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 전시되는 레핀의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영어제목은 'They Did Not Expect Him')을 찾아보다가 문득 딸아이가 생각났다.  

그림에서처럼 (아마도 유형지에서) 오랜 세월만에 되돌아온 아버지를 맞는 자식들의 (반가움보다는) 낯설어하는 표정에서 한 가족사의 비애를 잠시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러고 보면 매일같이 귀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복에 겨워 마땅하다. 비록 딸아이가 아는 체하지 않는 날이 더 많지만(듣자하니 아이는 요즘 남자친구에게 폭 빠져 있다고 한다). 귀가하면 아이는 보통 아래 사진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가을 소풍때 찍은 거라고 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보다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거라고 말해야 할까.   

혹은 딱 아래와 같은 표정이다. 배경은 물론 다르지만 반가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정쩡해 하는 표정은 똑같다.

집에 얼른 들어오라고 전화가 왔다(저녁을 집에서 먹으면 밥값을 아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오늘은 좀 밝은 표정으로 맞아줄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대하는 건 적어도 이런 정도의 표정이다. '아부'를 하기 위해서 자주 안 쓰던 메일편지까지도 미리 보내두었다. 그리고 머핀빵도 몇 개 들고 간다. 무얼 더 준비해야 할까...

아무튼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을 때 자진해서 집에 들어가야겠다(다들 제때 들어가시길!). 오늘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07. 11. 28.

P.S. 칸딘스키풍의 그림은 없고 대신에 고흐풍은 있다. 아이가 미술학원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가끔은 잠자고 있는 딸아이에게 속삭인다.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왔을까?(We Did Not Expect You!)"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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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2007-11-2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하신 분 인가봐요. 저희 남편도 딸아이에겐 아주 극진하답니다.참고로 저희 딸은 11살인데 게를 좋아해요.찐 게를 먹고 싶다니까 야밤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뒤지고 다녔답니다.점점 더해지지 덜해지지 않는 딸아이에 대한 극진한 사랑에 아이는 더한 무관심으로 답한답니다.각오하셔야 할걸요~

로쟈 2007-11-28 22:03   좋아요 0 | URL
극진한 것과는 거리가 멀구요(극진해도 사정은 비슷하다니까 웃어야 할지.^^;), 잠잘 때 가장 이뻐하는 편입니다. 가끔 신기해하면서...

웽스북스 2007-11-28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리지만, 색깔 쓰는 걸 보니 감각이 있어보여요 ^^
'아무도기다리지않았다'는 어쩐지 서글퍼지는 그림이네요 참

로쟈 2007-11-28 22:08   좋아요 0 | URL
보고 그리는 건 잘 그릴 때가 있습니다. 저는 아이의 정서에 문제가 있나 없나 정도가 관심거리지만...

nada 2007-11-2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실 때 조금 더 시니컬한 척(?)하시는 듯한 로쟈님. 그래도 고슴도치신 게죠?^^ 이주헌 씨 책에서 레핀 그림 처음 봤는데 사실적인 러시아 그림들이 참 재미나더라구요.

로쟈 2007-11-28 22:29   좋아요 0 | URL
아이한테 보여주니 언제 자기가 그랬냐며 글을 지우라고 하는군요.^^;

마늘빵 2007-11-28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쟈님과 많이 닮았어요. 양볼이랑 눈, 코 ^^

로쟈 2007-11-28 23:39   좋아요 0 | URL
발가락도 닮긴 했습니다.^^;

가시장미 2007-11-2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닮은 것 같아요. 그림도 너무 멋지네요. 저도 많이 좋아하는 그림인데~~~ 와우!
물감도 아니고, 크레파스로.. 저런 터치효과를 내려했다니.. 감각이 뛰어나네요! :)

특히, 집이 너무 귀여워요. 으크크 고흐의 그림에는 없는 집을.. 상상해서 그려냈네요.
집이 살아서.. 막 움직일 것 같은데요. 그림이 너무 생동감이 넘쳐서요~~
행복하시겠어요! 로쟈님~~ ^-^*

로쟈 2007-11-29 00:15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야 다 예쁜짓, 미운짓을 골고루 하지요. 부쩍 커가는 틈에 부모는 또 부쩍 늙어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네꼬 2007-11-2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레핀 그림, 김원일의 '그림 속 나의 인생'에서 첨 봤어요. 저 낯선 표정이 오히려 코끝 찡하게 하던걸요. 그나저나 자고 있을 때 누가(아빠가 아니라 누구라도!) 내 귀에 저런 말을 속삭인다면, 음,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멋져요.

로쟈 2007-11-29 12:33   좋아요 0 | URL
부모라면 누구나 속삭이는 대사가 아닐까요?^^

프레이야 2007-11-2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딸 사진이네요. 더 자랐고 더 예뻐요..

로쟈 2007-11-29 12:34   좋아요 0 | URL
'보고'드리는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07-11-2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너무 예뻐요!!
사진으로만 알고있는 로쟈님의 모습과도 정말 닮았습니다. :)

로쟈 2007-11-29 12:34   좋아요 0 | URL
사실 엄마를 훨씬 더 많이 닮았습니다.^^;

가시장미 2007-11-30 10:10   좋아요 0 | URL
어머니께서.. 미인이시군효! :)

로쟈 2007-11-30 10:26   좋아요 0 | URL
아이엄마가 부듯해 하겠군요.^^

자꾸때리다 2007-11-29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키우셔서 저한테 보내주세요. (너무 위험한 발언인가....)

로쟈 2007-11-29 22:21   좋아요 0 | URL
벌써 짝이 있습니다.

가시장미 2007-11-30 10:09   좋아요 0 | URL
으흐으흐 인기폭발! 근데 벌써 짝을....;;; 너무 빠르시옵니다! ^-^

로쟈 2007-11-30 10:26   좋아요 0 | URL
'너를 지켜줄게'라는 짝꿍이 벌써 생겼다고 해서요. 아이가 요즘 '강아지들' 때문에 학교생활이 즐겁다는군요...

마노아 2007-12-0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따스합니다. 로쟈님은 순간순간 사람 놀래키는 힘이 있다니까요. 아이가 참 예뻐요^^

로쟈 2007-12-01 11:51   좋아요 0 | URL
가끔 엉뚱한 짓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