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불매운동과 관련하여 '로쟈'란 이름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기회주의적 지식인'의 전형이며 '코메디언'이라는 게 내가 얻은 새로운 별칭이다. 생각의 자유가 있고 명명의 권리가 있을 터이다. 사실 이번 사안에 긍정적인 면이 없진 않다. 한 임시직 노동자의 '부당해고'가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로 '승화' 혹은 '성체화'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일 것이기에(해고의 불법성 여부에 대해선 아직 모르겠다. 법률적 자문이 필요할 텐데, 알라딘 내부에선 그럴 만한 능력이나 의사를 가진 분이 없는 듯하다. 역시 좁은 동네다). 비록 아직까지는 알라딘 '내부'에만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알다시피 알라딘쪽에선 담당자와 대표가 입장을 표명했다. 알라디너들에게 사과의 뜻도 밝혔다. 물론 충분할 리가 없다. 특히나 '질긴 놈이 이긴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나기나 피하자는 임시방편의 꼼수요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할 것이다(용산참사 합의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해고 노동자에게 백배 사죄하고 당장 정규직으로 채용하거나, 그게 불가하다면 이런 사단이 벌어지게 만든 인사 담당자에게 책임을 물어 면직시키는(여차하면 해직시키는) 조치도 고려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유식 대표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니 이왕지사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가 된 만큼 출판계 전체로 문제를 확장시켜볼 수도 있겠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로... 그렇게 되지 않고서야 충분할 리가 없다. 아니 충분해서도 안된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노동자를 해고시킬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장기근무를 약속받고 한달이나 묵묵히 헌신한 노동자를.
불의를 보고 묵과하지 않는 것은 '행동하는 양심'의 기본일 터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행동하는 양심'은커녕 '양심에 털난 인간'이다. 나는 뭐라고 말했던가?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임시노동직이 한 달을 일하고 해고됐어요. 몇 사람이 이걸 문제로 지적했고 알라딘 불매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저는 불만스러웠던 게, 사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다 그렇게 되어있잖아요. 그런데 굉장히 놀랍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알라딘에 항의를 하고, 이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게 웬 순수한 가장인가, 이게 과연 시급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불만스럽다고 한 건 비정규직(임시직)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이나 부당한 처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유독 알라딘의 경우만, 그것도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한 사례를 통해서 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가란 점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전략적인 판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내지는 이보다 더 중차대한 문제는 없다는 '순수한 가장'을 통해서만.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면, 피터 싱어의 예를 들어보자.
출근길마다 작은 연못가를 지난다. 날씨가 더울 때면 가끔 연못에 들어가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겨우 무릎까지 물이 차이 염려는 없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춥고, 시간도 이르다. 그런데 연못에서 첨벙거리는 아이가 있는 게 아닌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주 어린아이다.(...) 아이는 물 밖으로 겨우 몇 초 동안만 고개를 내밀 수 있는 모양이다. 뛰어 들어가 구하지 않으면, 빠져 죽고 말 것이다. 물에 들어가기란 어렵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며칠 전에 산 새 신발이 더러워질 것이다. 양복도 젖고 진흙투성이가 되리라. 아이를 보호자에게 넘겨주고 옷을 갈아입고 나면, 틀림없이 지각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21쪽.
물론 당연히 물로 뛰어들어야 옳다. 이것이 아마 불매운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시는 분들의 입장일 것이다. 적어도 인간으로서 측은지심을 갖고 있다면, 신발이 더러워지고 양복이 젖고 하는 건 핑계가 될 수 없다. '양심에 털난 인간'은 이러한 구호의 요구를, 연대의 손길을 외면하는 인간일 터이니, 그러면서도 인문학을 떠들어댄다면 낯짝도 두꺼운 사이코패스라 할 만하다.
하지만, 문제적 상황에서 아이가 둘이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오직 한 아이밖에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혹은 정말 불운하게도, 아이들이 떼로 빠져 있다면? 싱어도 자신의 가상의 사례에 이어서 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제아동기금 자료를 보면, 매년 거의 1천만 명에 달하는 5세 이하의 아동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그러니까 한 아이가 빠져 있는 게 아니라 1천만 명의 아이가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에 가깝다. 한국 실직 노동자만 하더라도 최소 수십 만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측은지심에 의해 발동한 즉각적인 행동의 효과에 대해서 재고해보도록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가령, 우리의 도덕감정은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을 동정하도록 이끌지만, 차가운 이성은 기회비용을 고려한다. 10명의 아이가 빠져 있는데, 10명이 달려가 가까이에 있는 한 아이에게만 매달려 있다면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한 사람이 아이를 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다른 아이를 구하거나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실직이 문제가 되는 건 보통 빈곤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알라딘에서 해고된 김종호씨는 현재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까 최악이라고 볼 순 없다. 요즘엔 가족을 부양하면서 자신의 학비까지 벌어야 하는 대학생들도 드물지 않다). 다시 싱어를 참조하면, 세계은행의 절대 빈곤 기준은 매일 1.25달러이며, 그 이하의 수입밖에 없는 사람의 수가 지구상에는 14억명 가량이 있다. 반면에 10억명의 인구 정도는 "오늘날 일찍이 없었던, 있었더라도 왕이나 귀족들 정도나 누렸을 법한 풍요를 누리고 있다." 다른 게 '풍요'가 아니라 냉난방이 잘 갖춰져 있어서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정도면 '귀족적 호사'다.

문제는 이 '귀족들' 또한 이 정도의 풍요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데 있다. 하여 '사람사는 세상'이 되려면, 14억의 빈곤도 해소해야 하지만, 10억의 욕구불만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전선은 이중적이다. 부당한 사회적 관계도 철폐해야 하지만, 동시에 가치있는 삶의 모델도 새롭게 주조해야 한다. 단지 빈곤층이 중산층이 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오늘날 자본가와 노동자가 같은 TV드라마를 보고 같은 노래를 들으며 늘씬한 아이돌들을 보고 똑같이 므흣해한다면, 그들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는 한국사회에서 '먹고사니즘' 이데올로기의 극복 없이는 대안도 진보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배부른 소리 하는 게야"라는 말들이 먹고사니즘의 구호다("책이 먹고 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어?"라는 물음도 그 변이형이다). '생존' '생계'라는 프레임에는 진보/보수, 좌파/우파가 따로 없다. 한쪽에서 '생존권 투쟁'을 말하고, 다른쪽에선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한다.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모두가 '생명정치' 패러다임 안에서 움직이며, 그런 점에서 적대적으로 공모한다. 물론 생존이 중요하고 먹고 사는 일이 소중하다. 하지만, 가치있는 삶, 품위있는 삶이 생존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이곳이 절멸수용소가 아니라면. 아니 절멸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은 의미를 찾고자 했다). 먹고 살 만해야 책도 읽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편견이다(그래도 책을 읽는 노동자가 무식한 자본가보다야 우월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생존에의 욕구뿐만 아니라 가치있는 삶에 대한 욕망 또한 갖고 있으며 이것은 언제 어디서건 충족되어야 한다. 그런 욕망을 안 갖고 있다면 배워야 한다. 욕망하는 법을...
뭔가 충분히 '해명'하려고 했지만, 끝도 없는 일일 듯싶다. 그간에 나의 생각과 편향에 대해 '적게' 말해온 편도 아니건만, 오해와 오용은 불가피한 듯하다. 그러한 오용이 몇몇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면 말리지 않겠다. 나는 다만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 정도를 말하고 싶다. 물에 빠진 한 사람을 구하는 것, 부당하게 모욕받은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것, 당연히 가치있는 일이다. 하지만 길은 여러 가지다. 그리고 노자의 말대로 길흉화복은 길게 두고 봐야한다. 화 속에 복이, 복 속에 화가 엎드려 있다고 하니까. 좋은 괘를 얻었다고 희희낙락하지 않고 나쁜 괘를 얻었다고 하여 좌절하지 않는 것이 <주역>의 독법이라 한다. 이 또한 기회주의적 독법일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기회주의에 대해서도 연구해봐야겠다. 우선은 점심을 먹고서...
09.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