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테일 경제학에 대한 유익한 반론을 게시하고 있는 블로그에 들렀다가 뜻밖에도 나와 무관하지 않은 글을 읽게 되었다(http://blog.jinbo.net/marishin/?pid=187). 내용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옮겨놓고 몇 자 덧붙인다. 제목이 '알라딘 서재의 힘(?)'(06. 01. 28), 제목 때문에 자동적으로 클릭하게 된 글이었다(알라디너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어떤 종류건 일종의 '또래집단'이 생기면 그 가운데서 영향력이나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힘이 외부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 때는 그 힘에 대한 평가가 필요해진다.
나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있는 '나의 서재'가 책을 사는 이들에게 꽤 영향력이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신문이나 잡지의 서평이 워낙 '주례사' 수준인 데다가 요즘은 신문 서평을 올려놓는 게 금지되어서, 독자 서평이 더 중요해졌다. 게다가 상당한 전문 지식을 지닌 '독자'들도 많아졌고, 이들에 대한 신뢰도 높다.
이렇게 쓰면서 의도적으로 피한 단어가 '권력'이다. 권력이라고 하면 마치 대단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들이 무슨 권력이겠는가? 이 글은 그 '힘'을 질시해서 쓰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겠다.요컨대, 알라딘의 서재(또래집단!)가 '권력'은 아니더라도 "책을 사는 이들에게 꽤 영향력이 있는 곳"이라는 것. 내 경우 어쩌다 보니 나름대로 '부지런한' 알라디너가 된지라 한달에 적립되는 땡스투 마일리지가 12-13,000원쯤 된다(들쭉날쭉 하지만 15,000을 넘어본 적은 아직 없다). 마일리지가 책값의 1%이니까 내가 '영향력'을 발휘해서 '매출'에 기여하는 바가 100-150만원 정도이겠다(그걸 '기여'라고 한다면).
한데, 아다시피 이 땡스투라는 건 알라딘의 구매자에게도 1%가 적립되기 때문에 여기서의 '기여분'은 얼마간 과장된 것이다(물론 여기서는 책을 사려는 사람의 지갑을 닫게 만드는 네거티브 기여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는가). 그런 걸 고려하면 대략 한달에 100만원, 70-80권 정도의 도서구매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화자찬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사실 그들이 무슨 권력이겠는가?"라는 지적은 온당하다. 그저 '약간의 영향력' 정도인 것(한때 나 혼자 구매하는 책들만 한달에 그 정도는 됐었다. 집에서 매우 혼났지만).
아무튼 내가 자주 가는 어떤 '서재' 주인은 번역서의 오역 문제를 꾸준히 제기한다. 그래서 많은 참고가 된다. 그런데 오역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좀 문제가 있다. 원서를 제외하고 다른나라 번역본과 비교해서 오역이라고 단정하거나 의혹을 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본래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쓰인 책의 한글 번역본을 영역본, 러시아어본 등과 비교하는 식이다. 이런 비교가 한두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면 문제다. 만에 하나 이런 비교 글을 보고 사람들이 번역서를 의심해 책을 사지 않게 될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워낙 엉망으로 번역된 책이 많아서, 나부터도 이런 평이 나오면 일단 꺼려진다.
명시적으로 '어떤 서재의 주인'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알라디너의 상식으론 '로쟈의 서재'를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본래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쓰인 책의 한글 번역본을 영역본, 러시아어본 등과 비교하는" 짓을 누가 또 하는지는 모르겠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서 필자는 약간의 불만을 갖는 듯한데(이러한 지적은 예전에도 있었고 그에 대해서 답한 적도 있다), 오역의 문제를 학술적으로 제기하는 것도 아니고 한 독자의 입장에서 늘어놓는 코멘트에 '원본'과의 대조를 요구하는 건 나로선 일단 무리라고 본다(다른 언어의 번역본을 읽고 오역을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필자의 입장이라면 얘기가 길어지지만). 나의 지적이 부당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를 입증하면 그만 아닐까(실제로 들뢰즈나, 벤야민, 라이히 등의 번역에 대한 지적 건들에서 나는 생산적인 토론들을 주고받은 바 있다).
필자의 염려는 "만에 하나 이런 비교 글을 보고 사람들이 번역서를 의심해 책을 사지 않게 될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이른바 역기능일 텐데, 필자는 순기능과의 대차도 고려한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오독/오역에는 개방돼 있으며 나라고 독불장군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나대로의 의견을 제시할 뿐이고 그에 대한 취사선택은 또 읽는 이들의 몫이다. 이제 당연히 와야 할 내용은 그런 '선의의 피해'에 대한 사례이겠다.
자신이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되면 책에 대한 평가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라는 촌평이 달린 책을 읽어보니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은, '주례사'보다는 덜해도 여전히 씁쓸하다.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 운운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나는 철학자다>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나는 이렇게 적었다.
책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읽기인바, 그는 기존의 독해를 모두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적합한)이중적 독해를 제안하고 실행한다. 즉 그는 하이데거에 대한 "(지지자들의) 철학적 독해 대 (비판자들의)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서 하이데거 철학의 고유성이 나치즘과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 역자에 따르면, "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 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근에 나온 책들' 등 신간을 소개하는 페이퍼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나는 철학자다>를 읽기 전에 어떤 책이 나왔고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식의 예비적인 정보를 늘어놓았다(이건 나 자신을 위한 정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 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라는 역자의 말을 옮겨놓은 것이다. "책을 읽어보니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이란 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왜 이런 멘트는 댓글로 달아주시지 않았을까?)
나는 평가를 제시한 게 아니라(읽기도 전에 무얼 평가하겠는가) 소개의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역자의 말이야 책을 사면 다 읽어보는 내용 아닌가). 혹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란 구절이 문제된다면 일차적으론 역자와 독자의 의견이 다른 것이고(내가 주례를 잘못 섰다?).
'주례사'보다는 덜해도 여전히 씁쓸하다.고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 책을 '광고'했고, 필자는 이 책이 그러한 광고에 미치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텐데, 번역비판과 관련한 '선의의 피해'와는 좀 무관한 것 아닌가(참고로, 나의 '평가'를 말하자면, 이후에 나는 1/3쯤 책을 읽었던 듯한데 부르디외의 책은 제목도 번역도 그다지 만족스럽게 생각되지 않았다).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다.
이 서재를 통한 '약간의 영향력' 때문에 내가 책임질 몫이 있다면 책임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비판은 구체적이면 좋겠다. 번역서에 대한 불만을 지적할 경우 몇 페이지의 어느 문단이라고 나는 명시해왔다. 그에 대한 반론 또한 명확한 것이면 좋겠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기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06. 12. 07.
P.S. 본문에서 땡스 투 마일리지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마일리지가 조만간 적립금으로 일원화된다고 한다. 카테고리 자체가 '흡수'되는 셈이다. '땡스 투'에 대해서 미리 작별인사를 해둔다. 땡스, 땡스 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