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서울대 대출도서 1위'라고 알려지면서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를 소개하면서 단상을 보탰다(저자의 이름 Jared는 합의된 표기방식이 없는지 제각각 표기되고 있다. 번역본에는 '재레드'로, 알라딘과 몇몇 언론에서는 '제레드'로 표기한다). 개인적으론 다이아몬드의 주요 저작 세 권을 원서와 함께 다시 구입해서 읽고 있다. 그의 신작도 곧 출간된다고 한다.

 

 

 

경향신문(12. 11. 02) ‘도둑정치’와 어떻게 단절할 것인가

 

가을이 깊어가면서 올해의 달력도 마지막 두 장을 남겨놓았다. 하지만 출판계 기준으로는 이달이 마지막달이다. 보통 전년 12월부터 올 11월까지 출간된 책 가운데 올해의 책을 선정하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12월에는 온 국민의 이목이 쏠리는 대선이 있기에 책은 대중의 관심사가 되기 어렵다. 화제를 모을 만한 책이라면 그런 ‘경합’을 피해 출간을 앞당기거나 대선 이후로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특별한 주목거리가 된 책이 있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으로 알려지면서 신간이 아님에도 종합베스트셀러에까지 오른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란 책이다.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국내에서도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굳힌 명저이지만 이만한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은 없다. 묵직한 인문서가 ‘서울대 대출도서 1위’라는 타이틀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가. 생리학자로 출발했지만 조류학,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에도 정통한 저자는 조류의 진화를 연구하기 위해 뉴기니 섬에 체류하다가 한 원주민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쇠도끼와 성냥, 의약품에서 우산에 이르기까지 백인들이 들여온 온갖 새로운 물건을 뉴기니 사람들은 ‘화물’이라고 불렀다. 왜 한쪽에는 화물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없느냐는 원주민의 물음을 저자는 “인류의 발전은 어째서 대륙마다 다른 속도로 진행됐을까?”란 질문으로 바꾸고 25년 만에 그 해답을 내놓는다. 바로 <총, 균, 쇠>이다.

저자는 민족마다 다른 역사 진행의 차이가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환경적 차이 때문에 빚어졌다고 본다. 지리적 환경과 생태 환경의 차이가 궁극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역사학자들은 흔히 환경결정론이라고 무시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지식과 자료, 그리고 현장탐사의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그에 따르면 BC 1만1000년경에 시작된 농경(식량 생산)이 모든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사회의 지배적 형태를 바꿔놓는다. 다이아몬드는 사회형태를 무리, 부족, 추장사회, 국가로 구분하는데, 농경으로 인한 인구 증가는 점점 더 규모가 큰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이렇게 규모가 커지면서 계급이 형성돼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나뉘는 비평등사회가 탄생한다. 추장사회와 국가를 특징짓는 비평등사회는 개인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도 해치우지만 한편으론 평민들에게서 빼앗은 것들로 상류층을 살찌우는 ‘도둑정치’의 기능도 갖는다. 대규모 사회는 복잡한 중앙집권적 조직을 갖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사회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위해서 가장 유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앙집권화를 통해서 권력이 집중되면 권력자는 자신과 친척 및 주변사람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여러 집단들을 보더라도 자명한 일”이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장물 논란을 빚고 있는 정수장학회 문제도 그렇고, ‘은닉재산’으로 의혹을 받고 있는 시가 30억원 상당의 땅을 딸에게 증여한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나 내곡동 특검에 가족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일가를 보아도 그렇다.

국가와 같은 대규모 사회는 중앙집권화될 수밖에 없고 또 이 중앙집권화는 도둑정치로 귀결되기 쉽다면, 진정한 문명과 새정치의 척도는 ‘도둑정치’와 어떻게 단절할 것인가이다. 그런 혁신의 기회를 우리는 잡을 수 있을까.

 

12. 11. 02.

 

 

P.S. '도둑정치'와 관련한 내용은 책의 14장에서 가져왔는데, 우리말 번역에는 오류가 있다. 아래 대목이다.

이처럼 갈등 해결, 의사 결정, 경제, 공간 등의 문제를 모두 고려했을 때 대규모 사회가 결국 중앙 집권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권력이 집중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 권력을 가진 사람들(즉 정보를 독점하고 결정을 내리고 물자를 재분배하는 사람들)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과 친척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여러 집단을 보더라도 자명한 일이다.(417쪽) 

강조한 대목이 정반대로 옮겨졌는데(그러니 거꾸로 혁신정치의 기대치이다!), 원문은 이렇다. "But centralization of power inevitably opens the door - for those who hold the power, are privy to information, make the desions, and redistribute the goods - to exploit the resulting opportunities to reward themselves and their relatives. To anyone familiar with any modern grouping of people, that's obvious."(288쪽) 곧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과 친인척의 배를 불릴 기회를 갖게 되며, 알다시피 그들은 그걸 마다할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내곡동 특검이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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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세종캠퍼스의 소식지 쿠스진(KUSZINE)의 청탁을 받아 쓴 글을 오탈자를 바로잡아 옮겨놓는다(http://blog.naver.com/ks_enter?Redirect=Log&logNo=110150248950). '독서의 가치'가 제안받은 주제였다. 독서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글을 쓴 적이 있어서 중복되는 내용도 많지만 '종합'한다는 의미로 적었다. 언젠가는 망구엘의 <책 읽는 사람들>(교보문고, 2012) 정도의 규모로 써보고 싶다...

 

 

 

쿠스진(12. 10. 24) 독서의 가치

 

“네가 무얼 먹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는 말이 있다. 독서의 경우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가 무얼 읽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내가 먹는 것이 나인 것처럼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이다. 우리는 에누리 없이 각자가 읽는 만큼의 ‘나’가 된다. 나는 독서의 가치가 길게 말할 것 없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인간, 독서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부커스’로 정의될 수 있다면 말이다.


‘독서하는 인간’이 우리의 본질적 규정은 아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독서는 아주 최근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일단 문자의 발명 자체가 5천년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문자로 무얼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시대는 그 이전의 선사시대와 비교하더라도 극히 짧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 ‘짧은 기간’은 우리의 뇌가 책을 읽기에 적합한 구조와 능력을 갖게끔 진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 능력이며, 다른 용도로 진화된 뇌의 부위들이 서로 협조한 결과이다.


독서 능력 자체가 일반화돼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실상 그것은 매우 놀라운 능력이다. 우리는 대부분 처음 글자를 익히며 더듬더듬 읽어가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 재주를 발휘하여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기기도 했으리라. 그렇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우리는 저마다 기적을 만들어낸 능력자라고 말해도 좋다. 아침마다 태양이 뜨는 것처럼 일상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경탄에 값할 만한 기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기적이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구분하자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기적, 곧 ‘문해력’의 기적과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적, 곧 ‘독서력’의 기적이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문해력과 독서력은 일치하지 않는다. 똑같이 책을 읽는 능력이지만 문해력이 초급에 해당한다면 독서력은 그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고급능력이다. 가령 초등학생의 독서능력과 대학생의 독서능력을 비교해보아도 좋겠다. 책을 읽고 소화하는 수준에서 문해력과 독서력은 차이가 있다. 이유식을 먹던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충분한 영양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듯이 문해력이 독서력으로 질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선 일정량 이상의 독서 경험이 필요하다. 즉 독서력은 자연스레 체득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이다. 


문해력과 독서력의 간극을 잘 말해주는 것이 우리의 독서량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지만, 곧 문해율은 아주 높은 편이지만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권’ 꼴로 OECD 가입국가 가운데 꼴찌 수준을 못 면하고 있다. 성인의 연간 독서량이 2008년 12.1권에서 2011년 9.9권으로 떨어졌으니 상황은 더 나빠졌다. ‘한 달에 한권’이라는 수치도 그나마 올려 잡아서 그렇다. 게다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사람이 10명 중 4명꼴이라고 하니, 지표만 보자면 우리의 독서현실은 매우 참담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 수는 세계 최저 수준인데 반해서 독서 인구나 평균 독서량은 현저하게 적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해력이 곧 독서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독서력은 문해력만 있다면 저절로 얻게 되는 능력이 아니다. 문해력만 갖고는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해력에서 독서력으로 건너뛰기 위해선 그 보폭을 가능하게 할 만한 독서량이 요구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책을 ‘안’ 읽는 것이 아니라 ‘못’ 읽는 것이다. 실제로는 독서력이 부족해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단지 안 읽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독서력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어렵지 않다. 먹으면 살이 찌는 것처럼 읽으면 독서력이 붙는다. 다만 우리 뇌가 독서에 적합한 ‘독서근육’을 갖기 위해서는 비교적 단기간에 일정량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몸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운동을 어느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얼마만큼의 독서량이 필요한지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독서력>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에 따르면 대략 150권 정도의 독서가 필요하다. 그 정도 책을 2-3년 동안 독파해나가면 자연스레 우리의 뇌는 독서에 적합한 구조를 갖게 된다. 그것이 비유컨대 독서근육이다. 그리고 한번 형성된 독서근육은 너무 방치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독서를 한결 수월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단순히 ‘읽는 것’과 ‘읽어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독서력이다. 


따라서 ‘독서하는 인간’을 달리 ‘독서력을 갖춘 인간’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다. 독서의 가치를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스스로를 독서력을 갖춘 인간으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 흔히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우리 각자는 독서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해나가면서 비로소 독서의 가치를 알게 된다. 우리의 지식이 늘어남과 함께 정신이 성장하고 사고가 깊어지며 세계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 그것이 독서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와 ‘나의 세계’를 새롭게 변형하고 갱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읽는 것이 나”라는 말은 그런 의미의 무게를 갖는다.


한편 독서의 가치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시야를 ‘독서하는 인간’에서 ‘독서하는 사회’로 확장해본다면 우리는 독서라는 프리즘으로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 역사는 ‘책을 읽는 자’와 ‘읽지 못하는 자’라는 범주에 의해 구획된 역사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책을 읽는 계급이 읽지 못하는 계급을 지배해온 역사다.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문맹률은 70퍼센트에 달했다. 나머지 30퍼센트의 독서인구, 그리고 더 좁혀서 일본어 해독력까지 갖춘 10퍼센트의 조선인이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했다. 반대로 글자를 모르고 책을 읽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동시에 그것은 예속의 근거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보통교육이 시행되면서야 비로소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해력을 갖춘 인구가 문맹 인구보다 더 많은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이기도 하다. 소위 민주공화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할 때, 그 국민은 형식적인 자격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격, 균등한 능력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문해력은 그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1948년 최초로 총선거가 실시될 당시에는 이 기본 능력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투표방식으로 도입된 것이 후보자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써넣는 기재투표 방식이 아니라 작대기로 기호를 표시하는 기호투표 방식이었다. 문맹자가 다수였던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이후에 이것은 후보자의 이름과 숫자가 나열된 공란에 붓 뚜껑으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원시적인 방식이란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요즘은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도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내는 기재투표를 하는 것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독서능력을 그 수준의 척도로 삼는다면 우리는 세 종류의 정부, 혹은 세 단계의 정부를 가질 수 있다. 곧 ‘문맹자가 다수인 국가의 정부’, ‘문해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 ‘독서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가 그것이다. 독서능력의 여부가 국민의 수준을 결정하고 그 국민의 수준이 다시 정부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독서의 사회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책을 읽는 능력은 각자가 ‘나’를 만들어나가는 최상의 방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더 나은 정치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무얼 읽느냐에 따라서 한국의 미래가 달라진다. 독서는 우리 자신을 바꾸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힘이다.

 

1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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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9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의 <입시가 바뀌면 인재가 보인다>(시그마북스, 2012)를 서평감으로 골랐는데, 교육전문가가 아닌 심리학자가 제안하는 입시개혁은 어떤 것인가 궁금해서 선택했다. 사랑의 심리학에 관한 책 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성공지능이론'의 주창자이기도 하고 국내에 이미 관련서들이 소개돼 있다. 대선 후보들이 입시제도와 관련하여 어떤 개혁안들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참고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주간경향(12. 10. 30) '대안입시’란 무엇인가

 

입시철에 나올 만한 흔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입시가 바뀌면 인재가 보인다>는 국내 교육전문가가 아닌 미국 심리학자의 책이다. 저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지능과 인지 발달이 전공분야이며 ‘성공지능이론’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공한 학자이자 교육행정의 경험을 가진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입시’란 무엇이고, 우리에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까.
 

스턴버그는 대학입시와 관련한 자신의 경험담을 먼저 들려준다. 예일대에 지원했으나 대기자 명단에 올랐던 경험이다. 다행히도 그는 입학하게 되고 최우등 학생으로 졸업까지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으니 애초에 될성부른 학생이었을 텐데, 왜 떨어질 뻔한 것일까. 졸업 후에 대학 입학처 조교를 하면서 확인해보니 자신의 입시 면접 보고서에 ‘돌출형’이라고 기록됐더란다. 돌출형 학생을 원하는 대학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재능을 알아본 입학사정관이 손을 써서 그는 겨우 합격한 것이었다. 면접시험이 숨은 인재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했다고나 할까.
 
대학에 들어와서도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심리학을 전공하기 위해 심리학입문을 들었는데,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강의와 교재 내용을 잘 기억하는 게 관건인 수업이었다. 처음 제출한 소논문에서 10점 만점에 3점을 받았고, 암기력이 좋지 않은 스턴버그는 결국 이 수업에서 C학점을 받았다. 심리학입문 지식도 제대로 암기하지 못한 학생이었지만 스턴버그는 나중에 예일대학 교수가 되고 미국심리학회 회장도 역임한다. ‘학업에 중요한 기술’을 기준으로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키고 또 성적을 평가하지만 직업에서의 성공은 그와는 다른 자질과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해주는 사례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인재’이지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졸업생이지만 미국 역사상 최대 기업 회계부정을 저지른 ‘엔론 스캔들’의 주역 제프리 스킬링, 예일대 출신이지만 미흡한 첩보를 근거로 이라크를 침공한 조지 부시 등이 대표적이다. 대단히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와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례는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어디 미국만의 사례이겠는가!). 스턴버그는 이런 사례들이 모두 현행 대학입시 문제점의 한 단면이라고 본다. 사회·경제적 중상류층에게 유리한 현재의 교육제도는 기억력과 분석력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다른 능력들의 의의를 간과한다.

 

 

 
물론 시험만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사실도 저자는 인정한다. 하지만 제도적 개선방안을 찾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스턴버그가 제안한 것은 성공지능이론에 기반한 새로운 입시제도이다. 분석지능 외에 그가 강조하는 것은 창조지능과 실용지능, 지혜다. 지혜란 “지능과 지식을 활용하여 공동선을 꾸준히 추구하는 기술”이다. 지혜는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여러 이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조정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스턴버그의 제안이 갖는 강점은 그것이 이론적 공상에만 그치지 않고 성공적인 적용사례를 통해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터프츠대학교의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새로운 평가방식을 도입하여 흑인 등 소수계의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터프츠대학의 입시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출제된다. “어떤 것이 당신을 독창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가? 공동선에 기여하고 사회를 바꾸려면, 당신의 독창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고등학교 교과과정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지적 자유를 제한한다. 당신의 대학생활을 마음속에 그려보면서, 당신이 품은 열정 가운데 좌절된 것을 기술해보라.” 시험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는 발견해줄지 모른다.

 

1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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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이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월요강좌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11월과 12월에는 정치철학을 주제로 두 권의 책을 읽기로 했다.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개마고원, 2011)과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동녘, 2012)이다. <정치의 생각>은 마이클 샌델이 추천한 정치철학 입문서이다. 자세한 강의일정에 대해서는 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65 참조하시기 바란다.

 

 

 

<강의일정>
11월 5일 ~ 12월 26일 (8주) 매주 월요일 저녁 8시 ~ 10시 (12월 26일만 수요일)

1. 11월 05일 ~ 11월 26일 (4주) 애덤 스위프트, <정치의 생각> (개마고원)
2. 12월 03일 ~ 12월 26일 (4주) 마이클 센델, <민주주의의 불만> (동녁)
 

곧 대선이 있습니다. 선택을 눈앞에 둔 11월과 12월은 어느 때보다 더 “정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에서는 정치철학에 대한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습니다.
첫 번째 책은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입니다. 이 책은 정의, 자유 공동체 등 정치철학의 다섯 가지 개념들의 함의와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차이점을 밝혀주는 정치철학 입문서입니다.
두 번째 책은 마이클 센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입니다.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에 대해 느끼고 있는 불만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그 불만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쾌하게 제시한 책입니다.
정치란 본디 혼란스러운 것이어서 유권자들은 이 혼란에 그저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련의 사례들은 민주주의 정신에 과연 부합할까요?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는 이번 강의에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1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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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의 마지막 권 <희망의 배신>(부키, 2012)이 출간됐다. 서두에 붙인 추천사를 옮겨놓는다. '배신 3부작'의 한권으로 읽어도 좋고, 중산층 문제를 다룬 책으로 읽어도 좋겠다.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란 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여준 것이다.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

 

‘워킹푸어 생존기’ <노동의 배신>에 뒤이어 ‘화이트칼라 구직기’ <희망의 배신>이 이번에 번역됨으로써 <긍정의 배신>을 통해 우리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3부작’이 완결되었다.

 

 

원제와는 다르지만 ‘배신’이란 단어만큼 그의 책들이 전해주는 임팩트를 실감나게 전달해주는 말도 드물다. 이 세 권의 책과 함께 ‘1%를 위한 세상’을 비판하는 <오! 당신들의 나라>까지 포함하면 저널리스트 겸 원숙한 사회비평가로서 저자가 2000년대에 펴낸 대표작 대부분이 우리에게 소개되는 셈이다.

 

긍정적 사고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지 여실히 보여준 <긍정의 배신>이 우리에게 던진 충격은 무엇이었나? 저자는 자칭 ‘긍정적인’ 사람들이라는 미국인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사하고 미국식 낙관주의의 허상을 폭로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류의 자기계발서가 마치 복음서처럼 읽힌 연대가 우리의 2000년대 첫 10년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던 시기에 우리는 온갖 성공신화의 중독자였다(결국엔 MB정권까지 탄생시킨!). 모든 문제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되뇌면서 “새로운 치즈를 마음속으로 그리면 치즈가 더 가까워진다.”거나 “과거의 사고방식은 새로운 치즈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등의 주문을 아침마다 주워섬겼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그러한 주문이 얼마나 허황한 것이었던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추락하는 삶에는 날개가 없다는 사실도.  

 

<노동의 배신>과 <희망의 배신>은 <긍정의 배신>의 전사(前史)이자 ‘에피소드’이다. <노동의 배신>은 저자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저임금 노동의 실상을 몸소 겪고 쓴 일종의 ‘체험 삶의 현장’으로서 저임금 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기에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숙식도 해결하기 벅찬 것이 오늘날 노동의 현실이다. 물론 그것은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노동의 배신>에 뒤이은 <희망의 배신>은 중산층 화이트칼라의 현실을 다룬다. 저임금 노동과는 달리 이 경우는 노동이 아니라 구직 자체가 문제다.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위장하여 기업체 임원급으로 취업하려고 수개월간 유료 코칭도 받고 네트워킹 행사에도 참여하고 이미지 카운슬링도 받는다. 이 과정에서 구직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기술과 노동을 파는 블루칼라 노동자와는 달리 화이트칼라는 ‘자기 자신’까지 팔아야 한다. “CEO가 바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업 행위가 불법의 경계선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 해도 당신은 일체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몸 바쳐 일해야 합니다.”라는 한 카운슬러의 충고는 화이트칼라의 노동현실을 잘 요약해준다. 일자리의 안정성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희생되고 있는 것이 그 현실이다. 

 

저자는 온갖 노력에도 실패를 거듭하는데 바로 이 실패의 과정이 또한 우리 시대 중산층 화이트칼라가 처한 냉정한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기업 고위 경영자가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앤 대가로 높은 연봉을 받는 추세가 뚜렷해졌다. 이것이 구조조정의 실상이다. 대량의 정리해고와 아웃소싱을 단행한 CEO가 그렇지 않은 CEO보다 더 많은 보수를 챙기는 것이 오늘날 기업의 현실인 것이다. 저널리스트 이전에 생물학 전공자답게 저자는 그러한 현실을 ‘포식자의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야 경영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소위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현실의 필연적 귀결이 저자가 ‘중산층 대참사’라고 부른 중산층의 몰락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미국의 현실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청년실업과 중장년층의 정리해고와 재취업난은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었으니까.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가? 저자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희망의 배신>은 그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우리가 적어도 생쥐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각성 말이다. 

 

12. 10. 21.

 

 

 

P.S. '중산층 대참사'와 관련해서는 에런라이크의 책 외에도 톰 하트만의 <중산층은 응답하라>(부키, 2012), 그리고 조준현의 <중산층이라는 착각>(위즈덤하우스, 2012)을 더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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