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여행이 아주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또 언제든 쉽게 여행객 신분으로 변신한다. 예전과 달리 여행의 문턱이 낮아진 것도 있겠지만, 여행의 개념 자체가 달라진 탓도 크다. 여행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을 일컫는데,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은 곳마저 여행 목적지가 되곤 한다. 일상적인 행동반경이 워낙 좁은 현대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집을 벗어나면 유사 여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적 영역이 좁으면 좁을수록 외부는 반대급부로 넓어지기 마련이고, 예전 같으면 가벼운 외출에 지나지 않았을 행위도 쉽게 여행에 준하게 된다. 그런 여행으로 부터 의미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일찍이 여행의 모습이 지금 같지 않았을 때, 즉 떠나기 위해 안온한 일상 전부를 포기해야 했던 과거에는 여행자가 여행의 의미와 이유를 따져보는 것이 아주 당연했을 것이다. 이유 없이 떠나기에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너무 많았다. 도로 상황과 교통수단이 지금 같지 않았고, 임금과 여가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 여행자들은 떠나야 할 이유를 찾았고, 기어코 떠났다. 그 절박함으로부터 우리가 여행의 의미를 유추해낼 수는 없는 걸까? 다행히도 적지 않은 여행자들이 여행을 마치고, 여행의 의미를 되짚는 글을 썼다. 오늘날에도 그 글들이 여행기나 기행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 자체로 여행자가 남긴 불멸의 흔적인 셈이다.
그 흔적들로부터 지금은 거의 실종된 질문, ‘우리는 왜 떠나는가?’의 답을 구해볼 수는 없는 걸까? 물론 질문의 시작은 그게 아니다. 질문은 ‘그들은 왜 떠나는가?’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질문이 답을 구해 되돌아왔을 때는 ‘우리는 왜 떠나는가?’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각각의 여행은 특수할지도 모르나, 일상에 돌아와 되짚어 본 그 여행은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다. 여행은 근본적으로 떠남과 되돌아옴의 연속인데, 이는 인생의 아주 보편적인 현상인 탓이다. 결국 인생의 보편적인 진리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여행은 유의미한 것이 된다. 그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보편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또 다른 접근법일 수 있다. 선구자들은 그 고민에 이렇게 답하였다.
1. 『이탈리아 기행 1,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펭귄클래식)
말하자면 여기에 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 갖고 있던 개념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신던 신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오면 제법 대단한 사람이 되며, 비록 그것이 그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특별한 개념을 얻게 된다. (…)
나를 내부로부터 개조하는 재탄생 작업이 늘 계속된다. 이곳에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배우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학창 시절로까지 되돌아가 그 많은 것을 버리고 모조리 새로 공부해야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확신을 갖고 완전히 배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수록 더욱 즐겁다.
- 『이탈리아 기행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201~203쪽
무엇이 대문호 괴테를 이토록 호들갑스럽게 만들었을까? 괴테는 1786년 새벽 3시에 카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와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했고, 1차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해서는 이런 편지를 써서 부쳤다. 괴테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이제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며 완전히 새로 태어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저 그리스 고전 미술품을 직접 보았으면 했던 이 여행이 이후 그의 인생과 예술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괴테는 아직 알지 못했던 때이다. 야반도주하듯 몰래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담아 지인들에게 부쳤던 이 편지들은 훗날 『이탈리아 기행』으로 출간되었다.
괴테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볼 필요가 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출간 이후 유명인사가 된 괴테는 이후 장관 신분으로 바이마르에 머물면서 10년간 국정에 매달리게 된다. 그 기간에도 집필 활동은 지속했지만 별다른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했고, 대신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바이마르에서 자신의 예술 정신이 고갈되고 있음을 느낀 괴테는 요양 차 잠시 머물기로 했던 카를스바트에서 예고 없이 자취를 감추고는 오랫동안 미뤘던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괴테가 마흔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괴테의 여행은 베로나, 베네치아, 볼로냐와 피렌체를 거쳐 로마로 이어진다. 로마에 도착한 기쁨은 괴테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는 데, 그는 어서 빨리 로마에 오고 싶은 마음에 피렌체에 겨우 3시간만 머물렀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정말이지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곳(로마)을 직접 보고 현장에 와야 나을 수 있는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데 급기야는 라틴어 책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고 이탈리아 지역을 그린 어떤 그림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나라를 보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강렬했던 것이다.
- 같은 책, 168~169쪽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매료된 괴테는 로마와 나폴리까지만 둘러볼 생각이었던 애초 계획을 수정한다. 시칠리아 섬까지 여행한 다음 다시 돌아온 로마에서, 괴테는 이곳에 장기간 체류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른다. 친분이 두터웠던 화가 요한 빌헬름 티슈바인의 집에 머물면서 그에게 그림 수업까지 받으며. 한편으로 집필 활동도 재개하게 되는데, 미완으로 묵혀두었던 『이피게니에』와 『에그몬트』 등을 완성한 것도, 그의 대작 『파우스트』가 본격적으로 구상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말하자면 깨달음의 나날들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사물들의 본질과 그 관계들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오페라는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곤 내적이고 영원히 진실한 것밖에 없습니다.
- 『이탈리아 기행2』, 185~186쪽
2년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괴테는 바이마르에 돌아왔지만, 신뢰와 우정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냉대받는다. 실러를 만나기 전까지 괴테의 고독한 생활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후 확립된 그의 고전주의 경향이 고스란히 이탈리아 여행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괴테의 모습은 요한 빌헬름 티슈바인이 그린 <캄파냐 평원의 괴테(Goethe in the Roman Campagna)>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기행』의 국내판 표지로도 널리 쓰이고 있는데, 괴테의 단정한 옷차림과 심각한 표정에서 이 여행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티슈바인이 그린 또 한 장의 그림에서 다른 일면을 발견하게 되는데, 후자가 당시 괴테가 시달렸던 여행 충동을 더 잘 드러내는 듯하여 보는 마음도 뜨거워 진다.
<로마 코르소에 있는 숙소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괴테(GOETHE AM FENSTER DER RÖMISCHEN WOHNUNG AM CORSO)>, 요한 빌헬름 티슈바인, 1787
2.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동북아역사재단)
“체호프는 왜 사할린에 갔어요.” 후카에리가 물었다.
“그 점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지?”
“그래요. 당신은 그 책을 읽었어요.”
“읽었지.”
“어떻게 생각했어요.”
“체호프 스스로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을 거야.” 덴고는 말했다.
“어쩌면 그저 단순히 그곳에 가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지도에서 사할린 섬의 모양을 바라보다가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뭉클뭉클 솟아났다든가. 나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어. 지도를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는 꼭 가봐야겠다 싶은 장소가 있으니까. 그리고 왠지 몰라도 대개의 경우 그런 장소는 멀고 험한 곳이야. 그곳에는 어떤 풍경이 있는지,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튼 그런 게 못 견디게 알고 싶어져. 그건 홍역 같은 거야. 그래서 남에게 그 열정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 순수한 의미에서의 호기심. 설명할 수 없는 인스피레이션. 물론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사할린까지 여행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만큼 힘겨운 일이었으니까, 체호프의 경우에는 단지 그런 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 『1Q84 1』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546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을 언급한 한 대목이다. 『사할린 섬』은 작중에서 가상의 액자소설인 『공기번데기』와 함께 중요하게 인용되는 책 중 하나다.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명세만큼, 그가 소설에서 언급한 책이나 음반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이 벌어지곤 하는데, 실제로 『사할린 섬』 역시 일본에서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것이 수십 년 만에 재출간 되었고, 몇 년 뒤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오랫동안 물속에 가라앉아있던 체호프의 여행기를 뭍으로 끌어낸 셈이다.
『1Q84』에서 언급한 대로, 체호프는 뚜렷하게 알려진 이유도 없이 1890년 사할린 섬 여행을 강행한다. 서른 살의 나이로 이제 막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시점이었고, 당시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이 발병한 다음이었다. 사할린은 러시아 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변방 중의 변방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인들이 유형살이를 하는 유형지였다. 아직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가설되기 전이라 시베리아 횡단 여행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마차를 열 걸음 정도 끌다가 말들은 멈춰 서버렸다. 이제는 아무리 채찍을 가해도 호통을 쳐도 더 이상 꿈쩍도 안한다. 어쩔 도리가 없어 다시 배수로를 향해 도로에서 내려서서 다시 다른 길을 찾는다. 그러고 나서 또 생각하고 도로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이러기를 끝이 없다.
힘겹게 죽을힘을 다해 나아가지만 상황은 더 극심해질 뿐이다. 마치 여기가 지구의 곰보 자국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커먼 곰보길이 유럽과 시베리아를 잇는 유일한 혈관이라니! 이 혈관을 따라 시베리아로 문명이 흐른다고들 하니! (…)
약 25kg의 차 꾸러미들을 실은 수많은 짐수레가 바로 이 도로를 따라 느릿느릿 움직이고 바퀴는 깊은 홈에 반쯤 빠져 있고 작고도 여윈 말들이 목을 빼며 안간힘을 다한다. 그 짐수레 옆을 따라 짐수레꾼들이 가고 있다. 진흙탕 속에서 말을 도와가며 다리를 끌고 있다. 이들은 벌써 오래전에 기력을 소진했다. 그런데 또 짐마차가 멈춰버린다. 무슨 일인가. 한 짐수레의 바퀴가 부서졌다. 싫다. 더 이상 보지 않는 게 낫다!
-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동북아역사재단) 101쪽
엄밀히 말해 『사할린 섬』 책 전체가 여행기인 것은 아니다. 1부에 해당하는 「시베리아에서」만이 여행기 형식을 갖추고 있고, 사할린에 도착한 다음인 2부의 내용은 당시 유형지였던 사할린의 자연·주거환경과 유형수들의 생활을 조사한 보고서 형식을 띠고 있다. 작가와 의사직을 겸하고도 여전히 가난했던 체호프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사와 탐사 보고서 계약을 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가 체호프의 유려한 문장으로 쓰인 기행문을 기대하고 본다면, 특히 2부는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유형수의 삶이라는 것이 몹시 비참했던 만큼, 절제된 문장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체호프의 호기심과 연민만큼은 빛을 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할아버지도 없고 할머니도 없고 오래된 세간이나 할아버지의 가구도 없다. 세대에 과거와 전통이 결핍되어 있는 셈이다. 성상을 안치하는 곳도 없고, 있다고 해도 등이나 장식도 없이 매우 빈약하고 컴컴했다. 즉 관습이 없는 것이다. 세간은 우연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마치 자기 집이 아닌 듯한 느낌, 이제 막 도착했기에 자기 것을 갖추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고양이도 없고 겨울밤에도 귀뚜라미 소리 들을 일도 없으니 중요한 점은 고향이 없다는 것이다.
- 같은 책, 161쪽
자기 건강을 담보로 했던 이 사할린 섬 여행이 체호프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밝히려는 전공자들의 시도는 계속 있었다. 사할린 섬 여행 이후의 작품을 분석해서 그의 변화된 세계관을 살펴보거나, 인간을 대하는 달라진 태도를 분석한 시도도 없지 않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전까지 유명한 유머 작가였던 체호프가 이후 「6호실」, 「상자 속의 사나이」, 「공포」 같은 진중한 주제의식을 드러낸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할린 섬 여행은 체호프의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3. 『헤세의 여행』
(헤르만 헤세 / 연암서가)
현대인이 어떻게 여행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다룬 많은 책과 소책자가 있지만, 내가 알기로 좋은 책은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유람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 왜 그 여행을 하는지 아는 것이 좋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여행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도시인이 여행하는 것은 여름에 도시가 너무 덥기 때문이다. 그가 여행하는 것은 공기를 바꾸고, 다른 환경과 사람들을 봄으로써 일에 지친 피로를 풀고 푹 쉴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가 산으로 여행하는 것은 자연과 땅, 식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해되지 않는 갈망으로 그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로 여행하는 것은 그것이 교양 여행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그의 모든 사촌과 이웃도 여행을 가는데다, 또 여행을 갔다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무척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헤세의 여행』 (헤르만 헤세 / 연암서가), 32쪽
여행의 시학(詩學)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헤세는 다소 신랄하게 당시의 여행 행태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밌는 것은 여행객에 대한 이러한 비난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의미도 목적도 없는 여행이 유행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헤세는 이 모든 동기를 이해할 만하다고 눙치고는, 그 자신의 여행 시학을 정신적 관계를 맺는 체험으로 한정한다. 다시 말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데에, 새로 획득한 것의 유기적인 편입에,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지구와 인류라는 큰 조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증진에, 옛 진리와 법칙을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서 재발견하는 데’에 여행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방랑과 구도의 소설가다운 발상이다.
『헤세의 여행』은 헤세가 생전에 남긴 많은 에세이 중, 여행에 관련된 글과, 실제로 여행하며 쓴 여행기를 묶은 책이다. 24세부터 50세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으니, 한 권의 여행 책으로서는 시간 폭이 넓은 편이다.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헤세와 그의 사유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24세 때 처음 떠난 이탈리아 여행, 건강 문제로 바덴에서 요양 생활을 했던 시기, 그의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도 여행, 중년의 나이로 우울증에 시달리며 스위스에 칩거하던 시기, 늦은 나이에 떠나게 된 뉘른베르크 여행이 차례대로 소개된다. 여행에 관해 그가 처음 가졌던 도발적인 생각이 점차 완숙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독자 역시 마음이 누그러지고 만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며칠 정도나 귀향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추측건대 아직도 오랫동안 여행할 것이다. 아마 겨울 내내, 어쩌면 평생 동안. 결국은 곳곳에서 이런저런 친구를 만나 저녁이면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때로는 나의 천사가 어느 어스름한 시간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나리라. 또 내 청춘의 성소들이. 그리고 어디서나 내 자유의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거나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단지 슬퍼하지만 않고 웃으리라. 내가 가끔 그렇게 생각했듯이, 아마 내 안에 어떤 해학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면 나는 잘 해나갈 것이다. 그 해학가가 아직은 완전히 발전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내가 보기에 완전히 나빠진 것도 아니다.
- 같은책, 470~471쪽
4.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여행을 하는 행위가 그 본질상 여행자의 의식의 변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 움직임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은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행기라는 것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 하는 것을 (차례가 거꾸로 되더라도 좋으니까) 복합적으로 밝혀 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정말 신선한 감동은 거기서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8~9쪽
이 책은 소설가가 쓴 글을 모아놓은 것치고는 유별나게 실용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머리말을 제외하고는 이런 실용적인 제목에 본문 전체가 호응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우선 서두에 여행기를 쓰는 것에 대해 말문을 열고는, 실제로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 여행기를 썼는지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할까. 하루키에게 받는 여행기 작문 수업을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 실망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작가의 정수는 글 속에 담겨 있는 법이다. 그의 글을 직접 읽는 것이 가장 훌륭한 작문 수업인 셈이다. 소설가로 유명한 하루키이지만, 에세이스트로서의 면모도 그 못지않다.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는 여러 월간지 연재를 겸하며 다녀온 여러 여행기를 담은 책이다. 그러나 이 일련의 여행에는 일말의 연결성도 없다. 미국 작가들이 사는 도시 이스트햄프턴 방문, 일본 무인도 체험, 멕시코 버스 여행, 우동 맛집 여행, 격전지였던 몽골의 노몬한 여행, 아메리카 대륙 횡단 여행, 일본 도보 여행 등, 여행지도 여행의 방식도 결코 일관된 법이 없다. 아무래도 여행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모아놓은 탓이겠지만, 이러한 무질서함이 어쩌면 여행이 본질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루키가 앓고 있는 여행 충동의 정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여겨볼 것이 바로 무인도 여행과 멕시코 여행이다. 이 두 여행기는 ‘우리는 왜 떠나는가?’, ‘왜 하필 이곳인가?’ 라는 어떤 근원적인 질문에 나름 호응하기 때문이다.
골수 여행자라면 무인도 여행에 대한 낭만을 조금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인도는 이제는 지구 상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오지’와 ‘모험’이 여전히 거기 있을 거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다. 하루키 역시 우연한 기회로 무인도 여행을 떠나게 됐지만, 그곳에서 하루키를 반긴 것은 오지의 낭만이 아닌 온갖 벌레였다. 결국 하루키와 일행은 하루 만에 여행을 포기하고 만다. 이 여행이 실패하기까지의 과정을 하루키는 소상히도 적는다. 멕시코에서의 좌충우돌하는 버스 여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루키는 예기치 않은 사고와 분쟁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라 믿었다.
어쨌든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는 행위에는 광기(狂氣)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뭔가 불합리한 것이 내포되어 있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만 하는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며, 게다가 굉장히 피곤한 일인데.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분쟁에 말려드는 경우도 있다. 아니 분쟁에 말려들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
건너 본 적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본 적이 없는 높은 산맥이 줄을 잇고 있다. 호수나 하구는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변변치 않은 사막조차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보낸다.
(…) 아드레날린이 굶주린 들개처럼 혈관 속을 뛰어 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피부가 새로운 바람의 산들거림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았다.
문득 떠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일단 그곳에 가면, 인생을 마구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일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같은 책, 179~180쪽
그러면서도 하루키는 실제로 그런 일은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우리 인생은 몹시 허술한 듯하면서도, 허술한 상태 그대로 견고해져 버려서 그리 쉽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괴테나 헤세와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하루키처럼 수차례 여행을 반복하다 보면 인생이 휘청하는 순간이 한 번쯤은 오지 않을까? 여행이란,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한 것 아닐까?
5. 『인도 방랑』
(후지와라 신야 / 작가정신)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후지와라 씨는 왜 인도에 가셨던 거지요?” (…)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십 수 년 동안 식상할 만큼 자주 내게 던져진 범용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
젊어…… 그림자가. 역시 그림자에도 나이가 있는 모양이야. (…)
그 청년 시절의 나는 어쩐지 병을 앓고 난 것처럼 보였다. (…)
청년은 뭔가에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청년은 태양에 지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은 대지에 지고 있었다. (…)
청년은 자신을 둘러싼 온갖 것에 지고 있었다.
청년은 지친 눈은 표정을 상실한 듯 보였지만, 내리쬐는 태양에 눈부시게 백열하는 눈앞의 지면을 멍하니 응시할 만큼의 의지는 간신히 남아 있었다. (…)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온갖 것들에게 엉망으로
지기 위해서 갔던 게 아닐까.
……처음에는.
아니, 지기 위해서…… 말인가요.
- 『인도 방랑』 (후지와라 신야 / 작가정신), 23~24쪽
후지와라 신야가 1969년 24살의 나이로 모든 걸 버리고 떠난 인도 여행, 그 고행의 산물인 『인도 방랑』은 어느새 여행서의 바이블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가슴에 『인도 방랑』을 품은 채 배낭을 메고 인도로 떠났다. 그러니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 여행에는 어떤 의미가 필요했던 것이다. “왜 인도로 떠났습니까?” 이 질문은 마치 고문처럼 오랫동안 후지와라 신야를 괴롭혔다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 왠지 반감마저 들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 자체로도 복잡한 인간의 행위가 그런 단순명쾌한 질문에 의해 재단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찾아온 청년 둘의 모습을 보고, 청년의 그림자에 마음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렇게 고백하고 만 것이다. 지기 위해서, 라고. 청춘은 심지어 지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떠난다고.
여행서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담을 담백하게 담은 책과 이 여행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는(그러면서 사진까지 덧붙인) 책이다. 경험 상 대체로 훌륭한 여행 책은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담백한 진술 안에도 여행의 의미는 십분 발한다. 의미 부여가 과도하면 그 책은 낯뜨거워지고 만다. 앞서 소개한 책들은 전부 전자에 해당할 텐데,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 방랑』은 사실 후자에 더 가까운 책이다. 그러면서도 최고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좋은 것도 보았다. 거대한 바냔나무에 깃들인 숱한 삶을 보았다. 그 뒤로 솟아오른 거대한 비구름을 보았다. 인간들에게 덤벼드는 사나운 코끼리를 보았다. ‘코끼리를 정복한 기품있는 소년을 보았다. 코끼리와 소년을 감싸 안은 높다란 ’숲‘을 보았다.
세계는 좋았다. 대지와 바람은 거칠었다.
꽃과 나비는 아름다웠다.
‘여행’은 무언의 바이블이었다. ‘자연’은 도덕이었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침묵에서 나온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나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내 몸에 그것을 옮겨 적어보았다.
- 같은 책, 5~11쪽
『인도 방랑』은 후지와라 신야의 글과 사진이 어우러진 여행서이다. 동일한 형식으로 『티베트 방랑』, 『동양기행』, 『아메리카 기행』 등을 펴냈고,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는 풍기는 대작가가 되었다. 그 글의 특징은 여행 중에 여행자가 경험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심경을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해 내는 데 있다. 어떤 문장은 거의 시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그런 점 때문에 후지와라 신야는 ‘청춘여행론’의 구루(인도에서 스승을 지칭하는 말)로 추앙받는 듯하다.
그는 이제 열병과도 같았던 그 시기를 견뎌낸 72세의 노년 작가가 되었다. 『인생의 낮잠』이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 등의 근간에서도 확인되듯, 그의 관점도 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옮겨갔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청춘이 끝나버렸다고 말하면 지나친 걸까? 아직 뜨거웠던 청춘의 흔적들이 책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 그렇게 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책들은 청춘이 배낭을 메고 떠나도록 여전히 청춘의 등을 떠밀고 있으므로.
‘그들은 왜 떠나는가?’ 라는 질문을 앞세우고 몇 권의 여행 책을 살펴 보았다. 대부분이 대문호라고 부를 만한 작가의 여행기였다. 해답을 빨리 얻고자 다분히 의도한 선정이었다. 그러나 왠지 석연치 않다. 대작가들마저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행지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만을 잔뜩 발견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왜 떠났는지 그들 자신도 잘 모른다는 점이다. 애당초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떠나는 이유가 아니라 떠나는 그 자체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읽어 보자. 보들레르는 여행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여행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질문은 잠시 멈추고, 이 시를 음미해 보려 한다. 『파리의 우울』에 수록된 <이 세상 밖이면 어디라도>의 일부이다.
세상살이라는 병원에서, 병든 자신의 영혼을 달래고자 보들레르는 리스본이며, 로테르담이며, 바타비아로의 여행을 권한다. 그러나 영혼은 대답이 없다.
(…)
“결국 자네는 자네의 고뇌 속에서만 만족할 정도로 무기력해진 건가? 그렇다면 죽음과 유사한 지방으로 도망가자. 내가 일을 맡도록 하지, 불쌍한 영혼같으니! 토르네오로 갈 짐을 꾸리자. 더 멀리, 발트 해 끝자락까지, 가능하다면 삶으로부터 더 멀리 가자. 극점에 정착을 하자. 그곳에서는 햇빛이 땅을 비스듬하게만 스치지. 또 빛과 밤의 느린 교차가 다양함을 없애고 죽음의 반쪽인 단조로움을 늘려줘. 거기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어둠에 몸을 담글 수 있을 거야. 지옥의 폭죽이 반사되듯 북극광이 때때로 분홍 빛다발을 보내줄 동안 말이야.”
결국 내 영혼은 폭발했고 분별있게 내게 외쳤다. “어디든! 어디든지! 이 세상 밖이면 어디라도!”
- 샤를 보들레르, <이 세상 밖이면 어디라도>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