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길을 찾은 17인의 청춘 에세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책 <그 삶이 내게 왔다>(인물과사상사, 2009)에 필자의 1인으로 참여했다(알라디너로는 마태우스님도 '기생충들아 고마워'란 재미있는 글을 쓰셨다). 뒤늦게 제안을 받고서 영문도 모른 채 쓴 원고라(부분적으론 예전에 쓴 글을 편집했다) 기획 취지에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책은 나왔고 오늘 필자본도 배송받았다. 말 그대로 다양한 필자분들의 다양한 인생 체험담이다. '죽음'의 문제를 다룬 나만 빼고는. 내가 쓴 꼭지는 '게으른 저공비행'이란 제목이다. 글의 서두만 일부 옮겨놓는다. 행여 궁금해하실 분도 계실까봐서...
나의 삶이라는 난감한 문제를 받아들고
어쩌다 보니 ‘그 삶이 내게로 왔다’란 테마로 글을 쓰게 됐다. 그냥 어떤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기꺼이 승낙했을 따름인데, 참고하라고 보내준 책을 보고 나서야 ‘그 삶이 내게로 왔다’란 꼭지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삶이 오기 전에 내겐 그 책이 먼저 와버린 셈이다. 하여 뒤늦게 내가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 헤아려본다. 일단은 낭패스럽다. 막상 ‘그 삶’이 어떤 삶인지 모호하고, ‘내게로’란 말이 전제하는 ‘나’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며, ‘왔다’라는 사건이 무얼 지칭할 수 있을지 막연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는 처지이지만 ‘대학 강사’나 ‘서평꾼’이 모두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라고 하긴 어렵다. 즉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천국에 갈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그러고 보니 “블로거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라고 네이버 지식iN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하여 나의 ‘사회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그 삶’에 대해 말하기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럴 땐 고육지책이 비책이 되곤 한다. 문제가 안 풀릴 땐 문제를 비틀어라! ‘그 삶’에 대해서 말하기 어렵다면 ‘그 죽음’에 대해 말해보는 건 어떨까? 그건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물론 아직 죽지 않았고 직접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없으므로 ‘그 죽음’은 ‘죽음에 대한 관념’이라고 해야겠다.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 그러니까 ‘나의 삶’이 오직 삶으로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그늘과 맞닿아 있으며 죽음과 등을 맞대고 있는 죽음의 짝이라는 것, 더불어 삶은 죽음과의 내기에 언제나 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패배의 운명을 떠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 처음 알게 되었을까? 기억엔 초등학교 1학년 때다.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봉착한 날
아마도 어떤 모임이 있어서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날 밤에 나는 동생과 집을 지키고 있다가 문득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서 울기 시작했다. 머리가 더 큰 다음에 읽은 하이데거는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 혹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좀더 멋들어진 말로 표현했지만 그런 관념 이전에 여덟 살짜리는 그냥 ‘나의 죽음’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심연 앞에서 아무런 방비책도 갖지 못한 채 몸을 떨어야 했다.
그 나이까지가 평생이었다면 내 평생 가장 많이 울었던 밤이었고, 그 이후의 나날을 고려하더라도 더 많이 운 날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그날 나는 가까운 사람들 모두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망연자실했다. 그런 것을 ‘원체험’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준거체험이자 반복되는 체험 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읽은 세계위인전집 가운데는 석가모니도 들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고행하는 석가모니’의 이미지. 어린 시절 왕자였던 석가모니가 4대문 밖으로 행차했다가 그때마다 병과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고서 인생의 ‘생로병사’에 대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이후에 출가한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에 나선다. 다시 찾아보니 6년간의 고행이었다고 한다. 내가 본 건 그 고행의 객관적 상관물이기도 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석가모니의 육체적 실존이었다. 나는 기이한 낯설음을 느꼈던 듯싶다. 두렵고 경이로웠다. 정신적 고행에 의해 학대받는 육체라는 이미지, 그러니까 정신과 육체는 서로 대립된다는 관념은 그때 강하게 각인되었던 듯싶다.
이런 것이 특별한 경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아이는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고 그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부모가 더 조심해야 할까?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 <밑줄 긋는 남자>를 읽다 아이가 그러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까봐 근심하는 주인공이 등장하여 미소 지은 적이 있다. 이런 식이다. “파니는 아이가 마음을 다칠까봐 신중하게 처신을 해야 했고, 그래서 고추를 넣어줄 때도 싱싱한 것으로만 골라주었다. 자기 아들이, 어느 날 아침, 고추 네 개 중에서 쭈글쭈글하고 빛이 바랜 묵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일로 아이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맛볼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고 파니는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1학년을 앞뒤로 하여 나는 그런 형이상적인 문제에 봉착했던 듯싶다. ‘죽음에의 존재’라는 것.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읽으며 감명을 받은 것은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이렇게 적어놓았으니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나머진 다 장난이라고. 그랬다. 죽음(자살) 외에는 모든 것이 장난처럼 여겨졌다.(...)
09. 12. 23.
P.S. 출간에 즈음하여 출판사측에서 댓글 이벤트를 제안해왔다. "<그 삶이 내게 왔다>에서 가장 기대되는 저자의 이야기는 어떤 것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댓글을 달아주시면 세 분을 선정해서 <그 삶이 내게 왔다>를 보내드릴 예정이다. 참고로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공선옥 - 생의 한데에서 불안에 떨며
2. 정성일 - 영화,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3. 박래군 - 인권운동, 나의 영원한 숙제
4. 이진숙 - 땅의 힘으로 세상을 향해
5. 이현우 - 게으른 저공비행
6. 서민 - 기생충들아 고마워
7. 남경태 - 편집-번역-집필의 트리클다운
8. 김창남 - 어느 얼치기 쾌락주의자의 대중문화 편력기
9. 안건모 - 내가 버스기사 직업을 버린 까닭
10. 강홍구 - 캔버스 / 카메라 / 도망자
11. 이영미 - 대중의 문화, 나와 당신의 취향
12. 이희수 - 공존과 상생의 종교 이슬람과 함께
13. 염형국 - 단 한 번뿐인 삶이므로
14. 박승숙 - 우울증의 나날들, 그 길에서 만난 미술치료
15. 양희규 - 아이들에게 행복한 학교를
16. 김신명숙 - 페미니즘, 내가 사랑하는 방식
17. 전진삼 - 나는 어떻게 건축을 배웠는가?
이 중에서 아무래도 '정실' 관계를 고려해야겠기에 알라디너 두 사람(이현우, 서민)을 제외한 나머지 15분의 필자 가운데 '기대되는 저자'와 '그 이유'를 적어주시기 바란다. 마태우스님도 따로 이벤트를 하실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내게 할당된 인원은 3명이다(마태우스님 3명). 일주일간 이벤트를 진행해달라고 요청해왔지만, 너무 긴 듯싶고, 27일(일)까지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 가운데, 세 분을 28일에 선정하여 발표하도록 하겠다. 관심 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