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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평점 :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p.s - 함석헌 선생 탄생 102주년 기념 예배에서 발표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