 부르는 것이 실상에 더 부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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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사람과 책'(100호)의 '로쟈, 고전과 만나다' 꼭지를 옮겨놓는다(미처 퇴고하지 못했던 부분은 교정했다). 지난달 말에 마감을 넘겨 촉박하게 쓴 기억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대해서 몇마디 적었는데, 짧은 분량에 개괄적인 내용을 담으면서도 상식적인 중언부언은 피하고자 했지만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몇 가지 꼬투리는 다음 기회를 위해서 남겨놓았다. 시간이 없어서 2차문헌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강의 때는 김영균의 <국가>(살림, 2008)과 숀 세이어즈의 <플라톤 국가 해설>(서광사, 2008)을 주로 참고했다.

 

 

사람과 책(12년 10월호) 올바름에 관한 철학

 

대선을 두어 달 앞둔 정치의 계절인 만큼 정치철학의 고전도 만나보는 게 좋을 듯싶어 이달에는 플라톤의 <국가>(서광사)를 읽어보기로 한다. 초면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낯익은 체하기도 뭐하다. 데면데면한 고전이라고 할까. 고전은 으레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동시에 ‘다시 읽어도 다 못 읽는 책’이다. 읽다가 중간에 덮는다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서도 여전히 읽을거리가 남는다는 얘기다. 때문에 전체를 일독한 다음에는 주요한 대목들에 대한 재독과 정독이 필요하다. 고전 독서는 품이 많이 드는 독서다.


<국가>는 세 시기로 나눈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중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행적을 재구성하고 있기에 ‘소크라테스적 대화편’이라고도 부른다. 어떤 개념이 문제를 정의하고 논박하는 내용이 많으며 주로 짧은 문답법 위주로 돼 있다. 당시 소피스트들의 대중연설 방식 대신에 소크라테스가 선호한 것은 단답식 문답법이었다. 자신은 무지한 자로 자처하면서 연속적인 질문을 통해 상대방이 무지를 자인하게끔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제자들은 그러한 수법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의 논적들은 그런 방식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체 10권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제1권은 그러한 문답법으로 구성돼 있으며 나머지 제2권부터 제10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의 질문에 길게 답하는 형식이다. 이런 구성방식의 차이 때문에 1권과 나머지 대목이 쓰인 시기가 다르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전체적으론 젊은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 위주로 돼 있는 1권의 요지를 뒤이은 2-10권이 자세하게 보충하면서 한 번 더 반복하는 식이다. 대화적 형식을 갖추고는 있지만 소크라테스의 일장연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그런 점에서 초기 대화편과는 달리 플라톤의 관점과 색깔이 많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소크라테스라는 대역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하는 게 플라톤의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이다. 즉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곧 플라톤 자신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명칭을 갖고는 있지만 주로 다루는 주제가 ‘올바름(정의)’의 문제이기에 <국가>에는 ‘올바름에 관하여’란 부제가 붙여지기도 했다. 애초에 발단은 트라시마코스가 올바름이란 더 강한 자의 편익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소크라테스를 자극한 데 있었다. 그의 주장을 소크라테스는 올바르지 못함이 올바름보다 더 이득이 되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의 삶이 올바른 사람의 삶보다 더 낫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인다. 그와는 반대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하지만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주장은 곧바로 쉽게 수긍하기 어렵기에 소크라테스는 이를 입증하고 설득하기 위해 굉장히 긴 설명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국가>가 여느 대화편들의 몇 배에 해당하는 분량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펼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올바름에 대한 정의다.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취한 절차다. 올바름에는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 두 가지가 있을 터인데, 한결 규모가 큰 올바름을 이해한다면 작은 형태의 올바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곧 국가의 올바름을 알게 되면 개인의 올바름은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의 올바름과 개인의 올바름 사이의 유사성을 전제로 하는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코 자명한 전제가 아니다(가령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말해주듯이 개인과 사회의 도덕성이 불일치하는 경우도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단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따라가자면, 그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이 각자의 역할과 직분에 충실할 때 국가가 올바른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생산자와 전사, 그리고 통치자가 그 세 계층이며, 절제와 용기와 지혜가 그들이 가져야 할 각각의 미덕이다. 이러한 미덕을 갖추고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훌륭한 나라의 조건이고 특징이다. 국가의 올바름이 그렇게 가능하다면 개인의 경우는 어떤가.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혼 또한 국가와 마찬가지로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한다. 욕구와 격정, 그리고 이성이 그 세 부분이며 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대응한다. 올바른 국가의 경우처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각 부분이 제대로 일을 하게 되면 올바른 사람이 된다. 반대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란 혼을 구성하는 각 부분들이 서로 참견하거나 간섭하면서 내분을 불러일으킨 상태다. 결국 올바름은 훌륭한 상태로서 혼의 건강을 뜻하며 올바르지 못함은 나쁜 상태로서 혼의 질병을 가리킨다. 

 


올바름이란 주제에 한정하여 <국가>의 주장을 간추리면 그렇다. 하지만 대개의 고전이 그렇듯이 <국가>에도 흥미를 끄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포함돼 있다. 국가와 개인에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 소크라테스가 올바른 정체(政體)와 대비되는 잘못된 정체들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 제자들은 수호자 계층(전사와 통치자)의 처자 공유 문제, 출산과 양육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좀 망설이다가 자신의 견해를 세 가지 파도에 견주며 밝힌다. ‘파도’란 비유는 파격적인 주장에 대한 암시다


첫 번째 파도는 여성도 수호자로 임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소크라테스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동등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시 아테네 민주정에서 여성과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남녀 평등적 사고는 충분히 파격적이다. 소크라테스가 드는 비유로 치면 이것은 레슬링 도장에서 여자가 남자들과 똑같이 옷을 벗고 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적 이치에 따라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자격이 부여돼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이치인가? 전사 계층이 가져야 할 성향의 모델이 되는 감시견의 경우 암컷과 수컷은 그 역할에서 차이가 없다. 즉 양떼를 보살피는 일을 암컷도 할 수 있다면 여성도 전사로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자연적 이치다.


두 번째는 더 큰 파도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계층의 경우 모든 처자식을 공유하고 개인적인 동거는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무질서한 성적 관계를 갖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성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를 연상시키는데, 기본 발상은 우생학적인 고려에 근거를 둔다. 가령 사냥개의 경우에 좋은 혈통끼리 짝짓게 하여 최선의 새끼들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최상의 통치자들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함부로 짝을 짓게 하면 안된다. 따라서 최선의 남자들이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한 자주 성적 관계를 갖게 하고, 변변찮은 남자들은 변변찮은 여자들과 더 드물게 성적 관계를 갖도록 해야 한다. 남녀가 정해진 축제 기간에 추첨을 통해서 만나게 돼 있지만, 그러한 우생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추첨방식이 필요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렇게 가장 사적인 가족마저도 공유의 대상이 된다면 모든 시민이 국가를 위해 더 굳건하게 단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파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세 번째 파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다는 이른바 ‘철인통치론’이다. 통치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지혜인 만큼 ‘지혜를 사랑하는 자’로서 철학자가 통치에 적합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해보이지만, 철인통치론이 남녀평등론이나 처자공유론보다도 더 파격적인 주장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달려들 것이라는 응답은 당시 아테네에서 철학자가 가졌던 부정적 평판을 짐작하게 한다. <국가>에 대한 흔한 상식은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국가론을 펼친 책이라는 것이지만, 정작 플라톤 자신이 그러한 ‘올바른 국가’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확신한 것인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번에도 <국가>를 다 못 읽는 이유다.


12.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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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미 2019-10-09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쟈이십니다. 철저히 독자를 매료시키심...

birdy30 2019-10-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국가를 읽고있는데, 만약 플라톤의 국가가 실현가능하다해도 이번 생에선 그 국가의 국민은 되고싶지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3천년 뒤에 새로운 혼으로 다시 태어날땐 맘이 바뀔지도 모르겠으나ㅋ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낮에 급하게 보내놓고 지방에 강의를 다녀 오니 이 시간이다. 데스크에서 붙인 제목이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이다.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언급한 SF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로 유명한데, 나는 나대로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지난주 시사IN에도 윌리엄 깁슨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이 단 두 개라고 했다. 하지만 <뉴로맨서>(황금가지, 2005)와 <아이도루>(사이언스북스, 2001)에 이어서 최근에 <카운트제로>(황금가지, 2012)가 번역돼 나왔다. 나는 <뉴로맨서>(열음사, 1996)를 갖고 있지만,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아무래도 황금가지판으로 다시 구해야 할 듯싶다. 아무튼 현재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윌리엄 깁슨의 책은 그렇게 세 권이다.

 

 

 

경향신문(12. 10. 05)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자본주의적 인간관에 충실하자면 물론 ‘돈’이라고 해야겠다. 조금 고상하게 말하면 ‘인센티브’가 우리를 움직인다. 어떤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자극이 인센티브다. 인간을 경제적 동물, 곧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정의하는 인센티브 만능론자들은 아예 인센티브를 통해서 인간을 얼마든지 주조할 수 있다고까지 믿는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 영감을 받은 과거 행동주의 심리학자들도 적절한 보상과 강화를 통해서 인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령 책을 잘 읽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현금으로 보상하면 자연스레 독서로 유인할 수 있다는 식이다. 심부름을 하거나 착한 일을 할 때마다 아이에게 용돈을 주는 것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우등생과 선행 학생은 인센티브를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그런 식의 금전적 보상이 독서나 선행 같은 ‘재화’의 가치를 변질시킨다고 말한다. 독서나 선행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될 것이고, 그럴 경우 자발적인 독서나 선행이 갖는 의미와 만족감 또한 훼손될 수밖에 없다. ‘행위와 인센티브’라는 보상체계가 우리를 어떤 행위의 주체가 아닌 단순한 수행자의 위치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실상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정의 자체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체적인 존재이고자 한다.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옹호가 철학자들만의 레퍼토리인 것은 아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드라이브>란 책에서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인센티브가 오히려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지루한 반복적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을 독려할 때는 인센티브가 꽤 유용하지만 지적 도전을 수반하는 업무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자신의 성취가 금전적 가치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해야 할까. 현대 수학의 최대 난제 가운데 하나였던 ‘푸앵카레 추측’을 푼 공로로 2006년 국제수학자연맹이 필즈 메달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를 거부한 러시아 수학자 페렐만의 사례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이후에 미국의 한 수학연구소에 의해 100만달러의 상금이 걸린 ‘밀레니엄 상’ 수상자로도 선정됐지만 그 역시 거부했다. “나의 증명이 확실한 것으로 판명됐으면 그만이며 더 이상 다른 인정은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고집스러운 생각이었다.

 

예외적인 성취와 예상 밖의 수상 거부로 화제를 모으긴 했으나 페렐만의 경우가 이해 불가능한 사례인 것은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사고와 경쟁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모토가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는 말은 자본주의적 주술이다.

 

지난 6월 말 방한했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필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게 되면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금전적 보상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적 방식이다. 물론 어느 정도가 ‘생존을 위한 필요’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이 다를지 모른다. 고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지 않은 페렐만은 도심 외곽의 방 2칸짜리 낡은 아파트가 재산의 전부였다. 그 이상은 사치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무 때나 온수로 샤워할 수 있는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의 꿈이었지만 그런 아파트에 산 지 십 수년째다.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아직 퍼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의 실감이다. 각자의 꿈이 이루어진 곳에서 그 꿈을 널리 공유하고 확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주체적 삶이 아닐까.

 

12.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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