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반찬가게 인기 레시피 - 핫한 동네에서 매일 불티나게 팔리는 특급 반찬 120 소문난 반찬가게 인기 레시피 1
채움반찬 외 지음 / 비타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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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물에 홍두깨살을 1분 데치고, 식힌 뒤에 결대로 찢어?
요리를 안 해보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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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익한 책을 한 권 만났다. 전문 교정자 김정선 씨가 쓴 동사의 맛이라는 책인데, 제목이 주는 기대감대로 우리말 동사의 깊고 진한 을 맛보고 즐기는 기회가 되었다. 알다시피 동사는 사물의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품사다. 우리말로는 움직씨라고도 하는데, 확실히 동사라는 말보다 이쪽이 와 닿는 정도가 크다. 마찬가지로 타동사를 남움직씨’, 자동사를 제움직씨’, 완전 동사를 갖은움직씨’, 본동사를 으뜸움직씨’, 보조 동사를 도움움직씨라고 부르면 그 의미가 더 확연해진다. 움직임에 대한 우리말 고유의 섬세한 묘사가 단어 자체에 고스란히 녹아든 탓이다.


이 책을 읽고 뜻하지 않게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동작이 되게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가름하다, 감치다, 깁다, 공글리다, 궁굴리다, 까부르다, 다그다, 도리다, 바루다, 빻다, 뻗대다, 에다, 에돌다, 우짖다, 지피다, 호리다, 후리다. 평소 의식하지 않는 사소한 동작에도 이렇게 합당한 말이 따라붙는다. 아주 생소한 말도 입으로 여러 번 되뇌다 보면 자연스레 그 움직임이 연상되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체이니까 그렇다. 언어는 그 본질에 복무할 따름이다.



삶에서 멀어지는 움직임과 움직씨


듣기 좋고 말하기 좋은 말들이지만, 우리 입으로 그리 자주 내뱉는 말은 아닌 듯 하다. 더 쉬운 말로 대체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를 따져보자. 어쩌면 우리 몸이 그 움직임을 그만큼 잊었기 때문은 아닐까. 현대인이 살면서 옷 솔을 감치고, 바닥을 공글리고, 나무를 도리거나 후릴 일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과거에는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게 되자, 그 말들도 자연히 의미를 잃고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 말들을 다시 일상 무대에 세우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그런 움직임을 행해야 한다고 말할 건 아니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우리 행위가 빗은 부산물일 뿐이다. 이 시점에서 정말 복원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들이 아니라 그 말들의 연원이 된 움직임이여야 하지 않을까. 처음 말이 만들어졌을 때처럼, 몸을 움직이면 움직씨도 마땅히 따라오게 된다. 말이 풍부해지고 나면, 그 말들로 꾸며질 우리 삶도 그만큼 풍부해질 터이다.


현대인이 유달리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바쁜 와중에도 이런저런 운동과 소소한 취미 생활에 부지런히 몰두하는 것도 현대인의 모습이다. 다만 운신의 폭이 과거에 비해 아주 좁은 것뿐이다. 무엇보다 과거에는 꼭 해야 할 일을 지금은 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장작을 패거나 옷을 짓느라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기술과 문명 발전이 전부 이룩한 성과다. 하지만 때로는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일부러 함으로써 더 행복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무엇보다 움직이는 생명체이니까 움직임으로써 살아 있음을 더욱 실감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살아 있다는 실감은 정서적 충만함의 원인이 되는데, 주로 행복은 그런 데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같은 사람은 오로지 더 나은 삶을 위해 월든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집 이외에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과 음식도 대부분 자급자족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일이지만, 그때도 소로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문명에 반하는 혁명으로 간주됐다. 소로의 혁명 실험은 22개월하고도 이틀에 그쳤지만, 이후 많은 이들이 소로가 했던 방식에 따라 손과 몸을 움직이며 살았다. 모리스 미첼리처드 그레그,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같은 이들이 소로 못지않은 소박한 삶의 예찬자가 되었다. 지금 소개할 윌리엄 코퍼스웨이트도 그런 바로 삶을 살았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삶을 살았으므로, 꾸며줄 말들도 아주 많다.



내 손으로 만드는 삶


내가 중점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소박한 삶이 아니다. ‘유르트 디자인, ‘사회 변화도 아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모두 중요한 것이어서 내 시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핵심은 아니다.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추구하고, 실험하고, 계획하고, 창조하고, 꿈꾸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격려해준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핸드메이드 라이프, (윌리엄 코퍼스웨이트 / 돌베개), 14


윌리엄 코퍼스웨이트는 미국 메인 주 숲 속에서, 저급화된 물질문명에 반대하며 40여 년간 자급자족하는 생활방식으로 소박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또 그는 오늘날 실생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대안 기술, 풍속, 디자인을 찾아 세계 각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 자신이 소박한 삶의 실천가이면서, 앞으로 소박한 삶을 살아갈 이들을 위해 사회적·문화적 기반을 다지려 노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소박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삶의 태도에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윌리엄 코퍼스웨이트는 오늘날의 관점을 빌리자면 종합예술인이라 부를 만하다. 그는 우선 천생 교육자이자 농부였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주거공간인 유르트에 매료되어 북미에 유르트 디자인과 건축술을 도입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배우고 익힌 수공예로 각종 일상용품을 직접 만드는 장인이자, 자신의 소박한 일상을 꼼꼼히 기록한 작가이기도 했다. 뭐든 직접 해야 하는 자급자족의 생활방식이 그를 종합예술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소박한 도구들을 직접 만드는 일을 가장 즐겼다. 숲 속 생활에 필수 도구라 할 수 있는 손도끼를 직접 만들며, 그는 자신의 방식이 사회를 이롭게 하리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광폭 손도끼를 직접 만들어본 경험은 나에게 여러모로 소중한 것이었다. 먼저 이 일은 내내 신나는 모험이었다. 이렇게 기본적인 연장이 모양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에서 부터 남들이 만들어주던 것을 내가 직접 디자인하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내 연장을 직접 만드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그랬다. () 이런 과정은 우리가 얼마나 여러 방면에서 모험을 즐길 수 있는지 실증해주고 있다. 서민적인 도구들에 대한 개념을 확립해 나가는 동안 디자인하는 즐거움, 손을 쓰는 즐거움, 마음을 쏟아 일하는 즐거움을 두루두루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 경험이 나에게 가져다준 또 하나의 가치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장벽을 부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근사한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 이런 경험으로 미루어 우리가 계속해서 모색하면서 서로를 도와주다보면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열악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 같은 책, 66~67


핸드메이드 라이프는 윌리엄 코퍼스웨이트가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사회 디자인, 아름다움, 일과 밥벌이, 교육과 양육, 비폭력, 돈, 소박함, 평생 작업이라는 여덟 가지 주제를 통해 그가 바람직하다고 믿은 삶의 모습을 성찰한 책이다. 그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면서, 산업주의 문화에 중독되어 잊고 지내던 '손으로 만드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운다.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도 정확히 그러하거니와, 그가 추구한 삶의 방식에 내 손으로 만드는 삶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잘 어울릴 법하다.


공들인 수제품에는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에 가격을 매길 수야 없겠지만, 레디메이드 인생과 핸드메이드 인생 중 어느 쪽이 더 값진 가를 따진다면, 결과는 명백하지 않을까?



Do it Yourself!

 

코퍼스웨이트 역시 이 방면에서는 소로 못지않게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추앙한다고 해서 금방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추구하자면 소로나 코퍼스웨이트 같은 훌륭한 스승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함께 배우고 협력할 동료 역시 필요하다. 너무 완벽한 사람보다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열정만은 충만한 사람이라면 더없이 좋겠다.


 라로통가(남태평양의 섬)에서 사는 게 끔찍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우리가 찾으려 했던 것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즐겁게 살고 싶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으로 뭘 찾으려는 건지 우리도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로스앤젤레스 탓으로 돌렸던 우리의 문제들은 고스란히 우리를 따라 라로통가 행 비행기에 올랐다. 알고 보니, 우리가 문제였다. 그건 지상낙원으로 떠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

- 내 손 사용법(마크 프라우언펠더 / 반비), 23~24


마크 프라우언펠더는 IT 전문 칼럼리스트이자 블로거이다. 아마도 내 손으로 만드는 삶과는 가장 거리가 먼 부류에 속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한 때 잘나가던 그였지만 IT버블이 꺼지면서 본격적으로 대안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을 시작한 건 좋았지만 구체적인 방안 없이 미국을 떠나 남태평양의 섬 라로통가로 날아갔다. 소로가 갑자기 월든 호숫가로 떠났듯이 말이다. 하지만 마크 프라우언펠더는 소로와 달리 무참히 실패했다. 그와 그의 가족은 불과 넉 달 반 만에 폐렴과 기관지염과 기생충과 사회적 고립에 만신창이가 되어 미국으로 되돌아 왔다. 하지만 프라우언펠더는 이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DIY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DIY가 더 단순한 삶, 더 생태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는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삼기로 한다.


아마추어 모험을 처음 시작했을 때 DIY 친구들은 실수가 필연적이라면서, 실수하더라도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충고를 귀담아들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실수가 발생할지에 대해서는 무참할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나는 손을 대는 족족 망치기 일쑤였다. 프로젝트의 종류에 상관없이, 아무리 작고 간단한 경우라고 실수가 빗발쳤다. () 이틀에 걸쳐 선반을 다는 동안 속출한 실수담이라면 밤새도록 늘어놓을 수 있지만, 더 해봐야 망신살만 뻗칠 뿐이다. 그래도 달아놓은 선반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지만 않는다면.

이제는 실수를 저지르는 데 워낙 익숙해진 나머지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도 않는다. 가끔은 실수를 통해야 더 나은 방법이 도출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게다가 실수를 한다는 건 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 같은 책, 297~298


프라우언펠더는 <메이크>라는 잡지에 투고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DIY 전문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술을 전수 받는다. 그리고 일상에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부분부터 조금씩 DIY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라로통가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말이다. 그는 우선 텃밭을 가꾸었고, 닭집을 만들어 닭을 키웠다. 즐겨 마시던 커피를 정성 들여 직접 뽑았고, 기타를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다. 개중에서 양봉은 가장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여러 번 실패했지만그걸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도 더는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프라우언펠더는 손수 닭을 키우고 나무 숟가락을 조각하고 기타를 만들며 손에 굳은살이 박이는 게 쇼핑몰에 다녀오는 것보다 훨씬 큰 보람과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DIY‘Do it Yourself’의 줄임말이다. ‘네 스스로 만들어라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말 자체에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담겼다. 다만 오늘날에는 DIY라는 문구가 상품 홍보에 주로 쓰이면서, 그저 반제품을 조립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소모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말이다. 프라우언펠더는 DIY의 핵심은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제삼자가 봤을 때 DIY는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DIY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재료와 공구를 정하고, 어떻게 만들지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은 시간 낭비나 헛수고가 아닌 그 자체로 소중한 작품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뭐라도 직접 만들어 본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집을 짓기 위해 집을 짓다


사실 나는 집을 지은 적이 있다. 담쟁이덩굴과 일일초가 우거진 뒷마당에 자리한 방 하나짜리 초소형 단층집으로 거의 다 재활용 자재를 썼다. 그래도 문도 하나 있고 창문도 네 개나 된다. 게다가 기적이라 할 정도의 뾰족지붕이라 방안에서 서서 걸어 다닐 수도 있다. () 그 집이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 듯했다. 사실 나에겐 그랬다. 그건 내가 지은 집이었다. 단 하나뿐인. ()

나는 중서부의 한 도시에서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아온 해 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여러 달 책임 있는 자리에서 차분하고 사려 깊게, 그리고 대부분의 낮 시간을 실내에서 산 뒤라 활동하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현관에서 내 연장들을 들고 때리고 두드려서 단순하고 유용한 물건, 이를테면 책꽂이나 탁자를 만드는 대신 집을 짓기 시작했다.

- 휘파람 부는 사람(메리 올리버 / 마음산책), 집짓기, 20~22


메리 올리버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동부의 항구도시인 프로빈스타운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시인이다. 메리 올리버의 시는 주로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경이와 기쁨을 단순하고 빛나는 언어로 노래한다. 어떤 동료 시인은 그녀를 소로와 비교하여, 소로가 눈보라 관찰자라면, 올리버는 습지 관찰자이자 자연 세계에 대한 포기할 줄 모르는 안내자라고 일컬었다.


메리 올리버가 살고 있는 프로빈스타운은 역사적으로는 청교도들의 은신처였고, 지금은 비주류 작가와 성적소수자들의 안식처로 변모했다. 미국 최동단에 위치한 코드곶 만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미국의 동쪽 끝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벗 삼은 시인에겐 너무나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마술사이긴 하지만, 대체로 몸을 쓰는 데는 그리 능숙하지 않다. 시인 스스로 인정하듯, 목공 작업을 즐기긴 했지만 뭔가를 완벽하게 만들어낸 적이 없었고, 아주 잘 만든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재주가 아닌 열정이었다. 산책하며 시를 쓰는 것만으로 몸이 만족할 수 없을 때면, 다른 방식으로 몸을 움직였다. ‘톱날과 망치질, 작은 비명 소리와 함께 완벽한 보금자리를 향해 회전하며 들어가는 나사들로 말이다.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열심히, 헌신적으로 ,결연히 일했으며 베이고 긁히면서도 즐거웠다. 작업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지붕 공사가 이어졌고 적삼목 지붕널이 얹혔다. 나는 시인이었지만 잠시 생각과 공식적인 언어의 베틀에서 벗어나 이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즉흥적이었고 몰입 상태였으며 행복했다. 나는 늘 생긴 대로 살아가다가 또 다른 모습이 되고 싶기도 하다.

- 같은 책, 28


짧은 수필인 집짓기는 현재 우리나라에 출간된 두 권의 메리 올리버 수필집 중 휘파람 부는 사람에 실린 글이다. 그녀가 집을 직접 지었던 경험을 담아서 짧게 쓴 글이다. 늘 자연과 교감하는 언어와 소박한 삶을 예찬하는 그녀의 글 중에서, 유독 몸을 쓰는 즐거움을 찬양하고 있어 눈에 띈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 집을 잘 활용하고 있을까? 아니다. 시인은 그 작은 집을 거의 쓰지 않고 내버려 뒀다. 왜냐하면 그 집은 그저 짓기 위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집을 지은 다음에는 그 집 문지방을 넘어 떠나버렸다. 이미 자연이라는 거대한 궁전에 살고 있는 시인으로서 집은 그리 중요한 공간이 아니다. 시인에게 집짓기란 처음부터 집을 짓기 위한 행위 자체였고, 더없이 즐겁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역시 소박한 삶의 또 다른 경지는 아닐는지.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살 수 없는 생명체다. 우리는 서고, 앉고, 걷고, 뛴다. 손은 어떤가? 펴고, 굽히고, 누르고, 당긴다. 각각의 움직임이 제때 쓰임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잇는다. 최소한만 움직여도 물론 살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진 몸이 한껏 움직일 때, 몸은 제 몫을 다했다는 기쁨을 느낀다. 몸이 기쁘면 마음도 기쁘다.


삶의 태도는 다양하다 하겠다. 어떤 태도가 더 낫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이들의 삶은 그 자체가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의 실증일 때가 있다. 그런 삶에 대해서는 토를 달기 어렵고 그저 경탄하게 된다. 보통 사람에겐 불가능한 삶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손과 발이 있으니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 시인인 메리 올리버가 뾰족 지붕의 집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음을 기억하자. “나는 늘 생긴 대로 살아가다가 또 다른 모습이 되고 싶기도 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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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여행이 아주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또 언제든 쉽게 여행객 신분으로 변신한다. 예전과 달리 여행의 문턱이 낮아진 것도 있겠지만, 여행의 개념 자체가 달라진 탓도 크다. 여행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을 일컫는데,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은 곳마저 여행 목적지가 되곤 한다. 일상적인 행동반경이 워낙 좁은 현대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집을 벗어나면 유사 여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적 영역이 좁으면 좁을수록 외부는 반대급부로 넓어지기 마련이고, 예전 같으면 가벼운 외출에 지나지 않았을 행위도 쉽게 여행에 준하게 된다. 그런 여행으로 부터 의미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일찍이 여행의 모습이 지금 같지 않았을 때, 즉 떠나기 위해 안온한 일상 전부를 포기해야 했던 과거에는 여행자가 여행의 의미와 이유를 따져보는 것이 아주 당연했을 것이다. 이유 없이 떠나기에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너무 많았다. 도로 상황과 교통수단이 지금 같지 않았고, 임금과 여가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 여행자들은 떠나야 할 이유를 찾았고, 기어코 떠났다. 그 절박함으로부터 우리가 여행의 의미를 유추해낼 수는 없는 걸까? 다행히도 적지 않은 여행자들이 여행을 마치고, 여행의 의미를 되짚는 글을 썼다. 오늘날에도 그 글들이 여행기나 기행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 자체로 여행자가 남긴 불멸의 흔적인 셈이다.


그 흔적들로부터 지금은 거의 실종된 질문, ‘우리는 왜 떠나는가?’의 답을 구해볼 수는 없는 걸까? 물론 질문의 시작은 그게 아니다. 질문은 그들은 왜 떠나는가?’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질문이 답을 구해 되돌아왔을 때는 우리는 왜 떠나는가?’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각각의 여행은 특수할지도 모르나, 일상에 돌아와 되짚어 본 그 여행은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다. 여행은 근본적으로 떠남과 되돌아옴의 연속인데, 이는 인생의 아주 보편적인 현상인 탓이다. 결국 인생의 보편적인 진리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여행은 유의미한 것이 된다. 그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보편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또 다른 접근법일 수 있다. 선구자들은 그 고민에 이렇게 답하였다.

 

 

1. 이탈리아 기행 1,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펭귄클래식)

 

말하자면 여기에 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 갖고 있던 개념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신던 신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오면 제법 대단한 사람이 되며, 비록 그것이 그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특별한 개념을 얻게 된다. ()

나를 내부로부터 개조하는 재탄생 작업이 늘 계속된다. 이곳에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배우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학창 시절로까지 되돌아가 그 많은 것을 버리고 모조리 새로 공부해야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확신을 갖고 완전히 배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수록 더욱 즐겁다.

 

- 이탈리아 기행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201~203


무엇이 대문호 괴테를 이토록 호들갑스럽게 만들었을까? 괴테는 1786년 새벽 3시에 카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와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했고, 1차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해서는 이런 편지를 써서 부쳤다. 괴테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이제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며 완전히 새로 태어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저 그리스 고전 미술품을 직접 보았으면 했던 이 여행이 이후 그의 인생과 예술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괴테는 아직 알지 못했던 때이다. 야반도주하듯 몰래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담아 지인들에게 부쳤던 이 편지들은 훗날 이탈리아 기행으로 출간되었다.


괴테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볼 필요가 있다. 177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출간 이후 유명인사가 된 괴테는 이후 장관 신분으로 바이마르에 머물면서 10년간 국정에 매달리게 된다. 그 기간에도 집필 활동은 지속했지만 별다른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했고, 대신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바이마르에서 자신의 예술 정신이 고갈되고 있음을 느낀 괴테는 요양 차 잠시 머물기로 했던 카를스바트에서 예고 없이 자취를 감추고는 오랫동안 미뤘던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괴테가 마흔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괴테의 여행은 베로나, 베네치아, 볼로냐와 피렌체를 거쳐 로마로 이어진다. 로마에 도착한 기쁨은 괴테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는 데, 그는 어서 빨리 로마에 오고 싶은 마음에 피렌체에 겨우 3시간만 머물렀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정말이지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곳(로마)을 직접 보고 현장에 와야 나을 수 있는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데 급기야는 라틴어 책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고 이탈리아 지역을 그린 어떤 그림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나라를 보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강렬했던 것이다.

- 같은 책, 168~169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매료된 괴테는 로마와 나폴리까지만 둘러볼 생각이었던 애초 계획을 수정한다. 시칠리아 섬까지 여행한 다음 다시 돌아온 로마에서, 괴테는 이곳에 장기간 체류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른다. 친분이 두터웠던 화가 요한 빌헬름 티슈바인의 집에 머물면서 그에게 그림 수업까지 받으며. 한편으로 집필 활동도 재개하게 되는데, 미완으로 묵혀두었던 이피게니에에그몬트등을 완성한 것도, 그의 대작 파우스트가 본격적으로 구상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말하자면 깨달음의 나날들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사물들의 본질과 그 관계들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오페라는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곤 내적이고 영원히 진실한 것밖에 없습니다.

- 이탈리아 기행2, 185~186

 

2년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괴테는 바이마르에 돌아왔지만, 신뢰와 우정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냉대받는다. 실러를 만나기 전까지 괴테의 고독한 생활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후 확립된 그의 고전주의 경향이 고스란히 이탈리아 여행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괴테의 모습은 요한 빌헬름 티슈바인이 그린 <캄파냐 평원의 괴테(Goethe in the Roman Campagna)>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기행의 국내판 표지로도 널리 쓰이고 있는데, 괴테의 단정한 옷차림과 심각한 표정에서 이 여행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티슈바인이 그린 또 한 장의 그림에서 다른 일면을 발견하게 되는데, 후자가 당시 괴테가 시달렸던 여행 충동을 더 잘 드러내는 듯하여 보는 마음도 뜨거워 진다.


<로마 코르소에 있는 숙소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괴테(GOETHE AM FENSTER DER RÖMISCHEN WOHNUNG AM CORSO)>, 요한 빌헬름 티슈바인, 1787

 

2.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동북아역사재단)

 

체호프는 왜 사할린에 갔어요.” 후카에리가 물었다.

그 점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지?”

그래요. 당신은 그 책을 읽었어요.”

읽었지.”

어떻게 생각했어요.”

체호프 스스로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을 거야.” 덴고는 말했다.

어쩌면 그저 단순히 그곳에 가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지도에서 사할린 섬의 모양을 바라보다가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뭉클뭉클 솟아났다든가. 나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어. 지도를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는 꼭 가봐야겠다 싶은 장소가 있으니까. 그리고 왠지 몰라도 대개의 경우 그런 장소는 멀고 험한 곳이야. 그곳에는 어떤 풍경이 있는지,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튼 그런 게 못 견디게 알고 싶어져. 그건 홍역 같은 거야. 그래서 남에게 그 열정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 순수한 의미에서의 호기심. 설명할 수 없는 인스피레이션. 물론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사할린까지 여행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만큼 힘겨운 일이었으니까, 체호프의 경우에는 단지 그런 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 1Q84 1(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546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을 언급한 한 대목이다. 사할린 섬은 작중에서 가상의 액자소설인 공기번데기와 함께 중요하게 인용되는 책 중 하나다.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명세만큼, 그가 소설에서 언급한 책이나 음반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이 벌어지곤 하는데, 실제로 사할린 섬역시 일본에서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것이 수십 년 만에 재출간 되었고, 몇 년 뒤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오랫동안 물속에 가라앉아있던 체호프의 여행기를 뭍으로 끌어낸 셈이다.


1Q84에서 언급한 대로, 체호프는 뚜렷하게 알려진 이유도 없이 1890년 사할린 섬 여행을 강행한다. 서른 살의 나이로 이제 막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시점이었고, 당시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이 발병한 다음이었다. 사할린은 러시아 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변방 중의 변방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인들이 유형살이를 하는 유형지였다. 아직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가설되기 전이라 시베리아 횡단 여행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마차를 열 걸음 정도 끌다가 말들은 멈춰 서버렸다. 이제는 아무리 채찍을 가해도 호통을 쳐도 더 이상 꿈쩍도 안한다. 어쩔 도리가 없어 다시 배수로를 향해 도로에서 내려서서 다시 다른 길을 찾는다. 그러고 나서 또 생각하고 도로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이러기를 끝이 없다.

힘겹게 죽을힘을 다해 나아가지만 상황은 더 극심해질 뿐이다. 마치 여기가 지구의 곰보 자국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커먼 곰보길이 유럽과 시베리아를 잇는 유일한 혈관이라니! 이 혈관을 따라 시베리아로 문명이 흐른다고들 하니! ()

25kg의 차 꾸러미들을 실은 수많은 짐수레가 바로 이 도로를 따라 느릿느릿 움직이고 바퀴는 깊은 홈에 반쯤 빠져 있고 작고도 여윈 말들이 목을 빼며 안간힘을 다한다. 그 짐수레 옆을 따라 짐수레꾼들이 가고 있다. 진흙탕 속에서 말을 도와가며 다리를 끌고 있다. 이들은 벌써 오래전에 기력을 소진했다. 그런데 또 짐마차가 멈춰버린다. 무슨 일인가. 한 짐수레의 바퀴가 부서졌다. 싫다. 더 이상 보지 않는 게 낫다!

-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동북아역사재단) 101

 

엄밀히 말해 사할린 섬책 전체가 여행기인 것은 아니다. 1부에 해당하는 시베리아에서만이 여행기 형식을 갖추고 있고, 사할린에 도착한 다음인 2부의 내용은 당시 유형지였던 사할린의 자연·주거환경과 유형수들의 생활을 조사한 보고서 형식을 띠고 있다. 작가와 의사직을 겸하고도 여전히 가난했던 체호프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사와 탐사 보고서 계약을 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가 체호프의 유려한 문장으로 쓰인 기행문을 기대하고 본다면, 특히 2부는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유형수의 삶이라는 것이 몹시 비참했던 만큼, 절제된 문장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체호프의 호기심과 연민만큼은 빛을 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할아버지도 없고 할머니도 없고 오래된 세간이나 할아버지의 가구도 없다. 세대에 과거와 전통이 결핍되어 있는 셈이다. 성상을 안치하는 곳도 없고, 있다고 해도 등이나 장식도 없이 매우 빈약하고 컴컴했다. 즉 관습이 없는 것이다. 세간은 우연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마치 자기 집이 아닌 듯한 느낌, 이제 막 도착했기에 자기 것을 갖추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고양이도 없고 겨울밤에도 귀뚜라미 소리 들을 일도 없으니 중요한 점은 고향이 없다는 것이다.

- 같은 책, 161

 

자기 건강을 담보로 했던 이 사할린 섬 여행이 체호프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밝히려는 전공자들의 시도는 계속 있었다. 사할린 섬 여행 이후의 작품을 분석해서 그의 변화된 세계관을 살펴보거나, 인간을 대하는 달라진 태도를 분석한 시도도 없지 않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전까지 유명한 유머 작가였던 체호프가 이후 6호실, 상자 속의 사나이, 공포같은 진중한 주제의식을 드러낸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할린 섬 여행은 체호프의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3. 헤세의 여행

(헤르만 헤세 / 연암서가)

 

현대인이 어떻게 여행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다룬 많은 책과 소책자가 있지만, 내가 알기로 좋은 책은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유람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 왜 그 여행을 하는지 아는 것이 좋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여행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도시인이 여행하는 것은 여름에 도시가 너무 덥기 때문이다. 그가 여행하는 것은 공기를 바꾸고, 다른 환경과 사람들을 봄으로써 일에 지친 피로를 풀고 푹 쉴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가 산으로 여행하는 것은 자연과 땅, 식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해되지 않는 갈망으로 그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로 여행하는 것은 그것이 교양 여행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그의 모든 사촌과 이웃도 여행을 가는데다, 또 여행을 갔다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무척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헤세의 여행(헤르만 헤세 / 연암서가), 32

 

여행의 시학(詩學)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헤세는 다소 신랄하게 당시의 여행 행태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밌는 것은 여행객에 대한 이러한 비난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의미도 목적도 없는 여행이 유행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헤세는 이 모든 동기를 이해할 만하다고 눙치고는, 그 자신의 여행 시학을 정신적 관계를 맺는 체험으로 한정한다. 다시 말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데에, 새로 획득한 것의 유기적인 편입에,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지구와 인류라는 큰 조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증진에, 옛 진리와 법칙을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서 재발견하는 데에 여행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방랑과 구도의 소설가다운 발상이다.


헤세의 여행은 헤세가 생전에 남긴 많은 에세이 중, 여행에 관련된 글과, 실제로 여행하며 쓴 여행기를 묶은 책이다. 24세부터 50세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으니, 한 권의 여행 책으로서는 시간 폭이 넓은 편이다.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헤세와 그의 사유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24세 때 처음 떠난 이탈리아 여행, 건강 문제로 바덴에서 요양 생활을 했던 시기, 그의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도 여행, 중년의 나이로 우울증에 시달리며 스위스에 칩거하던 시기, 늦은 나이에 떠나게 된 뉘른베르크 여행이 차례대로 소개된다. 여행에 관해 그가 처음 가졌던 도발적인 생각이 점차 완숙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독자 역시 마음이 누그러지고 만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며칠 정도나 귀향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추측건대 아직도 오랫동안 여행할 것이다. 아마 겨울 내내, 어쩌면 평생 동안. 결국은 곳곳에서 이런저런 친구를 만나 저녁이면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때로는 나의 천사가 어느 어스름한 시간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나리라. 또 내 청춘의 성소들이. 그리고 어디서나 내 자유의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거나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단지 슬퍼하지만 않고 웃으리라. 내가 가끔 그렇게 생각했듯이, 아마 내 안에 어떤 해학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면 나는 잘 해나갈 것이다. 그 해학가가 아직은 완전히 발전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내가 보기에 완전히 나빠진 것도 아니다.

- 같은책, 470~471

 

4.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여행을 하는 행위가 그 본질상 여행자의 의식의 변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 움직임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은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행기라는 것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하는 것을 (차례가 거꾸로 되더라도 좋으니까) 복합적으로 밝혀 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정말 신선한 감동은 거기서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사), 8~9

 

이 책은 소설가가 쓴 글을 모아놓은 것치고는 유별나게 실용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머리말을 제외하고는 이런 실용적인 제목에 본문 전체가 호응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우선 서두에 여행기를 쓰는 것에 대해 말문을 열고는, 실제로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 여행기를 썼는지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할까. 하루키에게 받는 여행기 작문 수업을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 실망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작가의 정수는 글 속에 담겨 있는 법이다. 그의 글을 직접 읽는 것이 가장 훌륭한 작문 수업인 셈이다. 소설가로 유명한 하루키이지만, 에세이스트로서의 면모도 그 못지않다.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는 여러 월간지 연재를 겸하며 다녀온 여러 여행기를 담은 책이다. 그러나 이 일련의 여행에는 일말의 연결성도 없다. 미국 작가들이 사는 도시 이스트햄프턴 방문, 일본 무인도 체험, 멕시코 버스 여행, 우동 맛집 여행, 격전지였던 몽골의 노몬한 여행, 아메리카 대륙 횡단 여행, 일본 도보 여행 등, 여행지도 여행의 방식도 결코 일관된 법이 없다. 아무래도 여행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모아놓은 탓이겠지만, 이러한 무질서함이 어쩌면 여행이 본질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루키가 앓고 있는 여행 충동의 정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여겨볼 것이 바로 무인도 여행과 멕시코 여행이다. 이 두 여행기는 우리는 왜 떠나는가?’, ‘왜 하필 이곳인가?’ 라는 어떤 근원적인 질문에 나름 호응하기 때문이다.


골수 여행자라면 무인도 여행에 대한 낭만을 조금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인도는 이제는 지구 상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오지모험이 여전히 거기 있을 거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다. 하루키 역시 우연한 기회로 무인도 여행을 떠나게 됐지만, 그곳에서 하루키를 반긴 것은 오지의 낭만이 아닌 온갖 벌레였다. 결국 하루키와 일행은 하루 만에 여행을 포기하고 만다. 이 여행이 실패하기까지의 과정을 하루키는 소상히도 적는다. 멕시코에서의 좌충우돌하는 버스 여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루키는 예기치 않은 사고와 분쟁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라 믿었다.

 

어쨌든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는 행위에는 광기(狂氣)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뭔가 불합리한 것이 내포되어 있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만 하는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며, 게다가 굉장히 피곤한 일인데.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분쟁에 말려드는 경우도 있다. 아니 분쟁에 말려들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

건너 본 적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본 적이 없는 높은 산맥이 줄을 잇고 있다. 호수나 하구는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변변치 않은 사막조차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보낸다.

() 아드레날린이 굶주린 들개처럼 혈관 속을 뛰어 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피부가 새로운 바람의 산들거림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았다.

문득 떠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일단 그곳에 가면, 인생을 마구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일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같은 책, 179~180

 

그러면서도 하루키는 실제로 그런 일은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우리 인생은 몹시 허술한 듯하면서도, 허술한 상태 그대로 견고해져 버려서 그리 쉽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괴테나 헤세와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하루키처럼 수차례 여행을 반복하다 보면 인생이 휘청하는 순간이 한 번쯤은 오지 않을까? 여행이란,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한 것 아닐까?

 

5. 인도 방랑

(후지와라 신야 / 작가정신)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후지와라 씨는 왜 인도에 가셨던 거지요?” ()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십 수 년 동안 식상할 만큼 자주 내게 던져진 범용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

젊어…… 그림자가. 역시 그림자에도 나이가 있는 모양이야. ()

그 청년 시절의 나는 어쩐지 병을 앓고 난 것처럼 보였다. ()

청년은 뭔가에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청년은 태양에 지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은 대지에 지고 있었다. ()

청년은 자신을 둘러싼 온갖 것에 지고 있었다.

청년은 지친 눈은 표정을 상실한 듯 보였지만, 내리쬐는 태양에 눈부시게 백열하는 눈앞의 지면을 멍하니 응시할 만큼의 의지는 간신히 남아 있었다. ()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온갖 것들에게 엉망으로

지기 위해서 갔던 게 아닐까.

……처음에는.

아니, 지기 위해서…… 말인가요.

- 인도 방랑(후지와라 신야 / 작가정신), 23~24

 

후지와라 신야가 196924살의 나이로 모든 걸 버리고 떠난 인도 여행, 그 고행의 산물인 인도 방랑은 어느새 여행서의 바이블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가슴에 인도 방랑을 품은 채 배낭을 메고 인도로 떠났다. 그러니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 여행에는 어떤 의미가 필요했던 것이다. “왜 인도로 떠났습니까?” 이 질문은 마치 고문처럼 오랫동안 후지와라 신야를 괴롭혔다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 왠지 반감마저 들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 자체로도 복잡한 인간의 행위가 그런 단순명쾌한 질문에 의해 재단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찾아온 청년 둘의 모습을 보고, 청년의 그림자에 마음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렇게 고백하고 만 것이다. 지기 위해서, 라고. 청춘은 심지어 지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떠난다고.


여행서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담을 담백하게 담은 책과 이 여행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는(그러면서 사진까지 덧붙인) 책이다. 경험 상 대체로 훌륭한 여행 책은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담백한 진술 안에도 여행의 의미는 십분 발한다. 의미 부여가 과도하면 그 책은 낯뜨거워지고 만다. 앞서 소개한 책들은 전부 전자에 해당할 텐데,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 방랑은 사실 후자에 더 가까운 책이다. 그러면서도 최고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좋은 것도 보았다. 거대한 바냔나무에 깃들인 숱한 삶을 보았다. 그 뒤로 솟아오른 거대한 비구름을 보았다. 인간들에게 덤벼드는 사나운 코끼리를 보았다. ‘코끼리를 정복한 기품있는 소년을 보았다. 코끼리와 소년을 감싸 안은 높다란 을 보았다.

세계는 좋았다. 대지와 바람은 거칠었다.

꽃과 나비는 아름다웠다.

여행은 무언의 바이블이었다. ‘자연은 도덕이었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침묵에서 나온 이 나를 사로잡았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나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내 몸에 그것을 옮겨 적어보았다.

- 같은 책, 5~11

 

인도 방랑은 후지와라 신야의 글과 사진이 어우러진 여행서이다. 동일한 형식으로 티베트 방랑, 동양기행, 아메리카 기행등을 펴냈고,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는 풍기는 대작가가 되었다. 그 글의 특징은 여행 중에 여행자가 경험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심경을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해 내는 데 있다. 어떤 문장은 거의 시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그런 점 때문에 후지와라 신야는 청춘여행론의 구루(인도에서 스승을 지칭하는 말)로 추앙받는 듯하다.


그는 이제 열병과도 같았던 그 시기를 견뎌낸 72세의 노년 작가가 되었다. 인생의 낮잠이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등의 근간에서도 확인되듯, 그의 관점도 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옮겨갔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청춘이 끝나버렸다고 말하면 지나친 걸까? 아직 뜨거웠던 청춘의 흔적들이 책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 그렇게 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책들은 청춘이 배낭을 메고 떠나도록 여전히 청춘의 등을 떠밀고 있으므로.

 

 


그들은 왜 떠나는가?’ 라는 질문을 앞세우고 몇 권의 여행 책을 살펴 보았다. 대부분이 대문호라고 부를 만한 작가의 여행기였다. 해답을 빨리 얻고자 다분히 의도한 선정이었다. 그러나 왠지 석연치 않다. 대작가들마저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행지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만을 잔뜩 발견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왜 떠났는지 그들 자신도 잘 모른다는 점이다. 애당초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떠나는 이유가 아니라 떠나는 그 자체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읽어 보자. 보들레르는 여행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여행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질문은 잠시 멈추고, 이 시를 음미해 보려 한다. 파리의 우울에 수록된 <이 세상 밖이면 어디라도>의 일부이다.

세상살이라는 병원에서, 병든 자신의 영혼을 달래고자 보들레르는 리스본이며, 로테르담이며, 바타비아로의 여행을 권한다. 그러나 영혼은 대답이 없다.

 

()

결국 자네는 자네의 고뇌 속에서만 만족할 정도로 무기력해진 건가? 그렇다면 죽음과 유사한 지방으로 도망가자. 내가 일을 맡도록 하지, 불쌍한 영혼같으니! 토르네오로 갈 짐을 꾸리자. 더 멀리, 발트 해 끝자락까지, 가능하다면 삶으로부터 더 멀리 가자. 극점에 정착을 하자. 그곳에서는 햇빛이 땅을 비스듬하게만 스치지. 또 빛과 밤의 느린 교차가 다양함을 없애고 죽음의 반쪽인 단조로움을 늘려줘. 거기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어둠에 몸을 담글 수 있을 거야. 지옥의 폭죽이 반사되듯 북극광이 때때로 분홍 빛다발을 보내줄 동안 말이야.”

결국 내 영혼은 폭발했고 분별있게 내게 외쳤다. “어디든! 어디든지! 이 세상 밖이면 어디라도!”

- 샤를 보들레르, <이 세상 밖이면 어디라도>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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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에는 저마다 합당한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부엌 싱크대나 선반에 어울리고, 신발은 신발장에 들어가 있을 때 가장 보기 좋다. 옷을 위한 합당한 공간은 소파나 의자 등받이가 아닌 옷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때때로 게으름은 물건에 합당한 장소가 어딘지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책도 집에서 합당한 공간을 찾지 못해 애물단지 취급을 당하는 물건의 대표격이다. 물론 책을 위한 공간이라면 책장이라는 훌륭한 장소가 있지만, 왠지 이 책장 역시 자신에게 합당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거실 구석이나 창고 용도의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곤 한다. 제 갈 곳을 찾지 못한 물건들이 전부 이 책장 몫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마저, 책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데 골머리를 앓곤 하는데, 이 경우는 책이 너무 많아서 벌어지는 문제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나. 마음이 아프다고 느끼면서도.” 요시다 다쿠로의 노래 한 소절이 지금 내 마음에 절절히 와 닿는다. 마음이 아픈 것은 나의 장서 상태 때문이다. 책이 늘어도 너무 늘었다. 책장에 꽂아둔 책과 거의 같은 양의 책이 계단에서 복도, 책장 앞, 책상 주변까지 쏟아져 쌓일 대로 쌓였다. 덕분에 몸을 슬쩍 움직이는 일조차 여간 고역이 아니다. 바닥에 흐트러진 책과 책 사이 좁다란 공간에 한쪽 발을 비집고 들어서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겨우 앞으로 나간다 해도 쌓아올린 책의 탑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 장서의 괴로움(오카자키 다케시 / 정은문고)

 














아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은 책이 제 공간을 갖지 못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아무렇게나 쌓아둔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집이 무너져버렸거나, 무너지기 직전인 사례가 책에 잇달아 소개된다. 물론 목조건물이 많은 일본의 상황임을 감안해야겠지만, 2층 바닥에 쌓은 책의 무게 때문에 바닥이 꺼져 1층으로 쏟아져 내리는 대목에선,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애서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을 방지하려면 더 크고 튼튼한 집으로 이사하거나, 장서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대개는 현실적인 이유로 후자를 택하게 될 텐데, 다케시 역시 적당한 장서량은 5백 권이라 결론 내린다. 그래서 이 책 후반부의 내용은 수많은 장서를 어떻게 처분하고 줄일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는데, 책 제목인 장서의 괴로움장서가의 괴로움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다.


책에 공간이 중요한 것은, 책이 지닌 독특한 물성 때문이다. 흔히 책이라고 하면 책 자체보다는 그 내용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이 쓰인다면, 주로 저자와 책의 내용에 대해 말하지, 제본 상태나 무게, 질감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책의 그러한 물성을 무시하는 이들은 결코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떨 때는 책의 물성을 내용보다 더 신성 시 하기도 하는데, 사실 그건 애서가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공유되는 비밀이기도 하다. 체면 때문에 겉으로는 책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책을 읽지 않고 애지중지하여 고이 모셔두는 경우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을 터이다. 이런 연유로, 책 이야기를 하면서 책을 위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게 꼭 서재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서재가 아닌 곳에서 더 많은 책들과 만나기 마련이다.

 

 

특별한 가게, 서점

 

서재를 제외하고, 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이 바로 서점일 게다. 특히 과거에는 책이라면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을 만큼 불가결한 장소였다. 인터넷 판매가 대중화되면서 그런 독보적인 지위는 거의 잃었지만, 서점이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서점은 책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인 셈인데, 책이 그냥 상품이 아닌 이유로 서점 역시 그냥 가게라 할 수는 없다. 책이라는 특별한 물건을 파는 곳이고, 그래서 서점은 특별한 장소가 된다.

 

백화점에 들어가 한 30분쯤 새 재킷을 입어보기도 하고 그 옷을 걸친 채 막 돌아다녀보라. 다음 주 수요일에는 다시 그곳에 가서 옷을 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같은 행동을 되풀이해보라. 피자집에 들어가 혹시 피자 한 조각을 맛볼 수 있는지도 물어보라. () 가게 주인이 값도 치르지 않고 먹어 치우는 나 같은 손님을 과연 용서할까?

서점은 다르다.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와 느긋함은 거기서 파는 상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책은 느림을 동반한다. 시간을 요한다. 글을 쓰는 일, 책을 펴내는 일, 읽는 일이란 죄 늘어지는 일이다. () 게다가 책을 구입한 뒤에도 그걸 읽는 독자는 며칠이나 몇 주, 때로는 몇 달에 걸쳐 한 자리에 눌러 앉아 몇 시간씩을 보낼 작정을 해야 한다.

- 노란 불빛의 서점(루이스 버즈비 / 문학동네)

 














서점에서 10, 이후 출판사 직원으로 7년을 일 했고, 지금은 작가가 된 루이스 버즈비가 쓴 노란 불빛의 서점중 한 대목이다. 서점이 다른 어떤 가게와도 구별되는 특별한 장소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서점에 관한 다양한 경험담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랫동안 서점 직원 일을 하면서 그는 많은 서점이 개점하고 폐점하는 걸 지켜봤고, 출판사 외판원이 되어 고객(서점 주인과 독자)과 만나면서 자연스레 자기 안에 이야깃거리를 담게 된 것이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도, 맹목적인 탐서주의자도 아닌, 책과 더불어 십수 년을 살아온 이의 경험과 애정에서 비롯된 말들이니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대목이 많다.


그의 말마따나 서점이 다른 어떤 가게와도 구별되는 이유는, 거기서 파는 상품인 책에서 비롯된다. 책은 만드는 데도 많은 시간이 들지만, 구입하기 위해 살펴보는 데도 많은 시간이 들고, 구입 한 이후에도 사용에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된다. 책의 고유한 시간성이 책이 놓인 공간까지 지배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애서가들이 서점이라는 공간에 특별한 애정을 갖는 것도,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한데, 때로는 애정이 지나쳐 루이스 버즈비처럼 서점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도 더러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을 애정만으로 한다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서점은 현대의 대표적인 사양 산업이다 보니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다.

 

소액의 퇴직금으로 시작할 수 있는 서점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퇴직금이 없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큰일이겠지만, 10년이고 20년이고 서점에 다닌 사람들이 작은 서점 하나 가질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계속해서 서점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 사람들이 시작하는 서점이 만약 전국에 1천 곳 정도 생긴다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재미있잖아요. 제가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해보지 않으면 바뀌는 게 없지 않을까요?”

() 정열을 버리지 못하고 시작하게 된 작은 책방. 그런 서점이 전국에 1천 곳 생긴다면 세상은 바뀔 수도 있다. 그녀가 말한 이상이 기분 좋은 울림을 남겼다.

- 서점은 죽지 않는다(이시바시 다케후미 / 시대의창)

 














이 책은 개인 서점을 운영하거나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찾아가 인터뷰한 모음집이다. 서점에 관한 거개의 책들이 서점이라는 공간 자체에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서점 보다는 그 공간을 창출해낸 이들의 말과 생각에 주목한다. 서점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걸 만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건데, 이 역시 옳은 전략처럼 보인다. 우리 눈에 서가의 형태나 책이 진열된 방식에 특별한 의도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책을 분야 별로 구분해서 신간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놓는 정도가 아닐까 싶지만, 생각보다 서가 진열에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는다. 한 서점주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데, 그 도중에 시선을 잡아끌 포인트가 될 만한 책을 꼽기도 하고, 일부러 팔고 싶은 책과 팔리지 않을 책을 함께 꽂아서 고객이 비교해 보게끔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그냥 독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 다리가 필요한데, 서점과 서점원이 그 역할을 해낸다. “기본적으로 책에 관한 질문을 받았는데 만약 모르면 창피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역 주민들에 대한 서점의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작은 도시 돗토리에서 서점을 운영 중인 나라 도시유키의 말이다.


이 책에 소개되는 서점 장인들은 저마다 책에 대한 이상을 하나쯤 갖고 있다. 서점 운영이 이상 없이는 버티기 일이기도 하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이 내세우는 전략을 보면, 그 이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인다. 체인서점에서 16년을 일하고 출판사에 취직했으나 채 1년도 안 되어 관두고 자신의 서점을 개업한 하라다 마유미는 책의 외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책의 내용을 다루는 것은 다른 매체나 전문가가 더 잘할 수 있으니, 서점은 서점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책의 외형(제본 상태, 감촉, 무게,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서점의 마지막 생존 전략이다. “제본한 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서점은 앞으로 정말 몇 집밖에 살아남지 못할 테고, 남아야 할 필요조차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처럼, 책의 물성이 가장 돋보이는 곳이 바로 서점 아니던가. 책의 물성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서점은 곧 사라질 공간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기도 한다.

 

산토리니 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캐나다인과 미국인 친구가 20대에 시작하였다는 이 서점은 처음에는 그들이 직접 만든 침대와 책장뿐이었다고 한다. 기후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젊은이들이 나무판자와 해변에서 주워 온 돌들로 조금씩 그들의 취향대로 꾸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밧줄로 만든 계단은 천장 가까이에 있는 침대로 올라갈 때 쓴다. ‘철학의 탑이라는 이름의, 철학서만 꽂아둔 가느다란 책장이 좁은 가게 안에 높게 솟아 있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시미즈 레이나 / 학산문화사)

 












산토리니 섬 북쪽 끝에 위치한 서점, ‘아틀란티스 북스를 소개하는 한 대목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은 세계 각지의 서점을 여행하며 소개하는데, 무엇보다 서점이 빗어내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다. 다만 이 아름다움이 지나쳐, 열악한 서점 환경에서 익숙한 우리로서는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저 먼나라의 이야기로 치부하지는 말자. 자연과 시간과 사람이 함께 빗어낸 이 아름다운 유산을 거저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이 서점을 아름답게 만드는지 보고 배울 여지가 있다.

 

공공의 도서관

 

애서가들이라고 해서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 같지는 않다. 그 방식을 여기서 다 나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한 가지 물음으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엿볼 수 있다. “서점과 도서관 중 무엇을 좋아합니까?” 이 질문은 그러니까, 서점을 좋아하는 것과 도서관을 좋아하는 것이 책을 사랑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는 걸 전제하는 말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이렇다. 서점은 책을 사는 공간이고,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공간인데, 책을 사는 것과 빌리는 것이 또 다르다는 말이다. 사는 것이 책의 소유를 전제하는 행동이라면, 빌리는 것은 거기 담긴 내용을 섭렵하려는 데 더 방점 찍는 행위다. 서점과 도서관이 서로 다른 역사와 분위기를 갖게 된 것도 두 행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책을 구입하는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는 점이다. 서적 수집이 취미였다는 마키아벨리의 아버지가 평생 수집한 책은 겨우 40권 정도였다고 한다. 과거에 책은 쉽게 구입할 수 없는 고가의 제품이었던 데다가, 희귀하기까지 했다. 장서의 괴로움은 근대의 산물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도서관을 필요로 했다.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을 보관하여 이를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거기 담긴 지식을 전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가 도서관에게 남긴 지상과제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단순히 불멸성만을 목표로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과거에 기록된 것, 또한 기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 기록들은 미래의 기록에 참조되고, 끝없이 이어지는 독서와 해석은 다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독서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책을 무한정 보관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책을 읽는 사람들의 작업장을 지향했다.

- 밤의 도서관(알베르토 망구엘 / 세종서적)

 













독서의 역사(알베르토 망구엘 / 세종서적)를 통해 책과 독서의 역사를 일별한 바 있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또 다른 역작이다. 밤의 도서관은 도서관의 역사를 더듬는 시도라 요약할 수 있다. 어느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 힘든 도서관을 역할을 신화’, ‘공간’, ‘일터’, ‘생존’, ‘망각등의 열쇠말로 도서관이 문화사에 미친 영향을 짚어 본다.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 주변에 있는 것들의 윤곽이 보이면서 조금씩 눈앞이 밝아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낯선 세계로 떨어져 눈앞이 캄캄한 때, 도서관이 바로 서서히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망구엘의 생각이다.

 

밤이면 내 눈과 손은 일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깔끔한 선반에서 두서없이 움직이며 무질서를 회복한다. 어떤 책을 보다가 갑자기 다른 책을 떠올리며, 다른 문화와 다른 세계를 잇는 관련성을 찾아낸다. () 아침의 도서관이 세상의 질서를 엄격하게 지키고 이를 또한 당연히 바라는 공간이라면, 밤의 도서관은 세상의 본질로 흥미진진한 혼란을 즐기는 듯하다.

- 같은 책

 

도서관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알 수 있듯이, 최초의 도서관은 기록 보관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도서관과 서점이 가장 대비되는 지점이 바로 이 공공성에 있다. 물론 공공성 자체는 책의 근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서점도 상업공간이기 이전에 책의 보급이라는 공공의 목적에 일부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도서관과 만날 때 공공성이 극대화 된다는 걸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런 특성은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적인 현대 사회에서 오히려 뚝심을 발휘한다. 상업 공간인 서점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점점 쇠퇴해 가는 반면, 도서관은 공공기관으로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물론 도서관이라고 공공성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공공성의 가치는 선언으로 그치지 않았다. 문을 연 뒤 눈에 보이는 실체로 다가온 도서관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 가슴을 뛰게 했던 도서관의 정신이 고스란히 삶 속에 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책의 힘, 책 읽는 사람들의 힘, 책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공간의 힘, 그 모든 것이 소소한 일상의 삶터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서 자발성, 다양성, 일상성같이 현실을 변화시킬 원리들을 만났고, 북돋움이라는 덕목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책을 나누는 일은 꿈을 나누는 일이었다.

- 이용자를 왕처럼 모시진 않겠습니다(박영숙 / 알마)















사립 도서관인 느티나무도서관을 16년째 운영하고 있는 박영숙 관장이 내놓은 책, 이용자를 왕처럼 모시진 않겠습니다의 한 대목이다. 느티나무도서관은 사립 도서관이면서 공공성을 최고의 기치로 내건 것이 독특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왜 느티나무도서관이 공공성을 견지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지 금방 깨닫게 된다. 공공도서관은 이미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공공성을 위협받을 일이 거의 없다. 적은 운영비가 걸림돌이긴 하겠지만, 공공도서관이라는 정체성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사립 도서관이 공공성을 잃는다면, 이미 도서관이라 부르기 힘들어진다. 이용자를 왕처럼 모시지는 않겠습니다에는 사립 도서관의 그러한 고민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다. 거의 동일한 시기에 나온 꿈꿀 권리(박영숙 / 알마) 역시 박영숙 관장이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만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사연이 담겨 있다. 느티나무도서관은 도서관의 주된 이용자인 학교밖청소년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인턴십과 마이크로 크레딧(미소금융)을 운영 중이다. 이 두 권의 책은, 진정한 공공 도서관의 모습은 바로 이래야 한다는 장엄한 선언처럼 들린다.

 

장서의 괴로움으로 이 글을 시작하긴 했지만, 책을 위한 합당한 공간을 찾는 일이 과연 그리 어려울까 싶다. 무심코 눈길이 닿는 곳에, 어렵지 않게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바로 책이 놓였으면 좋겠다. 다만 서점과 도서관은 전문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많은 장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서점과 도서관을 위대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책에 관해 여러모로 부족한 우리가 곧잘 신세 지게 되는 장소. 그곳에 가면 책이 뭔지 조금은 알게 된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장소인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삶이 그 곳에서 비롯된다. 제 갈 곳을 찾지 못한 책이 바닥을 뒹굴다 발에 차인들 무어 그리 대수일까. 바로 거기가 책과 나를 위한 공간인 것을


다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손 가득 들고 온 이 책들을 놓을 공간이, 조금은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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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책의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대개의 물건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책은 매체이기 때문에 사실 용도 자체는 다양하다 말할 수 있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거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또는 순수한 재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책들이 세상에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단 하나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읽히기 위해서라는. 읽는다는 것이 책이 지닌 다른 모든 목적에 앞서는 본질적이고 불가결한 행위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읽힌다는 것은 책에 있어서 거의 운명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불행하게도 읽힌다는 목적에 도달하는 책의 수가, 독자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너무 적다. 예외 없이,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항상 더 많은 법이다. 그래서인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읽은 책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내 책장과 타인의 책장, 그리고 도서관과 서점과 헌책방에 꽂힌 채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저 많은 책들에 비하면, 내가 읽은 책의 목록이라는 것은 너무 하찮아 감춰버리고 싶은 것이다


다소 소아적인 발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직 읽지 않은 책에게 느끼는 부끄러움과 욕심은 앞으로 계속 책을 읽게 만드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것대로 필요한 결여이다. 다행인 것은, 책은 그런 우리를 기꺼이 기다려준다는 점이다. 책이 특히 인내심이 각별한 매체임을 뒷받침할 근거는 아주 많다. 책은 원하기만 하면 흔히 구할 수 있고, 중간쯤 읽고 덮어 두었다가 언제고 다시 꺼내 읽을 수 있다. 또 책은 인쇄술의 발전에 따라 모양새를 바꿔 왔는데, 현대에 이르러 우리가 기원전 그리스에서 쓰인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책의 그러한 끈질긴 생명력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책이 기꺼이 우리를 위해 기다려줄 거라는 믿음이 아주 근거 없는 낙관만은 아니다.

 

책의 또 다른 운명, 분서

 

그런데 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금서의 역사이다. 어떤 책들은 당대의 이해관계에 따라 읽거나 출간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 금지될 뿐 아니라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이에 관해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례이지 않을까. 진시황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우면서 법치주의를 통치의 근본 원리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기에 이른다. 수많은 책을 불태웠고, 이에 반발한 유학자들을 생매장했다. 금서가 만들어지는 맥락을 아주 잘 드러내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이러한 분서(焚書)는 그저 과거의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로 이해해야 할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조직적인 분서가 이루어졌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악서(惡書) 추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량의 만화책들이 불태워졌고, 정부 주도로 수만 권의 만화책이 압수된 일이 있었다. 이 탄압으로 이후 한국의 만화 산업이 크게 퇴보했음을 두말할 것도 없다. 지배계층의 만화책은 불건전하다는 판단, 그러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분서 행위를 뒷받침했고,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했다. 분서 역시 독서만큼이나 독자의 자발적인 행위일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이것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우리의 또 다른 반응인 것은 아닐까.


금서의 역사를 쓴 베르너 풀트는 사회 구성원의 적지 않은 동조와 창작자 자신의 자기검열이 금서 행위에 크게 기여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들의 생각은 간단명료하다. 어떤 책은 나쁘고, 그 책을 읽는 것은 나쁜 행위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나쁜 행위는 근절해야 하고, 따라서 나쁜 책을 없애야 한다. 이런 논리는 아주 자연스러워서, 상황이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벌어지게 된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화씨 451은 정확히 그런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그리는 소설이다. 시스템은 간단하다. 모두들 책이 나쁘다고 생각했고, 책은 불태워야만 하는 것이었다. 구태여 읽어볼 필요도 없다. 책이 숨겨져 있다면, 당연히 그 집도 함께 불태웠다. ‘방화수(frieman)’는 바로 그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주인공 몬태그도 방화수의 일원이다.

 

 

화씨 451, 책이 불타는 온도


 













클라리세 매클런이 말했다.

, 이런 것 물어 봐도 될까요? 방화수로 일하신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내가 스무살 때부터니까, 십 년이 되었군요.”

그 동안 태웠던 책들 중에서 읽어보신 것은 없나요?”

몬태그는 웃었다.

그건 법을 어기는 거지!”

, 물론 그렇죠.”

보람있는 일이죠. 월요일에는 밀레이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우리의 공식적인 슬로건이죠.”

- 화씨 451(레이 브래드버리 / 황금가지) 22


화씨 451은 책이 금지된 미래 사회를 그린다. 디스토피아 소설이 그리는 미래 사회는 대체로 끔찍하기 마련인데, 이 세계는 좀 독특한 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소설 속 미래 사회의 끔찍함이란, 주로 주인공이나 인류가 겪는 육체적인 시련의 정도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인간이 기계의 에너지원으로 전락한 모습은 미래 사회의 끔찍함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장치가 된다. 하지만 화씨 451에서는 그러한 육체적인 시련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이들은 대체로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으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거대한 벽면 텔레비전으로부터 세속적인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고, 복잡한 일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책을 읽지 않으니 기억력이 감퇴하여 과거에 매달릴 일도 없이, 그저 현재 삶의 욕망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끔찍한 일인가? 충분히 끔찍하다. 이 미래 사회의 끔찍함은 육체적 시련이 아닌, 바로 정신적 빈곤에서 비롯된다. 경우에 따라 후자가 더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방화수인 몬태그는 자기 일에 만족하며 사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책을 불태운 날에는 '구릿빛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라, 나중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그 잔인한 미소가 얼굴 근육을 꽉 붙들고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옆집에 사는 이상한 소녀 클라리세를 만난 이후, 견고하던 그의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클라리세의 끊임없는 호기심과 질문으로 인해 몬태그는 자신의 삶에서 모순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아요.”

무슨! 사람들이 왜 얘기를 안 해?”

아니에요.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자동차며 옷들이며 수영장 얘기밖엔 안 해요. 그런 것들이 뭐는 얼마나 멋있냐는 둥 그런 얘기뿐이죠. 누구든 하는 얘기들은 다 똑같아요. 남들과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요.”

- 57, 같은 책

 

몬태그는 자신이 벽면 텔레비전 사이에 끼워 넣어진 전기 장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도 할 줄 알고 사람처럼 움직일 줄도 안다. 그러나 이 벽을 깨어 부술 수는 없다. 단지 팬터마임처럼 안타깝게 그녀(아내)가 자신에게로 돌아와 줄 것을 간절히 바라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이 두꺼운 벽을 건드릴 수가 없다.

- 81, 같은 책

 

그러던 어느 날 클라리세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클라리세의 부재에 대한 걱정과 자기 안의 모순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끼던 몬태그는, 늙은 여인의 책을 불태우던 현장에서 충동적으로 책 한 권을 품속에 감춘다. 그리고 그 늙은 여인이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책과 함께 자살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몬태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음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혼란에 빠진 몬태그는 방화소로 출근하기를 거부하며, 아내에게 이런 말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다.

 

꼭 어젯밤에 죽은 여자 때문만은 아니야.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 같은 책, 89

 

이 자각은 조금 새삼스러워 보인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죄책감 없이 책을 불태워 왔으면서 왜 새삼 불태운 책을, 그리고 그 책을 쓴 사람을 떠올려야 했을까. 몬태그는 처음에 이것을 책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뒤늦은 자각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이유가 꼭 책에 대한 관심이나 죄책감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주변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이해 불가능한 상태 때문에 더 힘들어한다. 클라리세와 아내, 책과 함께 불탄 노인, 책을 쓰고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웠지만, 그들이 누구고 어떤 심정인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상태, 즉 타인에게 거의 무지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이들을 견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의 집에 찾아온 이웃집 부인들을 향해 몬태그는 시를 낭독하며, 자신의 감정을 처음으로 폭발시킨다. 사람들의 무지와 무감각함, 텅 빈 자신의 삶이 너무도 끔찍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사랑이여, 우리를 진실되게 하라, 우리 서로를! 세상을.”


이 일로 그가 책을 가지고 있음이 발각되고, 몬태그의 변화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그를 밀고하고 만다. 이제 그는 책을 가진,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책이다

 

우리 전부가 똑같은 인간이 되어야 했거든. 헌법에도 나와 있듯 사람들은 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는 거지. 그리고 또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인간이 되도록 길들여지지. 우린 모두 서로의 거울이야. 그렇게 되면 행복해지는 거지. 움츠러들거나 스스로에 대립되는 판결을 내리는 장애물이 없으니까. 그래, 바로 그렇기 때문이야! 책이란 옆집에 숨겨 놓은 장전된 권총이야. 태워 버려야 돼. 무기에서 탄환을 빼내야 한다고.”

- 같은 책, 99

 

당신이 찾아 헤매는 건 책이 아니야! 당신은 낡은 축음기 음반에서, 낡은 영화 필름에서, 그리고 오래된 친구들에게서 책에서 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것들을 얻을 수 있지. 자연 속에서, 그리고 당신 자신 속에서 찾아보시오. 책이란 단지 많은 것들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의 한 종류일 따름이니까. 우리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들을 담아 두는 것이지. 책 자체에는 전혀 신비스럽거나 마술적인 매력이 없소. 그 매력은 오로지 책이 말하는 내용에 있는 거요. ()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삶의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

- 같은 책, 136

 

각각 방화서 서장 비티와 은퇴한 영문학 교수 파버가 몬태그에게 한 말이다. 비티와 파버는 이 책에 등장하는, 책에 관해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두 인물이지만, 책의 역할에 관해서는 적어도 동일한 관점을 가진 것 처럼 보인다. 책은 삶을 남다르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만 비티로 대변되는 지배계층은 이를 위험으로 간주한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책에 관해, 자신과 타인에 관해 거의 무지했던 몬태그로서는 책이 정말 위험한 것인지 판단할 자기 안의 관점이 없다. 도시로부터 탈출하는 극단적 상황에 처했을 때 잠깐 잊었던 이 질문을, 몬태그는 다시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 소설이 파버나 비티같은, 책에 대한 확고한 자기 철학과 관점을 가진 인물이 아닌 몬태그 같은 거의 무지한 인물을 중심에 놓은 것은 옳은 선택처럼 보인다. 우리 같은 평범한 독자가 그렇듯, 몬태그는 이제부터 배울 것이 아주 많다. 도시 밖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또 많은 책을 읽게 될 터이다. 읽을 책이 많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다.

그리고, 도시 끝에서 몬태그가 만난 사람들, 도시를 벗어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 무리는 기꺼이 몬태그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책이 담은 지식을 보관하여 다음 세대로 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책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그들은 그들이 한때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그 자신들이 바로 책이 되기로 한다.

 

당신이 바로 전도서가 되는 것이오. 이제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 되었는지 아시구료!”

하지만 잊어버렸습니다.”

아니오.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요. 당신이 머릿속에 가로놓인 벽돌은 흔들어 떨어뜨릴 방법이 있소.”

하지만 지금까지 기억해 내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모릅니다!“

그럴 필요 없소.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기억나게 될 거니까. 우린 다들 아주 정확한 기억력을 갖고 있소. () 몬태그,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싶지 않소?”

물론 읽고 싶지요!”

내가 바로 플라톤의 국가라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시몬스 박사가 바로 마르쿠스라오. () 사악한 정치 소설인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를 소개합니다. () 몬태그, 여기 있는 우리 전부가 아리스토파네서, 마하트마 간디, 석가모니, 공자, 토마스 러브 피콕, 토마스 제퍼슨, 링컨입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기도 하고.”

- 같은 책, 231~232

 

앞서 언급한 책에서 베르너 풀트는 금서의 역사는 단순히 억압의 사슬, 파괴된 작품과 살해된 작가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권력에 대항해 언어가 거둔 승리의 연대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책을 완전히 금하는 것으로 과연 그 연대를 끊을 수 있을까? 화씨 451은 그 결과를 똑똑히 보여주는 소설이다. 책이 완전히 금지된 사회에서, 결국 사람이 책이 된다는 것을.

 

 

위험한 책

 

화씨 451은 책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찬가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책에 관한 찬미가 아주 감격적인 어조로 가득 차 있는데, 몬태그는 전도서의 한 구절을 적절히 인용함으로써, 이 찬가의 대미를 장식한다.


책에 대해 쏟아내는 그런 찬가에 동의 못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감동적인 동시에 조금 낯 뜨거워지는 측면이 분명 있다. 소설의 앞부분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화씨 451은 비티와 파버라는 책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취하는 두 인물의 입을 통해 책의 양면성을 비교적 균형 있게 다룬다. 비티의 말처럼, 책에는 우리를 잠깐 동안에 주정뱅이로 만들어 버리고, 몇 줄만 읽고는 당장 절벽 끝으로 달려 나가게만드는 위험한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화씨 451에서 책의 위험성에 대한 비티의 경고는 그냥 경고에 그치고 만다. 이 서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책이 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이 금지된 또 다른 사회 다룬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화씨 451이 가지 않은 어떤 지점까지 나아간다.


중국에서 태어나 문화혁명을 겪고 프랑스로 건너가 작가가 된 다이 시지에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로 우리를 문화혁명기의 중국으로 안내한다. 1960년대 말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이자 혁명 기수인 마오쩌둥은 나라를 일대 변혁하는 운동을 벌였다. 모든 대학이 휴교했고 젊은 지식인들, 다시 말해 중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재교육을 받기 위해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주인공인 와 친구 도 재교육을 목적으로, 이곳 하늘긴꼬리닭산의 스무 개 마을 중 한 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

 

우리는 실망과 괴로운 경험을 해야 했다. 교과목이 공업과 농업에 국한되었고 기초 지식에 속하는 수학과 물리, 화학 등은 폐지되었기 떄문이다. 교과서 표지에는 챙 달린 모자를 쓰고 실베스타 스텔론처럼 굵직한 팔로 커다란 망치를 휘두르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노동자 옆에는 농민으로 위장한 여자 공산당원이 빨간 머플러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우리가 유일하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런 교과서들과 마오쩌둥의 붉은 어록밖에 없었다. 다른 책은 모두 금지되었다.

- 14~15,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다이 시지에 / 현대문학)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특히 문화혁명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은 더더욱 적었기 때문에,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에서 보게 되는 당시 중국 사회는 다소 충격적이다. 재교육 첫날, 도시에서 온 소년들을 화로 앞에 세워 놓고 가방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물건을 태워버리는 장면은 SF 소설인 화씨 451에 비견될 만하다. 이 때 의 바이올린도 부르주아 장난감으로 치부되어 불 태워질 뻔 했지만, ‘의 재치로 살아남는다. 악기를 연주해 보라는 촌장의 말에 는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하게 되고, 제목이 뭐냐는 촌장의 질문에 뤄는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라고 재치 있기 대답한다.


엘리트 부모를 둔 소년들이 재교육을 마치고 무사히 복귀할 확률은 3퍼밀(3,000 분의 1)에 불과했으니, ‘와 뤄가 하늘긴꼬리닭에서 평생을 촌장의 비위나 맞추며 살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나마 와 뤄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화를 이야기로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서, 한 달에 한 번 용징에 가서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또 이웃 마을 재봉사의 바느질하는 딸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명처럼 찾아온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발자크와 소년과 소녀

 

그 얇은 책의 제목은 위르쉴 미루에였다. () 나는 밥도 먹지 않고 밤이 이슥하도록 사랑과 기적으로 가득한 프랑스 이야기에 푹 빠져,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보냈다.

아직 청춘의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열아홉의 숫총각이 애국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에 관한 혁명적 장광설밖에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갑자기 그 작은 책은 침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 81, 같은 책

 

작가와 시인을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 둔 또다른 친구 안경잡이한테는 비밀가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 금지된 책이 들어 있었다. ‘와 뤄는 안경잡이의 안경이 깨졌을 때, 그의 일을 도와주는 조건을 책 한 권을 빌릴 수 있었다. 그 책이 바로 발자크의 위르쉴 미루에였다. 책에 완전히 매혹된 는 책 일부를 가죽 점퍼에 옮겨 적었고, 뤄는 이 가죽 점퍼를 들고 바느질 소녀를 만나 읽어준다. 소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녀도 즉각 발자크와 사랑에 빠졌다.

 

내가 발자크의 원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주고 나자 그애는 네 점퍼를 잡아채어 다시 한 번 읽었지. () 그애는 그 글을 모두 읽고 나더니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서 마치 성스러운 물건을 든 신자처럼 네 점퍼를 떠받치고 있었어. 발자크는 그애의 머리에 보이지 않는 손을 올려놓은 진짜 마법사야. 그애는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몽상에 잠김 채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지. 그러고는 네 점퍼를 자기가 입었어. 꽤 어울리더군. 그애는 자신의 살갗에 닿는 발자크의 말들이 행복과 지성을 갖다 줄 거라고 말했어.”

- 같은 책, 86~87

 

소녀에게 발자크를 읽어준 것을 뤄는 교육이라고 표현했다. 시골 처녀를 자신과 어울리는 도시처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 뤄의 생각이었다. “이 책들로 나는 바느질 처녀를 딴 사람으로 만들어놓겠어. 그애는 더 이상 단순한 산골 처녀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와 뤄와 바느질 소녀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바뀌어 갔다.

 

나는 장난삼아 연애한다는 기분으로 그 책(장 크리스토프)을 대강 훑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을 펼친 그 순간부터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 재교육까지 받은 나의 빈약한 머리로는 한 개인이 전세계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장난삼아 시작한 연애가 위대한 사랑으로 바뀌었다. () 글자 그대로 수백 페이지의 거친 강물이 나를 집어삼켰다. 내게 있어서 그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책이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니 침범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삶도, 세상도 더 이상 이전의 것과 같지 않았다.

- 같은 책, 152~153

 

읽을 것인가 불태울 것인가

 

화씨 451에서 몬태그가 그랬듯이, 책을 사랑하게 된 소년소녀들이 오랫동안 이 열망을 소중하게 간직했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 ‘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슬픈 곡조를 따라, 뤄는 성냥에 불을 붙여 책을 불태우고 있다. 소년들은 한때 소중했던 소설의 등장인물과 표현들이 춤추다 재로 변하는 불길에 쳐다보며,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한다. 그 옆에 소녀는 없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가 던지는 질문이 힘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문학을 통해 삶이 바뀐다는 말은 넘쳐나는데, 정작 삶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현실에 문학이 너무 많이 넘쳐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에 영향을 받은 우리 삶의 부분들도 점조직처럼 흩어져 큰 변화의 물길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리라. 또 책의 치명성은 섬세한 것이어서 아주 희소한 순간이 아니면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리라. 소설 속 소년소녀가 느끼는 극심한 갈증(열정과 충동과 사랑) 정도가 아니라면, 책을 들이킨다고 한들 우리의 미약한 갈증이 풀리기나 할까? 절박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책도 그만큼 의미를 잃는다.


책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로 이 글의 서두를 열었다. 화씨 451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책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 영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책은 금지되고 불태워졌는데, 책을 향한 등장인물들의 반응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바느질 소녀가 왜 도시로 떠났는지 알 수 있는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의 마무리 역시 대신하기로 한다. 아마도 다음의 이유로, 책은 읽히거나 불태워지는 듯하다.

 

뤄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창백한 얼굴로 불가에 앉은 그는 하소연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뤄는 책을 불사르는 광기에 사로잡혔다.

가버렸구나.”

내가 말했다.

, 대도시로 가겠대. 그애가 발자크 얘기를 했어.”

뤄가 대꾸했다.

뭐라고 했는데?”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 같은 책,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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