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달에 공포문학 강의에서 다룬 작품이기도 한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한 대목에 관해 적었다. 인용은 문학동네판에서 가져왔다.
한겨레(12. 08. 11) 히스클리프,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폭염에는 제목만으로도 끌리는 책이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그렇다. 고유명사로서 제목이 가리키는 것이 ‘언덕’이 아니라 ‘집’이기 때문에 음역하여 <워더링 하이츠>로 옮긴 번역본도 있지만, 죽음도 넘어선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자연스레 ‘폭풍’을 연상시킨다. 작품에서 ‘폭풍’(워더링)은 “비바람이 몰아칠 때 이런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킨다. 거기에 빗대 말하자면 <폭풍의 언덕> 독자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두 주인공의 ‘감정의 격동’이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폭풍의 언덕>이 “모든 수준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고전이라고 평했지만, 우리 독서 수준이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한다는 걸 고려하면 “모든 시기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작품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하겠다.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중학교 때 읽은 가장 강렬한 작품 중 하나였던 <폭풍의 언덕>은 이제 40대에 다시 읽으니 가장 섬뜩한 작품이라고도 여겨진다.
발단은 ‘폭풍의 언덕’의 주인 언쇼가 리버풀에 갔다가 고아 소년을 하나 데리고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히스클리프’라고 이름 붙인 이 아이를 두 자녀 힌들리와 캐서린보다 더 편애한다.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에 대한 원한을 쌓아가지만, 딸 캐서린은 그를 끔찍이도 좋아한다. 그를 못살게 굴기도 했지만, 캐서린에게 가장 큰 벌은 히스클리프와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상황은 아버지 언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반전된다. 집안 주인이 된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하인으로 내친 것이다. 그럼에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굴하지 않고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린턴 가에 캐서린이 발을 들여놓게 되기 전까지는.
이웃 린턴 가의 사람들을 몰래 엿보다가 불도그에게 물려 그 집에서 몇 주간 치료를 받은 캐서린은 ‘아주 기품 있는 숙녀’가 돼 언쇼 가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다시 만난 히스클리프에게 너무 더럽다며 타박을 준다. 그러자 히스클리프는 “더러운 건 내 맘이야. 나는 더러운 게 좋아”라고 대꾸한다. 하나였던 둘이 조신함(문명)과 야만(더러움)으로 분리되는 순간이다. 캐서린은 에드거 린턴의 청혼을 받고 승낙하면서 그 이유를 하녀 넬리에게 설명한다. “지금 같아서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도 천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결정적인 이 고백을 히스클리프도 엿듣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결혼하면 천해질 거라는 얘기까지만 듣고서 폭풍우가 치는 밤 언쇼 가를 떠난다. 캐서린의 나머지 절반의 진실, 곧 그녀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진실이 결국 그에겐 비밀로 남는다. 그는 ‘생김새는 거무튀튀한 집시’이지만 ‘옷차림과 행동거지는 신사’가 돼 폭풍의 언덕으로 다시 돌아와 모진 복수를 시작한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오해의 산물일까? 그가 캐서린의 말을 끝까지 들었더라도 집을 떠났을까? <폭풍의 언덕>의 섬뜩한 교훈 하나는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2. 0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