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서울대 농활팀의 철수를 계기로 예전에 대학생활을 장식했던 농활에서 발생했던 몇 가지 이야기를 회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경암회"라는 학교 써클의 일원으로 농활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출발 며칠전부터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던지 거의 일주일간은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농활을 대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농활에 참석하는 봉사자가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자격요건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 일은 지금도 흐믓하며,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농활을 해서인지 지금도 농촌에 가서는 주변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생긴 경우에는 양말을 벗고 논 바닥에 뛰어들기도 하는데 이런것이 아마 잘 다듬어졌었던 농활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 똥지게를 나르기 위한 맹 트레이닝...

 제가 대학 입학후 처음 맞는 방학에 농활을 출발하는 지역은 충남 예산군 한산면 봉림리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산역에서 내려 흙먼지가 폴폴거리는 삽교 마을을 지나 미리 먹을것을 장봐온지라 어깨 가득 무거운 짐을 지고는 거의 4시간 가량을 걸어서 마을에 도착을 했던 당시에는 아주 오지였습니다. 저희 써클의 회장은 농촌 출신이었는데 신입생에게 체력 단련을 시킨다면서 어디서 구해왔는지 물레틀을 가져와서는 마닐라 포대에 넣고 요리조리 끈을 이용해서 어깨에 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입생들에게 그것을 메고 운동장을 한바퀴씩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키도 제법 크고 힘도 나름대로 빵빵했다고 생각해서 가장 먼저 그 일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양 어깨에 메고나니 이게 보통 무거운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레틀은 온통 통나무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입생들이 낑낑~거리며 운동장을 도는 모습을 회장(농활때는 대장이라고 호칭했습니다)은 자리도 뜨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일명 <똥지게 나르기>라는 이 훈련은 농활 출발전의 7월초의 뜨거운 날씨 속에서 매일 10바퀴씩 5일간 계속 되었습니다. 중간 중간 농활을 위한 자체조달 부식을 사러가서 짐을 지고 오기도 하였지만 물레틀에 비하면 감자 한 가마도 별로 무거운 것이 아닐 정도로 물레틀은 정말 무거웠는데 첫 날, 어깨에 물집이 생기고 아프기 시작했던것이 농활을 떠날때는 딱지가 앉아 별로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농활중에 실지로 똥지게를 지는 일은 없었기에 농활을 다녀와서는 은근히 5일간의 트레이닝에 대한 불만도 있었는데 다녀와서 보고회를 하는 과정에서 회장이 체력단련을 위한 트레이닝의 한 방법이라고 이해를 구하여 경험이 많은 회장의 사전 준비에 경탄을 했습니다. 회장은 농활에서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체력 저하를 우려하여 미리 체력을 강화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2. 저수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을 잤는데 어찌 대장이 알고 엄벌을??

 농활은 정말로 힘겨웠습니다. 매일 아침 6시 기상...그리고는 각자의 임무를 부여받고는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늦은 저녁을 먹고나면 자정을 넘겨가면서 반성회를 가졌습니다. 당연히 졸음은 더위와 함께 우리의 가장 막강한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날...저는 저수지쪽으로 논의 물꼬를 만드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오전에는 이 논 저 논의 물꼬를 저수지 방향으로 잡고 말라비틀어진 검은 진흙덩이와 씨름을 하면서 열심히 작업을 했습니다. 농활을 왔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런데 점심을 먹고나니 우선 식곤증으로 도저히 작업을 수행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논에 난 좁은 농로에서 잘 수도 없고 만약 자다가 수시로 순찰을 도는 대장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저는 그날밤 반성회 시간에는 거의 인민재판식 성토에 시달리게 될것이 뻔하니 몸을 잘 숨기고 잘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때 생각난것이 바로 저수지의 물속에 들어가서 자는 것입니다. 마을 저수지라 그리 깊지도 않고 또 저수지의 경사면도 완만해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저는 옷을 입은채로 저수지에 들어가서는 완만한 경사지에 얼굴중 숨쉬기 위한 공간만을 물 밖에 내 놓고는 거의 1시간 가량 잠을 잤습니다. 아주 완벽한 피서를 겸한 낮잠이었습니다. 얼굴이 조금 따가웠지만 온 몸이 물속에 담겨 있었으니 정말로 완벽한 피서를 겸한 낮잠이었지요.   저녁 반상회 시간에 각자 그날 수행했던 작업의 설명과 작업량, 앞으로 해야할 작업량 등을 보고를 하는 자리인데 저는 열심히 논의 물꼬를 만들었다고보고를 하는데, 갑짜기 대장이 옆에 있던 몽둥이를 집어 들더니 "엎드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혹시 잠자는 모습을 대장에게 들켰나보다고 생각하며 엎드려서는 엉덩이가 불이 날 정도로 얻어 맞았습니다.

 매질을 마친 대장은 한번만 더 농땡이 부리고 잠을 자면 정말로 무거운 벌을 주겠노라고 엄포(?)까지 놓는 것인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대원들이 무얼하는지 다 아니까 엉뚱하게 딴짓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을 하는데....아뿔싸....물속에서 자는 모습을 들킨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제 얼굴에는 물속에 잠겨있던 부분과 물 밖에 나와있던 인중 윗부분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대장은 제 얼굴이 이상한 모습으로 탄것을 보고는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인지 또는 과거 있었던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행동을 유추해 내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에고...제 얼굴은 정말로 멋진 가면을 쓴 모습이었습니다.

3. 오늘은 아침 당번 ...메뉴는 뱀탕이다....

 매일 2명이 다른 대원보다 일찍 기상을 하여 대원들의 조식을 장만해야 했습니다. 새벽 4시쯤 일어나서 20여명의 아침밥을 장만을 하는 일인데 밥 단지를 올려 놓고 장작불을 지피며 대충 밥이 익는 냄새를 맡으면서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를 고민하다가 대원들의 영양 보충을 위한 기발한 생각을 해 내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싸리 빗자루에서 제법 든든한 싸리가지를 몇 개 뽑아서는 농로에 나갔습니다. 농로에는 생각대로 개구리와 물뱀들이 있엇는데 싸리나무 가지를 휘둘러 3마리의 물뱀과 몇 마리의 개구리를 잡아 왔습니다.(음...제가 그렇게 무지막지 하냐구요? 그런게 아니고 농활을 하면서 극한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생존을 위한 음식과 잠에 대한 욕구만 강해져서 뭐...눈에 뵈는게 없었습니다....저도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제 아침식사 파트너는 기겁을 했지만 제 계획(그 때는 순전히 대원들의 영양 보충만 생각을 했었습니다)을 듣고는 그 파트너도 동의를 했습니다. 개구리 다리와 뱁의 껍질을 벗기는 일은 그 친구가 했고, 저는 칼로 잘게 다지는 일과 음식을 만드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지금도 뱀을 먹지 않지만 그아직까지 물뱀도 먹는 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개구리와 뱀을 커다란 쇠칼로 열심히 다졌습니다. 아주 잘게 다져진 덩어리는 분명 일반 고기와 다를바가 없어 보였고, 이것을 이용해서 시원한 된장국을 만들었습니다.

 대원들은 "오늘 식사당번 음식솜씨 최고다!!" 라는 찬사와 함께 커다란 가마솥에 담긴 국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습니다. 저는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미처 제가 먹을 국물 조차도 남아있지 않아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반성회 시간....오늘의 맛있는 요리의 재료를 발표하자 여학생들을 필두로 여기 저기서 웩~웩~ 거리면서 난리들인 것입니다. 그 무섭던 대장은 흐믓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원들에게 고단백을 공급해 주느라고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뱀이라면 기겁을 하는데 그 때는 어찌 그런 음식을 만들 용기가 다 생겼는지....지금도 수수께끼(? ===> 어디서 많이 본듯한 단어입니다)입니다.

 제게 있어 농활은 도시보다 뒤떨어진 빈농을 위한 진정한 봉사의 기회로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기억은 아예 없고 어떻게 하면 농민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으면서(농민들에게는 도시민은 선망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일을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상당히 고심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농활 기간인 20여일은 아예 죽었다고 각오하고 농활에 임했던 것이 당시 함께했던 대원들의 공통적인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이번 서울대생들의 농활 철수 기사를 접하며 제가 겪었던 농활에서의 에피소드 몇 개를 적어 보았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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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7-0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서재 주인 이름이 수수께끼???

호랑녀 2004-07-0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1학년 때는 순진하게 집에다 농활가겠다고 보고했다가 감금!당했고, 그 노하우 때문에 그 담부터는 말을 하지 않고 갔죠. 서울에 남아 공부 좀 해야겠다고 말하면서...ㅋㅋ
경상도 어디로 갔는데, 딸기 하우스를 하는 마을이었어요. 아저씨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방치가 된 하우스 몇 동을 책임지고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려놓는 일을 했는데... 한 일주일 걸렸던 것 같습니다.
여대라서 몽둥이 찜질 같은 건 없었구요 ^^
낮에 동네 아이들 데리고 다니면서 놀았는데... 둘째날부터는 다들 차라리 밭에 가서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때 일주일의 경험이, 농부의 며느리가 되어서 가끔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

조선인 2004-07-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학년 때 안동으로 지역이 바뀌기 전까지 영양으로 농활을 갔습니다.
그곳은 워낙 물이 귀한 지역이라 규율의 대부분이 물 절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루 딱 1번 씻는데 저녁에 물 반바가지로 이닦고 세수하고 발씻고, 그 물로 밭에 물주고.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머리 감는 건 5일째 밤에 딱 1번 허락되고, 목욕은 불가.
계속 물을 재활용해야 하니 비누나 치약, 샴푸도 쓰면 안되고.
물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었던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가을산 2004-07-09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한조각 거들랍니다.
제가 생선회를 처음 먹은 것이 봉사 덕이었으니까요. 어인 일로 비싼 생선회를? ^^

학생이었을 당시만해도 의료봉사를 가면 매일 수백명씩 진료를 받으러 왔었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료도 하고 역학조사도 하고 보건위생에 대한 교육도 하느라 점심은 먹을 시간이 없고, 새벽에 한번, 한밤중에 한번, 이렇게 두번 식사를 하는데, 마지막 날은 그나마 아침밥도 못먹고 오전진료만 하고 오후에 귀경을 해야 했습니다.

오후에 출발해서 어찌어찌 바닷가의 도시에 도착한 것이 거의 저녁때,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것이 전날 저녁이었으니, 거의 24시간을 굶은 샘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수고 많았다고 저희를 데려간 곳이 횟집이었습니다. 저는 생선회 못먹었는데.. ㅜㅡ
동기들은 덥썩덥썩 잘도 집어먹고, 생선회는 쑥쑥 줄어들고....
사람이 살자니, 24시간 굶었을 뿐인데..... 저도 생선회를 먹고야 말았습니다.
그 맹맹한 맛이라니.

지금도 생선회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사회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