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올림픽축구 한일전을 보고 다시 자는 바람에 늦은 아침을 먹었다. 책상에 다시 잔뜩 쌓여 있는 책들처럼 원고 일정이 빼곡한 주말이지만 포스팅도 밀려 있어서 하나라도 올려놓는다.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이달부터 '로쟈, 고전과 만나다'를 연재하는데, 그 첫 회분이다. 두 달 전에 강의한 일도 있어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다뤘다. 서두는 연재의 프롤로그이기도 하다. 글의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다.

 

 

사람과 책(12년 8월호) 사랑에 대한 '혁명적인 책'

 

고전이 ‘다시 읽기’의 대상이라면 고전과의 만남은 언제나 ‘두 번째 만남’이다. 고전이 다시 읽을 만한 책, 다시 읽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책을 가리킨다면, 고전과의 만남 또한 두 번째 조우를 통해서 제값의 의미를 갖는다. 설령 무심코 지나쳤던 첫 번째 만남에서 서로 아무것도 주고받지 못했을지라도 첫 번째 만남은 두 번째 만남의 조건이자 절차로서 충분하다. “그래, 예전에 한번 읽었더랬지”라는 감상적 기억과 함께 다시금 책을 손에 들기, ‘로쟈, 고전과 만나다’는 그런 기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고전과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 맨 먼저 다시 읽어보기로 한 저자는 에리히 프롬(1900-1980)이다. 현대사상가들 가운데 드물게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며 국내에서도 한때 가장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던 사회심리학자. 그런 만큼 그의 저작 대부분이 소개됐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같은 대표작은 오랫동안 스테디셀러로 읽혔다. 학부시절 대학가 서점에서 그의 책들은 흔하게 접할 수 있었고, 내가 처음 읽어본 것도 삼중당문고판 <사랑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지도와 대중성이 프롬에겐 함정이기도 했다. 너무 많이, 너무 쉽게 읽히는 사상가란 인식 때문에 ‘통속 사상가’로 폄하됐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도 그의 책을 대부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진지하게 읽어보진 않았다. 일종의 ‘내리막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까. 참고로 <103인의 현대사상>(민음사, 1996)에도, 우리시대 지성인 218인을 다룬 최성일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에도 ‘에리히 프롬’은 빠져 있다.

 

 


그런 흐름은 여전한 듯 보이지만, 반전의 계기가 없지는 않았다. 세기가 바뀌면서 적어도 개인적으론 그런 분위기를 재고하게끔 만든 책이 몇 권 출간됐다. 하이데거 전공자인 박찬국 교수의 <에리히 프롬과의 대화>(철학과현실사, 2001)와 르네상스적 지식인 박홍규 교수의 <우리는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필맥, 2004)가 국내서로는 대표적이고, 프롬이 제자이자 마지막 조수였던 라이너 풍크의 <에리히 프롬과 현대성>(영림카디널, 2003), <내가 에리히 프롬에게 배운 것들>(갤리온, 2008) 등도 내가 수집한 책들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도 우리가 에리히 프롬을 여전히 읽을 필요가 있고, 그에게서 아직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에 대한 상식을 부순 책
그럼 프롬 읽기의 현재적 의의란 무엇인가. 가령 우리말로 20종 이상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2006)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제목으로는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과 같은 부류의 책으로 묶이기 쉬우나 알다시피 ‘연애의 기술’이나 ‘유혹의 기술’과는 전혀 거리가 먼 책이다. 박홍규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의 기술>이 ‘혁명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대한 상식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어떤 상식인가? 사랑이란 ‘즐거운 감정’이라고 보는 상식, 그렇게 믿는 상식이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랑은 기술이기에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주장만큼 낯선 것도 드물 것이다. 실상 대부분의 현대인이 사랑이 중요하다고 믿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세 가지 전제에서 비롯한다. 첫째,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둘째, 사랑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하는 것. 사람들은 보통 서로에 대해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간주하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라고 프롬은 꼬집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을 발견하는 일이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열정적 감정만을 사랑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사랑의 실패로 향하는 지름길로 이끈다. 때문에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랑 또한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실존 문제와 관련한 사랑의 의의
여느 기술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 습득 과정도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론의 습득과 실천의 습득이 그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물론 주로 이론적 검토에 바쳐진다(‘실습’까지 감당하려면 ‘워크북’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프롬의 이론은 인간 실존론에서 시작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곧 사랑은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경우 사랑과 비슷한 것으로서 애착이 있지만 그것은 본능적 기구의 일부일 뿐이다. 반면에 인간은 비록 자연의 일부이긴 하지만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다. 일단 ‘낙원’에서 쫓겨난 이상, 곧 자연과의 본래적 합일에서 벗어난 이상 인간은 새로운 조화를 찾아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지만 이성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고독과 분리다. 이 분리에 대한 인식은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라고 프롬은 말한다. 이 분리 상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프롬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서 바로 이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와 직면하여 대답을 찾고자 했다고 본다. 그 대답의 기록이 곧 인간의 역사이기도 한데, 그것은 몇 가지로 간추려질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건 ‘도취’다. 자연과의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에 빠질 때 우리는 잠시라도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을 잊게 된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 성적 오르가슴 추구 등이 이러한 도취 추구의 방식이고 결과다. 하지만 도취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만 가능하기에 결과적으로는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도취와는 다른 방식이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함으로써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분리감으로부터 구제된다. 이러한 일치화 경향은 인간을 표준화하며 이는 개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일치에 의한 합일은 도취만큼 강렬하거나 난폭하지 않기에 분리로 인한 불안을 진정시키기에는 불충분하다. 예술가나 직공의 ‘창조적 활동’ 역시 합일을 이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경우의 합일은 일반적인 모델이 되기 어렵고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다.


도취적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합일, 일치에 의한 합일, 생산적 작업을 통한 합일이 모두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에 불과하다면 가장 완전한 대답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으로서 ‘사랑’이다. 사랑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그리하여 인간 실존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랑의 의의를 프롬은 이렇게 규정한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
프롬에게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은 그것이 보호와 책임, 존경, 지식 등을 기본적인 요소로 포함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사랑은 보호하고 배려한다. 사랑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준비가 갖춰져 있다는 뜻이고, 존경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개성을 존중하며 그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호와 책임, 존경은 지식에 의해 인도돼야 한다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다.


사랑의 대한 프롬의 이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랑의 유형학인데, 그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이 ‘형제애’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고 말할 때의 사랑, 곧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 형제애이다. 형제애 다음에 놓이는 것이 ‘모성애’이며, 사랑이란 말이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려주는 ‘성애’는 세 번째 유형이다. 그리고 ‘자기애’와 ‘신에 대한 사랑’이 사랑의 나머지 유형들이다. 프롬은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 인류를, 모든 살아 있는 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인류를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랑의 기술> 대신에 아예 '형제애의 기술'이란 제목이 붙었더라면 책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12. 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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