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부터 프레시안의 제안에 따라 '3인 1책 전격수다'에 참여하게 됐다. 도서평론가 이권우 교수와 전직 영화잡지 기자이자 <범죄소설>(강, 2012)의 저자 김용언 씨가 수다의 나머지 멤버이다. 첫번째로 다룬 책은 도널드 서순의 <유럽 문화사>(뿌리와이파리, 2012)인데, 워낙 방대한 분량의 책이라 관심을 가진 분야만 발췌독할 수 있었다. 책 수다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전문은 프레시안의 기사(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928124912§ion=04)를 참고하시길.

 

 

 

 

 

프레시안(12. 09. 28) 싸이, 모차르트가 될 수 있을까? "문제는 돈이야!"

 

이권우 : 이번 좌담을 준비하면서 <유럽 문화사> 다섯 권을 읽기 위해 시간을 한참 두었는데, 한 달이 지나도 한 권밖에 못 읽게 되더라고요. 목적 의식을 갖고 읽어도 이 책을 읽기가 쉽지만은 않구나, 그렇다면 일반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땐 어떨까 싶었어요. 우리부터가 먼저 이 책의 독서법에 대해 얘기를 시작해보죠.

 

이현우 : 문화 사전 같다는 인상이 가장 큽니다. 사전을 누가 처음부터 마지막 쪽까지 다 읽겠어요. (웃음) 필요한 영역별로 그때그때 참조할 수 있는 사전으로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의 장점이자 단점이, 연도별로 나누고 그 안에서 또 주제별로 나누어 기술됐다는 거죠. 주제별로 크게 분류되어있다면 그 흐름을 따라 죽 읽으면서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두 가지 기능이 복합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다섯 권짜리 책이니 양도 만만치 않고요.

 

김용언 : 사전에 가깝지만, 일차적인 느낌은 서술 자체가 무척 평이하고 재미있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200년의 문화사를 다룬다는 게 독자에게 많은 지식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사람이 무턱대고 책을 펼쳤더라도 그렇게까지 진입 장벽을 높진 않을 것 같아요. 문화의 각 분야 중 개인적 흥밋거리부터 천천히 읽어나가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고요. 그래서 도널드 서순이 집필할 때 주된 독자층을 어떤 사람으로 상정하고 썼을지 좀 궁금했습니다. 책의 많은 부분이 출판에 관련된 부분을 다루면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독자층의 변화를 일별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책이 어떤 독자들에게 읽혀지기를 기대했을까요? 우리 같은 사람일까요? (웃음)

 

이현우 : 서순이 서문에도 썼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에 집중했죠. 출판, 음악, 영화 등이요. 그나마 미술을 뺐기 때문에 분량이 줄어들었는데, 그 많은 분야에 세부적인 디테일과 정보를 꼼꼼하게 제공하잖아요. 그게 재미있는 면인 동시에 읽기 힘든 면이기도 하죠. 무엇보다 문화사 서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흥미로웠어요. 중간 계급을 위한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19세기부터 시작됐는데 사실 정말 짧은 시간밖에 안 걸렸구나, 이게 우리의 전사(前事)구나 하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죠. 무척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어요.

 

이권우 : 저자가 책 제목을 <유럽 문화사>로 지은 것도 유의미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세계 문화사'라고 썼을 수도 있어요. 근대의 창출점이 유럽이었기 때문에, 사실 '근대 세계 문화사'라고 해도 크게 저항을 받진 않았을 텐데요. 굳이 자신의 지역적 특색을 정확하게 드러냈다는 건 어쨌든 20세기 후반 서구 지식 사회의 자기반성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유럽이라는 지역의 지난 200년을 탈식민주의적인 시선으로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아요.

 

이현우 : 동아시아 쪽에서 독서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건 20세기가 넘어서부터죠. 유럽 쪽은 한 세기나 먼저 시작되었다는 시차가 존재합니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 관련해서는 천정환 교수가 쓴 <근대의 책 읽기>(푸른역사 펴냄)가 비슷한 콘셉트의 책입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의 기본 테마가 서문에 잘 나옵니다. 정신사적 측면보다 사회사적 측면을 강하게 드러내지요. 15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지난 200년에 걸쳐 문화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한 셈이다. 바로 그 역사가 이 책의 주제를 이룬다." 이걸 놓치고 <유럽 문화사>를 읽으면 안 됩니다. 근대 문화가 결국 대량 소비 생산 체계를 구축한 근대 사회 체제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하지요.

 

이현우 : 문화는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해요. 그런데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려면 시장이 있어야 하죠. 출판의 경우 책을 쓰는 저자가 있고 책을 만드는 출판업자가 있고 독자라는 삼박자가 갖춰져야 합니다. 그런 시장이 처음 형성되는 게 19세기부터인데, 그나마 규모까지 갖춰지는 건 19세기 중반부터지요. 그런 지점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제목은 다소 평범하게 들릴 수 있는 <유럽 문화사>지만 개성을 갖고 있는 문화사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언 : 한국 독자 같은 경우 사실 '유럽의 문화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들의 역사를 왜 내가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이 책은 문화 생산의 최종 목표를 균질화와 확산이라고 정리하잖아요. 전 세계가 거의 균질한 문화를 흡수하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고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건 하나도 없어요. 빅토르 위고의 소설부터 모차르트의 오페라까지, 우리는 그들의 역사와 생산물을 이미 내 것처럼 잘 알고 있어요. 서순이 의도했을 독자층에 동아시아 지역의 독자까지 포함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21세기의 아시아인이 읽었을 때 전부 이해가 가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결국 문화사의 진화와 확산의 최종 단계에 우리가 이미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를 읽다보면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일단 '사회사'를 강조하고 있잖아요. 하우저는 죄르지 루카치의 제자답게 계급성이나 사회의 역동성을 문화에 반영시켜 서술했죠. 도널드 서순의 경우 산업적 토대가 더 강조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근대 유럽 문화의 태동과 확산에 있어 부르주아의 역할이 컸다는 것도 강조하고요. 좀 더 정밀한 독서를 통한 비교가 필요하겠지만, 다른 측면이 분명 있어요.

 

이현우 : 독서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뿐 아니라 그 주변의 좀 더 넓은 계층들이 필요해집니다. 프티 부르주아부터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동자 계층까지, 문자 해득력을 갖춘 새로운 독서 대중이 필요하죠. 게다가 고등 교육도 필요해요. 고등 교육을 통해 배출된 어떤 독자층, 정확하게 부르주아와 딱 일치하지는 않지만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계층이 형성되고 그들에 의해서 문화가 주도됩니다. 그들을 위한 문화인 동시에 그들이 향유하고 소비하는 문화가 어떻게 발전하고 정점에 올라갔는지의 과정은 정말 흥미로워요. 예를 들어 러시아만 해도 19세기 중반 문맹률이 95퍼센트 이상인데, 독자층이 얼마 안 됐거든요. 그런데 문학 산업은 19세기 후반에 정점을 찍게 되죠. 거기에 견주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 시장, 출판 시장이 굉장히 큰데, 뭔가 배울게 있지 않은가 싶어요.

 

(...)

 

12. 09. 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광우의 <철학콘서트>(웅진지식하우스) 3권 세트 부록에 실릴 글을 옮겨놓는다. 철학은 배워서 어디에 쓰는지, 혹은 철학 공부의 의의란 무엇인지 써달라는 게 편집자의 주문이었지만, 그런 건 각자가 '고안'할 문제라는 생각에, 나대로 철학과의 만남 이야기를 적었다.  

 

 

 

당신에게 철학은 무엇이었나? <철학콘서트> 세 권을 마주하니 내게서 철학은 무엇이었던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언제였던가. 처음 철학적 물음에 붙들린 때가. 조금 진지한 관심의 시작이라면 실존주의 작가들을 즐겨 읽던 고등학교 시절부터가 아닌가 싶다. 가령 사르트르 같은 경우. 나만의 취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때는 사르트르야말로 작가이자 철학자의 대명사였으니까. 

 

 

 

게다가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를 읽은 것이 철학에 대한 관심을 배가시킨 것으로 기억된다. 고3 어느 때인가 서점에 가서 철학 코너를 둘러보다가 고른 것으로 내겐 철학 공부의 ‘이유식’과도 같은 책이다. 나중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주채(周采)의 <중국철학 이야기>란 책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렇게 철학책에 대한 독서는 ‘이야기’에서 시작됐다(이 책을 펼쳐든 독자라면 대부분 ‘콘서트’에서 시작하겠지만). 그리고 그 이야기의 자연스런 귀결이, 혹은 ‘다시 시작해보자’는 반복적인 귀결이 대학 첫 학기 ‘철학개론’ 신청이었다.


그렇게 신청한 철학개론 수강 이야기를 계속해보면 좋겠지만, 반전이 있다. 나는 철학개론을 듣지 않았다! 수강신청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책까지 구매했지만, 어쩐 일인지 수강에 자신이 없어졌다.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부터 시작하는 철학개론을 상상했던 나에게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을 거라던 노(老) 교수의 말이 부담이 되었던 듯싶다.


비록 철학개론과의 조우는 불발로 그쳤지만, 이야기는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3학년이 되자 철학개론은 건너뛰고 ‘현대사회의 철학적 이해’ 같은 과목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교양 수준의 사회철학 강의였는데, 당시엔 에리히 프롬이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를 읽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미완의 기획으로 끝났다. 첫 번째 리포트를 과제로 제출하고는 군대에 가게 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학부 시절에 단 한 과목의 철학 강의도 듣지 않았다. 대학원 과정에 들어가서야 철학과 대학원의 개설 강좌를 몇 개 수강하거나 청강한 것이 정식으로 쌓은 ‘이력’의 전부다.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철학 공부와는 대체로 무관해 보이는 나의 공부 이력은 어떻게 제 갈 길을 찾았을까? 강의실 바깥에 광대무변했던 ‘철학 학교’와 ‘철학 교사’ 덕분이었다. 그것은  바로 책이다. <철학 이야기> 이후에 내가 주로 읽은 책은 서양철학 쪽으로는 박이문 교수, 동양철학 쪽으로는 도올 김용옥 교수의 책이었다. 다작의 저자들이기도 한 이들의 책을 거의 대부분 읽었다.


어떤 책들을 줄기차게 읽어나갈 수만 있다면 사실 저자는 상관없다. 그리고 어디에서 시작하더라도 무방하다. 나 같은 경우도 아무도 내게 무엇을 읽으라고 지도하거나 권유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책은 자연스레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독서의 길을 안내하는 법이다. 철학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단지 첫 번째 책을 손에 들게끔 할 만한 물음을 갖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흔히 ‘~란 무엇인가’란 물음의 형식을 발명해냈다고 말한다. 그 물음의 형식에 붙들릴 때 우리는 오갈 데 없이 철학의 길, 철학적 사유의 오솔길에 들어선다. 정의란 무엇인가, 청춘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이 모두 그런 물음에 속한다. 전공으로서 철학 공부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오직 소수만이 철학에 대한 성향을 타고난다는 게 플라톤 이래의 정설이다. 그러니 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철학자들의 문제, 그들만의 고민으로 제쳐놓기로 하자. 하지만 특별한 철학적 성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철학적 문제들도 존재한다. “선생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같은 황광우의 물음이 그렇다.

 

‘철학콘서트’의 저자는 자신이 ‘철학의 초심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란 물음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사상가들’의 ‘위대한 생각들’에 대한 탐구의 오랜 여정으로 이끌었다. 그가 얻은 결론은 무엇인가? “철학이 죽음 앞에 선 우리의 고뇌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 풀기 힘든 난제에 대한 색다른 사유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이제 독자에게 또 다른 질문거리다. “과연 그러한가?”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우리는 ‘콘서트’가 끝난 자리에서 다시금 새로운 철학 여정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물음이 있는가? 그 물음이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 그 물음에 따라서 우리들 각자의 철학적 사유, 각자의 철학 콘서트를 시작해보기로 하자. 

 

12. 09. 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주간경향(99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한상범, 이철호 교수의 <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삼인, 2012)를 읽고 쓴 것이다. 찾아보니 두 사람은 <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패스앤패스, 2004)도 공저한 바 있다. 법치라는 명분이 어떻게 군사독재 정권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악용되고 남용됐는지 일람하게 해주는 책이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작은 책자'를 넘어서 좀더 무게 있는 책이 나왔으면 싶다. 한홍구 교수가 한겨레에 연재한 '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가 단행본으로 나온다고 하니까 기다려봐야겠다...

 

 

 

주간경향(12. 09. 25) 군사독재 굴레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헌법학자 한상범·이철호 교수가 <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의 서두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민주냐 독재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게 저자들의 문제의식이다. 민간인 사찰과 불온서적 목록 부활, 국가인권위의 파행적 운영 등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들이 횡행하는 현실은 우리의 시침을 1970∼80년대로 되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퇴행이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들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의 복고를 바라는 구세력이 준동하고 있고, 우리의 마음속에도 군사독재 시절의 의식구조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독재시대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여전히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현실인식 하에 책은 독재정권의 지배법리와 지배수법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과거 독재체제의 부정적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려면 먼저 그것이 어떤 수단들을 통해서 작동했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제헌헌법 자체가 쿠데타 세력과 독재정권에 악용될 소지가 많았다. 독일 바이마르헌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일본 헌법의 영향이 더 컸고, 특히 계엄제도에 관한 조문들은 메이지헌법에서 그대로 따왔다. 군이 계엄사무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게끔 했고, 군부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는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예산제도도 재정 민주주의나 재정 입헌주의의 규정이 아주 취약한 행정부 본위의 제도로 메이지헌법의 개악판이라는 게 저자들의 평가다. 결과적으로 제헌헌법의 이러한 구멍은 쿠데타 세력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일제 법제의 잔재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법문화이다. 일본의 경우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법학과 법제에서 자유주의적인 것이 말살되고 천황제 파시즘이 절정에 이른다. 때문에 ‘악법에 대한 거부’와 ‘폭군에 대한 저항’이라는 핵심적 시민의식이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고 근대적 자유주의 시민문화도 일본에서는 부재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이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고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배출된 친일 관료들이 해방 이후에도 법조계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게 됐다는 점이다. 1945년 이후에도 일제의 구(舊)법령 체제가 지속됐으니 해방이 됐다고는 하지만 인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일제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배우고, 한국의 독재정권이 일제로부터 다시 배워서 써먹은 통치수법이 “법률의 기술을 악용하는 관료의 통치술”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배수법의 최고 절정이 “계엄제도의 정치적 악용과 국가정보기관을 이용한 정치적 탄압 자행, 형사 범죄자의 날조와 조작”이다. 민족일보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같은 사법살인이 비근한 예이다. 이렇듯 법은 약자를 위한 보호장치가 아니라 강자를 위한 지배수단이었다. 게다가 법을 악용한 이러한 독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실무 법조인뿐 아니라 법학자, 어용언론이 동원됐던 게 우리의 독재정치사였다.
 
과연 우리는 그러한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실질적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해야 하는데, 이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시민적 주권의식이다. 권력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돼야 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과거 군사독재정권이 어떻게 법을 악용해서 국민을 우민화하여 지배했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 그러한 주체로 서는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군사독재가 시민사회를 붕괴시킨 황폐화된 폐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겐 아직 남아 있다. 민주냐 독재냐,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12. 09. 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달 책&(410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로 잡은 건 '사회적 비만'이다. 비만이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라는 걸 보여주는 책들에 주목해보았다.

 

 

 

책&(12년 9월호) 사회적 비만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계절이다. 활동하기에 좋은 풍성한 계절이란 뜻일 테지만, ‘살찐다’는 말의 느낌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과체중과 비만이 개인 건강의 문제를 넘어서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어서다. 어떤 근거에서 ‘사회적 비만’을 말할 수 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처방이 가능하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몇 권의 책을 통해 ‘늘어진 뱃살’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생각해보자.


기본적인 길잡이가 돼줄만한 책은 비만 문제를 연구해온 영양학자 베리 팝킨의 <세계는 뚱뚱하다>(시공사, 2009)이다. 제목은 저명한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저서 <세계는 평평하다>를 패러디한 것이다. ‘세계는 평평하다’의 이면이 바로 ‘세계는 뚱뚱하다’라는 암시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16억 명 남짓한 사람들이 과체중과 비만 상태이며, 2억 3천만 명이 당뇨병을, 15억 명이 고혈압을 앓고 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비만 인구가 1억 명 이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놀랄 만한 변화다. 영양실조 인구가 8억 명 수준으로 줄어든 것과 비교해보아도 비만 인구 증가 속도는 확연히 눈에 띈다.


비만인구의 급속한 증가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뚱뚱해지는 건 당연히 우리를 과체중으로 만드는 유전자와 음식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전자의 변화는 수천 년의 세월을 필요로 하기에 현대인을 비만으로 이끈 변화의 주된 요인은 음식일 수밖에 없다. 콜라와 같은 고칼로리의 당분음료, 패스트푸드의 슈퍼사이즈화가 가져온 대형화된 식사량, 고당분과 고지방 음식 섭취가 비만이라는 유행병의 주원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방식으로 음식을 먹고 마시며 육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책에는 쌀과 채소를 주식으로 삼던 한국에서도 1995년 WTO 가입 이후 서구 식품과 레스토랑이 유입되면서 비만이 급증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만의 세계화에 우리도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비만은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유행병이지만 그 진원지는 역시나 미국이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이노세 히지리의 <미국인은 왜 뚱뚱한가?>(작은책방, 2012)는 미국이 어째서 국민의 3분의 1이 비만이고 나머지 3분의 1이 비만 예비군인 ‘비만대국’이 됐는지 자세히 살핀다. 미국인들이 급속하게 살이 찌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우선 경제격차다. 비만이 ‘사치병’으로 간주되는 문화권도 있지만 미국에서 비만은 빈곤층의 표식이다. 소득이 낮을수록 비만이 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을 경우 값싸면서 칼로리가 높은 패스트푸드나 가공식품에 의존하게 되고 이러한 식생활이 자연스레 비만을 가져온다. 게다가 미국은 국토가 넓기에 자동차로 이동하는 게 일반적이고 그만큼 운동이나 신체활동은 줄어든다. 즉 식사의 고열량화와 몸을 움직이지 않는 생활패턴이 미국형 비만이 만들어지는 환경이다. 

 

 


문제는 그런 환경이 세계화와 함께 ‘글로벌 스탠더드’가 돼가고 있다는 점이다. 비만율이 높은 나라들은 모두 미국과 지리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가까운 나라들이다. 멕시코를 비롯해 영국과 호주, 캐나다 등이 모두 비만율 상위권 국가들이다. 미국과는 다른 식생활을 갖고 있어서 비만국가에서 열외인 것으로 보였던 프랑스까지도 미국식 패스트푸드문화가 확산되면서 포식국가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지금 세계를 덮친 비만화의 물결에서 제외된 지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단언한다. WHO의 예상으론 2015년이 되면 과체중 인구가 23억 명, 비만인구가 7억 명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테러와의 전쟁’보다 더 시급한 것이 ‘비만과의 전쟁’이라는 얘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따라서 비만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 이상 ‘배부른 소리’로 간주될 수 없다. 굶주림과 결핍에 시달리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과잉 열량으로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강요된 비만>(거름, 2012)의 저자들은 사회적 비만을 일컬어 “굶주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 세상의 또 다른 질병”으로 규정한다. 처방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저소득층이 질적으로 더 좋은 식품을 먹도록 지원하고, 몸에 해로운 식품의 판매는 규제하며 지방과 설탕, 소금이 과다하게 함유된 제품의 광고는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 등이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된다. 더불어 신체활동을 장려할 수 있도록 도시 중심가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물론 거대 식품회사들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에 맞서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 ‘비만의 사회학’이 ‘식품정치’로 나가야 하는 이유다. 에릭 슐로서의 <패스트푸드의 제국>(에코리브르, 2001)과 <식품주식회사>(따비, 2010), 그리고 매리언 네슬의 <식품정치>(고려대출판부, 2011) 등이 사회적 비만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켜줄 책들이다. 죽도록 다이어트를 해도 절대 살이 빠지지 않는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12. 09.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이번 달 '사람과 책'에서 '로쟈, 고전과 만나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원고를 쓰느라 지난 8월에 다시 읽은 고전이 오웰의 <1984>였다. 여러 번역본 가운데 문학동네판으로 읽으면서 다른 주요 번역본들로 참고했다. 자투리 독후감은 지난주 한겨레 칼럼에 쓰기도 했지만, 얘깃거리들은 더 많이 남아 있다. 전기적 내용과 관련하여 참고한 평전은 박홍규 교수의 <조지 오웰>(이학사, 2003)인데, 최근에 나온 고세훈 교수의 <조지 오웰>(한길사, 2012)를 방안에 두고도 못 찾아서 참고하지 못했다. 평전으로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왜 오웰이 중요한가>도 주문해놓은 터여서 나중에 같이 읽어보고 싶다.

 

 

 

사람과 책(12년 9월호) 감시사회, 그 '오래된 미래'

 

‘<동물농장>의 작가’, 아마도 조지 오웰(1903-1950)이란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려줄 만한 별칭이다. 국내에서는 <1984>와 함께 가장 많이 읽히는 오웰의 대표작인 만큼 이상할 건 없지만, 오직 ‘<동물농장>의 작가’로서만 기억된다면 오웰로서는 좀 억울할 법하다. 그리고 실상이 그랬다. 전체주의를 비판한 두 ‘우화적’ 소설이 한국에서는 ‘반공소설’로 읽히고 또 권장됐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임한 작가의 운명 치고는 다소 고약했다고 할까. 


국내에서 나온 첫 평전 <조지 오웰>(이학사, 2003)을 쓴 박홍규 교수에 따르면, <동물농장>(1945)이 세계 최초로 번역된 건 놀랍게도 한국어판(1948)을 통해서였다. 우리와는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고 반가워할 일만은 아니다. 미국의 해외정보국이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작품의 소개를 주선했기 때문이다. 오웰이 예술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을 결합시키려고 한 이 ‘정치소설’만큼 정치적으로 이용된 작품도 드물다. 미국 정부로서는 이 ‘반스탈린적 풍자소설’이 반공주의 계몽과 계도에 유용하다고 판단했으리라.


아이러니컬한 것은 바로 그런 정치성 때문에 정작 영국에서는 출간에 애를 먹었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은 영국과 함께 독일에 맞서 싸우고 있었기에 출판사들은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대한 이 풍자소설의 출간을 꺼렸다. 한편 미국에서는 ‘동물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 오해받아서 역시나 출간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1944년에 탈고한 <동물농장>은 우여곡절 끝에 1945년 8월에야 출간됐고 이듬해 나온 미국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웰은 비로소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마지막 작품 <1984>를 집필할 수 있는 생활의 여유도 갖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지병인 폐결핵이 점차 악화돼 가던 참이었다. 1948년에 탈고했기에 제목을 <1984>라고 붙인 이 작품은 이듬해인 1949년에 출간돼 20세기 디스토피아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는다.    

 

 


따지고 보면 <1984> 또한 우리와는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1984년 1월 1일 아침에 전 세계 안방에 방송된 위성예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백남준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중학생이었던 당시 ‘오웰’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고 서점에 가서 막 나온 <1984>를 구입해 읽은 기억이 있다. 1984년에 읽은 첫 책이 <1984>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오웰과 인연이 없었다.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한 ‘반공문학’ 작가란 평판 때문에 80년대 대학가에서도 오웰은 널리 읽히지 않았고, 강한 정치성 때문에 문학적으로 대단치 않은 작가로 폄하됐다.

 

 

 

이런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위건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010) 같은 그의 르포르타주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같은 에세이집이 새롭게 주목받으면서부터다. 박홍규 교수의 평전에서 “특히 그의 수많은 에세이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 에세이는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를 철저히 비판한 것이기에 대부분 소개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언급한 것과 사뭇 대조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반공주의자 오웰’에서 ‘사회주의자 오웰’로 작가의 이미지가 이동했다고 볼 수 있을까. 게다가 정치성과 문학성을 결합시키려는 오웰의 시도는 문학과 예술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재평가됐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1946)에서 “자신의 정치적 편향을 의식하면 할수록, 자신의 미학적·지적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고 적었다. 정치적 편향이 미학적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일반적 통념과는 정반대로 그러한 편향성이야말로 진정성을 희생시키지 않게끔 한다는 것이 오웰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적 입장이란 무엇인가?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자신이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영국 북부노동자들의 생활을 취재한 <위건부두로 가는 길>(1937)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에 대한 르포 <카탈로니아 찬가>(1938)에도 관철된다. 그가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의용군으로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했다가 좌익 내부의 분열을 목격하고 얻은 결론은 사회주의 운동의 재건을 위해선 ‘소련 신화’의 파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동물농장>의 집필 의도였고 <1984>는 그 연장선상에서 쓰인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란 글에서 로렌스 멀킨은 “소설로서 <1984>는 특별히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보다는 우화에 가깝고, 우화보다는 차라리 판타지에 가깝다.”고 평했다(윌리엄 랭어 편,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푸른역사). 이러한 평가는 한편으론 메시지가 너무도 분명한 작품이 치르는 대가이기도 한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전체주의 사회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주제는 처음 몇 페이지만 읽어도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성취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은 과연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한 ‘판타지’에 불과한가? 민간인사찰이 무단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는 빅브라더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감시사회보다 과연 얼마나 나은 사회인가? 아니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구조를 들여다본다면 과연 오늘날과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984>에서 세계는 핵전쟁 이후에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초대형 국가로 분할돼 항구적인 전쟁상태에 놓여 있다. 이들 국가 중 두 나라가 연합한다고 해도 다른 한 나라를 정복할 수 없기에 세력 판도가 그대로 유지된다. 이들 국가의 기본적인 특징은 계급사회라는 것이다. 주인공 윈스턴이 속해 있는 오세아니아에서 권력 피라미드의 정점에 절대적 존재로 당을 대신하는 빅브라더가 있고, 그 아래로는 인구의 2퍼센트 미만인 내부당원이 있다. 그리고 그 밑을 국가의 손발 역할을 하는 외부당원이 차지하고 있고, 이들 관료기구가 전체의 15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전체 인구의 85퍼센트는 ‘노동자’라 불리는 하층계급으로서 소위 ‘벙어리 대중’이다.


그러한 권력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권력인 당이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소수의 당원들이다. “노동자들은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둬도 그들은 몇 대가 지나도록, 몇 세기가 지나도록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것도 파악할 힘이 없이 일하고 자식을 키우며 죽어가는 것이다.” 반면에 “당원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사상경찰의 시선 안에서 살아간다.”

 

‘진리부’라는 행정관청에서 역사변조를 담당하는 공무원 윈스턴은 외부당원이며, 따라서 그러한 감시하에 놓인다. 그는 당이 강요하는 변조된 진실 너머 역사적 진실이 따로 있다고 믿고 반역을 꾀하지만 체포돼 고문을 받고서 ‘치유된다’. 윈스턴은 너무도 허술하게 반역을 기도하지만 당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응징된다. 그가 끔찍한 고문상황에 처하게 되자 연인이었던 줄리아마저 배신하고 결국엔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이러한 음울한 결말이 집필 당시 건강이 악화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오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지식인 계급에 대한 작가 불신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윈스턴은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오웰을 닮았다. 그는 ‘빅브라더 타도’를 은밀히 결심한 이후에 자신이 죽은 목숨이고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줄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 생전에 뭐 하나 바꿔놓을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 그러나 여기저기서 소규모의 저항이 일어나 사람들이 조금씩 떼를 이루고, 점차 불어나 후세에 기록을 몇 가지라도 남기게 되면 우리가 죽은 뒤 다음 세대에서는 수행할 수 있을 테지.”

 

그렇듯 ‘미래는 노동자들의 것’이라는 게 윈스턴의 신념이었다. 과연 오늘날 계급화된 자본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노동하는 다수는 ‘벙어리 대중’인가 아니면 ‘미래의 주인’인가. 그런 질문이 아직 유효하다면 오웰의 <1984>는 ‘오래된 미래’이다.

 

12. 09.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